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무진기행

2016.11.22~2.12 금호미술관

양효실 | 미학, 미술비평

금호미술관의 한국화 기획전 〈무진기행 〉은 국내외적으로 주목받는 30~40대 작가 14명의 작업 90여 점을 통해 ‘동시대 맥락 안에서 재해석된 이상향 개념을 살펴보는’ 전시이다. 비장소적이고 무시간적인 이상향은 그(한) 시대의 삶(현실)에 결핍된 것의 환상적 충족이고, 그렇기에 이상향은 삶(현실)을 가리는 베일로 봉사한다. 자주 이상향은 과거추수적인 향수와 연접(連接)한다. 향수는 지금의 문제를 거론하고 해결하려는 변혁의 태도가 불가능할 때, 혹은 그 태도가 탄력을 잃을 때 동시대를 압도한다. 2016년 미술계가 단색화나 민중미술 회고전에 힘을 실었다면 이는 두 진영의 이데올로기적 대치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흐름으로 제시될 경향이 부재했거나 문화적 보수주의가 쇄도했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당연히 시간적 연속성에서 이탈하는, 환원을 거부하는 새로운 이름들, 경향들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주류 상업 갤러리들이 전통, 향수, 역사에 방점을 찍었다면 이는 회화, 작가성, 기념비성과 같이 운송 가능하고 유지 가능한 또는 사고 팔기에 좋은 ‘미술’의 복귀이자
반복이 또 일어났다는 것이다.〈무진기행〉에 전시된 한국화는 수묵, 담채, 채색화부터 아크릴 채색화까지 형식적으로 다양하다. 전시의 프레임을 이룬 개념으로서의 한국화와 이상향은 전시 작가들을 묶기 위한 불가피한 전제이자 최소한의 유사성이었다고 보인다. 물론 관객은 복고적 동양주의 대신에 80여 점의 작품에 내포된 스토리텔링이나 서사에 사로잡힐 것이다. 작가의 개인사나 일상 경험, 한국 근대사, 탈맥락적 은유나 상징에 바쳐진 풍경들 앞에 서서 관객은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읽기’를 시작할 것이다. 이 읽기는 14명의 작가가 살고 있는 ‘동시대 맥락’에 대한 것이고, 그렇기에 이상향은 무시해도 좋은 배경으로 물러나 있다. 기획자는 이상향과 연관된 전시의 세 단계(국면)를 ‘갈등의 공간, 현실’, ‘현실 속 도피와 휴식의 공간’, ‘현실 너머의 이상’으로 차별화했다. 이것은 ‘성찰적’ 태도이다. 현실은 비루하고, 자의식적인 개인-예술가는 무력하고, 쥐고 있는 패는 도피이고, 그렇기에 이상(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기획자는 동양적 이상향과 전통??-??매체??-??한국화를
끌어들이면서도, 작가들이 ‘문제화하는’ 동시대성에 주목함으로써 반복과 복귀가 아닌 차이와 이탈을 도모한다. 젊고 비판적이다. 외연은 낡은 것이지만 내포는 전복적이다.
흥미로운 점은 전시 제목인바 김승옥의 1965년 소설 《무진기행》에서도 이번 전시 기획의 세 단계 구도가 읽힌다는 것이다. 다시 읽어본 소설에서 나는 주인공 남자의 유약한, 자조적인, 자기연민에 가득한 상념이 순천-무진을 식민화, 박제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33세의 사내는 서울-현재를 벗어나 고향-과거로 숨어들지만, 또(더 이상) 돌아오지 않으려면 이상향-환상을 지워야 하기에 현재의 무진을 외면하거나 모독한다는 느낌이 엄습했다. 이것은 젊은 여선생이 주인공에게 서울-이상향으로의 도피에 끼워주기를 간청할 때, 그리고 무력한 여선생을 폭력적으로 ‘다룬’ 뒤에 오직 소설의 독자만이 자신의 ‘선’의를 읽게 한 뒤 여선생에게 보낼 편지를 찢을 때 정점에 도달한다. 무진을 이상향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서울만큼 환멸의 공간으로 만들어야 하기에 주인공은 무진을 ‘시체가 썩어 가고
있는’ 곳으로 읽는다. 그의 악행과 악의는 출구 없는 현실, 대안 없는 현재와 연접한다. 지식인 김승옥의 자폐적 내면이 무진과 여선생에 대한 일방적 대상화를 요청했다면, 2016년의 우리는 《무진기행》을 다시 읽어야할 의무가 있다.
2016년의 전시는 현대 문학의 ‘경전’ 《무진기행》을 복고적으로 인용하면서도 ‘동시대 맥락’ 안에서 재고하려 한다. 전시작 중에는 명상, 절제, 담백, 화해와 같은 정서적이고 관념적인 이상향을 가리키는 작품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관객을 더 압도하는 것은 잔인함, 교활함, 비극성, 그로테스크, 직면이다. 14명 중 12명의 작가가 여성이라는 것, 그녀들의 작업이 전통적 매체에 머무른 채로 현재(성)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 좋다. 《무진기행》에서는 혼자 서울로 갈 수 없었던 여선생, 남자에게 자신을 맡겼던 여자(들)이 2016년 〈무진기행〉에서는 무진에 남아 계속 싸우고 갈등하는 것이다. 예술이 자조적 위선과 기만의 알리바이가 아니라면, 아니 작가 개인의  환멸을 정당화하기 위해 ‘생생한’ 현실을 착취하지 않으려 한다면, 혹은 복고적 이상향을 위해 현재를 외면하지 않는다면, 아니 동시대 맥락 안에서 전통, 이상(향), 과거, ‘경전’과 같은 이념을 재고하려 한다면, 심지어 지금??-???여기의 삶을 들려주는 이야기꾼들을 읽게 된다면, 징글징글한 삶이란 결국 우리를 계속 살게 만드는 유혹이고 내기인 게다.

위 임태규 한지에 먹, 채색 346 x 828cm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