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아치 : When Two Galaxies Merge,
9.8~11.22 아뜰리에 에르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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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열린 문 너머로 희미하게 겹쳐 보이는 형상들과 뚜렷한 방향 없이 깜박이는 전자음이 출력의 강도를 점차 높이기 시작했다. 밖에서 서성이던 관객들이 일제히 어둡고 비스듬한 통로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잠시 지익-직 거리는 조정을 겪고 나서) 이미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아득한 형상들과 서로 충돌하며 순식간에 폭파하듯 다시 사방으로 흩어져 내렸다. 서로 다른 소리와 형태들이 이동하면서 만들어내는 경로는, 지표에서 벗어나 가늠할 수 없는 움직임과 예측할 수 없는 장면들을 예고하며 새로운 공간으로의 이입을 꾀했다. 양아치의 개인전 〈When Two Galaxies Merge,〉의 오프닝 퍼포먼스는 그렇게 우연한 만남과 불안한 신호들이 출현하는 하나의 극장이 됐다.
극장 혹은 무대처럼 만들어진 이 일시적인 공간은 영원한 현재성을 무효화하는 잠재적 힘을 지녔다. 양아치에게 극장은 일련의 커뮤니케이션 상황이면서 잠재적 힘의 공간인 가상을 말한다. 그가 자신의 작업 전반을 아우르는 화두로 제시한 “가상-잠재적 힘”은 그간 여러 형식을 통해 실험되었는데, 한때 몰입했던 인터넷으로부터 최근의 극장 및 무대에 이르는 시공간의 특징이 불확실한 가상 세계에 대한 작가의 강한 동경을 말해준다. 예컨대, 전시 제목은 “두 개의 세계가 만날 때”라는 일련의 불확실한 상황만을 제시하고 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가 병합하는 이 엄청난 상황은 기존의 안정된 중력으로부터 벗어나 일제히 흩어져 휘발되었다가 다시 새로운 감각으로 결집하는 커뮤니케이션의 교란과 비선형적 구조로의 재편을 불러온다. 작가가 제시한 전시의 제목이 미완의 문장인 것처럼, 굳이 말하자면 그는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무대 위의 상황에 유독 집중하고 있다. 어쩌면 그가 제시한 무대야말로, 흩어져 있는 상이한 감각들이 교차함으로써 순간순간 잠재적 힘-사랑, 불면, 최면, 이동, 새, 서울, 스코어, 5G-을 발휘할 수 있는 가상의 시공이 되기 때문이다.
소리는, 이때 두 세계가 만나는 극장의 무대에서 쇠퇴해버린 감각을 회복시키는 다양한 존재의 시그널로 작용한다. 양아치는 전적으로 시지각에 의존해온 감각에 대해, 그 힘이 과연 있는지 혹은 그것이 이 세계를 여전히 끌고 갈 힘을 아직도 갖고 있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의심한다. 그리고 그는 마치 르페브르(Henri Lefebvre)가 말한 리듬분석가처럼,
소음과도 같은 웅성거림 속에서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상이한 소리의 개별 존재들을 가늠하려 한다. 또한 그것은 마수미(Brian Massumi)의 표현에 따르자면, “잠재적인 것이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방식”으로서의 소리에 귀 기울여 그 잠재적 힘이 발생시키는 예측불허의 상황, 즉 가상을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웹에 기반을 둔 미디어 아트를 실험했던 양아치는, 이미 오래전부터 미디어 자체를 일련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재인식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미디어가 자극하는 모든 감각은 때로 낯선 커뮤니케이션을 발생시키기도 하는데, 적어도 양아치에게 있어서 소리는 인식하지 못한 미지의 경험들과 직접 매개해주는 촉각적 언어로 다뤄지고 있다.
이를테면, 무대 위에는 청각적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새가 등장한다. 매달아 놓은 새장에 혼자 갇혀있던 새들은, 간혹 공간의 희미한 웅성거림을 깨고 날카로운 소리를 바깥으로 쏟아낸다. 그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두 개의 세계가 병합하면서 조각난 커뮤니케이션의 퍼즐이 우연히 맞춰지게 된다. 극장 무대 위의 새는 이따금 TV와 스피커에서 새어나오는 어떤 소리에 유독 강하게 반응하는데, 그 순간이 바로 서로 다른 세계의 불확실한 병합이 이루어지는 때다. 새의 갑작스러운 몸짓 때문에 매달린 새장이 좌우로 흔들리는 것을 가만히 서서 보고 있노라면, 강렬한 청각의 반응이 정적인 공간에 작은 진동을 일으켜 일종의 최면을 거는 것도 같다. 번뜩, 새들이 먼저 알아챈, 깜박거리는 전자음들의 존재가 숱한 웅성거림을 뚫고 귓가에 새로운 파동을 일으키니 말이다. 또한 다양한 소리들이 깜박이듯 허공에서 부딪치는 이 가상의 무대 공간은, 반쯤 열린 회전문과 같다. 두 개의 세계가 맞물려, 그 병합에 의해 서로 밀고 밀리면서 불확실하고 아득한 세계에 대한 몸의 경험을 서로가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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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안소연 |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