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Focus] 윤동천 개인전 병치(竝置)-그늘
지금 지금 지금, 여기 여기 여기, 우리 우리 우리
작가 윤동천은 고도압축성장을 이룬 한국사회의 이면에 도사린 부조리와 모순을 냉철하게 진단하고 은유적으로 표현해왔다. 6월 18일부터 7월 30일까지 신세계백화점 본점 갤러리에서 열리는 윤동천의 개인전 <병치(竝置)-그늘>은 작가가 포착한 한국사회의 적나라한 얼굴이다. 설치, 사진, 오브제 등 다양한 매체를 다루며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의 작품은 시사적이고 무거운 주제를 특유의 조형어법으로 해석하고 있다. 전시의 이모저모를 동료 작가인 석영기 교수(계원예술대학교 순수미술과)와의 대담을 통해 소개한다.
석영기(이하 석) 이번 전시는 언제부터 준비 해오셨나요.
윤동천(이하 윤) 제안은 몇 년 전에 처음 있었는데, 지난해 겨울에 일정이 최종 결정됐습니다. 그러니까 지난 겨울방학 무렵부터 준비해온 셈이죠.
석 전시 제목은 언제 정하셨나요.
윤 막판에 홍보자료 내기 직전에요.(웃음) 5월 중순에 결정했어요. 그전엔 이것저것 망설임이 많았죠. 처음에는 백화점 갤러리가 재미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고객층을 생각하니 입장이 바뀌더군요. 아주 진지한 걸 보이자니 관객들이 재미없어할 것 같고, 남대문시장에서 물건을 사다 놓을까 생각도 해봤는데 내 나이에 너무 치기어린 짓 같고. (웃음) 엎치락뒤치락하다보니 시간이 좀 많이 걸렸죠. 다른 전시보다 수위조절을 하고 콘셉트를 잡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석 지난 2011년 OCI미술관 전시 때 내건 ‘탁류(濁流)’라는 제목은 비교적 선명했는데, 이번 전시제목은 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윤 ‘그늘’은 이 사회의 ‘그늘’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세대가 만들어 놓은 ‘그늘’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에서 학생들과 얘기하다보면 젊은 세대들이 우리 때보다 훨씬 더 불안해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저희 세대에게 그림 그린다는 것은 잘 먹고 잘 살겠다는 희망을 포기하고 시작한 터라 별로 불안할 게 없었어요. 못살아봤자 얼마나 더 못살겠느냐는 심정이랄까요. 그런데 요즘 젊은 친구들은 생각이 다르더군요. 웬만큼 먹고산다는 전제하에 그림을 그리는 거지 절대빈곤은 아예 상상도 못하는 것 같아요. 상대적으로 전체가 잘 살게 되니까 그 대열에서 낙오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겠지요. 사실 요즘 젊은 세대는 다들 뛰어나잖아요. 시각경험도 많고, 아는 것도 많고, 재주도 많고. 만약 제가 요즘 이 친구들하고 경쟁한다면 맥도 못 출거예요. 그런데도 무지 불안해하고 괴로워해요. 자기 신뢰도 없고, 서로 지나치게 경쟁하고. 우리 세대는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으려 열심히 일했지요. 그러면 당연히 우리 자식 세대는 잘살겠지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우리 자식들 세대는 너무 불안해하며 어쩔 줄 모르더군요. ‘삼포(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세대’, ‘잉여세대’, ‘88만원 세대’라고 칭해지는 세대 말입니다. 아! 이런 게 바로 우리세대가 만들어 놓은 ‘그늘’이구나 생각하게 됐지요. 그런데 문득 내 나이를 생각해보니, 너무 많이 먹었더라고요. 아직까지도 남 탓을 하기엔 이미 한참 쪽팔릴 나이가 됐더군요.(웃음) 철이 안 들어서였는지 여태껏 그걸 잘 몰랐어요.
석 병치(竝置)는요?
윤 병치는 방법론일 뿐입니다. 하나만 갖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뭔가를 늘어놓고 결합시키거나 대조, 반복해서 보여주는 방식 말입니다.
석 병치보다는 그늘에 방점을 찍어야겠군요.
윤 그렇습니다. 병치는 보여주는 형식, 방법론이고, 실제로는 젊은 세대에 대한 저의 자책, 반성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늘-병치’는 좀 이상하더라고요. 그래서 ‘병치-그늘’로 정했습니다.
석 20년 전부터 윤 선생의 작품을 봐왔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말씀하신 것처럼 거의 비슷한 방법론을 유지해온 것 같아요. 20여 년 전, 그러니까 이른바 민중미술 끝 무렵 작품이 대부분 사회적 문제를 현실적으로 부각시켜 서술하는 방식이었는데, 그에 반해 윤 선생님의 방법은 은유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사실적이고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무엇에 빗대어서 설명하는 방식이란 말이죠. 이런 점에서 현실적인 문제를 은유적인 방식으로 처음 제기한 작가랄까, 그 그룹의 일원으로 평가합니다. 한편 1990년대 초반 설치작품도 크게 유행했는데, 그들은 형식 자체, 물성의 연장선에서 실험정신을 표현했지 사회적 문제의식을 작품에 적극 반영하지는 않았습니다. 윤 선생님은 이 설치미술을 이용해 사회적 문제제기를 했다고도 할 수 있고, 이 또한 처음 시도한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죠.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당시 활발했던 민중미술이 퇴보하면서 사라졌다는 거죠. 서술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던 작가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정치적 문제가 다 끝나거나 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존재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다시 사회적 문제에 관심 갖는 작가가 많아진 것 같아요.
윤 제 나름대로는 은유뿐만 아니라 직유, 환유, 제유 등 여러 가지 비유법, 강조법을 써오긴 했습니다만. 결론이 나있는 뻔한 주제를 다룰 때 자주 위트, 유머, 파라독스 등의 역설적 표현을 하는 편이지요. 저는 꾀가 많아선지(웃음)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장기적으로 투자해야하는 방식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물론 종국에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소신은 있지만. 체질적으로 별로 끈기가 없는 것 같아요. 만약에 저 보고 글을 쓰라면 소설가는 못 되고 시인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때문에 직설적으로 발언하거나 정공법으로 대놓고 이야기하지 못하고 피해왔던 것 같기도 해요. 정공법으로 공감을 얻으려면 그만큼 더 정교하고, 분명하고, 설득력이 있어야 하니까요.
석 나쁘게 말하면 피한 거지만, 좋게 말하면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적인 문제를 환기시킨 거라고 할 수 있죠. 그때 민중미술 하는 분들과 같이 전시하기도 했는데…
윤 민중미술 쪽에선 제가 갖고 있는 비판의식 때문에 저를 포섭하려 했던 것 같고, 반대쪽에선 제 작업의 실험적인 측면만 보고 현대미술의 일원으로 보려고 했죠. 이렇게 양쪽으로부터 제의를 받았지만, 사실은 양쪽에서 다 저를 곱게는 안 봤죠. 어느 한편으로 확실히 입장을 정리하기 원했지만 제가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당시는 민중과 모더니즘 이 둘을 놓고 선택을 고민하는 게 현실이었죠. 하지만 이쪽 아니면 저쪽 식으로 진영을 구분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어요.
석 당시 1980년대 후반 민중미술은 미술적인 주제에 의한 구별보다는 논리, 개인적 유대감, 집단의 소속감 같은 동지애에 치우쳤다고 봐요. 사실 내부적으로는 민중미술이 상당히 다양했는데도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그 시절 활동했던 작가들이 지금은 어떤 작업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다시 돌아와, 윤 선생님의 작품들을 보면 방법론적으론 은유적인 방식을 사용했고 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죠. 미학적 측면에서 보면 이렇습니다. 미적 범주에서 보자면 숭고미 비장미 우아미 골계미가 있는데, 민중미술은 숭고미 아니면 비장미에 해당되죠. 그런데 윤 선생님의 작품에서는 우아미 아니면 골계미가 느껴집니다. 골계미의 특징은 해학, 위트, 아이러니 등인데, 특히 윤 선생님 작품은 해학적인 미적 범주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그때로서는 해학적인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작가가 드물었죠. 조선후기에는 그림뿐 아니라 판소리처럼 해학적인 예술장르가 많았지만, 사라졌고. 근대 이후 모더니즘 시기엔 우아미가 휩쓸었죠. 사회적인 문제 내용은 별로 없고 시각적인 아름다움이나 정신적인 고상함을 추구하는 차분한…. 민중미술은 숭고미 아니면 비장미가 대세였고. 이렇게 볼 때 윤 선생님의 해학적인 작품은 미적 범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죠. 조선시대 미학을 이어받았다고 하면 너무 거창한가.(웃음)
윤 제 작업을 보고 나쁘게 얘기하자면, 산만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하도 여러 가지 매체를 한꺼번에 다루고, 주제도 개인적인 것부터 사회적인 부분까지 다양하게 건드리니까요. 반면 좋게 얘기하면 실험적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요. 뭐 결국은 그 얘기가 그 얘기지만요.(웃음)
석 또 다른 지점에서 보자면 요즘은 이미지를 채집하는 방식의 작가가 많지만, 1990년대 무렵엔 그렇지 않았죠. 그런 분야에서도 윤 선생님은 선도적이었다고 봅니다.
윤 이번 전시엔 유독 이미지를 채집해서 사용하는 작업이 많이 포함되었지요. 장소가 크면 대개 페인팅을 함께 거는데, 작을 경우 단일한 인상을 주기 위해 양식을 통일하는 편입니다. 헌데 사람들은 제가 페인팅 작업을 하는 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실제로 지금까지 몇 차례 상을 받은 것도 모두 페인팅작업의 결과였는데. 제가 진정성을 갖고 열심히 해도 사람들, 특히 기자들은 위트와 유머를 앞세워 얘기해요. 아무래도 그게 더 인상적이었나 봐요. 제가 보여 지고 싶은 모습과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모습에는 차이가 있겠지요. 실제로 페인팅을 할 때는 특성상 이미지 채집보다는 더 본격적으로 작업하는데 그게 잘 부각되지 않는 편이지요.
석 그런 측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네요. 이미지를 채집하고 그 이미지를 활용하는 작가로 인식되어 있고, 그린다는 건 잘 인식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윤 상대적으로 회화작품만으로 한 전시가 최근엔 많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회화만 가지고 큰 전시를 해볼 생각이에요. 회화작업을 하면 마치 고향에 온 것 같고 설레요.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줄곧 해오던 것이었고, 한편으론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다른 작품의 프로세스는 머릿속에서 계산하고 이미 끝을 알고 만들어 가는데, 그림은 그렇지 않거든요. 제게 그림은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과정에 반응하고 끝을 찾아가는 작업이에요. 그렇다보니 전시를 준비할 때 제일 먼저 페인팅작업을 해요. 그러지 않으면 막판에 쫓기다 엉망이 되기 십상이죠. 예상할 수 있는 건 미루어도 상관없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건 미리미리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페인팅이 안 풀리면 그 전시 전체를 죽 쑤게 되죠.(웃음)
석 페인팅을 안 알아준다고 상당히 서운하신 것 같네요.(웃음) 그런데, 손재주도 좋은 것 같아요. 실험성 못지않게 완성도나 밀도 면에서도 아주 완벽하거든요. 메시지의 은유 못지않게 큰 장점이라고 봐요. 상업적 미술에서 요구하는 마감도 잘한다는 얘기죠. 사실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에게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봐요. 그런가 하면 앞서 말한 민중미술 세대와 다시 비교하자면 민중미술 작가들은 삶의 현장, 사건 현장 그 자체에서 작업했는데, 윤 선생님은 집 거실에서, 사무실에서 신문이나 TV를 보면서 작업을 한다고 할 수 있죠. 실재 그 자체가 아닌 사진이나 비디오로 찍은 2차적인 소스를 이용해 작업하는 거죠. 윤 선생님 작품 제작 방식은 그런 전환점에 위치해 있는 것 같아요. 더불어 국제적인 이슈보다는 한국 사회에 대한 관심이 큰 것 같아요. 보기 드문 경우인데, 제목도 한글로 정하고, 한글을 사랑하시나요?(웃음)
윤 작업에 대한 저의 입장은 이미 미대 입학 전에 정리됐어요. 그리고 대학생활을 거치면서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고요. 그것은 결국 ‘지금, 여기, 우리’의 문제를 다루겠다는 생각이에요. 우리나라 사람한테 보여주는데 굳이 남의 나라 말을 쓸 필요도 없고.(웃음)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우리 세대는 민중미술과 모더니즘 사이에서 선택의 고민을 강요받았죠. 그런데 민중미술은 관점과 태도는 좋은데 방법론에선 좀 그렇고, 모더니즘은 미학적인 측면에선 일정 정도 성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도대체 소통이 안 되고…, 그래서 그 사이의 접점을 찾자는 게 저의 입장이었지요. 아마 그 당시 다른 작가들도 비슷한 입장이었을 테지만.
석 1990년대, 그러니까 한국 현대미술의 전환기라 할 수 있는 시기에 본격적으로 작품을 시작하신 건데, 본인의 작품 관점에서 봤을 때, 요새 젊은 작가의 작품을 보거나 윤 선생과 비슷한 주제의 작품을 하는 작가를 볼 때 어떤 생각이 드나요. 그들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슈를 어떻게 풀어내는지 궁금할 듯해서요.
윤 글쎄요, 아주 솔직히 말해 요즘 젊은 작가의 작품을 보면 전반적으로는 “저걸 왜 하지?”, “저게 재미있나?”하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게 사실이에요. 이제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것에 누구나 동의하는 것 같고, 또 그 방향으로 가고 있기는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소통의 수단으로서 작품을 생각한다면 과연 누가 재밌어할까에 대한 고려가 먼저 있어야 할 텐데, 그들에겐 이에 대한 성찰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자신의 기호와 취향만 있지. 저는 그 지점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왜냐하면 저 자신은 남과 소통하기 위해선 작품이 한껏 친절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한편으로 또 다른 움직임이 있지요. 자기정체성을 드러내면서도 아주 깊게 사회와 연결시키는, 개인과 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연루되어 있는 작업 말입니다. 상당 기간 지속된 이런 움직임은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 사회와 돈독히 관계 맺고, 결속되어 있는 면모를 갖고 있는 것 같아 반갑기도 해요. 비교해보면 내 작업은 여전히 그냥 던지는 듯한 느낌이라서 스스로 반성도 많이 하게 되죠. 예를 들어 어떤 지역이나 사회에 몸담고 합류해서 함께 이뤄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집요하게 장기간의 프로세스 자체를 작업으로 이끌어내지도 않으니까요. 저는 여전히 전시장, 미술관 안에서 머물고 있어요. 사실 20년 전에도 어떤 인터뷰에서 “전시장보다 현장에서 이뤄지는 미술에 관심이 많다. 앞으로는 그런 작업을 더 진행할 요량이다”라고 밝히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게 막상 그렇게 잘 이뤄지지 않더라고요.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하고 수없이 벼르기만 했지요. 모두 저의 게으름과 실천력 부족이 문제겠지요.
석 현실 참여 면으로만 보면 윤 선생님의 미술은 미지근하다고도 볼 수 있죠. 그런데 작품 하나하나를 보면 다양한 볼거리, 다양한 읽을거리가 있어요. 예를 들면, <개가 달린다>라는 작품, 좀 당황스럽기도 한데, 이 작품을 보는 저도 아, 나도 개처럼 달리면서 살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스치지요.
그런데 미술 형식적인 면에서 보면, 문자와 이미지가 같이 사용되는 방식은 포스터나 일러스트레이션 같은 것이고요, 우리 전통미술에서는 문인화 같은 것이죠. 시서화 일체라고 하였는데, 시가 먼저 있고 그다음에 그 내용을 시각화하는 것이 문인화라고 할 수 있어요. 물론 지금은 일러스트레이션이라고 부르죠. 저는 이 <개가 달린다가 전통문인화 방법과 현대 일러스트레이션의 관계 속에 있다고 봐요. 문인화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자기수양의 세계죠, 반성적인 자기고찰도 포함되겠고. 일러스트레이션은 소통이 제일차적인 목적이겠고, 작가 본인의 내면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요. 이 작품에서는 자기 내면의 성찰과 소통이 동시에 보이네요. 그리고 작품 <촛불-태우다>는 기법이 독특하네요. 색감으로 보면 동판화 같기도 하고.
윤 레이저 커팅기를 이용해서 판화지 표면을 살짝 태운 거죠. 원래 레이저 커팅기는 금속판, 아크릴, 나무 등을 레이저빔으로 절단하는 것인데 그 강도를 약하게 조절해서 작품에 이용했습니다. 판화지 종류마다 타는 정도가 일정하지 않아서 시행착오를 거치느라 제작하는 데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습니다.
석 촛불도 타고 종이도 타서 완성되는 작품이군요. 주제의식과 매우 일치하는 기법이라고나 할까(웃음) 실제 불난 흔적을 보니까 촛불의 느낌이 더 다가오네요. 그리고 노란색 종이에 검은색 테두리 액자들로 이루어진 작품은 세월호 사건을 생각나게 하는군요. 너무 가슴 아파 무슨 말을 더 할 수 없네요.
윤 세월호 사건이 그 작업의 직접적인 동기지만 노란색에 대해서 저마다 다른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석 윤 선생님 작품을 보다보니 문득 작고하신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소설이 생각나요. 정치적인 주제, 사회적인 주제보다는 자신의 삶 주변의 일상을 끊임없이 지적하는 소설이죠. 기억나는 대목이 있는데, 몇 년 전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었던 내용이에요, 같은 아파트 단지 내에 부모님 집 건너편 동에 아들 내외가 사는 집이 있지요. 부모님은 밤이면 아들네 아파트 창을 바라보면서, 불이 환하면 아들네가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는구나, 불이 꺼져 있으면 아들네가 외식을 하는구나, 불이 흐릿하면 아들네가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붙이고 생일 파티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내용이죠. 뜨거운 내용은 아니지만 쓸쓸하기도 하죠. 하지만 소설가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죠. 박완서의 소설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우리의 삶을 다루듯이,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미술을 잘 모르시는 분들도 그냥 천천히 보면서 같이 느끼고, 이해하며, 공감할 수 있는 우리의 삶을 다루고 있다고 봐요. 미지근하지만 20년 이상 묵은 관록에서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진행 정리・이준희 편집장
윤동천(오른쪽)은 1957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크랜브룩 아카데미 오브 아트를 졸업했다. 1988년 갤러리 현대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8회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제1회 토탈미술상(1991), 제11회 석남미술상(1992) 제4회 국제 아시아 유럽 비엔날레 금상(1992)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석영기는 1960년 태어나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파리 8대학 조형미술과와 뉴욕주립대 판화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에서 첫 개인전 <컴퓨터사진판화전>(도올갤러리 1991)을 비롯해 <복제미술전>(자하문미술관 1992), <박정희, 박찬호, 그리고 15대 대선-컴퓨터 판화전>(담갤러리 1997), <박정희전>(표화랑 2001) 등 20여 회 개인전을 열었다. 현재 계원예술대학교 순수미술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모음집(母音集)-모이다(1933 한글맞춤법통일안에 의한,)> c-print 110×550cm(총 20점, 각각 55×55cm) 2014
<정치가기성세대를 위한 도구들>(왼쪽) 종이위에 레이저 76×56cm 2014
각종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도구들을 시각화하였는데, 뻔한 내용이지만 결국은 우리들을 꾸짖어 달라는, 때려 달라는, 질책하고 벌하라는 얘기이다.
<삶의 무게> 시트지, 신문, 폐지, 병, 캐리어 272×436×140cm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