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 ISSUE
고전서양미술사에 대한 활발한 저술과 번역 활동으로 잘 알려진 노성두 박사가 <루벤스는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를 그리지 않았다>라는 파격적인 제목의 원고를 《월간미술》에 보내왔다. 이에 앞서 노 박사는 독서신문 《책과 삶》에 연재 중인 ‘노성두의 그림읽기’(2015년 10월호, 11월호)에서 “현재 LA게티미술관에 있는 한 뼘 반짜리 초상 소묘의 주인공을 둘러싼 논의의 역사는 꽤 길고 깊지만, 조선인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처음 주장했다. 이후 시사월간지 《신동아》(2015년 12월호)에 같은 논지의 글을 게재해 논쟁의 불을 지폈다.
공교롭게도 같은 달 《월간조선》에 ‘[역사추적] 루벤스 作 <한복 입은 남자>로 본 神話의 탄생과 소멸-임진왜란 때 유럽으로 간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 그는 어떻게 신화가 되었나’제하의 김성동 기자 글이 실려 ‘루벤스의 조선인 그림’ 논쟁은 더욱 뜨거워졌다. 때마침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리히텐슈타인박물관 명품전-루벤스와 세기의 거장들전>(2015.12.12~4.10)이 열리고 있다. 물론 이 전시에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가 전시되지는 않지만 노성두 박사의 이 같은 문제 제기는 여러 면에서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월간미술》은 향후 이 문제에 대한 발전적인 논의가 지속되기 바라며, 노 박사의 글을 소개한다.
“루벤스는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를 그리지 않았다”
노성두 미술사
〈한복 입은 남자〉. 페테르 파울 루벤스 (Peter Paul Rubens)가 유일하게 조선인을 모델로 그린 것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우리에게는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한데, 현재 LA 게티미술관에 있는 이 그림이 1983년 11월 29일 크리스티 경매에서 소묘작품 사상 최고가인 32만4000파운드에 낙찰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안토니오 코레아는 역사적 실존 인물이다. 피렌체 출신의 이탈리아 상인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가 기록하고 사후 출간된 《나의 세계 일주기》에는 조선의 해안 지방에서 왜구에게 납치되어 터무니없는 헐값에 노예시장에 나온 조선인 이야기가 실려 있다. “조선인 다섯 명을 12스쿠디보다 조금 더 쳐서 매입하고 세례를 받게 한 다음 그 가운데 넷은 인도 고아에서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 풀어주고 한 명을 피렌체까지 데리고 왔는데, 현재 그는 로마에서 안토니오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고 알고 있다”는 내용이다.
1979년 10월 7일 김성우(한국일보 기자)가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코레아 성씨가 원래 조선인 안토니오의 후손이라는 요지의 기사를 발표하면서 국내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또 1992년에는 임진왜란 400주년에 즈음하여 알비의 시장과 주민들을 국내 초청하고, DNA 검사를 하는 등 법석을 떨다가 한국인의 혈통과 전혀 무관하다는 허탈한 결론에 이르기도 했다. 이듬해 1993년에는 소설가 오세영이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에서 영감을 얻어 집필했다는 《베니스의 개성상인》이 판매부수 200만 부를 훌쩍 넘기며 국내에 안토니오 코레아 열풍에 다시 불을 지폈다.
지금까지 발표된 다수의 소설과 다큐멘터리, 드라마, 뮤지컬, 논문이 예외 없이 게티 소묘의 주인공이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2011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야심차게 준비한 전시 〈초상화의 비밀〉이 열렸을 때 박물관 건물 전면을 채우는 거대한 걸개그림에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가 집채보다 큰 사이즈로 등장해서 우리의 가슴을 뛰게 했고,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은 방미 일정 중 시간을 쪼개어 게티미술관을 찾아 루벤스의 소묘에 심심한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안토니오 신화는 픽션과 팩트와 팩션 사이를 넘나들면서 군더더기가 많이 붙는다.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의 더께를 벗겨내고 기록의 근거를 치밀하게 추적한 연구서가 《조선 청년 안토니오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이다. 부산대 사학과의 곽차섭 교수가 2004년 푸른역사에서 출간한 단행본인데 지금은 절판되었다. 곽차섭은 책에서 루벤스가 그린 게티 소묘의 주인공은 조선인이며, 그 조선인은 다름 아닌 안토니오 코레아라고 주장한다. 논의를 전개하기에 앞서 필자의 결론을 앞당겨 밝히면 이렇다. “루벤스는 조선인도, 안토니오 코레아도 그리지 않았다.”
《월간조선》 2015년 12월호 ‘루벤스 작, 〈한복 입은 남자〉로 본 신화의 탄생과 소멸’ 제하의 기사는 그간의 안토니오 코레아
논쟁을 정리하고 있다. 김성동(월간조선 기자)은 안토니오 코레아 신화가 1979년에 탄생했다가 2015년 11월 노성두에 의해 소멸된 것으로 보고, 이에 대한 곽차섭의 입장을 간단히 소개했다. 먼저 곽차섭의 논리를 들어보자. 그는 세 가지 근거를 내세워 루벤스 소묘가 조선인을 모델로 했다고 확신한다.
1. 머리에 조선 방건을 쓰고 있다.(서양사학자 곽차섭 주장)
2. 상투를 틀었다.(한문학자 강명관 주장)
3. 조선 철릭을 입었다.(복식사학자 석주선 주장)
여기서 ‘조선 방건’이 곽차섭의 유일한 관찰이다. 1934년 영국 미술사학자 클레어 스튜어트 워틀리가 루벤스 소묘에 대해 ‘조선인 특유의 투명한 말총모자’를 언급한 적이 있고, 곽차섭이 이를 조선 방건으로 확정한 뒤 지금까지 별다른 이의 제기 없이 학계에 수용되었다. 현재 게티미술관에서도 〈한복 입은 남자〉라는 작품 제목을 공식화하고 있다. 그런데 ‘한복 입은 남자’는 한 명이 아니다.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박물관에 걸려 있는 루벤스의 대형 제단화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에도 같은 인물이 나온다. 제단화 속의 동양인과 게티 소묘의 주인공을 비교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복식과 차림새가 일치한다.
또 두 사람의 용모를 비교해도 쌍꺼풀 진 눈, 바깥으로 솟은 눈꼬리, 깡총한 눈썹, 내려앉은 콧부리, 단단한 콧날, 돌출형 치아와 도톰한 입술, 동그란 광대뼈, 좁은 하관, 그리고 귓불 등이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학계에서는 둘을 동일 인물로 보고, 이 점에 곽차섭도 동의한다. 빈 제단화는 원래 북유럽 가톨릭의 전초기지 가운데 하나였던 안트베르펜에 새로 지은 예수회 교회인 이냐치오 로욜라 교회(1779년에 카를로 보로메오 교회로 개칭)의 중앙 제단화 두 점 가운데 한 점으로, 작품 주문시점이 1617년이다.
학계에서는 루벤스가 제단화를 주문받고 나서 준비작업의 일환으로 게티 소묘를 제작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제작 시점이 1617년경이 된다. 하지만 곽차섭은 10년 정도 앞당겨서 1607~1608년경에 소묘가 그려졌고, 게티 소묘는 제단화의 동양인과 동일 인물이기는 하지만 제단화 주문과 무관하게 작업되었으며, 동양인의 정체가 다름 아닌 조선인 노예 출신인 안토니오 코레아라고 본다. 곽차섭의 논리는, 루벤스가 로마 체류시절에 조선인 안토니오를 만났고, 나중에 소묘를 활용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동양인 모델을 그려서 챙겨두었고, 우연히 10년 뒤 안트베르펜 예수회로부터 예수회 선교와 연관된 제단화 주문을 받고는 고이 모셔둔 조선인 소묘를 다시 꺼내서 제단화 밑그림 그릴 때 활용했다는 것이다. 현재 게티미술관은 곽차섭의 주장과 달리 소묘의 제작시점을 1617년으로 표기하고 있다.
방건과 크기의 문제
곽차섭은 게티 소묘의 주인공이 조선 방건을 착용했으니 당연히 조선인이라고 말한다. 깔끔한 논리이다. 실제로 곽차섭은 책의 상당 부분을 방건에 대한 설명에 할애하면서 풍부한 증거 자료를 제시한다. 하지만 그의 방건 이론은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 방건은 사각형의 관모로, 정육면체에 가까운 형태이다. 상하를 제외하고 네 개의 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면은 굵은 사각형 테두리 안을 가는 올로 엮어 채워서 만든다. 4개의 면을 나란히 엮으면 정육면체에 가까운 반듯한 형태의 방건이 완성된다. 그런데 게티 소묘의 관모는 네모난 형태가 아니라 원통형이다. 각도 보이지 않고 면도 보이지 않는다. 사각형의 굵은 테두리도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 곽차섭은 “언뜻 보기에 드로잉 속의 방건은 사각형이 아니라 둥근 모양인 듯도 하지만, 이는 여러 해에 걸쳐 사용함으로써 각진 부분이 완화된 결과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조선 청년 안토니오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 89쪽)라고 해명한다.
방건을 여러 해 사용했더니, 가는 올은 멀쩡한데 굵은 바깥 틀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세로로 각진 부분 역시 저절로 펴져서 원통형으로 변신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방건은 벗어둘 때 납작하게 눌러 접어서 보관하기 때문에 올이 풀리고 해져서 나달나달할 때까지 써도 각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생선구이 석쇠를 오래 썼더니 가는 철사로 엮은 망은 멀쩡한데 바깥을 두른 굵은 철사심이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을까? 실물 방건과 그림 속 관모를 비교해보면 간단히 알 수 있다. 논리적 추론이라기보다 호그와트 마법학교에서나 통할 기적에 대해 지금껏 아무 이의 제기가 없었다는 사실이 더 불가사의하다.
곽차섭이 저지른 또 하나의 치명적 오류는 작품 해석은 반드시 작품 관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미술사 방법론의 대전제를 무시한 점이다. 작품 관찰보다 자신의 학식과 역사적 상상력을 우선시한 것이다. 게티 소묘는 완전한 상태가 아니다. 애당초 루벤스가 완성한 소묘작품의 크기는 현재 상태보다 조금 더 컸을 것이다. 소묘의 가장자리를 관찰하면 원작의 상단과 하단이 잘려나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루벤스의 소묘 〈한복 입은 남자〉는 종이 가장자리를 따라서 상하좌우에 테두리 선이 그어져 있다. 그런데 작품 속 관모의 세로 올을 표현한 선들이 수평으로 그어진 테두리 선을 넘어서 종이 끝까지 뻗어 있다. 작품 하단부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관찰된다. 루벤스가 동양인 모델을 그리면서 관모와 발목을 끊어먹지 않았다고 보고, 원작에서 잘려나간 부분을 복원해보자. 복원 기준은 빈 제단화이다. 제단화의 동양인을 터잡아 잘려나간 부분을 복원하면, 게티 소묘의 주인공이 쓰고 있는 관모는 각이 진 방건 형태가 아니라 높이가 훨씬 올라가는 원통형이 된다. 방건을 쓰기 전에 망건을 두르지 않은 데 대한 궁금증도 자연스레 해소된다. 그의 관모는 방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곽차섭의 책 12쪽의 도판에는 그림 가장자리에 테두리선이 보이지 않는다. 만약 처음부터 부실한 도판을 보고 주장을 개진했다면, 스스로 방건 이론을 철회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소묘 작품의 상·하단 테두리 선을 실수로 놓쳤거나, 테두리선은 보았지만 관모의 세로 올이 테두리 선을 관통하는 부분의 디테일을 보지 못했거나, 혹은 자신의 논리를 관철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소묘의 디테일을 무시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월간조선》 2015년 12월호 (364쪽) 김성동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곽차섭은 “노 박사는 그림 속 인물이 착용하고 있는 것이 조선 방건과 철릭이 아니기 때문에 제 주장이 틀렸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그림 속 인물이 착용하고 있는 방건과 철릭이 어디 것인지를 밝혀야 하고 혹시 그것이 중국의 것이라면 그 시대 그와 유사한 모자와 옷을 증거로 제시해야 한다. 그러한 증거가 없다면 여전히 제 견해는 가능성이 있는 가설”이라고 항변하면서, 방건 이론을 고수하고 있다. ‘동그란 네모’, 또는 ‘네모난 동그라미’를 논리학에서는 ‘형용모순’이라고 한다. 곽차섭의 항변에 대해서 이렇게 되묻고 싶다.
“가령 미켈란젤로가 그린 우피치 미술관의 〈도니 톤도〉 배경에 나오는 알몸의 청년들이 우리 은하계에서 200만 광년 정도 떨어진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라는 주장을 누군가 제기했을 경우, 그 주장을 반박하려면 알몸의 청년 모두의 이름과 주소지를 밝혀야만 하며, 그렇지 못하면 외계인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씀이신지?”
곽차섭은 또 다른 근거로 그림 속 인물이 조선 철릭을 입고 있으니 조선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소묘에는 철릭에 넓은 목깃이 접혀 있을 뿐, 조선 철릭의 특징인 동정이 달려 있지 않다. 또 무릎 뼈 바로 아래에 걸칠 정도로 짧은 조선 철릭에 비해서 게티 소묘의 철릭은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이가 풍성하다. 그런데도 정말 조선 철릭일까? 게티 소묘의 철릭은 루벤스가 1617년경 그린 예수회 선교사 〈니콜라스 트리고의 초상〉이나 같은 시대 마테오 리치가 입고 있는 중국식 철릭과 형태가 훨씬 유사하다. 곽차섭은 그의 책(95쪽)에서 원작 소묘의 흑백 프린트에다 목깃 안쪽에 마치 조선식 철릭의 동정이 달려있는 것처럼 굵은 검정색으로 가필한 도판을 붙여두었다. 정작 루벤스는 그린 적이 없는 동정이 사학자의 신비로운 손길에 의해 홀연히 현현한 것이다. 남의 작품에다 없는 동정을 슬그머니 그려 넣고 주인공의 신분과 국적을 세탁하려고 한 것일까?
조선 방건을 쓰고 조선 철릭을 입었으니 조선인이 당연하다는 주장의 근거는 모두 깨진 셈이다. 다시 말해 루벤스 소묘의 주인공은 조선인이 될 수 없다. 조선인이 어쩌다 이국의 복식을 입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같은 논리로 태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말레이시아 사람이 그랬을 가능성도 똑같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별 의미가 없다.
엉터리 방건과 위조 철릭을 내세운 곽차섭은 또 루벤스가 안토니오 코레아를 1607~1608년에 로마에서 만나서 소묘를 제작했다고 주장한다. 게티 소묘의 주인공이 조선인이라는 전제가 성립한 연후의 주장이므로 그의 안토니오 코레아 이론은 당연히 배척되어야 하겠지만, 여기서 잠시 입장을 바꾸어서 거꾸로 접근해보자. 만약 곽차섭의 주장대로 루벤스가 조선인 안토니오를 로마에서 만나서 모델이 돼줄 것을 요청하고 소묘 작업을 진행했다는 추리가 성립하려면 어떤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할까?
1607~1608년, 루벤스는 건강 상태와 재정 상태가 최악이었다. 또 로마에 신축한 예수회 교회인 키에사 누오바 교회의 주제단화를 그리기로 하고 근 1년에 걸쳐 완성했으나 교회 측으로부터 작업 대금도 못 받고 거부당한다. 두 번째 제단화에 전념하던 중 가까스로 완성했을 무렵 고향 안트베르펜에서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급한 전갈을 받고 제단화의 공개도 못보고 귀향길에 오른다. 그런데 이 시기에 장차 10년쯤 뒤에 안트베르펜 예수회 교회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제단화 주문에 대비하여, 예수회가 선교 활동을 벌인 인도, 중국, 일본을 대표할 인물상을 모색하던 가운데, 유럽에 이미 꽤 진출해 있어서 모델을 구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한 중국인은 제쳐놓고, 예수회 선교와도 상관없고 외교관계도 없어서 유럽 전체에 겨우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조선인을 굳이 수소문해서 조선인 노예 출신인 안토니오를 찾아낸 뒤, 그에게 혹시 동양의 고관대작이나 외교 관료나 고위 성직자가 걸칠 만한 의관을 갖고 있는지 확인한 다음, 의관정제하여 초상소묘의 모델로 서줄 것을 요청하고,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모델료를 지불하고 그림을 그렸어야 한다.
한편, 조선인 안토니오는 왜구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린 뒤에, 파란만장한 삶의 역경과 거친 역사의 파고를 거치면서도, 자신의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 황금비단 철릭과 사치스러운 이국풍의 가죽신발과 높은 관모를 끝내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플랑드르 화가의 모델을 설 때 요긴하게 활용하는 일이 가능했을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곽차섭의 주장은 불가능에 가까운 성립 확률을 수차례 중첩해 논리의 차원을 크게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차라리 조선 천재 김시습이 다섯 살 연상의 어우동을 갈라파고스에서 만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낳았다는 쪽에 베팅을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