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뉴 스킨: 본뜨고 연결하기

일민미술관 7.3~8.9

안소연 미술비평

한동안 느슨했던 스크린이 다시 팽팽해졌다. 화려하고 매끈한 이미지 뒤에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실재가 봉인되어 있다고 하는 응시에 대한 신화가 스펙터클한 현실을 다소 평평하게 정의해온 터라, 시각적인 이미지 표면에 대한 긴장감이 줄어든 지도 오래다. 인간의 시각과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매개하는 상징적 의미의 스크린은, 사실 그 프레임 안에 투사된 이미지로만 실제 세계에 대한 재현이 가능하다. 이는 플라톤의 동굴우화에서부터 라캉의 시각철학으로 이어진 주체의 시각 경험에서 얻어낸 결론이다. 스펙터클한 현실의 이미지도 결국 스크린 위에 투사된 하나의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나면, 비로소 볼 수 있음에 대한 희망보다는 끝내 볼 수 없음에 대한 실망감으로 더욱 무색해진다. 그래서 뒤샹과 워홀은 화려한 스크린 위에 거친 흠집이라도 내보려는 심산으로 그처럼 불안한 유희를 즐겼나보다. 때때로 파열될 것처럼 팽팽해진 스크린에서는 어떤 의심쩍은 실체가 곧 뚫고 나올 것 같았지만, 상징적 언어들로 재무장한 환영의 스크린은 어느 순간부터 뻔한 결말로 흘러가는 시나리오처럼 단순해졌다.
그렇게 힘 빠진 스크린이 요즘 다시 팽팽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일민미술관에서 함영준 큐레이터가 기획한 전시 <뉴 스킨: 본뜨고 연결하기>(이하 <뉴 스킨전>)를 보고난 느낌이 그랬다. 이 전시는 최근 주목을 받은 몇 개의 전시와 일부 관심을 공유하고 있다. 가장 근래에 개최된 전시로 <필름몽타주>(코리아나미술관, 배명지 기획)와 <김실비: 어긋난 신(들)>(인사미술공간, 이단지 기획)을 들 수 있는데, 부분적으로는 디지털 영상매체를 기반으로 한 무빙이미지가 강조되었다는 점에서 동시대의 이목을 끈다. 수많은 영화적 요소에서 비롯된 디지털 무빙이미지는, 그야말로 잡다한 동영상까지 아우르며 그에 대한 오늘날의 경계 없는 시청각적 경험을 유도한다. 그들은 대부분 진부해진 주체의 시각 구조를 새삼 환기시키면서, 무엇보다 물질로서의 스크린 그 자체에 몰두하는 태도를 보인다. 특히 <뉴 스킨전>은 특정 시점부터 인터넷을 중심으로 “퍼스널 스크린”이 확산되면서 겪게 된 시각 메커니즘의 적나라한 변화를 소개하며,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을 일군의 세대적 특성으로 묶는다.
총 6명의 작가가 참여한 전시 <뉴 스킨>은 세계화와 자본주의 전략으로 가속화된 일약 디지털 세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2010년대에 막 활동을 시작한 젊은 미술가들”로 소개된 그들은 대다수가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 적합한 체질을 타고난 세대로, 1990년대식 표현이긴 하지만 소위 “신인류”라 부를만하다. 시공간의 제약을 딛고 새로운 환경, 즉 새로운 영토로 언제든 탈주 가능한 이들은, 환영으로 물든 현실세계 보다 오히려 가상의 미디어 환경을 더욱 크게 체감하고 있다. 그들이 주목하는 미디어 환경은 내부에 무한한 인터페이스들이 잠재해 있기에 이질적인 것들의 손쉬운 결합과 현실에 대한 비선형적 역사기술의 가능성까지 시사한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박민하의 경우만 보더라도, 약 5분 분량의 2채널 영상으로 제작한 <전략적 오퍼레이션-비즈니스 카드 A/B>(2015)를 통해 현실에서 모의되는 가상 체험의 실체를 흥미롭게 다룬다. 서로 마주보게 놓인 두 개의 화면 위로 편집된 일종의 몽타주 영상이 흐른다. 박민하는 캘리포니아 모하비사막에 있는 NTC(National Training Center) 군사훈련센터를 배경으로 한 이 영상에서, 한때 스펙터클한 할리우드 영화 세트장으로 조성되었던 장소가 전쟁 시뮬레이션에 이용되는 현실의 모습을 무질서하게 합성해 놓았다. 영화 특수효과와 군사 훈련을 일련의 산업 시스템으로 엮어놓은 기이한 현실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광고 영상과 시뮬레이션 기록 영상, CG 영상 등 각각의 상이한 이미지들이 충돌하고 재배치되면서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게다가 작가는 두 개의 영상 스크린 뒷면에 초기 텔레비전 박물관에서 그가 직접 열람한 이미지 아카이브의 일부를 공개함으로써 가짜 같은 현실을 적극적으로 증명해 보였다.
강정석은 그들 세대가 공유하는 디지털 화법에 훨씬 노련하다. <시뮬레이팅 서피스 A>(2014)는 게임회사에 출근하는 친구를 그가 몇 개월간 지하철역까지 배웅하면서 그 과정을 아마추어 홈비디오 형식으로 기록한 영상이다. 그는 게임 산업 구조의 허술한 단면을 애써 폭로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실직과 취업을 반복하는 친구의 표피적인 일상에 따라붙어 수없이 열렸다 닫히는 현실의 출구를 상상하는 일에 동참한다. 그렇게 현실에 스며든 불순한 상상은 인터넷 “합필” 영상처럼 <시뮬레이팅 서피스 B>(2014)로 제작되어 구체화된다. 강정석은 <시뮬레이팅 서피스 A>에서 추출한 영상 소스를 인터넷 공간에서 소비되는 “합성 필수요소”로 사용했다. 불법 복제, 저급한 편집, 불완전한 전개 등이 빚어낸 허술한 합성 이미지들은 현실을 스크린 위에 그럴듯하게 재현하는 대신 현실에 기생하는 가짜 같은 현실을 본떠서 급속히 유포한다.
한편 김희천의 영상작업 <바벨>(2015)을 한참 몰입해서 보고 있으면, 마치 신체의 모든 감각이 가상의 디지털 표면 위에서 시각적으로 분석되고 일시에 전환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영상은 아버지의 실제 죽음을 몇 가지 데이터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경험에서 시작된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이 남긴 몇 가지 기록을 인터넷 데이터와 지도 같은 가상의 공간 위에 가시화했고, 동시에 쉽게 체감할 수 없었던 현실의 커다란 문제들 또한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화면 위에 재구성했다. 김희천의 영상에서 드러난 것처럼, 우리는 현실을 직접 체험할 능력을 이미 소진한 상황에서 어쩌면 가상의 세계를 경유하여 우리가 처한 모든 현실을 새롭게 경험해야 하는 것이 맞는지도 모른다. 김영수의 보드게임 <우주시민 A씨의 데카드>(2015), 달의 움직임을 좌표로 전환시킨 강동주의 <달은 어디에 떠있나>(2015), 그리고 개별 작품들의 보이지 않는 물리적 인터페이스를 설계한 김동희의 공간 구조물들처럼, 적어도 <뉴 스킨전>에서 그들이 주목하는 가상의 미디어 환경은 수많은 이미지 스크린의 병치와 그 행간에 스며들어간 잠재적인 서사를 이용해 현실에 대한 새로운 기술(記述)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위 박민하 <Robert Television Bomber>(가운데) 2015

CRITIC 옅은 공기 속으로

금호미술관 5.27~8.23

조성지 미술비평

금호미술관의 <옅은 공기 속으로>는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 동시대적 풍경의 한 단면을 조망해볼 수 있는 전시다. 권기범, 김상진, 김수영, 김은주, 박기원, 이기봉, 카입+김정현, 하지훈, 홍범 등은 깨어있는 눈과 치열한 작가정신, 예술의 개념으로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형상담론을 추구해온 이들이다. 국내 국공립, 사립미술관과 갤러리, 문화예술기관들이 해외 블록버스터급 근현대 유명작가들로 운영과 소통 성과 올리기에 급급한 가운데, 국내 작가들에 대한 진득한 관심이 참으로 고맙고 반가운 미술관 전시다. 또한 참여 작가군 역시, 현란하고 속 시끄러운 세태를 향해 난해한 개념의 날덩이들로 맞대응하는 집단혈기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공력의 시간을 거쳐 정련된 개념형상을 추구하는 차별성이 눈에 띈다. 흑백을 기조로 한 이들의 특징적인 드로잉, 영상, 사운드 설치는 무채색의 시각적 비움을 연출한다. 어느덧 국내 중진・중견작가로 자리매김한 이들의 작품은 현대미술이라는 콤플렉스로부터 해방된 듯 한결 무난하고 여유로운 느낌이다.
하지만, 일견 시각적 비움으로의 초대는 편치 않다. ‘옅은 공기 속으로’란 제목이 말하듯, 미술관도 전시도 투명한 곳이 아니다. 옅은 공기 속에 지엽적으로 개별 작가의 개념과 의도, 정신성이라는 환영 짙은 공기들이 정체된 느낌이다. 그런가 하면, “견물생심”이라 했거늘, “보고 온몸으로 느끼며 소통하고픈 마음”을 일으키기에는 볼 것이 없다. 관객 입장에서는 이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환영의 미끄러짐과 동일한 환영의 반복에 식상하고 무료함을 느낄 법하다.
난해한 것은 난해한대로 무난한 것은 무난한대로 현대미술이라는 헛것을 따라다니다가 헛것 된 듯 관객의 입장은 무안하다. 관객이 좌절하지 않을 방법은 황망하니 잊어버리거나, 휑뎅그렁 남겨짐에 대해 해명하는 일이다. 전시입장료와 상관없이 미술을 사랑하는 마음 착한 관객이거나, 전시입장료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얻으려는 악착 같은 관객이 후자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체감과 휑뎅그렁 남겨짐은 비단 현대미술을 대하는 관객의 경험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참여 작가를 포함한 동시대 국내외 현대미술이 처한 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현 상황에서 금호미술관이 기획한 이번 전시는 여러모로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남는 전시다.
금호미술관 <옅은 공기 속으로>는 분명 작가 선별과 전시일정상, 서구 미니멀리즘 이후 개념미술, 공감각적 환영과 상호작용성 등에 관한 다양한 양태의 국내작가 일파를 집중 조명하고 검증하는 프로그램들로 뜻 깊은 전시기획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러한 관객의 경험은 오히려 작가와 관람객, 예술세계와 현실세계를 만나게 하고 특별한 사물로서 현대예술에 대한 문제 제기와 비평적 견해들을 되짚어보며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로 기대해봄직한 전시였다. 그런 만큼 상당 부분을 관객의 능동적 참여와 학습에 맡겨버린 작가와 미술관의 방만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미술관 전시와 작가와의 대화가 모든 검증이 끝난 작가의 팬 미팅 자리가 아닌 이상, 참여 작가는 일반인에게나 미술인에게나 대체로 낯선 무명이다. 굳이 반세기 전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린 미니멀리즘 작가들의 회고전에서 한 작가가 미술관으로의 역사화, 제도화에 반기를 들었던 해프닝까지는 아니어도, 이번 전시는 흑백의 다채로운 색감과 독특한 개성을 남기지 못하고 무채색 옅은 공기 속에 묻힌 인상을 준다. 미술관의 무난한 관성범위 망 안으로 너무나 온순하게 들어온 거 아니냐고 작가에게 묻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작가들과 함께 꾸준히 시대적 감수성과 현대미술의 방향성을 모색해온 금호미술관의 이번 전시를 눈여겨본다. 현대미술의 크고 작은 집단 혈기와 돌풍이 끊임없이 소진되고 지나간 자리, 그 위로 감도는 살아있는 무언가를 품었으리라. 이번 전시 <옅은 공기 속으로>를 뚫고 나올 참여 작가들의 그 무언가를 기다려본다.

위 권기범 <Jumble Painting 15-1 Gravity> 벽면 회화에 고무줄 설치, 혼합매체 2015

CRITIC 도윤희 Night Blossom

갤러리 현대 6.12~7.12

배은아 독립 큐레이터

밤이 피어오르다. 밤의 개화. ‘Night Blossom’은 도윤희의 열여섯 번째 개인전 제목이다. 갤러리 현대, 4년 만의 개인전, 독일 작업실, 새로운 기법, 색의 출현과 같은 정보를 제치고. 엄습해온 것은 ‘Night’와 ‘Blossom’의 오묘한 조합이 만들어내는 파장이다. 일반적으로 작가가 영문에서 국문 번역 과정을 점프하는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다. 외래어가 가지고 있는 이국적인 느낌 때문이거나 그것이 차용된 명제이거나 혹은 ‘Night Blossom’과 같이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질서에 존재하지 않은, 번역 불가능한 어떤 순간을 드러내기 위함일 수도 있다. ‘Night Blossom’은 언어로 번역되기 이전에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지는 무엇이다. 그 무엇은 예측하지 못한 어떤 것이 저 문 너머에 있을 것 같은 설렘을 만들었고, 동시에 언어의 역할 그 자체를 의심하게 했다. 그 문 너머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색들은 여럿이자 하나가 되어 색이 아닌 무엇으로 다가왔고 그것은 몸의 한 기관을 자극한다기보다는 온몸에 내재하는 혹은 온몸 밖으로 벗어나는 무엇이었다. 그것을 울림이라고 해야 할지. 떨림이라고 해야 할지. 열림이라고 해야 할지. 그런 애매모호한 것이 되어 오히려 보는 이의 눈을 감게 했다. 나는 그 무엇을 그림도 음악도 언어도 아닌 일종의 ‘포에지(poésie, 시: 영혼의 기반을 움직이게 하는 예술 (Novalis, L’Encyclopédia))’라고 부르고 싶다.
그녀는 매일 아침 무엇을 읽을까. 그녀의 식탁 위에는 어떤 꽃이 꽂혀 있을까. 그녀의 창문 너머로 무엇이 보일까. 무엇이 그녀의 손가락 끝을 움직이게 하는 걸까. 그것은 물리적인 대상이 아닌 그 대상을 존재하게 하는 주체로서 에너지이다. 그것이 신문의 한 칼럼을 장식한 익명의 자살일 수도. 유리병에 꽂힌 작약일 수도. 창문 너머 보이는 하늘색 캐딜락일 수도 있다. 그 주체들은 유형이든 무형이든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나름의 생존방식을 가지고 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 존재 방식이 도윤희의 손가락 끝으로 전이된 것일까. 손가락 끝의 근육이 만들어내는 선, 색 그리고 형은 보는 이의 시각을 자극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우리의 감각체계를 통해 음악의 리듬 혹은 춤의 움직임과 같은 공명의 세계로 확장된다. 그 움직임은 즉흥적이면서도 의도적이며 특별하면서도 보편적이다. 이번 전시에서 도윤희는 붓이라는 회화의 전통도구를 내려놓음으로써 회화 밖의 언어를 습득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 언어조차 거부하고 마치 언어 이전의 존재를 마주하려는 듯 오로지 손가락의 움직임에 도취했음에 분명하다. 보이지 않는 것, 계산되지 않는 것, 말로 전달되지 않는 것, 그리고 해석되지 않는 것에 유난히 무감각해진 오늘날. 매일 아침 쏟아지는 전쟁과 부패, 분쟁과 대립 그리고 재앙과 질병 따위의 뉴스에 자괴감마저 드는 오늘날. 우리는 감히 무엇에 도취해 무엇을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 예술이라는 고독의 섬을 떠도는 한 예술가가 부조리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정의구현도 아니고 억압당할 수밖에 없는 자유의지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비굴한 삶을 존속하게 하는 생명의 담론, 카오스 그 자체이다. 너무 낭만적이거나 너무 아름답거나 너무 이상적이거나. 그것은 공유를 통해서 공감을 통해서 공명을 통해서 ‘포에지’의 중심에서 우리를 호출한다. 그 호출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타자를 존재하게 하고 타자를 받아들이고 그리고 비로소 자아의 현전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2층에 주르륵 나열된 캔버스들 앞에서. 초라한 벽, 빈약한 조명, 시크한 관람자들, 세속적인 대화가 공간에 울리면서 돌연 색의 향연은 예술(자본)의 틀 안에 갇히고 마는 것일까. 틀에 갇히기 이전에. 번역되기 이전에. 의미로 전달되기 이전에. 문장으로 완성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혼돈의 상태. 그것이 그녀가 말하는 Night Blossom 일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색채’. 그리고 ‘밤이 되어서야 드러나는 세계’.

위 도윤희 <무제> 캔버스에 유채 2014

CRITIC 임자혁 조금 이상한 날

누크갤러리 6.25~7.23

정신영 서울대학교미술관 책임학예사

2002년 뉴욕 MoMA에서 개최된 <Drawing Now>은 드로잉을 주된 표현방법으로 사용하는 작가들만을 모은 대규모 기획전이었다. 개최를 전후하여 최소한 현대미술에서는 드로잉을 하나의 독립적인 매체로 인정하는 의식이 자리잡았다. 캔버스를 짜고 밑칠을 하는 과정이 생략되고 선적 요소만으로 화면을 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회화에 비한다면 드로잉은 보다 일상적이고 친밀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변적인 표현방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더 이상 밑그림이나 설계도처럼 타 매체에 연관지으며 의지하거나 도전하지 않는 새로운 드로잉이라는 장르는, 일상을 영위하며 수용하는 개개인의 시점을 반영하는 데 있어 최적의 매체로 보인다. 임자혁의 경우 다양한 현실의 단편들은 무엇보다도 시각적인 정보로 다가오는 듯하다. 삼청동 누크갤러리의 2개층에 걸쳐 전시된 총 108점 중 ‘오렌지 드로잉’으로 분류되는 54점의 드로잉은 임자혁이 지난 3~4년에 걸쳐 경험한 일상의 순간이나 사건들의 축적임과 동시에 색, 선, 형상, 구도 등으로 재구축된 현실의 기록들이다. <깃털>은 마치 참빗으로 긁은 듯 등고선이나 기압골처럼 촘촘한 줄문양으로 처리된 거대한 인물의 뒷모습에 흰 오리털이 한 조각 붙어있는 모습이다. <사죄>는 뉴스나 신문에서 접하는 전형화된 광경으로, 무릎 꿇고 깊숙이 고개 숙인 양복차림의 남성들이 줄줄이 열을 이루는 모습이 상하로 반전되어 마치 서로에게 사과하는 듯 코믹하게 배치되어 있다. 짙고 옅은 오렌지색의 유산지에 묘사된 이 같은 이미지들은 모두 작가가 경험한 현실에서 출발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단독 작품인 1층의 콜라주 역시 시각중심적(ocular-centric)이면서도 어떤 상황에 대한 비일상적인 면모를 감지해내 사건화하는 작가 특유의 예민함이 드러나 있다. <야유회>는 이제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한국인 중장년층의 등산복 애호에 대한 언급이다. 광활한 초록빛을 배경으로 울긋불긋 모자와 재킷이 일렬로 늘어서 나들이 풍경을 연출한다. <그룹 미팅>은 실내에 설치되어 있어야 할 소화기 여러 대가 야외로 옮겨져 붉은 펭귄처럼 옹기종기 한곳에 모여있는 모습이며, <어떤 덩이>는 지방도로의 목가적 풍경 속에 우뚝 솟은 장승 같은 거대한 비닐묶음들의 특수한 존재감을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1층의 작품들의 서술적 요소와 제목의 결합은 때로는 동화처럼, 때로는 난센스한 코믹삽화처럼 해석하는 즐거움을 주는데, 이뿐만 아니라 화면에 펼쳐지는 색, 선, 패턴이 주는 리듬감이나 장식성이 예사롭지 않은 디자인적 감수성을 제시하고 있다.
깨알 같은 잎사귀의 표현이나 원색과 중간색을 미묘하게 섞은 대담한 색면의 배치는 2층에 이어지는 <돋보기> 연작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돋보기> 연작은 1층에 전시된 작품의 한 부분을 원형이나 길쭉한 타원, 평행사변형 등으로 도려낸 후 거대하게 확대하여 잉크젯 프린터로 출력한 작업들이다. 원작의 서술적 맥락에서 격리되어 새로운 화면으로 옮겨진 조형요소들은 급격히 추상화되어 있다. 대비되는 색상이나 불안정한 듯하면서도 숙련된 선들의 교차는 이미 북유럽의 패턴화된 디자인과도, 일본 디자인의 절제된 양식과도 또 다른 작가양식을 만들어내고 있다.

위 임자혁 <주홍색 드로잉>(왼쪽) 종이에 잉크, 총 54장 2015

CRITIC 김미경 서 있는 시간

갤러리 비원 6.1~30

정현 미술비평

저마다의 욕망으로 가득 찬 도시의 소란스러움은 ‘사색’의 가능성을 지워버린다. 명상과 사색마저 자기 개발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하는 성공만능주의 시대에서는 예술도 현실만큼 뒤틀리고 소란스러운 경우가 많다. 사색마저 생활의 지혜이자 미래를 위한 투자가 된 셈이다. 김미경의 전시 <서 있는 시간>은 전속력으로 앞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에 길든 사람들에게 시간에 끌려가지 말고 시간을 마주하라고 말을 건넨다. 그녀의 회화는 작은 화폭 위에 미디엄을 이용해 여러 겹으로 색을 입히는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이전 작업에서는 이 겹들의 층이 두드러졌다. 반투명한 평면을 쌓아 올리는 방식을 통해 각 층의 색들은 서로 겹치는데, 이러한 겹침으로 나타나는 색은 광채를 띠기까지 했다. 이전 작업이 일련의 물리적 과정에 의해 겹침의 효과를 극대화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겹침보다는 스며듦을 강조하는 듯하다. <My heart is bleeding>(2013)은 흰 바탕 위에 강렬한 붉은색 직사각형이 화면을 분할한다. 두 개의 화면으로 구성된 <I write a letter(diptych)>(2014)는 마음의 상처를 써내려간 것처럼 붉은색 직사각형이 화면 상부에 수평으로 위치하고, 다른 화면은 빈 종이처럼 다음의 문장을 기다리는 것만 같다.
사실 한국 미술계에서 추상회화는 대중에게 큰 관심을 받지 못한다. 최근 단색화 붐이 일어났지만, 개인적으로는 단색화에 대한 관심은 추상회화에 대한 관심과는 다른 것 같다. 헬 포스터의 말을 빌리면 “시뮬레이션의 시대에 추상화를 부흥시키려는 시도는 ‘자본의 추상화 과정’을 흉내 내려는 기회주의적 시도라고 생각한다.” 미술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웅장하고 영웅적인 해석을 강요당한 부분이 적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으며, 무엇보다 예술을 통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보려는 여러 입장 덕분이었다. 추상을 개인적 차원의 감정이입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관습을 파괴한 혁명적 실천으로 볼 것인지는 결국 미학이 정치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W. J. T.미첼은 추상회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굳이 거창한 회화론이나 주체성을 운운할 필요는 없다고 조언한다. 오히려 그는 작품에 다가가는 관객의 자율성과 이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종의 친밀감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교조적인 추상미술의 강령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신화적 영웅을 알현하기 위해 추상미술을 관람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갑자기 작품에 대한 친밀감이 샘처럼 솟아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모방과 재현의 패러다임을 벗어나기 위해 형상을 지운 추상미술의 시대는 끝났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미학적 강령 대신 작품 자체에 집중하라는 조언과 더불어 추상적 이미지는 이미 고대부터 존재했다는 익히 알려진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김미경의 회화는 무겁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다. 작품은 관객에게 자신에게 관심을 달라고 강요하지도 않고 명상하라고 주문을 걸지도 않는다. 물론 전시장의 상태와 작품의 배치에 따라 이러한 느낌은 달라지겠지만, 내게 이번 전시는 내가 굳이 작품에게 말을 건네지 않아도 무방할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건 마치 편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드는 기분에 가까웠다. 친밀감은 소통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자유로운 상태일 것이다.

위 갤러리 비원에서 열린 김미경 개인전 광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