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Report] Alibis – Sigmar Polke 1963-2010

지그마르 폴케(Sigmar Polke, 1941~2010). 69세를 일기로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그의 이름이 현대미술에서 차지하는 무게감은 남다르다. ‘작가의 작가’로 불리며 지독한 실험정신으로 무장했던 그를 회고하는 전시 <알리바이 1963-2010(Alibis 1963-2010)>(MoMA, 4.19~8.3)가 열렸다. 그의 작품 약 250점을 선보인 이 전시는 왜 지금 우리가 폴케를 되돌아 봐야 하는지에 답하고 있다.

현자의 돌을 찾으려 한 연금술사의 행적

서상숙  미술사

지난 2010년 오랜 암투병 끝에 69세를 일기로 숨진 독일작가 지그마르 폴케(Sigmar Polke, 1941~2010) 회고전, <알리바이 1963-2010(Alibis 1963-2010)>이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모던미술관(MoMA, Museum of Modern Art)에서 석 달 반의 전시 일정을 마치고 8월 3일 폐막한다. 폴케가 작품을 준비하며 기록한 메모나 스케치를 볼 수 있는 노트북과 스케치북을 포함, 250여 점의 작품이 연대기순으로 전시되고 있다.
<알리바이전>은 폴케가 세상을 뜨기 전 기획된 전시다. 폴케는 모마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대규모 회고전을 기획한다는 것을 알았고 초기 준비단계에 참여했다고 한다. 만약 그가 살아있었다면 어떤 작품을 선정했고 어떻게 디스플레이 하기를 원했을까 하는 아쉬움을 전시장을 도는 내내 떨쳐버리기가 힘들었다. 그는 색깔 하나하나까지 자신이 직접 만들어 썼으며 작업실에 조수를 두지 않고 직접 작품을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까다로운 절충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이 전시는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며 끊임없는 실험정신으로 생애의 마지막까지 새로운 재료와 방법을 탐구했던 폴케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함으로써 지난 4월 19일 개막 이후 관심이 끊이지 않았다.
폴케는 만화 같은 드로잉과 코믹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 그리고 늘 웃음을 머금고 있는 듯한 자신의 이미지로 ‘익살꾼’이라고도 불렸다. 나치 치하에 태어나 어린 시절 서독으로 망명했고 분단국가와 히틀러, 대량 학살이라는 치욕의 역사를 살아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위트와 유머 그리고 풍자가 곁들인 작품으로 독일을 대표하는 전후작가로 자리매김한 폴케는 그러나 독일 분단의 역사를 빼고는 논의가 되지 않는다.
‘알리바이(현장부재증명)’라는 전시 타이틀 역시 ‘나는 아무것도 못봤다’라는 뜻으로 나치의 만행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침묵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진공 속에서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시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그의 말처럼 역사성과 시대성에 대한 인식은 그의 작품의 중요한 주제였다.
폴케는 그와 함께 전후독일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히는 게르하르트 리히터(1932~ )가 전통적인 의미의 회화를 통해 그 명성을 쌓은 것과는 반대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진, 필름, 옷감, 비소 등 화학물질을 비롯 과일과 채소, 심지어 달팽이까지 이용한 색채실험, 유리, 미술사, 정치사회적 풍자, 신문과 광고이미지 등 다양한 주제와 방법을 통해 작품을 제작하였다.
MoMA의 이번 회고전 역시 어느 한 작가의 개인전이 아니라 그룹전에 온 듯한 느낌을 받을 만큼 각기 다른 스타일의 페인팅은 물론 퍼포먼스, 판화, 스테인드글라스, 비디오, 사진, 조각, 인스톨레이션 아트까지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전시장을 채우고 있다. 이 다양한 양식뿐만이 아니라 팝, 신표현주의, 개념미술, 옵아트, 포스트 페인터리 추상, 신구상주의, 후기 색채추상주의 등 지난 20세기 중반이후에 일어난 모든 미술운동이 여기저기에 각각 돌출하고 있다. 이 같은 실험정신으로 폴케는 자주 ‘미술계의 연금술사’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한동안 완성되지 않은 듯한 작품, 모방한 듯한 작품, 기회주의적 작업, 독창적인 스타일을 정립하지 못한 작가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이 실천되고 정립되어가던 20세기 후반을 거쳐 21세기로 접어들면서 폴케의 작업은 제2, 제3의 커리어로 불리는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제 그의 작품은 장르와 형식, 그리고 중심이 해체, 변형, 혼합되고 결합될 수 있으며 어프로프리에이션이라는 모방의 개념 역시 하나의 방법으로 인정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으로 새롭게 검증받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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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케전이 시작되는 2층 아트리움에 들어서면 <감자 하우스(Potato House)>(1967)라는 설치작업이 눈에 들어온다. 미니멀리즘 건축처럼 나무판을 십자형으로 묶어 간결하게 지어진 이 구조물에 가까이 가면 감자가 구조물 전체에 달려 싹이 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감자판은 근처의 벽에 걸린 평면작업 <감자 드로잉(Potato Drawing)>(1969~70)에도 붙어 있다.
폴케는 동독의 올레스(현 폴란드 올레슈니차)에서 태어나 4살 때 가족과 함께 나치와 러시아의 침공을 피해 튜빙겐으로 도망갔다가 1953년 동베를린에서 기차를 타고 서베를린으로 망명했다. 당시 12세이던 폴케는 평범한 가족여행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자는 척했다고 전해진다. 그후 폴케는 당시 독일 현대미술의 중심지였던 뒤셀도르프에 정착하면서 미술에 대한 관심을 키우게 된다.
1958년 2차세계대전 이후 첫 다다 전시가 열린 곳이 뒤셀도르프이고 1960년에는 로버트 라우센버그, 사이 톰블리 등 미국작가들의 작품이 상업갤러리에 전시되기 시작했으며 1962년에는 조지 마치우나스, 백남준, 요셉 보이스, 오코 요노 등이 참여한 전위예술그룹인 플럭서스가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폴케는 18세이던 1959년부터 1960년까지 2년 동안 뒤셀도르프의 한 스테인드글라스 공장에서 일하면서 이 같은 새로운 미술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고 1961년 요셉 보이스가 교수로 재직하던 뒤셀도르프 미술학교에 입학한다. 폴케는 후에 요셉 보이스에 대해 새롭고 다양한 미술의 매체 (미디엄)를 제시하고 ‘예술이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재조명한 “나의 영웅”이라면서 그의 예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밝혔다. 폴케의 전 작품에 흐르는 다다의 영향과 실험적인 매체의 이용, 사회적 운동으로서의 미술에 대한 개념은 이때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젤라틴 실버 프린트 18×23.9cm 1975 폴케의 이 자화상은 1975년 뒤셀도르프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찍은 사진이다. 1970년대는 마약과 명상, 그리고 섹스 웨이브의 시기였으며 폴케는 당시의 젊은이들처럼 카메라를 들고 세계여행을 떠났다. 이때 찍은 사진은 그의 작품에 수시로 이용된다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Acquired through the generosity of Edgar Wachenheim III and Ronald S. Lauder © 2014 Estate of Sigmar Polke/Artists Rights Society(ARS), New York/VG Bild-Kunst, Bonn

<무제> 젤라틴 실버 프린트 18×23.9cm 1975 폴케의 이 자화상은 1975년 뒤셀도르프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찍은 사진이다. 1970년대는 마약과 명상, 그리고 섹스 웨이브의 시기였으며 폴케는 당시의 젊은이들처럼 카메라를 들고 세계여행을 떠났다. 이때 찍은 사진은 그의 작품에 수시로 이용된다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Acquired through the generosity of Edgar Wachenheim III and Ronald S. Lauder © 2014 Estate of Sigmar Polke/Artists Rights Society(ARS), New York/VG Bild-Kunst, Bonn

 

 

작업실이라는 실험실
1963년에는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만난 게르하르트 리히터와 콘라드 뤼그(Konrad Lueg), 만프레드 쿠트너(Manfred Kuttner)와 전시를 갖게 된다. 당시 리히터는 동독에서 넘어온 피난민들에게 주어지는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었고 후에 휘셔(Fisher)로 성을 바꾸고 갤러리스트로 변신한 뤼그는 우편국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폴케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팔아 생활비를 벌던 시절이었다. 가구가게를 빌려 전시를 연 이들은 보도자료를 통해 “독일 팝아트를 소개하는 첫 전시”라고 밝히고 자신들의 작업을 ‘자본주의적 사실주의(Capitalist Realism)’라고 명명했다. 동독에서 망명한 작가들로서 사회주의에 대비되는 서독의 팝아트 작업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폴케는 양말, 셔츠, 플래스틱 일상생활용품, 도넛, 초콜릿 등 음식물을 소재로 앤디 워홀이 주도하던 미국 팝아트의 영향을 크게 받은 작업을 지속하며 독일 팝미술의 탄생에 동승한다. 폴케는 “당시 미국 팝아트는 우리에게 신세계였다”면서 “거대한 변화의 시기였다”고 회상한 바 있다.
볼펜으로 날개 달린 벌레를 종이화면 위쪽에 조그맣게 그린 <더 적은 노동, 더 많은 급여를!(Less Work, More Pay!)>(1963), 모나 리자를 99센트에 판매한다는 볼펜 드로잉, <모나 리자(Mona Lisa)>(1963), 화면 오른쪽 상단에 입과 소시지를 든 손을 마치 실수로 페인트가 묻은 듯 조그맣게 그리고 화면 전체를 소시지 링크로 가득 채운 <소시지 먹는 사람(The Sausage Eater)>(1963) 등은 서독으로 이주한 후 보게 된 자본주의 생활에 대한 코멘터리다.
폴케의 래스터(점방식) 페인팅 시리즈는 로이 리히텐슈타인이 이용한 신문사진과 만화를 인쇄하는 기술인 벤-데이 도트(Ben-Day Dots) 기법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1963년 미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암살된 해에 그려진 “리 하비 오스왈드의 초상 (1963)”에서 시작된다. <여자친구들(Girlfriends)>(1965~1966)에서 보이는 것처럼 폴케의 래스터 페인팅에 나타나는 점들은 하나하나 연필에 달려있는 지우개로 스탬프처럼 찍거나 펠트마커로 색을 덧칠함으로써 뭉개진 듯한 효과를 내는데 이것은 리히텐슈타인의 기계로 찍어낸 벤-데이 도트와 다른 회화적인 느낌을 준다. 폴케의 래스터기법은 2007년에 제작된 <광선을 본다(Seeing Rays)>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전생에 걸쳐 구사한 그의 시그너처 기법이다.
이와 함께 1960년대 일본에서 개발된 합성섬유가 유행하자 폴케는 섬유 자체를 캔버스로 쓰는 작업을 진행한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이미지를 넣어 배너처럼 만든 <마오(Mao)>(1972)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Wonderland)>(1972) 등이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1970년대는 요셉 보이스, 한나 다보벤으로 대표되는 개념미술이 득세하던 시대로 독일의 페인팅은 언더그라운드로 들어가면서 휴지기를 맞는다. 폴케 역시 페인팅을 멈추고 여행을 떠난다. 사진기와 캠코더를 들고 파리, 이탈리아 등 유럽 전역은 물론 뉴욕,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타일랜드 등 동남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이집트 등 1980년대 초반까지 전 세계를 여행한 것이다. 명상과 마리화나가 유행하던 1970년대 폴케의 사진작업은 이 여행에서 찍은 사진과 비디오를 이용한 것이며 이 자료들은 몇 년 후 그의 작업에 광범위하게 나타나게 된다. 자신조차 곧잘 실험의 대상으로 삼은 폴케의 작업에 마약에 의한 환각상태를 상징하는 버섯 이미지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팜추리와 성적인 이미지가 등장하는 일련의 작업이 진행된 시기다.
1980년대는 “재현으로의 복귀”를 주장한 독일의 신표현주의가 나타나 성공한 시기로 잭슨 폴록으로 대변되는 추상표현주의에 이은 미니멀리즘 그리고 앤디 워홀을 중심으로 하는 팝아트로 미국이 잡았던 세계미술의 주도권을 독일로 옮겨 오는 전환기를 맞는다. 폴케와 리히터 역시 새로운 표현형식의 에너지에 힘입어 페인팅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이 시기 폴케의 색깔 찾기 실험을 시작하고 ‘연금술사’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우라늄, 비소, 라벤더 오일, 유성가루, 진사, 터키 공작석, 석화석고, 전기석, 규산염 광물, 밀랍 등은 물론 달팽이의 진액에 빛과 산소를 쬐어 보라색을 만들었는데 그 과정을 비디오로 찍기도 했다. 이 보라색은 그리스, 로마시대에 황족들의 옷감에 물을 들이기 위해 달팽이 진액을 사용했다는 기록에 착안한 시도로    <보라색(Purple)>(1986) 시리즈에서 볼수 있다. 1982년 작 <네거티브 밸류Ⅱ(Negative Value Ⅱ)>를 만들면서 시장에 나와있는 보라색을 쓴 폴케는 시판하는 색깔에서 찾을 수 없는 ‘찬란한 색조’를 찾기 위해 달팽이 진액을 이용했다고 한다. <금덩어리(Lump of Gold)>(1982)는 독약인 비소를 직접 캔버스에 바른 작품이며 <우라늄(핑크)> 시리즈는 1992년에 작업한 것으로 빛에 민감한 사진건판과 네거티브에 우라늄 방사선 자국을 남긴 것이다. 이 같은 색채실험 작업은 1986년 베니스비엔날레에 독일대표로 참가했을때 소개되어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폴케의 전 작품에 끊이지 않고 등장하는 중요한 모티프는 나치 독일에 관련한 것들이다. 1984년 시작해 1980년대 후반까지 지속된 <망루(Watch Tower)> 시리즈, <사냥 탑(Hunting Tower)>(1984) 등은 나치의 강제수용소 철책과 망루를 표현하고 있고 나치경찰의 모자를 쓰고 돼지를 데리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경찰견(Police Dog)>(1986) 역시 긴장과 비극이 감도는 작품이다. 전설적인 바이올린 연주자를 제목으로 한 <파가니니>(1981~1983)에도 나치의 상징인 스와스티카가 그려져 있는데 당시 놀라운 그의 연주가 실은 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유령이 하는 것이라는 소문을 토대로 나치의 망령이 아직도 살아 있음을 상징하는 알레고리가 들어있다.
<이렇게 앉는 것이 옳은 방법이다(고야를 따라서)>(1982) 등 고야, 알프레드 뒤러, 막스 에른스트 등 거장들의 작품에서 차용한 이미지 작업들은 ‘포스트 모던 플레이’라고 불리며 그의 또다른 시도로 꼽힌다.
복사 중에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옮기면서 나오는 이미지를 추구한 1990년대의 <프린팅 에러> 시리즈, 이미지 위에 이미지가 겹쳐 보이도록 하기 위해 개발해낸 양면이 볼록한 2000년대의 <렌즈 페인팅> 시리즈 등 새로운 색과 이미지를 찾기 위한 그의 실험은 계속되었다.
이같이 평생에 걸쳐 미술 실험을 계속한 폴케는 ‘작가들의 작가’로 불린다. 젊은 작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쳐 몇몇 그의 작품은 여러 작가의 대표작이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그가 대학생이던 1963년 제작한 <무제(점)(Untitled(Dots))>은 종이 위에 수채화 물감과 과슈 빨강, 노랑, 초록, 파랑 등의 작은 점을 일렬로 찍은 작품으로 1986년에 시작한 데미안 허스트 (Damien Hirst)의 <점(Spot)> 시리즈와 매우 유사하다. 차이라면 폴케의 수작업에 비해 허스트는 조수를 고용해 점과 점의 간격까지 수학적으로 계산한 기계적인 완벽한 점을 추구한다는 것뿐이다. 이밖에도 마틴 키펜베르거(Martin Kippenberger), 알베르트 욀렌(Albert Oehlen), 리처드 프린스(Richard Prince), 페터 휘슬리(Peter Fischli)와 다비드 바이스(David Weiss) 듀오, 라라 슈니트거(Lala Schnitger) 등이 폴케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로 꼽힌다.
폴케의 마지막 작품은 스위스 취리히에 위치한 그로스민스터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다. 죽기 한 해 전인 2009년 마지막 창문을 완성한 이 스테인드글라스 역시 그의 실험작이었다. 12개의 창문 중 구약성서의 이미지가 들어간 5개를 제외한 7개를 기원전 3, 4세기에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 화려하고 신비한 색깔의 돌, 옥수(agate)의 조각으로 만들었다. 암과 투병하면서 이 종교적인 예술작업을 이뤄낸 폴케. 50년 전 미술대학에 입학하기 전 스테인드글라스 공장에서 일하던 젊은 자신을 떠올리며 지나온 삶을 돌아보았을 것으로 짐작해 본다.
한평생 실험을 거듭하며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찾으려 한 폴케. 연금술사들이 비밀실험을 거듭하며 찾으려 했다는, 그 어떤 금속도 금으로 바꿀 수 있다는 신비의 물질, ‘현자의 돌’을 과연 그는 찾은 것일까. <알리바이전>은 뉴욕 전시 후 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10월 1일부터 2015년 2월 8일까지), 그후에는 폴케가 생애의 대부분을 보내다 숨진 독일 쾰른의 루드비히 미술관(Museum Ludwig, 2015년 3월 14일부터 7월5일까지)으로 옮겨 전시된다. ●

폴케는 ‘연금술사’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미술의 방법뿐 아니라 재료의 새로운 발견을 위해서도 실험을 거듭했다. 과학자들이 처음 우라늄을 발견했던 방식처럼 우라늄을 빛에 민감한 플레이트에 놓아 만든   (사진 왼쪽,1992) 시리즈, 그리고 은박지, 합성수지, 심지어 운석의 가루까지 써서 만든 (1988) 시리즈가 보인다 © 2014 The Museum of Modern Art. Photo: Jonathan Muzikar. All works by Sigmar Polke © 2014 The Estate of Sigmar Polke/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VG Bild-Kunst, Bonn, Germany

폴케는 ‘연금술사’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미술의 방법뿐 아니라 재료의 새로운 발견을 위해서도 실험을 거듭했다. 과학자들이 처음 우라늄을 발견했던 방식처럼 우라늄을 빛에 민감한 플레이트에 놓아 만든 <우라늄(핑크)>(사진 왼쪽,1992) 시리즈 그리고 은박지, 합성수지, 심지어 운석의 가루까지 써서 만든 <스피릿>(1988) 시리즈가 보인다 © 2014 The Museum of Modern Art. Photo: Jonathan Muzikar. All works by Sigmar Polke © 2014 The Estate of Sigmar Polke/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VG Bild-Kunst, Bonn, Germany

<알리바이전>에는 폴케의 스케치와 드로잉과 메모, 만화 등 신문이나 잡지에서 오린 이미지 등이 들어 있는 그의 노트북들도 함께 전시돼 있다. 특히 노트북에는 스케치에 색을 칠하고 종이를 잘라 붙이는 등 끝마무리가 된 작품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아닐 만큼 완벽성을 추구해 놀랍다. 노트북을 놓은 유리상자 위에
몇 대의 아이패드를 놓아 작가에 대한 정보를 찾아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 서상숙

폴케의 전시가 시작되는 모마의 아트리움. 심플한 구조물에 감자를 매달아 놓은 <감자 하우스>(사진 맨 왼쪽, 1967)는 감자가 싹이 나고 썩기도 하는데 전시기간에 썩은 감자는 다시 모양이 비슷한 새로운 감자로 대체하고 있다.
© 서상숙

<모던 아트(Moderne Kunst)> 캔버스에 아크릴과 래커 150×125cm 1968 베를린 <모던 아트전>에 출품했던 폴케의 작품.
추상화를 퇴폐예술로 간주하던 나치시대, 전후에는 나치의 만행을 침묵으로 덮으려 했던 독일을 이 그림으로 패러디한다.
Froehlich Collection, Stuttgart © 2014 Estate of Sigmar Polke/Artists Rights Society(ARS), New York/VG Bild-Kunst, Bonn

<무제> 젤라틴 실버 프린트 18×23.9cm 1975 폴케의 이 자화상은 1975년 뒤셀도르프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찍은 사진이다. 1970년대는 마약과 명상, 그리고 섹스 웨이브의 시기였으며 폴케는 당시의 젊은이들처럼 카메라를 들고 세계여행을 떠났다. 이때 찍은 사진은 그의 작품에 수시로 이용된다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Acquired through the generosity of Edgar Wachenheim III and Ronald S. Lauder © 2014 Estate of Sigmar Polke/Artists Rights Society(ARS), New York/VG Bild-Kunst, Bonn

왼쪽·<케타의 안개 낀 푸른 하늘/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Quetta’s Hazy Blue Sky)/Afghanistan–Pakistan>의 한 장면 16mm 필름을 옮겨 담은 비디오 34분33초 1974~1976 1970년대 폴케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여행하면서 거리에서 현지인이 원숭이를 놀리는 것을 보고 찍은 필름의 한 장면.
개인 소장
© 2014 Estate of Sigmar Polke/Artists Rights Society(ARS), New York/VG Bild-Kunst, Bonn
오른쪽·<슛 페인팅(Soot Paintings)>의 한 장면
16mm 필름을 옮겨 담은 비디오(컬러) 42분12초 1990
개인 소장
폴케와 함께 가장 중요한 독일의 전후작가로 꼽히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촛불 페인팅을 떠올리게 하는 폴케의 비디오 © 2014 Estate of Sigmar Polke/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VG Bild-Kunst, Bonn

폴케는 ‘연금술사’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미술의 방법뿐 아니라 재료의 새로운 발견을 위해서도 실험을 거듭했다. 과학자들이 처음 우라늄을 발견했던 방식처럼 우라늄을 빛에 민감한 플레이트에 놓아 만든 <우라늄(핑크)>
(사진 왼쪽,1992) 시리즈,
그리고 은박지, 합성수지, 심지어 운석의 가루까지 써서 만든 <스피릿>(1988) 시리즈가 보인다 © 2014 The Museum of Modern Art. Photo: Jonathan Muzikar. All works by Sigmar Polke © 2014 The Estate of Sigmar Polke/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VG Bild-Kunst, Bonn, Germa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