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TOPIC | TOKYO Simon Fujiwara < White D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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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도쿄 오페라 시티 아트 갤러리 전시광경 Installation view at Tokyo Opera City Art Gallery 2016 ⓒ Simon Fujiwara courtesy of the artist and TARO NASU photograph: MISHIMA Ichiro 아래 < Untitled(Plum Tree) > 2016 ⓒ Simon Fujiwara courtesy of the artist and TARO NASU photograph: MISHIMA Ichiro

사이먼 후지와라의 개인전 타이틀이 왜 <화이트 데이>(도쿄 오페라 시티 아트 갤러리, 1.16~3.27)로 명명되었는지 전시장에 들어서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세속적이며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이른바 ‘화이트 데이’는 그야말로 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현대 소비사회가 만들어낸 극단화된 ‘감정 소비’의 한 단면이다. 지금을 정의하는 요소인 역사, 사회, 정치, 문화 등을 바라보는 후지와라의 시선은 직접적이기도 하지만, 타인의 시선을 빌리기도 한다. 따라서 그의 하얀 전시장은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그 누구의 시선도 수용하는 거대한 용기(容器)처럼 보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비추는 거울

마정연 미술비평

1982년 런던에서 태어난 사이먼 후지와라 (Simon Fujiwara)는 케임브리지 대학과 프랑크푸르트 국립조형미술대학에서 건축과 미술을 전공한 뒤 베를린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다. 2010년에 프리즈 아트페어에서 카르티에상을, 같은 해 아트바젤에서 바로워즈상을 수상하고 2012년 테이트 세인트 이브스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여는 등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이 젊은 작가는, 베니스 비엔날레, 상파울루 비엔날레, 싱가포르 비엔날레, 타이베이 비엔날레, 상하이 비엔날레 등의 국제전과 파리 퐁피두센터, 런던 헤이워즈갤러리,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등에서 열린 그룹전에 참가했다.
2016년 1월 16일부터 3월 27일까지 신주쿠에 위치한 도쿄 오페라 시티 아트 갤러리에서 가 개최 중이다. 2012년 광주비엔날레에 이어 이듬해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개인전을 통해 소개된 바 있기 때문에, 건축가인 일본인 아버지와 무용가인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그의 출생 배경이나 게이로서의 성적 아이덴티티는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다만 후지와라가 일본에서 미술관 규모의 개인전을 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에 대해 의외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적지 않을까 싶다. 큐레이터 시노부 노무라가 개인전을 제안, 후지와라의 승낙을 받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의 일이었다고 한다.
본 전시의 타이틀은 기획 초기 단계에서 이미 유력한 안이었다는 화이트데이. 설마 그럴리야 없겠지 생각하는 그 화이트데이가 맞다. 작가는 왜 이 단어에 주목했을까? 그는 사랑과 감사라는 행복과 가장 밀접한 감정을 초콜릿이나 선물 교환을 통해 표현하는 풍습을 개인의 감정과 소비를 연관시킨 시스템의 성공적인 사례라고 보았다. 본 전시에서 작품으로 제시된 제품(product)의 생산 과정과 디스플레이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해당 미술관에서 그간 열린 다른 전시들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설정된 동선을 따라가면 새하얀 카페트가 깔린 긴 통로로 이어진다. 오프닝 직후 관객들의 마음속에는 막 내린 눈길을 처음 걷는 것 같은 설렘과 죄책감이 교차했다. 스포트라이트가 두 개의 사물을 비추고 있다. 하나는 영국의 고급 백화점 쇼핑백에 담긴 모피, 또 하나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 꽃봉오리가 맺힌 매화나무 가지로 그 주변에는 동전들이 흩어져있다. 일반 시민의 손이 닿지 않는 고급 백화점이 몰락한 광산업과 섬유 산업의 도시에서 시작되었다는 아이러니와, 작은 대가를 지불하고 큰 보상을 기원하는 인간의 욕망이 담긴 동전을 던지고 기도하는 신사의 풍습이 후지와라가 보여줄 자본주의 사회의 단면들을 예고하고 있다.
동전들을 따라간 곳 역시 새하얀 공간이다. 곳곳에 구멍이 뚫린 바닥의 흰 카페트는 물론, 화이트큐브의 특징인 흰 벽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 전시장 공간의 약 절반이 여백에 가깝게 활용되었다는 점이 새롭다. 익숙한 동전들 사이에 19세기 멕시코의 플랜테이션에서 사용되던 자체 화폐와 일본이 점령 중인 필리핀에서 발행해 종전(終戰)과 동시에 쓸모없는 종잇장이 되어버린 지폐로 만든 부채가 눈에 띈다. 식민지배가 계속될 거라 믿은 일본과 식민지배의 잔재를 취미생활로 연결시키는 필리핀인들에게서 각기 다른 낙관주의를 볼 수 있다. 화폐는 바닥에 놓인 구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가면, 나치가 ‘예술행위’로서 파괴한 탑의 고철을 덧댄 탭댄스 슈즈, 그리고 독수리의 모티프로 이어진다. 독일의 동물원에서 가져온 독수리 석조와 미술관 소장품에서 차용한 독수리의 그림에서 동서양이 공유하는 권력의 상징을, 전후 나치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훼손해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게 된 독일 지하철의 독수리 부조에서 권력과 역사에 대한 태도를 읽어낼 수 있다.
권력과 역사에 대한 시선은 북한의 만수대예술단 화가들에게 의뢰, 제작한 회화작품 시리즈 (2015)로 이어진다. 공식적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북한에는 신선한 우유가 유통되지 않는다고 하니 이 화가들은 본 적이 없는 소재를 하이퍼리얼리즘으로 그린 셈이다. 우유라기에는 너무나 ‘위대한’ 그림 뒤에는 거대한 명함이 걸려 있는데, 읽어보면 전형적인 중소기업의 말단 영업사원임을 알 수 있다. 아무도 원치 않는 명함을 건네며,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이 남자는 24시간 내내 일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힌 일본 사회의 가장 작은 부품이다. 후지와라는 각기 다른 높이로 천장에 걸린 캔버스와 패널, 모니터가 겹치는 이 공간을 일본 건축의 특징인 장지 미닫이문에서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전시회장 중앙에는 투명한 작업실이 설치되어, 흰 가운을 입은 스태프가 수작업으로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2015~) 시리즈는 모피 표면의 털을 제거함으로써 드러난 피부를 캔버스화한 작품이다. 후지와라는 털로 덮여있을 때는 럭셔리한 상품이었던 모피가 생물학적 속성을 감추지 못하는 죽은 짐승의 피부로 돌아가는 과정이나 결과에 대해 특정 문화권과 사회계층에 속한 관객들의 반응이 매우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짐승의 피부 건너편 전시실에는 권력의 피부가 전시되어 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강한 여성이라고 인식되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수상의 피부다. 그녀의 메이크업을 담당하고 있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의뢰해 메르켈이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파운데이션으로 색칠한 리넨을 캔버스에 고정한 작품 (2015)은 권력자의 겉껍데기와 미디어를 통해 주입된 권위의 피상성을 언급한다.
또 한 명의 강한 여성,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2020년 도쿄올림픽 국립경기장 모델이 뒤집힌 채 전시되어 있다. 제목은 (2016). 우연의 일치이지만, 본 전시의 담당 큐레이터는 국립경기장 건립 백지화 논란이 일어나기 전인 2014년에 하디드의 첫 개인전을 담당했었다. ‘배송 사고로 더럽혀진 부분을 가리기 위해’ 오프닝과 전시 첫날에는 작품 위에 생오징어가 놓여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투명한 흰색으로 변해가는 죽은 오징어의 피부는, 오징어라는 별명을 가진 하디드의 건축에 대한 야유와 국립경기장 사태를 둘러싼 국민적 수치심을 연상시킨다. 후지와라는, 일본 사회가 문제를 지우고 숨기는 것이 아니라 그 더러움과 얼룩을 직면하고, 거기서 의미를 찾아나가길 바란다고 말한다.
강한 두 여성 사이로 보이는 것는 익명의 소녀들이다. 2011년의 런던 폭동에 참여해 체포된 빈곤층의 16세 소녀 레베카는 2주간의 갱생 지도 여행으로 세계의 공장인 중국에 보내져 대량생산공정과 수천 년 전 대량생산되어 진시황릉에 묻힌 테라코타 군대를 견학한다. 여행의 끝에 그녀를 같은 방식으로 대량 복제해 만든 것이 테라코타 색의 석고상 시리즈 (2012)다. 현재까지 약 130명의 레베카가 제작되었는데 그 가운데 약 100명이 전시에 참여했다.

형식적 제약이 없는 것이 미술
두 번째 전시실에서 레베카들이 바라보고 있는 영상의 제목은 (2015)다. 새하얗게 표백된 공간에서 석고 조각상의 받침대 위에 앉아 쓰레기를 주우며 살아가는 자신의 가족과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는 마리아의 스페인어는 음악처럼 아름답다. 그녀는 실존하는 인물인가? 실제와 거의 구분되지 않는 3D CG의 손이 화면을 터치하고 넘기고 고정하고 있기 때문에 마리아조차 CG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그곳에 또 다른 창이 뜨고, 3D CG의 손을 제작한 독일인 막스의 인터뷰가 시작된다. 그 역시 일상적인 행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카메라가 조금 물러섰을 때, 영상을 보고 있는 관객들이 거의 동시에 순간적으로 움찔하고, 그 직후 조심스럽게 주변의 시선을 살핀다. 막스가 팔이 없는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장면이 스쳐갔기 때문이다.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한 심리적 동요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게끔 교육받은 일본인들이 여지껏 의식한 적 없었던 행복에 대한 고정 관념과 그 잠재된 폭력성을 자각하는 순간이다.
영상 속에는 쓰레기 분리수거통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뒤돌아 보면 영상을 지켜보고 있는 레베카들 사이에도 같은 형태의 검은 오브제가 늘어서 있다. 이들의 타이틀은 (2015), 독일어로 ‘나’를 의미하는 단어다. 사회 전체의 생산소비 사이클의 일부분인 개인이 그 시스템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수행해야 하는 분리의 윤리는 독일 사회 속에 200종류가 넘는 분리수거통이라는 형태로 존재한다. 작가가 무기를 연상시키는 검은 동으로 색을 덧칠한 순간, 쓰레기통은 인종 분리를 둘러싼 20세기의 트라우마를 상기시키는 장치로 변모한다.
혼인에 의한 인종 간 유전자의 교환에 대한 인식은 서서히 변화해왔다. 일본어에서는 혼혈을 의미하는 단어로 영어의 ‘하프(half)’가 쓰인다. 누군가를 ‘반쪽’ 취급하는 차별어인 줄 알았던 이 단어는 독특한 선천적 매력을 갖고 있다는 뉘앙스로도 사용되는 일상용어이다. 일본 사회는 혼혈에 대해 얼마만큼 관용적인가. 전시장 바닥의 카페트가 잘려나간 부분 사이로 보이는 얼굴의 주인공은 아프리카계 혈통을 받은 혼혈이라는 이유로 일본을 대표하는 미인이 될 수 없다는 논란을 불러일으킨 미야모토 에리아나이다. 관객들은 ‘순수한 일본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의 위기를 가져온 ‘검은 미인’의 얼굴 위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거대한 눈은 아름다움의 조건으로 손꼽혀 온 하얀 피부의 정치성을 고발한다.
아름다움의 정치성이라는 면에서 후지와라의 소속 갤러리 타로 나스(TARO NASU)에서 동시 개최되고 있는 전시 을 언급하고 싶다. 미키모토가 발명한 양식진주에는 인공적으로 삽입된 이물질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조개의 자기치료 시간이 응축되어 있다. 순결과 원만함의 상징이기도 한 이 하얀 보석은, 남성이 혼인을 약속하는 증거로 여성에게 건네는 보석으로 사랑받아왔다. 조개에 이물질을 삽입하는 장면을 표현한 조형물에서 잔혹함을 느끼는 것은 감성의 문제이겠지만, 성인 여성이라면 산부인과의 금속 의료기구가 몸 안에 들어오는 차가운 이물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작가가 직접 진주를 삼키고 X선 사진을 찍은 작품 (2015)을 선보인 이 전시는 화이트데이와 더불어 일본의 발명품인 양식진주를 통해, 인공과 자연 사이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폭력성 그리고 폭력적인 아름다움을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
후지와라는 한 인터뷰에서 무엇인가를 온전히 완성하는 것을 꺼려 온 자신에게 형식적인 제약이 없는 분야가 미술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현대미술에 정해진 형식이 없다는 말은 곧 모든 형식을 가진 분야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본 전시에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하나의 작품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캡션 없이 뒤섞여 있는 오브제, 캔버스, 설치, 조각, 영상들은 각기 다른 개념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철저하게 계산해서 배치한 것은 작가지만, 개념 간의 연상을 통해 이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성을 발견해내는 것은 온전히 보는 이의 몫이다. 이 비결정성이야말로,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작품 기능을 하는 의 본질적인 힘이다.
출품작 가운데는 큐레이터인 노무라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그녀가 다니던 유치원에는 아이가 동물원에서 본 동물 중 마음에 드는 동물을 그리고, 아이의 어머니가 그 그림을 보고 만든 인형을 크리스마스에 선물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고 한다. 유치원의 선생님은 아이가 보라색으로 그린 봉고가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는 대신, 어머니가 따라 만든 인형의 꼬리 부분이 그림과 조금 다르니 고쳐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후지와라는 크게 기뻐하며 그림과 인형을 빌려 (2009~2013)와 의 사이에 배치했다. 단 하나의 잣대를 강요하지 않고 아이가 보는 세상의 리얼리티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시점, 옳고 그름의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는 다양한 가치관이야말로 ‘반쪽’의 일본인인 작가가 일본 사회 전체에 보내는 메시지가 아닐까. 이 전시를 통해 후지와라라는 아티스트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듣고, 그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인지 아주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그를 다시 만날 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