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21세기의 지정학적 노마드 이우환

김미경 한국문화예술연구소(KARI) 소장, 강남대 교수

이우환은 스스로를 노마드(nomad) 혹은 중간자로 정의하는 것 같다.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그가 우리 미술과 어떤 상관관계를 맺고 있을까? 또한 그의 작품세계 전반을 지배했던 일본이라는 유무형의 환경은 이우환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세계의 시각은? 이러한 많은 질문은 아직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다. 필자의 글을 통해 이우환과 우리, 그리고 일본,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논의의 물꼬를 트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지금 우리는 세계적인 거장이자 한국 국적을 갖고 있는 예술가 이우환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큰 예술로 배태되어 미학적 토론의 대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토양은 근본적으로 일본과 유럽의 문화였다. 그렇다면 과연 한곳에 정착하지 않는 노마드(nomad)면서 중간자(中間者)로서의 이우환에게 한국은 어떤 곳인가? 다시 말해서 한국 문화예술은 이우환의 사상 및 예술과 정작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한국의 예술가들과 이우환의 실체적인 관계는 어떠한가? 아울러 이우환을 바라보는 일본 내부의 비평적 시각과 일본이 세계에 선보이는 이우환은 상당한 간극이 있는데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서구에 거의 알려져 있지도 않고, 일본이나 한국의 많은 사람에게도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 그 대화를 위해서는 먼저 일본과 한국의 현대미술계에서 이우환을 동시에 살펴 볼 수 있어야 한다. 세계적인 거장의 사소한 주변 이야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못했던 그 대목은 먼저 한국에서 논의되어 세계가 인식하도록 해야 하며, 그것은 세계적인 한국인 예술가에 대해 자부하기 전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다.

1956년 여름, 서울대 미술대학 동양화과에 갓 입학한 이우환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어머니가 손에 들려준 약을 갖고 작은아버지의 병문안을 위해 감행했던 대학 1년생의 일본 밀항은 60여 년 전의 은밀한 사건이었고, 현재의 이우환을 당시에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작은아버지의 권유로 일본에 눌러앉기로 결심한 그는 도쿄의 다쿠쇼쿠(拓殖) 대학에서 일본어를 배운 뒤 니혼(日本)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일본에서 문학가로서의 성공을 꿈꾸며 끝없이 글을 쓰던 그가 자신의 열린 사상으로 젊은 일본 작가와 처음 교감했던 글은 1969년 6월 《산사이(三彩)》에 실린    <존재와 무를 넘어서-세키네 노부오론(存在と無を越えて-關根伸夫論)>이었다. 무명의 작가이자 비평가가 떠오르는 신예 작가에 대해 쓴 글은 성공적이었고, 그는 세키네와 주변의 작가들에게 사상적 키워드를 제공하며 1971년 파리비엔날레에 출품한 <관계항>으로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알려져 있다시피 훗날 국민미술 ‘모노하’(ものほ)로 불리게 된 일본의 중요한 예술 흐름에서 재일 한국인 이우환은 사실상 결정적인 존재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 2005년 일본 《비주츠테초(美術手帖)》의 ‘일본근현대미술사 100년’ 특집에서 일본 대표 미술가로 선정된 일, 2007년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과 2010년 일본 나오시마의 이우환미술관 건립, 그리고 2011년 구겐하임미술관 개인전과 2014년 베르사유 궁전에서의 전시를 관통하는 이력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우환의 사상과 예술의 특성이지만 일본의 국력과 다각도의 모노하 담론도 만만치 않은 뒷받침이다.

‘근대초극’ 논의의 중요성과 일본에서의 이우환

한국 문화예술계에서는 서구 근대나 컨템퍼러리 개념이 혼용되고 있을뿐더러 그것들을 우리에게 대입하는 이상으로 ‘근대초극(近代超克, The modern)’ 논의가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다. 그러나 필자가 《모노하의 길에서 만난 이우환》(2006)에서 상세히 다루었듯이 일본 지성계에서 ‘근대초극’ 논의는 매우 심도있게 전개되었으며 이우환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서구 근대문명과 모더니즘의 역사를 비판하며 뛰어넘자는 일본의 근대초극은 이우환의 글 <세계와 구조-대상의 와해>(1969.6)나 <컨셉션과 대상의 은폐> (1969.8), <데카르트와 서양의 숙명>(1969.9)에서도 잘 피력되어 있다. 그러나 이우환의 근대초극 관점의 보다 큰 강점은 단순히 서양을 이기는 동양 찬미가 아닌 ‘중간자’로서 서양과 동양의 경계도, 좌익과 우익의 이데올로기적 경계도 없는 통섭적 입장으로 열려있는 태도이다. 그것은 모노하 작가들을 그의 주변으로 모이게 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에 다마(多摩) 미술대학의 비쿄토(美共鬪)가 이우환을 맹공격한 이래 그 공격의 주동이었던 히코사카 나오요시(彦坂尚嘉)는 물론 미네무라 도시아키(峯村敏明)나 지바 시게오 (千葉成夫)로 이어지는 일본의 비평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우환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신비주의적 자연주의 파시스트’(히코사카)나 ‘창조를 부정하는 자’(지바), ‘붓을 빼앗기고 추방된 자들이 세운 왕국 모노하의 이우환’(미네무라) 같은 일본의 비평적 관점은 이우환 예술의 성격을 상당히 오해하거나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노하가 일본의 국민미술로 추앙받기 위해서는 이우환이 껄끄러운 ‘타자’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세계적인 모노하를 말하기 위해 이우환이 일본의 전면에 내세워지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의 그의 말은 그 점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한국에서 커서 일본에서 서려고 하니 일본 쪽은 나더러 한국적이라며 침입자 취급을 하려들고 시간이 흐르니 한국에서는 일본 바람을 탄 도망자로 몰려는 느낌도 있었다. 그래서 더 멀리 설 곳을 찾아 유럽 각지를 삼십여 년 헤맸더니 그쪽에서는 또 동양적이니 이방인이니 하며 칭찬으로 점잖게 제외시키려 들지 않는가. 하지만 그래도 낯선 곳을 쫓아다녀야 하고 생소한 작가와 만나고 함께 전람회를 거듭하는 가운데 열린 자기를 기르는 수 밖에 따로 살 곳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우환 《여백의 예술》(2002)에서

한국의 실험미술과 이우환의 실체적 관계

이우환은 평면회화나 입체설치에서 모두 자신의 미학을 관통시킨다. 1960년대 초엽에 이미 시도된 점과 선의 회화들은 1970년대에 특유의 조형과 미학으로 진화되었고,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입체설치는 모노하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애초에 이우환의 회화는 모노하라는 이름 아래에서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다. 모노하는 평면회화의 문제가 아닌 시공간의 물질 문제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1969년 7월 《공간》을 통해 ‘일본현대미술의 동향’을 처음 국내에 소개한 이우환의 글에는 ‘모노하’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다카마쓰 지로(高松次朗)의 광목 천과 세키네 노부오나 나리타 가즈히코    (成田克彦), 요시다 가쓰로(吉田克郞)의 돌로 눌러 놓은 종이 외에 이다 쇼지(飯田昭二)의 반으로 자른 통나무, 아오야마 고유(靑山光佑)의 인간형체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 이후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과 1972년 이우환의 명동화랑 전시, 그리고 이우환이 커미셔너였던 1973년 파리비엔날레 무렵까지 일본 모노하를 둘러싼 새로운 설치 형태의 조형은 한국의 젊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수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모노하’를 특정 카테고리화하지 않던 이우환이 그 용어를 한국에서 사용하지 않았고, 이우환 하면 ‘모노하’를 떠올렸던 국내 비평가들에게 이우환의 회화와 입체는 모두 ‘모노하’라는 이름으로 묶어졌다. 게다가 엉뚱하게도 ‘모노하’는 ‘모노크롬’과 혼동되는 해프닝을 빚기도 했다. ‘모노하’는 결코 회화적 개념이 아니며 ‘모노크롬(Monochrome)’과는 더더욱 상관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미학이 아닌 우정 관계 :이우환의 회화와 한국의 모노톤* 예술

이우환과 몇몇 한국의 실험미술 작가는 시공간에서 물체들이 발휘하는 물질성의 놀라운 생생함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예술의 태도를 공유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이우환과 한국의 모노톤 예술을 주도한 작가들 간에 맺어진 관계는 사실상 미학으로 연결된 것이 아닌, 서로의 필요에 의한 인간적인 우정 관계였다.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이우환의 회화와 한국 작가들의 관계는 1968년에 시작되었다. 1968년 7월 한국내 반일감정을 다소 극복하면서 본격적인 한일교류전으로 <한국현대회화전>이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열렸을 때, 이우환이 재일 작가로서 출품한 <퐁경Ⅱ>가 박서보에게 ‘그리지 않은 그림’으로 깊은 인상을 준 사실은 1984년 가을         《화랑》에 실린 박서보의 <이우환과의 만남 68년 이후를 회상한다>에 기록되어 있다.
“…이우환과의 첫 만남은 1968년 8월… 그는 한국현대회화전에 300호가 넘는 대작 3점을 출품했는데 분무기로 전 화면에 형광도료를 뿜어 놓은 소위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그런 작품이었다… 그것이 성공적이건 아니건 간에 추상표현주의의 강렬한 열기에 심신이 만신창이로 화상을 입고 있던 서울화단의 시각과는 전혀 다른 것을 추구하고 있음을 곧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우환은 한국의 모노톤 예술가들과 같이 전시를 하며 어울려 다녔으면서도 자신의 회화의 미학적 입장을 그들과 관련시켜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다시 말해 그의 회화는 한국의 ‘모노톤 예술’과 거의 상관이 없는 예술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유의 출발 지점부터 전혀 다르다.
그런데 왜 최근의 국내외 전시에서까지 ‘단색화’라는 이름으로 모노톤 예술가들과 이우환이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한국의 모노톤 예술가들 그리고 몇몇 전시 기획자와 국내의 몇몇 비평가가 미학이 아닌 우정관계에서 비롯된 이우환의 태도를 이우환의 미학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영향이 미술계에 미치는 파장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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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모노톤 예술Monotone Art’
이라 부르게 된 미술 경향은 그것이 ‘단일한 색’을 의미하는 모노크롬Monochrome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며, 역시 ‘단일한 색으로 이루어진 그림’을 의미하는 ‘단색화Dansaekhwa’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1999년 박사논문 이후 ‘단색조 회화Monotone Painting라 부르기도 했지만, 하종현이나 최병소, 김장섭 등 중요 작가들의 작업이 단순히 회화의 문제가 아닌 시공간의 물질 문제로 이미 확장되어 있다는 점을 중시하게 되었다.

유목민 중간자 이우환

이우환은 한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이라는 삼각형 속에서 그 어떤 꼭지점도 자신의 철저한 본거지가 되지 않는 일종의 유목민(nomad)이다. 그래서 어디서도 ‘타인(他人)’의 처지를 면치 못하는 이방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관계’ 속에서 이동하는 운동성을 갖고 있다. 2013년 파리의 카멜 므누(Kammel Mennour)에서 열린 전시에서 이우환은 자신의 회화와 입체설치를 놀랍게 조우시키는 ‘만남’의 관계를 또 한번 새롭게 시도했고 2014년 베르사유전시에서 서구 전통과 아시아의 미학을 조우시켰다.
필자는 올해 4월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한국 현대미술 다시 읽기(Re-reading Korean Contemporary Art)’란 제목으로 한 영어 발제에서 한국의 실험미술과 모노톤 예술의 용어 문제 및 한국 현대미술에서의 두 가지 정치 사회학적 매핑을 피력했고, 대단히 진지한 반응과 공감을 나누었다. 앞으로 한국의 미술계에서도 이우환과 그의 예술에 대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토론의 장에서 연구자들의 만남이 더욱 활성화되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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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멜 므누에서 열린 이우환 개인전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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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 <풍경 Ⅱ> 1968, <한국현대회화전>, 도쿄국립근대미술관 (2003년 이우환이 처음으로 필자에게 공개한 컬러 슬라이드)

위 이미지. 이우환 <관계항> 180×230×50cm 1969, 파리 비엔날레(1971) 출품작

사진 : 한국문화예술연구소(KARI) 아카이브 자료

[Exhibition Focus] 윤동천 개인전 병치(竝置)-그늘

지금 지금 지금, 여기 여기 여기, 우리 우리 우리

작가 윤동천은 고도압축성장을 이룬 한국사회의 이면에 도사린 부조리와 모순을 냉철하게 진단하고 은유적으로 표현해왔다. 6월 18일부터 7월 30일까지 신세계백화점 본점 갤러리에서 열리는 윤동천의 개인전 <병치(竝置)-그늘>은 작가가 포착한 한국사회의 적나라한 얼굴이다. 설치, 사진, 오브제 등 다양한 매체를 다루며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의 작품은 시사적이고 무거운 주제를 특유의 조형어법으로 해석하고 있다. 전시의 이모저모를 동료 작가인 석영기 교수(계원예술대학교 순수미술과)와의 대담을 통해 소개한다.

석영기(이하 석) 이번 전시는 언제부터 준비 해오셨나요.
윤동천(이하 윤) 제안은 몇 년 전에 처음 있었는데, 지난해 겨울에 일정이 최종 결정됐습니다. 그러니까 지난 겨울방학 무렵부터 준비해온 셈이죠.
전시 제목은 언제 정하셨나요.
막판에 홍보자료 내기 직전에요.(웃음) 5월 중순에 결정했어요. 그전엔 이것저것 망설임이 많았죠. 처음에는 백화점 갤러리가 재미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고객층을 생각하니 입장이 바뀌더군요. 아주 진지한 걸 보이자니 관객들이 재미없어할 것 같고, 남대문시장에서 물건을 사다 놓을까 생각도 해봤는데 내 나이에 너무 치기어린 짓 같고. (웃음) 엎치락뒤치락하다보니 시간이 좀 많이 걸렸죠. 다른 전시보다 수위조절을 하고 콘셉트를 잡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지난 2011년 OCI미술관 전시 때 내건 ‘탁류(濁流)’라는 제목은 비교적 선명했는데, 이번 전시제목은 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늘’은 이 사회의 ‘그늘’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세대가 만들어 놓은 ‘그늘’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에서 학생들과 얘기하다보면 젊은 세대들이 우리 때보다 훨씬 더 불안해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저희 세대에게 그림 그린다는 것은 잘 먹고 잘 살겠다는 희망을 포기하고 시작한 터라 별로 불안할 게 없었어요. 못살아봤자 얼마나 더 못살겠느냐는 심정이랄까요. 그런데 요즘 젊은 친구들은 생각이 다르더군요. 웬만큼 먹고산다는 전제하에 그림을 그리는 거지 절대빈곤은 아예 상상도 못하는 것 같아요. 상대적으로 전체가 잘 살게 되니까 그 대열에서 낙오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겠지요. 사실 요즘 젊은 세대는 다들 뛰어나잖아요. 시각경험도 많고, 아는 것도 많고, 재주도 많고. 만약 제가 요즘 이 친구들하고 경쟁한다면 맥도 못 출거예요. 그런데도 무지 불안해하고 괴로워해요. 자기 신뢰도 없고, 서로 지나치게 경쟁하고. 우리 세대는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으려 열심히 일했지요. 그러면 당연히 우리 자식 세대는 잘살겠지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우리 자식들 세대는 너무 불안해하며 어쩔 줄 모르더군요. ‘삼포(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세대’, ‘잉여세대’, ‘88만원 세대’라고 칭해지는 세대 말입니다. 아! 이런 게 바로 우리세대가 만들어 놓은 ‘그늘’이구나 생각하게 됐지요. 그런데 문득 내 나이를 생각해보니, 너무 많이 먹었더라고요. 아직까지도 남 탓을 하기엔 이미 한참 쪽팔릴 나이가 됐더군요.(웃음) 철이 안 들어서였는지 여태껏 그걸 잘 몰랐어요.
병치(竝置)는요?
병치는 방법론일 뿐입니다. 하나만 갖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뭔가를 늘어놓고 결합시키거나 대조, 반복해서 보여주는 방식 말입니다.
병치보다는 그늘에 방점을 찍어야겠군요.
그렇습니다. 병치는 보여주는 형식, 방법론이고, 실제로는 젊은 세대에 대한 저의 자책, 반성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늘-병치’는 좀 이상하더라고요. 그래서 ‘병치-그늘’로 정했습니다.
20년 전부터 윤 선생의 작품을 봐왔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말씀하신 것처럼 거의 비슷한 방법론을 유지해온 것 같아요. 20여 년 전, 그러니까 이른바 민중미술 끝 무렵 작품이 대부분 사회적 문제를 현실적으로 부각시켜 서술하는 방식이었는데, 그에 반해 윤 선생님의 방법은 은유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사실적이고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무엇에 빗대어서 설명하는 방식이란 말이죠. 이런 점에서 현실적인 문제를 은유적인 방식으로 처음 제기한 작가랄까, 그 그룹의 일원으로 평가합니다. 한편 1990년대 초반 설치작품도 크게 유행했는데, 그들은 형식 자체, 물성의 연장선에서 실험정신을 표현했지 사회적 문제의식을 작품에 적극 반영하지는 않았습니다. 윤 선생님은 이 설치미술을 이용해 사회적 문제제기를 했다고도  할 수 있고, 이 또한 처음 시도한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죠.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당시 활발했던 민중미술이 퇴보하면서 사라졌다는 거죠. 서술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던 작가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정치적 문제가 다 끝나거나 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존재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다시 사회적 문제에 관심 갖는 작가가 많아진 것 같아요.
제 나름대로는 은유뿐만 아니라 직유, 환유, 제유 등 여러 가지 비유법, 강조법을 써오긴 했습니다만. 결론이 나있는 뻔한 주제를 다룰 때 자주 위트, 유머, 파라독스 등의 역설적 표현을 하는 편이지요. 저는 꾀가 많아선지(웃음)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장기적으로 투자해야하는 방식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물론 종국에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소신은 있지만. 체질적으로 별로 끈기가 없는 것 같아요. 만약에 저 보고 글을 쓰라면 소설가는 못 되고 시인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때문에 직설적으로 발언하거나 정공법으로 대놓고 이야기하지 못하고 피해왔던 것 같기도 해요. 정공법으로 공감을 얻으려면 그만큼 더 정교하고, 분명하고, 설득력이 있어야 하니까요.
나쁘게 말하면 피한 거지만, 좋게 말하면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적인 문제를 환기시킨 거라고 할 수 있죠. 그때 민중미술 하는 분들과 같이 전시하기도 했는데…
민중미술 쪽에선 제가 갖고 있는 비판의식 때문에 저를 포섭하려 했던 것 같고, 반대쪽에선 제 작업의 실험적인 측면만 보고 현대미술의 일원으로 보려고 했죠. 이렇게 양쪽으로부터 제의를 받았지만, 사실은 양쪽에서 다 저를 곱게는 안 봤죠. 어느 한편으로 확실히 입장을 정리하기 원했지만 제가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당시는 민중과 모더니즘 이 둘을 놓고 선택을 고민하는 게 현실이었죠. 하지만 이쪽 아니면 저쪽 식으로 진영을 구분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어요.
당시 1980년대 후반 민중미술은 미술적인 주제에 의한 구별보다는 논리, 개인적 유대감, 집단의 소속감 같은 동지애에 치우쳤다고 봐요. 사실 내부적으로는 민중미술이 상당히 다양했는데도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그 시절 활동했던 작가들이 지금은 어떤 작업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다시 돌아와, 윤 선생님의 작품들을 보면 방법론적으론 은유적인 방식을 사용했고 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죠. 미학적 측면에서 보면 이렇습니다. 미적 범주에서 보자면 숭고미 비장미 우아미 골계미가 있는데, 민중미술은 숭고미 아니면 비장미에 해당되죠. 그런데 윤 선생님의 작품에서는 우아미 아니면 골계미가 느껴집니다. 골계미의 특징은 해학, 위트, 아이러니 등인데, 특히 윤 선생님 작품은 해학적인 미적 범주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그때로서는 해학적인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작가가 드물었죠. 조선후기에는 그림뿐 아니라 판소리처럼 해학적인 예술장르가 많았지만, 사라졌고. 근대 이후 모더니즘 시기엔 우아미가 휩쓸었죠. 사회적인 문제 내용은 별로 없고 시각적인 아름다움이나 정신적인 고상함을 추구하는 차분한…. 민중미술은 숭고미 아니면 비장미가 대세였고. 이렇게 볼 때 윤 선생님의 해학적인 작품은 미적 범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죠. 조선시대 미학을 이어받았다고 하면 너무 거창한가.(웃음)
제 작업을 보고 나쁘게 얘기하자면, 산만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하도 여러 가지 매체를 한꺼번에 다루고, 주제도 개인적인 것부터 사회적인 부분까지 다양하게 건드리니까요. 반면 좋게 얘기하면 실험적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요. 뭐 결국은 그 얘기가 그 얘기지만요.(웃음)
또 다른 지점에서 보자면 요즘은 이미지를 채집하는 방식의 작가가 많지만, 1990년대 무렵엔 그렇지 않았죠. 그런 분야에서도 윤 선생님은 선도적이었다고 봅니다.
이번 전시엔 유독 이미지를 채집해서 사용하는 작업이 많이 포함되었지요. 장소가 크면 대개 페인팅을 함께 거는데, 작을 경우 단일한 인상을 주기 위해 양식을 통일하는 편입니다. 헌데 사람들은 제가 페인팅 작업을 하는 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실제로 지금까지 몇 차례 상을 받은 것도 모두 페인팅작업의 결과였는데. 제가 진정성을 갖고 열심히 해도 사람들, 특히 기자들은 위트와 유머를 앞세워 얘기해요. 아무래도 그게 더 인상적이었나 봐요. 제가 보여 지고 싶은 모습과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모습에는 차이가 있겠지요. 실제로 페인팅을 할 때는 특성상 이미지 채집보다는 더 본격적으로 작업하는데 그게 잘 부각되지 않는 편이지요.
그런 측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네요. 이미지를 채집하고 그 이미지를 활용하는 작가로 인식되어 있고, 그린다는 건 잘 인식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상대적으로 회화작품만으로 한 전시가 최근엔 많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회화만 가지고 큰 전시를 해볼 생각이에요. 회화작업을 하면 마치 고향에 온 것 같고 설레요.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줄곧 해오던 것이었고, 한편으론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다른 작품의 프로세스는 머릿속에서 계산하고 이미 끝을 알고 만들어 가는데, 그림은 그렇지 않거든요. 제게 그림은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과정에 반응하고 끝을 찾아가는 작업이에요. 그렇다보니 전시를 준비할 때 제일 먼저 페인팅작업을 해요. 그러지 않으면 막판에 쫓기다 엉망이 되기 십상이죠. 예상할 수 있는 건 미루어도 상관없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건 미리미리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페인팅이 안 풀리면 그 전시 전체를 죽 쑤게 되죠.(웃음)
페인팅을 안 알아준다고 상당히 서운하신 것 같네요.(웃음) 그런데, 손재주도 좋은 것 같아요. 실험성 못지않게 완성도나 밀도 면에서도 아주 완벽하거든요. 메시지의 은유 못지않게 큰 장점이라고 봐요. 상업적 미술에서 요구하는 마감도 잘한다는 얘기죠. 사실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에게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봐요. 그런가 하면 앞서 말한 민중미술 세대와 다시 비교하자면 민중미술 작가들은 삶의 현장, 사건 현장 그 자체에서 작업했는데, 윤 선생님은 집 거실에서, 사무실에서 신문이나 TV를 보면서 작업을 한다고 할 수 있죠. 실재 그 자체가 아닌 사진이나 비디오로 찍은 2차적인 소스를 이용해 작업하는 거죠. 윤 선생님 작품 제작 방식은 그런 전환점에 위치해 있는 것 같아요. 더불어 국제적인 이슈보다는 한국 사회에 대한 관심이 큰 것 같아요. 보기 드문 경우인데, 제목도 한글로 정하고, 한글을 사랑하시나요?(웃음)
작업에 대한 저의 입장은 이미 미대 입학 전에 정리됐어요. 그리고 대학생활을 거치면서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고요. 그것은 결국 ‘지금, 여기, 우리’의 문제를 다루겠다는 생각이에요. 우리나라 사람한테 보여주는데 굳이 남의 나라 말을 쓸 필요도 없고.(웃음)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우리 세대는 민중미술과 모더니즘 사이에서 선택의 고민을 강요받았죠. 그런데 민중미술은 관점과 태도는 좋은데 방법론에선 좀 그렇고, 모더니즘은 미학적인 측면에선 일정 정도 성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도대체 소통이 안 되고…, 그래서 그 사이의 접점을 찾자는 게 저의 입장이었지요. 아마 그 당시 다른 작가들도 비슷한 입장이었을 테지만.
1990년대, 그러니까 한국 현대미술의 전환기라 할 수 있는 시기에 본격적으로 작품을 시작하신 건데, 본인의 작품 관점에서 봤을 때, 요새 젊은 작가의 작품을 보거나 윤 선생과 비슷한 주제의 작품을 하는 작가를 볼 때 어떤 생각이 드나요. 그들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슈를 어떻게 풀어내는지 궁금할 듯해서요.
글쎄요, 아주 솔직히 말해 요즘 젊은 작가의 작품을 보면 전반적으로는 “저걸 왜 하지?”, “저게 재미있나?”하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게 사실이에요. 이제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것에 누구나 동의하는 것 같고, 또 그 방향으로 가고 있기는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소통의 수단으로서 작품을 생각한다면 과연 누가 재밌어할까에 대한 고려가 먼저 있어야 할 텐데, 그들에겐 이에 대한 성찰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자신의 기호와 취향만 있지. 저는 그 지점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왜냐하면 저 자신은 남과 소통하기 위해선 작품이 한껏 친절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한편으로 또 다른 움직임이 있지요. 자기정체성을 드러내면서도 아주 깊게 사회와 연결시키는, 개인과 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연루되어 있는 작업 말입니다. 상당 기간 지속된 이런 움직임은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 사회와 돈독히 관계 맺고, 결속되어 있는 면모를 갖고 있는 것 같아 반갑기도 해요. 비교해보면 내 작업은 여전히 그냥 던지는 듯한 느낌이라서 스스로 반성도 많이 하게 되죠. 예를 들어 어떤 지역이나 사회에 몸담고 합류해서 함께 이뤄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집요하게 장기간의 프로세스 자체를 작업으로 이끌어내지도 않으니까요. 저는 여전히 전시장, 미술관 안에서 머물고 있어요. 사실 20년 전에도 어떤 인터뷰에서 “전시장보다 현장에서 이뤄지는 미술에 관심이 많다. 앞으로는 그런 작업을 더 진행할 요량이다”라고 밝히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게 막상 그렇게 잘 이뤄지지 않더라고요.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하고 수없이 벼르기만 했지요. 모두 저의 게으름과 실천력 부족이 문제겠지요.
현실 참여 면으로만 보면 윤 선생님의 미술은 미지근하다고도 볼 수 있죠. 그런데 작품 하나하나를 보면 다양한 볼거리, 다양한 읽을거리가 있어요. 예를 들면, <개가 달린다>라는 작품, 좀 당황스럽기도 한데, 이 작품을 보는 저도 아, 나도 개처럼 달리면서 살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스치지요.
그런데 미술 형식적인 면에서 보면, 문자와 이미지가 같이 사용되는 방식은 포스터나 일러스트레이션 같은 것이고요, 우리 전통미술에서는 문인화 같은 것이죠. 시서화 일체라고 하였는데, 시가 먼저 있고 그다음에 그 내용을 시각화하는 것이 문인화라고 할 수 있어요. 물론 지금은 일러스트레이션이라고 부르죠. 저는 이 <개가 달린다가 전통문인화 방법과 현대 일러스트레이션의 관계 속에 있다고 봐요. 문인화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자기수양의 세계죠, 반성적인 자기고찰도 포함되겠고. 일러스트레이션은 소통이 제일차적인 목적이겠고, 작가 본인의 내면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요. 이 작품에서는 자기 내면의 성찰과 소통이 동시에 보이네요. 그리고 작품 <촛불-태우다>는 기법이 독특하네요. 색감으로 보면 동판화 같기도 하고.
레이저 커팅기를 이용해서 판화지 표면을 살짝 태운 거죠. 원래 레이저 커팅기는 금속판, 아크릴, 나무 등을 레이저빔으로 절단하는 것인데 그 강도를 약하게 조절해서 작품에 이용했습니다. 판화지 종류마다 타는 정도가 일정하지 않아서 시행착오를 거치느라 제작하는 데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습니다.
촛불도 타고 종이도 타서 완성되는 작품이군요. 주제의식과 매우 일치하는 기법이라고나 할까(웃음) 실제 불난 흔적을 보니까 촛불의 느낌이 더 다가오네요. 그리고 노란색 종이에 검은색 테두리 액자들로 이루어진 작품은 세월호 사건을 생각나게 하는군요. 너무 가슴 아파 무슨 말을 더 할 수 없네요.
세월호 사건이 그 작업의 직접적인 동기지만 노란색에 대해서 저마다 다른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윤 선생님 작품을 보다보니 문득 작고하신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소설이 생각나요. 정치적인 주제, 사회적인 주제보다는 자신의 삶 주변의 일상을 끊임없이 지적하는 소설이죠. 기억나는 대목이 있는데, 몇 년 전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었던 내용이에요, 같은 아파트 단지 내에 부모님 집 건너편 동에 아들 내외가 사는 집이 있지요. 부모님은 밤이면 아들네 아파트 창을 바라보면서, 불이 환하면 아들네가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는구나, 불이 꺼져 있으면 아들네가 외식을 하는구나, 불이 흐릿하면 아들네가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붙이고 생일 파티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내용이죠. 뜨거운 내용은 아니지만 쓸쓸하기도 하죠. 하지만 소설가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죠. 박완서의 소설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우리의 삶을 다루듯이,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미술을 잘 모르시는 분들도 그냥 천천히 보면서 같이 느끼고, 이해하며, 공감할 수 있는 우리의 삶을 다루고 있다고 봐요. 미지근하지만 20년 이상 묵은 관록에서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진행 정리・이준희 편집장

윤동천(오른쪽)은 1957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크랜브룩 아카데미 오브 아트를 졸업했다. 1988년 갤러리 현대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8회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제1회 토탈미술상(1991), 제11회 석남미술상(1992) 제4회 국제 아시아 유럽 비엔날레 금상(1992)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석영기는 1960년 태어나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파리 8대학 조형미술과와 뉴욕주립대 판화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에서 첫 개인전 <컴퓨터사진판화전>(도올갤러리 1991)을 비롯해 <복제미술전>(자하문미술관 1992), <박정희, 박찬호, 그리고 15대 대선-컴퓨터 판화전>(담갤러리 1997), <박정희전>(표화랑 2001) 등 20여 회 개인전을 열었다. 현재 계원예술대학교 순수미술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윤동천 (42)

<모음집(母音集)-모이다(1933 한글맞춤법통일안에 의한,)> c-print 110×550cm(총 20점, 각각 55×55cm) 2014

윤동천 (35)

<정치가기성세대를 위한 도구들>(왼쪽) 종이위에 레이저 76×56cm 2014
각종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도구들을 시각화하였는데, 뻔한 내용이지만 결국은 우리들을 꾸짖어 달라는, 때려 달라는, 질책하고 벌하라는 얘기이다.

윤동천 (19)

<삶의 무게> 시트지, 신문, 폐지, 병, 캐리어 272×436×140cm 2014

 

 

[Exhibition Topic] Fluid FormⅡ Arab Contemporary Art

유동체로 흐르는 그곳에 관하여

한국에는 아직 생소한 아랍지역의 정치・문화・사회적 변화를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는 아랍현대미술전이 네모블루스퀘어(5.21~31)와 부산시립미술관(6.4~7.3)에서 열렸다. 독립큐레이터 김유연이 기획한 <Fluid Form II>가 그것. 이번 전시는 아랍문화에 대한 정형화를 시도하기보다 그들의 작품 속에 내재하는 다양한 문화적 통찰력과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면모에 주목한다.

이미솔  예술학

미지의 아랍세계. 신세기 벽두에 일어난 9・11 테러의 배후와 세계의 화약고라는 오명, 남성의 재산으로 취급되는 여성들이 깊이 베일을 두른 모습 등 아랍 하면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최근에 많이 노출된 정보일 뿐이다.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아랍어, 코란, 문명의 발상지, 각종 과학기술의 보고, 세계최대의 산유지, 아름다운 아라베스크로 장식된 사원들 그리고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이슬람교도 등 학교에서 배운 아랍의 이미지들이 연상된다. 그렇다면 아랍의 현대미술은 어떨까.
<아랍현대미술전 : Fluid Form(유동체) II>는 벌써 7회를 맞이한 아랍문화제 행사 중 하나로 서울과 부산에서 열렸다. 한국-아랍소사이어티가 주최하는 아랍문화제는 본 전시와 함께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진전 <수단 바아길>, 아랍영화제, 전 팔레스타인 총리의 초청강연, 주한아랍외교단의 특강, 그리고 일반인을 위한 강좌로 구성됐다. 우리에게 아직은 낯선 아랍의 문화를 이해하고 이를 누릴 수 있도록 마련한 것이다. <Fluid Form II전> 은 서울의 네모블루스퀘어와 부산시립미술관에서 두 차례에 걸쳐 아랍현대미술의 면면을 소개했다. ‘유동체’라는 제목으로 현재 급격한 확장과 변모를 겪고 있는 아랍세계와 작가들의 이야기를 유연하게 담고자 했으리라. 뉴욕을 거점으로 활동 중인 독립 기획자 김유연은 2010년 아랍 도시디자인 & 현대미술전 <Fluid Form I>으로 국내 최초 아랍현대미술전을 개최한 바 있으며 이번 전시는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더 많은 작품을 볼 수 있었던 부산시립미술관에서의 전시를 다룬다.)
사실 아랍은 우리에게 낯설기만한 세계는 아니다. 우리는 아랍과 활발하게  교류한 시기가 있었다. 중년 이상의 성인들은 기억할 것이다. 1970~1980년대 중동 건설 특수기에 한국 건설사의 많은 인력이 중동에서 활약했던 것을. 당시 우리 건설업체가 중동에서 발주한 공사의 90%를 수주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큰 산업적 교류가 있었음에도 그들의 종교를 비롯하여 문화, 생활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는 높지 않다. 하지만 <Fluid Form II전>을 보고 난 후라면, 최소한 터번을 두른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지만) 보더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이번 전시는 아랍세계 여러 이슈를 다루면서도 ‘무섭거나 무겁지’ 않다.
중동의 일부 국가들은 석유로 축적한 재력을 통해 굵직한 미술행사들을 진행하기에 나섰다. 아랍에미리트의 샤르자에서는 1993년부터 ‘샤르자비엔날레’를 개최해 현대미술에 대한 후원을 이어왔다. 2000년대 후반에 문을 연 ‘아부다비 아트페어’와 2007년 ‘걸프 아트페어’로 시작한 아트두바이 아트페어 등은 세계로 문을 열고 있는 아랍 사회와 함께 촉망받는 미술 행사이다. 이렇게 21세기의 문턱에서 이미 아랍세계는 개방을 위한 전초전을 끝낸 상태였다. 2011년 베니스비엔날레가 아랍의 현대미술에 방점을 두었고 2012년 광주비엔날레에서도 ‘아랍의 봄’을 담론에 등장시키며 아랍권 작가들의 작품을 다수 선보인 바 있다. 2010년 말 소셜미디어를 채널로 집결하고 자유, 민주적 인식을 확대한 시위대들은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반정부 시위를 벌였으며 튀니지와 이집트 등지에서 혁명으로 표현되는 정권 교체를 이루기도 했고 이 움직임은 ‘아랍의 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전례 없던 이 혁명의 물결도 그 세계에 온전한 해방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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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린 <FLUID FORM II> 전시광경  사마 알샤이비 <Muraqaba I>(맨 오른쪽) Diasec print 166×250cm 2014

아랍현대미술의 현주소
사우디아라비아의 작가 파이살 삼라는 ‘아랍의 봄’에 의구심을 드러낸다. 아직도 여전한 가난과 속박, 실업 등 복잡한 상황을 고발하고 그들의 움직임을 ‘봄’으로 개념화하려는 일각에 의심을 품는다. 허풍은 아닌지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아랍연합의 22개국을 상징하는 22개의 풍선은 ‘아랍의 봄’이라고 지시되고, 부풀려 있고, 언제든 터질 수 있다. 중동을 상징하는 모래가 이를 위태롭게 지지하고 있다. 이렇게, 사우디 방송에서 일하기도 했던 작가는 사회가 당연한 듯 사용하는 언어가 가진 진정한 의미는 어떤 것인지 고민하면서 대중매체의 시각메커니즘과 소통에 질문을 던진다. 미국의 영웅캐릭터가 등장하는 <청색에 대한 신화는 없다> 또한 매체를 통해 전파되는 허상을 드러내며, 퍼포먼스의 영상 스틸 컷을 전시한 <일그러진 현실>은 다층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미지를 통해 우리가 명확하다고 여겨온 정보들 속에서 진실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다.
삼라의 <아랍의 봄>보다 먼저 전시장 초입에서 만나는 작품들은 정서적으로 금방 접근할 수 있었다. 지아드 안타의 영상작품이 그렇다. 터키행진곡을 연주하는 이 영상에서는 마땅히 들려야 할 피아노 연주는 침묵하고 건반을 내려치는 타격음만이 공격적으로 울리고 있다. 이에, 행진곡은 전쟁을 떠올리게 하고 타격음은 폭력적인 갈등을 자아낸다. 여기에서 시선을 돌리면 사딕 알프라지를 만나게 된다. 모국(이라크)에서 추방당한 작가이다. 그의 작품 <지식을 획득하는 단계>에는 무채색의 배경과 검은 ‘존재’가 등장한다. 세 번으로 나누어 점진적으로 수그러드는 허리와 고개는 제목과 달리 겸손이 아닌 슬픔으로 여겨진다.
압둘낫세르 가렘(사우디아라비아)의 작품은 자신이 인식한 사회의 현실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렘은 <동식물 군락>, <콘크리트블록>을 통해 통제에 대한 불신을 떠오르게 하며, <수송 중>에서 그는 가득 메워진 아랍 문자와 아라베스크, 다이아몬드 가루 위에 활주로와 이륙하는 비행기를 두어 이중적인 국가의 권력(군사력)과 길을 제시한다. 한편 여성의 문제를 다루는 라에다 사데(팔레스타인)의 작품은 화면을 가득 채우는 황무지와 같은 곳에서 진공청소기를 작동시키는 롱샷의 영상작품으로, 여성으로서의 무기력함과 변화를 향한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의지 사이를 진동한다. 사마 알샤이비(팔레스타인/이라크)의 작품에서도 이와 유사한 정서가 느껴진다. 수면에 완벽하게 반사-복제된, 현실과 유사하면서도 비현실적인 이미지들은 빼앗긴 땅, 혹은 전쟁으로 인한 결핍 앞에서 무기력한 갈망을 드러낸다.
모하메드 카젬(아랍에미리트)은 폭넓은 관심사를 바탕으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관찰하고 오브제를 수집하거나 사진으로 작업한다. <나의 이웃>에서는 14장의 연작을 나열했다. 이는 그가 머물렀던 두바이의 풍경이다. 이주노동자가 절대다수를 차지했던 두바이에서 그의 이웃들은 바쁜 일과 때문에 집에서는 잠만 잤던 모양이다. 빨랫줄 위에서 다 마른 채 방치되어 이곳저곳으로 쏠린 옷가지는 부재의 지표가 된다. 그런데 이곳이 두바이인지, 뉴욕인지. 아니면 이탈리아의 한 주택가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작가는 오늘날 모든 도시가 지니는 공통의 초상을 옮기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도시의 풍경을 드러낸 작품이 또 있다. 칼레드 자라르(팔레스타인)의 <팔레스타인의 삶과 일>이다. 하지만 이건 팔레스타인의 풍경에만 해당한다. 전시장 한쪽에 자리한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은 가까운 길을 두고 장벽을 돌아 집으로 가야 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일상인 것이다. 전시장의 장벽에는 최단동선이 되는 지점에 예전 팔레스타인 지형의 구멍이 뚫려있어서 장벽의 해체와 영토 수복에 대한 열망을 전달한다. 가자지구와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를 둘러싼 벽의 높이는 8m. 길이는 700km에 이르며(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는 높이 3m, 길이 18km였다.) 조금씩 해체되거나 새로 축조되기도 한다. 자라르는 이 장벽을 조금씩 허물어 그 콘크리트로 축구공을 만들었다. 과정을 담은 영상에는 아무런 음악도 격렬한 언행도 없다. 청아한 끌과 정의 마찰음 뒤에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찰 수 없는 축구공이 등장한다. 자라르의 화법은 격한 감정을 배제하고 다소 ‘쿨’하게 다가오는데, 이보다 더 ‘쿨’한 모로코의 작가 핫산 하자즈는 다소 유쾌한 화면에 거리의 예술가들을 담아서 <나의 록스타 I> 시리즈를 만들었다. 전부 퍼포먼스적인 촬영과정을 거치며 즐거워 보이지만, 자유분방하고 화려해 보이는 이들은 끝내 아랍의 전통문양 또는 캔으로 만들어진 액자(frame)로 둘러싸여 있다.
아랍문화는 과거 문명의 시작이자 중심으로 그 자체로서 찬란한 때를 보냈다. 그러나 (미국으로 갈음되는) ‘서구’가 주도하는 현대사회는 그들의 틀로 아랍에 대한 재해석과 오해를 생산해왔다. 이번 전시는 그 틀을 매끄럽게 와해시키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쉬린 네샤트전>과는 또 다른 감성으로 다가온다. 이슬람의 여성 작가가 드러내는 무거운 주제는 전시장을 나서는 관객들에게 익숙하고 중량감 있는 고민을 쥐여주지만, 이에 반해 <Fluid Form II전>은 다양한 작가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아랍의 일면들을 통해 지금까지 직조되어 온 아랍의 이미지를 헤집어 놓는다. 넓은 전시공간에 펼쳐진 영상과 설치, 회화작품들은 저마다의 화법으로 여느 현대미술전과 ‘다르지 않은’ 유희를 제공한다. 그들이 가진 사회에 대한 고민, 규율과 억압에 기인한 고통, 혼란에 따른 불안, 미지에 대한 갈망, 그리고 세계에 대한 관찰은 여기 대한민국에도 존재할 뿐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아랍세계는 생각보다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고 그 거대한 유동체는 이제 주목을 요청하고 있다. ●

16.ANG27 Abdulnasser Gharem 'Flora & Fauna' 148 X 209 cm. Coriander Pigment Print on Photorag Paper with 4 Silkscreen Glazes Edition of 8 2013

압둘낫세르 가렘 <동식물 군락> 비디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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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살 삼라 <아랍의 봄> 22개의 풍선, 모래 200×200cm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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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현대미술전 : Fluid Form Ⅱ>을 기획한 독립큐레이터 김유연

“‘아랍의 봄’ 이후 아랍 현대미술의 가능성”

_MG_4318국내에선 아랍 현대미술이 아직 생소한 면이 많다. 왜 지금 아랍 현대미술을 주목해야한다고 생각하는가?
2011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아랍현대미술 전시가 최대 규모로 열렸다. 현재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에 루브르 미술관과 구겐하임 미술관이 건설 중이기 때문에 예전과는 달리 전 세계적으로 아랍 현대미술에 관심이 많다. 영국 브리티시 뮤지엄과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도 최근 현대미술까지 컬렉션 영역을 확장했으며, 뉴욕도 마찬가지다. 1993년부터 시작된 샤르자비엔날레는 지난 5년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급속히 향상돼 아랍의 현대미술 중심으로 굉장히 좋은 작가들을 대거 소개하고 있다. 2009년부터 샤르자비엔날레가 열리는 기간에 두바이 아트페어도 함께 열려 시너지 효과가 크다. 아랍 현대미술은 컨텍스트 자체도 굉장히 다양하다. 2010년 ‘아랍의 봄’ 이후 작가들이 정치적 색채도 강해졌고, 다양한 시각을 확보함으로써 콘텐츠도 훨씬 풍부해졌다. 아랍의 봄 자체가 그동안 묻혀 있었던 지식인들의 의식이 깨어나는 민주화운동이었다. 한국의 1970년대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트위터, 페이스북 등 멀티미디어의 역할이다. 하룻밤 만에 22개국에 급속히 전파되어 소통이 이루어졌다. 이번 전시를 통해서 아랍 현대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그냥 성찰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국 민주화 경향으로서의 미술운동의 현주소에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2010년에 열린 <아랍현대미술전 : 유동체>에 이어 선보인 이번 전시에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무엇인가?
2010년 전시에서는 아랍 현대미술과 도시 디자인에 주목해 역사, 사회, 정치, 도시환경 변화 등 현대 도시의 변화된 지형도를 소개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번에는 아랍 현대미술에 집중해 한곳에 멈추지 않고 유유히 이동하는 잠재적인 측면, 소용돌이처럼 정치・사회가 급속도로 변화하는 지점 등을 예술가의 작업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기획 의도였다. 아랍의 현대미술가들은 대부분 다국적이며, 원래 부족국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유목민처럼 작가들의 생각과 사고도 어느 한 국가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철학과 사상도 깊이가 있다. 아랍 현대미술을 정의 내리고 정형화하기보다, 아랍 현대미술이 국내에 소개될 때 다양한 배경을 가진 기획자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보여주는 것이 증요하다고 본다. 다양한 시각이 콜라주되면 내용이 보다 풍부해진다.  한 사람의 큐레이터로서 나의 시각을 제안하는 것이다.
작가들의 선정 기준은 무엇인가?
이번에 소개된 작가 중에 생소한 작가가 많을 것이다. 현재 내전이 발생한 시리아 지역 작가도 다수 참여했다. 아랍 현대미술에 접근하는 여러 갈래 중에서도 개념적이고 시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있다. 이때 개념적이라 함은 굉장히 정치적이라는 뜻이다. 역사를 드러내거나 사회 정치적 이슈, 환경, 개인적 경험 등을 작업으로 표현할 때 자기 목소리가 강하면서, 여러 겹의 메타포에 의해 시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 다양한 이면성을 내포하고 있다. 아랍의 봄 이후에 이곳에는 전쟁이 계속 발발하는데 그런 아픔을 다양한 방식으로 인상 깊게 표현한 작업이 꽤 많다.
아랍 현대미술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부족한 상황에서 서구 중심의 편향적 시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서구에 의해, 자본에 의해 편향적인 시각을 갖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런 점에서 좀 더 열린 측면에서 아랍 현대미술을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제대로 살펴보려면 한 작가를 집중 조명해도 부족하며 22명의 60여 점을 통해 아랍 현대미술의 전체 흐름을 읽기는 아직까지는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 자체마저 없으면 안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현재로선 이들의 역사, 사회, 정치 등 다양한 면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중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이 같은 전시일수록 누가 후원하고 누가 기획했는지 등 어떤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에 따라 종속적인 취향이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런 것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지금까지 독립큐레이터로 남아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어떻게 하면 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여줄 수 있는지는 나에게 늘 숙제로 남아 있다. 일단 서구적인 취향이라는 것은, 그 의도가 자기들의 이익 창출을 위한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본다. 시장도 그런 관점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시장 중심으로 소개되는 주류 작가들보다 오히려 역으로 가고자 하는 것이 제 역할인 것 같다. 서구적인 편향된 시장 구조에서 벗어나는 데 중요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고자 했다.
아랍미술계의 주요 컬렉션 및 행사들이 엄청난 재정 능력을 갖춘 왕족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 샤르자비엔날레, 아트두바이와 같은 행사들이 어떠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나.
아랍 현대미술 작가들은 이에 부정적인 생각도 많이 한다. 카타르, 아부다비에 있는 여러 미술관들에서 많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추상표현주의, 앤디워홀 등 서구의 미술품들을 소장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아랍현대미술은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편이다. 그래도 현재 두바이에 크리스티, 소더비 옥션 등이 설립돼 런던과 파리와 연결되어 있고, 글로벌한 움직임이 크다보니 이들 작가의 작품 가격도 당연히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어차피 시간문제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가 중에서도 굉장히 유명한 작가가 많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다양한 국제 교류 프로그램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싶다. 현재 하나바에서 제안받은 프로젝트가 있으며, 뉴욕에서 열릴 대규모 국제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15년 전 베를린에서 동북아 한자문화권을 중심으로 1990년부터 2000년까지 ‘퍼포먼스 보디 앤 아트’라는 프로젝트를 선보인 적 있는데, 최근 10년간 변화된 면모를 새롭게 조명할 계획이다. 이슬비 기자

 

 

 

 

[Special Artist] 임동식

충남 공주에서 생활하며 작업하는 작가 임동식은 우리 화단에서 아주 각별한 존재다. 일찍이 1980년대부터 야외 현장에서 자연에 반응하거나 교감하는 설치와 퍼포먼스 작업을 하면서 “서구 모더니즘의 형식주의에 동아시아의 사유체계를 투영시킨 급진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10년간의 독일 유학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임동식은 보다 진지하게 자신이 살아온, 그리고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곱씹으며 회화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한국 미술계의 어떤 범주에 속하거나 얽매이지 않은 채 묵묵히 홀로 자신의 인생관과 예술관을 탐구하는 수행의 길을 가고 있다. 작가 임동식의 과거와 현재의 여정을 살펴본다.

뫼비우스의 띠 같은 화가

이윤희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임동식은 1945년생, 올해 일흔이 되는 화가로, 그 자신의 현재를 ‘후기 사춘기’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하고 학습의 과정을 거치던 ‘초기 사춘기’를 지나, 1970년대 중반부터 사변적인 미술에 몰두하여 주로 야외에서 개념적인 작업을 하거나 각종 프로젝트를 조직하던 ‘중기 사춘기’를 거쳐, 2000년대 들어 다시 붓을 잡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후기 사춘기’를 지나고 있다는 것이다. 1
임동식의 자신의 삶에 대한 이러한 의미 부여에 한편 웃음이 나면서도 다른 한편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5년 전 임동식을 포함한 다섯 작가의 그룹전(<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대전시립미술관, 2009)을 기획하면서 공주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수시로 드나들 때의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다시 붓을 들고 본격적으로 유화를 그려 온 수년간 화면 속의 여러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제야 가속도가 붙은 것 같은 기분을 이야기하다가 그는 “앞으로도 이렇게 나가면 몇 년 후에는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이 두고두고 나의 마음에 남았다. (이제 세상을 조금 알 것 같은 나머지, 남은 인생 동안 더 새로운 것을 만날 가능성이 없이 이대로 살아야 할 것 같은, 어딘지 지치고 조로(早老)했던 당시의 나에게 이 말의 울림은 상당히 컸다) 그가 자신의 삶의 여정을 지속적인 사춘기로 말하는 것은, 작업을 통한 스스로의 변화 가능성을 늘 열어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와 비슷한 연배 작가들의 작품에서, 혹은 그보다 훨씬 젊은 작가들의 경우에도, 이유가 무엇이든(미술시장의 요구이든, 안정된 생활의 반영이든, 혹은 포기이든) ‘한때’ 훌륭했던 자신의 작품에 대한 복제와 반복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을 숱하게 보아왔기에, 또한 미술사에 남은 수많은 화가의 작품이 인생을 따라 그리는 하향곡선을 보아왔기에, 이대로 시간이 더 가면 훌륭한 화가가 될 것 같다는, 노년으로 접어든 화가의 발언은, 충분히 놀라운 것이었다.
그의 말이 단지 소박한 겸양이 아닌 것은, 그가 당시에 펼쳐놓던 작품들의 양상이 스스로 증명했다. 과거에 야외 현장에서 행했던 퍼포먼스를 회고하여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들, 미술과는 전혀 관계없는 동네 친구 우평남 씨가 소개하는 좋은 풍경들을 그리는 <친구가 권유한 풍경> 연작, 자신의 과거 기억을 더듬으며 지금은 사라진 금강변의 지난 풍경을 그리는 작업들, 게다가 새로이 막 시작했던, 동양 비단문화의 흥망성쇠를 통해 동서양의 문화 접변 현상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대하 서사 <비단장사 왕서방> 연작까지, 그는 당시 새로운 작품들을 무한 생성 중이었다.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떠오르는 새로운 연작의 아이디어와, 특히 비단장사 왕서방의 인생 과정에 중간 중간 개입해 들어가는 세부적인 방계의 이야기들까지, 그가 현재 하고 있는 작품들과 향후 계획하는 작품들이 모두 실현되려면 앞으로 10년 넘어 20년은 족히 걸릴 것으로 보였다. 나는 당시 임동식이, 만물이 색을 입으며 움트는 봄날과 같은 생성의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다고 느꼈다. 말하자면 이것이 사춘기와 같은 것이 아니면 무엇이랴.
그로부터 5년 후, 2014년 6월의 임동식은 과거에 진행하던 연작에 추가하는 작품들뿐 아니라, 어김없이 처음 보는 새로운 연작의 작품들을 펼쳐놓고 있었다. 작업실의 한 켠에는, 큰 줄기의 서사에 하루가 다르게 작은 이야기들이 끼어들어 언제 마무리 될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던 <비단장사 왕서방> 연작의 마무리 작업이 <도심의 밤에 불빛되어 퍼지다>라는 제목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과거 야외에서 행했던 설치미술과 퍼포먼스를 캔버스에 옮겨 담는 작업 중 새로이 시작된 것으로는, 난생처음 발을 디딘 바닷가인 안면도 꽃지해수욕장에서 커다란 알의 형상들을 해변에 흩어 놓은 자신의 설치작업을 그린 작품(비가 막 내리기 시작했을 때 카메라를 가진 이에게 “나 한 장 찍어줘!”라고 멀리서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임동식 자신의 자화상과 알 형상 설치작품이 그려진 그림)과 故 전국광의 설치작업을 회고하여 그린 작품(안면도의 해변에서 보이는 작은 섬에 수평선을 연장하는 듯한 흰 띠를 두른 전국광의 설치작업. 사진을 필름으로 찍어 인화하던 시절 이 장면을 찍었지만 실패로 돌아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현장을 본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그리고 있다) 등이 시작 단계에 있었다.
다른 한편, 과거 자신에게 풍경을 그리기를 권했던 동네 친구 우평남 씨를 모델로 임동식 자신의 자화상과 더불어 2인 초상을 그린 것으로 시작된 <자연예술가와 화가>의 후속 작품 여러 점, 그가 공주 원골에서 기획했던 ‘예술과 마을’ 프로젝트에서의 여러 면면들이 새로이 그림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또한 새로운 형식의 작품으로, 과거 대학시절부터의 드로잉들을 다시 끄집어내 캔버스의 한쪽 면에 과거 드로잉을 붙이고 다른 쪽 면에 그 드로잉을 재해석하는 100점의 연작 <그 시절을 그리다>를 위해 100점의 과거 드로잉이 선별되어 100개의 캔버스에 차곡차곡 놓여 있었다.
전혀 새로운 내용의 작업으로는 <선생님을 그리다> 연작이 있었는데, 이는 임동식의 고등학교 시절 미술선생님의 일대기에 관한 것이다. 지리선생님과 미술선생님을 겸하던, 어린 임동식에게 끊임없이 스케치를 하라고 권했던, 이미 40년 전에 작고한 과거의 선생님은 살아생전에 자신을 그려달라고 청했었고, 이를 잊지 않은 제자 임동식은 이제 선생님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선생님을 그리다> 시리즈의 하이라이트는, 그림 속에서 상상으로 선생님을 세계여행 시켜 드리는 작품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절 세계를 돌아다니는 여행가를 무척 부러워했던 선생님을 기억하며, 이를테면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 서 있는 선생님, 에펠탑을 구경하는 선생님의 모습 등을 상상으로 그려낼 예정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들에서 그의 작품을 형성하는 두 개의 큰 축인 서사성과 서정성이 극도로 아름답게 결합될 것 같아서, 완성된 작품을 보기도 전에 생각만으로도 벌써 마음이 움직인다.

비단장사 왕서방 - 그림과 모델 130 x162cm oil on canvas 2009

<비단장사 왕서방-그림과 모델> 캔버스에 유채 130×162cm 2009

서정적이고 서사적인 완결판
임동식의 작품에서 서정적인 특성은 주로 자연을 대상으로 할 때 두드러져 보인다. 예컨대 계란을 헤드폰처럼 귀에 대고 ‘생명의 음’을 듣는 작업,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나는 과정을 두 손을 오무렸다 폄으로써 모방하는 작업, 소나무 묘목의 가지에 자신의 수염을 매어 식물과 교감을 시도한 작업 등 초기의 퍼포먼스 작업들에서부터, 캔버스에 그린 풍경화들에 이르기까지 자연과 마주했을 때 일어나는 미세한 정조들을 최대한 정밀하게 담아내려는 그의 의도를 볼 수 있다. 그의 풍경화에는 땅 위에 무질서하게 솟아 있는 풀잎 하나, 나무에서 뻗어나가는 잔가지 하나도 아무렇게나 그려지는 법이 없다. 또한 풍경을 바라보는 당시의 마음을 더 가까이 표현하기 위해, 그의 화면은 처음에는 햇살이 비치는 풍경으로 그려졌던 것이 다음 날에는 보슬거리는 비가 내리기를 거듭하고, 눈 덮인 겨울 풍경으로 시작했던 것이 어느덧 봄 풍경으로 마무리되는 일이 허다한 것이다. 화가인 자신이 선택한 풍경이 아니라 자연과 더 친밀하게 살아온 친구의 권유를 받아들여 친구의 눈과 감성으로 본 풍경을 그리는 방식에서도,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자신을 낮추어 가까이 다가가려는 그의 태도를 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풍경이 보여주는 실재감, 박진감은 사물을 사진처럼 리얼하게 그리는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자신이 그리는 대상과 최대한 정서적 교감을 하는 태도에서 배어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임동식은 소년 시절부터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서사적 특성의 그림을 그려왔다. 마치 영화의 스틸 장면들을 엮어놓은 듯한, 혹은 만화처럼 프레임에 담은 그림들과 그것을 설명하는 문장들이 결합되어 있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서사적 그림 연작이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초기 사춘기’부터 드러난 이러한 특성은 개념적 작업을 주로 했던 ‘중기 사춘기’에도 이어져 갱지나 자투리 종이들에 그린 수많은 드로잉에 상투를 튼 남자와 한복을 입은 여자, 사랑에 빠진 동네 처녀, 마을을 돌아다니는 엿장수 아이, 혹은 심청이와 심봉사 같은 이야기를 담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캔버스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후기 사춘기’의 수많은 풍경화와 인물화들에서도 이러한 특성은 여전히 보이는데, 자신의 과거 경험을 회고하여 그리는 연작은 물론, 단편의 그림들에서도 길든 짧든 완결된 이야기 구조를 볼 수 있다. 예컨대 <고개 숙인 꽃과 마주한 인사>는 수선화 밭을 지나며 한 방향으로 숙여진 꽃들이 모두 자신을 향해 인사를 하는 것처럼 느껴져 자신도 모자를 벗고 꽃들을 향해 머리 숙여 인사했던 과거의 강렬했던 경험의 ‘이야기’가 담긴 것이고, 그저 나무를 그린 풍경처럼 보이는 <친구가 권유한 방흥리 할아버지 고목나무 – 여덟 방향>은 사방팔방으로 가지를 뻗은 몸집 큰 나무를 하나의 방향에서 보지 않고 여덟 방향에서 관찰하여 그린 것으로 하나의 나무가 보여주는 각기 다른 측면들에 주목해 면면의 속성들을 완결된 하나의 작품으로 엮은 것이다. 친구와 자신의 이인초상인 <자연예술가와 화가>에서는 이보다 더 적극적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계절에 두 사람의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대입해, 소년기부터 장년기까지 서로 다른 인생 여정을 살아오다 노년기에 이르러 서로 비슷한 지점에서 만나는 이야기를 유장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서사성의 완결판은, 그 자신이 지어낸 스토리를 그린 <비단장사 왕서방> 연작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선생님을 그리다>는 과거의 현실과 더불어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못한 상상의 이야기들이 결합되는, 또 다른 경지의 서사성이 개입되는 것이다. 물론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서사적 특성과 서정적 특성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서로 구분할 수 없이 맞물려 있다.
그림에 한정해서 보자면, 그의 서정적이고 서사적인 작품 상당수가 자신의 과거와 연결점을 갖는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한 특성으로 보인다. 과거의 드로잉을 개작하는 작업(과거 드로잉의 개작은 현재 시도하는 캔버스 작업들 이전부터 다른 방식으로 행해져왔다. 예컨대 대학 시절 수업시간에 했던 누드 드로잉들에 옷을 입히거나 다른 인물을 첨가하는 작업 등 다소 서투른 솜씨로 그려진 과거 작업들에 다시 손을 대는 ‘덧그리기’ 작업들이 그것이다)과, 과거의 강렬했던 자연 속 체험을 회고하여 더 강렬하게 그려내는 작업, 자신과 친구의 과거지사들을 떠올려 그리는 작업, 더 까마득한 과거의 선생님을 그리는 작업 등은 모두 과거를 현재에 다시 불러내는 작업들이다.
그는 자신의 과거 기억을 이미지에 담아 생생하게 소환할 뿐 아니라, 기억 속의 자잘한 아쉬움이나 모순들을 수정하고 재구성한다. 세계 여행을 떠나지 못했던 선생님의 인생을 그림 속에서 바꾸고, 과거의 드로잉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옛 시절에 가졌던 생각들을 되돌이킴과 동시에 과거와 달라진 현재를 그 속에 반영하며, 늘상 결별로 마감된 지난 프로젝트들의 좋았던 모습을 부각시켜 새로운 현재적 기억으로 마감하는 일, 그것은 과거를 소환하여 재구성하는 것일 뿐 아니라 과거의 기억들과 화해하는 그의 방식인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살아가고 있는 과정과 삶을 바라보는 태도를 통해 예술이 의미를 얻게 됨을 보여준다. 그의 과거적 소재 지향은 흘러가는 시간을 붙들어 현재에 매어놓으려는 시도가 아니라, 과거로부터의 존재인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함으로써 현재를 활동시키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서정성과 서사성을 따로 떼어 구분하기 어렵듯이, 과거와 현재의 경계 역시 명확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딱 한 번 있었던 과거의 일을 떠올려 현재의 캔버스에 붓을 대는 그 순간, 과거와 현재의 경계는 무너지는 것이다. 따라서 언제든 현재화할 수 있는 그의 과거에 대한 회고에는, 회한의 감정이나 자기연민이 개입되지 않는다. 한때 나는 그의 과거 지향성을 나르시시즘적 취향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보았으나, 그보다는 오히려 그가 가진 시간 그 자체에 대한 독특한 관점과 감각의 소산인 것 같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시간에 대한 관점은 달리 말하면, 그의 인생관이고 예술관이다. ●

임동식은 1945년 충남 연기에서 태어났다. 공주 중・고등학교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독일 국립 함부르크미술대학 자유미술학과를 졸업했다. 1967년 공주문화원에서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5회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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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임동식의 작업실 외관과 내부 모습. 친구가 마련해준 낡은 집을 수년간 손수 고치고 다듬어서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건물의 안팎을 황토로 마감했고, 여러 칸으로 나뉜 작은 방에선 각기 다른 시리즈 작업을 동시에 진행한다.
특히 기와 지붕에 구멍을 뚫어 자연광이 내부로 비치게 한 것이 돋보인다. 이렇게 함으로써 물감 본연의 색에 좀더 가까운 색감을 볼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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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권유한 방흥리 할아버지 고목나무-여덟 방향> 캔버스에 유채 80×100cm(각) 2010 2010년 스페이스 공명에서 열린 개인전 전시 광경

고개숙인 꽃과의 인사 Oil on canvas 2005

<고개 숙인 꽃에 대한 인사> 캔버스에 유채 181.8×227.3cm 2005
이 그림의 내용은 1986년 함부르크에서의 행한 야외작업의 모습을 담고 있다.


1  임동식의 작업 여정을 그의 오랜 지음(知音)인 홍명섭은 2005년에 다음과 같이 구분하였다. (모던한 평면작업을 하던 홍대 졸업 전후를 제외하고) 야외미술의 시절, 자연미술의 시절, 공동체미술의 시절, 원초미술의 시절(<임동식>전 카탈로그 서문, 아르코 미술관, 2005).
임동식은 1975년 안면도에서 ‘청년작가회 야외작품 발표회’에 참가한 이후 야외 현장에서 자연에 반응하거나 교감하는 설치와 퍼포먼스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여러 프로젝트를 기획해왔다. 1980년의 금강현대미술제와 1981년에서 1998년까지 지속되었던 야투(野投), 1980년대 독일에서 10년 유학 후 돌아와 1991년에 시작한 <금강국제자연미술전> 등이 그것이다. 한편 1993년부터 2001년까지 ‘예술과 마을’이라는 명칭으로 공주 원골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는 농민들과 예술가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농민들의 작업과 예술가들의 작업이 구분 없이 보여진, 새로운 형태의 전시이자 나아가 새로운 공동체의 실험으로 기록될 만하다. 임동식의 지난 작업과 프로젝트들은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독보적 위상을 가지며, 특히 1993년 겨울에 시작했던 ‘예술과 마을’ 프로젝트는, 서양에서 1990년대에 그 맹아가 시작되고 우리나라에서 2000년대 이후 현재까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rt)’의 세계적 선구 사례라 평가받을 만하다.

[Artist Review] 최인선

성(聖)과 속(俗), 그리고 미술관

캔버스 앞에서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거듭해온 화가 최인선의 25년간의 작품세계를 조망한 전시가 지하 4층에서 3층에 이르는 아라아트센터의 전관에서 열렸다. <최인선의 미학오디세이 25년>(6.5~8.5)이 그것.
초기에 선보인 단색화에서 다양한 색을 끌어들인 근작에 이르기까지 총 40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한 예술가의 예술적 고민뿐 아니라 삶의 고뇌까지 엿볼 수 있는 자리이다.

양은희  미술사

한 화가의 역사를 보는 일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아직 살아있는 화가의 그림을 통해 25년이라는 시간을 보는 일은 각각의 화폭에 구현된 이미지를 통해 아직 결말에 도달하지 않은 진행형의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개인사의 세부를 다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림 속의 여러 풍경, 인물, 정물을 통해 그의 시선을 추측하고, 안료, 색채, 질감을 통해 성격을 보며, 드로잉이나 스케치와 같은 흔적을 통해 그의 사고를 들여다볼 수 있다.
아라아트센터의 전층에 걸쳐 전시되고 있는 <최인선의 미학오디세이 25년전>은 작가가 직접 수백 점을 디스플레이하면서 플롯을 만들고, 연도순이 아니라, 작가가 설정한 개연성을 따라 극적 긴장과 이완을 담은 전시이다. 이 전시는 캔버스 앞에서 25년 이상의 시간을 보냈을 작가의 성과를 보여준다는 목적에 맞게 물질, 질료, 색채, 점, 선, 면, 추상, 구상과 같은 회화의 고유한 요소와 특성이 한 예술가의 정신과 육체를 거쳐 승화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세계를 보여주는 진행형의 영화처럼 보인다. 한 인터뷰에서 그가 “예술을 위한 예술”에 지나치게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한다고 말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마치 숙명처럼 받아들인 사각형의 평면에 충직하게, 그리고 고독하게 지난 수십 년간 전개된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통해 이미지, 사고, 언어의 삼각관계를 보여준다.
이 전시에는 버려진, 거친 물질로 만든 초기 작업에서부터 은은하게 반짝이면서 세련된 표면을 뽐내는 대형 회화작업, 그리고 빨강, 노랑, 흰색 등 원색의 물감을 쌓아 올린 최근의 회화작업까지, 광범위한 작업이 소개되고 있다. 또한 눈이 부실 만큼 다채로운 색채로 채운 회화가 무수히 걸린 전시장 한쪽에 그의 개인적 사색의 흔적이 담긴 종이들도 수줍게 걸려 있다. 최인선의 지난 25년은 치열한 싸움, 예술과의 싸움이었음을 보여준다.
1990년대 초반 나온 <영원한 질료> 시리즈는 물감에 이물질을 섞고, 캔버스 위에 종이를 붙이는가 하면 물감을 두텁게 이겨 바르거나, 때로는 맑은 수채화 물감처럼 흐르게 둔 채 질료의 성격과 가능성을 다루면서 다양한 기법과 양식을 담아내  구체적 이미지를 거부하고 흔적, 움직임에 대한 사고를 통해 회화의 근본을 보여준다. 그 탐색의 과정에서 어떤 목적을 이루어야 하는 의지와 그 의지를 향한 열망을 표명하듯 거칠면서도 감정적으로 물질을 다루고 있다. 그의 작업은 199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보다 정돈된 사고를 보여준다.    <생산되어진 흰색>과 같이 흰색과 회색조의 단색을 주로 사용한 작업들은 은색, 흰색 등 단색의 범위 내에서 미묘한 변화를 포착하는 동시에 추상의 언어를 사색의 공간으로 끌어갔다. 선은 가늘어지고, 작은 흔적 하나도 그의 생각의 파편을 반영하기 시작한다. <움직이는 구조>(1999)를 보면 미니멀한 바탕에 선으로 묘사된 원과 이어진 선들이 나열된 회화로 선들은 마치 그의 머릿속에서 오고가는 사고의 지도를 그린 듯 구역을 나눈 자유분방한 선과 그 위에 시간의 질서를 이식한 것 같은 수평의 직선들이 배치되어 있다.
2000년대 이후 주목할 만한 그의 회화는 스스로 “명제”라고 부르는 <미술관 실내>, <날것의 빛> 시리즈이다. 이 두 시리즈는 아마도 최근에 가장 잘 알려진 작업으로 빛과 물체가 만날 때 그가 얻는 모든 색과 형태를 포착한 작업이다. 이 두 시리즈는 사실 제목만 다를 뿐 소파, 식탁, 싱크대처럼 중산층 가정의 실내를 온갖 점, 선, 면으로 해체한 그림들로서 내용은 거의 대동소이하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제목은 직접적인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중시하는 주제의 표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의 미술관은 작가가 바라보는 물건이나 풍경을 화폭으로 옮길 때 그의 지각과 사고를 거쳐 비자연적인 색채를 통해 점, 선, 면으로 번역하면서 나온 결과물이다. 다양한 형태와 물감의 영토, 사색을 거쳐 나온 기호의 영역, 바로 그곳이 그의 미술관이다.
그러나 이 전시는 예술가가 예술만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는 것도 보여준다. 그는 예술과의 싸움 이상의 것, 삶을 살아야 하는 실존적 인간의 고뇌와 그 삶 속에서 자신에게 소중한 가치들을 지키기 위한 싸움도 보여준다. 전시된 수백 점의 작업에는 물질과 재료, 형식과 양식에 대한 고민도 들어있지만 유학생활의 소회,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 사랑하는 이들과 살아가는 공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경배하는 절대자에 대한 생각까지 모두 드러난다.
<로젠달에서 오다>(1996)는 미니멀한 평면에 집, 길, 초원을 시사하는 몇 개의 선과 면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로젠달은 아마도 그가 유학시절 접했던 지역, 뉴욕 주의 로젠데일을 일컫는 것 같다. 뉴욕 주의 한 동네를 사색적으로 표현한 이 그림은 그가 질료와 형식에만 몰두하지 않고 자신이 지나간 공간에 대한 개인적 인상도 소중히 거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상-수평, 수직 속의 집>(2007)은 두 개의 색을 기초로 쌍을 이룬 색면이 표현적인 붓자국으로 처리되었으나 여전히 수평, 수직의 격자무늬 구조를 유지하면서 거대한 집, 혹은 아파트와 같은 건축물을 연상시키고 다시 그 격자무늬 위에 붓질을 하면서 3차원적 집이라는 환영을 파기하고 2차원적 회화로 환원시킨다. 격자무늬의 색면구조들은 그가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이지만 가정을 지키는 ‘집’에 대한 생각을 풀어가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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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되어진 흰색> 캔버스에 유채 2000 설치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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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실내–빛의 들판>(오른쪽) 368×456cm 2011~2013

예술가의 싸움
사색은 예술과 철학이 만나는 지점이다. 이미지와 존재에 대한 그의 사색은 “Formation of thinking,” 또는 “Names of my family make beautiful bridge”와 같은 문장으로 나타난다. 그는 이런 문장을 스탬프로 만들어 그림의 한쪽에 찍는다거나 직접 연필로 써넣어 시적인 화면을 구성한다. 그의 드로잉과 메모에는 “Some where a painting starts”, “malevich bedroom”, “회화= Language”와 같은 문구가 적혀있는데 회화와 언어에 대한 그의 생각의 흔적들이다. 실제로 그는 ‘생각의 형태화’(2000년 9월)라는 메모에서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사고의 파편들에 주목하면서 “나는 아주 예민하고 섬세한 손끝으로 사고의 파편들을 화면으로 낚아 올린다”고 썼다. 그는 그렇게 포착된 개인적 사고의 파편들이 그의 회화를 통해 누군가에게 읽힐 “가변적 텍스트”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또한 그는 자신에 사고의 힘에만 의지하는 무모한 현대인이 아니라 속도와 변화의 세계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절대자를 숭배하는 겸허한 존재라는 것도 보여준다. 전시장의 가장 큰 벽에는 성경에서 따온 문구를 넣은 수많은 캔버스가 모여 마치 대형 제단화처럼 걸려있다. 거대한 벽면을 채운 각각의 캔버스에는 “I LOVE YOU O LORD MY STRENGTH”,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와 같은 문구가 삽입되어 있고, 중간 중간에 검은 사각형 추상회화와 거실, 침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구상회화가 나란히 배열되어 전시장은 마치 그가 ‘날것’이라고 부르는 세속의 것과 ‘미술관’이라고 부르는 예술적인 것, 그리고 ‘LORD’의 신성함이 공존하는 혼성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 이 혼성의 공간에서 그가 소개하는 절대자의 세계는 쌍을 이룬 직사각형의 색면이 격자무늬로 배열된 위에 고딕체와 같이 강직한 문체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성경의 구절들은 그의 신앙의 얼굴이자 세속의 것, 그의 삶을 지키는 로고스로서 그가 흔들리는 세상을 극복하고 회화를 통해 순수한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구현하려는 열망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그의 전시에서 검은 사각형, “malevich bedroom” 그리고 위의 제단화를 보고 필자는 질문했다. “선생님에게 말레비치는 어떤 존재입니까?” 그는 답했다. “아, ‘말레비치의 방’ 말이군요. 알아두셔야 할 것이 저의 작업에 보이는 단색은 이전의 단색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저의 개인적인 고민… 환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말레비치를 본 것이 아니라 그의 방을 본 것 같은 것이죠.”
말레비치의 비유는 우연한 것이 아니며, 최인선을 이해하는 창문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최인선은 말레비치처럼 추상과 구상을 오고가며, 말레비치처럼 개인적인 삶과 초월적 존재를 회화에 반영한다. 말레비치가 100년 전 검은 사각형으로 재현을 탈피했다는 미술사적 의의를 본 것이 아니라 그가 비대상성의 표현으로서 결국 자신의 종교관, 즉 신의 존재를 표현했다는 겸허함을 본 것 같다. 사실 기호로서의 회화에 도달했던 말레비치는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후에 구상으로 돌아갔지만 검은 사각형은 그의 정신의 핵심이었다. 말레비치는 생전에 검은 사각형의 의미에 대해 질문이 반복되자 결국 그는 “검은 사각형은 나의 죽음의 기호”라고 인정한 바 있다. 1935년경 병석에 눕게 되자 그의 침실은 찾아오는 예술가와 학생들을 맞는 살롱으로 변했다. 자신의 추상과 구상 그림이 잔뜩 걸린 이곳에서 그는 동료 예술가의 시를 듣기도 하고, 자신의 사망 이후에 벌어질 일을 정리하곤 했지만 결국 같은 해 사망했다. 이때 침대 머리맡에 걸려 있던 그림이 바로 검은 사각형이었다. 추상을 개인적인 영역으로 환원시킨 말레비치는 예술가에게 ‘예술과의 싸움’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최인선은 1963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뉴욕 주립대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1989년 관훈미술관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44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중앙미술대전 대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하종현 미술상, 세오 중진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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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것의 빛>(사진 왼쪽) 캔버스에 유채 200×800cm 2008~2014

[Artist Review] 차계남

선(線)과 선(禪)이 조우하는 장소와 시간

작가 차계남의 작품은 눈으로만 봐선 알 수 없다. 손으로 만지고 더듬으며 촉감의 세계를 경험해야 한다. 최소한의 컬러와 단순한 구조로 구성된 작품은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시공간의 울림을 전한다. 재료가 지닌 고유한 물성의 특성을 극대화하며 존재감을 드러낸 입체작품이 이를 대변한다. 6월 17일부터 29일까지 대구 동원화랑과 봉산문화회관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작가는 한지를 이용한 신작을 선보였다. 흑과 백의 단순한 색과 노동집약적인 결과물인 신작은 작가의 새로운 미래를 보여준다.

김옥렬  현대미술연구소&아트스페이스펄 대표

작가 차계남의 전시가 대구미술관 3전시실(2014. 5.27~8.31 <기억의 풍경 7인전)>과 봉산문화회관 1전시실, 그리고 동원화랑(6.17~29) 초대 개인전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가 주목받는 것은 작가가 6년간의 침묵을 깨고 발표하는 대형 전시라는 이유도 있지만, 전혀 다른 재료와 기법에도 불구하고 이전 작품과의 연속성을 통해 그만의 독자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일본에서 첫 개인전 후 30년 이상을 한국과 일본 그리고 프랑스와 독일을 무대로 활발히 활동 해오다 긴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6년 동안 면벽수행하듯 지내던 시간을 담아 신작을 발표했다. 오랜 세월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기나긴 침묵 속에서 나온 작품은 어떤 것일까? 이러한 의문의 답은 개인전 오픈에 참석한 많은 사람의 면면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6년간의 공백, 그것은 긴 시간동안 몰입한 작업을 반추하는 숙성의 시간이자 새로운 도전이 담긴 창작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깊은 침묵 속에서 발견한 작은 생명이 발아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다해 개간한 창작의 경작지에 작은 홀씨 하나 심어 놓은 기분일 것이다. 홀씨는 다른 것과 합체하는 일 없이 단독으로 발아하여 새 개체가 된다고 한다. 씨줄과 날줄로 엮어 만든 직물이 아니라, 부드럽고 질긴 ‘사이잘삼’1 실이 가진 일차적인 물성만으로 선을 면으로 면을 다시 입체로 만들어가는 과정처럼, 차계남의 이번 신작은 선과 면이 2차원의 공간을 따라 3차원의 공간으로 확장되는 연속성을 가진다.
이를테면, 차계남은 물성 그 자체의 고유한 요소를 부각시킨다. 그래서 작가는 재료의 물성이 갖는 일차적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씨줄과 날줄로 크로스(cross)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이 부분은 그의 작품이 어떤 상징이나 기호 혹은 은유가 아닌, 다만 물성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통한 작가적인 수행의 과정이 담겨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조용한 울림이다. 전시장에 걸린 대작들을 보면서 점이 선으로 그리고 선은 면으로 이어져 공간을 따라 무한히 확장되고 있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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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한 물성과 선(線 혹은 禪)
대부분의 사람은 명상을 하거나 기도를 하면서 눈을 감는다. 눈을 감는 행위는 명상과 참선 혹은 기도를 위한 일차적인 의식과도 같다. 그 이유는 눈에 보이는 세계에 현혹되지 않고, 고요하고 평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내 속에 있는 나 자신을 보기 위해 눈을 감는 것은 눈을 뜨고 보는 것과는 그 의미와 목표가 다르다. 그것은 낮과 밤만큼 다르거나 몸과 마음만큼의 차이를 가진다. 그 경계를 넘을 수 있는 것은 잠시나마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 바로 눈을 감고 나를 보는 순간일 것이다.
눈을 감고 깊은 심연과도 같은 어둠 속에서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눈을 뜨고 보는 ‘나의 밖’에 있는 ‘나’가 아니라, ‘나의 안’에 있는 ‘나’일 것이다. ‘나의 안’을 보고자 면벽과도 같은 의식적인 행위를 하는 것은 눈을 감고 잠에 빠진 사람이 꿈을 꾸는 것과 구별된다. 눈을 감고 명상이나 기도를 하는 것은 삶의 깊이를 뚫고 들어가 내 ‘안’에 있는 ‘나’를 만나는 숭고한 의식이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 이전과 다른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다면, 눈을 뜨고서도 ‘나’를 보거나 또 나의 ‘밖’과도 만날 수 있는 경지가 아닐까.
안과 밖을 연결하는 선(線)을 차계남은 사이잘삼이라는 끈, 즉 실을 겹치고 겹쳐 검은색의 입체조형에 투영한다. 그렇게 투영된 작가의 설치물은 하나의 존재, 즉 선에서 면이 되고 또 입체가 되는 과정을 통해 존재의 벽, 벽 너머의 존재가 되는 선(禪)일 것이다. 이렇듯  실(線) 따라 선(禪)에 가 닿을 때, 눈을 뜨고 벽 앞에서 보는 것은 벽 너머에 펼쳐있는 새로운 풍경, 즉 내 속에 있는 ‘나’가 투영된 또 다른 ‘나’를 보는 것이다.
차계남은 밧줄이나 노끈을 만드는 섬유재료로 ‘부드러운 조각(The Soft Sculpture)’을 만드는 것에 30년 동안 집중했다. 무엇보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물성이 주는 사이잘삼의 매력에 끌려 견고한 조각과도 같은 작품을 조형함으로써 섬유예술의 새로운 장을 열어 놓았다. 섬세하면서도 부드러운 실(線), 그 실들이 겹치고 겹쳐지면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立體), 즉 구조적인 풍경은 하나의 장소에서 그만의 존재감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선입관을 버리고 세 곳의 전시를 두 번씩 보았다. 그렇게 하고서야 새롭게 발표한 작품이 이전의 작품과 어떻게 다르고 또 같은지를 작가로부터 듣고 싶어졌다. 내가 본 것과 작가가 의도한 동일성과 차이가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몸도 마음도 바쁜 작가를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작가의 초기작은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배운 형염(型染)을 활용해 염색된 실과 실을 겹쳐 선명하고 강한 입체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선명하게 염색된 사이잘삼의 입방체로 한글을 활용한 자음조형이 탄생했다. 소재가 갖는 속성에 몰입하는 동안 색을 받아들이는 섬유의 특성을 실험하는 단계를 지나 이후, 작가는 모든 색을 포함하고 침묵하는 깊은 심연과도 같은 검은색의 섬유조각을 시도한다. 그의 섬유조각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빛을 품고 자신의 존재감을 가장 잘 드러낸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심오하고 지배력이 있고 과묵하며 또한 더할 바 없이 웅변적인 색을 소재에 입혀서 그 소재가 되살아나기를 기다린 것처럼, 검은색을 선택했다.”
흔히 섬유는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면서 직물로 태어난다. 그러나 차계남의 거대한 ‘섬유작업(The Fiber Work)’은 경사와 위사로 짠 직물이 아니라, 재료 자체가 갖는 물성을 강조하는 것에 있다. 무 (無)에 가까운 침묵하는 색, 어떤 의미나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아서 좋아한다는 검은색, 트레이드마크가 된 그녀의 검정색 패션은 일상 속에서도 집요하게 작품에 몰두하는 태도가 엿보인다.
대구미술관 3전시실에는 밖으로 난 창이 있다. 이 창을 배경으로 10m에 가까운 차계남의 작품 <Untitled 5347-I>이 설치되어 있는데, 거대한 섬유조형물 사이사이로 풍경이 비쳐 자연과 인공의 대비, 그 대비가 빚어내는 미묘한 조화가 눈앞을 가득 채운다. 검정의 간결한 기둥, 그 사이를 곡선으로 연결해가는 구조적 형태는 마치 자연을 품은 그림 같기도 하고 빛의 그림자를 조형해 놓은 것처럼, 안과 밖이 하나로 연결되는 구조가 된다. 확실히 선(線)과 선(禪)이 조우하는 시간, 눈을 뜨고 보는 ‘나의 안’과 ‘나의 밖’이 만나는 장소가 되고 있다.
모든 색을 합치면 검은색이 된다. 하나이면서 동시에 모두를 담고 있는 색이 검정인 이유다. 빳빳하게 풀을 먹여 검은색으로 물들인 거대한 섬유조형 앞에서 관객은 눈을 뜨고도 검은 벽을 본다. 그 검은 벽 혹은 덩어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람과 공기가 흐르고 빛과 그림자가 피고 지며 살아 숨 쉰다. 이 심연과도 같은 검은 입체조형에서 한 발 두 발 뒤로 물러서면  간결하게 정리된 사각의 입체와 곡선이 결합된 섬유조형물 사이, 작품이 놓인 장소와 공간이 그렇게 서로를 채우고 있다. 사각의 간결한 형태는 설치되는 장소에 따라 그 장소의 시간과 공간을 나누어 가지며 상호 침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검정이 모든 색을 품은 것처럼, 침묵은 삶과 사랑 그리고 욕망과 증오마저 품는다. 깊은 골짜기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젖줄이 낮은 곳으로 흐르고 흘러 바다가 되듯이 검은빛은 낮과 밤, 사랑과 증오, 희망과 절망, 삶과 죽음을 모두 품고 심연의 바다처럼 침묵한다. 이렇듯 깊고 푸른 침묵과도 같은 색에 심취해 있던 작가는 한지를 길게 잘라 만든 한 가닥의 실(線)을 화면 가득 세로로 길게 붙여 한지 끈을 만들어 전면을 선으로 채운 신작을 선보이고 있다.
그 침묵의 시간 속에서 작가는 붓글씨를 쓰고 사군자를 치면서 한지가 먹을 받아들이고 품는 것을 보고 느낀다. 그렇게 쓰고 그린 수천 장의 한지를 1cm의 폭으로 잘라 한 가닥 한 가닥씩 꼬았다. 꼬아진 한지 가닥은 수백 수천의 글과 그림이 지나간 흔적을 품은 채 실  (線)이 된다.  인간에게는 말을 배우고 신으로부터는 침묵을 배우듯, 쓰고 그리는 행위를 통해 말과 침묵 사이에 흐르는 긴장, 그 속에서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알아간다. 누가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고 했는가. 그것은 말이 곧 언어이고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기에 책임질 수 없는 말보다 침묵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일상 속에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그런 순간이 있기나 한 것일까? 아니면 항상 몸과 마음은 당연히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누구나 한 번씩 가져보는 질문이다. 이러한 의문에 작가는 깊은 침묵과도 같은 검정과 무위(無爲)의 흰색을 통해 몸과 마음처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는 작업을 시도한다. 그러한 시도는 먹으로 쓴 글과 그림이 그려진 한지가 실이 되면서 한지의 흰 부분과 검은 부분이 그만의 역할을 가지는 거대한 추상, 점과 선과 면이 우연과 필연 속에서 어우러지는 말과 침묵 사이, 빛과 그림자가 흐르는 풍경이 된다. 이 풍경은 점과 선 그리고 면의 연속성으로 이어져 여럿이 하나이고, 영원과 찰나가 교차하는 장소, 즉 선(線)과 선(禪)이 조우하는 시간일 것이다. ●

차계남은 1953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효성여대 미술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대학원 중퇴 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시립 예술대학 대학원 염색과를 졸업했다. 대구 카톨릭대학교 예술학과에서 미학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4년 일본 교토 마로니에갤러리에서 첫 개인전 이후 국내외에서 30여 회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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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7일부터 8월 31일까지 대구미술관에서 열리는 <대구미술:기억의 풍경전>에 출품된 <무제 5347-1> 사이잘삼 200×9500×100cm 2000(오른쪽)과 <무제 5360-2> 한지에 먹 244×491×7cm 2013


1  Sisal hemp,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원산지인 용설란과의 여러해살이풀. 용설란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줄기가 짧고 가시가 없다. 사이잘삼이라는 이름은 멕시코 시살(Sisal)만에서 수출한 데서 유래. 열대와 아열대지방에서 많이 재배하고 건조에 강하기 때문에 다른 작물을 재배할 수 없는 곳에서도 잘 자라는 열대성 풀이라 질긴 잎이 있으며, 이 잎에서 섬유를 채취한다. 마닐라 마에 다음가는 마 원료인데 내수성이 떨어진다는 결점이 있다. 색은 흰색·노랑·담록색 등이 있으며 흰색의 것이 상질. 잎에서 채취한 섬유는 실내장식용 재료나, 어업·선박·포장 따위의 밧줄을 만드는 재료로 쓴다.《패션전문자료사전》 1997

 

 

[Artist Review] 심영철

그날 에덴동산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미디어 작가 심영철의 작품은 단순히 빛을 조작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종교적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예술적 상상력을 더해 존재와 존재 사이를 무한 반영시킨다. 그녀의 예술적 자취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준 회고적 성격의 전시 <춤추는 정원>(6.14~8.22)이 제주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초기작인 <빗>시리즈부터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변화를 거듭하는 <가든> 시리즈 까지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무한반영’의 변주를 살펴보자.

고충환  미술비평

1990년 아니면 91년으로 기억된다. 당시 필자는 한 화랑에 기숙하고 있었다. 그때 심영철 작가의 전시며 작품을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전인가 아님 이후 근처에 있는 한 갤러리에서 작품을 본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둠 속에서 은근한 빛을 발하는 네온이 장착된 조형작업이었다. 가시나무와 어우러진 둥근 형태의 네온이 발하는 빛은 아마도 예수가 머리에 썼던 가시관을 형상화한 것이리라. 이 네온조형작업을 전후로 열린 전시에서 작가는 성경책을 피라미드 형태로 쌓았고, 공간에는 가시철망이 둘러쳐져 있었고, 박제된 사슴의 뿔에서 불꽃이 일었던 것 같다. 작가는 전시기간 중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에게 성경책을 나눠주었다. 성경책을 피라미드로 쌓은 것은 아마도 애급에서의 엑소더스를 상징할 것이고, 가시철망 속에서 불을 뿜는 사슴의 뿔은 가시덤불을 태우지 않으면서 불꽃으로 화한 신의 현현을 상징할 것이다. 이후 작가의 다른 작업에서 신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화신하기도 했다. 애급에서의 엑소더스 내내 찌는 듯한 더위와 살을 에는 추위로부터 자신의 선민을 보호하기 위해 신이 각각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현신한 것이다. 그렇게 신은 자신의 선민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 지상낙원에 흐르는 젖과 꿀은 다름 아닌 석유인 것으로 밝혀졌고, 역사의 아이러니랄 것이 그곳은 정작 낙원이 아닌, 세상에서 가장 첨예한 분쟁지역으로 남아있다. 전에도 그랬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작가는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저였다. 다르게는 무당이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알다시피 산 자와 죽은 자의 영역을 넘나들고, 특히 의미와 무의미를 중재하는 현대판 무당은 예술과 관련이 깊다. 제주현대미술관 개관 7주년을 기념해 열린, 작가 개인적으론 작업을 시작한 지 30년에 이른 그동안의 작업 성과를 회고해보는, 사실상의 준(準) 회고전 형식으로 열린 이번 전시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가는 대개 설치와 퍼포먼스를 병행하는데, 이번 전시에서도 퍼포먼스로 전시를 열었다. 기독교의 창세신화 중 원죄의식을 다룬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원죄의식이 최초로 싹튼 에덴동산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 극장에는 신과 사탄, 그리고 아담과 이브가 각각 출연한다. 지혜의 나무로 알려진 선악과를 매개로 뱀(사탄)이 이브를 유혹하고, 이브는 아담을 유혹한다. 그리고 욕망을 책망하는 신의 목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린다(작가 자신이 직접 허밍으로 처리함).
대충 이런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일말의 의문이 든다. 애초에 선악과가 없었더라면 욕망도 유혹도 처벌도 원죄의식도 없었을 것이다. 금지가 욕망을 부르고 욕망이 위반을 부르는, 그리고 위반이 처벌을 위한 당위성을 제공한다는 논리 그대로가 아닌가. 그러므로 어쩌면 금지는 처음부터 처벌을 전제로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어쩌면 원죄의식 내러티브는 신과 사탄의 싸움에 인간을 끌어들인 것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사탄을 자기 아래 두려는 신의 의지(사탄은 유혹하고 신은 처벌하는)와 여자를 자기에게 종속시키려는 남자의 이해관계(여자는 유혹하고 남자는 책망하는)가 부합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창세신화도 원죄의식도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만든 것이라는 페미니즘의 입장을 대변해본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욕망이 금지와 함께 태어났다는 태생적 왜곡을 주지시키는 것이리라(금지는 없는 욕망도 만들어낸다. 그리고 모든 신화에는 거의 어김없이 이런 금지와 위반이 등장한다). 따라서 신의 말씀(로고스와 로직, 이성과 논리)대로 되었다는 창세신화는 사실은 각본대로 되었다는 전복적 읽기로 대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상낙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하늘에선 그 일이 낱낱이 기록되고 반영된다. 무슨 말이냐면, 작가는 근작의 메인 콘셉트에 해당하는 <매트릭스가든> 시리즈에서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원형을 도입한다. 그리고 똑같은 소재와 재질과 크기의 원형을 상하좌우로 겹겹이 병렬시켜 공중에 매단다. 사실상 무한 병렬되는 것을 임의적으로 한정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여기서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구(球)는 매끄러운 표면으로 인해 이미지를 반영하는 거울 구실을 한다. 낙원에서 일어나는 일, 곧 원죄의식이 막 생성되는  (조작되고 만들어지는?) 극적인 순간이며 사건을 반영하고 퍼트려 서로의 무의식에 아로새긴다. 나는 너의 반영이고, 너는 나의 거울이다. 나는 너의 원죄의식을 반영하는 분신이고, 너는 나의 원죄의식을 되비치는 타자이다.

심영철 (81)

<매트릭스 가든-비상>이 설치된 제주현대미술관 전시실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작가

매트리스 속 거울의 존재
불교에선 존재가 존재를 되비치는, 그리고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무한 반영되는 유리구슬로 엮인 그물을 인드라망이라고 한다. 나는 너의 업(業)이고, 너는 나의 연(緣)이다. 나는 너의 원인이고, 너는 나의 결과이다. 그래서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너이기도 하다. 존재와 존재의 무한반영이자 무한연쇄를 의미하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지도 모를 연기설과도 통하는 개념이다. 작가의 <매트릭스 가든>은 바로 그런 존재의 그물망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매트릭스는 우주의 자궁을 의미한다. 혹자는 카오스라고도 하고, 혹자는 블랙홀 아님 화이트홀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이미지를 무한반영하는 만화경에 비유하기도 한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상(이미지)인가.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그림자인가. 존재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차이 나는 의미들이며 의문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개념(푸코 식으로 치자면 유사와 비교되는 상사가 되겠고, 들뢰즈 식으로 치자면 리좀을 파생시키는 뿌리의 뿌리에 해당하는) 정도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작가는 <매트릭스 가든>을 통해 나는 너를 반영하고 너는 나를 반영하는, 그리고 그렇게 존재와 존재가 무한반영되는, 마치 만화경 속 정경과도 같은 존재의 거울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서 신은 사탄을 반영하고 사탄은 신을 반영한다면, 남자는 여자를 반영하고 여자는 남자를 반영한다면(여자는 남자의 미래)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까. 선은 악을 잠재하고 악은 선을 품고 있다는 존재의 양가성을 들이댄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일까. 그렇게 작가의 <매트릭스 가든>은 우주의 자궁으로 열리고 존재의 만화경을 열어 보인다. 어쩌면 보들리야르의 진단, 곧 우리는 이미 가상현실을 현실로 살고 있다는 진단은 진실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다만 반영과 반영(반영하는 것과 반영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가의 <매트릭스 가든>은 에덴동산의 반영이었고, 지상낙원의 반영이었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된 땅의 반영이었고, 유토피아의 반영이었다. <매트릭스 가든>은 <일렉트로닉 가든>의 반영이었고, <일렉트로닉 가든>은 <모뉴멘탈 가든>의 반영이었고, <모뉴멘탈 가든>은 <시크릿 가든>의 반영이었고,      <시크릿 가든>은 에덴동산의 반영이었다(여기서 에덴동산의 반영이 <시크릿 가든>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왜 시크릿인가. 에덴에는 무슨 말 못할 사정이나 사연이라도 숨기고 있었는가. 에덴에는 동산과 함께 동쪽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일이다). 그렇다면 반영의 원형은 어디에 있는가. 애초에 원형이라고 부를 만한 실체가 있었는가. 혹 그것은 다만 스테레오타입 아님 도돌이표의 반복변주는 아니었을까.
돌이켜보면 작가의 작업은 온통 반영이었다. 홀로그램이 그렇고, 플라스마가 그렇고, 영상이 그렇고, 거울이 그렇고,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무한반복되는 구슬이 그렇다. 작가의 작업 어디에도 정작 손에 잡히는 실체는 없었다. 다만 반영하고 반영되는 무한반영이 있을 뿐. 그리고 그렇게 약속된 땅에서, 원형 없는 반영의 땅에서, 밑도 끝도 없이 반영하고 반영되는 만화경 속에서 아담은 불현듯     (어쩜 악몽과도 같은) 잠을 깬다. 작가의 작업 표면이 종교적 내러티브라고 한다면, 그 표층을 뚫고 작업의 밑바닥 내지 무의식의 지층에 면면히 흐르는 이런 무한반영되는(어쩜 실체 없는 것을 좇는) 놀이 내지 유희에 주목할 일이다. 어쩜 작가의 작업의 묘미는 종교적 신념 내지 믿음처럼 센 것과 실체 없는 것들이며 희박한 것들이 하나로 만나게 되는 이율배반적인 지점에 모아질지도 모르겠다.●

심영철은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신여대 조소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OTIS Parson’s, U.C.L.A에서 수학, Golden State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3년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열린 첫 개인전 <빗(빛)의 단계적 표상>을 시작으로 다수의 개인전을 열고  단체전에 참여했다. 성신미술상, 최우수 예술가상, 토탈미술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수원대 조형예술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심영철 (43)

<일렉트로닉 가든>,<모뉴멘탈 가든>, <시크릿 가든>(네온, 스테인리스 스틸, 홀로그램, 조명, 자갈)이 제주현대미술관 본관 전체공간을 따라 설치되었다. 네온조명과 홀로그램이 결합된 작품으로 바닥에는 제주 현무암이 놓여있다.

 

 

[Review] 사회적 풍경

사회적 풍경

LIG 아트 스페이스 5.22~6.28

동시대미술에서 ‘풍경’이 삶의 배경이 아닌, 삶 그 자체로서의 풍경으로 재현되는 것은 지극히 ‘일상적’이다 못해 흔하다. 그렇기에 풍경을 주제로 기획을 할 때 어떤 맥락을 가질 것인지가 어렵지만 중요한 부분인데, <사회적 풍경>은 그 부분을 드러낸 전시였다.
참여 작가들의 작업 면면은 작가적 의도와 맥락이 뚜렷했다. 부산의 감천, 영도라는 장소가 가진 버내큘러적 공간성을 그대로 담아낸 강홍구의 사진, 도시 사람들의 취미와 여가의 집합성과 익명성을 드러낸 이상원의 회화, 개발과 성장기 모던 시티의 디스토피아의 현재를 보여준 정재호의 회화,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현장을 미술관 쇼케이스처럼 증거로 남긴 진기종의 설치, 존재와 소멸 안의 시간과 기억을 상상하는 이혜인의 회화의 설치, 극장 간판 그림쟁이, 동네 골목 작은 가게 안 미싱사의 삶과 일상에 대한 기록인 전소정의 싱글 채널 영상이 그러했다.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그래서, 익숙한 사회적 풍경 안에 숨은 다른 풍경에서 찾을 수 있는 것에 무엇이 있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19세기 근대 국가 탄생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 이전에는 ‘공동체’가 보편적 개념이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근대화 과정에서 비가시적 공동체의 소서사를 드러낸 전소정의 <되찾은 시간> <어느 미싱사의 일일>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의 시간성과 역사성이 축적된 장소성을 사실대로 찍어낸  강홍구의 <사람의 집 – 프로세믹스 부산 > 연작이 다른 풍경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이란 개념에서 정치적이고 이념적 맥락과 거리를 두고자 했던 탓일까. ‘사회적’ 풍경에서 ‘사회적’이란 기획의 틀을 개인적이고 정서적 관점으로 밋밋하게 걸쳐 둔 것이 작업들이 가진 섬세한 결들을 보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왜냐면, 새로운 작업이 아닌 기존 작업들을 엮어 전시를 만들 때 어렵지만 중요한 지점 중 하나가 작업들이 가진 섬세하고 풍부한 결들을 다른 주제와 개념들로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다. 관람객이 전시나 작업의 의도와 달리 해석하고 경험하는 것에 대한 여지를 두는 것과는 별도로 이 부분에 미술계 관람객이 아닌, 일반 관람객을 대상으로 하는 전시에서 미술이 가진 다양한 가능성을 경험하기 위한 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채은영・우민아트센터 학예실장

 

 

[Review] 이탈리아 젊은 작가 – We Have Never Been Modern

이탈리아 젊은 작가  __  We Have Never Been Modern

송은아트스페이스 5.8~8.9

이탈리아 젊은 작가전은 2012년 스위스를 시작으로, 매해 한 나라의 젊은 작가들을 소개하는 프로젝트이다. 단순 소개에 머무르지 않고 각각의 주제를 가진다. 작가 22명의 작품 24점을 아우르는 키워드는 논쟁적인 전시의 부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탈리아 하면 아직도 고풍스러운 이미지가 있는데, 모더니티를 문제 삼은 것은 다소간 의외이다. 그러나 역사학자 R. 코젤렉이《  지나간 미래》에서 말하듯이, 르네상스 시대에 인문주의자들이 고대의 전범으로 돌아가면서 그 사이의 ‘야만적 시대’는 하나의 기간이 되었고, ‘새로운 시대’는 마침내 ‘중세’에 대해 새롭게 파악되는 하나의 기간을 뜻하게 된 것에서 근대가 설정되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어느 나라보다 일찍 근대를 맞은 이탈리아의 자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근대는 가히 고대적 질서를 떠올릴 만큼 강고하게 자리 잡았다. 근대적 진보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선형적 질서로 강요되었고, 미리 규정된 목표에 이르기 위한 최적의 방법을 의미하는 합리주의는 개별적 특수성과 무관하게 모두 따라야 하는 원리가 되었다. 예술은 ‘새로움’으로 치장된 근대적 질서를 일찍이 내면화했지만, 모더니티라는 거대한 동일성의 질서에서 주변화되기 마련이었다. 20세기의 이탈리아에서 근대란 후발자본주의의 성급함에서 비롯된 독재 및 세계전쟁과 밀접했으며, 그러한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근대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래서 이탈리아 현대미술은 앞으로의 진격을 명령하는 전위주의에 대해 ‘트랜스 아방가르드’로 반응한 바 있다. 어떤 목적을 향한 전위의 계몽적이고 예언자적 태도는 전복되고, 전 방위적인 유목 및 횡단이 고무되었다. 이 전시의 어리둥절할 만큼의 다양성은 근대라는 본질화된 가치로부터 멀어지려는 확산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전시는 5개의 섹션으로 나뉘어 있다. ‘모더니티 철회하기’에서는 매체의 순수성과 자율성으로 진화해온 모더니즘의 미학적 이데올로기에 대해 혼성으로 대응한다. ‘다수의 세계’와 ‘평행 우주’에서는 중심/주변, 전체/부분 간의 질서를 통해 유례없는 한 줄 서기를 가능케 한 위계적 질서를 해체하려 한다. ‘자연의 법칙’은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한 근대의 합리적 이성에 의해 억압된 자연을 복귀시키며, ‘현재에 대하여 생각하기’는 새로움과 진보라는 근대에 독단적으로 설정된 시간 질서에서 과도기로만 간주되었던 현재를 다시 본다. 근대에 대한 자의식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는 생활필수품이 비치되어 있는 박스형 건축구조물을 설치한 F. 아레나의 작품이 있다. 그것은 근대에 대해 근원적인 회의를 불러일으키게 한 획일적 주거환경을 떠올린다. A. 타디엘로의 악기처럼 생긴 구조물은 엄청난 강도의 소리를 방출하는 무기이기도 한데, 그것은 근대에 설정된 예술과 진격의 관계를 풍자한다. R. 오를란도가 손글씨로 쓴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는 근대에서 배제되었던 타자의 가치를 1970년대 페미니즘의 구호를 인용하여 표현한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앨범에 분장한 자신을 끼워 넣은 M. 리치의 위조 사진들은 현실과 허구가 어느 때보다도 가까워진 포스트모던 세계를 반영한다.

이선영・미술비평

 

[Review] 박진아 – 네온 그레이 터미널

박진아  __  네온 그레이 터미널

하이트컬렉션 5.30~8.2

한 남자는 검정 백팩을 메고 떠나고 있다. 걷다가 몸을 반쯤 틀어 남겨진 이를 바라본다. 등 뒤로 열린 자동문은 그를 재촉한다. 자동문 너머 길게 뻗은 흰 통로, 그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알 수 없다. 공항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박진아의 새 연작 중 <자동문(이쪽으로)>의 한 장면이다. 다른 작품 <활주로가 보이는 창>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네 명의 인물은 창문 밖을 바라보며 있다. 유리창 너머 텅 빈 활주로를 응시하는 이들의 뒷모습과 함께 캔버스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은 공항의 회색 바닥과 그 표면의 광택에 반사되어 비친 네 명의 그림자이다. 창문 안 공항 내부와 창문 밖 활주로, 공항 안 사람들과 바닥에 비친 그들의 그림자, 캔버스 안 등장인물과 캔버스 밖 관람자의 배치를 통해, 작가는 하나의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공항이라는 공간을 개념적으로 시각화한다.
박진아는 자신이 촬영한 공항 사진들에서 그 인테리어 대부분이 회색으로 채워져 있음을 발견했다. 작가가 발견한 무채색의 공항은 “현대의 공항은 ‘아무것도 아닌 공간(non-place)’으로 설계된다”는 인류학자 마크 오제(Marc Augé)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 세계의 어느 공항이든, 공항이라는 공간은 그 장소가 가진 고유한 흔적들은 사라진 채 복제화된 공간으로 존재한다. 장소가 갖는 독특한 관계성이나 역사성, 또는 정체성이 파괴되고 일률적으로 동질화된 공항에서 우리는 만나고 헤어지며 또다시 삶을 살아간다.
박진아는 공항 연작에서 공항의 ‘회색’을 재현하는 것이 과제였다고 한다. 천장의 회색, 벽의 회색, 그리고 바닥의 회색 광택은 그 안에 있는 인물을 에워싼다. 작가는 그 상황을 캔버스에 여러 색을 겹친 붓질로 표현했다. 회색 공간 안에서 인물들은 아래로 길게 늘어진 제 그림자와 함께 고립된 섬들처럼 떠있는 듯하다. 박진아의 캔버스는 켜켜이 고독으로 가득하다.
박진아는 자신이 많은 시간을 보낸 공간과 인물들을 작품의 소재로 삼아왔다. 이전 작업에서는 전시장의 모습과 미술계 인물들의 일상의 순간을 소재로 삼았다면, 이번 신작에서 작가는 최근 많은 시간을 보낸 공항이라는 공간을 소재로 삼는다. 작가는 일기를 쓰듯 자기의 주변을 기록하고자 공항에서 느낀 그 쓸쓸함을 작품에 담는다.
이번 전시에서 또한 박진아는 독일 작곡가 페터 간과 공항을 소재로 회화와 음악을 공감각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협업 작품을 소개한다. 페터 간은 공항에서 채집한 소리들과 자신의 키보드 연주를 편집하여 사운드를 내놓는다. 이 사운드는 노이즈가 되어 박진아가 회색만으로 구축한 추상의 캔버스와 조우한다. 관객은 겹겹이 쌓아 올려 결국은 무채색이 된 회색의 캔버스와 그 노이즈에 둘러싸인다.
양지윤・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