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 : 조각모음
8.25~9.24 아트스페이스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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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30cm의 동일한 크기의 그림이 촘촘히 붙어있는 전시장의 공기는 어쩐지 메마른 느낌이다. 서걱서걱하는 장지 결에 몇 차례 덧발라 스며든 갖은 명도의 검정이 말라붙으면서 습기는 사라졌다. 표면에는 먹과 호분을 바르고 쓸어내 그것들이 화면과 마찰하며 생긴 종이 보풀이 대신 남았다. 안개를 풀듯이, 혹은 속도를 심듯이 작가가 의식적으로 흐려놓은 화면은 기실 약한 종이 표면을 보호하기 위해 코팅제를 올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붓의 결이다. 기법으로만 보자면 아크릴 물감을 도포한 후 재차 미디엄을 올리고 수정해 화면에 여러 층이 생기는 것과 비슷한데, 그 움직임을 받는 것이 견고하지 않은 종이라는 점이 캔버스화와 차이를 만든다. 정덕현의 그림은 한국화에 기초하고 있지만 종이의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는 두 기법 ― 윤곽선을 쓰지 않고 일필로 그리는 수묵화나 밑그림을 잡고 곱게 담아내는 채색화와는 다르다.
오일의 반짝임과 형형함이 없는 단색조의 그림은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뿌연 노이즈가 낀 어제의 쇼트(short)같기도 하다. 그림에 등장하는 대상인 각종 도구, 재봉틀, 나사못, 난로, 사다리, 콘센트 등이 우리가 오랜 시간 동안 사용해 온 익숙하고 사소한 사물들이라는 점도 어제와 오늘의 경계를 흐린다. 화면은 작가가 일상에서 얻는 형상, 지척의 풍경,
그리고 마음의 상태가 더해지면 순차적으로 발생된다. 작가의 이성과 손을 차례로 통과해 앉은 정물의 구성은 개인을 중심으로 발생하는 노동과 사회적 관계에 대한 컴컴하면서도 담담한 현실 전개다. 지난 2015년 합정지구에서 열린 개인전 〈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한다〉에선 불공정한 노동사회를 견고하게 만드는 거대한 시스템에 대한 비관과 발언이 두드러졌다면, 이번 전시에서 정덕현은 본인의 사적인 상태에서부터 주변의 미시적인 것들을 관찰하는 데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지칭하거나(〈자식새끼〉) 상대에게 말을 거나(〈같이 먹자〉) 풍자하는 농조(〈선생질〉) 같은 작품 제목은 그림의 전체 맥락과 사물들 간의 관계를 정직하게 발설한다. 작가는 이 전시를 두고 여러 상황이 조각조각 나뉜 전시작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라 설명한 바 있다. 물론 지정된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쇼트(작품)들은 선형적인 내러티브를 이룬다기보다는 관람자 스스로가 구성하는 다양한 시퀀스로 분열될 것이다. 그런데 작품들이 결합해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정덕현은 일각만을 보고 사물을, 상황을, 입장을 판단하는 성급함에서 본인을 지켜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정확하게 그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신중하게 접근한다. 이를테면 생명체는 감정이 있고 그리는 순간에 그것의 정확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사물로 대할 수 있는 것들’을 그린다. 작가가 왜곡되지 않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한 건 이 때문일 것이다. 전체적인 것을 전 방위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그리기. 사물을 보는 다양한 시점을 육면체에 그린 ‘다각기둥’도 이 같은 배경에서 탄생한 신작 시리즈다. 그러므로〈조각모음〉이라는 이번 전시명은 전체(완성된 하나의 이야기)를 얻기 위해 다각적인 조각들을 모아보는 작가의 태도를 대변한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과 그것을 환기시키는 사물들을 곁에 가까이 둔다. 그리고 이 전시의 관객들은 작가가 그린 침착한 시선의 조각들을 대면했을 때 그 어떤 감정 중에서도 ‘가까움’이라는 것에 기울어 졌을 것이다. 정덕현의 그림은 가깝다. 저 너머에 있는 원경의 것이 아니라 내 눈앞에 위치한 새삼스럽지 않은 생활의 풍경이라 가깝고, 꼼꼼하게 뜯어보기에 버겁거나 요원하지 않아 가깝다. 그림 속의 구겨진 돈 쪼가리도, 밥공기도, 작업실도, 난로 있는 방도, 헛헛하게 비어있는 보풀 붙은 화면마저도 다 가까워서 관객들의 마음이 그만 센티하게 물들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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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수정 | 독립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