Korean Beauty – 민간신앙에 녹아있는 도교
<바다 위의 신선들> 비단에 채색 각 150.3×51.5cm 조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서왕모가 요지에서 개최하는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신선들이 바다를 건너는 장면으로 중국의 유명한 고사에 나온 도상이다. 화면 중앙에 노자가 소를 타고 도덕경을 읽고 있는 모습이 특징적이다.
도교는 유교, 불교와 함께 우리 문화의 근간을 이룬다. 지금까지도 세시풍속과 민간신앙, 예술, 대중문화, 건강 수련 등 우리 생활 각 분야에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도교문화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전시 <한국의 도교문화–행복으로 가는 길>(2013.12.10~3.2)이 열렸다. 필자는 특히 도교와 민간신앙의 연결관계에 주목해 한국인의 삶에 녹아있는 도교의 다양한 면모를 살펴본다.
우리 생활문화 속 도교적인 이미지는 도처에 산재하는 복합문화로 공존하지만, 다른 문화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분야이다. 광범위한 도교의 실체는 우리 기층문화인 무속과 민간신앙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행복으로 가는 길 한국의 도교문화전>은 매우 체계적으로 전시되어 생활 속 도교를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도교는 불사약 복용이나 심신수련, 온갖 신에 대한 기도 등을 통해 불로장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부와 명예 같은 현세적 이익을 추구하는 중국의 토착 종교이다. 도교가 교리와 조직을 제대로 갖춘 것은 4세기 북위시대부터이며, 이후 많은 종파가 생겨났지만, 그 기원을 살펴보면 신선설과 민간신앙을 핵심으로 하여 음양, 오행, 주역 등의 설과 의학, 도가 철학 등을 보태고, 여기에다 불교와 유교의 성분까지 받아들여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도교에서 받드는 신들은 매우 잡다(雜多)할 뿐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 그것은 새로이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제사 지내는 신에는 원시천존(元始天尊) 또는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있고 이는 다시 무형천존(無形天尊)·무시천존(無始天尊)·범형천존(梵形天尊)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교조인 노자, 곧 노군(老君)을 원시천존의 화신(化身)이라고 믿는다. 그 밖에도 현천상제(玄天上帝:北極星)·문창제군(文昌帝君)·후토(后土)·성황신(城隍神) 등 수많은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또한 도교에서는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염원하면서 이를 이룰 수 있다는 여러 가지 방법을 실천하는데, 전적으로 연단술(鍊丹術)만을 닦는 것이 아니라 적덕행선(積德行善)하고 계율을 지켜야 진선(眞仙)이 된다고 하여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기도 했다.
도교는 7세기 고구려 때 우리나라에 공식 전래되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미 그 이전부터 도교적인 문화요소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도교는 종교로서보다는 문화요소로서 존재하면서, 불교 또는 민간신앙과 혼합되거나, 동학과 같은 신흥종교에 영향을 주었으며, 문학과 회화 등 예술작품의 주제나 소재로 활용되었다. 또한 복숭아나 신선, 십장생 같은 도교적 상징들은 장수와 행복을 가져오는 길상의 의미만 남아 공예품이나 장식화 등의 소재로 민간생활 속에 깊숙이 녹아있었다.
도교가 공식적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래된 것은 624년 당 고조가 고구려 영류왕에게 천존상과 도법을 보내온 기록이 최초이다. 신라와 백제에도 비슷한 시기에 전래되었으나, 도교신앙은 고구려에서만 성행했다. 그것은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천제(天祭)·무속 (巫俗)·산악(山岳) 신앙 등 종교적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책적으로 국가에서 수용을 적극적으로 권장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백제와 신라에서는 종교적 신앙보다는 노자(老子), 장자(莊子)의 서적을 통해 무위자연(無爲自然)사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자체사상과 융합하면서 선도(仙道)·선풍(仙風) 의식을 심화시켜 나가는 양상을 보였다.
통일신라 시기에는 당(唐)나라 유학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 중에 양생(養生) 보진(葆眞)을 도모하는 사람이 있어 단학(丹學)의 성격을 가지는 수련(修鍊)도교 양상을 드러내는 현상도 나타났다.
도교가 가장 성행했던 시기는 고려시대라고 할 수 있다. 중세에 해당하는 고려시대는 신앙의 시대, 종교의 시대라고 할 만큼 신(神) 중심의 나라였다. 불교가 그 중심 종교이기는 했지만 귀신·영성(靈星)·토지신 그리고 무속(巫俗)과 더불어 도참(圖讖)사상이 병존하면서 모든 것이 기복(祈福)종교의 현상을 띠는 것이 이 시대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도교 역시 여러 민간신앙과 섞이면서 불교 도참사상과 함께 하여 현세이익(現世利益)을 희구하는 양재기복(禳災祈福)의 기축(祈祝)행사가 성해, 그 풍습이 민간생활에까지 뿌리를 내렸다.
국가적으로는 호국연기(護國延基)를 바라는 재초(齋醮:도교식 제사)행사가 크게 행해졌으며, 특히 예종(睿宗:1105~1130)은 복원궁(福源宮)이라는 도관(道觀:도교 사원)을 건립하는 등 도교를 크게 진작시켜 불교보다 더 중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도교의 성행은 민간에 수경신(守庚申)이라는 도교습속(道敎習俗)까지 낳게 하여 그 풍습이 오늘에 이른다.
조선시대로 넘어온 이후에도 재초 중심의 도교는 그대로 이어졌으나 중종(中宗:1506~1544) 때에 이르러서 조광조(趙光祖:1482~1519) 등의 유학 선비들의 상소로 소격서(昭格署:재초 등 도교행사를 관장하던 관청)가 혁파(革罷)되는 등 점차 위축되어갔으며, 임진왜란(1592) 이후에 초제를 행하는 의식도교의 모습은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나 궁중이나 민간에 뿌리내린 수경신 등의 도교풍습은 그대로 존속해 내려 왔고 지식인층에서는 노자·장자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더불어 양생 보진의 수련도교에 종사하는가 하면 참동계(參同契) 용호비결(龍虎秘訣) 등의 도서(道書)를 주해 및 연구 저술하는 사람들이 있어 도교의 사상적 측면은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도교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이후 크게 의식도교와 수련도교의 두 맥을 이루면서 종교사상은 물론 문학·예술 등 생활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끼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도교, 한국 문화의 뿌리
도교의 신들 중에는 중국 토착 신앙에서 유래한 것이 많은데 그중에는 우리나라 고유의 토착 신들과 상통하는 것이 적지 않았다. 밤하늘의 별자리를 관찰하고 숭배하며, 삶의 터전이 되는 대지와 강, 산과 나무 등을 신성시하고, 마을이나 성곽, 가정을 지키는 신령이 있다고 믿는 종교관념은 한국인들 역시 일찍부터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두칠성에서 유래한 칠성신이나, 성곽이나 마을을 수호하는 성황신, 불을 수호하는 조왕신, 해와 달을 상징하는 일월신장, 동서남북과 중앙의 터를 지키는 오방신장과 같은 도교의 신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토착 민간신앙과 무리 없이 어우러지면서 점차 그 일부가 생활화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무신도와 함께 민화, 부적, 당사주 등의 기층문화를 이루는 상당부분이 도교에 근간을 두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중국의 관우신앙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중국 고대의 무장 관우는 원래 중국에서 모셔지던 민간의 재물신이었다. 이 신앙이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파되었다. 관우의 신령 덕에 왜적을 물리쳤다고 믿어 전국에 관왕묘를 건립하였고, 이후 숙종이 관왕묘에 배례하는 등 왕권 강화의 상징으로 활용하면서 그 위상이 높아졌다. 이러한 양상이 점차 민간으로 퍼지면서 무속에서도 관우신을 받아들여 관우신앙이 무속화 (巫俗化)하는 양상을 보였는데, 무속화를 살펴보면 적토마를 탄 장수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19세기 후반 고종대에는 왕권 강화를 위해 관우신앙에 대한 한글 전적들이 간행되었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 도처에 관우 사당이 새로 건립되기도 하였으나, 20세기 들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관우신앙은 점차 쇠퇴해갔다.
한편 중국 무속에서 유래한 도교의 점복과 부적문화 역시 복을 구하고 액을 피하려는 도교에 바탕을 둔 민간신앙의 일종이다. 삼재를 막아준다고 하는 머리 셋 달린 매와 액을 물리치는 뜻의 글귀가 새겨진 부적을 목판에 새긴 것은, 목판으로 찍어서 대량으로 인쇄해야 할 만큼 부적이 널리 사용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도 불길한 일이 있거나 간절히 바라는 일이 있을 때 부적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다.
당사주는 당나라 때 도사로 알려진 이허중(李虛中)이 하늘에 있다고 하는 12성을 인간의 생년월일시와 관련시켜 인간의 길흉을 판단하는 방법을 쓴 책이다. 글과 그림이 같이 있는 형태로 글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림으로 그 뜻을 바로 알 수 있도록 그려졌다. 근대까지도 당사주를 이용하여 길흉화복을 점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생활문화 가운데 하나로 도교에 근간을 두고 있다.
사회가 어지러운 혼란기일 때 삶이 팍팍할수록 위안을 찾으려는 믿음과 기원은 인간이 갖는 자연스러운 속성일 것이다. 도교문화의 현대적 의미를 해석해내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가령 도교가 현재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답인 듯 호들갑을 떠는 것도, 도교를 미신과 동일시하며 과격하게 부정하는 것도 적절한 시선은 아니기 때문이다.
삼교의 하나로서 도교가 유교, 불교와 함께 한국과 중국의 사상과 문화의 뿌리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토대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도교문화의 깊고도 넓은 영향력을 역사와 문화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 역사에 도교가 존재했다는 사실 그 자체와 도교문화가 세시풍속이나 민간신앙 등으로 남아서 우리의 삶에 지금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많은 부분 우리 삶에 유용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우리 문화의 깊은 연원들, 그리고 그 안에 녹아있는 다양한 삶의 방식들을 들여다보는 매개체로서 자리매김되길 희망한다.●
윤열수 가회민화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