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홍순환 – 중력의 구조

홍순환  __  중력의 구조

자하미술관 10.10~11.2

존재는 안정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몸에 탈이 나면 몸이 알아서 자가진단을 하고 자가 치유를 하는데, 여기에 착안한 것이 자연치유요법이고 대체의학이다. 몸이 그렇고 마음도 그런데,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라면 기억을 왜곡시키고 없는 기억도 만들어내는 자기암시 내지 자기최면 내지 자기합리화가 그것이다. 몸이 그렇고 마음이 그렇고 사회도 그런데, 체제의 안정을 위해서 사회는 변화보다는 기꺼이 정체를 선택한다. 정체를 보존하기 위해서 사회는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고, 때론 이데올로기를 급조하기도 한다. 그렇게 모든 급진적인 것은 체제안정을 위해 흡수된다. 혁명의 기억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시들해지고, 아방가르드는 자본주의에 흡수된다. 이처럼 존재는 안정성을 추구하고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경향은 지구에도 있는데, 중력이 그것이다. 홍순환은 중력의 구조를 주제로 중력을 그리고 설치한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중력은 그저 지구가 사물을 끌어당기는 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안정성을 추구하고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존재의 경향성과 같은, 포괄적인 의미를 아우른다.
중력은 아래로 흐른다. 벽에 매달린 튜브다발처럼. 가지런히 벗어놓은 드레스처럼. 벗겨진 옷의 중력이 잠재적인 에로스를 욕망한다. 그러므로 중력은 욕망에 연동되고 에로스를 지향한다. 그리고 사각의 스펀지가 물을 욕망한다. 미니멀리즘의 구조와 반복과 패턴을 전유하면서. 한편으로 벽 아래쪽으로 흘러내려 쌓인 분필가루에는 먼지가 섞여있고, 벌인지 파리인지 모를 죽은 사체가 중력의 법칙에 순응하고 있다. 중력의 법칙은 캔버스에 바른 물감이 아래쪽으로 흘러내려 맺힌, 그리고 그렇게 비정형의 얼룩을 만드는, 그리고 그 얼룩이 관객에게 어떤 잠재적인 공감을 자아내는 경우와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처럼 중력은 물리적인(역학), 심리적인(욕망), 그리고 미술사적인(전유) 현상에 연동된다. 그리고 중력은 확성기로 대리되는 이데올로기와 프로파간다와 같은 사회학적 의미에 연동되기도 한다. 사람들의 의식을 짓누르고 무의식을 파고들어 자기를 실현하려는 제도의 관성에 중력이 작동되고 있는 것. 그리고 중력은 시간에도 작용한다. 작가는 벼룩시장에서, 아마도 가족사진이지 싶은, 슬라이드 필름 한 다발을 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필름을 사진으로 현상했다. 그렇게 모르는 사람들이, 익명의 주체들이, 어쩜 이미 죽었을지도 모를 혼령들이 되살아났다(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이 죽음이라고 했다). 그 유령들은 과거에 속한다. 시간적으로 과거는 현재에 중력이 작용한 결과로 볼 수가 있겠다. 현재에 연동된, 잠재된 현재며 현재의 침전물로 볼 수가 있을 것.
이런 중력 작용에 작가는 반기를 드는 제스처를 슬쩍 밀어 넣는다. 거의 눈에 띄지 않게 공중에 떠있는 카펫과 바닥에 고인 액체와 그것을 비추는 조명이 그것이다. 특히 바닥에 고인 액체는 중력의 결과랄 수 있겠고, 그 액체는 조명이 비추는 열을 받아 휘발될 것이다. 그렇게 휘발되는 액체가 중력에 반하는 실천논리를 암시하고 있는 것. 이로써 작가는 어쩜 중력으로 나타난 물리적 현상을 인문학으로 전유하는, 인문학의 배경으로서의 유물론을 증명하는, 그런 형식실험을 꾀하고 있는 것 같다.
고충환·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