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이광호 그림 풍경
국제갤러리 2014.12.16~1.25
환한 빛이 가득한 1층 두 방에서, 그리고 어둠으로 차 있는 2층에서 곶자왈을 만났다. 지나간 시간들이 말라비틀어진 덩굴식물의 줄기와 나뭇가지들이 덤불 속에서 폐부를 찌르듯 쏟아져 나왔다. 눈앞의 잡목 뒤에 어떤 세계가 펼쳐져 있을지 가늠할 수 없었던 그때의 낯섦은 무한한 원시림을 상상하게 했는데, 세월이 지나 갑작스레 화면 속에서 마주한 곶자왈에서도 그 너머의 산길은 가늠할 수 없었다. 기시감을 넘어선 실재의 공간, 곶자왈은 꿈속에서 만난 풍경이자 잠시 머물렀던 지나간 시간이며 무한히 펼쳐내는 환상적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곶자왈은 내게는 아르카디아이나 작가 이광호에게는 매료된 특정 장소이자 자연을 사색하는 공간이다. 남자 차장이 버스 몸통을 두드리며 외친다. “곶자왈! 곶자왈 내립서.” 외지인인 나의 뇌리에는 제주도의 소리 “곶자왈”이 각인돼 있다. 창밖 어둠 속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그곳을 다시 지나던 낮에, 여전히 버스 몸통을 탕탕 두드리는 남자 차장의 비음과 함께 차는 출발하고 창밖으로 엄청나게 큰 고사리잎으로 뒤덮인 산길 입구가 열려 있었다. 5.16도로에 감사하며 버스 운행시간에 맞추어 제주도의 남쪽과 북쪽을 오간 이들에게 ‘곶자왈’은 그렇게 사전적 의미로 설명되지 않는 어떤 장소이고 어디서나 만나는 동네 숲길이다.
이광호의 화면 속에 존재하는 곶자왈은 눈이 덮여 있을 때조차 봄으로 보인다. 연중 상온을 유지하는 제주에서 눈은 그저 차가운 수분일 뿐이다. 눈 아래 놓인 푸르름과 달리 덤불은 눈을 넘어 공간으로 뻗어 오른다. 그 날카롭고 뻣뻣한 나뭇가지 혹은 메마른 줄기들은 바늘의 예리함으로 화면을 뚫고 나와 속살을 드러낸다. 푸르름이 가득한 봄 풍경과 물기가 말라들어 바삭해진 가을 풍경 모두 발려진 물감층을 뚫고 비집고 나온 풀이나 잡목처럼 그렇게 생명력을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예리한 바늘의 리듬감 있는 그리기, 결국 표면의 상처를 통해 형상화된 빈 공간이다.
화면 속 곶자왈의 밤은 깊고 무겁다. 부드럽고 가늠할 수 없는 깊이로 인해 상상력의 골이 무한히 깊어지는 공간을 체험케 한다. 그림의 표면은 균질하고 싱싱하다. 밤을 울리는 벌레 소리와 잎이 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부드러운 생명의 현장이 흔들거림 혹은 진동하는 에너지의 축처럼, 가는 떨림이 가득한 평면에 다름 아님을 알게 될 때, 이 작가의 놀라운 테크닉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탄력 있는 고무붓의 경쾌한 리듬과 탄성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진동하는 에너지의 형상화를 보게 되는 것이다. 숲에 이르러 보지 못하게 되는 숲이 아니라, 가까이 들여다보아 사라지는 나무가 아니라 생명성 자체를 경험하는 일, 그림 속 곶자왈을 만나는 것은 각인된 시간의 여행, 원시적 생명성에의 경외를 경험하는 일이다.
조은정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