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New York

뉴욕 (5)

윌리엄스버그는 브룩클린에서 가장 오래된 화랑가다. 많은 작가들과 화랑들이 다리건너 브룩클린로 옮기면서 최근에는 인접지역인 그린포인트, 브쉬익까지 넓혀가고 있다

 

지난해 10월에 브룩클린 윌리엄스버그에 완성된 에두아르도 코브라의 벽화. 사진작가 마이클 할스번드가 앤디 워홀과 바스키아를 모델로 한 유명한 사진을 변형한 것으로 ‘스트리트 아트를 위해 싸우자’란 글이 적혀있다

지난해 10월에 브룩클린 윌리엄스버그에 완성된 에두아르도 코브라의 벽화. 사진작가 마이클 할스번드가 앤디 워홀과 바스키아를 모델로 한 유명한 사진을 변형한 것으로 ‘스트리트 아트를 위해 싸우자’란 글이 적혀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대표지역
서상숙 미술사

뉴욕시에 화랑이 모여있는 대표적인 지역은 모두 5군데다.
맨해튼의 어퍼 이스트 사이드Upper East Side, UES, 소호SoHo, 첼시Chelsea, 로어 이스트 사이드Lower East Side, LES 그리고 브루클린Brooklyn 등이 바로 그곳이다.
맨해튼 동쪽을 흐르는 이스트 리버 건너편에 위치한 브루클린에는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 덤보D.U.M.B.O, 그린 포인트Greenpoint, 부시윅Bushwick 등지에 화랑가가 형성되어 있다.
시티인덱스에 의하면 뉴욕에는 500여 개의 화랑이 있다. 그중 절반에 가까운 200여 개가 첼시에 몰려 있으며 LES에 100여 개, 브룩클린에 100여 개, 그리고 57가를 비롯한 UES에 50여 개, 소호와 나머지 지역인 롱아일랜드 시티, 트라이베카, 미트패킹 디스트릭에 50여 개가 산재한다.
지난 50여 년간 뉴욕 화랑가에 일어난 변화 중 네 가지를 꼽자면 (1)세계적 화랑가였던 소호의 붕괴 (2)‘뉴소호’로 부상한 첼시의 유명 화랑들이 대형화되는 반면 작은 화랑들은 문을 닫거나 새로운 장소를 찾아 떠나고 있다는 것 (3)LES가 뉴뮤지엄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미술구로 관심을 끌면서 그에 따른 관광화, 상업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있다는 것 (4)브시윅 등 브루클린 화랑가의 확장 등이다.
이 같은 뉴욕 화랑가의 끊임없는 이동과 확장은 도시화 하는 현대에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의 대표적인 예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빈민가 혹은 낙후된 지역이 재개발을 통해 중상류층 주거지나 상업지역으로 변화하면서 경제적, 정치적 힘이 없는 기존 거주자들을 몰아낸다는 이론이다.
공장과 창고 건물이 대부분이고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가난한 동네였던 소호는 전설적인 미술상 파울라 쿠퍼가 1968년 갤러리를 처음 오픈한 이후 20여 년 동안 미국의 현대미술, 나아가 세계 현대미술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패션 부티크, 고급 레스토랑 등이 앞다투어 들어서는 고급 상업구로 변신하면서 급격히 올라간 집세를 견디지 못한 소호의 화랑들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첼시로 대거 이동했다.
1970, 1980년대에는 300여 곳의 갤러리가 몰려 있었으나 현재 소호에는 디아 미술재단Dia Art Foundation, 아티스트 스페이스Artists Space, 드로잉센터Drawing Center 등 비영리단체의 전시공간과 피터 블룸Peter Blum, 팀 갤러리Team Gallery 등 몇몇 화랑만이 남아 과거의 명성을 되새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디아의 프로젝트 갤러리 두 곳이 월터 데 마리아Walter De Maria의 두 작품을 30년 이상 같은 자리에 전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상업적인 소호 거리에 조용한 경종을 울리는 동시에 미술에 관심 있는 사람은 반드시 한번은 봐야 하는 인식을 심어줬다.
또 지난해 스프링 스트리트에 위치한 도널드 저드
Donald Judd(1968~1994)의 작업실과 집이 수리를 거쳐 공공미술관으로 개관했다. 그리고 인접한 LES가 최근 새로운 미술구로 부상하면서 그 여파에 힘입어 아직까지 집세가 낮은 소호 남동쪽 지역의 LES와 연결되는 지역에 몇몇 갤러리가 들어서는 추세여서 변화를 기대하게 한다.
가고시언, 페이스, 파울라 쿠퍼, 메리안 보에스키, 메리 분, 바바라 글래스톤, 데이빗 즈워너 등 미국은 물론 세계적 화상들의 갤러리를 포함, 200여 화랑이 몰려 있는 곳은 첼시의 서쪽지역인 웨스트 첼시다.
1996년 10여 개의 화랑뿐이었던 첼시가 절정을 이루었던 때는 2008년으로 350여 개의 화랑이 성황을 이루었다. 이후 하향세로 접어들어 2011년에는 250여 개로, 현재는 다시 200여 개로 줄었다.
소호의 갤러리 중 가장 먼저 첼시로 이동한 곳은 매튜 막스로 1994년이었다. 이어 건물주와 맺은 계약기간이 끝나면서 오르는 집세를 견디지 못한 파울라 쿠퍼, 팻 헌, 아메리칸 파인아트, 폴 모리스, 바바라 글래스톤, 매트로 픽처스 등이 뒤따랐는데 이들을 일컬어 첼시 화랑가의 “오리지널 7인의 정착민들Original 7 Homesteaders”이라 한다.
첼시에는 디아 파운데이션이 1987년 22가에 4층짜리 창고 건물을 보수해 지은 미술관이 있었으며 1985년에 가고시언갤러리가 잠시 둥지를 틀긴 했으나 대부분 건물이 자동차 정비공장과 물품창고로 쓰였다.
이곳이 갤러리를 열기에 적합했던 요소라면 낮은 부동산 가격과 화랑에 적합한, 기둥이 없는 넓찍한 공간을 들 수 있다. 1층짜리 창고 건물들이어서 복수층 빌딩보다 가격이 낮았고 또 천장을 통해 자연광을 들여올 수 있었다는 것도 큰 매력이었다.
건물 용도를 규정하는 조닝zoning도 상품 보관 창고에 쇼룸을 낼 수 있도록 허용했기 때문에 화랑을 내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것도 큰 역할을 했다. 이곳에는 비영리 갤러리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두산, 그리고 국제화랑에서 운영하는 티나 킴 갤러리 등 한국인이 운영하는 갤러리가 위치해 있다.
최근 급격한 화랑 증가세가 주춤하고 주요 갤러리들이 첼시에만 두세 개 혹은 그이상의 갤러리를 확보하고 있고 또 갤러리 크기를 대형화하는 반면 소규모 갤러리들이 문을 닫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어 소호의 전철을 밟을 시기를 맞은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또 미술공원인 하이라인이 조성되었고 올해 휘트니 미술관이 업타운에서 첼시에 완공되는 새 건물로 이사할 계획이어서 그에 따른 인구 이동과 상업화가 필수적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소호와 첼시 화랑의 큰 차이점은 초기 소호의 화랑들이 집세에 밀려 쫓겨나다시피한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 많은 첼시의 화랑은 건물을 빌리지 않고 매입했다는 것이다. 취약점은 지하철 등 공공 교통수단이 가까이에 없다는 것인데 그것은 오히려 지나친 상업화를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LES는 요즘 뉴욕의 가장 ‘핫한’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차이나타운과 리틀이태리를 경계로 하는 LES는 전통적으로 이민자 거주지역이었으며 마약중독자, 홈리스, 높은 범죄율 등으로 위험한 지역으로 소문난 곳이었다. 그러나 2007년 뉴뮤지엄이 보어리 스트리트Bowery St.에 개관하면서 갤러리가 앞다투어 들어섰고 그에 따라 개성있는 패션, 레스토랑, 액세서리 가게 등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다.
2002년 뉴뮤지엄 건축계획이 발표된 직후인 2003년 미술관 근처에 2개의 갤러리가 문을 열었고 공사를 시작한 2007년 뉴뮤지엄이 개관하면서 14개로 늘었다. 현재 100여 개의 갤러리가 뉴뮤지엄 주변에 몰려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또 첼시의 하이라인 파크를 벤치마킹해 폐쇄되었던 윌리엄스버그 트롤리 터미널에 세계에서 처음으로 지하공원인 로라인 파크 조성 계획이 이루어지고 있어 LES는 당분간 지속 발전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작은 평수의 아파트 빌딩들 그리고 맘앤팝 스타일의 동네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곳이어서 화랑 공간이 작다는 점에서 첼시와 비교된다.
몇몇 갤러리가 벽을 허물고 유리로 대체하는 등 세련된 화랑의 면모를 갖추려 시도하고 있지만 아직 정육점 간판을 떼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거나 칠을 하지 않아 외벽에 낙서가 그대로 남아있고 작은 출입문에 간판도 달지 않아 갤러리인지 모르고 지나칠 정도로 무심한 것이 오히려 신선함을 느끼게 한다. 집세가 낮은 데서 얻는 경제적인 자유로움과 뉴뮤지엄의 존재 자체의 문화적 장소로서의 당위성이 증명된 LES는 젊은 갤러리스트들이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취재 중 만난 신갤러리의 신홍규 씨는 미국에서 교육받은 20대 후반의 젊은 컬렉터로 지난해 그랜드 스트리트에 첫 화랑을 냈다. 무명의 한국 작가들을 소개해 좋은 반응을 얻었고 곧 두 개의 화랑을 더 열 계획이라고 한다.
브루클린에는 윌리엄스버그에 20여 년에 걸쳐 꾸준히 화랑가가 형성되었으나 최근 덤보(맨해튼에서 이스트 리버를 건너 브루클린으로 넘어오는 맨해튼 브리지 아래 지역을 이르는 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의 줄임말), 그린포인트, 부시윅까지 확장되고 있다.
맨해튼에서 다리만 건너면 도착하는 브루클린은 오랫동안 맨해튼보다 싼 월세로 작업실과 아파트를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뉴욕 무명 작가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최근에는 100여 개의 화랑이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으며 유명한 영화배우, 모델들까지 이사를 오면서 소위 ‘힙한’ 지역으로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부시윅은 56보가트Bogart 빌딩을 중심으로 화랑이 급격히 늘고 있어 맨해튼의 화랑가가 소호에서 첼시 그리고 LES로 확장된 것처럼 새로운 커팅에이지 아트허브가 조성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있다.
첼시처럼 창고 건물들이 몰려 있던 덤보는 다리 위로 수시로 지하철이 지나가 소음이 상당하지만 맨해튼이 가깝고 싼 월세로 큰 공간을 얻을 수 있어 관심을 끌면서 현재 40여 개의 갤러리가 들어서 있다. 다만 브루클린은 맨해튼의 ‘강건너 마을’이라는 심리적인 약점이 빠른 발전을 막고 있다.
윌리엄스버그에는 20여 년 전에 오픈한 원조화랑 피로기Pierogi가 꿋꿋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뿐 아니라 제2 갤러리를 오픈하는 등 그 전성기를 맞고 있다. 피로기 화랑이 장수하는 비결 중 하나는 화랑주며 작가인 조 에메린이 화랑건물을 소유하고 있어 오르는 집세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화랑에 들어서면 큰 파일 캐비닛이 제일 먼저 눈에 띄는데 이것은 로컬 작가들의 작품을 파일로 만들어 직접 보여주거나 인터넷으로 볼 수 있도록 해 판매하는 플랫 파일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2000년 신개념주의 작가 마크 롬바디가 자신의 모든 작품을 피로기화랑에 옮겨다 놓고 같은 날 자살했는데 이 사건도 피로기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어퍼 이스트 사이드UES의 화랑가는 1906년 하스갤러리가 오픈한 후 맨해튼의 센트럴파크 동쪽 메디슨 애비뉴를 중심으로 60가에서 90가까지, 3번 애비뉴와 5번 애비뉴 사이에 200여 개의 갤러리가 퍼져 있다. UES에는 전성기였던 1950년대 200여 개의 화랑이 존재했으나 현재는 50여 개의 갤러리가 남아 있다.
특히 57가의 메디슨 애비뉴와 5번 애비뉴 사이에 가장 많은 갤러리가 몰려 있어 이곳을 따로 복도 중심으로 양옆에 죽 늘어서 있는 방을 일컫는 ‘57가 회랑57th street corridor’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어퍼 이스트 사이드는 뉴욕시의 전통적인 부촌으로 록펠러, 휘트니, 케네디, 아스토어, 최근에 뉴욕시장을 지낸 블룸버그 등 이름만 들어도 아는 미국의 상류층이 사는 곳이다. 이들을 고객으로 마스터들의 작품과 이미 검증된 현대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판매하는 안정적인 화랑가가 형성돼 있다. 또 최근에는 첼시와 LES에 화랑이 넘치면서 화상들이 다시 UES로 눈을 돌리고 있어 흥미롭다. ●

 

THEME FEATURE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부리부리한 눈의 자화상으로 잘 알려진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
그는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 겸재謙齋 정선鄭歚(1676~1759)과 함께 조선의 삼재로 불린다.
또한 뛰어난 화가이자 시와 문학, 실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인물이다. 윤두서 서거 300주년을 맞아 국립광주박물관(2014.10.21~1.18)에서 특별전을 마련했다. 이번 전시는 윤두서와 후대 작가들의 서화를 함께 전시해 18세기 조선의 인식변화를 이끈 그의 실학적 탐구와 정신을 재조명했다. 뿐만 아니라 공재를 넘어 아들 낙서駱西 윤덕희尹德熙(1685~1766), 손자 청고靑皐 윤용尹愹(1708~1740)으로 이어지는 회화세계를 살펴본다. 《월간미술》은 전시소개와 더불어 현시점에서 공재 윤두서를 다시 바라보려 한다. 르네상스인으로서의 공재 윤두서의 모습을 소개하고 그가 당대와 후대에 끼친 역사적 영향력을 고찰한다.
장소와 세대를 넘어 교감할 수 있는 윤두서의 열린 세계관을 살펴본다. 특별히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회화사료 세 가지(윤두서의 중국지도, 윤덕희의 단양 바위글씨, 윤위의 <구택규 초상>)를 소개한다. 이를 통해 윤두서 일가의 예술적 자취를 폭넓게 바라보자.

시대의 변혁을 꿈꾼 예술가, 공재 윤두서
이내옥 | 미술사

조선왕조와 같이 하나의 국가가 오백 년 동안 지속된 사례는 세계 역사상 흔치 않다. 조선은 유교를 국가 지배이념으로 삼고, 그를 통한 이상국가 실현을 지향했다. 그 근본 기저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흔들렸지만, 조선 멸망에 이르기까지 강고해져갔다. 주자학 이념은 국가와 사회 그리고 개인의 전반적인 규범과 사고를 조직하고 제어했다. 형刑이 아닌 예禮로써 국가를 운영하려 했던 조선의 이상적인 시도가 오백 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사실은 인류 역사상 높이 평가될 수 있다.
조선을 시대 구분하는 데에는 몇 가지 기준이 있지만, 크게는 임진왜란을 기준점으로 전,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사상적인 면에서 보자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독존獨尊의 지배이념이었던 주자학에 균열이 생겼다. 그에 대한 대응은 두 갈래로 나타났다. 주자학의 배타성을 더욱 강조하려는 경향과, 청淸의 새로운 학문적 조류를 흡수하면서 보다 다양하고 유연한 학문적 경향을 추구하는 이른바 실사구시實事求是 이념에 입각한 실학이 그것이다. 임진왜란이 수습된 지 한 세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은 서서히 국력을 회복하고 경제적 안정을 이루는 가운데, 주자학과 실학이라는 두 가지 학문적 경향이 공존한 시기가 바로 숙종대(1674~1720)였다.
조선 후기의 사회적 변화는 숙종대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농업에서 이앙법 등의 기술 혁신으로 광작廣作 운동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부농층이 대거 발생했다. 조선은 또 청일 간의 중개무역을 맡고, 일본에 인삼을 수출해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였다. 이러한 경제적인 부의 축적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윤택해지고 사치와 문화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던 사찰 3백여 개가 중창되고, 분원分院에서 사사로이 제작된 호화로운 자기들이 대량으로 시장에 보급되었다. 나라 안에 돈이 돌면서 여행의 풍조도 서서히 고조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리면서 회화부문에서도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새로운 장르로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와 풍속화風俗畵가 등장하고, 사대부의 고상한 정서를 표현하는 문인화文人畵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의 회화적 경향에 비한다면, 조선 후기의 이러한 변화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진경산수화, 풍속화, 문인화의 등장 배경은 무엇인가? 그리고 의미는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이야말로 회화사는 물론 조선시대 예술사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화두話頭라고 할 수 있다.

윤두서 〈윤씨가보尹氏家寶〉 25면 〈나물 캐기〉 모시에 먹 30.4×25cm 조선 17세기 말~18세기 초

윤두서 〈윤씨가보尹氏家寶〉 25면 〈나물 캐기〉 모시에 먹 30.4×25cm 조선 17세기 말~18세기 초

르네상스인, 공재 윤두서
조선 후기 회화사의 새로운 경향의 대두에 대한 해명 작업이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다. 단순히 실학이라 추정하기도 하고, 문화적 자존의식의 발로라고 하기도 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점은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를 창조하고 문인화를 수용한 최초의 인물이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공재에 대한 연구 없이는 그에 대한 설명 자체가 관념적이고 공허할 수밖에 없다.
공재는 1701년 실경의 <금강산도>를 두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토론했으며, <산골의 봄>과 <백포별서도> 등 2점의 진경산수화를 남겼다. 그리고 <나물 캐기> <짚신 삼기> <목기 깎기> <돌 깨기> 등 4점의 풍속화가 전하고 있다. 4점의 풍속화 모두 노동하는 인간을 그렸다는 점이 특징적이며, <나물 캐기>는 여성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공재는 당쟁에 회의를 느껴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면서 학문과 예술에 매진했는데, 선비로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세상일을 자기 책임으로 인식하는 정서를 문인화로 표현했다.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많은 문인화를 그린 것이다.
공재의 이러한 창조적 시도가 초창의 미숙성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의 모색은 영·정조대를 거치면서 계승, 발전해 나갔다. 진경산수화에서 겸재 정선, 풍속화에서 단원 김홍도, 문인화에서 추사 김정희가 출현해 황금기를 연출했다. 따라서 겸재, 단원, 추사는 공재의 예술적 키즈였다. 당시 추사는 공재를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했다. “우리나라에서 옛그림을 배우려면 진정 공재에서 시작해야 한다. 정선이나 심사정이 모두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전하는 바의 권첩이란 한낱 안목만 어지럽게 할 뿐이니 결코 들춰보아서는 안 된다.” 문인화가 전공이었던 추사의 입장이 드러난 말이지만,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공재의 위치에 대한 적절한 평가라고 하겠다.
공재는 회화적 표현 역량 또한 탁월했다.
그의 <자화상>(국보 제 240호)은 동양 전신傳神의 최고 수준의 작품이다. 말을 지극히 사랑한 그의 <유하백마도>는 문기와 사실성이 결합된 동아시아 최고의 작품이라 평가할 수 있다. 공재의 예술에서 비교적 덜 알려진 부분도 많다. 서양의 음영법을 채용한 조선 최초의 정물화를 그리기도 했고, 전각예술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그가 그린 조선지도는 정상기와 김정호 지도의 선구였고, 그의 일본지도는 정밀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또한 조선을 석권했던 한석봉체의 거칠고 투박한 서예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여 동국진체東國眞體 창안의 중심에 섰다. 이렇게 다양한 방면에 뚜렷한 창조적 업적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공재는 진정 조선의 르네상스인이었다.

윤두서 〈윤씨가보〉 11,12면 〈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 비단에 엷은 색 32.2×40cm 조선 17세기 말~18세기 초

윤두서〈윤씨가보〉 11,12면〈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비단에 엷은 색 32.2×40cm 조선 17세기 말~18세기 초

공재 윤두서, 시대를 꿰뚫어 보다
공재는 다양한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예술에 대해서도 남다른 신념이 있었다. 앞선 시대의 예술적 경향을 반성하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였다. 공재는 해남윤씨海南尹氏 가문의 종손으로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자이다. 공재는 윤선도의 가풍을 이어 교육을 받았으며, 같은 남인南人인 성호星湖 이익李瀷 형제들과 학문적으로 매우 밀접하게 교유했다. 이들이 두 집안에 소장하고 있던 중국과 서양 서적을 비롯한 수천 권의 도서를 열람하고 토론하는 과정이 조선 후기 새로운 사상과 학문 그리고 예술의 탄생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공재의 학문은 증조부인 윤선도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윤선도는 예론을 비롯해 천문, 음양, 지리, 의약, 복서, 음악 등에 걸쳐 박학했다. 이러한 학문적 경향은 그의 새로운 인식론에 바탕을 둔 것으로, 주자학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공재는 윤선도의 이러한 학문적 경향을 가학家學으로 전수받았다. 공재의 인식론은 천하의 만사 만물이 각각 다르므로 그 속성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궁구하여 그 경험적 지식을 축적하고 체계화하는 분석적 방법론이다. 이러한 인식론에 기반을 둔다면, 외계 사물을 실사實事에 비추어 증험함으로써 실득實得을 추구하고,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성리학과 예론은 물론 천문, 지리, 의약, 음악, 패관소설, 병서, 공장, 기교 등 다방면에 걸쳐 박학할 수밖에 없다. 조선 후기의 실학도 바로 이러한 인식론에 근거하고 있다.
인식론의 변화는 예술에서도 새로운 변화를 일으켰다. 이제 주위의 호박, 참외와 같은 하찮은 미물들이 그림의 대상으로 등장했다. 동양의 오랜 전통적인 관점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파악하고, 그 자연과 동화될 때 이상적인 경지에 다다른다는 이른바 인간과 자연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상화된 자연으로 표현된 것이 관념산수화였다. 그렇지만 각각의 사물에 별도의 이理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여 상대적으로 보는 시각이다. 예컨대 이러한 시각에서 산을 그린다면 그 산들은 각각 독자적인 차별상을 가지고 표현될 것이고, 금강산, 인왕산 등 개개의 이름을 가지는 개성적인 산으로서의 진경산수화가 출현하는 것이다. 풍속화의 대두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공재 이전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관념적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단일한 주체, 즉 사대부였다. 그러나 인간들을 독자적인 차별상으로 표현할 때에 그 대상은 폭넓게 확대되어 상인, 농부, 하인, 공인, 여인네 등으로 넓어진다. 그 표현이 조선 후기의 풍속화였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예술적 변화의 근원에 공재가 위치한 것이다.
공재의 외증손인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공재를 성현의 재질과 호걸의 뜻을 갖춘 분이기에 남긴 글과 유묵도 그러하나, 시대를 잘못 만나 애석하다고 했다. 공재가 지닌 역량이나 시대를 보는 안목 그리고 후대에 미친 영향에 비한다면, 지금까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저평가된 것이 사실이다. 예술가는 예민한 촉각과 감관을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공재는 다가올 시대를 예견하고, 그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정통 주자학을 신봉했던 주위 인물들은, 당시 공재의 학문과 예술에 대해 우려하고 비판했다. 그러나 공재가 창조하고 개척한 예술은 조선 후기 문예부흥의 토대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공재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연 진정한 선구자였다. ●

윤두서 《가전보회家傳寶繪》 19면 20면 〈송함망양도松檻望洋圖〉 종이에 먹 23×61.4cm 조선 1707년

윤두서 《가전보회家傳寶繪》 19면 20면 〈송함망양도松檻望洋圖〉 종이에 먹 23×61.4cm 조선 1707년

 

THEME FEATURE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공재와 마주하기: 국립광주박물관 <공재 윤두서전>을 가다
임승현 | 기자

“모든 사람들이 한쪽에 치우쳐서 두루 잘하지 못하거나 어떤 이는 두루 잘하나 공교하지 못했으니 요컨대 모두 작가라 할 수 없다. 그 모든 사람들의 것을 모두 집대성한 자는 오직 윤두서뿐이구나!” 한국미술사에서 중요한 회화비평집을 저술한 남태응南泰膺(1687~1740)이 《청죽만록聽竹謾錄》 중 ‘화사畵史’에서 윤두서를 평한 글 중 일부다. 윤두서 회화의 정교하고 공교로운 맛은 오랫동안 높게 평가 받았음을 엿볼 수 있다.
윤두서 서거 300주년을 맞아 국립광주박물관에서 공재 윤두서와 그 일가의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최초의 전시 <공재 윤두서>(2014. 10.21~10.18) 열렸다. 이번 전시의 중심은 공재를 조선 후기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연 선구자이자 르네상스인으로 보고 다가가는 데 있다. 이 기조 하에 그의 회화와 학문적 성과를 다각적 시선으로 살펴보고 그 일가와 후대 화가들의 그림을 함께 소개한다. 특별히 녹우당綠雨堂(사적 제167호)에서 소장한 공재 윤두서 일가의 책과 글씨, 그림이 최초로 외부에 선보여 전시를 더욱 풍요롭게 했다. 녹우당은 해남윤씨 어초은공파漁樵隱公派의 종가로서 우리나라 가사문학에 획을 그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 고택으로 익히 알려진 곳이다. 전시된 녹우당 소장품 중 단연 주목되는 작품은 <자화상>이다. 정면을 응시하는 통찰력 있는 눈동자와 매서운 눈매, 정교한 필선의 사실적인 수염이 보는 이를 압도하는 전신傳神의 절정인 이 작품은 미술에 무관심한 이들에게도 익숙한 명작이다. 바로 공재 윤두서의 명작이다. 이번 전시는 그와 그의 일가에 수준높은 작품을 실견할 수 있는 자리로 기대가 크지만 유물을 소개하는 방식도 눈길을 끈다. <자화상>을 그릴 당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거울을 함께 배치한 방식을 일례로 들 수 있다. 이 거울에 대해 국립광주박물관 박해훈 학예연구관은 “그동안 해남윤씨 집안에서 대대로 사용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 전시를 위해 거울 뒷면을 조사하면서 17세기 후반경에 제작된 일본 거울임이 밝혀졌다”고 전했다. 또한 전시 말미에 <자화상>을 둘러싸고 제기된 다양한 미술사적 해석을 더해 관객이 각기 나름의 해석을 해볼 여지를 뒀다. 전시가 단순히 유물을 선보이는 것을 넘어 오랜조사와 학술적 연구의 결과를 펼치는 장임을 증명한 대목이다.
<자화상> 한편에는 옥동玉洞 이서李敍(1662~1723)가 쓴 녹우당 현판이 전시돼 있다. 옥동 이서는 윤두서와 둘도 없는 친구였다. 사실 이서가 쓴 현판이 자화상과 함께 배치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17~18세기는 서예에 있어 전서篆書와 예서隸書가 새롭게 주목받은 때다. 이서와 윤두서는, 학계의 논란이 있는 용어이기는 하나 ‘동국진체’라는 새로운 서체를 개발하고 구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기에 이서가 쓴 이 현판 글씨는 곧 윤두서의 서예 미감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인 셈이다.
녹우당을 나와 박물관으로 나들이한 작품 중 주목할 만한 것으로 윤덕희가 윤두서 사후에 윤두서의 그림과 글씨 중 좋은 작품을 모아 엮은 서화첩 《윤씨가보尹氏家寶》와 《가전보회家傳寶繪》가 있다. 화첩 특성상 수록된 모든 작품을 한번에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만큼 화첩의 모든 작품은 뛰어난 회화미를 자랑한다. 이 화첩은 공재가 《고씨화보》 《당시화보》 등 중국에서 수입한 화보를 임모臨摹하며 습득한 남종화풍, 더불어 사실주의적 태도와 사의를 중시하는 그의 회화관을 볼 수 있다. 《윤씨가보》에는 말 그림, 산수화 등과 함께 <짚신삼기> <나물 캐기> 등 윤두서가 그린 조선 후기 풍속화가 포함돼 있다. 윤두서의 풍속화는 그의 일가를 넘어 조영석 강희언 등 후대 선비화가들이 풍속화를 그리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므로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윤두서뿐 아니라 아들 윤덕희와 손자 윤용의 산수화, 인물화, 말 그림을 다수 선보이는 제2,3부 전시실은 윤씨 일가의 뛰어난 회화적 역량이 결집된 장이다.
이번 전시는 조선 후기의 화단뿐 아니라, 실학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변혁적인 인간관을 제시한 윤두서를 다시 주목했다. 현재 호남화단의 뿌리로까지 해석을 확대한, 윤두서를 재평가할 수 있는 장이다. ●

 

왼쪽 위 해남 녹우당과 옥동 이서가 쓴 현판©국립광주박물관

 해남 녹우당과 옥동 이서가 쓴 현판©국립광주박물관

 

THEME FEATURE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새로이 발굴한 공재 윤두서 일가의 회화사료 세 가지
이태호 | 명지대 교수, 문화예술대학원장

공재 윤두서는 자화상으로 유명한 문인화가이다. 그의 탁월한 묘사기량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손에 꼽을 만하다. 국립광주박물관은 서거 300주기를 추모하여 대규모의 도록 발간과 함께 <공재 윤두서전> 을 마련하였다. 윤두서와 관련한 조선후기 서화와 문학, 그리고 학예를 망라하는 빅 이벤트였다. 해남윤씨 집안의 자랑인 녹우당綠雨堂의 대표가 가사문학의 효시 ‘고산 윤선도’에서 그의 증손자 ‘공재 윤두서’로 바뀌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윤두서의 예술세계를 재평가하는 좋은 기회였다.
이 글에서는 내가 새롭게 만난 윤두서 일가의 세 가지 회화사료를 살펴보겠다. 첫 사례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천하지도>로, 이 지도가 윤두서의 중국지도임을 검토한 것이다. 둘째는 단양 하선암 바위글씨에서 발견된, 윤두서의 아들 ‘윤덕희’이다. 셋째는 윤두서의 손자 윤위가 그린 <구택규 초상>으로, 요근래 세상에 나온 그림이다. 이들도 <공재 윤두서전>에 함께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필자의 게으름 탓에 이제야 소개하게 되었다.

이태호 (1)-1

윤두서 추정 〈천하지도天下地圖〉 종이에 수묵담채 128.2×156.7cm 18세기 초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윤두서의 중국지도, <천하지도>
<천하지도>는 조선 닥종이에 수묵담채로 그린 18세기초의 대작인즉, <천하대총일람지도天下大摠一覽之圖>라는 명칭으로 진작에 알려져 있었다. 조선총독부 도서관이 1929년 박봉수에게 당시로는 엄청 고가인 3000원에 구입했던 지도이다. 필자는 최근 학술심포지엄에서 이 지도에 대해 윤두서 제작설을 제기한 적이 있다.(이태호, <조선후기회화의 사실정신과 지도, 그리고 대동여지도>,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대동여지도간행 15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 국립중앙도서관, 2011) 접힌 소책자 형태가 현재 녹우당에 소장된 윤두서의 조선지도나 일본지도와 흡사하여 그렇게 주장한 것이다.
국화무늬 능화판으로 찍은 <천하지도>의 표지에는 활자식 명조체로 ‘천하지도, 부 조선 류구국天下地圖 付 朝鮮 琉球國’이라는 묵서가 씌어 있다. 현재의 장황은 19세기 말 이후 다시 꾸민 상태이다. 제목과 같은 글씨체의 ‘천하대총일람지도’를 별지에 써서 지도 위에 덧붙였고, ‘조선국’ ‘류구국’ 등을 써 넣었다. 뒷면에서 음각의 ‘德’자와 그 아래에 붙은 양각의 ‘弼’자를 배치한, 2cm가량의 붉은 인장으로 찍은 전서체 ‘덕필’이 눈에 띈다. 위치로 보아 소장자가 찍은 것이다. 이는 재표구하면서 본래 지도 뒷면에 있던 도장을 오려다 붙인 듯하다. ‘덕필’은 윤두서의 조카뻘인 윤덕필(1723~1793)로 생각된다. 윤덕필은 해남윤씨 어초은파 중시조인 윤효정의 넷째 아들 윤부尹復의 6대손으로 강진에서 종택을 이루었다. 언제 윤덕필의 소유로 넘어갔는지 모르나, <천하지도>가 윤두서의 작품일 개연성을 높여주는 소장인이다.
윤덕희는 윤두서가 중국지도·조선지도·일본지도를 그렸다고 밝혀 놓았다.(<恭齋公行狀>) 현재 녹우당에는 윤두서의 조선지도인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와 일본지도인 <일본여도日本與圖>만이 전해져, 이 <천하지도>가 윤두서의 중국지도임을 점쳐본다. 조선과 류구를 함께 그려 넣고 ‘천하지도’라고 표제가 바뀌었지만, 당시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를 인식했던 점에 비추어 볼 때 중국지도라 이를 만하다. 붉은색 선묘의 도로표시, 같은 색 외곽선과 노랑이나 파란색 바탕에 지명을 써놓은 방식, 약간 길쭉한 지명의 행서체, 그리고 <천하지도>의 필치와 회화적 분위기가 윤두서의 조선지도나 일본지도와 근사하다. 특히 전체적으로 사막, 만리장성, 산악, 강과 호수, 바다 표현과 색채감이 한 폭의 그림다운 맛을 돋운다. <천하지도>의 제작시기 또한 윤두서가 두 지도를 그린 1710년대와 멀지 않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천하지도>는 북경·남경의 양경兩京과 13성省의 명나라 행정체계를 바탕으로 삼았고, 만주지역의 영고탑寧古塔과 오라烏喇, 그리고 심양審陽을 승격시킨 성경盛京 등 청나라 초기의 새 지명이 공존하는 지도이다. 이를 통해 청조가 대륙을 완전히 장악하기 이전의 정황을 읽어내기도 한다.(오상학, 《조선시대 세계지도와 세계인식》 창비 2011) 일본의 위치를 글로만 써놓고 류구국을 크게 강조한 것도 이 지도의 특징이다. 또 일반적인 류구지도와 달리 상하가 뒤집혀 있는 점도 눈에 띈다. 조선에서 내려본 시점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중국과 동아시아 지도가 16~18세기 조선에서 유행한 가운데, 이 <천하지도>는 조선을 가장 자세히 그린 사례이다. 경도京都와 함흥, 평양, 해주, 원주, 공주, 전주, 대구, 제주 등 8도 소재지의 원이나 네모 표식과 더불어 주요 지명과 강·산·섬의 이름이 가득하다. 1680년대에 등장하는 무산茂山이나 순흥順興 등의 지명이 있고, 1712년 5월 15일 조선과 청의 국경협약에 따라 백두산에 세운 임진정계비壬辰定界碑가 보이지 않음은 이 지도의 제작시기를 1680년대 후반~1712년 이전으로 짐작게 한다. <천하지도>가 백두산정계비를 표시한 녹우당의 <동국여지지도>보다 앞서 그려졌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산맥의 흐름보다 농담으로 주요 산들을 독립해 강조한 표현이나 바다의 파도형 물결무늬는 고식으로,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인촌기념관 소장)를 비롯한 16~17세기 중국지도의 유형이 잔존한 증거이다. 윤두서는 1712~15년경 <동국여지지도>를 그리면서, 왜곡이 심하던 <천하지도>의 조선 영토 남쪽과 제주도·대마도를 상당히 수정하게 된다.
<천하지도>를 포함한 윤두서의 조선지도나 일본지도에 대하여, 한국지리학 연구의 중추이자 권위인 이기봉 박사는 “창조적이지는 않지만, 앞 시기의 사례를 정성스레 베낀 지도들이다. <천하지도>의 경우 중국 간행본을 모사하면서 제작자의 식견에 따라 조선 부분에 당시 지명을 충실히 반영했다”고 평가한다.
윤두서는 자화상을 치밀하게 그렸듯, 땅의 초상 또한 세세하게 지도로 제작했다. 그가 지도를 베낀 큰 이유는 병법을 연구하고 무기를 제작하는 등 병류兵流, 곧 군사학에 관심이 컸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장수나 호걸형의 자화상 이미지에 걸맞는, 사내다운 취미이다. 동시에 그는 천문학이나 수학에도 전문성을 지녔다. 1706년 12월에 송나라 수학자 양휘의 《양휘산법楊輝算法》을 필사했다고 본다. 청나라 황정黃鼎이 저술한 백과전서 《관규집요管竅輯要》(80권 25책)를 여럿이 필사하면서 직접 삽도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윤두서가 중국의 과학서적을 모사하던 이 시절, 1706년경 전후에 중국지도인 <천하지도>도 제작했을 법하다.

이태호 (8)

윤덕희 〈도담절경도島潭絶景圖〉 비단에 수묵 27.8×17.1cm 1763 녹우당 소장

윤덕희의 단양 바위글씨와 <도담절경도>
이번에 윤덕희의 <도담절경도>를 대하면서, 언젠가 충청북도 단양을 답사할 때 발견한 하선암의 바위글씨가 떠올랐다. 단양팔경의 시작인 제1곡 하선암下仙巖
큰 바위 아래의 조각바위에 오른쪽부터 ‘윤덕희尹德熙’, ‘윤덕후尹德煦’, ‘윤덕염尹德廉’, ‘권엄權儼’이라고 새긴 네 사람의 이름이 나란하다. 바위글씨들은 약간 비뚤하고 고졸한 행서체이다. 윤덕희의 서풍은 아니니, 나머지 셋 중의 한 명이 썼겠다. 이렇게 명승고적에 새져진 바위글씨는 훌륭한 사료가 된다. 포항 내연산 폭포의 ‘겸재 정선’, 삼척 무릉계곡 용추폭포의 ‘정선과 이병연’, 단양 사인암의 ‘이인상과 이윤영’, 양산 통도사의 ‘김홍도와 김응환’ 예처럼, 바위글씨에서 유명인사의 이름이나 시같은 필치를 만날 때 반갑기 그지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연옹連翁 윤덕희(1685~1766)는 윤두서의 9남3녀 중 장남으로, 아버지를 따라 문인화가의 길을 걸었다. 82세로 장수하면서 집안을 건사했다. 윤두서가 세상을 떠났을 때, 막내인 윤덕증(1714~1778)이 돌 지난 해였으니 윤덕희는 대가족의 맏형으로 아버지의 역할마저 해야 했다. 윤덕희의 단양 유람에 동참한 윤덕후(1696~1750)는 윤두서의 넷째 아들이고, 윤덕염(1702~1754)은 여섯째이다. 윤덕희는 1746년 6월 남쪽으로 가는 윤덕후에게 애정이 서린 이별의 징표로 <선면산수도>(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 그림부채를 선물한 적도 있었다.
섭서葉西 권엄(1729~1801)은 관찰사, 대사간, 판서 등을 두루 지낸 문신文臣이다. 세 형제의 여행에 나이 어린 권엄이 왜 참가했는지 궁금해서 해남 윤씨 족보를 뒤지니, 윤두서의 둘째인 윤덕겸(1687~1733)의 사위로 나온다. 권엄은 나이로 보아 윤덕겸의 늦둥이 딸과 결혼했다. 윤덕겸의 사후인 1745년 전후에 맏형 윤덕희가 챙겼을 혼사이다. 이들 네 명의 생졸년과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윤덕희가 1747년 3~4월 금강산을 여행(《금강유상록》)하기 이전인 1745년 전후에 단양팔경을 다녀간 듯하다.
윤덕희의 노년 필치로 어눌하게 그린 비단그림 <도담절경도>는 1763년에 그린 <송월농현도松月弄鉉圖>와 마주하여 서화첩 《보장寶藏》(녹우당 소장)에 들어 있다. 단양을 유람한 지 근 20년 뒤 실경을 추억해서 그렸을 수묵화이다. 중경에 도담島潭 세 봉우리를 우뚝하게 과장해 배치하고, 멀리는 치악산경이다. 화면의 왼편 구멍이 뚫린 봉우리는 도담삼봉의 맞은편 북쪽 강언덕의 석문石門이다. 이 그림처럼 석문과 삼봉이 한 화면에 담길 시점을 실제 현장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윤덕희가 단양의 명소 도담 풍광을 그렇게 기억해 구성했을 것 같다. 또 윤덕후에게 그려준 <선면산수도> 역시 강변의 험준한 벼랑과 산세에서 단양풍경을 연상케 한다. 윤덕희의 기억에 따른 합성과 변형방식은 조선후기 진경산수화 형식을 완성한 겸재 정선(1676~1759)의 화법과도 유사하여 흥미롭다.

이태호 (11)

윤위 〈구택규 초상〉 비단에 수묵채색 58.7×42.3cm 18세기 중엽 서울옥션 125회 출품작

윤두서의 손자, 윤위의 <구택규 초상>
윤위의 <구택규 초상>은 관복차림의 문신 흉상이다. 2012년 가을, 프랑스에서 국내로 반입돼 옥션에 출품되었다.(제125회 서울옥션 미술품경매 도록, Lot.414, 2012, 9) 족자로 꾸민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림에는 이름이 없으나, 초상화의 아랫단에 ‘1760년 7월(음력) 피눈물을 흘리며 썼다’는 단정한 예서체의 글에서 초상화의 주인공이 확인된다. 글쓴이는 병조판서를 지낸 구윤옥具允鈺 (1720~1792)이다. 그가 떠올린 ‘중년 이후의 아버지’, 곧 초상인물은 한성부판윤을 지낸 존재存齋 구택규具宅奎(1693~1754)이다. 1750년경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범재泛齋 윤위尹愇(1725~56)라고 밝혀 놓았다.
윤위는 윤두서의 일곱째 아들인 윤덕현尹德顯 (1705~72)의 장남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시와 문장으로 유명했다. 32세에 세상을 떠났으나 《범재집》이 전하고, 서문을 윤두서의 외증손자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지었다. 윤위의 아들 남고南皐 윤규범尹奎範(1752~1821)이 요청한 서문에서, 정약용은 절친인 윤규범의 천재성 못지않은 윤위의 문학세계를 서성書聖 왕휘지·왕헌지 부자에 빗대서 칭송했을 정도이다. 윤위가 그린 초상화의 출현으로, 윤두서 집안에서 삼대에 걸쳐 배출된 문인화가는 3명에서 4명으로 늘어난 셈이다.
<구택규 초상>은 50대 사대부 문관의 고집스러운 품위가 가득한 비단그림이다. 오사모에 분홍색 단령포 차림으로 전형적인 조선후기 관복 초상화 방식을 보여준다. 구불구불 세심한 선묘의 희끗희끗한 수염이나 붉은색 입술, 음영을 살짝 넣은 기법은 <윤두서 자화상>에서 배웠을 법하다. 이마와 눈가 주름, 코와 안면의 검버섯 같은 피부병 묘사까지 사실감이 서늘하다. 어깨선의 수정 흔적이나 몇 가닥 옷주름에 보이는 조심스러운 붓자욱은 문인화가의 담백한 감성을 물씬 풍긴다. <구택규 초상>은 소품의 흉상이지만 단아한 명작이다. 윤두서의 뛰어난 소묘력 유전인자가 기존에 알려진 연옹 윤덕희-청고 윤용 부자보다 윤위에게 내려진 모양이다. ●
 

SPECIAL ARTIST 안창홍

A218

위  캔버스에 유채 114×194cm 2014 아래  캔버스에 유채 114×194cm 2014

위 <맨드라미 예찬> 캔버스에 유채 114×194cm 2014 아래 <비바람 이후> 캔버스에 유채 114×194cm 2014

작가 안창홍의 세상을 향한 날카로운 시선과 화면을 압도하는 특유의 회화적 어법은 한국 현대미술에서 각별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지난 30여 년간 그가 보여준 예술적 성취와 첨예한 작가의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도발적인 인간형상으로 시대정신을 그려왔던 안창홍이 이번에는 꽃을 그렸다. 아름다움을 넘어 기괴하고 처연하게 보이는 꽃은 안창홍의 또 다른 심상풍경이다. 2014년 11월 28일부터 12월 28일까지 더 페이지 갤러리에서 열린 작가의 29번째 개인전 을 계기로 그의 작품세계를 탐구한다.

고통으로 기록한 처절한 아름다움
최태만 국민대 교수

안창홍의 작품을 보면서 나는 도록 뒤쪽의 여백에 ‘맨드라미의 꽃봉오리는 검붉은 물감덩어리이자 짓이겨진 육질이고, 폭발하는 장기臟器이다’라고 적었다. 29번째 개인전 개막을 앞둔 11월 15일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작가노트에서 “내 눈에 의해 관찰된 맨드라미는 느낌이 식물이라기보다는 동물에 가깝다. 마치 정육점 진열장의 붉은 조명등 아래 놓인 살코기 같은 느낌! 꽃의 형태 대부분이 좌우가 비대칭이고 괴이한 데다 원초적 느낌의 현란하고 강렬한 붉은 빛, 질긴 생명력이 느껴지는 다양한 모양의 억센 줄기와 다양한 색의 잎들. 온 몸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듯이 시들어갈 때의 처연함. 망연자실, 꽃이긴 한데 꽃이 아닌 듯한 느낌”이라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그림 속의 꽃들은 실핏줄처럼 엉겨있는 줄기와 가지 위로 솟구치는 에너지가 응고된 곳에서 요염하면서도 강인하게 몽우리를 피우고 있다. 선명한 원색의 물감덩어리가 도도하게 짓이겨진 꽃은 화려하면서 처연하다. 그래서 대지에 낭자하게 뿌려진 선홍빛 피가 그대로 굳어버린 듯한 그의 그림은 처절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의 그림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긴장, 즉 처절한 아름다움은 그가 단지 자연을 재현한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식물을 동물로, 붉디붉은 빛깔의 꽃을 살코기로 표현한 것은 모두 죽음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그의 그림은 죽음의 비유이자 환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화려하게 만개했지만 왠지 쓸쓸하거나 혹은 아예 시들어 말라버린 안창홍의 꽃밭은 풍경이라기보다 정물에 가깝다. 서구미술에서 정물화는 ‘여전히 살아있는still-life’이란 뜻을 지니고 있으나 동시에 ‘죽은 자연natura morta’이란 의미도 담고 있다. 특히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발전한 정물화 속의 활짝 핀 꽃은 언젠가는 시들기 마련이고 자신을 태우며 어둠을 밝히는 촛불도 곧 꺼져버릴 운명이며, 투명한 유리잔도 깨질 것이고 거품은 허공으로 사라질 것이므로 부귀영화와 같은 세속적 욕망은 물론이거니와 삶조차 덧없음vanitas을 상징한다. 대체로 이 그림들은 이러한 대상들을 통해 삶의 허망함을 일깨움으로써 ‘죽음이 항상 네 옆에 있으니 기억하라memento-mori’란 교훈을 담고 있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삶에의 욕망eros과 죽음의 충동tanathos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한짝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창홍도 죽음 자체만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농염한 개화의 절정을 그린 것일까? 이번 전시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그 길이만 10m가 넘는 세 개의 꽃밭 풍경을 연결한 작품이다. 화려하고 농염한 빛깔을 자랑하는 다른 그림과 비교해 볼 때 이 작품은 꽃밭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생성과 소멸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삶의 순환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 앞에 놓인 보라색의 커다란 두상은 그의 작품이 단지 삶의 덧없음에 대한 경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함의를 지니고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그는 이 입체작품의 제목을 사람의 피를 먹고사는 좀비 세상을 다룬 영화제목에서 따와 <눈먼 자들의 도시>라고 붙였다. 물론 전시장이나 도록에서 그 제목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꽃밭으로 둘러싸인 이 보라색 두상은 그의 작품에 담긴 수수께끼와도 같은 의미를 푸는 열쇠구실을 하고 있다.

A234

<내 이름은 맨드라미> 캔버스에 유채 91×71.5cm 2014

정물같은 풍경
안창홍은 새로운 작업을 시작할 때마다 어김없이 나를 호출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소환장을 받은 사람처럼 그의 작업실로 출두한다. 덕분에 나는 이 꽃밭작업의 시작부터 볼 수 있었다. 그것도 부족한지 내가 작업실을 다녀온 후에도 그는 SNS 문자메시지를 통해 작업과정을 사진과 함께 꼭 보고 한다. 2014년에 보낸 문자를 보자. 4월 2일 그는 ‘안창홍의 정원’이라 이름 붙인 첫 작품을 보내왔다. 그리고 작업에 대한 글보다 한국사회를 고통에 빠뜨린 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의 문자는 대체로 침몰한 세월호에 대한 정보나 심경을 토로한 짧은 글로 채워졌다. 그리고 한동안 작업에 대해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더니 6월 20일에는 210호 크기의 유화 <검은비>를 완성했다고 알렸다. 7월 20일에는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을 생각하며 그린 작품과 함께 풍경과의 오버랩이 쉽지 않다는 글을 보냈으나 7월 30일에는 드디어 이 작품을 완성했음을 알렸다. 그리고 이 작품을 꼭 봐야한다며 작업실 방문을 독촉했다. 그의 출두명령을 받고 간 작업실에서 한 무더기 맨드라미가 뒤엉긴 그 작품을 봤다. 좌우에 평행으로 맨드라미가 두 그루씩 쓰러져 있고 화면의 중심에는 맨드라미 군락이 한 몸처럼 뒤엉겨있는 이 작품은 그 구조에서나 분위기에서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을 떠올리게 했다. 전면으로 돌출된 꽃에 비해 평면으로 처리하여 원근을 파괴한 배경은 작품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훗날 전시를 개막할 즈음 《조선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그것에 대해 ‘구도의 도발’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의도적인 구도 해체는 안창홍이 정물 같은 풍경을 위한 연출 즉, 연극이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미장센mis-en-scene이란 점에서 작품에 담긴 비유와 환유, 그리고 상징을 감추면서 드러내는 수사이기도 하다. 나는 고야가 그린 <1808년 5월 3일>에 대해서 미술사 서적보다 홋타 요시에堀田善衛가 방대한 자료 조사와 소설가의 상상력을 동원해 쓴 고야 평전 번역본을 통해 더 재미있게 읽은 것으로 기억한다. 고야는 이 작품을 사건이 일어난 지 6년 후인 1814년에 그렸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통합한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나폴레옹이 보낸 프랑스군에 맞선 마드리드 시민들의 봉기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경비병부대가 봉기에 참가했거나 검문 중 조그만 칼이라도 소지한 사람이라면 모조리 잡아다가 프린시페 피오 언덕에서 처형하는 장면을 그린 이 작품은 겉으로 볼 때 선과 악이 분명하게 나뉘어 있다. 잔인한 처형 앞에 무기력한 시민들과 비교할 때 표정을 감춘 프랑스 경비병들은 살인기계로 표현돼 있다. 더욱이 화면 속 흰색 셔츠를 입고 두 손을 치켜든 남자의 손에 못자국과 같은 상처가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그를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예수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야는 이 그림과 함께 5월 2일에 일어난 스페인 시민들의 봉기도 그렸다. 마드리드 시민들이 프랑스군에 소속된 이집트인 지휘관이 이끄는 용병부대와 뒤엉겨 싸우고 있는 이 작품에는 선악의 경계도, 위대한 영웅도 없다. 혼란스럽고 산만한 구도는 이 혈전의 잔인함만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사실 대부분의 전쟁화는 전투에서 승리한 자의 용맹을 과시하기 위해 전투의 끔찍함을 왜곡한다. 고야는 불과 하루 사이에 일어난 두 사건을 왜 이토록 다르게 그렸을까. 고야는 5월 3일의 사건을 목격하지 않았고 훗날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참고해 <1808년 5월 3일>을 그렸다. 그 뒤에는 누구보다 생존본능이 강했던 고야의 정치적 고려도 작용했지만 또 한편으로 당시 유럽과 스페인의 복잡한 정치에 대한 그의 의식도 작용하고 있다. 그때까지 스페인에는 종교재판이 존재했고, 나폴레옹이 그것을 금지하자 스페인 교회는 스페인인들로 하여금 나폴레옹에 반대해 봉기할 것을 사주했다. 반면에 왕정과 교회의 무능과 억압에 지친 스페인인들은 프랑스가 혁명의 이념을 전파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결과적으로 스페인인들은 프랑스군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임을 깨닫고 저항했다. 이러한 복잡한 정치 구조 속에서 고야는 프랑스군이 떠나고 페르디난도 7세가 복권한 후인 1814년 의회에 청원하여 왕의 재정지원을 받아 작품을 제작했다. 고야는 <1808년 5월 3일>에서 희생자를 순교자로 표현하고 있으나 스페인왕정은 자취도 없고, 교회조차 더 이상 시민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상황을 포착했다. 따라서 그림 속에서 전통적인 기독교미술의 구원이나 부활의 상징을 발견할 수는 없고 잔혹한 살육만 강조돼고 있다. 고야의 작품에서 강조된 야만과 폭력의 섬뜩함이 안창홍의 작품에서 맨드라미의 핏빛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내가 작업실을 다녀간 후인 8월 23일 그는 90% 완성했다는 소식과 함께 시들어가는 맨드라미 꽃밭을 통해 가깝게는 우리나라, 멀게는 지구촌의 절망과 슬픔을 이야기한 <안창홍의 뜰, 개 같은 여름>이란 작품의 이미지를 보내왔다.(도록에는 이 제목들이 모두 빠졌고 단지 ‘뜰’이란 애매하고 중성적인 제목만 붙어있다.) 다시 안창홍의 작업노트로 돌아가 보자. “2014년은 나에게 가혹한 해였다.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의 무차별적인 학살, 여객기 피격으로 사망한 259명의 사람들, 이라크 내전, 슬픈 아프리카 빈국들의 끝없는 전쟁과 살육, 에볼라로 사망한 5000여 명의 사람들, 전 세계를 수렁으로 내몰고 있는 이 모두가 피도 눈물도 없는 약육강식의 경제논리가 모든 가치의 우위에 있는 광기와 탐욕의 결과물들이 아닌가! 그리고 잊혀질까 두려운 세월호 사건.” 그렇다. 4월 16일 이후 한국은 깊은 절망의 수렁 속에 잠겨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여름이 지나갔지만 진전은 없었고, 10월 말 생일을 맞은 황지현 양의 시신이 인양되었다. 그러므로 안창홍의 풍경 같은 정물은 죽음이 네 옆에 있을지니 항상 그것을 기억하란 보편적인 경구가 아니라 죽음 앞에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와 고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안창홍은 이년 전부터 작업실 앞마당에 작은 꽃밭을 일구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꽃을 통해 자연과 투쟁하며 살아남기 위해 생존의 몸부림을 치는 인간의 삶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그것은 어쩌면 안창홍 자신의 모습을 꽃을 통해 투영하려는 욕망의 발로일 것이다. 그러다 그는 자신의 뜰에서 맨드라미를 발견했다. 돌담 밑이나 장독대 부근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그 꽃이다. 맨드라미의 학명은 셀로시아 크리스타타Celosia cristata로서 린네가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셀로시아는 그리스어로 불타오르다는 의미를 지닌 ‘켈로스κηλος’에서 파생한 것으로서 꽃봉오리 모양이 불꽃처럼 보이기 때문에 붙여졌다. 그래서 맨드라미의 꽃말도 ‘불타오르는 사랑’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안창홍의 맨드라미는 죽은 자연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분노를 불태우며 부활하는 살아있는 자연은 아닐까. 그는 “예술은 규범과 단정의 부산물이 아니라 모호함과 불안함과 갈등의 긴장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라야 더욱 아름답다”고 했다. 그래선지 그의 작품이 나에게는 처절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

 캔버스에 유채 97×194cm 2014

<검은비> 캔버스에 유채 97×194cm 2014, 더 페이지 갤러리 개인전 전시광경

 IMG_0421안 창 홍 Ahn Changhong
1953년 태어났다. 부산 동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금까지 개인전 29회와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13년 제25회 이중섭미술상, 2006년 제1회 부일미술대상, 1998년 부산봉생문화상, 1989년 프랑스 카뉴국제회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현재 경기도 양평에서 작업한다.

ARTIST REVIEW 송현숙

복잡하고 어려운 것을 단순화하면 그 힘은 강해진다. 최소한의 붓놀림으로 성숙하고 명료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작가 송현숙을 만나본다. ‘획’이라는 동양적 개념과 서구미술의 ‘시간성’이 공존하는 그의 회화에 드러난 리얼리티는 무엇일까.
2014년 11월 11일부터 12월 31일까지 학고재에서 열린 개인전 를 통해 한층 묵직하고 깊어진 그의 작업세계를 살펴본다.

적극적 내용미학으로의 모색, ‘붓질의 다이어그램’을 떠올리며
박석태 미술사

어떤 텍스트냐를 막론하고 그 안에는 작가가 추구하는 진실한 믿음의 세계가 존재한다. 그것이 세계평화나 미술의 사회적 역할과 같은 거대담론일 수도 있지만, 작가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좀처럼 알아차릴 수 없는 내밀한 태도 혹은 정서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작품에는 그 수만큼의 리얼리티reality가 존재한다고 할 터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려는 리얼리티는 흔히 ‘리얼한 표현이 인상적이다’라고 할 때의 사실적 표현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작품으로서 다가가려는 작가의 구체적인 어떤 지점을 가리킨다. 이를 조형예술에 국한해 말하자면, 그 내밀한 지점에 다가가려는 태도 자체에 존재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구사하는 언설言說로는 도저히 표현되지 않지만, 특유의 시각적 장치를 통해서만 작가가 제시하고 싶어 하는 리얼리티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송현숙의 회화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리얼리티는 무엇인가. <3획>, <6획>, <28획> 등 작품 타이틀이 말하듯 최소화된 획으로 펼쳐 보이는 동양적(한국적) 개념인가, 그를 통해 작품과 작가가 대면하는 방식인가, 혹은 행위와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내용적 측면의 리얼리티인가. 이때 리얼리티라는 개념은 1970년대 파독 간호사 출신으로 겪어야만 했던 디아스포라라는 정체성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탐구인가, 화면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횃대, 흰 천, 익명의 인물과 같은 소재들로 전달하려는 두고 온 땅에 대한 그리움인가.
그가 제시하는 ‘획’이라는 동양적 개념은 서구미술의 ‘시간성’과 일정 부분 맥을 같이한다고 보인다. 획은 필을 긋는 행위를 뜻하지만, 호흡이 만들어내는 시간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생몰년 미상)의 <달마도>나 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생몰년 미상)의 <풍설야귀도>에서 그 본질적 속성과는 별개로 그야말로 ‘일필휘지’가 만들어내는 정지된 호흡을 읽기도 한다. 반대로 공필工筆로 형사形似를 추구하는 그림에는 헤아릴 수 없는 붓질의 중첩이 만들어낸 시간이 응축돼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획을 긋고 그 수가 그대로 작품 타이틀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송현숙의 화면은 상당 부분 동양적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인다. 송현숙은 이번 개인전에서도 중첩된 시간성을 예의 그만의 태도로 기록하고 있다. 그가 겪어낸, 혹은 그려 온 지난한 시간의 쌓임을 어두운 색채로 증언하는 작업 태도는 절제된 획의 흔적을 보여주는 방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는 시간성을 기록하는 그만의 적절한 행위로 보인다. 그러나 시간과 행위를 기록하는 서구의 추상표현주의 방식과는 상당히 다른 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즉 서구의 방식이 실존적 사고에 근거해, 대상(화면)과 주체를 전제한 채 주체가 강조되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고 한다면, 송현숙의 그것이 화면과 마주하는 주체가 구분되지 않는 몰아일체의 경지를 탐구함으로써 서구의 이분법적 사고를 해체한다는 점은 주목을 요하는 지점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획수를 기록하는 그의 작품은 시간의 경과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이 외면화하기까지 사유의 기록이기도 한 것이다.

(오른쪽) 캔버스 위에 템페라 150×200cm 2014

<28획>(오른쪽) 캔버스 위에 템페라 150×200cm 2014

동양적 사고로 풀어낸 내면의 리얼리티
송현숙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시간에 대한 동양적 사고를 실험한다. 즉 시간 그대로의 시간positive time과 대비되는 개념적인 시간negative time을 형상화하는 방식을 취한다. 언뜻 보기에 그의 화면은 획수와 타이틀로 이어진 순환구조로 마치 촬영시간과 러닝타임이 일치하는 무편집영화를 연상시키지만, 그 이면을 채우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혹은 그 정체성에 맞닿은 재현을 넘어선 사의寫意의 흔적이라는, 기나긴 사유의 시간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고 보인다. 이처럼 가시적·비가시적 시간이라는 양면성을 표현하는 그의 방식은 마치 동양의 음양사상을 떠오르게 하는 지점인 바, 선형적 시간개념을 근간으로 한 서구적 사상에 대한 일종의 반전을 시도하는 듯하다.
한편 사유가 동반된 시간 개념을 증언하는 그의 행보는 시대의식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 같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길을 끈 작품은 <붓질의 다이어그램(4월 16일 세월호 비극을 생각하며 그림)>(이하 <붓질의 다이어그램>)이다. 검고 어두운 배경 속에 그가 오랫동안 택해온 소재들-횃대, 그 위에 놓인 흰 천으로 감긴 길고 날카로운 형상-이 마치 깊은 바다 속에 침잠해 있는 비극의 배처럼 검은 공간 속에 힘겹게 형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들은 그가 두고 온 땅을 떠오르 하는 그리움의 기표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목의 ‘다이어그램’이 뜻하듯 그와는 다른 무엇인가를 전달함을 목적으로 제시된 시각언어로 보인다. 통곡마저 삼켜버린 그 음험한 바다 한가운데서 서서히 가라앉으며 운명을 달리한 수백 명의 원혼에 수의를 연상시키는 흰 천이 감긴 듯한 장면은 고요하므로 더 큰 울림을 담아낸다. 유일하게 획수가 표기되지 않은 작품 제목이 상징하는 듯한, 적어도 이 작품에서만큼은 그가 줄곧 스스로 내면화해왔던 규율을 넘어선 태도로 인하여 그가 제시하려는 내용적 측면의 ‘리얼리티’를 얻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번 개인전에 선보인 16점의 작품은 <붓질의 다이어그램>으로 수렴되는 듯하다. 구도하는 수도승처럼 한 획 한 획 써내려간 그의 화면은 이국에서 사무치게 솟구치는 고향 땅에 대한 그리움, 그곳에서 벌어지는 갈등으로 인한 슬픔, 그리고 차마 외면하지 못할 시대의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붓질의 다이어그램>에 이어 <8획>에 등장하는 횃대에 감긴 흰 천이 우리 시대의 비극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면, 실상 그는 화면에 단지 여덟 번 붓을 그은 것만이 아니라고 보인다. 현상적으로 보이는 8획을 통해 그는 4월 16일, 그때부터 간단없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스스로의 아픔을 화면과 일체가 되어 증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서두에서 리얼리티가 작가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좀처럼 알아차릴 수 없는 내밀한 태도 혹은 정서의 문제일 수 있다고 적었다. 또 내밀한 지점에 다가가려는 태도 자체에 존재 가치가 있다고 했다. 동양적 사고에 기반을 둔 조형언어라는 그만의 리얼리티는 바야흐로 내용적 측면에서 리얼리티를 획득하는 모색의 지점에 서 있다고 보인다. 달리 표현하자면 개인적 차원의 정서를 드러내는 태도가 사회적 인식의 범주로 나아가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더욱이 그 동안의 작업이 디아스포라로서 정체성을 모색하는 정서적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을 거두어 왔으므로 이러한 그의 변화는 작업의 이력에 깊이를 더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리얼리티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기법적인 해석과 표현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보편적인 속성으로의 전이, 나아가 이미지가 갖는 존재론적인 규명이 적극적인 내용미학으로 연결되었다는 데에 이번 송현숙 개인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

 캔버스 위에 템페라 135×174cm 2012

<1획 위에 4획(왼쪽), 8획(오른쪽)> 캔버스 위에 템페라 135×174cm 2012

 송현숙 인물송 현 숙 Song Hyunsook
1952년 태어났다. 1972년 파독 간호원으로 독일로 건너가 4년간 독일의 병원에서 근무하다 함부르크 미술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독일 학술교류처 장학생으로 전남대에서 동양화와 한국미술사를 연구했다. 1982년부터 독일과 한국을 넘나들며 18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스위스 베른미술관, 독일 함부르크 미술관,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일본 모리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함부르크에서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다.

 

ARTIST REVIEW 나현

DF2B1686

<바벨탑 프로젝트, 체리나무 바벨탑>(사진 앞 오른쪽)120×120×140(h)cm 2013

나현의 개인전 <프로-젝트(PRO-JECT)>가 LIG아트스페이스에서 2014년 11월 27일부터 12월 31일까지 열렸다. 나현은 이 전시에서 수집한 역사적인 자료를 작가 개인의 주관과 결합하여 객관의 역사 속 절대 진실을 보여주는 일련의 작업을 선보였다. 따라서 관람객은 전시장에서 결과물이 아닌 지금도 지속되는 작업 과정을 목도하게 된다. 객관의 역사가 재구성되는 나현의 전시장으로 들어가 본다.

‘절대 진실’에 저항한다
김주원 미학

“민족의 피가 더럽혀져가는 이 시대에 자국의 가장 우월한 인종 보존에 최선을 다한 국가는 언젠가 분명 세상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우월 인종 보존을 두고 성공 가능성이 있는지를 당이 요구하는 희생과 비교하며 불안해지는 일이 있더라도 이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Mein Kampf》 중에서

한 작가의 작품세계에 관한 글을 내가 이렇게 불순하게 시작하는 이유가 있다. 한 사람의 광기어린 편견과 민족, 인종에 대한 오해가 다른 민족을 절멸의 운명으로 이끌고 세계지도를 전쟁과 학살의 피로 얼룩지게 한 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작가가 말하는 ‘절대 진실Absolute truth’, 즉 근대와 근대성의 표상이며, 이를 교육받고 강요받으며 유년기를 보낸 세대의 작가 나현이 이에 대한 의심으로 자신의 프로젝트들을 전개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성이자 말인 로고스에 대한 신뢰와 확신의 시대에 대한 의심인 셈이다. 합리주의와 식민주의/우생학, 진보에 대한 믿음과 인종/민족주의, 자본주의와 실증주의 등의 근대 프로그램은 작가 나현의 <실종Missing>(2006~2009)에서부터 현재진행형인 <바벨탑The Babel Tower>(2012~)에 이르는 거의 10년 동안 진행되는 프로젝트 등의 비판적 대상이며, 이로 인해 만들어진 객관화된 ‘하나’의 사실 혹은 역사로 불려온 것들이 사실은 두껍고 단단한 마스크를 쓴 복잡한 ‘여러’ 다른 얼굴을 감추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물론 이것은 그의 작업이 어떻게 진행돼왔고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를 살피는 일에서 확인될 것이다.
LIG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리는 작가 나현의 전시 <프로-젝트PRO-JECT>에는 작가가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현재 진행 중이거나 지금까지 진행해 온 회화, 드로잉, 영상, 사진, 설치 등 다양한 매체의 작업들이 소개되고 있다. 그의 프로젝트는 <실종>(2006~2009), <나현 보고서-민족에 관하여NA Hyun report-about the Ethnic>(2008~2011), <로렐라이의 노래A Song of Lorelei>(2010~2013), <바벨탑>(2012~) 등 크게 네 개로 구별되지만 이들은 연쇄적 성격을 지녔다.
프로젝트들은 하나의 특정한 레퍼런스, 장소, 그리고 시간에서 시작해 관련된 자료나 문서들을 수집하고 실재 인물 인터뷰 등을 이용하는 리서치 기반의 작업 형식을 띤다. 그러나 그 특정한 레퍼런스와 장소적 그리고 시간적 편협함 안으로 미끄러지지는 않는데, 이는 나현의 작업이 리서치 과정과 결과물의 형식에서, 아카이브나 기록이라는 전형성과 박제성에서 멀리 나아가기 때문이다. 즉 사건으로서의 역사적 사실과 그것을 에워싼 담론들의 축조들을 여러 맥락에서 살피고 다시 현재 혹은 각기 다른 장소, 시간과 엮고 구성하여 역동적 읽기와 새로 쓰기의 가능성을 여는 흥미로운 과정을 끌어오는 것이다.
예컨대, 작가가 우연한 기회에 접하게 된 독일제국의회의 1912년 혼혈혼 논쟁Die Mischehendebatte im Reichstag 자료에서 출발한 <바벨탑>의 경우를 보자. 사실, 인종 혼합이라는 공포의 이미지는 근대 식민주의 담론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식민지의 지배 인종이 피식민지인과 혼합되면서 식민 주도의 힘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인종 혼합=종種의 퇴화라는 우생학적 담론이 바탕에 있다. 이 정치적 논쟁의 법률적 도덕적 성격 판단 여부를 떠나 이러한 논쟁의 사건 속에서 지속적인 역사적 과정의 인식들이 생기게 된다고 작가는 보았던 것 같다.

 아틀리에 에르메스 서울 전시광경 2013

<바벨탑 프로젝트> 아틀리에 에르메스 서울 전시광경 2013

네 개의 프로-젝트와 질문들
혈통, 민족, 로고스(이성이자 말), 신화 등으로 대응되는 바벨탑 이야기는 작가 나현에 의해 전후 전쟁 쓰레기로 만들어진 베를린의 토이펠스베르크Teufelsberg(악마의 산)과 자본의 논리 아래 쏟아지는 산업, 생활 쓰레기로 이루어진 서울의 난지도라는 두 도시의 인공산으로 연결되었다. 프로젝트에는 7000년 전 유럽과 한성 백제시대의 <목조우물>의 재현, 베를린 거주 외국인들의 모국어 <인터뷰_크로이츠베르그>(2013~2014) 프로젝션, 외래종과 토착종의 채집 식물들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목조우물> 속에 프로젝션 되고 있는 <인터뷰>는 터키, 미국, 일본, 캐나다, 에티오피아, 그리스, 폴란드, 이탈리아, 이스라엘, 브라질, 한국 등 각기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지만 한 가지 언어(‘영어’)로 질문하고 다시 한글로 번역되는 과정을 보인다.
이 작업들은 나현의 프로젝트가 고대 유적 바벨탑의 발굴 프로젝트임을 상징한다. 서로에게 대응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로고스를 둘러싼 분리와 단절의 계기들을 혼합된 경계지대로 이끌어내어 서로가 ‘적’이자 ‘위험한 것’이었던 민족 간 혹은 인간과 신, 자연과 인간 등이 스스로 품었던 두려움, 공포, 경계 등을 끄집어냈다. 이는 서로 연결될 수 없을 것만 같던 공간과 시간, 여러 가지 계기들이 작가 나현에 의해 다시 직조되어, 지배적인 판단, 정의, 역사라는 확정된 절대 진실에 대한 수사학적 전복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프로젝트 <바벨탑>은 <로렐라이의 노래>, <나현 보고서-민족에 관하여>와 동일한 맥락에 서있다. ‘기적’과 ‘개발’의 수사로 언급돼 온 독일의 라인 강과 한국의 4대강을 연결하여 3년에 걸쳐 진행된 또 다른 발굴 프로젝트 <로렐라이의 노래>는 14세기 독일의 성과 영토를 위한 경계 목A boundary post <PILE(말뚝) PROJECT>(2012)을 재현한 것으로 시작된다. 나현은 2년 동안 강변에 <말뚝>을 박고 자연의 흐름과 그것을 둘러싼 인간의 사회정치적인 태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관한 압축적 지표화를 시도했다. 라인 강을 둘러싼 정벌과 전쟁, 교역과 공업, 생태도시로의 전환이라는 시간차를 둔 이 모순적인 역사적 모델들은, 아름다운 소녀의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죽음의 유혹이라는 전설의 노래와 하이네의 시 ‘로렐라이’로 수렴되어 <말뚝>에 흔적으로 남게 했다. 그리고 다시 <말뚝>은 테이블로 제작되어 ‘기적’과 ‘개발’이라는 근대적 신화를 만들기 위한 충돌과 모순, 경계를 통합하는 가능성으로 전환됐다. 라인 강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한국의 남한강대교-한강, 구담교-낙동강, 담양호-영산강, 금강 등지에서도 나현의 프로젝트는 그렇게 수행되었다.
사실 <나현 보고서-민족에 관하여>는 앞의 두 프로젝트가 의심하고 있는 문제들, 즉 근대와 근대성이 요구해온 ‘절대 진실’로서의 동일성과 균질성, 그리고 경계가 그 이면의 것들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질문에 닿아있다. 다른 것들에 비해 상당한 갈래를 갖고 있는 작업들은 시베리아나 몽골의 바이칼 호와 쿠바 그리고 한국의 서남해안 등지를 여행하며 수집한 역사와 자료들에 기초한다. 작업은 민족(혹은 ‘국민’, nation)의 구성적 특징이라 여겨진 초역사적 단일성과 동질성의 개념을 흔들고 민족ethnic의 문제를 디아스포라와 잡종, 그 경계에 주목하게 했다. 원시시대 소금과 먹이를 찾아 이동한 매머드를 따라 인간 역시 이동했다는 작가의 가설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1950년대 한국전쟁에 참전한 프랑스 군인 중 실종자 7인에 관한 도큐멘트에서 출발한 <실종>은 프랑스군, 연합군, 실종자라는 무정체적 정체를 지닌 보편 혹은 덩어리들인 7인의 병사를 12인의 개인, 혹은 파편으로 찾아내고 소생시켰다. 실종이라는 이미 멈춰버린 사태와 그 사태의 해체 혹은 재구성을 위한 그의 작업 과정은 실종자 7인의 실종확인 도큐멘트, 시테 섬의 7개의 다리, 관을 연상시키는 7개의 함석 제작품 등으로 가시화된다. 특히 7개의 함석제작품 안의 <물 위에 그리기>는 지나간 시간들이 사건으로 남는 방식에 관해 말하고 있다. 물위에 그린 그림, 증발된 물, 함석 바닥에 남은 물감의 분명치 않은 흔적 등은 주체에 따라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인식되고 상상될 것이다.
<우물>, <말뚝>, <매머드 터스크>, <물위에 그리기>는 네 개의 프로젝트 각각의 중심에 있다. 현지 조사와 수집을 통해 모아진 레퍼런스들에 기대는 종류의 작업이 잃기 쉬운 미학적 터치들은 작가가 설정한 발굴 지표로서 이들 작업에서 해소되고 상징화됐다. 나는 근대와 근대성의 모순적인 모델들을 마술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으로 이들을 상정한 작가의 진심을 여기에서 읽는다. 그래서 그의 작업이 프로젝트가
아닌 프로-젝트일 수 있는 가능성을. 다른 시간들과 공간들, 그리고 다른 공동체들의 담론적 네트워크를 실천하는 수행성을. ●

 2010/2012/2013

<로렐라이의 노래 프로젝트, PILE-Rhine> 2010/2012/2013

 

DF2B0389나 현 Na Hyun
1970년 출생했다. 홍익대 회화과, 동 대학원 그리고 옥스퍼드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과 일본, 독일, 영국 등지에서 15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한국을 비롯하여 인도, 일본, 미국, 영국 등지에서 열린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출품했다. 프랑스 파리 시테, 쿠바 아바나, 베를린 쿤스트하우스 베타니엔 등 국내외 레지던스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현재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

 

EXHIBITION & THEME Africa Now: Political Patterns

 

 

아프리카 (9)

Yinka Shonibare, MBE (왼쪽) Victorian children’s dresses made of Dutch wax printed cotton 각 460×280cm 2010

글로벌라이제이션 이후 소수자, 제3국가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 아프리카의 미술을 소개하는 전시는 극히 드물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아프리카 나우: Political Patterns>(2014.12.6~2.15)는 그 동안 간과해온 아프리카의 예술을 대거 소개한다. 미국 영국에서 활동하는 아프리카 출신 작가를 포함한 20명의 작품 100여 점이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민속적인 면을 강조한 작업을 단순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탈식민주의 이론, 이민세대의 인종차별, 아프리카 대륙 내의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작가들의 작업을 선별해 흑인 디아스포라의 탈식민주의적 예술적 성찰을 엿 볼 수 있다.

정체성이라는 환영(spectre)-정체성 정치학으로서의 아프리카 현대 미술

정현 미술비평

사회 전반에 팽배한 정체성에 대한 요구는 개인적으로는 견고한 자아 형성에 초점이 맞춰지지만, 공동체, 집단, 국가, 민족, 인종, 성 그리고 종교의 관점이 투사되면 정치적 차원의 의무가 등장한다. 중심과 주변, 주류와 비주류의 위계질서가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거대 명제로부터 출발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결국 민족과 인종의 동일시는 백인 남성 중심의 역사를 주류의 세계사로 만들었다. 주변의 반란이 촉발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유는 분명하다. 역사라는 기획물은 세계를 관측하는 절대적인 창이 되었고 수세기에 걸친 유럽 국가의 식민지 개발은 열등한 민족, 인종, 성이란 고정관념을 인류에 심어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의 관성에 균열을 만들고 이 틈새로부터 세계에 관한 인식의 틀을 이동시키고 확장시키기 위한 노력은 1960~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시작되었다. 혁명적 사유의 시작은 사상가, 문학가들이 주도했고 시각예술계에서는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정치적 관점을 바탕에 둔 시도가 일어난다. 주변의 혁명은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냈고 예술, 문화, 학술 등의 분야에서 이른바 소수적 사고가 핵심 사상이 된 것은 비교적 단기간에 이루어낸 큰 변화의 물결임에 분명하다. 우리는 미국에서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는 역사적 전환기를 목격한 세대이다. 그러나 안심하기엔 아직 이른 것일까? 현재 미국에서는 부조리한 흑인 차별이 끊이지 않고, 백인과 흑인 사회 간의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미술계에 다문화, 다원주의가 반영된 첫 전시는 1980년대 말 파리의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대지의 마술사들>(1989)로 오세아니아, 아프리카의 동시대작가를 유럽 작가들과 동등하게 다루었다고 평가받은 바 있다. 특히 이 전시로부터 자연스레 탈중심주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네트워크를 중요시하는 새로운 전시 방법론이 제시되면서 이른바 세계화 현상을 재현하는 대신 작가들의 국적, 비서구권 국가의 전통을 새롭게 재해석하는 시도를 통해 다양성을 수용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시 패러다임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비서구권 작가들은 여전히 민족지적 성격이 강한 작업들을 소개하며 타자의 영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21세기 이후, 아프리카 대륙은 세계화 헤게모니 문제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고 2005년 유럽에서는 가장 큰 규모로 <아프리카 리믹스>라는 전시가 영국의 헤이워드 갤러리 주최로 열린 바 있다. 아프리카는 물론 유럽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을 망라하며 25개국 60명이 넘는 작가가 참여한 이 전시는 아프리카의 정치·경제·환경적 조건을 다양한 매체와 방식으로 제시한 최초의 블록버스터 전시였다. 규모로 본다면 <아프리카 나우>는 <아프리카 리믹스>보다 작은 기획전이지만, 전시가 지향하는 바를 보면 10년의 시간차만큼 기획의도의 시각이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프리카 나우>라는 표제는 다소 전형적으로 보이지만, 그 의도는 분명하다. 아프리카를 타자로, 민족지적 표상으로 보여주기보다 탈국가, 탈전통, 신세대의 시점이 반영된 혼성적 성격에 무게를 두고 있다. 오늘날의 시각예술전시가 과거의 만국박람회나 인류학 박물관이 추구하던 지배자의 시선으로 희귀한 타자의 세계를 감상하던 방식을 거부하고 있음을 암묵적으로 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아프리카는 변화 중이다. 세계화는 장소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세계화는 무조건 배척하거나 비판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 어떻게 권력이 비윤리적으로 세계를 분할하고 타자를 이용하는지에 관한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변화하는 아프리카의 정체성
전시에서는 아프리카의 클리셰를 발견하기 어렵다. 잉카 쇼니바레, 크리스 오필리는 아프리카의 전형적 기표와 대상의 관계를 전치하여 그 틈에 각인된 식민과 개발의 역사, 고정된 관점을 뒤흔든다. 존 아캄프라는 정체성과 세계 정치지형도 간 힘의 논리를 지성적이면서도 시적인 영상언어로 풀어낸다. 대중문화와 미디어의 영향을 보여주는 베레코, 카네미이어, 윌리 등은 전 지구적 문화의 맥락 안에서 아프리카의 현재를 시각화한다. 이외에도 전통공예에 뿌리를 둔 현대공예를 소개하는 전시 안의 또 다른 전시인 <정치적 패턴>은 탈전형적 질료를 사용해 현대 디자인과 정치 간의 맥락화를 시도하는 작가들을 통해 가장 전통적 방식의 공예품을 가장 정치적인 조형언어로 변용한다. 대중 미디어가 소개하는 이국적 아프리카, 광활한 대지와 정글은 사실 환영으로서의 아프리카에 가깝다. 과장된 휴머니티가 넘실대는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레드퍼드 주연의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 노예의 지난한 삶을 다룬 <뿌리>나 후피 골드버그의 <컬러퍼플>과 같은 드라마처럼 말이다. 민족지적 시선이 두려운 까닭은 삶과 문화는 끊임없이 변화 중이라는 점에서다.
정체성 연구 또한 변화 중이다. 정체성은 고정된 성질이 아닌 개인과 사회, 내면과 외부세계 간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 정체성 또한 결과가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 중으로 보아야 한다. 대한민국 역시 다문화, 다원주의를 국가의 문화정책으로 표방하고 있지만, 제도에 의한 문화행정은 오랜 시간 뿌리내린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허물어뜨리지는 못한다. <아프리카 나우>는 전시 자체가 주는 만족감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 대한 사고를 바꿔줄 신선한 기회가 될 것이다. 일회적 전시로 머물지 않고 초대 작가들과의 대화 및 동시대 아프리카 문화를 함께 다룰 또 다른 기회를 기대한다. ●

아프리카 (13)

Kevin Beasley 〈Untitled(Sack)〉(가운데 조각) foam, resin, t-shirt, mattress, cover, cotton, thermal shirt 58.4×129.5×40.6cm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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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새로 찾은 아프리카의 아이덴티티”
신은진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이번 전시는 아프리카 현대미술 작가를 소개한다. 그러나 한편 아프리카 출신이지만 서구권에서 활동하는 작가가 많은 편이다. 아프리카 미술의 범주를 어떻게 설정했는지 궁금하다.
참여작가에 남아공 출신 작가 6명(팀), 모잠비크, 알제리, 마다가스카르, 나이지리아 등 아프리카 대륙 출신 작가 9명이 포함돼 있다. 거의 절반의 작가가 아프리카 대륙 출신이다. 존 아캄프라와 잉카 쇼니바레 역시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각각 가나와 나이지리아 출신이며 자신의 뿌리는 아프리카에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들이다. 반면, 안톤 카네마이어와 히스 내쉬는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난 백인 아프리카너이다. 아프리카라는 아이덴티티를 피부색이나 지역으로만 국한하지 않았다.
전시의 구성과 디스플레이가 돋보인다.고대 그리스 풍의 기둥을 세운 방의 경우, 마치 유럽지역의 박물관을 연상케 한다.
전시 디스플레이에서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알려달라.
아프리카 미술에 대한 우리의 인상이 막연히 전통조각에 국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역으로 이용했다. 제국주의의 상징인 박물관은 일찍이 식민지에서 값나가는 보물이나 유물을 가져다 전리품처럼 진열하는 장소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정치적으로는 식민제국주의가 종결된 시대라고 하지만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신식민지배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3층 전시장의 한 섹션을 잉카 쇼니바레의 방으로 채웠다. 특별히 이 작가를 주목한 이유가 있는가.
특별히 잉카 쇼니바레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다른 작가에 비해 설치와 조각적인 요소가 두드러지는 작품이 많아 그렇게 했다. 작품 내러티브도 강렬하고 조각의 동세와 영상의 사운드까지 모든 특징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었기 때문에 다른 작품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윌리 로만 시리즈 사진은 우리 측에서 처음으로 삼면화 기법을 써서 평균 높이보다 높게 걸었는데 잉카의 스튜디오와 갤러리 측에서 아주 만족해하며 이제부터 이 작품 디스플레이를 이렇게 하겠다고 했다.
이번 전시를 담당한 큐레이터로서, 관람객들이 특히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무엇이라고 보나.
2층 규모의 작지 않은 공간에 공예, 사진, 회화, 영상, 조각 등 다채로운 미디엄의 작업과 작가군을 선보였다. 존 아캄프라는 우리나라 영화제에서도 작품이 소개된적 있지만 갤러리 피스로는 처음으로 듀얼 스크린 형식을 선보였다. 영상미와 사운드 그리고 내러티브가 모두 훌륭한 작품이다. 1월 23일에 문강형준, 임동근, 김소영, 김현미, 서동진, 심보선, 권명아, 박자영과 함께 글로벌 이주와 문화정체성에 관련된 학술 세미나를 진행할 예정이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임승현 기자
사진 조영하

곤살로 마분다 Gonçalo Mabunda (뒷쪽)가 설치된 전시 광경

곤살로 마분다 Gonçalo Mabunda <무제 (mask)>(뒷쪽)가 설치된 전시 광경

 

 

EXHIBITION TOPIC 프로젝트대전 2014: 더 브레인

예술은 인간의 마음작용 중 가장 복잡한 과정을 거친 산물이다.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주최하는 격년제 미술행사 <프로젝트대전 2014>(2014.11.22~2.8)의 주제는 ‘더 브레인’이다. 대전시립미술관, 카이스트 KI빌딩, 대전시립미술관 창작센터 등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감각과 인지, 물질과 파동 등 뇌에 관한 다양한 예술적 실천을 펼쳐 보인다.

뇌로 바라보는 자아와 세계

유현주 미학

‘뇌’를 통해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려는 전시가 있다. 바로 대전시립미술관과 카이스트가 주관한 이 그것이다. 2012년 처음 ‘에네르기’란 주제로 과학예술의 포문을 연 데 이어, 이번 전시는 뇌과학 기반의 기술과 예술을 접목한 미디어아트라고 부를 만하다. 전시의 전체 구조는 ‘뇌’에 대한 큰 주제 아래, 미술관을 비롯해 네 개의 장소에서 세분화된 소주제들과 그 아래 하위 섹션들로 나뉜다. 미술관에서는 ‘인간의 뇌, 제2의 자연’을 주제로 뇌와 신경의 세계를 시각화하고, 카이스트에서는 ‘인공의 뇌, 로봇은 진화한다’는 제목으로 인공지능을 비롯한 인간-로봇의 철학을 이야기한다. 대전창작센터에서는 카이스트 및 대덕연구개발특구의 과학자들과 작가들이 융합한 <아티스트프로젝트(ArtiST: Art in Science and Technology)>를 선보이며, 원도심에 위치한 대전스카이로드에서는 ‘미디어스카이’라는 제목으로 거대한 영상패널을 통해 거리의 시민들에게 말을 건넨다.
미술관에서의 주제는 뇌과학의 의제들을 예술과 융합시키려는 기획 의도를 잘 보여준다. 먼저 뇌 존재 자체의 정체성을 묻는 작업들을 ‘뇌라는 물질’, ‘파동으로서의 뇌’라는 섹션에서 선보인다. 말하자면 뇌를 신경생리학적 메커니즘을 갖는 하나의 물질적 ‘자연’으로 보고자 하는 작업이다. 예를 들면, 뇌의 단백질 세포 구조를 시각화한 <단백질 초상>(마르타 데 메네제스), 난독증을 앓는 작가 자신의 뇌 촬영을 시도한 <나의 영혼>(캐서린 도슨), 인간 뇌의 해부 이미지를 QR코드로 전달하는 <스캔>(니나 셀러스), 뇌신경세포체인 뉴런의 성장과 활동을 마치 숲의 공간과 유사한 이미지로 비유한 <마술 숲>(앤드루 카니>에서 우리는 물질로 환원된 뇌를 만난다. 그러나 물질로 환원된 뇌만으로 인간의 자율적인 사유작용을 설명하기엔 미흡하다. 따라서 이어지는 전시는 ‘파동으로서의 뇌’를 통해 사유와 감정을 파동으로 풀어내는 작품들을 펼쳐보인다. 에마뉘엘 페랑의 작품 <인사이드 브레인, 아웃사이드 브레인>은 뇌를 뉴런과 시냅스로 구성된 기계로 환원하고자 하는 오랜 인류역사를 보여준다면, 리사 박의 <좋은 생각>과 샘슨 영의 <음악가의 해부학>은 각각 감정의 작용을 뇌파로 시각화한다거나, 연주자의 뇌파를 데이터로 삼고 그 데이터를 다시 전자음으로 바꾸는 퍼포먼스를 통해 감정과 사유과정의 비밀을 뇌의 물리적 과정으로 환원시킨다.
모든 사유작용이 과연 뇌의 의식작용으로 증명될 수 있을까? 무의식은 어떨까? ‘의식과 무의식’ 섹션에서 오윤석의 작품 <감춰진 기억-꽃> 등은 바로 그러한 뇌과학의 담론 가운데 하나인, 즉 무의식을 의식으로 전환하려는 시도와 일치한다. 일정기간 해온 운동을 오래 쉬었다가 재개했을 때, 의외로 몸은 쉽게 이전의 방법을 기억하는데, 이는 무의식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의식작용이라는 이론이 있다. 이러한 ‘머슬메모리’ 이론을 적용해, 작가가 감춰진 기억과 공포의 결과물을 극복하고자 그린 그림들이 결국은 무의식이 아닌 ‘의식작용’이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기억의 층위’와 ‘뇌화한 마음’ 섹션에서 전개된 다른 작품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의 비연속적이고 비선형적 기억이란 현실과 연결된 개인의 내러티브(뮌, <오디토리움>)이며, 사회의 특정 조건에 따라 의미망을 만드는 의식작용(전승일, <트라우마는 인간의 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김기라 변영돈, <이념의 무게_한낮의 어둠>)으로 설명된다. 흥미로운 것은 미술관 전시의 모든 방향이 인간의 뇌를 자연의 뇌로 설명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다는 점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모호할 뿐 아니라 그러한 것의 증거를 찾는, 어두운 ‘밤의 과학’을 언급하는 과학자도 여전히 많은데, 이러한 뇌과학적 인식이 얼마만큼 관객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느냐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예술이 앞장서서 이러한 뇌과학의 과제들을 풀어내고 해석한다는 점은 놀라운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앤드루 카니 라이드 영상 24분 2002

앤드루 카니<마술 숲> 라이드 영상 24분 2002

마음의 실체,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는가
카이스트에서의 전시 <인공의 뇌, 로봇은 진화한다>는 실제적인 과학자들의 과제와 연계되면서도 창조적인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시각예술작업에 다가서고 있다. ‘로봇’을 ‘움직이다 느끼다 생각하다 표현하다’의 동사에서 접근하여 인간이 만든 로봇, 마치 ‘인간’ 자신의 재현과 같은 ‘휴머노이드’를 꿈꾸는 작업 등을 소개한다. 컴퓨터가 인식한 얼굴 구름(신승백 김용훈, <클라우드 페이스>)과 단어를 창조하는 로봇(전병삼, <전병삼룡이>)은 신기함을 넘어, 실제 인공지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묻게 한다. 한편 강현욱의 작품 <아픈 강아지>는 바이러스가 주입된 로봇인형을 통해 통제 시스템하에 놓인 인간 자아와 사회를 통찰한다. 이는 2013년 4월 19일 인공위성을 개인이 혼자 쏘아 올리는 작업을 했던 송호준의 <인공위성 메들리>에서 엿보이는, 기존의 과학자들에게만 허용된 과학실험 등 국가 권력과 분리되지 못하는 현재의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언급과 맞닿는 부분이 있다. 창작센터의 <아티스트프로젝트>는 과학자와의 융합적인 작업이 아니었다면 생각하기 어려운 성과들을 내놓았다. 원동민의 <하이데거>는 과학자들의 협력 끝에 그들과 했던 인터뷰의 단편들을 모스부호로 치환한 후 그것을 음악으로 구현한 매력적인 사운드아트이다. 한편 <미디어스카이>에서 작가들은 신체 어딘가에 있을 ‘영혼’의 영역을 탐색하기도 하고(박형준, <떠다니는 신체>), 적, 청, 록을 연속으로 바라볼 때, 눈과 뇌의 협업으로 인한 잔상효과로 결국 흰색을 바라보는 인식의 불완전성(석성석, <뇌.색>)을 들추기도 한다.
대전발 과학예술프로젝트의 두 번째 활시위는 첫 번째보다 한결 힘 있게 당겨졌다. ‘눈’이 아니라 ‘뇌’로, 감각작용 및 모든 인식을 ‘뇌’의 작용으로 보는 시대가 온 것일까? 자아와 세계를 ‘뇌’로 해명하는 것은 곧 우리 삶을 물리적인 현상과 체계로 명쾌하게 이해하자는 것인데, 거기에서 예술은 과학 너머의 것을 노래하기도 한다. 마치 인간이 끝내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형이상학적 요구가 있는 것처럼,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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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뉘엘 페랑, 구에놀라 바공, 스테판 드구탱 <귀류법: 뉴로스위치>(왼쪽) DIY 전자장치, 종이 프린트 2014

사진 박홍순

 

EXHIBITION FOCUS 이창원 개인전

family_2009_홍차잎, MDF, 목재_252x400cm

이창원 <가족> 홍차잎, MDF 252×400cm 2009 베를린 안도파인아트 (AANDO Fine Art) 갤러리 전시광경

Shadow Casters 이창원 개인전 <그림자의 주인>

현실과 환영, 리얼리티와 이미지의 관계를 파고드는 작가 이창원의 개인전 <그림자의 주인>(2014.11.6~1.30)이 갤러리 시몬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현상과 그 이면을 들춰내는 장치로서 다양한 신작을 선보인다. 미술평론가 신혜영과의 대담을 통해 리얼리티와 왜곡된 이미지의 관계를 드러내는 이창원의 작업과 예술에 대한 태도를 살펴본다.

예술, 현상의 이면을 보여주는 장치

신혜영(이하 ‘신’) 작가님 작업은 2007년에 열린 두아트갤러리 개인전부터 관심 있게 지켜봤습니다. 지난 6월 고양스튜디오 전문가 방문 프로그램에서 처음 뵙고 이야기 나누었을 때 벽면에 붙은 작업 메모들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냥 봐도 성실한 분 같은데 평소 많은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거르고 다듬어서 작업하는 모습이 매력적이었죠.
이창원(이하 ‘이’) 저는 저 자신이 논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단편적인 생각을 메모로 많이 남기는 편이에요. 그리고 관심사도 종교부터 다방면에 걸쳐있어 잡식성이라 할 수 있죠.
이런 사람은 어떤 TV 프로그램을 볼까 궁금해서 여쭤봤는데 당시 드라마 <내 생애 봄날>을 본다고 했죠. 나중에 찾아보고 저도 눈물 좀 뺐습니다. 중반 이후부터는 힘이 빠지고 뻔한 내용이긴 한데 어느 정도 감동을 주는 면이 있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보편적인 주제를 특별하게 풀어내는 게 참 어려운 일이라 생각했어요. 원래 평범한 이야기인데 어떤 관점, 어느 시점에서 바라보느냐, 어떻게 펼쳐놓느냐에 따라 누군가에게 공감을 주는 작업이 되잖아요. 그런 점은 작가님의 작업과 일맥상통한다고 봐요.
저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평범한 나 자신을 조감도처럼 바라보는 거죠. 그게 작가의 시선인 것 같아요. 평범한 일상을 살다가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를 반복하는 것이 작가의 삶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요즘 자주 해요.
작업에서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 빛과 그림자 등 이원적인 구분이 자주 등장하고, 큰 주제를 다루면서도 일상의 재료를 가지고 구체적인 사건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풀어내는 공통된 흐름이 보이는 것 같아요.
그런 관심사는 1998년 독일로 유학을 가서 저 자신에 대해 질문하면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러다가 점차 내 주변의 상황,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됐어요. 그리고 제가 사는 세계를 이해하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원래부터 알고 작업으로 풀어낸 것은 아니지만 제 작업에 대해 글을 쓰시는 분들이 종종 ‘플라톤의 동굴 비유’를 언급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찾아봤어요. 동굴에서 사슬에 묶여 평생 앞만 보는 죄수들 뒤로 모닥불이 있는데, 그들은 그림자라는 환영을 실체라고 착각하며 그림자라는 현상의 근원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죠. 현상의 근원을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 곧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근데 동굴 비유가 지금 한국 사회에도 유효한 세계상인 것 같아요. 세계상은 세상에 대해 상상한 이미지인데 과거에는 종교에 따른 세계상이 있었고 어떤 시대에는 지구는 평평하다고 생각했잖아요. 세계상은 상상일 뿐이지만 굉장히 무서운 것일 수 있죠.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상상하는지 자꾸 드러내고 함께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과정 없이 무의식적으로 어떤 세계상을 가지고 살다 보면 역사적으로 볼 때 위험한 방향으로 갈 수도 있잖아요. 그렇다고 의무감이나 사명감을 가진다기 보다, 그런 상상이 제 작업의 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저도 작가님의 작업을 플라톤의 동굴 비유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동굴 비유가 사람들을 묶어놓고 리얼리티는 못 보게 하고 이미지만 보게 해서 이미지가 리얼리티라고 믿게 하는 거잖아요. 반면 작가님의 작업 방식은 리얼리티와 이미지의 대결구도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평행세계Parallel World> 같은 경우에는 리얼리티와 이미지의 공존과 대비를 더욱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죠. 처음에 그림자를 보고 어떤 상상을 하는데 실제로 그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출처는 전쟁이나 재난에 대한 신문기사나 영상인 식으로요. 그것이 현실의 장면이라 리얼리티처럼 보이지만, 미디어가 보여주는 리얼리티라는 것 역시 결국 가려지고 왜곡되는 이미지잖아요. 리얼리티와 이미지의 중층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작업의 특징인 것 같아요.
요즘 저는 작업에 대해 관객이 보고 어떻게 반응하는 일종의 장치라고 상상해요. 저 자신이 보통사람인 것처럼 저는 보통사람들이 제 작업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굉장히 궁금해요. 과거 세계상 속에서는 삶도 생각도 단순했지만, 지금은 서로 이율배반적인 세계상이 공존하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데 보통사람으로서 일종의 분열증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동굴의 비유처럼 현상의 근원을 가린다면 사람들은 현상의 실체를 보지 못하잖아요. 하지만 그것을 가리지 않으면 누구나 빛과 그림자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작업할 때에도 그런 관계를 볼 수 있게 장치를 만드는 편이고, 그러면 사람들이 무심하게 살아가는 일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하죠.
이번 전시에서 1층에 설치된 <성스러운 빛Holy Light>은 앞에서는 종교적이고 경건해 보이지만, 뒷면을 보면 세속적인 삶을 이루는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종교와 일상, 삶과 예술 등 플라톤의 이원론적 구분이 이제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인 것 같아요. 독일에서 처음 선보였죠?
네. 그동안 한국에서는 발표한 적 없어요. 전시장에서 맨 왼쪽에 설치된 작품이 2005년 독일에서 발표했던 것을 일부 다시 제작한 거고요. 그 작품에서 파생된 작업이 1층에 배치되었어요.
군복무 시절 스테인드글라스 제작 경험이 계기가 됐다고 하셨지요?
네. 스테인드글라스는 공간을 점유하지 않고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빛만 조율해서 공간 자체를 전혀 다른 공간으로 바꿔버리잖아요. 그 경험이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사실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는 성당에 들어가면 사람들은 성스럽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죠. 하지만 그게 사람이 만든 빛이잖아요. 그 빛을 통해 신을 느끼는 것에 대해 질문도 하게 됐어요.
그런 불경한 생각에서 시작된 거군요.(웃음) 사실 작가님의 작업에서 빛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데 그때부터 빛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제대하고 바로 빛에 관한 작업을 한 건 아니에요. 미대에서는 졸업할 때까지 돌, 용접 등 전통적인 작업 방식을 배웠죠. 이후 독일에 가서 사진이나 음식물 등 좀 더 다양한 매체를 가지고 실험을 많이 했어요.
독일 유학이 큰 전환점이 된 것 같네요. 조각은 실제 공간의 부피를 차지하고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기본 속성인데, 이후 작업들은 비정형적이고, 물질이 아닌 것일 수도 있고, 빛을 이용해 그림자가 공간을 점유한다거나 반사된 이미지를 사용하는 등 전통적인 조각의 속성과는 거리가 먼 것들로 일관된 것 같습니다.
그런 식으로 작업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2003년 블라인드 형태의 구조에 찻잎을 뿌려서 형태를 만들면서부터였어요. 블라인드와 블라인드 사이에 재료가 어슴푸레 반사되는 빛을 어슴푸레 발견한 거죠. 그때부터 빛을 가지고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물질을 버리고 빛으로 작업했다기보다 그 빛이 여전히 물질을 지시하고 있다는 점이 매력적인 거죠. 사람들로 하여금 반사된 빛을 보게 하지만 그 빛이 원래의 물질을 지시하기 때문에 물질을 넘어선 재료를 가지고 물질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 거예요.
작업의 재료가 찻잎처럼 대부분 일상의 하찮은 재료인데 만들어낸 이미지는 주로 영웅이나 신화 같은 것이더군요. 그런 대비가 무척 흥미로워요. 어떤 의도인가요?
영웅을 형상화한 동상은 권위를 표현하기 위해 세월의 풍파를 잘 견디는 단단한 재료로 만들지만 그 동상의 주인에 대한 사람들의 해석이 바뀌면 금방 철거되거나 철거 논란에 휩싸이죠. 눈앞에 단단한 물질로 만들어져 있지만 사실은 연약하다는 본질을 드러내고 싶었어요. 어떤 거리에서는 굉장히 웅장한 크기의 동상의 이미지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후’하고 불기만 해도 흩어지는 재료로 만들어진거죠. 게다가 찻잎은 가까이서 보면 낙엽처럼 보여요. 그런 시간성도 있고 동양적이고 명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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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원 <플라스틱해> LED 패널, 블랙 라이트/피그먼트 프린트, 금속 프레임 44×64×8cm(각) 2014 갤러리 시몬 전시광경

왜곡된 진실을 드러내다
반사된 빛을 다룬 작업 중에서 일시적이고 고정되지 않은 형태로 그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업이 찻잎 작업인 거 같아요. 찻잎 작업 다음이 거울반사 작업이죠?
네. 제가 독일 유학 중일 때 한국에서는 찻잎을 이용한 스케일 큰 설치작업을 많이 선보였어요. 유럽에서는 리플랙션으로 이루어진 사진, 그림 작업을 선보였는데 반응이 굉장히 좋았어요. 2008년까지 독일과 벨기에 갤러리와 일을 하면서 작품도 잘 팔리고 생계에도 큰 보탬이 됐죠. 그런데 그런 작업을 계속 하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진 거예요. 그래서 2009년 한 전시를 앞두고 뭔가 새로운 것을 모색해야겠다는 생각에 유리판에 그림을 그려 포지티브와 네거티브를 이용한 자화상 작업을 시도했어요. 나는 하나지만 여러 공간에 비춰 어떤 상황에 투영됐냐에 따라 내가 다르게 보이는 그런 작업이에요. 사실 드로잉 북을 보면 2004년부터 거울을 이용한 작업을 구상했는데 그동안 실현을 안 한 거죠.
자화상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업이에요. 작가가 그린 것은 유리에 네거티브 형상인데 빛에 비쳐서 그림자로 드러날 때 비로소 포지티브로 보이잖아요. 그런 방식이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신작 <플라스틱해The Plastic Ocean>에도 연결되는 것 같아요. 세계지도를 그릴 때 작가가 플라스틱 조각으로 표시해놓은 곳은 바다를 이루는데 우리의 눈에는 대륙이 먼저 보이죠. 그래서 오리-토끼 그림처럼 대륙인지 바다인지, 플라스틱 조각이 어떻게 놓이고 얼마나 조밀하게 모이느냐에 따라 사람의 시선이 그쪽으로 가게 되잖아요. 그래서 세계지도에서 공룡과 같은 다른 형상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런 이미지와 리얼리티의 관계가 재미있어요.
도록에도 <플라스틱해>에 관해 짧은 글을 썼는데 우리가 세계를 파악할 때 육지를 실제 공간으로 생각하고 나머지는 빈 공간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빈 공간에 쓰레기가 그렇게 많이 버려지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에 반전시켜 본 작업이에요.
<엔젤 오브 더 미러Angel of the Mirror>는 어떤 작업인가요?
2013년 겨울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의 소장품이 옥션에 나왔다는 기사가 거의 모든 신문에 실렸어요. 기사들을 봤더니 온통 그 일가의 안목이 높았다든지 어떤 작품이 얼마에 낙찰됐다는 데 관심이 집중돼 있더군요. 그때 작가로서 예술이 과연 무엇일까 많이 고민했어요. 예술이 권력과 부의 장식에 불과한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면서 하게 된 작품인데요. 소장품 중에 하얀 천사가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거울을 들고 있는 공예품이 있었어요. 그 작품이 전 전 대통령 소장품이 얼마에 낙찰됐다는 기사의 대표 이미지로 쓰였는데 그걸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죠. 일가 사람들이 이 소장품을 가지고 있었을 때 저 거울은 무엇을 비추고 있었을까 그런 상상을 한 거죠. 백설공주 이야기에서 왕비가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고 물었을 때 자신을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것처럼 저 거울도 광주라는 도시를 계속 비춰주는 내용으로 구성하게 된 거죠.
<엔젤 오브 더 미러>를 포함한 2층 전시는 두 개의 다른 작업이지만 하나로 느껴져서 좋았어요. <네 개의 도시Four Cities>는 바그다드, 평양, 서울, 후쿠시마라는 각기 다른 이슈를 가지고 있는 도시를 모아서 4개의 도시가 하나의 실루엣을 이루잖아요. 거기에 광주를 비추는 <엔젤 오브 더 미러>가 더해져 전체적으로 역사・정치・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도시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돋보이는 하나의 전시공간으로 다가왔어요.
우리는 미디어라는 창문을 통해서 어디에서 전쟁이 일어났다거나 방사능이 유출됐다는 식의 사건을 접하잖아요. 미디어가 바로 눈앞에 벌어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여주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나랑은 상관없다는 식으로 거리를 느끼거든요. <네 개의 도시>는 우리가 서울이라는 도시에 살고 있는데 다른 세 개의 도시를 걸어서 몇 시간 가면, 아니 버스를 타고 몇 분만 가면 갈 수 있는 곳처럼 환영의 차원에서 보여주었을 때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사실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곳이거든요. 그런데 그 사이의 단절은 왜 생기는지 그런 생각에 하나의 도시처럼 연결해 본 거예요.
요즘에는 실질적인 거리 개념은 무너지고 심리적인 거리가 문제인 것 같아요. 미디어로 전쟁을 봤을 때 실제 전쟁의 참혹한 감정은 느낄 수 없는 것처럼 미디어 환경이 리얼리티를 리얼리티로 느낄 수 없게 만드는 것이죠.
세상은 점점 이미지로만 드러나고 리얼리티는 숨겨지는 시대에 사는 것 같아요. 뉴스도 현상만 있고 진실은 가려져 있잖아요.
그래서 계속해서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장치를 만든다는 말씀이 와 닿네요. 전반적인 작업이 영구적인 조각이 아니라 판매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런 지점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하는지 궁금해요.
한국 미술계는 작품을 판매하는 작가와 비평 위주의 작가로 나뉘어 양극화가 심한 것 같아요. 물론 서양 역시 나뉜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정도가 이렇게 심하진 않거든요. 설치작가도 작품을 판매하고 미술관에서는 커미션 작업을 통해 응용할 수 있어요. 그런데 한국은 개인 소장가들이 일반적으로 작품을 투자 대상으로 간주한다든지 장식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문제인 것 같아요.
투자나 장식이어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거든요. 작가가 성장하면 그 작업도 같이 성장한다는 점에서 투자일 수 있고 장식적으로 집이나 공간에 맞게 설치할 수 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데 교육의 문제라고 할까요.
저는 한국 사람들의 취미활동이 굉장히 섬세하고 집요하다고 생각해요. 오디오, 기계식 컴퓨터 자판, 만년필 등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세세한 것을 따지고 그 차이를 느끼고 즐기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아직 현대미술에 대해서는 파고들려고 하지 않고 무관심하거나 잘 모른다는 게 좀 신기해요. 그렇기 때문에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업이 관객에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컬렉터의 문제도 있지만 사실 작가들이 작품이 판매되도록 잘 마감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봐요. 외국에서 작품을 잘 판매하는 작가들의 경우 작품 지시서instruction나 패키지가 완벽하죠. 아직 한국 작가들의 작품은 완성품으로서 마감처리가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갤러리에 있을 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물론 큐레이터, 비평가, 기자 등 생산자와 소비자를 매개하는 사람들의 의식 수준도 전반적으로 상승해야 겠지요.
네. 복합적인 문제죠
앞으로의 계획은요?
중국 베이징 코뮨에서 서진석, 이진명 큐레이터가 기획한 한국 작가 소개 그룹전 (2014.11.25~2.28)에 참여하고요. 연말에는 재충전해야죠.
진행 정리・이슬비 기자
사진 조영하

이창원(왼쪽)과 신혜영 이창원  쇼 케이스, 받침대, LED 조명 113×45×45cm(각) 2014

이창원(왼쪽)과 신혜영 이창원 <네 개의 도시 :바그다드, 평양, 서울, 후쿠시마> 쇼 케이스, 받침대, LED 조명 113×45×45cm(각) 2014

이 창 원 Lee Changwon
1972년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했고 독일 뮌스터 쿤스트아카데미에서 파인아트 전공으로 석사학위(디플롬)를 받았다. 2003년 벨기에 갤러리 쿠세너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11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서울, 독일, 영국, 중국 등지에서 열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04년 제58회 인터나치오날레 베르기셰 쿤스트아우스슈텔룽에서 관객상을 수상했다.
신 혜 영 Shin Hyeyoung
1975년 태어났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미학과 석사를 졸업했다.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영상커뮤니케이션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학위논문을 준비 중이다. 《월간미술》 기자와 가인갤러리 큐레이터를 거쳐 현재 강의와 미술비평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