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숨을 참는 법

숨을 참는 법

두산갤러리 4.23-5.31

국내의 전시 중에서 제목이 지나치게 모호한 경우가 많다. 안 그래도 작가가 다루는 소재나 형태가 복잡해지면서 미술계의 ‘전문인’들 사이에서도 ‘전위적인’ 작업들을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 쉽지 않다. 여기에 전시제목마저 모호하면 혼돈은 가중된다. 이번 <숨을 찾는 법>에서 각종 해체주의적인 쟁점–언어의 이중성, 소통 불가능성, 모순된 상황, 해석의 다양성, 좌절된 상황–이 재현되는 방식도 그러했다. 전시의 제목이나 작업들이 모호해서 진정으로 관객에게 좌절감을 안겨주거나 단순해서 허무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전시장 입구에서 “숨을 찾는 법”에 관한 설명이 주어졌다.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거리감 대신에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거리감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 <숨을 찾는 법>이 은유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비평적 사회현실에 해당한다. 하지만 정확히 ‘숨을 참는 법’이라는 제목이 이러한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불확실했다. 뿐만 아니라 전시장 입구에 놓인 구동희의 <부목>설치를 비롯하여 양정욱의 비교적 고전적인 목조 조각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도 불확실해 보였다. 물론 21세기 서구 인문과학의 발전이 소통의 불가능성을 줄곧 주장해왔고 현대미술도 이러한 주제를 열심히 답습해왔다. 하지만 좌절, 소통의 부재, 모순된 상황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공공의 장소에서 구현하고 관객의 공감대를 얻어낼 수 있을지는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전시장 입구에 놓인 구동희의 <부목>은 언뜻 보기에 단순하다. 시간을 두고 관객의 참여를 이끄는 상황이나 작업 구상단계에서 생성된 비하인드 스토리가 없었던 탓에 관객은 전시장의 중앙에 놓인 화분과 외곽에 설치된 각종 설치물들을 주시하면 된다. 그러나 전시장의 CCTV를 가리는 파이프, 생명력을 상징하는 화분, 트럼펫과 악기에 달려서 드리워진 현수막을 작가의 설명 없이 총체적으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물론 멋진 소리를 뿜어내지 못하는 악기나 건물의 뒤쪽에나 숨겨져 있을 법한 파이프가 외관으로 노출되어 있는 모습이 모순되어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그의 설치작업을 그리 단순히 해석해도 될는지, 좀 더 심오하고 독창적인 생각이 숨어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모호하거나’의 또 다른 축으로서 양정욱의 작업은 ‘단순하거나’의 위험을 지닌다. 각종 빈티지 물건들이 정교한 목조 조각에 부착된 작업은 보기에나 심지어 듣기에나 흥미롭다. 하지만 문제는 빈티지한 목조작업의 정교함과 신기함이 관객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피곤은 언제나 꿈과 함께’나 ‘아버지는 일주일동안 어떤 잠을 주무셨나요’등의 제목은 관객을 안도하게 해준다기보다는 허무하게 만든다. 아버지 세대에 대한 연민과 이에 투영된 우리 세대의 그야말로 좌절된 상황을 너무 직접적으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작가의 엄청난 노력과 기술을 고려해 보았을 때 복잡한 주제가 지나치게 단순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정지현의 <듣기 위해 귀를 사용한 일>은 좌절이 무엇인지, 자신의 감각기관에 대한 불신이 무엇인지가 비교적 정확하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모호하거나 단순하거나의 비판을 비껴가고 있다. 작은 소파가 놓인 공간 안에 들어가 전화기를 들게 되면 소리 대신   (예민한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고주파의 소리) 불이 켜지면서 앞쪽에 바닷가 풍경의 영상이 펼쳐지고 실내의 환경이 도드라진다. 즉 소리를 듣고자 했으나 시각이 더 자극되는 순간이다. 반면에 전화기를 내려놓으면 안쪽의 불이 꺼지면서 관객은 유리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대면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공간, 구석, 천장, 시각과 청각 등의 이면적인 세계에 관심을 지녀온 정지현은 이번 전시에서 자신의 오랜 관심을 현상학적이고 관객 참여적인 방식으로 풀고 있다.
결론적으로 전시의 공통적인 주제에 해당하는 허무주의적인 감수성은 현대미술에서 전혀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좌절, 모순, 소통의 부재, 심지어 민주주의의 몰락 같은 단어들이 별반 새롭게 들리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시대의 허무주의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다시금 돌아보아야 할 사고와 인지의 이면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없다면 좌절, 모순과 같은 개념들은 일종의 칙(chic)한 스타일로 잘못 해석되고 반복될 수밖에 없다. <숨을 참는 법>에서 필자가 좌절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고동연・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