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잘 알지도 못하면서

벌써 14년이 지났네요. 2001년 9월11일, 세계가 놀란 세계무역센터 폭파·붕괴 사건이 일어 난지 말입니다.
이 끔찍한 사건으로 3천여 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지요.
여객기가 쌍둥이 빌딩에 처박히던 때 맨해튼은 이른 아침이었어요. 같은 시각 지구 반대편에서 저는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아파트 상가 호프집에서 생맥주 잔을 부딪치고 있었고요. 공교롭게 그날이 제 생일이었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당시 저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심하기 짝이 없었답니다.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CNN 화면을 보면서 낄낄댔고, 심지어 ‘우와~(멋있다)!’라는 감탄사를 내뱉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처음엔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 까닭이었죠. 지금 생각해도 정말 부끄럽습니다.
사실 호프집 TV에서 긴급속보로 접한 뉴스는 너무나 비현실적이었습니다. 건물이 무너지고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두 눈으로 보면서도 선뜻 믿어지지 않았으니까요. 그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똑같은 장면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보면서 차츰 제정신을 차렸답니다. 이처럼 9.11은 한동안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습니다. 리얼이 지나치면 오히려 초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사건 이후, ‘오사마 빈 라덴’, ‘알 카에다’, ‘테러’, ‘이라크’ 같은 낯선 말들이 뉴스에서 오랫동안 회자 됐습니다. 그러던 중 2011년 빈 라덴이 사살되면서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이 종지부를 찍는듯했지요. 하지만 사정은 여전히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IS’, ‘참수’, ‘화형’, ‘보복’… 처럼 더 무시무시한 용어가 새로 등장했으니 말입니다. 전선戰線도 미국을 넘어 유럽 등 전 세계 여러 지역으로 확대되는 추세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동안 강 건너 불구경하듯 뒷짐만 짓고 있던 우리도 이제 이 싸움이 남의 일이 아닌 처지가 됐습니다. 자발적으로 IS에 가담했다는 ‘김군(君)’ 소식 들으셨죠?
잘은 모르지만, 이 전쟁의 본질은 (극악무도한 일부) 이슬람 테러집단과의 단순한 싸움 같지는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21세기에 벌어지는 종교전쟁인 동시에 뿌리깊은 역사의 갈등에서 비롯된 문명의 충돌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때, 앞서 언급한 모든 사건의 중심에 ‘이슬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슬람에 대해 너무나 모르고 있더군요.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슬람과 그 문화를 무조건 배척하거나 적대시하는 경향도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라도 이슬람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보고 궁금증을 풀어보고자 부랴부랴 특집기사를 준비했습니다. 시사주간지도 아닌 미술 전문지에서까지 웬 이슬람 타령이냐고 불편해하시는 분도 계시겠죠. 하지만 미술 역시 세상만사의 한 부분입니다. 미술과 사회를 따로 떼어 놓고 볼 수는 없습니다. 부족하더라도 이번 특집기사가 그동안 잘 몰랐던 이슬람과 그 문화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 바랍니다.(글 제목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제목을 인용했습니다)
편집장 이준희 dam2@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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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HK연구교수
이번 이슬람 미술 특집기사는 이슬람 전공자들의 절대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임 교수는 이슬람문화 용어 사전 집필에 참여해 이슬람 문화의 안내자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특히 본문 글제목을 아랍 문자로 표기해주었다. 부산외대 아랍어과를 졸업하고 한국외대 대학원에서 아랍문학 전공으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랍세계의 헌법 번역과 이슬람법 샤리아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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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문현주
대구미술관 홍보마케팅팀장
대구미술관 문현주 팀장은 바쁜 와중에도 침착하고 꼼꼼하게 취재진을 응대하고, 기자간담회를 무리없이 진행했다. 대기업 홍보팀을 박차고 대학원에 진학했고, 미술관 개관때 부터 미술관이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을 지켜봐왔다. 대구미술관의 영문 MI(부처 아이덴티티)인 ‘dam’을 보고 ‘수자원공사 건물’이냐고 진지하게 묻던 한 관객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고. 앞으로 대구미술관의 존재를 제대로 알리는 유능한 홍보우먼으로 남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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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0947이필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
마감 직전 지면상 불가피하게 원고 분량이 늘어날 때가 있다. 순발력 있게 글 내용을 보완해준 노고에 감사드린다. 홍익대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시카고대 미술사학과에서 현대미술과 사진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카고대와 아트 인스티튜트 시카고 대학(SAIC)에서 강의했으며, 스마트 미술관과 아트 인스티튜트 시카고(AIC)에서 큐레이터 경력을 쌓았다.

 

COLUMN 강수미의 공론장 2

양극화의 미학, 미술경향의 문제

1965년 출간돼 프랑스 젊은 층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조르주 페렉의 소설 《사물들》은 지금 여기 20~30대 독자가 읽어도 공감할 부분이 많을 것이다. 그 젊은이가 국내 예술대학 과/또는 유학을 마친 미술, 건축, 디자인, 영화, 연극, 패션, 무용 전공자라면, 그래서 남보다 나은 아비투스를 취득했고 세련된 감각을 가졌다고 자처한다면 더 그럴 것이다. 특히 연남동, 서촌, 경리단길, 한남동 등 소위 ‘핫 플레이스’가 마치 자기 취향의 고향, 자기 라이프스타일의 최신 버전, 자신의 미적 커뮤니티 혹은 심적 게토로써 감각의 쾌적함과 심리적 안락함과 지적 자존감을 높여준다고 느낀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현재 경제 형편, 경력, 지위를 볼 때 학생 때부터 갈고 닦은 자신의 미시전공/오타쿠적 지식과 아방가르드/앞서가는 안목이 사회적으로 충분히 보상을 못 받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녀에게 《사물들》은 씁쓸한 일기장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 상품사회가 제공한 “오로지 그들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사물들에 둘러싸여” 자신과 통하는 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자유롭고 여유롭게 일할 수 있다면 “삶은 하나의 예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경제 상황이나 사회적 지위에 걸맞은” 궁핍이 “그들의 현실이고”1 오늘 여기 88만원세대의 수입은 고사하고 신분조차 불투명한 젊은 예술인들의 현실이니 말이다.
이와 같은 간극, 즉 사물에 대한 취향의 사적 정치경제학과 사물을 소유할 수 있는 사회적 부와 권력의 불일치, 예술적 삶을 향한 꿈의 질적 수준과 예술을 전유할 수 있는 물질적 역능 사이의 낙차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크고 깊어졌다. 그 간극은 사회구조적 원인에서 비롯됐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배태한 극단적 양극화가 그 간극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하지만 그 간극, 또는 양극화는 특히 요즘 뜨는 감각과 훈련된 열정, 디지털미디어 기반의 다원적 정보력과 의사소통능력을 지닌(이런 능력은 큰 잠재력이지만 현실 자본이나 힘으로 교환되는 행운은 극소수에게만 주어진다) 청년세대에게 치명적 내상을 입히거나 강압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이를테면 재능 면에서나 성실함에서나 그것을 소유하고 누릴 자격을 갖췄다고 자신하는 그/녀가 눈앞에 아른거리는/SNS를 보면 나보다 못한 이도 가진 욕망의 대상 획득에 번번이 실패한다. 그런 경우 그/녀는 점차 위축되고 자신과 세계 사이에 견고한 벽을 쌓기에 이른다. 혹은 반대로 과도하게 외부에 개방된 채 무조건 승자나 강자를 따라 하고 보는 카피캣(copycat)이 된다. 나는 여기에 한국현대미술의 어떤 문제를 결부시킬 수 있다고 본다.
우선 한국의 젊은 미술가(작가, 큐레이터, 비평가, 이론가)들을 중심으로 보면, 그 간극은 하부구조적 원인의 단계를 넘어서 문화적 표현의 꼭짓점까지 차올랐다. 이름 붙이자면 ‘미적 경향의 양극화’ 내지는 ‘양극화시대의 양극화된 미술 경향‘이다. 첫째로는 만든 이에게나 감상자에게나 사적으로 내밀한 부분에 연결되는, 내향적이고 스케일이 작으며 멜랑콜리한 미술이 있다. 또는 그런 속성을 대중문화 속 이른바 ‘병(신)맛’ 코드나 ‘비주류/비정상’ 기호로 덧씌워 자신과 같은 심리 및 처지에 있는 커뮤니티 안에서 증폭시키는 미술이 있다. 둘째로는 문화적 주도권이든 경제력이든 현실 사회에 강한 우세종의 미술, 대표적으로 테리 스미스가 컨템포러리 아트 유형으로 꼽은 리모더니즘(remodernism), 레트로 센세이셔널리즘(retro -sensationalism), 스펙터큘러리스트 아트(spectacularist art)2 중 하나를 부단히 학습하고, 내면화하고, 재-재생산함으로써 그 일원이 되려는 미술이 있다(지난 글에서 청년작가들에게 전위적이거나 혁신적인 작품을 보유하고 있냐고 물은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틈은 없지만 이 현대미술 유형은 대체로 과거의 유력 미술 유령들을 오늘의 글로벌미술시장에 맞게 재생한다. 기품 있으면서 섹시하고, 전통적이면서 센세이셔널 할 수 있게 ‘복고(retro-)’라는 위약과 ‘장관(spectacle)’이라는 강장제를 써서. 그러니 그것을 흉내 내는 새로운 세대의 미술은 낡은 미술 유령의 출몰을 뒷바라지하는 꼴이다.
어쨌든 위 첫 번째 미술은 젊은 미술가들이 사회경제구조가 초래한 양극화에 대해 무력한 소외 또는 자발적 잉여생산 및 소비의 방식으로 응대하는 것이다. 두 번째의 미술은 정반대로 그 양극화 또는 간극을 양성하고 고착화한 문화예술경제의 패권적 기제를 영리하게 마스터하고 점유, 활용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주인미술(라캉의 ‘주인담론’에 유비하자면)로 거듭나고자 하는 양태다. 그런 면에서 이 두 미술의 방향은 분리된 노선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대미술계에는 가령 현재는 우세종 미술에 포함되지 않은 것들이 예외적 스타일이나 별스러운 취미라며 하루아침에 각광 받을 기회가 널려있다. 두 노선이 얼마든 뒤섞이고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미적 경향의 양극화’ 문제를 젊은 미술가들에 한정하지 않고 한국현대미술 전반이라는 큰 틀에 맞추면 무엇이 보이는가? 막대한 물량 공세로만 구현 가능한 스펙터클 미술 기획안, 시쳇말로 ‘몰빵’에 가까운 ‘선택과 집중’ 정책을 통해 발탁한 스타 아티스트, 그/녀에게만 몰리는 재정 지원과 미술제도적 후원, 그런 거대 자본과 시스템을 통해서만 획득 가능한 문화예술지식 및 현장 경력에 독점적 지위 부여, 그것을 우월하고 유효한 것으로 가공해줄 수 있는 미술계 내부 전문가의 영향력 행사. 이렇게 다양한 성부(聲部)의 여러 박자가 긴밀하게 울려 퍼지면서 한국 미술계의 소위 ‘상위 1%(객관적 통계가 없으니 양극화를 표상하는 사회적 수치를 빌리면) 컨템포러리 아트’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보인다. 이는 짧게는 최근 몇 년, 길게는 10여 년 사이에 만들어진 현상이다. 또 국립현대미술관, 아르코, 리움, 에르메스코리아, 양현재단, 일우재단, 국제갤러리, 갤러리 현대, 아라리오, SBS, CJ, 현대자동차, 하이트 등을 통해 이뤄진 각종 미술사업, 즉 전시, 컬렉션, 상, 오디션, 국제교류, 작품 위촉, 출판, 국제비엔날레와 레지던시, 국제미술시장에서의 판매, 경매, 프로모션, 협업 사례에 등재된 소수의 작가/심사자/결정권자 이름과 그들의 작품/프로젝트를 검토하는 것으로 충분히 확인 가능한 사실이다. 말하자면 그 이름들과 사업들이 한국현대미술의 우세종이다.
그런데 위의 장면과는 반대로 보이는, 그러나 분명 동시대의 조건 속에서 동시대미술의 일부로 공존하는 미술 종(種)이 있다. 의식적으로 넝마주이의 질료와 방식을 써서 약함, 부적응, 결여, 궁핍, 불완전, 불안정, 버려짐을 드러내고 그렇게 해서 소수자적 감수성과 삶의 방식에 어필하는 작업이 그에 속한다. 가까운 과거에는 철 지났거나 폐허로 취급됐을 장소를 서로 알음알음 협력해 주변부 예술공간으로 변용하고 운영하면서 기업의 자본이나 공적 제도의 지원 대신 자생력과 문화예술 힙스터의 지지를 양분 삼아 커가는 미술 시스템도 있다. 그리고 뻔한 예가 되겠지만, 셀 수도 없이 많은 미술가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가운데, 합당한 자리도 없이 각자의 현존으로 각자의 미술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화실에 고독하게 앉아 40년째 사군자를 연마하는 이서부터 공동체에 기여하는 미술을 실천하고 싶어 자비를 들여 강화도 섬 주민들의 미적 일상을 신문으로 만드는 이까지 말이다. 이들은 싫든 좋든 한국의 상위 1% 현대미술과는 현재로서는 다른 지점에 있다. 아니, 사실은 사회에서 말하듯 그 1%를 떠받치고 있는 99%의 나머지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도 어떻든 충분치 않은 사회적 인정과 경제 형편에 고통 받고, 스타 아티스트의 휘황찬란한 행보와 작품 앞에서 쪼그라든 채 어찌할 바를 모를지 모른다. 이렇게 보면 앞서 말한 젊은 미술가들의 현실과 어려움은 특정 세대가 아니라 대다수 미술인이 겪고 있는 현실이고 문제다. 문제는 가진 기성세대와 못 가진 청년세대, 의식과 취향이 ‘꼰대’인 이들과 그에 앞서가는 이들의 미학적 갈등이 아니다. 조건 설정에 따라 그것들은 얼마든 바뀌고 뒤섞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기형적으로 양극화된 미적 경향을 문화 경쟁력을 빌미로 내속시키는 미술계 상하부구조다. ‘세계적 미술관’ ‘국제적 지명도의 작가’ ‘글로벌 전시’ ‘명품’ ‘저명 전문가’ 같은 둔한 수사학 뒤에서 다수의 다종다양한 미술가능성이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든 꿈에서 깨 짚어야 한다.
강수미 동덕여대 교수

1 Georges Perec, 《Les Choses: Une histoire années soixante》, 1965, 조르주 페렉, 김명숙 역, 《사물들》, 펭귄클래식 코리아, 2011, pp.20~23.
2 Terry Smith, 《What is Contemporary Art?》,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9, pp.267~268. 참고할 것.

HOT PEOPLE 박우홍 제 17대 한국화랑협회 회장・동산방화랑 대표

代를 이은 畵商, 화랑협회 수장이 되다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코엑스에서 열리는 <제33회 화랑미술제> 전시 포스터
위 2014년 9월 25일부터 29일까지 열렸던 <한국국제아트페어(KIAF)> 전시광경. 박 회장은 “임기 중 <KIAF>를 재설계할 것”임을 밝혔다
박우홍 동산방화랑 대표가 2월 12일에 열린 사단법인 한국화랑협회(이하 ‘화랑협회’) 정기총회에서 제17대 화랑협회장에 선출됐다. 국내외 경제 침체로 우리 화랑가의 표정도 그리 밝진 못한 터라 더욱 막중한 책임이 지워진 지금, 3년 임기를 시작하는 박 회장을 만났다.
박 회장은 “화랑협회가 1976년 출범할 당시에는 회장을 맡은 이의 화랑에서 곁방살이를 했는데, 현재 회원화랑 수만 140여 곳에 달할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이전 선배들의 공이지요”라고 인터뷰의 운을 뗐다. 그러나 현재 한국 미술시장은 화랑협회의 위상에 걸맞은 성장을 이루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 표정이다. 박 회장은 현재 우리 미술시장이 봉착한 어려움의 원인을 분석했다. “우리 시장이 협소한 것은 잘 알려졌지요. 그런데 주변국인 중국, 일본, 싱가포르 등의 상황도 매우 안 좋아요.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아트바젤 홍콩>이 성황을 이루며 활발한 움직임을 이어가고 있죠. 그러니 우리 작가를 아시아에서 열리는 다양한 아트페어에 소개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럴 때 자국 시장에서 받쳐줘야 하는데 구조적 문제로 그러지를 못하고 있어요.” 작금의 상황에 대한 답답함의 토로다.
불황도 문제지만 시장 상황의 왜곡으로 화랑에 대한 불신이 커진 것도 큰 문제다. 박 회장은 이를 선결해야 할 과제로 꼽았다. “한 사회에서 화랑문화가 성숙하려면 충분한 시간과 교육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최근 일고 있는 특정 장르에 대한 열풍은 설익은 감이 없지 않아요. 이를 뒷받침할 전시와 비평적 논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시장의 열풍은 거품과 같아서 금방 꺼져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제 그는 한 단체의 수장으로 정책 입안 과정부터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박 회장은 현재 입법부는 물론, 정책 입안을 담당하는 주무부서도 화랑계를 불신하는 실정이라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화랑에 대한 이미지 쇄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임기 중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화랑협회가 문화예술 분야의 한 축을 담당함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상인들의 이익단체로 치부하는 시선을 느낍니다. 그간 쌓이고 쌓인 불신이 지금의 상황을 만든 것이겠죠.” 이를 타개해 이후 화랑계를 이끌어갈 세대들을 위한 초석을 다지는 데 역량을 기울일 것을 출마소견서에 적시했던 박 회장이다.
우리 미술시장을 몇몇 대형 화랑이 장악한 상황과 경매사와의 갈등도 풀어야 할 과제로 지적된다. 이 문제에 대해 박 회장은 회원 화랑의 의견수렴을 적극적으로 해 하나 하나 풀어가겠다고 말했다. 또한 컬렉터문화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양화를 지향하되, 질이 담보되며, 일반인이 컬렉터가 되는 데 있어 높은 문턱을 의식하지 않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는 점을 들었다. 작가의 유족이나 컬렉터의 기부문화 활성화와 그에 대한 정책적 지원도 필요함을 역설했다. 올해 시장을 예상해달라는 주문에 대해서는 “더 떨어질 것은 아니나, 나아지지도 않을 것”이라고 다소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덧붙여 <화랑미술제>나 향후 열릴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의 변혁을 예고했다. “특히 <KIAF>는 적극적인 모멘텀을 만들려고 합니다. 이에 7개국(한국, 중국, 일본, 타이완, 싱가포르, 홍콩, 호주) 화랑협회와 머리를 맞대고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할 묘안을 찾고 있습니다. 상호 단체가 주관하는 아트페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또한 컬렉터를 연결시키는 등의 방안을 모색 중입니다.” 그러면서 KIAF의 재설계도 임기 내에 이뤄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장에 맡겨 미온적으로 대처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박 회장의 부친은 화랑협회 2, 6대 회장을 역임한 박주환 전 동산방화랑 대표다. 지금도 고미술 전람회를 기획할 때면 부친에 대한 헌정전으로 생각한다는 박 회장이다. 이번 회장직 선출로 우리 화랑협회 역사상 처음으로 부자(父子) 회장이 탄생했다. 2대에 걸쳐 화랑을 운영하는 그에게 현재 화랑계의 가업화(家業化) 상황에 대해 물었다. “우리 화랑은 당대에 한 작가의 특정 작품 경향을 트레이드마크화해 올인하는 경향이 있어요. 외국의 경우 할아버지 대에 상대하던 작가가 손자 대에 이르러 큰 평가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죠. 그래서 화랑의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따라서 후대에 이르러 평가받을 수 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대를 이어 지원하고 평가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화랑의 역사가 오래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발굴 작가가 의미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다시 미술관이나 비평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한 셈이다.
새로운 수장의 선출로 화랑계가 침체된 분위기를 쇄신하고 미술계의 한 축으로서 도약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황석권 수석기자

박 우 홍 Park Woohong
1952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다. 단국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인사전통문화보존회 이사 및 부회장(1997~2002), 한국화랑협회 감정위원(2002), 한국미술품 감정평가원 감정위원(2005~2014), 한국화랑협회 부회장(2009~2012) 등을 역임했다. 2000년부터 동산방화랑 대표를 맡았다.

SIGHT & ISSUE 故임영방 제12대(1992~1997)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대쪽 같은 작은 거인의 귀천

지난 1월 31일, 관장님 부음을 접하고 잠시 멍해졌다. 언제나 찾아뵈면 반가이 맞아주실 줄 알고 바쁘다는 핑계로 뵙기를 미루고 시간을 보내다 관장님이 하늘나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아뿔싸 후회했지만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누구에게나 인생에 있어, 삶에 있어 은인 같은 분이 있게 마련이다. 내게 임영방 관장님은 은인을 넘어 부모님 같은 분이다. 세상의 고마운 분들로부터 늘 은혜를 입어 지금과 같은 꼴을 갖추고 살고 있지만 관장님은 오늘의 나를 만들어주신 분이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를 마친 나를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불러 학예실장이라는 과분하고 무거운 짐을 주셨다. 그 부름에 조금이라도 답하고자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웠지만 부딪쳤다. 가끔 힘이 들고 어려운 기색을 보일라치면 저녁에 퇴근하면 소주 한잔하자고 슬그머니 이끄셨다. 허름한 대폿집에 들어서면 늘 미술관 직원들이 함께 있었다. 미술관 구석구석에서 소리 없이 자신의 일에 열심인 직원 몇을 저녁 술자리에 불러 스스럼없이 대해주시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이때는 엄한 관장이 아니라 동지적 관계(?)에서 새로운 미술관 시스템을 이야기하고 이해를 구하고 설득하는 자리였다. 덕수궁미술관 시절부터 근무해온 그들에게 관장님이 그리는 선진적인 미술관의 시스템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설명하시면서 함께 새로운 미술관을 만들어갈 것을 당부하셨다. 그런 점에서 인간적인, 귀천과 높낮이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사람답게 대해주는 그런 소탈한 분이셨다. 그런 관장님이 2015년 유난히 매섭던 겨울이 꼬리를 감추고 봄이 오려는 즈음에 하늘나라로 돌아가셨다. 관장님은 늘 섬기고 따르던 하느님의 품에 안기어 행복하실지 모르지만 속세에 남은 장삼이사들은 그 서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사실 임영방에게 세상은 너무 많은 임무를 부여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 스스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어렵던 시절 홍콩과 프랑스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남다른 기회에 대해 국가와 민족에 보답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그는 우선 학문적으로 보면 한국미술사에 근대적 개념의 미학과 미술사의 개념과 방법론을 제시했다. 그는 근대기 지식인이었으며, 국민을 계몽해야 한다는 의지로 지사적 실천을 행했다. 하지만 그는 인문학이라는 틀을 지키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 학문적 원칙주의는 그의 삶에서도 그대로였다. 그는 자신의 가치와 철학에 따라 주도적으로 원칙을 만들고 이를 스스로 지킨 사람이다. 그 원칙 때문에 때로는 오해도 샀지만 자신의 원칙을 잠시 미룰지언정 허무는 법은 없었다. 이런 그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스스로 만든 원칙을 지키면서 힘들고 때로는 거추장스러웠을까, 아니면 행복했을까’. 그럼에도 그는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고 스스로에게도 양보하지 않는 원칙의 삶을 살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는 우리에게 영원한 사표이자 대한민국에서 21세기까지 존재한 마지막 선비였다.
특히 한국 미술관에서 임영방은 변곡점이다. 그 이전의 미술관은 근대적인 미술관 아니면 개발도상국가형 미술관이었다면 그 이후의 미술관은 현대적인, 글로벌 스탠더드를 추구하는 미술관으로 전이해나간 과정 그 자체이다. 그래서 그는 큐레이터 중심의 미술관을 꿈꾸었고 그들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 삶과 유리된 구름 위의 미술을 세상의 미술, 사람들의 미술로 변화시킨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가 학문과 삶에서 추구했던 것처럼 미술이 삶 속으로 들어온다고 해서 그 가치와 격이 떨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맡고 그 이듬해 <93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전>을 논란을 물리치고 개최했다. 단색조회화라는 전대미문의 집단 개성화된 한국화단에 다문화적 당대미술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한국미술에 새로운 국면을 불러일으켰다. 또 <민중미술 15년전>을 열어 산발적인 미술운동차원의 미술을 한국미술사에 편입시켰다. 또 <올해의 작가>라는 제도를 통해 미술의 영역을 확대하고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기를 희망했다. 또 <일본현대미술전>을 통해 정치와 문화를 구분해서 일본을 대하고 바라보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 내세우지 않았다. 그는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이고자 했다. 사실 그는 오늘날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베니스비엔날레의 한국관 건립에도 막후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광복 후 홍콩에서 동문수학한 후배 백남준과 함께 이탈리아와 베니스시를 설득하고 한국 정부를 이해시켜 건립 예산을 확보하기까지 안살림을 맡아 동분서주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국 현대미술의 격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킨 1995년의 광주비엔날레도 그의 작품이다. 첫 비엔날레의 조직위원장으로 그는 자신의 유학시절 인맥과 경험을 최대한 가동시켜 척박한 불모의 땅에 비엔날레라는 씨앗을 움 틔웠다. 이후 그가 떠난 후의 광주비엔날레를 떠올려보면 그의 혜안과 지도력 그리고 실천의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미술사에서 그의 족적을 살펴보고 이를 서술한다는 것은 내겐 역부족일지 모른다. 미술사, 미학 등의 이론분야는 물론 문화정책과 박물관학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구석이 없다. 하지만 그는 이론 또는 책상에서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에 옮긴 문화운동가였다.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단구의 거목이었다.
인천에서 태어나 일찍이 개화된 가풍으로 인해 열린 세상을 누구보다 먼저 접한 그. 지사적 자세로 파란만장한 한국의 근현대사를 헤쳐 나오면서, 가끔은 기뻐했으나 많은 시간을 통분하고, 혹은 질주하고, 때로는 돌아오면서 역사와 현재의 화해를 통해 미래를 그리고자 고군분투했던 임영방 관장에게 가장 큰 힘은 거침없는 용기와 강단 있는 명철한 판단이었다. 그리고 굽히지 않는 자신감과 소명의식이었다. 이런 지사적 풍모와 대쪽 같은 그의 기개는 조선 선비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관장님을 하느님의 품으로 보내드리고 나서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겠습니다. 계실 적 그리 일러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던 제가 이제야 깨우쳤지만 결코 관장님처럼 격과 결이 있는 삶을 살 수 없음이 더욱 부끄럽습니다. 부디 누구도 당신이 세운 올곧은 뜻을 거스르는 자 없는 하느님의 품 안에서 평안하소서.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취임식을 마치고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취임식을 마치고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임 영 방 Lim Youngbang
고 임영방(1929~2015)은 경기도 인천 출생이다. 프랑스 파리 대학에서 철학과 미술사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1871~1940년 사이 파리시의 공공건물 내의 벽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미술대학 및 인문대학 교수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을 역임했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 조직위원장을 맡아 국내 최대 규모의 국제미술제를 이끌었으며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건립에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저서로는 《서양미술전집》 《미술교육》 《현대미술의 이해》 《미술이 걸어온 길》등과 중세부터 바로크시대까지 시대별로 미술을 정리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와 미술》 《중세미술의 도상》 《바로크》가 있다. 서울신문비평상(1986), 프랑스 일급문화예술훈장(1996), 제36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은관 문화훈장(2006)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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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bute
50년 동안의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기리며

선생님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이 제가 스무 살 학생 때였으니 벌써 50년 전 일입니다. 그 당시 저는 미술대학에 대해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니 당연히 미술에 관련된 논의가 활기차게 흘러넘치고 ‘미술로 세상을 열어’ 갈 저에게 빛이 되어줄 곳이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허기진 지식욕을 채워주기에는 실기 위주의 미술대학 분위기는 기대와 영 딴판이었습니다. 게다가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매 학기 정상적으로 수업이 이뤄진 적이 거의 없던 때였습니다.
바로 그러할 때 선생님이 미술대학(저에게)에 나타나셨습니다. 지성적인 면모의 패션, 걸음걸이까지 멋지던 선생님은 저에게 막연히 동경하던 미술의 나라 프랑스 그 자체였습니다. 해맑은 미소는 말할 것도 없고 서투른 모국어까지 멋있어 보였으니 선생님의 뭔가가 제게 씌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학보사 편집을 맡고 있던 저를 선생님은 퇴근길에 자주 데리고 다니시면서 세상 보는 시각을 넓혀 주셨습니다. 심지어 동베를린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에 저를 데리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을 통해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졸업한 뒤 한참 지나 문리대 미학과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저는 속으로 당신이 원하던 인문학의 자리로 옮기신 것을 축하드렸지만 당신은 그래도 미술대학에 애착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도 훌륭한 제자를 많이 배출하셨으니 보람 있는 자리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선생님과 저의 특별한 인연이 다시 시작된 것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님으로 재직하실 때였습니다. 과천의 산속에 뚝 떨어져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 관장으로 계시면서 〈휘트니 미술관전〉과 〈아! 고구려전〉 등 몇 개의 특별전으로 미술관의 대중화에 대성공을 거두셨습니다. 그 직후에 당시 운동권미술인 ‘민중미술’ 전시회를 개최한 것은 선생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큰 결단으로 지금도 제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그 당시 선생님의 주위에는 불온한(?) 민중미술전을 열지 말라는 따가운 시선과 만류가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러한 시선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전시회의 개최를 밀고 나가셨습니다. ‘민중미술’은 허구가 아니라 분명히 이 땅에서 만들어진 리얼리즘미술이란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생님의 빛나는 업적은 은퇴 후 세검정 시절에 이룩한 인문학적 저술 활동입니다. 르네상스미술과 중세미술, 바로크미술에 이르기까지 거의 800~1000 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저작들을 80세 전후의 고령에 펴낸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아깝게도 선생님은 낭만주의 미술에도 손을 대시다 영면하신 걸로 전해 들었습니다. 미처 완성하지 못한 원고들은 저희 제자들이 능력이 되는 대로 출판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러한 저술은 그 자체로 인문학적 학술활동으로서의 가치만이 아니라 미술의 지평을 인문정신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켰다는 데 큰 의미가 있어 미술학도로써 또 제자로써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남을 가르치는 데 스스로 모범을 보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동안 선생님은 많은 일을 하시면서 알게 모르게 후학들에게 모범으로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한 인간이 참다운 스승을 모실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선생님을 은사로 모실 수 있는 인연을 가지게 된 것은 저희 제자로서는 정말 행운입니다. 저희는 이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선생님의 인문정신의 가르침을 우리들 스스로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 높은 곳에서 이제는 편히 쉬시기를 바랍니다.
김정헌 작가,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스승의날 모임을 마치고 제자들과 함께(앞줄 왼쪽부터 김정헌, 임영방 부부, 안필연, 뒷줄 왼쪽부터 최태만, 임옥상, 박영남)

스승의날 모임을 마치고 제자들과 함께(앞줄 왼쪽부터 김정헌, 임영방 부부, 안필연, 뒷줄 왼쪽부터 최태만, 임옥상, 박영남)

 

SIGHT & ISSUE 함창예고을-금.상.첨.화錦.上.添.畵

비단과 술이 익는 마을, 함창의 미술프로젝트

우리나라에서 마을미술프로젝트가 벌어진 지 올해로 7년째를 맞았다. 이 사업은 지금까지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받으며 조용히 진행돼 왔다. 조용하게 진행됐다란 말은 기획 특성상 마을미술프로젝트가 미술계 안에서 작가들과 기획자에게만 주목받고 있다는 뜻이다. 미술공간과 행사가 대도시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예술계의 관심도 당연히 여기에 맞춰져 있다. 마을미술프로젝트는 생산(작가의 창작), 소통(전시와 비평), 수용(관객의 반응)의 세 꼭짓점 중에서 주로 생산 장소로 쓰이던 곳에 나머지 요소를 불러들인다. 경북 상주시 함창읍의 마을프로젝트는 작년에 발주한 사업 가운데 가장 크게 진행되는 행사다.
<함창예고을-금.상.첨.화>라는 표제를 붙인 프로젝트는 비단 위에 꽃을 얹었다는 금상첨화(錦上添花)에서 꽃 화(花)를 그림 화(畵)로 바꾸었다. 예부터 뽕나무와 누에를 키워서 비단의 고장으로 이름 높은 이곳에 그림까지 더한 마을을 일군다는 뜻의 ‘금.상.첨.화(錦.上.添.畵)’는 프로젝트 전체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함창 간이역 앞에 세워진 육근병의 미디어아트 작품은 누에고치 형태로 상주시 함창의 장소성을 함축해 보여준다.
전체 둘레길은 육근병과 오승환의 작품이 설치된 함창역을 <금상첨화> 가운데 ‘금(錦)’으로 잡고, ‘상(上)’에 해당하는 가야마을에 정의지, 양현진, 오유경과 김경아, 이창호, 프로젝트팀 2반(최혜정, 달문, 나다), 가야사랑마을공작소, 김성석의 작업이 들어갔다. 읍내 전통시장의 담벼락과 아케이드 천장에 각각 백용성과 이강준의 벽화와 조형물이 ‘첨(添)’을 이뤘고, 마지막 ‘화(畵)’에는 가장 많은 작가(이재형, 고순정, 윤동환, 라온(이미정, 신순단, 박남규), 김승영과 박기진, 김석환, 있다1(최정은 등)과 2(요아킴 등), 상주예총 협업, 안경진, 이승원)이 들어갔다. 이는 미술의 각 분야에 더하여 공연, 출판까지 아우르는 총체 예술의 성격을 띤다.
상주 특산품인 비단과 더불어, 전쟁 직후부터 ‘세창도가’란 명성을 쌓으며 함창에서 번성하던 양조업이 자취를 감춘 지금, 함창프로젝트는 양조장 폐건물을 예술공간으로 되살려냈다. 모두 여섯 개의 복합전시공간으로 변신한 이곳은 예컨대 김승영, 박기진 작가의 협업 <술도가>(술을 빚어내는 집이란 뜻으로, 지역에서는 ‘술도가이’라는 발음에 가깝게 쓴다)처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맥락을 얻었다. 무엇보다 함창마을프로젝트가 큰 조형물을 놓거나 선전 문구를 뿌리는 식의 자치단체 홍보수단으로 변질되는 선례를 따르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이는 출발 단계에 선 이 프로젝트가 아직도 원 거주민에게는 예술마을 정착이건 관광산업 혹은 양조업의 부활이건 하나의 활력 요소로 자리 잡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함창=윤규홍 갤러리 분도 아트 디렉터

육근병 <터> 철근 철판 FRP 영상설치 310×230×290cm 2014 함창역 앞에 설치됐다

육근병 <터> 철근 철판 FRP 영상설치 310×230×290cm 2014 함창역 앞에 설치됐다

 

HOT ART SPACE

가나아트콜렉션
가나인사아트센터 1.27~3.16

인사동 가나아트센터가 내외관을 리뉴얼하고 <가나아트콜렉션전>을 전관에서 진행한다. 1월 27일부터 3월 16일(<고암 이응노전>은 3월 1일까지)까지 열리는 이 전시는 <한국근대조각전>, <근대한국화 4인전>, <해외작가전: 기억과 체험>, <외국인이 본 근대 풍물화전> 그리고 <고암 이응노 미공개 드로잉전 1930~1950s>으로 구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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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혜 (1)

양주혜 개인전
신세계갤러리 본점 1.22~2.25

<시간의 그물>을 타이틀로 한 이번 개인전은 작가가 프랑스 유학시절부터 30여 년간 해온 색점작업으로 구성됐다. 그를 대표하는 바코드 작업과 더불어 ‘지난 시간을 지우고 새로운 시간을 덧입히는’ 과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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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 (1)

최선 개인전
송은아트스페이스 2.13~3.28

제12회 송은미술대상 대상 수상작가인 최선의 이번 전시 제목은 <메아리>다. 작가는 작품의 주제와 연관있는 재료를 이용하거나 다양한 외부인을 제작 과정에 적극 참여시켜 완성한 작품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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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립

텍스트 콜라주
경남도립미술관 1.29~5.13

윤성지 이광기 조은지 3인의 작가가 참여해 현대미술에 일반화된 소재인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기존 문법을 거부하는 텍스트가 이미지화될 때 벌어지는 다양한 미적체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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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잉_일우 (6)

Play with Drawing
일우스페이스 1.8~2.25

19명의 작가가 드로잉 및 설치작품 60여 점을 선보인 전시는 다양한 세대의 작가들이 참여해 세대별로 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작가의 내면을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한, ‘날것’의 성격을 지닌 드로잉의 매력을 발견하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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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연 (4)

김부연 유작전
갤러리 팔레 드 서울 1.28~2.10

뜻밖에 요절한 故 김부연(1969~2013)의 유작전이 열렸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세계를 화면에 옮겼다는 평가를 받는 그의 작업은 순수함과 밝음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이번 유작전은 그를 추모하는 이들이 뜻을 모아 개최한 것으로 그 의미를 더했다.

SPECIAL FEATURE 우리가 모르는 이슬람문화

이슬람 문화의 어제와 오늘
최근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며 우리 삶에 부쩍 다가온 ‘이슬람’. 그러나 정작 우리는 이슬람문화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현재 무슬림 인구는 18억에 육박하고 아프리카 중북부 지역, 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등에 걸친 57개국이 이슬람회의기구(OIC, Organization of the Islamic Conference)에 가입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슬람’하면 22개의 아랍국가에 국한된 ‘아랍’이나 지역적 의미의 ‘중동’을 떠올리기 쉽다. 또는 일부 지역의 정치적 이슈와 전쟁 및 특정 테러 무장단체 이미지가 생각나기도 한다. 이슬람문화를 떠올리며 혹시 막연한 두려움이 엄습한다면, 그것은 이슬람문화에 대한 무지가 불러일으킨 불안감 때문은 아닐까. 《월간미술》은 이슬람의 문화와 미술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슬람문화 전반, 이슬람 전통문화와 오늘날 미술의 모습, 이슬람에 대한 서구의 시선을 포함해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이슬람문화까지 접근해 본다.
이번 특별기획이 이슬람문화에 대한 왜곡 없는 이해를 돕는 최소한의 가이드가 되길 바란다. 우리가 모르면서 알고 있고, 알면서 실체가 없던 세계, 이슬람의 새로운 모습이 펼쳐진다.

서울중앙성원 2층 남성예배실 내부 앞 페이지 서울 용산구 우사단로(한남동)에 위치한 한국이슬람교중앙회 서울중앙성원 사진 조영하

서울중앙성원 2층 남성예배실 내부 앞 페이지 서울 용산구 우사단로(한남동)에 위치한 한국이슬람교중앙회 서울중앙성원 사진 조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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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문화 용어 사전

임병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HK 연구교수

국가와 지역

이슬람 Islam 이슬람은 종교적 명칭이다. 이슬람 국가라 하면 이슬람법 샤리아에 따라 이슬람교도(무슬림) 지도자가 통치하는 국가이다. 일반적으로 중동, 지중해, 중앙아시아, 카프카스, 발칸 반도, 북아프리카, 서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남아메리카 등 이슬람회의기구(OIC, Organization of the Islamic Conference)에 포함된 57개국을 말한다. OIC는 이슬람 국가들의 연대 강화와 교류 촉진, 민족독립을 지향하는 무슬림에 대한 투쟁지원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아랍 Arab ‘아랍’은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아랍어를 사용하는 문화권을 통칭하며, 아랍연맹(League of Arab States)에 가입된 22개국을 가리킨다. 대부분의 아랍 국가는 국민의 대부분이 이슬람교를 믿는 이슬람국가이지만, 민족적으로 아랍인이 아니면서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도 많이 있기 때문에 모든 이슬람국가가 아랍 국가는 아니다. 특히 중동에 있는 터키와 이란은 아랍이 아닌 이슬람국가이다. 이란은 과거 페르시아제국을 건설했던 아리아인의 나라로 아랍인과는 민족적으로 다르다. 터키도 13세기에 중앙아시아로부터 이동해 와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건설한 투르크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중동 Middle East 원래는 유럽에서 본 지리적 개념으로 극동(Far East), 근동(Near East)에 대하여 그 중간 지역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현재의 중동은 아랍연맹에 가입한 아랍국가 22개국(팔레스타인 포함)과 아프가니스탄, 이란, 터키, 이스라엘 등의 비(非)아랍국가로 이루어진다. 종교적으로 이슬람이 압도적이지만 기독교 각파가 소수파로 존재한다.

서아시아 West Asia 지리학적으로는 ‘서남아시아’라고 하는 경우도 있으며 ‘근동, 중근동’ 등의 명칭도 이 지역을 가리킨다. 동양과 서양의 중간에 있으며, 자연·민족·역사·문화적으로 큰 공통점이 있다. 이 지역의 주요국으로는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터키,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이스라엘 등이 있다.

아랍에미리트 United Arab Emirates 정식 명칭은 아랍에미리트연합(United Arab Emirates, U.A.E.)이다. 1892년 영국 식민 지배하에 있던 6개 아미르국(토후국), 즉 아부다비, 두바이, 샤르자, 아즈만, 움무 알꾸와인, 후자이라가 1971년 입헌연방국으로 독립하면서 결성한 연방공화국이다. 1972년 라으스 알카이마가 참여함에 따라 현재는 총 7개 아미르국이 연방을 구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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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탈레반 Taliban 1994년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주(州)에서 결성된 무장 이슬람 정치단체로서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한 세력이다. 약 2만5000여 명의 학생 (딸리분)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알 카에다 Al-Qaeda 1979년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아랍 의용군으로 참전한 오사마 빈 라덴(우사마 빈 라딘)이 결성한 국제적인 테러 지원 조직이다. 1991년 걸프전이 발발하면서 반미 세력으로 전환하였으며 빈 라덴의 막대한 자금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파키스탄, 수단, 필리핀,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 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이고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총 34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토대, 본부’란 뜻의 ‘알까이다(al-qā‘īdah)’가 변형된 명칭이다.

이슬람원리주의 이슬람의 성서인 코란의 가르침에 따라 원래의 이슬람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이슬람화운동이다. 이슬람근본주의 이슬람주의, 이슬람개혁운동, 이슬람부흥운동, 이슬람정통주의라는 말로도 사용된다. 이것은 서구 열강이 중근동에 진출했을 때 전통 이슬람이 외압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내부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하여 이슬람세계의 파탄을 가져온 데 대한 반동으로 나타났다.

이슬람국가 IS 이라크·샴 이슬람국가(ISIS : Islamic State of Iraq and al-Sham) 또는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 Islamic State of Iraq and the Levant)’의 줄임말이다. 두 이름이 혼용된 데는 시리아·레바논·요르단 지역의 옛 지명이 다르기 때문이다. 2014년 6월에 시리아와 이라크의 북부 지역을 장악하고 이슬람원리주의 국가를 선포했다. 인질들을 참수하거나 화형하는 등의 장면을 동영상으로 퍼뜨림으로써 전 세계를 공포와 경악에 떨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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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알라 Allāh ‘알라’는 아랍어 정관사 ‘알’과 ‘신’이라는 뜻의 명사 ‘일라’의 결합으로, 이슬람의 유일신을 뜻한다. 그런데 간혹 ‘알라신’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신신’이라는 이상한 의미가 된다. 따라서 이슬람의 신을 뜻할 때는 ‘알라’라고 하는 것이 옳다. 간혹 이를 ‘하나님’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의 유일신과 혼동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알라’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좋다.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에는 유일신 알라를 지칭하는 이름이 99개가 나오는데, 우리는 이 이름들을 통해 알라의 속성을 파악할 수 있다: 자비로우신 분, 왕, 신성하신 분, 믿는 자들의 보호자, 승리하시는 분, 창조자, 용서하시는 분, 모든 것을 아시는 분, 재판관, 사랑을 주시는 분, 가장 강하신 분, 유일하신 분, 복수를 하시는 분, 상속자, 안내하시는 분 등등.

코란 Koran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이슬람의 성서를 지칭하는 용어로 ‘코란, 꾸란, 쿠란, 꾸르안’ 등과 같은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아랍어로는 ‘알꾸르안(al-Qur’ān)’이라고 발음되는데 ‘알’은 정관사이며 ‘꾸르안’은 ‘읽혀야 할 것’이란 의미이다. 아랍어 원음에 맞는 ‘꾸르안’이란 용어의 사용이 바람직하지만,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코란’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좋겠다. 코란은 114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전 분량이 일시에 계시된 것이 아니라 메카에서 13년, 메디나에서 10년, 총 23년 동안 질문에 대한 대답 형식으로 부분적이고 간헐적으로 계시되었다. 이슬람법 샤리아의 제1법원(法源)으로서 무슬림이라면 코란에 명시된 내용은 반드시 준수해야만 하는 알라의 절대적인 명령이다.

무슬림 Muslim 이슬람을 믿는 신도를 가리키는 용어이며, 간혹 ‘모슬렘’이란 용어도 쓰이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알라의 명령에 순종하는 이’라는 뜻이며, 전 세계의 무슬림 수는 약 16억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무함마드 Muḥammad 이슬람의 마지막 예언자이며, 간혹 ‘마호메트’란 명칭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잘못된 용어이다. 무함마드는 서력 570년에 태어나 632년에 사망한 역사적 인물이며, 그가 건설한 이슬람제국이 인류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인류에 공헌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선정된 바 있다.

회교 回敎 종교로서의 이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회교 또는 회회교’는 중국의 회족이 이슬람을 믿은 데서 유래한 용어다. 그러나 전 세계 약 16억 이상이 믿는 종교는 회교가 아니라 이슬람이다. 간혹 ‘무함마드교, 마호메트교’라는 용어들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 또한 크게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도 종교를 의미할 때는 ‘이슬람(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메카 Mecca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이슬람 제1의 성지로 원래 아랍어 발음은 ‘막카(Makkah)’이다. 메카는 이슬람 이전 시대부터 무역과 종교 (우상숭배)의 중심지였으며, 특히 메카의 카아바 신전은 이슬람이 도래한 이후 모든 무슬림의 예배 방향(끼블라)이 되었다. 메카 순례는 경제적 능력이 되는 무슬림에게 평생 한 번은 수행해야만 하는 의무 중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의 메카”라고 하면 ‘중심지, 센터’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메디나 Medina 사우디아라비아 히자즈 지방에 있는 이슬람의 제2성지이며, 아랍어로는 ‘알마디나(al-Madīnah)’라고 발음한다. 원래 명칭은 유대인이 거주하던 ‘야쓰립’이었으나, 예언자 무함마드가 622년에 핍박 받던 추종자들을 이끌고 메카에서 이곳으로 이주(히즈라)한 다음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카아바 al-Ka‘bah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하람성원 중앙에 있는 정육면체의 대리석으로, 모든 무슬림이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기는 성소이다. 무슬림들은 매일 5차례의 예배 시간에 이곳을 향해 기도한다. 순례 의식도 이곳에서 시작되고 이곳에서 끝난다. 산 자나 죽은 자 모두가 돌아가야 할 고향과 같다.

샤리아 Sharī‘ah ‘큰 길, 절대자인 알라에게 다가가는 길’이란 뜻으로 이슬람법을 가리킨다. 샤리아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알라에 의해 계시된 것이며 코란, 하디스(순나), 합의(이즈마으), 유추(끼야스)의 4가지 법원(法源)에 기초한다.

이슬람 종파 이슬람의 종파는 크게 수니파, 시아(쉬아)파, 카와리지파로 구분되며, 그 외 열두 이맘파, 일곱 이맘파(이스마일파), 자이드파, 알파위파, 드루즈파, 바하이파 등은 시아파의 소수 종파들이다. 수니파는 무슬림의 약 90%를 차지하는 다수 종파로서 4명의 정통칼리파(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를 예언자 무함마드의 합법적인 후계자로 인정한다. 시아파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이며 사위였던 제4대 정통 칼리파 알리와 그의 후손만을 후계자로 인정한다. 카와리지파는 신에 의한 칼리파 계승을 주장하며 알리 진영에서 ‘이탈한 이들’이다.

수피 Sūfī 이슬람 수도사를 가리키는데, 양털을 뜻하는 ‘수프(Sūf)’에서 유래했다. 이들은 양털 옷을 걸치고 세속적인 삶 대신 금욕생활을 통해 오로지 알라에게 헌신하는 고행의 길을 택했다. 이들은 신에게 가까이 가는 길은 오직 금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코란 구절을 반복해서 외치는 행위(디크르)나 음악과 춤을 통해 알라에게 다가가려고 했던 춤(수피댄스)을 통해 그들의 간절한 염원을 느낄 수 있다. 12세기경 이슬람 내에서 수피즘이 일종의 사회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이후 금욕주의에 머물지 않고 환희와 기쁨으로 충만한 사랑의 신비주의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사랑을 노래한 많은 시인과 성인을 배출한 수피즘은 메소포타미아,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등지로 확산되었다

지하드 Jihād ‘노력, 투쟁, 성전’이란 뜻이며, 신앙과 원리를 위한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인 투쟁을 의미한다. 최근에는 이교도들과의 물리적인 싸움을 가리키는 ‘성전’이란 의미로 많이 사용되는 실정이다. 카와리지파와 이바디파는 지하드를 6번째 기둥으로 정하고 있다.

이슬람의 다섯 기둥 Five Pillars, Arkān al-Islām 이슬람교도(무슬림)들이 준수해야만 하는 5가지 의무를 말한다. 첫 번째 기둥은 신앙 고백인 ‘샤하다(Shahādah)’이며, 두 번째 기둥이 매일 5차례 수행하는 예배인 ‘쌀라(Ṣalāh)’, 세 번째 기둥이 가난하고 빈궁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징수하는 ‘자카트(Zakāh)’이다. 네 번째 기둥은 이슬람력 아홉 번째 달인 라마단 한 달 동안의 단식인 ‘싸움(Ṣawm)’, 다섯 번째 기둥이 평생에 한 번은 수행해야 되는 메카 순례인 ‘핫즈(Ḥajj)’이다.

아단 Adhān 신도들에게 하루 5번(새벽, 정오, 오후, 저녁, 자기 전)의 예배 시간을 알리는 소리를 뜻한다. 예배 시간이 되면 무앗딘이 이슬람 사원의 첨탑(미나라)에 올라가 메카를 향해 서서 소리 높여 외치는데, 지역에 따라 리듬이 조금씩 차이가 나기도 한다.

칼리파 Khalīfah ‘후계자’란 뜻이며 예언자 무함마드가 632년 사망한 뒤 그의 지위를 계승했던 지도자를 가리킨다. 무함마드의 뒤를 이은 4명의 칼리파를 ‘정통 칼리파’라고 하며, 칼리파란 칭호는 이후 우마이야조, 압바스조에서도 사용되었다. 칼리파제는 1924년 터키 공화국에 의해 폐지되었다.

술탄 Sulṭān ‘힘, 권위, 통치, 통치자’란 뜻이며 이슬람의 최고 권위자인 칼리파가 지방 총독과 같은 통치자에게 수여하는 칭호이다. 칼리파가 정치, 군사 및 종교의 최고 지도자인 반면 술탄은 군사와 정치 권력을 의미한다. 술탄이 이슬람세계의 최고 통치자를 의미하게 된 것은 오스만제국의 무라드 1세 때부터였다. 오늘날에는 오만과 브루나이가 정부 형태로 술탄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일부 부족 지도자들이 술탄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이맘 Imām ‘지도자 또는 모범’이라는 뜻이며,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의 지도자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는 금요일에 행하는 집단 예배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수니파에서는 이슬람 교단의 지도자인 칼리파를 가리키며 종교적 기능이 아닌 행정적·정치적 기능을 담당했다. 시아파에서는 공통적으로 제4대 정통 칼리파였던 알리의 자손만을 이맘으로 인정하였다. 학식이 뛰어난 이슬람 학자를 부르는 존칭으로 사용되었다.

마흐디 Mahdī ‘인도된 자, 신에 의해 올바르게 인도된 자’를 뜻하며, ‘메시아’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은폐와 현현(또는 재림)을 특징으로 하는 마흐디 사상은 시아파의 핵심 사상이다. 알라가 874년 무함마드 알마흐디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들로부터 그를 은폐하였으며, 언젠가 마흐디가 인류를 인도하기 위해 현현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사라센 Saracen 중세 때 유럽인들이 이슬람교도(무슬림)들을 부르던 호칭이다. 그리스·로마에 살던 라틴문화권 사람들이 시리아 초원의 유목민을 사라세니(Saraceni)라고 부른 데서 연유하였다. 7세기 이슬람이 도래한 이후로는 비잔티움인(人)이 이슬람교도 전반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고, 십자군을 통하여 유럽 전역에서 사용되었다.

무어인 Moors ‘피부색이 어두운 자’란 뜻이며, 유럽에서 북아프리카 사람들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스페인에서는 아직도 아랍인을 모로(Moros)라고 부르며, 1492년 재정복 이후에도 스페인에 남아 외견상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아랍인을 모리스코스(Moriscos)라고 하였다. 유럽인의 식민지가 점점 팽창하면서 무어인이 무슬림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아졌다. 인도 남부와 스리랑카에 사는 무슬림을 흔히 ‘무어인’이라 부르고, 필리핀에 사는 무슬림 소수 민족도 ‘모로스 또는 모리스코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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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양식

모스크 Mosque 무슬림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이슬람사원을 가리키며, 아랍어로는 ‘마스지드’라고 한다. 건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모든 곳이 모스크이며, 어느 곳에서나 근행되는 예배는 효력이 동일하다고 한다. 그러나 카아바 신전이 있는 메카의 하람성원에서는 10만 배, 메디나의 예언자사원에서는 1000배, 예루살렘의 악사사원에서는 500배의 효력이 있다고 한다.

미흐랍 Miḥrāb 이슬람사원의 한 벽에 메카 방향(끼블라)으로 만들어져 있는 아치형 홈을 가리킨다. 이슬람은 우상을 금지한 대신 미흐랍을 메카 방향의 벽에 설치하고 예배의 표상으로 삼았다. 미흐랍은 예배를 인도하는 이맘이 서는 장소이기도 하며 보통은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민바르 Minbar 이맘이나 설교자가 설교하는 연단을 가리키며, 예배 방향을 가리키는 미흐랍 옆에 있다.
피슈타크 Pishitaq 직사각형 틀을 가진 이중의 아치형 입구를 가리키며, 인도에서 기원하였으나 아나톨리아와 이란의 건축 양식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서체, 아라베스크 무늬, 유약을 바른 타일로 장식되기도 한다.

미나렛 Minaret 이슬람사원(모스크, 마스지드)에 있는 첨탑을 가리키며, 아랍어의 ‘미나라(등대)’에서 유래했다. 하루 다섯 차례의 예배 시각에 무앗딘이 올라가 예배를 권유하는 아단을 하는 곳이며, 유사시에는 망루나 전망대 구실도 했다. 미나렛의 형태는 이라크의 사마라모스크와 이집트 카이로의 이븐 뚤룬모스크에 있는 나선형(말위야) 첨탑에서부터 연필 모양의 가느다란 첨탑, 4각형 첨탑 등 매우 다양하다.

끼블라 Qiblah 무슬림들이 행하는 예배의 방향을 가리키며, 이슬람 초기에는 예루살렘이었으나 이후 메카로 변경되었다. 무슬림들은 예배뿐만 아니라 짐승을 도살할 때도 죽은 자를 매장할 때도 얼굴을 메카 방향으로 향하게 한다.

이완 Iwan 3면이 벽으로 에워싸인 아치형의 현관을 가리킨다. 사산조 때 유행하였으며 이후 이슬람건축에 포함되었다.

칸 Khān 숙박시설과 무역센터의 기능을 결합한 건물을 가리킨다. 보통 ‘칸’에는 마구간, 창고, 숙박시설, 모스크가 갖추어져 있다. 현재 가장 유명한 곳은 이집트의 최대 전통 시장인 ‘칸 알칼릴리’를 들 수 있다.

아라베스크 Arabesque ‘아라비아풍’이란 뜻이며, 그리스 공예가들에게서 유래했으나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이슬람교의 특성상 살아 있는 신의 형상을 만들지 않는 대신 신을 찬미하는 의미로 매우 정교하고 정형화된 양식을 만들게 된 것이다. 문자와 식물, 기하학적인 무늬가 배합되어 독특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내며, 이슬람 장식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무까르나스 Muqarnas 이란에서 유래한 독창적인 건물 장식 방법으로서, 아랍-이슬람 건축물에서 벽과 천장이 연결되는 모퉁이에 사용되거나, 입방형의 구조물을 아치형으로 바꿔주는 연결 부위를 장식하는 데 사용된다. 무까르나스에는 쐐기를 박아 연결한 나무 조각이나 모퉁이를 둥글게 마무리하기 위해 수직적으로 배합한 석고 주조에 조각을 한 형태 등이 있고, 말벌 집의 모양이나 종유석을 닮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런 식의 아름답고 독특한 기하학적 설계는 창문이나 출입문, 미흐랍이나 돔 천장에서도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마드라사 Madrasah ‘학교’라는 뜻이며, 전통적으로 이슬람 학자인 울라마를 육성하기 위한 고등교육기관이다. 법학을 중심으로 코란학, 하디스학, 언어학과 같은 전통 학문 외에도 수학, 천문학, 의학, 철학 등의 외래 학문을 가르쳤다. 마드라사가 이슬람세계의 보편적인 제도로 자리 잡은 것은 11세기 셀죽조 때부터이며, 10~12세기에 존재한 파띠마조가 카이로에 건설했던 아즈하르모스크의 마드라사는 세계 최초의 대학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후 마드라사는 유럽 대학의 본보기가 되었는데, 대학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구분하거나 검은 가운을 입는 것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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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할랄 Ḥalāl 과 하람 Ḥarām 할랄은 ‘허용된 것, 허용할 수 있는, 합법적인’이란 뜻이며, 특히 음식 가운데 이슬람식으로 도살된 고기에 적용된다. 그 외 과일, 채소, 곡류 등 모든 식물성 음식과 어류, 어패류 등의 모든 해산물 같이 이슬람 율법 하에서 무슬림이 먹고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된 제품을 총칭한다. 반면 하람은 ‘금지된 것, 금지된, 신성한’이란 뜻이며 술과 마약류처럼 취하게 하여 정신을 흐리게 하는 것, 돼지고기와 개 등의 동물, 자연사했거나 이슬람 율법에 따라 도살되지 않은 고기들과 같이 무슬림에게 금지된 음식을 하람이라고 한다.

오른쪽과 왼쪽 아랍인은 악수를 하거나 음식을 먹을 때, 선물을 주고받을 때, 코란을 만질 때에는 반드시 오른손만을 사용하고, 왼손은 화장실에서 용변 후 씻을 때, 신발을 닦을 때, 코를 풀 때 사용한다. 잠을 잘 때도 오른쪽 방향으로 자며 왼쪽으로 자는 것을 피한다. 화장실에 갈 땐 먼저 왼발을 화장실 안으로 내딛는다. 손톱을 자를 때는 오른손 먼저, 그 다음이 왼손, 오른발, 왼발 순으로 깎는다. 칫솔질도 입안의 오른쪽부터 한다. 이러한 아랍인의 문화를 ‘오른손 사용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장례문화 아랍인은 이슬람 전통에 따라 장례식을 치르는데, 우선 고인의 몸을 씻기고 흰 천으로 감싼다. 그리고 사망 당일 매장하는데, 고인의 머리를 메카의 카아바 신전으로 향하도록 눕힌다. 보통 매장은 이른 오후 예배를 마치고 특별 장례예배 후 진행되며, 매장이 끝난 후 조문객들은 고인의 가족을 찾아가 위로한다.

마흐르 Mahr 결혼할 때 신랑이 신부에게 주는 돈으로 ‘신부값’이란 용어가 많이 사용되었으나 ‘혼례금’이란 용어를 권장한다. 이것은 만약의 경우에 대한 일종의 보험금 성격을 가지며, 신부의 고유 재산이다. 만일 이혼을 할 경우에는 신부가 혼례금의 전체를 다 가지게 되며, 초야를 치르기 전에 혼인 관계가 깨어지면 절반을 신부가 갖는다.

결혼문화 아랍인에게 결혼은 종교적 의무이자 사회적 의무이다. 아랍인이 결혼 상대자를 선택할 때는 혈연적, 종교적 동질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예전에는 사촌 간의 결혼과 무슬림 간의 결혼이 지배적이었다. 무슬림 남성은 기독교도나 유대교도 여성과 결혼할 수 있다. 만일 이교도 여성이 결혼 후에도 자신의 종교를 고수한다면 남편 사후에 상속권을 부여 받지 못한다. 한편 무슬림 여성은 무슬림 남성과만 결혼할 수 있다.

인샬라 in shā’a Allāh ‘알라가 원하신다면’이란 뜻이며, ‘인샤알라’라고 발음하는 것이 원어에 더 가깝다. 보통 미래의 예정된 행위나 약속과 함께 사용되며, 간혹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정당함으로 이해되나 기본적으로는 약속을 지키겠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라마단 Ramaḍān 이슬람력(히즈라력) 아홉 번째 달의 명칭이며, 코란이 최초로 계시된 신성한 달로서 이슬람교도(무슬림)들의 의무 단식 기간이다. 이슬람력은 태음력이기 때문에 라마단 달은 1년 중 어느 계절이나 될 수 있다. 단식하는 기간은 라마단 달 30일 동안 검은 실과 흰 실이 구분되는 새벽부터 해가 지는 낮 시간 모두가 해당된다.

하렘 Harem ‘신성한 장소, 성소, 여성, 부인’이란 뜻이며, 아랍어 ‘하림(ḥarīm)’이 터키풍으로 변형된 명칭이다. 보통 이슬람사회의 여성과 부인들이 거처하는 방을 가리키며, 특정한 상황을 제외하고 일반 남성의 출입이 금지된 장소이다.

우두 Wuḍū’ ‘세정, 소정’이란 뜻이며, 보통 정규 예배인 쌀라를 하기 전에 행하는 일정한 정화 의식이다. 우두용 물은 흐르는 물이어야 하며, 물이 없는 경우에는 모래, 흙, 돌 등을 사용하는 ‘따얌뭄’이라는 정화 의식으로 대체할 수 있다. 보통의 경우 이슬람사원 안마당에는 우두에 사용할 수 있는 분수, 샘, 수도 등이 있다.

아라비아 숫자 현재 우리들이 사용하는 1, 2, 3, 4, 5, 6, 7, 8, 9, 0의 열 자를 말한다. 원래 인도의 범어 알파벳으로부터 전와되어 아랍인이 유럽에 전파했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생겨났다. 피사노 등에 의해 개량되어 15세기 말기에 지금의 모양을 갖추게 되었고 ‘인도-아라비아숫자’라고도 한다.

터번 Turban 인도에서 비롯된 복식으로, 주로 인도인이나 이슬람교도가 머리에 둘러 감은 천을 가리킨다. 긴 천을 머리에 둘러 심한 더위를 피하고, 또 바람을 막기 위해 쓴다.

히잡 Ḥijāb ‘베일, 커튼, 휘장, 장막’ 등을 뜻하며, 무슬림 여성이 사용하는 얼굴가리개를 통칭한다. 히잡은 여성의 머리, 목을 가리지만 얼굴은 가리지 않는다. 눈만 내놓은 얼굴가리개는 ‘니깝(niqāb)’이라고 부르며 ‘부르카(burqu‘)’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체의 모든 부분을 가리며 사물을 확인할 수 있게 눈 부위만 망사로 돼 있다. 이란에서는 머리와 몸을 가리는 베일을 ‘차도르(chador)’라고 하고, 터키에서는 이를 ‘차르샤프’라고 한다.

명예살인 요르단, 이집트, 예멘 등의 이슬람국가에서 간통이나 정조 상실 등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남편이나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해당 여성을 살해하는 것을 가리킨다. 살해한 가족은 붙잡혀도 가벼운 처벌만 받기 때문에 일부 이슬람국가들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어 왔다.

할례 Circumcision 남성의 성기 일부인 포피를 제거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슬람사회에서는 할례가 의무 사항이 아닌 예언자 무함마드의 권고 사항으로 준수되고 있다. 몸을 깨끗이 해야 한다는 코란의 계율에 따라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할례를 한다.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새로운 무슬림에게는 나이에 관계없이 건강에 피해가 없는 한 할례를 권장한다. 여성의 할례는 코란과 순나(하디스) 어느 쪽에서도 권장되지 않으며, 간혹 발생하는 여성 할례는 이슬람의 전통이 아니라 아프리카 일부 부족의 전통이라 할 수 있다.

히즈라 al-Hijrah ‘이주’라는 뜻이며, 622년 예언자 무함마드가 메카 지배층의 박해를 피해 추종자들을 이끌로 메디나(당시는 야쓰립)로 이주한 사건이다. 622년을 히즈라력의 기원으로 정한 인물은 제2대 정통 칼리파인 우마르였다. 칼리파 우마르는 히즈라력의 시작을 음력인 무하르람(히즈라력의 첫 번째 달) 제1일로 했는데, 이날은 서력으로는 622년 7월 16일이다. 영어로는 ‘히즈라 기원으로’라는 뜻의 라틴어 ‘Anno Hegirae’의 머리글자인 ‘A.H.’로 표시한다. 태음력이기에 매 월이 29일, 30일로 번갈아 지나게 되며 1년이 354일이다.

아랍 서체 원어로는 ‘알캇뜨 알아라비(al-khaṭṭ al-‘arabī)’라고 하는데, 이슬람이 피조물의 형상을 그림이나 조형물로 표현하는 것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사람이나 동물을 대상으로 하는 예술이 발달하지 못했다. 반면에 기하학적인 문양과 아랍어 서체를 통한 독특한 예술이 발전하였다. 아랍어 서체는 이슬람사원이나 건축물의 벽면, 도자기, 금속이나 목제 세공품 등의 표면을 장식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가장 많이 쓰이는 아랍 서체는 쿠파체이고, 나스크체는 인쇄체로, 루끄아체, 쑬루쓰체, 페르시아체, 디완체는 필기체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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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국가 국기에 왜 초승달과 별 모양이 많은가?

이슬람 국가들의 국기는 13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중동을 지배한 오스만제국의 국기에서 유래했다. 오스만제국이 붕괴된 후 탄생한 새로운 국가들이 이를 모방해 국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스만제국의 국기는 붉은색 바탕에 하얀색 초승달과 별을 그린 것이었다. 오스만제국이 초승달과 별을 국기에 넣은 이유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기원전 4세기 비잔티움(현재의 이스탄불)이 마케도니아의 공격을 받았을 때 달빛 덕분에 성이 함락되지 않았다, 오스만제국을 건설한 오스만 베이의 꿈에 초승달과 별이 나타나 제국의 수립을 예언했다, 달의 여신 다이나와 성모 마리아의 상징인 ‘베들레헴의 별’을 나타낸다 등. 또한 초승달이 뜬 밤에 별(천사를 상징)이 내려와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계시를 내려주었다는 설과 메카에서 메디나로 무함마드가 이주(히즈라)할 때 초승달과 별이 지켜주었다는 설도 무슬림에게는 설득력이 있다.

SPECIAL FEATURE 이슬람문화의 이해

최영길 명지대 명예교수

우리는 지금 항공산업의 발달로 하루 정도면 세계 어느 나라든 못 갈 곳이 없을 정도로 지구촌 일일생활권 안에서 살고 있으며 초고속 정보통신망의 발달로 1분 이내에 세계 어느 누구와도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지구촌 한 가정, 한 가족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와 종교라는 장벽이 때로는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간 갈등과 불화를 조성하고 나아가 지구촌 이곳저곳에서 마찰과 충돌 그리고 국가와 국가 간에 전쟁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는 다행과 불행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불교, 유교 그리고 기독교문화에 친숙해졌지만 14세기 이상의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는 이슬람문화에 대해서는 너무도 모르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많다. 이슬람세계의 미술도 마찬가지다. 동상이 우상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꾸란(코란)》*의 경고에 따라 조형 및 조각미술이 발달하지 못했다. 반면 우주에 관한 사색과 연구를 강조한 《꾸란》의 가르침에 따라 기하학적 미술과 꾸란 문구를 인용한 이슬람 서체미술의 발달은 다른 미술사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절정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미술은 여전히 생소하다.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유목민 출신의 두 인물이 있다. 가장 빠른 말을 타고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한 초원의 유목민 칭기즈 칸과 가장 느린 낙타를 타고 가장 느린 속도로 가장 오랜 기간에 방대한 제국을 건설한 사막의 유목민 무함마드(우리에게는 마호메트로 알려져 있다)가 있다. 13세기 몽골에서 시작한 칭기즈 칸은 세계가 지켜본 가장 방대한 지역을 정복했으나 그 후예들은 지금의 몽골인들이 살고 있는 영토 외에는 별로 남겨놓은 것이 없다. 그러나 7세기 아라비아 반도에서 출발한 무함마드의 이슬람 회복운동은 그의 추종자에 의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왕국을 포함한 서남아시아에서부터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파키스탄 등을 포함한 중앙아시아권,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터키 등을 포함한 중동권과 이집트, 리비아, 알제리, 수단 등을 포함한 아프리카 대륙 중・북부에 걸쳐 57개 국가에 달하는 이슬람문화권을 형성했고 전 세계에 18억 무슬림을 남겨놓았다.
우리는 이슬람문화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개문화 내지는 열등한 종교문화로 받아들이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서구 방송매체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문화를 테러문화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왜곡됨 없이 세계인에게 올바르게 이해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전 세계 18억 무슬림도 자신들의 문화가 있는 그대로 이해되기를 바란다. 자기 나라의 자연환경과 역사 그리고 그 문화 속에서 생성된 문화적 가치관을 가지고 타문화를 평가하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할 때 문명의 충돌, 특히 《성경》이 밑거름이 되어 발전해 온 서구문명과 《꾸란》이 바탕이 되어 성장해 온 이슬람문명의 충돌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18억 무슬림의 문화와 종교를 이해하고 그들의 실체를 인정할 때 그들도 우리의 문화와 종교를 이해하고 우리의 실체를 인정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친구가 될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친구가 되면 그들이 우리를 찾을 것이요 그들이 우리를 자신들의 세계로 부를 것이다.

이념과 사상
전 세계 거의 모든 문화가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때로는 발전하고 때로는 퇴보 혹은 소멸했지만 이슬람문화는 14세기 동안 세계 정세와 과학문명의 발달에 따른 급속한 변화에도 아랑곳없이 그 정통성을 유지하면서 민족과 언어를 초월한 단일 공동체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슬람은 종교이기 전에 국가 또는 공동체의 체제를 유지시켜주는 자유민주주의나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와 같은 이념이요, 사상이면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 다양한 상相을 가진 생활양식이요 생활문화이다.
이슬람은 존재와 소멸의 원인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인간을 비롯해 지구・태양・우주 등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偶然이나 어떤 물질의 진화進化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존재케 한 원인자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다는 창조론이 뒷받침된 정치사상이다. 민주주의를 정치사상으로 채택한 국가와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부정하면 반체제 인사로서 제재를 받는 것처럼 이슬람사회도 그와 마찬가지다.

생활문화
이슬람사회는 《꾸란》의 가르침에 따라 동이 틀 무렵 드리는 아침예배로 하루를 시작한다. 예배의 첫 조건이 청결이어서 얼굴과 손발을 닦는다. 이슬람사회에서 세수는 우리의 일상적인 세수와 개념과 방법이 전혀 다르다. 우리의 세수 목적은 청결이요 세수 방법은 일상적인 관습이지만 그곳 사회에서의 세수는 신을 경배하기 위한 행위다. 세수를 하지 않고 드리는 예배는 신이 수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수하는 목적이 우리와 다르듯 방법과 횟수도 다르다. 의무적으로 하루에 다섯 번 예배를 드려야하므로 세수도 다섯 번 해야 하며 닦는 방법도 무함마드의 전통에 따라 오른쪽부터 시작해서 왼쪽 순으로 최소한 세 번 이상 닦아야 한다.
화장실문화도 우리와 다르다. 우리 화장실에는 휴지통이 일반적으로 오른편에 있다. 오른손으로 휴지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슬람사회의 화장실에는 휴지통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휴지를 사용하지 않고 왼쪽 손으로 물을 사용하여 닦기 때문이다. 휴지 대신 주전자나 물을 받아 사용할 수 있는 용기 혹은 물 호스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전통음식을 먹을 때는 오른손을 사용한다. 14세기 전부터 물을 사용하기 시작한 이슬람의 화장실문화가 서구의 수세식 화장실문화로 발전하고 변기 개발의 동기를 마련해주었다.
음식문화 역시 우리와 크게 다른 점이 있다. 피를 먹지 말라는 《꾸란》의 가르침에 따라 짐승을 도살하는 방법이 우리와 다르다. 피를 최대한 제거 하기 위해, 짐승을 죽인 다음 피를 받아내는 우리의 도살법과 다르게 짐승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짐승의 목, 즉 식도와 정맥을 단번에 절단하여 도살한다. 동물의 피가 식용으로 금지되어 있으니 우리가 즐겨 먹는 순대나 선지국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이유로 이슬람 국가에 쇠고기라면이나 즉석 삼계탕, 쇠고기가 들어간 조미료 등 육식 동물의 고기가 들어간 식품을 수출하려면 반드시 이슬람 도살 방법대로 도살된 고기로 만들어진 식품이어야 한다.
돼지고기 역시 《꾸란》에서 식용을 금지한다. 그 결과 이슬람 사회에 돈육산업이 전무할 수밖에 없다. 돼지상像이 들어간 상품은 기능이나 디자인에 관계없이 이슬람사회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
술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음료수로 여겨질 정도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꾸란》에 의해 술이 금지되는 이슬람사회에서는 술이 악의 근원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그곳에는 주류 생산에서부터 그와 관련한 산업이 전무할 수밖에 없고 유흥업이 성황을 이룰 수 없으며 밤거리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유흥업소의 네온사인 간판을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에게는 술과 관련한 다양한 문화와 사건사고가 있지만 그곳에는 술과 관련된 문화가 없을뿐더러 음주와 관련한 사건사고가 발생하지 않으니 음주운전 단속 경찰이 있을 필요가 없고 폭음으로 인한 술병환자가 없다.
공휴일과 명절도 우리와는 크게 다르다. 대다수 이슬람 국가에서 공휴일은 금요일이요, 이슬람 달력 라마단 한 달 동안의 단식을 종료하면서 다음 달 첫날부터 3일간이 우리의 추석명절 같은 것이요 이슬람 달력으로 12월 10일, 성경과 《꾸란》에 등장한 예언자 아브라함의 전통에 따라 가축을 도살하여 신의 제단에 바친 그날부터 3일간은 우리의 새해와 유사하다. 이슬람사회의 전통 생활문화에서는 양력에 의한 크리스마스와 신년의 기분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케르반 스페셜

아랍어 문화
아랍 출신의 무함마드가 이슬람 회복운동에 선봉적 역할을 하고 이슬람문화의 핵심이 아랍어로 기록된 《꾸란》을 일점・일획도 변질됨 없이 원본대로 보존하게 함으로써 《꾸란》의 언어인 아랍어가 인류 언어문화에서 가장 오랜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에서 시작된 이슬람 회복운동은 메디나를 최초의 이슬람국가로 탄생시키고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한 후 주변 국가로 퍼져나가면서 이슬람과 아랍어가 동시에 전파됐다. 이슬람이 전파된 곳에는 그 지역의 민족어가 차츰 사라지고 《꾸란》의 아랍어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꾸란》을 아랍어로 읽고 암기하는 이슬람 신앙생활이 아랍어 전파에 절대적 역할을 했다. 아랍 무슬림은 《꾸란》을 아랍어 최대 걸작으로 간주한다. 아랍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22개 아랍국가가 생겨나고 《꾸란》의 아랍어가 표준어가 되면서 방대한 지역 간 이해할 수 없는 사투리로 인한 분열을 막는다. 《꾸란》의 본래 언어인 아랍어가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생활언어로 남아 18억 무슬림의 종교 및 신앙생활의 공통언어로 전파된 현상을 두고 몇몇 학자는 ‘《꾸란》의 기적’이라고 말한다.
18억 무슬림의 정신세계는 절대적으로 《꾸란》의 영향을 받고 있다. 매일 다섯 번의 예배를 통하여 적게는 27번, 많게는 80번까지 《꾸란》의 일부 구절을 암기하며, 특히 라마단 금식월에는 《꾸란》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 분량을 읽거나 암기한다. 남녀노소, 학생과 스승, 농민과 도시인, 일반인과 전문가,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문맹자와 최고의 학벌을 가진 지성인과 장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604쪽에 달하는 책 한 권의 일부 또는 전 분량을 암기하고 암송하며 노래한다. 인류 역사 이래 책 한 권의 전 분량이 암기되는 유일한 책이다.

종교문화
종교로서의 이슬람은 유대교 및 기독교와 형제자매이다. 이 세 종교는 시발점이자 핵심인 존재론存在論에서 동일한 유신론有神論과 유일신唯一神 사상을 핵심 교리로 채택하고 있으며 모두 아담과 하와를 인류의 시조로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과 《꾸란》은 신이 금기한 열매를 맛본 아담과 하와의 사건에 대한 해석을 달리한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아담과 하와가 죄의 구속을 받게 되었으며 죄가 원인이 되어 땅으로 추방되고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면서 인간의 원죄설原罪說을 주장하는 것이 성경의 핵심 내용이다. 《꾸란》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신이 금기한 나무의 열매를 맛본 것은 사실이지만 고의적으로 신과의 약속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 망각에 의한 실수였다고 말한다. 또한 아담과 하와는 죄의 구속을 받고 창조되었다는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죄인이 들어갈 수 없는 천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죄의 구속을 전혀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땅으로 내려 온 것은 신을 대신하여 땅을 관리하고 다스리기 위한 신의 예정설에 따른 것으로 죄의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인간의 원선설原善說을 제시한다.
예수와 무함마드의 조상은 아브라함의 가문에서 비롯되었다. 아브라함이 본처 사라의 몸에서 자식을 얻지 못하자 하갈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여 이스마엘을 낳고 그가 무함마드의 선조가 되었으며 이스마엘이 9~11세가 되었을 때 아이를 갖지 못했던 사라의 몸에서 이삭이 태어나 예수의 선조가 된 것이다. 이스마엘과 이삭, 즉 배다른 이 두 자식을 중심으로 장자 상속권 문제와 신의 제단에 바쳐진 아들이 누구인지를 놓고 기독교와 이슬람은 서로 다른 견해를 주장함으로써 그에 따른 두 종교문화도 서로 다른 양상으로 발전했다. ●

*이슬람문화 용어사전에서는《코란》으로 표기했으나 필자의 서술방식을 살려 《꾸란》으로 적는다.

 

SPECIAL FEATURE 비 서구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영화  포스터와 스틸컷 1962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 포스터와 스틸컷 1962

강정인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서구중심주의는 서구를 예외적으로 특권화해 격상시키는 서구(유럽)예외주의와, 서구가 일방적으로 선택한 (보편적인?) 잣대에 의해 비서구문명을 격하하는 오리엔탈리즘으로 구성돼 있다.
이러한 서구예외주의는 유럽에서 근대성(또는 근대문명)의 출현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바, 세 가지 명제로 구성돼 있다. 첫째, 유럽문명에 내재한 ‘독특한’ 요소들이 유럽에서 자본주의, 산업혁명, 계몽주의, 자유주의 등 근대성의 출현을 가능케 했다. 둘째, 유럽문명은 오직 유럽 내재적인 독특한 요소에 힘입어 근대성을 ‘자생적으로’ 출현시켰다. 셋째, 근대 유럽에만 존재한 것으로 단언된 독특한 요소들은 서구 역사의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존재해 온 모종의 항구적 속성-고대 그리스문명, 로마문명, 유대교 또는 기독교 정신 등-으로부터 유래한다.
비서구사회에 대한 서구의 지식체계인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의 예외성을 여타 세계와 구분하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 《오리엔탈리즘》에서 사이드(E. Said)는 19세기 유럽의 지식인들이 주로 아랍과 이슬람 지역을 대상으로 창안한 지적 구성물을 오리엔탈리즘으로 개념화하고 이를 비판했다. 서구인이 보는 동양은 동양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부정확한 정보와 왜곡된 편견으로 가득 찬 허구일 뿐이라고 통박했다. 나아가 오리엔탈리즘에 내재된 지식과 권력(서구의 동양 지배)의 상호 불가분적인 결탁관계를 폭로했다. 즉 베이컨의 말처럼 ‘아는 것(지식)이 힘(권력)’이기도 하지만, 푸코가 갈파한 것처럼 ‘힘이 지식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은 비서구사회를 중대한 경제적·사회적·정치적·문화적 요소의 ‘부재’ 또는 ‘일탈’을 통해 설명한다(‘부재의 신화’).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서문에서 비서구문명을 과학, 역사연구, 예술, 건축, 전문화된 관리와 행정, 법치, 자본주의 등이 부재한 것으로, 나아가 자본주의를 가능케 한 ‘합리성’이 결여된 것으로 설명했다. 서구문헌에서 궁극적으로 영원한 정체상태에 있는 비서구문명은 총체적으로 ‘역사’가 없는 것으로, ‘문화’가 없는 것으로 빈번이 서술됐다.
또한 서구문명은 그들의 주된 타자인 동양을 새롭게 구성하여 ‘일탈’로 규정하는 오리엔탈리즘을 발전시켰다(‘일탈의 신화’). 그리하여 동양은 “만족시킬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아랍인의 성적 욕망” “이국적인 여성” “인파로 붐비는 시장” “신비주의적 종교” 등의 이미지를 떠안게 되었다. 나아가 경제적으로는 “아시아적 생산양식” 정치적으로는 “동양적 전제정치”라는 일탈적 범주로 구획되었다.
오늘날 서구인이 제작한 아랍이나 이슬람지역 배경의 소설, 애니메이션, 영화 등에서도 오리엔탈리즘은 보이지 않는 무대장치로 기능을 한다. 대표적으로 정지인이 엮은 책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편》에 소개된 영화이기도 한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를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아랍 민족의 독립에 적극 참여했던 영국군 장교 T. E. 로렌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로렌스는 분열된 아랍군을 통합하는 데 앞장섰고 게릴라 활동을 진두지휘해, 아카바 기습 점령,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 점령 등 혁혁한 공을 세우며 아랍민족의 영웅으로 추대되었다. 이 작품은 1963년 아카데미상 7개 부문을 휩쓸었으며, ‘세계’ 영화사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그런데 그 ‘실화’는 점차 사실이 아닌 ‘허구’인 것으로 밝혀졌다. 영국의 작가 리처드 알드링턴은 《아라비아의 로렌스: 전기적 질문》(1955)이라는 책에서 로렌스가 사기꾼이었으며 그의 공적이 부풀려졌다고 주장해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요르단의 역사학자 슐레이만 무서 역시 《T. E. 로렌스: 아랍의 관점》(1966)이라는 저서를 통해 아랍 혁명이 한 영국군의 영웅적인 활약이 아니라 수많은 아랍인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상세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밝혀냈다. 결국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서구인의 시선으로 아랍의 역사와 로렌스의 삶을 그려냈고 그 점에서 (비록 세련된 수준에서지만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을 내장하고 있었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

SPECIAL FEATURE 이슬람 현대미술의 현주소

TR.16402

미트라 타브리치안(Mitra Tabrizian) 〈테헤란 2006년(Tehran 2006)〉(5/5) 라이트젯 C-타입 인쇄 © Mitra Tabrizian © 2014 Museum Associates / Los Angeles Country Museum of Art. (위)아미르 무사비(Amir Mousavi) <잃어버린 원더랜드> 시리즈 중에서<무제, 제8번>(1/5) 광택 사진 인화지 © Amir Mousavi. Photo © 2014 Museum Associates / Los Angeles Country Museum of Art

박진아 미술사

“인간의 두뇌는 (통합이 아닌) 임의적으로 가르고 나눔으로써 세계를 이해한다”고 독일의 철학가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글로벌리즘이 정점에 도달해 승승장구하는 21세기는 지역 문화도 지정학적 구분에 따라 브랜딩하고 상품화하는 시대다. 언제부터인가 현대미술계와 미술시장은 ‘이슬람미술’ 또는 ‘아랍미술’이라는 종교적 배경이나 역사적 의미가 함축된 명칭들 대신에 ‘중동미술’이라는 한결 중립적이고 정화된 이름으로 쇄신하고 현대 시각 미술 트렌드를 마케팅하며 21세기 글로벌 문화지도를 재서술하고 있다.
전 세계 미술계가 별안간 아랍권 미술에 관심의 촉수를 세우게 된 계기는 실은 중동 지역이 대중매체를 통해 국제 시사 관심사로 떠오르면서부터였다. Y2K 밀레니엄 버그에 대한 공포가 괜한 우려로 마감되며 21세기가 기지개를 켠 직후 2001년, 뉴욕 9・11 테러를 시발로 중동 지역은 이슬람 종교의 과격화, 종파 간 분열과 내전, 정권교체 등의 소식으로 국제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일찍이 1970년대부터 시작된 레바논 내전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발발한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 이란의 녹색혁명, 알제리에서 촉발해 이집트를 거쳐 북아프리카 도처로 번진 이른바 아랍의 봄Arab Spring 민주화운동, 리비아 전 그리고 최근의 시리아 내전에 이르기까지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이라는 무대를 배경으로 아랍권의 많은 나라가 글로컬 위기에 처해 있다.

중동권 현대미술 시장을 선도하는 새 주소
아랍권 이웃 국가들과 형제들이 전쟁, 소요, 트라우마로 신음하는 사이에 아랍에미리트UAE와 카타르 등 걸프 토호국의 부유한 형제들은 산유産油경제로 축적한 막강의 국부펀드와 세계 최대 국내총생산GDP을 자랑하는 신흥 초부유국으로 떠올라 경제다각화 기치 아래 초호화 부동산 개발과 관광 및 소비 서비스 산업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었다.
막강한 부에 못지않게 걸프국들은 빠른 시일 내에 국제적인 문화도시로 발돋움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다. 카타르는 2008년 말 수도 도하에 고故 사우드 알 타니 왕자가 수집한 방대한 전통 이슬람미술 컬렉션(현 감정가격 약 16억 달러어치)을 기반으로 이슬람 박물관을 개관했다.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에서는 사디얏 문화구역에 루브르 박물관과 구겐하임 미술관 아부다비 분관이 각각 장 누벨과 프랭크 게리 두명의 스타 건축가의 설계로 2015년과 2017년 개관을 앞두고 있고, 이웃 두바이는 현재 30여 사설화랑이 각축하며 연간 3편의 현대미술페어를 주관하는 중동권 미술시장의 중심도시로 급부상했다. 아랍에미리트의 제3도시 샤르자만은 1993년 〈샤르자 현대미술 비엔날레〉를 설립해 비상업적 입장에서 중동 및 걸프권 미술계의 담론을 이끌고 있다.
그 결과 걸프국 신흥 도시들은 명실 공히 초현대식의 기상천외한 마천루로 빼곡한 도심 스카이라인과 호화 숙박 및 소비시설이 갖춰진 관광 목적지로서만 아니라 일년 내내 현대 비엔날레와 박람회 등 세간의 이목을 끄는 행사들이 번갈아 열리며 뉴욕, 런던, 마이애미에 다음가는 국제미술시장의 허브가 되었다. 크리스티 경매소가 2006년 두바이에서 중동현대미술 경매를 성공적으로 마치자, 2008년 소더비 경매소가 뒤따라 도하에 아랍/이란/터키 현대미술 경매실을 열었다. 중동 미술붐을 간파한 사치갤러리는 2009년 런던에서 〈새로운 중동 미술 베일을 벗다전〉(2009.1.30~5.9)을 열어 중동 현대미술 시장 붐을 거들었다. 최근 이곳의 현대미술 페어에는 보다 큰 시장을 찾아 중동지역에서 온 화랑들 외에도 가고시안, L&M Arts, 페이스빌덴스타인 등 국제적 메가급 화랑들도 정기적으로 참여해 피카소, 워홀, 베이컨의 20세기 블루칩 작품들을 장에 내놓고 이곳의 부유한 컬렉터들을 유혹한다.

걸프 익스프레스의 양지와 그늘
급히 먹는 밥은 체한다고 했다. 막대한 액수의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미술을 매개로 삼아 단기간에 글로벌 문화지도에 새 발자취를 남기겠다는 걸프왕국들의 노력은 분명 야심차지만 후유증도 있다. 방글라데시 태생의 문필가 슈몬 바사르Shumon Basar는 중동지역 현대미술계가 자칫 졸부의 자기망상심리를 자극해 오일머니에 눈이 먼 서구 미술시장 세력의 포로로 전락할 수 있음을 경고했다. 창조활동을 하는 미술인들 또한 급가열된 중동권 현대미술시장의 시류에 휩쓸려 외형만 서구적 무늬를 흉내 내고 내용은 공허하거나 무의미한 작품을 양산하는 데 그치기 쉽다. 영국 월간지 《아트뉴스페이퍼Artnewspaper》의 아나 소머스 콕스 편집장은 2009년 7/8월호 논평에서 돈과 명성을 찾아 이 신개척지로 몰려온 구미권 큐레이터, 평론가, 경매소, 아트딜러, 미술관 기관들이 서구중심적 시각으로 중동의 ‘현대contemporary’ 미술을 임의로 규정하고 서구적 구미에 맞는 중동권 미술가나 작품을 편애・편식하며 연약한 중동 미술계를 식민화하지나 않을까 우려했다.
실제로 미술대학에 진학하고 유럽과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고 돌아온 걸프국의 젊고 부유한 인재들은 이른바 ‘에미라티 자아정체성’ 부재를 앓고 있다. 신세대 에미라티 미술가들에게 1960~1970년대 플럭서스 운동의 영향을 받은 개념주의 선구자 하싼 샤리프Hassan Sharif가 유일한 근현대 미술계 선배로 본받을 만한 롤모델이다. 에미라티 자아정체성 부여라는 취지로 2009년 아부다비에서는 에미리트 궁전에서 〈에미라티 표현전〉(2009.1.20~4.16)이 기획돼 제2세대 UAE 출신 작가 6명의 작품을 소개하고 UAE에도 국제미술계에 자랑스럽게 내보일 수 있는 현대미술가가 존재함을 선언했다. 같은 시기 두바이에서는 사설 화랑인 엘레멘타 갤러리가 〈리-소스Re-Source전〉을 열어 UAE의 신인 미술인 10명을 소개했지만 대체로 2009년 봄 〈샤르자비엔날레〉에서 발굴된 작가들을 다시 보여주는데 그쳐 아쉬움을 남겼다.
현대미술 면에서 실질적인 미술 프로덕션은 ‘메나MENA: Middle Eastern Northern Africa’로 불리는 이란, 터키, 북아프리카 등 옛 아랍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유구한 역사를 거쳐온 메나권 미술인들은 자기정체성 모색이나 구축으로 고뇌하기보다는 거친 현실 속에서 미술가의 정당한 역할을 하고 싶어한다. 근현대 아랍권 미술계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이 벌어지고 있는 이란에서 현대미술은 대체로 전통적인 회화와 조각 위주로 ‘침착하고 단조로우며 내면지향적’인 경향을 띠나 미술가란 현실 도피를 일삼는 순진무구한 몽상가가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사회 참여를 멈추지 않는 현실참여적 직업인이다.
1979년 이란 혁명의 영향으로 지금도 이란에는 신식민주의와 페미니즘이 주축이 된 좌파 경도 성향 미술인들의 활동이 눈에 띤다. 이슬람교 규율이 일상과 공공활동을 지배함에도 불구하고 이란에서는 대중 차원의 미술 감상이 정책적으로 장려되고 있어 문화향유에 관심 많은 중산층의 주도로 현재 테헤란에는 50여 군데의 사설 미술화랑이 성업 중이다. 이란의 현대미술계는 종교적 제약을 피해가면서 창조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는데, 그렇다 보니 화랑 주인들과 전시기획자들은 전시 허가를 받기 전 이슬람교계도부의 검열을 거쳐 최종전시까지 미세조정하며 타협하는 관행에 능숙하다. 그렇다고 이를 피하기 위해 서구 미술시장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자의식이 강한 것도 특징이다.
구미권 현대미술 시장에서 찾는 ‘아랍다움’이라는 개념에 가장 강렬히 저항하는 주체도 이란 미술계다. 현재 중동의 현대미술에 대해 논평하고 작가를 발굴하는 평론가나 큐레이터들은 아랍 혹은 이슬람권 문화의 윤리적 가치관, 정치, 사회, 문화적 코드를 부여해 서구적 시각에서 해석하고 중동 현대미술이라는 정형화된 틀에 넣어 집단적으로 규정하는데 이란 미술계는 이에 대해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가 지칭한 ‘오리엔탈리즘’이라 비판한다. 예컨대 이란의 미술계 인사들은 아랍문화 속 여성문제를 부각시켜 서구 미술계에서 호평받는 망명작가 쉬린 네샤트Shirin Neshat의 사진은 서구중심 오리엔탈리즘에 편승한 ‘자기이국화Self-Excoticism’라 본다.
그런가 하면 터키의 현대미술계는 한결 서구친화적인 입장이다. 근대가 도래하기 이전까지 600여 년을 지배한 오스만 제국의 후신이나 1920년대 아타튀르크의 근대화 이후 현재까지 터키의 국민은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근대적 개념의 세속적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 유럽연합EU의 정식 가입국이 될 비전을 안고 일찍이 1987년부터 이스탄불비엔날레 재단을 발족하는 등 문화 인프라 개발에도 앞섰으나 결국 EU의 정식 가입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슬람 신도 수의 급속한 증가와 친이슬람교 성향의 에르도안 총리가 집권한 후로 현재 터키는 사회문화적으로 점점 이슬람화하는 추세다.
세속주의 원칙에 익숙한 터키 국민과 미술인들은 이슬람화가 자유로운 예술 표현과 자유방임적 미술시장 정착을 방해하고 있다고 불평한다. 실제로 <이스탄불비엔날레>를 비롯해서, 호화 사교클럽과 화랑들이 응집한 베요글루 화랑가와 <컨템포러리 이스탄불> <아트인터내셔널 이스탄불> 아트페어 조직위원회는 이슬람교 정서에 거슬리는 표현이나 논조가 담긴 작품은 전시하지 말 것과 작품 가격 경쟁을 과열시키지 말라는 정부의 당부 혹은 압력을 받고 있다. 터키의 미술인과 화랑계 인사들은 ‘조국에 표현의 자유가 없다면 이민 간다’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터키가 유럽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도 있지만 이주・이민이 쉬워진 글로벌 시대에 노마디즘과 임시변통에 능숙한 미술가들은 창조의 자유가 보장된 곳으로 떠날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일테다.

그들만의 시각적 아이덴티티를 찾아서
아랍권 현대미술 큐레이터 잭 페르세키언 Jack Persekian은 오늘날 전 세계 곳곳으로 망명 또는 이민을 가 예술활동을 하는 아랍인이 유독 많아진 원인을 1960년대 불거진 범아랍주의운동의 실패에서 찾는다. 과거 이슬람권 지역을 세속주의 사회주의로 이끌어 근대화를 꾀했던 이집트 정치가 가말 압델-나세르의 계획은 결국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반발로 좌절됐다. 그래선지 이 지역의 현대미술인들은 ‘시대의 목격자’ 역할을 자처하며 주로 사진, 비디오, 설치 등 뉴미디어를 통해 상실, 실패, 실망의 정서가 서린 기록성 강한 작업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레바논 출신의 사진가 커플인 하지토마스와 조레지Joana Hadjithomas & Khalil Joreige는 15년 넘는 내전 끝에 살아남은 자들과 유령들이 공존하며 폐허 속에서 서성이는 고국 레바논의 현실을 기록한다. 이집트 출신의 설치미술가 할라 엘쿠시Hala Elkoussy는 옛 북아프리카 아랍인들의 사라지고 잊힌 공동체에 대한 향수와 아쉬움을 표현한다. 시리아의 흐레르 사르키시언Hrair Sarkissian 역시 황량하고 건조한 사막을 배경으로 짓다말고 방치된 건축 현장을 서늘한 분위기의 컬러사진으로 담아 성장 정지당한 시리아 사회를 은유한다.
고대부터 19세기까지 유럽 역사와 운명을 함께한 북아프리카에서는 제도적인 차원에서, 특히 뉴미디어가 주가된 현대미술을 장려하는 추세다. 튀니지에서는 2011년에 인터넷상으로 <가상 비판미술전>을 시도하는 한편, 라메종디마주La maison d’image Tunis 연구소를 운영하는 등 오늘날 북아프리카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비판성 강한 미술이 전개되고 있다. 모로코는 2005년부터 무함마드 6세 국왕의 후원으로 <마라케시비엔날레>가 열리며, 최근에는 뉴 포토 뮤지엄과 트란캇 아트스페이스가 개장했다. 2014년부턴 <디지털 마라케시 페스티벌>이 열릴 계획이다. 알제리는 알제리 근현대미술관에서 국제현대미술페스티벌을 발족해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고, 말리도 2009년 <바막 사진비엔날레>를 설립해 북아프리카 현대사진과 비디오 예술 육성을 꾀하고 있다. 통치자나 이슬람교에 대한 비판은 법적으로 금지돼 표현의 자유 면에서는 제약이 있지만, 대다수 미술인은 이 대륙이 처한 보다 긴급한 문제들—경제, 관광산업, 후기 식민주의, 이민과 글로벌리즘 그리고 그 속의 자기정체성—을 미술로 논하기에도 바쁘다.
여전히 유럽 현대미술계는 서구적 컨셉추얼리즘과 아랍적 이그조티시즘이 적절히 조합된 현대 작가들에게 주목한다. 2007-2008년 보스턴 ICA 레지던시, 2009년 사치갤러리 전시, 2010년 퐁피두 전시를 통해서 소개된 알제리계 프랑스인 카더 아티아Kader Attia는 유럽과 북아프리카 문화라는 두 의자 사이를 오가며 논평하는 설치작품으로 구미 일급 화랑들과 현대미술 컬렉터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팔레스타인 혈통이면서 레바논인임을 강조하는 설치작가 모나 하툼Mona Hatoum도 서구와 아랍 사이 문화적 차이를 개념주의로 전환시킨 작품으로 주류 미술계와 시장에서 인정받고 있다. 이집트 태생인 와엘 샤우키Wael Shawky는 유럽 꼭두각시 인형으로 퍼포먼스나 설치작업을 해 글로벌 시대 종교 대 정치, 유럽 대 이슬람 세계의 대립에서 빚어진 과거사와 갈등상을 이야기로 푸는 작업을 하며, 모로코 출신의 이토 바라다Yto Barrada는 유럽으로의 불법 이민을 꿈꾸는 북아프리카인의 삶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기록해 서구가 주도한 글로벌화 프로젝트의 실패상을 지적한다.
두말 할 것 없이 현재 중동권 현대미술은 국제 미술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일본 도쿄 모리미술관은 <아랍 익스프레스전>(2012.6.16~2012.10.28)을 기획해 일본인에게 최신 현대아랍미술을 소개했다. 특히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서 UAE관이 처음 개설된 이후로 중동권 현대미술에 대한 미국의 관심도 커져서, 보스턴 파인아츠미술관은 〈이야기하는 여자전〉(2013.8.27~2014.1.12)을, 뉴욕 뉴뮤지엄은 〈여기와 다른 곳전〉
(2014.7.16~9.2)을 열었고, 현재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박물관에서도 〈이슬람 현대미술전〉이 올 2월부터 폐막일 없이 계속된다. 로스앤젤레스의 이 오픈엔드 전시가 시사하듯, 중동 현대미술의 추진적 기세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

모로코 출신의 모하메드 엘 바즈(Mohamed El Baz) 〈밤일주(La ronde de nuit)〉 2014 © Photo: Mohamed El Baz. Courtesy of Institut du Monde Arabe. Le Maroc Contemporain

모로코 출신의 모하메드 엘 바즈(Mohamed El Baz) 〈밤일주(La ronde de nuit)〉 2014 © Photo: Mohamed El Baz. Courtesy of Institut du Monde Arabe. Le Maroc Contempo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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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프로젝트 비아 아랍에미리트 자유리서치 참여

아랍에미리트의 미술현장

IMG_4295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와 아부다비에서는 3월과 11월에 각각 아트 두바이와 아부다비 아트페어가 열리고, 샤르자에서는 1993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12회를 맞는 샤르자비엔날레가 개최된다. 이와 더불어 ‘문화예술의 섬’을 목표로 아부다비의 사디야트 섬에서 대대적으로 진행 중인 미술관 프로젝트는 장 누벨이 설계한 루브르 아부다비와 프랭크 게리의 구겐하임 아부다비, 노먼 포스터의 자이드 국립박물관과 자하 하디드, 안도 다다오의 퍼포밍 아트센터와 해양박물관을 포함한다.
아부다비의 거대한 미술관 프로젝트 기획이 예술특구지역 구축에 있다면, 두바이에는 이미 많지는 않지만 당대미술을 전시하는 갤러리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 형성됐다. DIFC 게이트 빌리지와 알 쿠오즈(Al Quoz) 지역의 알세르칼 애비뉴(Alserkal Avenue)가 그곳으로 10여 개의 갤러리가 모여 있는 DIFC 게이트에는 중동지역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 기획전시를 선보이는 아트 사와(Art Sawa), 아얌 갤러리(Ayyam Gallery), 쿠아드로 파인 아트 갤러리(Cuadro Fine Art Gallery) 등과 같은 국내 갤러리들과 크리스티 두바이 사무실과 오페라 갤러리가 있다. 알세르칼 애비뉴가 위치한 알 쿠오즈는 원래 공단지역으로 이곳의 갤러리들은 빈 창고 건물들을 손봐서 전시공간으로 쓰고 있는데, 물론 그 수나 규모는 훨씬 작지만 뉴욕의 첼시나 베이징의 다산쯔를 연상시킨다. 알세르칼 애비뉴에는 아얌갤러리, 카본 12, 갤러리 IVDE(Gallery Isabelle Van Den Eynde), 그린 아트갤러리(Green Art Gallery), 그레이 노이즈(Grey Noise), 로리 샤비비(Lawrie Shabibi) 등 15개의 갤러리가 모여 있으며 인근의 모타헤단 프로젝트 등을 포함하여 30개 정도이다. 이 지역의 갤러리들이 두바이 또는 아랍에미리트에서 컨템포러리 아트 갤러리를 대표하는 공간이자 아부다비 아트나 아트 두바이는 물론 아트 바젤, 프리즈, 아모리 쇼 등의 국제적인 아트페어에 참가하여 아랍에미리트 및 중동권 작가들을 소개하고 지원한다.
샤르자 예술재단의 새로운 전시 공간은 샤르자 헤리티지 지역(Sharjah Heritage Area) 옛 건물을 훼손하지 않고 이미지에 거스름 없이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가 함께하는 모습이다. 샤르자 예술재단은 여러 예술 활동의 기회를 만들고 국내외의 협력과 교류를 추진함으로써 페르시아만 지역의 예술적 환경을 부흥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샤르자비엔날레> 개최뿐만 아니라 다양한 전시와 연계한 이벤트, 교육프로그램, 레지던시 프로그램 외에 해마다 작가와 큐레이터 등 예술계 전문가들이 모여 아이디어와 네트워크를 다지는 3월 미팅(March Meeting)과 같은 프로그램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송희정 PNCO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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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아부다비 아트 레지던시 참가

아부다비의 환대

사막_도로시경기도창작스튜디오에 있을 무렵 뭔가 새로운 곳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김현정 학예사의 제안으로 한 아트레지던시 공모에 응하게 되었고 10월에 아부다비 아트 레지던시에 참여하게 되었다. 런던 유학시절 두바이를 경유하는 노선 비행기 표 가격이 경제적이어서 가끔 두바이를 경유한 적이 있었지만, 아부다비는 2013년 그때 처음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나는 아부다비가 아랍연합국가(UAE)에 수도인 것도 그때 알았다.
아부다비에 도착했을 때 이미 4명의 한국작가가 더 있었다. 매달 각 나라를 정해서 그 나라의 작가들을 초대하는 식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이었다. 도착한 다음 날은 금요일이라 (무슬림 국가에서 금요일이 일요일과 같아서 그날은 종교적으로 휴일이다) 쉬고 토요일부터 본격적으로 관광을 하기 시작했다. 레지던시 기간은 한 달이었다. 처음 일주일은 아랍문화를 알 수 있을 법한 토속미술관이라던가 아랍현대미술관 등을 보여주고 사막도 체험하게 해주고, 그 다음주부터는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들게 하는 식이었다.(특별히 아랍문화에 대한 미술작품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이전에도 해외로 레지던시를 다녀본 적은 있지만 이처럼 관광과 음식, 그 나라 문화체험 등을 시켜주는 프로그램은 드물었다. 참 특이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도 외국에서 사람이 오면 한국문화를 못 보여줘서 안달이고 손님이 오면 환대하는데 아랍문화도 약간 우리나라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또한, 무슬림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는데, 사막의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온 점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 척박한 땅에서 석유가 나고 지금 부유하게 살고 있는 것을 모두 그들이 모시는 신이 주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재미있었던 것은 K-pop이 유명해서 그런지 한국말도 잘하고 한국문화에 관심을 가진, 아랍 젊은이가 생각보다 많다는 점이었다. 거기서 만난 정말 아름다운 소녀가 한국에서 작가가 왔다는 말을 듣고 와서 하루 종일 자기 차를 몰고 관광을 시켜주었다. 그 당시 시청률이 높았던 소지섭 주연 드라마에 대해서 한국말로 또박또박 이야기를 하는데 한국 연예인들의 스캔들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어서 놀랐다. 하여간,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을 사진으로 찍고 싶어서 4명에게 모델 제안을 했더니 그녀들은 모델이 너무너무 하고 싶지만, 아직 시집을 안간 처녀인지라 집에서 부모님이 사진 모델로 찍히는 것을 결사반대한다고 했다. 그래도 전시 오픈에 꽃과 선물을 챙겨서 와주었다. 정이 많은 사람들이라 느꼈다. 이렇게 추운 겨울날이면 가끔 그때 따스했던 아부다비의 사막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도로시엠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