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예선의 달콤한 작업실 9
달콤한 친구들의 화수목한 공동체
모든 것은 한잔의 차에서 시작되었다.
첫 일과를 시작하는 오전 11시와 나른해지는 오후 3시, 작업실에는 어김없이 찻물이 끓는다. 바르르.. 전기포트에서 물 끓는 소리를 들으며 오늘의 차를 골라본다. 찻통을 열고 크게 숨을 들이켜면 찻잎에 맺힌 향들이 살포시 떠오른다. 찻주전자에 찻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그리고 잠시 기다린다. 맑은 찻잔에 담긴 고요한 한잔의 차.
혼자 마시는 차 맛도 나쁘지 않지만 누군가와 함께 마시고 싶어질 때가 자주 있다. 차를 즐기는 삶과 차와 연관된 수많은 경험을 나누는 차 모임을 열어볼까? 차 모임은 작업실을 구상하던 순간부터 꼭 해보고 싶은 일이기도 했다. 한 달에 한 번 티테이블을 차릴 계획을 세우고 블로그에 공지했더니 신청자들이 생겼다. 참가 희망자들에게 은밀한 임무를 주듯 작업실 약도를 일러주었다. 첫 모임이 열린 밤이 떠오른다. 어떤 사람들이 올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소박한 티테이블을 꾸미던 그 밤. 곧이어 어둠 속에서 한 명씩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수줍게 작업실의 문을 두드렸다. 작은 소란처럼 밤의 작업실에서 티테이블 토크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매달 세 번째 목요일 저녁에 만났다. 바삐 달려가다가 약간 숨 고를 시간이 필요한 게 세 번째 주 목요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차 모임의 이름도 ‘달콤한 목요일’이었다. ‘목요일’에 대한 환상도 조금은 있었다. 어릴 적 책에서 읽은 “목요일의 아이는 길을 떠나고…”라는 글귀가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목요일은 새로운 떠남과 새로운 시작을 예감할 수 있어 약간의 안도감을 주는 날이다. 세 번째 주도, 목요일도, 저녁이라는 시간도, 나름 상징성이 짙은 선택이었다. 떠나고 싶은 그 밤에 나는 작업실 문을 열었다.
마른 찻잎을 듬뿍 덜어서 향을 맡으며 동시에 느낀 기대감과 찻잔에 또로록 떨어지는 주홍빛 찻물을 보자마자 숨겨둔 이야기를 쏟아낼 수밖에 없었던 그 다급한 마음들. 차를 마시면 왜 이야기가 하고 싶어지는 걸까? 그래서 찻물에 치유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러므로 많은 작가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찾아내려고 애쓴 건지도 모른다.
차 모임은 외국어를 배우는 모임으로 바뀌었다가 소설을 읽는 모임으로 이어졌다. 함께 모이는 날은 화요일이 되었다가 수요일이 되었다가 지금은 다시 목요일을 되찾았다. 이 화수목한 공동체로 작업실은 충만해진다. 이야기가 앞설 때는 차 맛을 음미하는 일은 저만치 멀어지기도 하지만, 따뜻한 찻물만큼은 빼놓고 싶지 않아서 보기 좋은 차 주전자도 사들이고 향기 좋은 잎차도 준비한다. 문학과 예술은 표면적인 것일 뿐, 우리의 이야기는 대부분 자신의 내면에 대한 것이다. 좋아하는 것, 원하는 것, 감각하는 것, 분노하는 것… 감정이나 의견을 거울처럼 드러내는 건 쉽지 않지만, 그 머뭇거림을 뛰어넘어 공감할 수 있었던 건 티테이블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끝없이 길어도 무방하다. 차는 기다릴 줄 아는 존재니까.
한잔의 차는 작업실 친구들이라는 소란한 공동체를 만들었다. 혼자서는 첫걸음마를 배울 때처럼 용기가 필요한 일도 함께라면 거뜬히 해낼 수 있는 일이 많았다. 그렇다면 이 멤버들과 ‘달콤한 작당’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대화하고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멋진 사람들을 초대해서 이야기를 들어보는 그런 자리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내 첫 책의 편집자로 만나 친구가 된 S와 내가 주축이 되어 ‘달콤한 아카데미’라는 라운드테이블을 열고, 달콤한 친구들이 이 작은 공간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데려오면서 모임을 확장해보기로 했다.
“이전 시대의 예술가들은 특별한 모임들을 종종 가졌잖아. 서로 교류하면서 인생철학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달콤한 아카데미는 그런 장면을 포함하고 있으면 좋겠어.”
수요일 오후 3시에 열렸다는 일랴 레핀의 ‘수요식탁’이나 목요일 밤이면 버지니아 울프 부부를 비롯하여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지식인, 문인, 예술가들이 모였던 ‘블룸즈버리 그룹’ 같은 문화토론장이 되어 본다면? 여기서 세상을 바꾸는 혁명적 결과물이 나오지 않더라도, 나른한 삶에 모험심이라는 화학작용을 계속 돋우는 것만으로도 좋다. 무용하지만 왠지 마음을 끄는 것들이 이 자리에서 오고갈 것이다. 소설과 그림과 술과 음식, 여행과 음악에 대한 이야기들. 삶을 관능적으로 만들어주는 것들 말이다. 우리는 쓸데없이 명·청 시대 문인들의 취미생활을 엿보고, 일제강점기 예술가들의 흔적을 따라갔다. 1920년대 북경에서 펼쳐진 항일운동가의 파란만장한 사연과 중국 본토의 어느 곳에 있다는 우리 고고문화재 소식도 전해 들었다. 이 무용한 토론은 우리의 심장을 뛰게 했고 아주 먼 역사의 저편으로, 아주 깊은 대륙의 끝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불이 꺼지면 연극이 끝나듯 현실로 돌아왔지만.
아카데미가 열릴 때 작업실은 ‘어른들을 위한 놀이터’가 된다. 자발성, 공유와 평등, 그리고 배려와 애정. 나는 이 몇 가지가 어른의 ‘자격’이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자신이 갖고 있는 이야기들을 공유하는 데 어색함을 떨칠 수 없지만, 이 장소, 이 시간만큼은 자유롭게 마음껏 발설할 수 있으면 좋겠다. 어쩌면 미래에 우리는 어느 좋은 곳에서 서로 배우고 가르치고 함께 살아가는 문화 공동체를 만들지도 모르잖은가? 그때도 우리 곁에는 따듯한 연결고리처럼 한잔의 차가 있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