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그리기, 감각의 재구성

contents 2014.02. Special Feature | 그리기, 감각의 재구성

위 왼쪽・손승범 <어릿;한 지도자> 장지에 채색 163×262cm 2013
오른쪽・김현정 <고요한 숲의 계절> 캔버스에 유채 130.3×162.1cm 2013
아래・강호성 <우리 시대의 동화 신화 읽기> 비단에 채색 180×600cm 201

왼쪽 위・고권 <바람 센 날>
한지에 먹 채색 72×60cm 2013
오른쪽 위・홍수정 <Nymph Forest 2>
캔버스에 아크릴 90×90cm 2013
가운데・류노아 <고민상담 Friends>
캔버스에 유채 130×162cm 2013
아래・김보경 <그린리듬그래프> 가변크기
종이 위에 아크릴 나무 2012

위・이화평 <유린옐로우> 디지털프린트 100×240cm 2013
아래・김진욱 <4 color of bibim> 148cm(원형) 혼합재료 2013왼쪽페이지
왼쪽・이우성 <가장 빛나는 별> 캔버스에 과슈 130.3×162.2cm 2012
오른쪽・김희연 <정지한 낮> 리넨에 아크릴 193.9×372.8cm 2012

위 왼쪽・윤진초 <Reigen_burden>
모노타이프 프린트 30×21cm 2013
가운데・이단비 <관점을 달리하면 다르게
명명할 수 있는 법칙적 드로잉 3>
crystal photo frame 50×60cm 2012
아래・김범종 <엮어내기>
종이에 먹 아크릴 380×280cm
가운데 왼쪽・장종완 <천개의 눈을 가진 밤>
캔버스에 유채 90.5×118cm 2012
오른쪽・전희경 <인간되기>
캔버스 위에 아크릴 116×91cm 2013
아래・배윤환 <Playground>
캔버스에 유채 파스텔 132×223cm 2013

위・이세준 <무한을 유한 속에
담는 방법&> 캔버스에 유채
183.3×738.1cm 10pcs 2013
가운데 왼쪽・김수민
<월화수목금금금>
캔버스에 종이컵 펜 아크릴
37.9×45.5cm 2013
오른쪽・신준민 <Dal-sung Park>
캔버스에 유채 181×227cm 2013
아래 왼쪽・윤향로 <299>
offset-printing 17×26×1cm 2013
오른쪽・조은주 <Empty Space>
162.2×130.3cm
장지에 혼합재료 2012

위 왼쪽・박종찬 <구영3길 81>
박스에 아크릴 가변설치 2012
오른쪽・김민주 <휴가(休家)>
장지에 먹과 채색 130×157cm 2012
가운데・이주리 <마지막 도시>
캔버스에 펜 아크릴 227×362cm 2013
아래・박기일 <Engine 9>
캔버스에 아크릴 130×194cm 2010

왼쪽 위・김혜나 <Duvet>
캔버스에 유채 162.1×130.3cm 2013
가운데・임영주 <신목167 East>
캔버스에 유채 73×91cm 2013
아래・구지윤 <일요일 오후>
캔버스에 유채 22×27.5cm 2013
오른쪽 위・김봄 <어떤 동네-개와 고양이>
종이에 아크릴릭 64×100cm_2012
가운데・조종성 <정물화된 풍경>
장지 위에 먹 66×62.5cm 2013
아래・빈우혁 <A man is standing near ofrest>
캔버스에 유채 차콜 240×330㎝ 2013

위・김해진 <옥상> 캔버스에 유채 24×33.5cm 2012
아래・오희원 <Blind Site : White Scene> 캔버스에 유채 89.4×130.3cm 2014
내가 신진이라는 ‘표현’을 피부의 체감으로 의식하게 된 것은 2006~2007년, 미술시장의 풍경 속에서였다. 보다 빨리, 먼저 “신진”을
찾아내야 한다는 미션은 최대 마진을 추구하는 화랑들의 전략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새로운 얼굴은 곧 어린 얼굴들이었고, 화랑들
중 일부는 작가와의 파트너십이 생기기도 전에 상품을 주문하듯이 그들의 취향(?)을 신진작가에게 요구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생산
적이어야 둘의 관계를 단순한 ‘속도전’의 양상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불과 몇 년 사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시장의 거품 뒤에는 갤러리에
대한 냉소가 부풀대로 부풀어 있었다. 이제 어린 작가들도 상업 화랑에서의 작품 발표를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다. 유통에 대해 터부
(taboo)시하는 작가들의 분위기는 안타까운 일면이기도 하다. 반면 이러한 불안은 젊은 작가들에게 발표 기회를 직접 찾아 나서게 하
는 동기로 작용하면서 정부나 지자체, 기업에서 운영하는 여러 가지 작가지원제도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아마 지원제도는 작
가들이 느끼기에는 더욱 비주체자로서의 확인과 허무함이 남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최종적으로 본인이 혜택을 받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 공모제도이다. 나는 프로그램에 선발된 작가가 지원제도와 혜택을 고사했다는 이야기를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작가들 중 누구도 작가지원제도의 순기능 자체를 부정하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락의 패배감은 실체도 형체
도 확인되지 않은 음모와 부정의 유령을 좇게 만든다. 사실 사회 시스템에서 구성원 모두의 여건을 수용할 수 있는 절대의 값, 궁극의 구
현이란 처음부터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다만 주최자가 기관의 철학을 굳건히 가지고 최대한 투명하게, 객관적인 과정으로 ‘최선’의 노
력하는 것이 건강한 제도의 할 일일 것이다. 더불어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지평에서의 지원정책을 늘려가는 것이 당면한 숙제이다.
한편 이러한 현실을 제대로 겪고 있는, 나와는 (세대적 측면에서) 그리 큰 차이도 없는 20~30대의 작가(우리)들은 흔히 일컬어지는
88만원 세대다. 그들은 해결이 어려운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도 주체성을 향한 적극적인 의지를 실천하고 있다. 거부하고 도망갈 수 있
는 것이 생활이 아니듯, 승자 독식의 사회상황을 목격하는 그/그녀는 작업과 동시에 사회와 노동에 대한 의식이 강해졌다. 한국미술사
에서 작가의 삶이 그렇지 않은 시절이 있었겠냐마는 개발도상국의 그림자 속에는 상대적인 박탈감과 허무하게 끝난 기대를 반동에너
지 삼아 사회적 목소리를 내고 있는 작가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젊은 세대의 성장 통으로 치부하기에는 최근 몇 년간 지속적이
고 다소 공통적인 패턴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것은 다수의 경우 비슷한 입장과 철학을 가진 작가들의 연대로 이어지고, 연대가 잉태한
대안적인 주체로써 ‘컬렉티브’들이 태어났다. 굳이 전시 활동을 위한 물리적인 그룹이 아니더라도, 학연이나 또는 지리적 구역을 중심
으로 다수의 구성원이 참여하는 협회들과는 달리 소규모이고 주체적이다. 작가들은 작업실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네트워크를 ‘스스로’
찾아다닌다. 기획자가 되기도 하고, 공간을 운영하기도 하고, 글을 쓰거나 매거진을 만들기도 하고, 아르바이트나 노동활동을 작업으
로 끌어오기도 한다. 협업과 연대의 목적이 미술계에 대한 냉소이거나 자조적인 현실인식이거나 미학적 구현을 위한 것이거나 간에,
비주체적인 염증을 동력 삼아 활동의 외연을 치열하게 넓혀가는 움직임이다. 이러한 연대들은 ‘따로, 또 같이’, 뭉쳤다가 흩어지기를 반
복하면서 미술계에서 작가의 역할을 실감나게 만드는 활력이 되고 있다. 활동반경의 확장은 딱딱한 틀을 느슨하게 만드는 전략에서 주목할 만하다.
미술의 역사에서 작가의 가치가 사후 세대에까지 걸쳐 조명되는 경우를 보아왔지만, 지금의 작가(우리)의 운명은 살아생전에, 심지
어 학교를 마친 후 몇 년 안에 승부를 보아야 하는 경쟁, 검증을 마쳐야 하는 게임처럼 오해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적어도 작가에게 작
업은 평생에 걸친 고민해야 할 터이기 때문이다.
결국 ‘신진’은 타자에 의해 호출될 때 비로소 생겨나는 표현인가보다. (본인을 소개할 때 “저는 신진작가입니다”하는 작가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 ‘표현’으로의 신진, 제도의 기준으로서 그것의 반대말이 ‘기성’이라면, 작가라는 말 속에 이미 숙명
적으로 지고 가야 하는 태도로서 ‘신진’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신진세대들을 지켜본 입장을 짧은 글로 전한다는 것이
솔직히 망설여졌다. 순간적이거나 지엽적인 현상에 그치지 않는 그들을 나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의 문제를 생각해본다 치면 어
느 순간 별 볼 것도 없는 내 얼굴을 새삼 들여다보는 거울보기와 다를 바 없다는 식의 결론으로 허무하게 돌아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기기도 했다.
나는 나의 동료인 그들이 영원히, 지금의 순간보다는 앞으로의 미래가 궁금한 작가이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