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의 초상] 마일스의 마지막 연대기를 여는 자화상
contents 2014.2. portrait in jazz 9 | 마일스의 마지막 연대기를 여는 자화상 |
황덕호│재즈 칼럼니스트 |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1952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26세 때를 회고하면서 당시 “나도 이제 늙은이가 된 것이 아닌가?”하고 느꼈다고 했다. 그만큼 당시 뉴욕의 재즈동네는 치열한 경쟁의 격전장이었다. 하루가 멀다고 탁월한 기량의 신예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사조는 빠르게 변해갔다. 여기에 당시 미국의 예술계에 범람했던 약물은 재즈 음악인들을 깊은 수렁에 빠뜨리고 있었다. 마일스의 선배 혹은 동료였던 찰리 파커(Charlie Parker)와 버드 파월(Bud Powell)은 이미 헤로인 중독으로 젊은 나이에 전성기에서 가파르게 내려오고 있었으니까. 그런 와중에서도 마일스는 당시 가장 창의적인 젊은 연주자였고 끊임없이 지속되었던 그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재즈의 변천사 그 자체였다. 이미 1940년대 후반 9중주 편성으로 쿨 사운드의 원형을 만들어냈던 그는 1955년 그가 구사하는 트럼펫의 시적인 절제미와 논리적이면서도 들끓는 에너지를 지닌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의 테너 색소폰을 대칭시킨 자신의 첫 5중주단을 결성했고 이후에 피아니스트 빌 에번스(Bill Evans)와 교감을 통해 모드(mode)를 통한 즉흥연주를 추구했다. 1960년대 중반 웨인 쇼터(Wayne Shorter), 허비 핸콕(Herbie Hancock), 론 카터(Ron Carter), 토니 윌리엄스(Tony Williams)와 가장 진취적인 즉흥연주의 5중주단을 결성했던 그는 1960년대 말 전기 사운드와 록 비트를 전폭적으로 끌어들인 퓨전 사운드로 재즈의 방향을 급선회시켰다. 그는 좋았던 과거 시절에 대한 회상에 빠지는 것을 싫어했으며 늘 최전선에 있기를 원했고 그래서 새롭고 젊은 음악에 탐닉했다 하지만 1975년, 마흔 아홉의 나이에 그는 자신이 이미 중년을 훌쩍 넘겼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젊은 음악팬들은 자신보다 허비 핸콕의 음악에 더 열광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으며 재즈계의 경쟁에서 늘 앞서가야 한다는, 더 나아가서는 록과 소울의 태풍 속에서 재즈 음악인으로서 생존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그로 하여금 점차 더 알코올과 약물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위궤양과 폐렴, 불면증 여기에 엉덩이뼈의 습관적인 탈골은 중년의 마일스를 위기 상태로 몰고 갔으며 전처 아이린은 자녀 양육 문제로 마일스에게 거액의 소송을 제기했다. 1975년 여름 순회공연 중 마일스는 결국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음악 활동을 멈추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그는 자신이 음악을 다시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아무런 확신이 없었다. 은퇴 시기 마일스의 삶은 더 깊은 어둠으로 빠져들었다. 기존의 거의 모든 사람들과의 연락을 끊었으며 알코올과 약물에 대한 의존, 무절제한 성생활은 더욱 심각해졌다. 그러던 중에 시슬리 타이슨(Cicely Tyson)이라는 새로운 여인이 마일스를 돌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일스의 모든 악습을 끊게 만들었고 그에게 그림을 그려보라고 권유했다. 음악계로 복귀하기 전 마일스는 하루 종일 즉흥적인 스케치에 탐닉했으며 시슬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림은 내 인생의 마지막 중독이야.” 그러한 칩거에도 불구하고 재즈계가 마일스를 그냥 놔둘 리 없었다. 1978년부터 컬럼비아 레코드의 재즈 부서장 조지 버틀러(George Butler)는 마일스를 끈질기게, 하지만 조심스럽게 설득했고 결국 심신의 병마에서 벗어난 마일스는 6년의 공백을 깨고 1981년 음악계에 복귀했다. 당시 마일스는 탁월한 드러머 앨 포스터(Al Foster)와 기민하게 반응하는 퍼커셔니스트 미노 시넬루(Mino Cinelu)를 통해 입체적인 리듬파트를 만들었고 그 위에 악곡 전체를 역동적으로 해석해 내는 베이시스트 마커스 밀러(Marcus Miller), 여기에 깊은 블루스를 연주할 줄 아는 두 기타리스트 존 스코필드(John Scofield)와 마이크 스턴(Mike Stern)을 배치함으로써 그의 음악인생의 마지막 장(章)을 향한 시동을 걸었다. 비록 음반에서는 그 존재감이 축소되었지만 늘 그렇듯이 그의 트럼펫과 대조를 이룰 수 있는 탁월한 색소포니스트 빌 에번스(피아니스트와는 동명이인)가 필요했던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복귀 후 세 번째 음반인 <스타피플>은 어두운 터널을 뚫고 나온 그의 흔적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거칠게 스케치한 그의 그림이 자화상처럼 표지를 장식했다. 열거한 이름들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마일스 밴드의 멤버들은 현재 재즈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당연히 이 천재가 남긴 유산 속에서 보물을 찾아내고자 고군 분투 중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