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회화를 긋다

회화를 긋다

갤러리 세줄 4.18-5.31

갤러리 세줄에서 ‘회화를 긋다’라는 주제로 중진작가 최병소, 박기원, 장승택, 도윤희의 그룹전이 개최되었다. 뉴미디어 장르의 복잡하고 화려한 이미지, 시대를 풍자한 팝아트, 협업의 공존개념 작품들이 넘쳐나는 한국의 여느 전시장과는 달리 꾸준히 자신의 작업에 몰두하면서 예술의 이상적인 목적에 접근하는 작가들의 전시는 오랜만에 미학적 안도감을 가져다준다. 1980년대 한국의 미술계는 민중미술의 경향과 한국적 추상과 미니멀리즘, 개념작업의 계보를 잇는 작가들로 양분되어 있었다. 1990년대는 해외유학파들이 들어오면서 포스트모던의 일상적 소재를 다루는 작가들이 등장하고 2000년부터 상업적 명성을 떨치며 미술계를 장악한 젊은 블루칩 작가들이 본격적으로 대중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이번 전시는 하나의 스타일을 만들어 섬세한 변화를 추구해 자신만의 세련된 감각을 연마해온 작가들로 구성되었다. 시각예술의 본질에 해당하는 회화 장르 안에서 최소한의 선과 색채만 사용하는 작가들의 작품은 천장이 높고 넓은 면적의 화이트큐브 전시장과 잘 어울리며 내재된 에너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1층에는 장승택과 박기원의 작품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장승택은 물감과 붓이 아닌 화학적 질료를 통해 시대적 회화를 실험하며 세련된 현대성 안에 잠재되어 있는 연약하고 불안한 것들을 표현한다. 이번 작품은 색채를 사용하여 약간의 변주를 준 화면 안에 최소한의 움직이는 선을 통해 감각의 미세한 부분을 흔든다. 하나의 엷은 표면에 원을 그리고 층층이 쌓아 만든 화면은 정지된 형태가 움직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며 보는 이를 뿌옇고 모호한 심연으로 깊이 빠져들게 한다.
박기원은 장지로 된 화면을 비스듬한 선으로 분할하고 그 면 안에 촘촘하게 선을 그어 다양하게 작동하는 공간의 질서와 변화를 그려낸다. 사각 평면이라는 주어진 공간 안에서 비정형적으로 분할된 면들과 그 안에 각각 다른 감각으로 표현된 선들은 시간에 따라 축적된 세계의 조합이다. 사계절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인간이나 사물은 선으로 대입되어 선이 만든 면, 그리고 그 면들이 만든 공간 안에 감정이 흘러들어가는 명상적 작품이다.
2층 전시장에서 도윤희의 대작들과 최병소의 신문지 드로잉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도윤희의 회화는 형태의 흔적과 선들의 분절이 무채색 화면에 섬세한 감각으로 혼합되어 화면 전체로 퍼져나간다. 배경의 무의식적이며 원초적인 성층의 표현은 시간의 다양한 흔적들을 암시하고 그 위에 씨앗, 줄기의 시작과 같은 형태를 연결시킨다. 이렇게 생성된 비정형의 유기적 형상은 식물의 뿌리처럼 보이거나 산과 같은 자연풍경의 일부가 된다. 확실한 형태와 명확하지 않은 부분의 이중구조로 그려진 회화는 감각적인 것과 비감각적인 것을 느끼게 하며 존재의 비밀에 섬세하게 다가가게 한다. 최병소의 작품은 신문지의 한 면은 그대로 보여주고 다른 한 면은 연필로 내용을 지워 검은 화면을 만든 것이다. 그는 매일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싣는 신문의 활자를 볼펜으로 지우고 연필을 사용해 검은 색이 전면을 뒤덮을 때까지 그려 한 폭의 추상화로 표현했다. 작가는 편향, 왜곡, 변질이라는 매체 안의 숨은 속성에 대한 시니컬한 거부의 표현으로 모든 것을 지우고 예술의 순수함 속에 그것들을 가둬놓는다. 그려지면서 내용은 비워지고 채워지면서 화면은 비워지는 조형과 삶의 근본구조가 함께 수반된 작품이다. 검은색 표면은 흑연으로 축적된 두께와 작가의 반복적 드로잉에 의한 힘의 밀림으로 요철이 생성되면서 추상표현의 예술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현실 참여에 대한 관심과 개념적 태도에서 출발한, 관조적이지만은 않은 열린 개념의 새로운 추상이다.
이번 전시가 갖는 의미는 시대가 원하는 반짝이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영리한 작가들의 작품이 각광받는 미술계에 묵묵히 충실하게 자신의 세계를 깊이 파 들어가며 초월적 감각을 보여주는 작가들의 작업을 상업화랑에서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한국의 상황은 모더니즘을 경험하기도 전에 포스트모더니즘에 돌입하였기에 이상을 추구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예술의 진정한 감상을 해보지 못했다. 현란한 이미지의 제공과 투자의 수단으로 전락한 현재의 우리 미술계는 예술의 원래 목적인 본질을 깊이 사고하게 하는 중진, 원로들의 작품을 조명할 기회를 많이 마련해 삶과 예술이 나아가야 할 진정한 가치를 찾고 또 갖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김미진・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

[Review]소음인가요

소음인가요

서울시립미술관  5.13-6.22

사운드아트 전시를 표방한 <소음인가요>는 19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국내에서 즉흥음악, 전자음악, 실험적 테크노 등 다양한 장르의 활동을 전개해 온 뮤지션 19명의 작업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들의 사운드스케이프는 현대예술에 민감한 관람객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권병준, 최준용, 트랜지스터헤드 등 국내 인디음악에서 잘 알려진 이들 이외에도 초대된 뮤지션은 모두 2000년대 이후 국내 각종 전시에 특별 이벤트나 개막공연의 형태로 활발하게 참여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전시는 국내의 아방가르드 음악과 현대예술 분야의 크로스오버를 점검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것이다. 지금까지 독립적인 장르보다는 전시행사의 부속물로 수용되어 온 낯선 소리들과 비트들을 어떻게 현대예술의 맥락에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가, 또한 이 뮤지션들의 공연이 가진 본원적인 일회성과 덧없음(ephemerality)을 넘어서 이들의 작업을 보존하고 경험하는 데 적합한 인터페이스는 무엇인가라는 두 가지 문제의식이 이 전시를 둘러싼 분위기(ambience)가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의식 중 <소음인가요>는 두 번째 문제의식의 분위기를 불어넣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지금까지 서구 현대예술에서 사운드아트가 미적 대상이자 독립적인 연구주제로 부상하는 데 있어 핵심적으로 작용한 키워드들인 노이즈, 청취, 침묵, 물질성, 잠재성, 시공간 등은 이 전시에 참여한 뮤지션들의 작업들에서 다양한 진폭과 주파수로 환기될 수 있다. 하지만 전시의 구성이 이러한 키워드들 대신 아방가르드 음악과 전자음악의 장르들을 분류체계로 활용하기 때문에 관람자가 사운드아트의 개념과 위상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대신 전시는 국내 전자음악의 역동적이고도 다채로운 사운드스케이프를 망라할 수 있는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이 아카이브에 접근하고 경험하기 위해 효과적인 인터페이스를 마련하는 데 상대적으로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전시장에 설치된 19개의 아날로그 텔레비전 모니터는 사운드아트의 경험적 대상인 소리들을 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하드웨어의 물질성을 환기시키며, 찰나성에 사로잡힌 공연에 일정한 시공간적 지속성을 부여한다. 아울러 뮤지션들의 홈페이지와 사운드클라우드(Soundcloud)를 함께 소개하여 관람의 경험이 디지털 네트워크로 연장될 수 있도록 배려하였고, 관람자가 특정 뮤지션의 음원과 소개자료를 직접 CD로 구워 DIY 리플릿을 제작할 수 있게끔 했다.
비록 현대예술에서 사운드아트의 경향과 미학적 논점들을 이해하기에는 다소 부족하지만, 이 전시에 참여한 뮤지션들의 작업을 살펴보면 서구 사운드아트의 맥락에 비추어 볼 때 국내 뮤지션과 예술가들의 작업들에서 어떤 영역들이 상대적으로 활성화되어 있고 어떤 영역들이 부족한지를 파악해볼 수는 있다. 전자음악과 즉흥음악은 발달해왔지만 비주얼 뮤직(visual music)이나 갤러리 설치작품의 형태로 청각적 시공간을 구축하는 예술적 경향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소음인가요>전은 오늘날 국내 사운드아트의 현주소를 소개하는 동시에 앞으로의 가능한 발전방향들을 암시하고, 해당 분야를 테마로 한 더욱 본격적인 전시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김지훈・중앙대 교수

 

[Review]임승천 – 네 가지 언어 The Omnibus

임승천  __  네 가지 언어 The Omnibus

성곡미술관 5.2-7.27

‘네 가지 언어’라는 부제로 열린 임승천 개인전은 4막으로 구성된 옴니버스식 연극 같다.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는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설명하려는 가설이지만, 사실보다 더 사실처럼 다가오게 하는 강력한 가설이다. 거기에는 문학이나 연극, 영화같은 서사가 있지만 그러한 시간적 형식이 공간적 형식으로 번역될 때 간극이 발생한다. 막과 막 사이에는 도약과 비약이 있는 것이다. 서사적 요소들은 선형적 배열이 아니라, 관객의 상상력에 따라 다르게 조합되어 읽힌다. 열린 이야기이긴 하지만 서사와 형상은 서로를 받쳐주기 때문에 의미의 방향타는 존재한다. ‘상실’로 이름 붙은 1전시실은 심해의 풍경처럼 연출됐다. 제 몸보다 작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려 애쓰는 큰 물고기는 비대한 욕망의 덩어리이며, 주변에 배치된 사실적 혹은 신화적 인물들은 이 괴물의 희생자다. 희생자들은 발이 묶여있고, 등골마저 빨린 상태이다. 전시실 앞의 여주인공은 손에 피를 묻힌 채 경고하고, 이 모든 광경을 숙고하는 눈이 셋인 괴물/선지자 캐릭터는 작가의 또 다른 자아이다. ‘노시보(Nocebo)’로 이름 붙은 2전시실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라 할 수 있는 남녀 사이의 거짓말이 야기하는 비극의 무대다. 여성의 거짓말로 남성이 거인으로 석화되는 신화적 장면이다. 욕망은 상징계, 즉 언어와 사회를 무대로 하며, 언어에 실린 욕망이 주체와 객체를 모두 상징적 구조의 노예로 만든다. ‘고리’로 이름 붙은 3전시실은 희로애락의 4개 가면을 쓴 무뇌인들이 발목이 묶인 채 줄줄이 연결된 군상의 무대다. 이 집합적 정체성은 실제로는 원자화되어 있기에 강제적 연결이 필요하다. 연결망은 자연에서 발견되는 생명의 그물 같은 멋진 생태계가 아니다. 이성 및 합리성과 거리를 두는 이 분열적 개체들은 연좌제처럼 죄를 공유하는 클론들일 뿐이다.
‘순환’으로 이름 붙은 4전시실에서 서커스 천막 안 4단 케익 같은 구조는 조트로프(Zoetrope)처럼 돌면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천막 안의 구조물은 위로부터 시스템의 지배자/관리자/향유자/파괴자 순으로 배열된다. 체제를 선전하는 요란한 깃발, 감시하는 시선, 캉캉 춤 같은 소비의 향연 아래에서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벽을 치는 노동자는 시스템의 최말단 희생자이자 그에 도전하는 세력이다. 빙빙 도는 이 순환적 구조는 이익을 창출하는 기술로 환원된 사회를 상징하며, 각 계층을 이루는 문화적 정체성은 권력이 동원하는 요소일 뿐이다. 작가는 막간극에 잠시 등장한다. 막과 막 사이의 공간에는 가면 쓴 얼굴과, 원근법의 소실점에 위치하면서 세상에 대한 궁금증으로 흐릿한 유리창을 손으로 닦는 자폐적 인물이 보인다. 그는 가면이나 층층의 구조 뒤에 숨어있지만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세상에 대한 관심을 표한다. 보이지 않는 구조는 주인공들 못지않게 힘을 발휘한다. 심해처럼 색을 칠한 <Missing>은 무의식과 상실의 무대를 말하며, <Nocebo>에서 멀리 마주한 남녀를 연결짓는 것은 언어의 망이다. <Link>와 <Circle>은 사회 속 인간들이 맺는 관계망 그 자체이다. 구조는 인간들 사이의 드라마를 만드는 주된 요소이다. 인간은 그러한 구조의 산물이며, 익명적 구조에 얼굴 표정을 부여한다. 거대 물고기는 촘촘한 비늘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만 제 몸도 못 가눌 정도로 굼뜨다. 목적을 상실한 채 스스로를 유지 확대하는 것에만 몰두하는 현대의 비대화된 관료제를 닮았다. 비슷한 것들이 줄줄이 엮인 4면상의 군상은 4지 선다형 문제를 푸는 학생처럼 주어진 것 안에서만 자율성과 자유를 구가할 따름이다. 임승천의 작품은 이러한 체계 속에서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나 내밀한 자아도 왜곡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이선영・미술비평

 

[Review]정정주 – Scotoma

정정주  __  Scotoma

갤러리 조선 4.30-5.29

정정주의 작업은 건축의 모형과 내부에 설치된 움직이는 카메라를 통해 모형 내부의 건축적 이미지를 외부로 끌어오는 설치 영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내부를 은밀하게 비추는 그의 영상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면서 ‘바라보는’ 친숙한 공간을 카메라의 눈으로 재투사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보여지는’ 불안한 응시의 지점을 유추하게 하였다.      ‘응시의 도시’로도 불리는 그의 대표적인 영상설치 작업은 시선의 주체이자 응시의 대상으로 관객의 자리를 재위치지으면서 우리를 복잡한 시각의 장(場)과 그것이 야기하는 인간의 알 수 있는 불안감에 진지하게 연루시켰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응시는 시각장을 지배하는 코기토로서의 주체개념을 해체하는 정신분석학적 개념이기도 하다. 사물이 나를 응시하는 주체의 경험과 주체보다 선행하는 타자의 응시는 대상을 지배적으로 바라보는 통합적 의미로서의 주체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응시의 개념을 유추하게 하는 이번 전시 <암점(Scotoma)>의 대표작인 영상 설치 <응시>는 바로 이러한 시각과 주체의 문제를 의미화한다고 볼 수 있다.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전시장 중심에 대칭적으로 위치한 기다란 레일을 중심으로 두 개의 프로젝터가 서로를 향해 다가오고 물러서기를 반복한다. 각각의 프로젝터 앞에는 작은 비디오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 서서히 다가오고 물러가는 반대편 프로젝터의 느린 이동과 렌즈로부터 나오는 눈부신 빛을 담아내고, 이를 실시간으로 전시장 벽에 투사시킨다. 두 개의 프로젝터가 가까워질수록 빛의 점들은 강화되고 동시에 영상화면은 흰색의 빛으로 점점 차오른다. 관객이 들어섰을 때 마주하는 것은 바로 근원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없는  산재한 빛들이다. 프로젝터 기계와 영상화면 속에서 동시에 나오는 이 빛들은 라캉이 말한 정어리 깡통의 빛, 알 수 없으나 산재하는 타자의 응시를 은유하는 듯하다.
정정주의 작품 <응시>에서 관객은 작품을 바라볼 뿐 아니라 카메라에 의해 포착되어 비디오 영상 안에 포섭되면서 또 다른 관객의 시선의 대상이 되고 만다. 보고 보여지는 이러한 중층적인 시각의 메커니즘 속에서 관객은 지각의 혼란과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마주한다. 이러한 불안감은 시각장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데서 나오는 상실감, 위협적인 응시를 감지하였을 때 느끼는 심리적 상태와도 같다. 작가가 거주하는 아파트 거실을 찍은 영상과 지인들의 아파트 거실을 찍은 영상을 섞어 전시장 전체에 회전시키는 영상 작품 <5개의 거실>은 바로 이러한 심리적 상태를 증폭시킨다.
지금까지 언급한 응시와 주체의 관계에서 생각해 볼 때, 작가가 두 개의 작은 영상 <두번째 창문>과 <바다방>을 에드워드 호퍼의 회화로부터 끌어왔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이는 호퍼의 회화가 카메라가 바라보는 앵글과 유사하다는 단순한 사실을 넘어선다. 정정주의 영상에서 창문으로 가시화된 공간과 그 너머에서 들어오는 빛은 호퍼의 회화처럼 화면이라는 공간적 틀을 벗어나 화면 밖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그 안을 바라보는 응시의 지점들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배명지・코리아나미술관 책임 큐레이터

[Review]노석미 – 높고 높은 풀 위로

노석미  __  높고 높은 풀 위로

자하미술관 5.9-6.1

“너는 왜 일을 하지 않지? 일자리가 없어서 그런 거니? 내가 공장 소개해줄까?” 평소에 늘 집에 있는 나를 노는 사람으로 보았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이없어하면서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림을 그리잖아.” 그랬더니 그가 이상하게 여기면서 말했다. “그림을 그리는 건 직업이 아니잖아.” 갑자기 할 말이 없었다. 어찌 보면 만의 말이 맞기도 한 것 같았다. 나는 ‘공장에 다녀야 할까?’라는 생각을 잠깐이지만 정말 했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봉제공장의 미싱사면 좋겠다고 말이다.(노석미,《  서른살의 집》 중)
노석미는 그림을 그리는 모든 과정에서 먹고 마시고 일하고 쉬고 잠을 자며 풀벌레와 바람과 고양이들과 계절과 함께 일상을 조밀하게 그려내며 자유로운 취향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견지한다. 우리 사회가 언니들에게는 결코 편하지 않은 사회이니 쉬운 일은 아니다. 흔히 사람들은 멈추면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말이 많지만, 막상 멈추면 불안해하고 자꾸 무언가를 재촉하니 문제다. 게다가 자신만 그러면 누가 뭐라나. 괜히 주위 사람들을 흔들어댄다. 작가는 조급증과 강박에 출렁대는 파도를 자신의 취미로 수용한다. 불안과 불편은 잠시 지나가는 일상의 소소한 일과로 녹아든다.
1990년대 말 노석미의 개인전을 흥미롭게 본 기억이 난다. 당시 노석미의 작업은 컬러풀한 오브제를 전시장 전체에 매달고 늘어놓은 설치로 관객들은 전시 관람이 곧 작품 속을 돌아다니는 경험을 하게 된다. 수작업의 섬세함과 몰입의 경험을 재현하고 있었다. 그 후 간명하고 단순한 드로잉과 일러스트와 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미지와 함께 작가의 인생관과 세계관 또는 예술관과 연애관을 고백하거나 수다를 떠는 에세이를 담백하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불편할지언정 결코 외롭거나 불안해 보이지 않는다. 그림은 그녀의 삶의 균형을 잡고 채워주는 힘이자 의지이다. 그녀의 그림을 보면 오랜 시간 공들인 바느질이 주는 깊고 그윽한 풍취가 느껴진다.
그녀의 작업은 태도의 독자성, 수수하면서도 섬세하고 간결한 표현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어제와 내일을 염려하면서도 오늘 하루의 삶에 집중하는 생활의 미학을 보여준다. 그녀의 그림은 그림이자 동시에 일기이며 하나의 에세이이자 시가 된다. 풍경처럼 화가의 일상이 잘 버무려져 침전된다. 정교하거나 세련된 재현의 테크닉에 연연하지 않으며 드로잉과 채색과 이야기를 엮듯 이어가고 잠시 뚝 끊거나 방향을 틀며 의도적인 전략이나 계획 없이도 공감을 만들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일련의 그림과 에세이는 생활과 결합하는 시간의 아카이브를 만든다. 그녀의 아카이브는 불편함이 곧 아늑함과 멀리 있지 않고 모호한 것으로 채워지는 시간들이 사실은 매우 명쾌하기도 하다는 점을 느끼게 한다. 생활의 희로애락이 모자이크처럼 또는 조각보처럼 일상과 예술이 분리되기 이전으로 회귀하는 여행을 엿본다. 자신을 위한 시간을 만드는 과정이 곧 창작인 듯, 오롯이 자신의 시간들로 채운 채 잠시 세상을 지나가는 여행자의 야생성과 경쾌함이 있다. 그녀는 매번 디테일로 가득한 생활로 나아간다.

김노암・문화역서울284 예술감독

 

[Review]숨을 참는 법

숨을 참는 법

두산갤러리 4.23-5.31

국내의 전시 중에서 제목이 지나치게 모호한 경우가 많다. 안 그래도 작가가 다루는 소재나 형태가 복잡해지면서 미술계의 ‘전문인’들 사이에서도 ‘전위적인’ 작업들을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 쉽지 않다. 여기에 전시제목마저 모호하면 혼돈은 가중된다. 이번 <숨을 찾는 법>에서 각종 해체주의적인 쟁점–언어의 이중성, 소통 불가능성, 모순된 상황, 해석의 다양성, 좌절된 상황–이 재현되는 방식도 그러했다. 전시의 제목이나 작업들이 모호해서 진정으로 관객에게 좌절감을 안겨주거나 단순해서 허무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전시장 입구에서 “숨을 찾는 법”에 관한 설명이 주어졌다.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거리감 대신에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거리감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 <숨을 찾는 법>이 은유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비평적 사회현실에 해당한다. 하지만 정확히 ‘숨을 참는 법’이라는 제목이 이러한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불확실했다. 뿐만 아니라 전시장 입구에 놓인 구동희의 <부목>설치를 비롯하여 양정욱의 비교적 고전적인 목조 조각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도 불확실해 보였다. 물론 21세기 서구 인문과학의 발전이 소통의 불가능성을 줄곧 주장해왔고 현대미술도 이러한 주제를 열심히 답습해왔다. 하지만 좌절, 소통의 부재, 모순된 상황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공공의 장소에서 구현하고 관객의 공감대를 얻어낼 수 있을지는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전시장 입구에 놓인 구동희의 <부목>은 언뜻 보기에 단순하다. 시간을 두고 관객의 참여를 이끄는 상황이나 작업 구상단계에서 생성된 비하인드 스토리가 없었던 탓에 관객은 전시장의 중앙에 놓인 화분과 외곽에 설치된 각종 설치물들을 주시하면 된다. 그러나 전시장의 CCTV를 가리는 파이프, 생명력을 상징하는 화분, 트럼펫과 악기에 달려서 드리워진 현수막을 작가의 설명 없이 총체적으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물론 멋진 소리를 뿜어내지 못하는 악기나 건물의 뒤쪽에나 숨겨져 있을 법한 파이프가 외관으로 노출되어 있는 모습이 모순되어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그의 설치작업을 그리 단순히 해석해도 될는지, 좀 더 심오하고 독창적인 생각이 숨어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모호하거나’의 또 다른 축으로서 양정욱의 작업은 ‘단순하거나’의 위험을 지닌다. 각종 빈티지 물건들이 정교한 목조 조각에 부착된 작업은 보기에나 심지어 듣기에나 흥미롭다. 하지만 문제는 빈티지한 목조작업의 정교함과 신기함이 관객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피곤은 언제나 꿈과 함께’나 ‘아버지는 일주일동안 어떤 잠을 주무셨나요’등의 제목은 관객을 안도하게 해준다기보다는 허무하게 만든다. 아버지 세대에 대한 연민과 이에 투영된 우리 세대의 그야말로 좌절된 상황을 너무 직접적으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작가의 엄청난 노력과 기술을 고려해 보았을 때 복잡한 주제가 지나치게 단순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정지현의 <듣기 위해 귀를 사용한 일>은 좌절이 무엇인지, 자신의 감각기관에 대한 불신이 무엇인지가 비교적 정확하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모호하거나 단순하거나의 비판을 비껴가고 있다. 작은 소파가 놓인 공간 안에 들어가 전화기를 들게 되면 소리 대신   (예민한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고주파의 소리) 불이 켜지면서 앞쪽에 바닷가 풍경의 영상이 펼쳐지고 실내의 환경이 도드라진다. 즉 소리를 듣고자 했으나 시각이 더 자극되는 순간이다. 반면에 전화기를 내려놓으면 안쪽의 불이 꺼지면서 관객은 유리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대면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공간, 구석, 천장, 시각과 청각 등의 이면적인 세계에 관심을 지녀온 정지현은 이번 전시에서 자신의 오랜 관심을 현상학적이고 관객 참여적인 방식으로 풀고 있다.
결론적으로 전시의 공통적인 주제에 해당하는 허무주의적인 감수성은 현대미술에서 전혀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좌절, 모순, 소통의 부재, 심지어 민주주의의 몰락 같은 단어들이 별반 새롭게 들리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시대의 허무주의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다시금 돌아보아야 할 사고와 인지의 이면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없다면 좌절, 모순과 같은 개념들은 일종의 칙(chic)한 스타일로 잘못 해석되고 반복될 수밖에 없다. <숨을 참는 법>에서 필자가 좌절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고동연・미술비평

 

[Review]Two Drawing Project – 열림과 닫힘

Two Drawing Project  __  열림과 닫힘

갤러리 소소 5.13-6.15

오늘의 화가들에게 사는 일과 그리는 일은 대개 분리되어 있다. 미술과 인격은 분리되어도 상관없는 것처럼 여겨진 지 오래고, 무용(無用)을 기본으로 하는 예술이 실제의 삶과 맞닿는 일은 견우직녀의 만남처럼 어렵기만 하다. 삶을 예술처럼 살아가고, 예술을 삶처럼 만들 수 있다면 예술은 사라질 것인가? 김을의 말처럼 “그림이 필요 없는 아름다운 세상은 언제 오려나?”
‘서울 드로잉 클럽’이라는, 이름부터 좀 웃음이 나는 그룹의 전시회가 갤러리 소소에서 1, 2부에 걸쳐 진행되었다. 웬 일요화가회 같은 명칭을 가진 이 그룹의 멤버들은, 서로 제각각의 경향을 가진, 연령대도 차이가 나는 작가들이다. 이들은 그룹의 명칭과는 달리 모두 서울에 사는 것 같지도 않고, 전시도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 더 많이 했던 것 같고, 드로잉에 대한 관점의 깊이와 넓이도 서로 큰 차이가 나는 것처럼 보인다.
모일 이유가 없을 것 같은 이들이 모여, 전시의 1부에는 각자의 드로잉에 대한 관심을 내보이는 작품을 선보였으며, 2부에서는 여덟 명 작가가 각자 제안서를 쓰고 각각의 제안들에 반응하여 작품을 제작해 전시하였다. <노자(老子)가 가르쳐준 드로잉>(김을), <뜻한 바 없이>(김태헌), <Nothing>(송민규), <그림일기>(이상홍), <사건의 드로잉>(홍원석), <이어달리기(이승현), <15분이 넘지 않게>(이주영), <귤 보고 그리기>(이해민선), 이렇게 여덟 작가의 제안서가 모두에게 발송되어 상대의 제안에 따라 드로잉을 했기 때문에, 하나의 명제에 8점의 작품이 엮여서 보여지는 방식인 것이다.
여덟 작가의 제안들은 제안자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고 예술관을 짐작하게 하기도 하며, 혹은 작품에 대한 자신의 고민과 짐을 상대의 손에 넘겨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해서 결과적으로 나온 작품들은 대체로 각자의 원래 작풍의 바리에이션들이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타인의 제안을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삶 속으로 받아들이는 시간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15분이든, 7일간이든, 특정하게 소요되는 시간 속에서, 각자의 삶 속에서 서로를 만난 흔적들이 ‘드로잉’의 형식으로 드러나는데, 이 드로잉 작품들에서 작가들의 삶의 태도, 타인을 대하는 방식 등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윤희・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Review]장재민, 시간을 잃어버린 풍경

장재민, 시간을 잃어버린 풍경

Project Space 사루비아 다방 5.2-31

그리기의 대상.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에서 개인전을 연 작가 장재민의 그림은 풍경을 그리기의 대상으로 삼는다. 확정적이고 단선적인 풍경 대신에 그의 화면 위에 올라와 있는 풍경은 어쩌면 대상이라기보다 잡을 수 없는 상태이자 기온처럼 보인다. 변화무쌍한 어제와 오늘의 날씨, 더웠다가 추워지는 체온계의 높낮이처럼 그림 안에 뜨거움과 차가움이 공존한다고, ‘감각’에 의존해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장재민이 담아낸 풍경은 확정적 단서가 아닌 쌓인 밤과 낮의 시간, 물 옆의 연기와 숲속 공터 그리고 그 시간들 속으로 사라졌다가 조금씩 몸을 일으켜세우는 여백들로 채워져 있다. 이 채워지는 풍경 사이로 각각의 장면을 구성하는 대상들이 얽히고설킨 한때를 보여준다. 작가가 잡아낸 한때의 장면을 그는(그가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는) 왜 ‘시간을 잃어버린 풍경’이라 이름붙였을까. 잃어버렸기 때문에 폐허에서 솟아나는 선분홍색의 작은 살덩어리처럼, 그림 속을 가로지르는 붓질은 끊임없이 무엇인가 찾고자 한다.
찾기, 그리고 걷고 보며 탐색하는 일은 작가로 하여금 새로운 그림, 그리고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다른 풍경을 발굴하는 일을 지속하게 한다. 장재민의 그림은 풍경을 불확정적인 미지의 단서들로 둘러싸인 새로운 자리로 불러온다.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대상들을 멀리 또 가까이 보는 굴절된 조감의 시간을 통해 그림 속의 단서들은 하나씩 돌출해 바깥으로 걸어나온다.
초여름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날에 찾은 전시장은 어쩐지 더 차갑게 느껴진다. 전시장에 걸린 몇 점의 캔버스는 벽면에 밀착되어 있지 않다. 툭툭 몇 장면을 축약해 잘라낸 듯 평평하게 걸린 화이트 큐브의 그림들과는 다르다. 전시장에 따로 또 같이 있는 몇 점의 그림은 캔버스의 사각 프레임 안에 갇히지 않고 한 바퀴 둘러본 듯한 사방의 풍경이 되어 바깥의 현실과 겹친다. <Reaction for Nothing>, 가로 468cm에 달하는 긴 그림이 펼쳐져 있다. 어떤 그림은 벽의 모서리를 꼭지점으로 두고 사선으로 걸려있기에 벽에서 살짝 앞으로 튕겨져 나와 벽의 시간과 일정의 거리감을 확보한다. 이를테면 <Blank Sight>가 걸려있는 방식은 중력을 가진 그림의 무게와 지탱하는 벽이 팽팽하게 서로의 긴장 관계를 대칭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 속에서 보이는 산 아래의 이름 모를 장소는 작가가 잡아내고자 하는 ‘비어있음’의 역설로서, 풍성한 상태를 드러낸다. 장소의 구체성은 사라진 대신 그때 존재했던 찰나의 땅, 산, 공기의 감각들이 지난 시간의 흔적을 생경하게 더듬는다. 그런가 하면 <Cold Breath>에서 차가운 살얼음 수평 면 위에 수직으로 뻗은 가는 나뭇가지들은 가려진 시야를 복원시키는 날 선 한때의 기록이 되려 한다.
평소와 다른 몸의 감각을 불현듯 체현하는 것. 장재민의 그림에 공존하는 뜨거움과 차가움은 공존할 수 없는 모순을, 하나의 관통하는 시야 안에서 바라보게 한다. 회색 톤의 정조가 감도는 그림에는 몇 겹의 생채기, 그러니까 붓이 만들어낸 리듬의 흔적이 보일 듯 말 듯 약간의 경쾌함을 남긴다. 작품 <Line and Smoke>의 장면은 미끄러지면서 사라지는 연기의 찰나를 그림으로써 잡아낸다. 전시장에 있는 그림 중 가장 따뜻한 체온이 감도는 그림 <4 Boards>에는 유일하게 사람이 보인다. 발에서부터 허리까지, 하체만 보이는 한 사람이 서 있다. 관람객은 얼굴없는 이 사람의 시야를 유추하며 계단 위 공간에 놓인 이 그림을 올려다보게 된다. 사라져 가는 모든 풍경은 장재민의 그림 안에서 유일한 시간을 획득한다.

현시원・독립큐레이터

 

[Review]최혜인 – 小.行.星

최혜인  __  小.行.星

갤러리 담 4.23-5.3

최혜인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채 일상적으로 만나고 있는 곡식과 채소 등의 식물에서 소우주(microcosm)를 발견하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잡식성 동물인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외부로부터 영양을 섭취하는 식사 행위의 재료가 되는 곡물과 채소는 발아와 성장을 거쳐 수확됨으로써 인간의 생명 공급원으로 제공된다. 최혜인은 이러한 식물 성장의 순환 과정에서 변화하는 미세한 모습을 포착하여 그것을 우리 삶의 여러 가지 모습과 생명의 순환 과정을 표현하는 시각적 이미지로 응용하고 있다.
씨앗과 낱알에서 싹이 돋고 자라나서 개화와 결실로 이어지는 식물의 순환과정은 태아에서 발달하여 탄생과 성장으로 진화하는 우리 인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현상은 생명과학이나 철학에서 탐구와 사유의 중심에 놓고 바라본 시각과 달리 미술에서는 다분히 부차적인 모티프로 취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역사화와 종교화, 인물화에서 무심히 다루어진 주변적인 소재로서의 식물들이 화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그것으로부터 거대한 인간의 서사나 우주의 축소판 같은 내러티브가 도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최혜인의 작품은 이런 면에서 신선하다.
최혜인은 장르의 경계에 구속되지 않고 장지와 순지, 먹, 백토에서 캔버스와 아크릴까지 회화의 재료로 동원할 수 있는한 폭넓은 재료를 도입하여 몇 알의 콩과 쌀이 광활한 우주의 소용돌이와 우뚝 선 산의 모습처럼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끼리 알록달록한 색상을 띤 채 옹기종기 모여 앉은 모습에서 추상적 화면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여성 작가로서 모성과 생명에 대한 자연스러운 관심을 우주의 유동적인 변화와 달의 움직임 등의 천체물리학적 원리로 투사하여 비중있는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최혜인의 작품들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주제 선택만큼이나 작가적인 조형 탐구의 진지함과 일상생활 속에 벌어지는 생명현상에 대한 과장없는 논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가로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여 시각적으로 언어화해서 관람객과 소통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최혜인의 모티프에 대한 해석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하계훈・단국대 대학원 교수

 

[Review] 로와정 – 그 정도 거리

로와정  __  그 정도 거리

갤러리 팩토리 4.30-5.25

정치는 타자와의 관계설정의 문제이다. 나와 타자의 ‘거리’는 이들의 대화 방식을 결정한다. 이 대화는 온전히 일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불가능성의 인정, 즉 절대적 타자성의 인정이 대화의 첫 번째 전제조건이다. 자신의 언어를 고집하는 것도, 그 언어로 재단하여 연민이나 동정을 보내는 것도 폭력에 가깝다. ‘그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나에게 개입되는 언어를 통해 나의 언어를 반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이 대화는 온전하지 않고, 혼란스럽고, 덜그덕거린다. 불편하다. 이 불편함을 감내하는 것이 타자에 대한 최소한의 윤리이다.
로와정은 이번 전시 <그 정도의 거리>에서 이 ‘거리’ 자체를 전면에 내세운다. 나와 타자의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 없이 거리의 불편함을, 덜그럭거림을 그 자체로 보여준다. 로와정은 거리의 문제를 중심과 주변의 (위계적) 관계가 야기한 것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경계를 지운다는 하나마나한 추상적인 답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제시하는 것은 불편함 그 자체이다. 나의 언어가 문제시되고, 타자의 언어가 문제시되는 지점. 즉, 주체가 타자가 되고, 타자가 주체가 될 수 있는 상호 타자성의 인정이 이들 작업의 지향점으로 보인다. 두 다리로 지탱하던 사다리는 서로 연결되어 공간을 구획하고 있고, 전면을 향해야 하는 모니터는 후면을 보인다. (모니터를 보기 위해서는 전면이 마주한 거울을 통해 간접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전시장 배치도는 그 자릴 떠나는 순간 텅 빈 종이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 공간의 시각적 장치가 나에게 불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익숙하고 편안했다. 현대미술 어딘가에서 본 익숙한 문법들이다. 낯선 상황에 대한 익숙한 문법의 제시. 불편한 상황적 언어의 제시 그 자체로 이번 전시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도 있지만, 이들이 유지하고자 했던 ‘그 정도의 거리’가 시각적 언어로 발현되지 못함에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중심과 주변의 관계가 그들이 제시하고자 했던 절대적 타자성의 인정, 상호 타자성의 지향을 자욱한 안개 속으로 가져간 것은 아닐까?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이제 시작된, 그리고 중요한 이들의 문제의식이 타자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다성적 공간’에 피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대범・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