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고산금 오마주 투 유-자본과 사랑
6.2 ~ 7.2 갤러리 바톤
남선우 | 일민미술관 큐레이터
고산금은 텍스트를 화면에 옮긴다. 이번 전시 <오마주 투 유 – 자본과 사랑>에서도 작가는 소설, 이론서, 사람 이름 등 다양한 텍스트를 작은 진주알을 이용해 옮겼다. 수십 번 칠하고 갈아내기를 반복해 만든 백색 나무판에 모조 진주를 글자 수만큼 행과 열을 맞춰 붙여나갔을 지난한 과정이 그려지는 작업들은 어떤 방대한 책의 필사본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작업들은 실은 글자가 있던 자리를 진주로 바꾸어 텍스트를 없애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진주알은 글이 있던 자리에 눌러앉아 그것이 원래 가리키고 있던 것을 지워버린다. 의미와 내용이 사라진 가지런한 화면은 그것이 원래 절절한 부성이었든(오노레 드 발자크, 《고리오 영감》), 수치와 지표에 기반을 둔 자본 분석이었든(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 모두가 악인으로 알고 있는 자의 항변이었든(빅토르 위고, 《장발장》의 자베르) 간에 이제는 모든 것을 잊어버린 듯 마냥 반짝일 뿐이다. 그 위에는 투명한 풀 한 방울 위에 진주알을 놓고 온 신경을 다해 살짝 누르기를 반복했을 작가의 미세한 제스처만 남아있다.
전시장 안에 들어선 관객은 읽을 수 없는 화면, 그러면서도 아주 섬세하고 잘 짜인 모양 때문에 더욱 답답한 희고 빛나는 화면에 둘러싸인다. 화면에 놓인 진주알들은 텍스트와 일말의 형식적 동일성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런 의미도 읽어낼 수 없다. 이는 작가가 사용한 언어의 문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백색의 판 위에서 막막하게 빛나는 불통의 진주알들은 애초에 언어가 아니다. 고산금이 만든 새로운 텍스트는 어떤 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본래의 텍스트가 몇 개의 글자로 이루어졌었다는 지푸라기 같은 힌트를 담은 흔적일 뿐이다. 작가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아니 언어가 아닌 것으로 텍스트를 바꾸어 이를 온전히 자기만의 것으로 만든다. 텍스트를 옮기는 것처럼 보였던 작업은 그것을 지우는 과정이기도 했다가 이제 텍스트의 번역,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나쁜 번역이 된다.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옮긴다’는 말이 곧 번역을 뜻한다.
언어가 사라진 화면을 바라보며 그것이 본래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내 빈곤한 언어에 억지로라도 들어맞는 생각만이 밖으로 발화될 수 있고, 그중에서 역시나 빈곤한 상대의 언어로 포착되는 것들만이 받아들여진다. 이런 세상에서 사실 모든 말하기와 듣기, 쓰기와 읽기는 나쁜 번역이다. 가령 고산금의 작업이 알아볼 수 있는 텍스트로 쓰였다 한들,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적어도 수십 번의 번역을 거쳐 돌고 돌아 도착한 텍스트는 원래 의미를 얼마나 전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원래 의미라는 것이 과연 있기는 한 것일까.
읽히기를 거부하고 차라리 빛나기만을 택한 고산금의 진주알 작업은 텍스트가 입고 있던 맞지 않는 옷을 벗기고 풀어주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여기에 글자가 있었다고, 어떤 의미가 존재했었다고 말해주는 묘비와도 같다. 이제는 고인이 되어 정말로 기호로만 남게 된 유명한 이들의 이름이 진주알로 바뀌어 비석처럼 놓여있는 〈The Name Anonymous 1〉처럼 말이다.
위 고산금 〈레미제라블2(빅토르 휴고/Penguin), 부분발췌 pp. 338-369〉(왼쪽) 나무패널에 아크릴채색 4mm 인공진주, 접착제 162×116cm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