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FACE 2016 라선영

인간을 말하다

더 이상 ‘조각’이라는 장르 개념은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설치, 영상 등이 대세를 이루는 지금의 미술계에서 나무로 인체 형상을 제작하는 라선영의 작업은 조금 특별해 보인다. 그렇다고 전통적인 작업은 아니다. 어쩌면 나무로 만든 인물조각이 전통적이라는 인식은 어디까지나 편견에 불과할 것이다. 작가는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을 따라가지 않고 그냥 자신이 하고 싶은 작업을 할 뿐이다.
인간의 다양한 행태에 관심이 많은 작가는 작업 초기부터 70억 명의 인물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나무를 깎는 행위는 그녀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가장 잘 맞는 표현방식이다. 나무 특유의 따뜻함도 인물 형상과 잘 어울린다. 그녀가 만든 인물조각은 특별한 기교도 디테일도 없다. 하지만 채색 작업을 통해 형광색 조끼를 입은 경찰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여중생 등 조각 하나 하나의 개성이 뚜렷이 드러난다. 작가는 나무 특유의 물성을 압도하거나 압도당하지 않고 사람 형태라고 인식할 만큼만 깎는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모든 작품은 그녀의 평생 프로젝트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다양한 인간 군상은 그 시대의 삶의 풍경을 반영한 거대한 아카이브가 될 것이다.
<런던>, <서울, 사람> 시리즈가 주변에서 관찰한 사람들의 풍경이라면 <빔(Beam)>, <타워>, <벽(Wall)> 시리즈는 인간의 내면세계, 특히 욕망에 관한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실제로 인물조각은 당대의 열망 또는 염원을 그대로 담아낸다. 예를 들어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석기시대 다산의 상징이었고, 거대한 동상이 다수 제작된 시대에는 이데올로기 전달이 중요한 목표였다. 30cm 남짓한 크기로 바닥에 낮게 배치된 라선영의 목조 군상은 신이 사람을 내려다보듯 관객에게 전지적 시점을 부여해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만든다. 작가에게 조각품은 그 자체로도 의미 있지만 그것들이 연출된 상황도 중요하다.
6월 카이스갤러리에서 선보이는 개인전 <반짝이는 것들>에는 새로운 형태의 작업을 선보일 예정이다. 작가는 모두가 주목받고 싶어하는 동시대 세태를 담아내기 위해 목조로 제작한 신부(新婦) 형상을 도자기로 대량 제작했다. 깨지기 쉬운 재료인 도자기는 현대인의 연약한 자아와도 맞닿아 있다. 도자기로 만든 신부 부대를 바닥에 깔고 천장에는 반짝이는 종이로 만든 낙하산 부대를 매달을 계획이다. 능력이나 자질 없는 낙하산 인사처럼 이들 형태는 반짝여서 눈에 띄지만 옆에서 보면 제대로 안보일 만큼 얄팍하다. 이처럼 동시대 삶의 모순을 담아내다 보니 라선영은 목조각이 아닌 새로운 표현방식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녀의 작업에서는 하고 싶은 말과 재료적 특성, 표현방식이 일치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슬비 기자

라선영
1987년 태어났다. 이화여대 조소과와 영국왕립예술학교 조소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대중의 새발견>(문화역서울284), <플라스틱 신화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등에 참여했다. 6월 23일부터 7월 22일까지 카이스갤러리에서 3번째 개인전 <반짝이는 것들>을 개최할 예정이다.

 나무에 채색 가변 크기 2015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전시광경

<타워> 나무에 채색 가변 크기 2015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플라스틱 신화> 전시광경

NEW FACE 2016 김하나

불안전한 시대의 온화한 풍경

고요한 풍경, 느슨한 움직임. 새하얀 빙하는 세월의 흔적을 겹겹이 담고 이동하며 일상에서 볼 수 없는 낯선 풍경을 선사한다. 작가 김하나는 일상과 동떨어진 백색의 빙하에서 자신을 발견했다. 작가는 빙하가 지닌 수만년의 시간과 하얀 빙하 벽에 흡수되고 산란되는 수많은 빛과 빙하 층의 결, 사이의 틈과 구멍에 집중했다. 그는 실견한 빙하를 캔버스에 옮기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본 빙하 이미지와 영상자료를 통해 그만의 빙하를 상상한다. 실견하지 않은 물질을 그리다 보니 표현의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 거대한 자연에 억눌리지 않고 재해석할 수 있는 해석의 자유로움을 얻는다. 이미지를 통해 자연의 모습을 접하니 거대한 자연에 압도되지 않고 미시적인 부분에서 새로운 시각적 미학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빙하의 새하얀 ‘색’은 작가가 빙하를 선택한 첫 번째 이유다. 흰색은 빛을 머금고, 내뿜으며 빛의 스펙트럼을 키우는 특징이 있다. 빙하 주변에 빨간 토양이 있으면 빙하는 붉은 빛을 띤다. 시간과 날씨에 따라 흰색은 다양한 옷을 입는다. 작가에게 빙하는 프리즘과 같다. 빙하가 빛을 흡수해 새로운 색을 뿜어내듯 작가는 순백의 캔버스를 다양한 색의 온도로 채운다. 흰색과 다른 색의 자연스러운 만남은 그의 작업을 안온한 분위기로 만드는 결정적 순간이다. 그의 작업에 차가운 빙하는 존재하지 않는다. 빙하가 바다를 부유하듯 안단테로 그어진 붓의 속도감과 봄날의 꽃망울 같은 따뜻한 색이 유독 많이 사용됐다. 차가운 빙하가 아니라 따뜻한 빙하다.
빙하가 지닌 시간성은 작가의 불안감을 표현하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 그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담는 ‘도구’로 빙하를 선택한 데에는 그것이 지닌 불안한 운동성과 시간성도 한몫 한 듯하다. 빙하풍경은 천편일률적이지 않다. 물 위에서 천천히 흐르고 서서히 변화한다. 그러나 빙하가 녹아내릴때는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파괴력으로 소멸한다.
작가가 가진 불안감과 빙하의 관계를 살피다 보면 “왜 빙하일까?”라는 원초적인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 질문은 작가 스스로도 자주 던지는 물음이다. 처음 시작은 개인의 불안감에서 비롯됐다. 작가는 “졸업 후 작가로의 전환 과정에서 ‘나’를 찾고 안정이 되면, 그때 작업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작업 속에서 안정을 찾는 자신을 발견했다”며 “나를 받아들이는 시간 자체가 그림을 그리는 출발점이었다”고 말했다. 빙하는 곧 시간의 유한함을 나타낸다. 젊은 작가에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작업과 동행하는 숙명과 같다. 어쩌면 작가는 빙하의 가변성에서 그가 느끼는 불안함을 찾은 것은 아닐까?
이번 전시에는 2년 반 정도 준비한 작업이 출품됐다. 젊은 작가의 개인전 준비기간으로 꽤 긴 시간이다. 작가는 빠르게 변화하는 시간에 불안감은 느끼지만 조급함이 없어 보인다. 느리게 흐르면서 다양한 색을 머금고 풀어내는 빙하는 작가의 모습과 닮아있다. 물론 앞으로의 작업에서 다른 풍경이 펼쳐질 수도, 작업을 해나가는 속도에서 변화가 있을 수도 있다. 인터뷰 내내 작업을 시작하는 작가로서 작업의 변화 가능성을 열어두는 그에게서 그림에 녹아있는 찬찬한 부드러움과 침착함이 느껴졌다. 작업의 소재나 주제가 바뀌더라도 작품을 닮은 그의 모습이 작업에서 온전히 드러날 것이다.
임승현 기자

김하나
1986년 태어났다. 첼시 런던예술대학교 순수미술과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에서 활동 중이다. 2015년 커먼센터 그룹전 〈오늘의 살롱 2015〉에 참여했고, ‘2016년 Shinhan Young Artist Festa’에 선정되어 5월 2일부터 6월 8일까지 신한갤러리 광화문에서 개인전이 열린다.

〈 Untitled 〉 캔버스에 유채 130.3×162.2cm 2016

〈 Untitled 〉 캔버스에 유채 130.3×162.2cm 2016

최예선의 달콤한 작업실 8

옛날 음악을 들으러 갔다

집에 있던 J의 오래된 턴테이블을 작업실로 옮겼다. 뽀얗게 먼지가 앉은 LP판들도 박스에 담아왔다. 오랫동안 내버려둔 물건이라 제대로 소리가 날까 모르겠다. 망가진 바늘칩을 새것으로 바꿔 끼우고 카트리지를 이리저리 움직이니 플래터가 뱅글뱅글 돌아가기 시작한다. 아무 판이나 꺼내서 얹었다. 존 덴버가 희생양이 되기로 했다. ‘퍼햅스 러브’. 존 덴버의 미성이 매끄럽게 뻗어나가면 플라시도 도밍고가 바이브레이션 바리톤으로 중후하게 이어가는 그 노래.
판이 돌아가자 클래식 전주부터 울렁울렁하더니 존 덴버의 미성은 어디 가고 테이프 늘어진 노랫소리를 뱉어낸다. 존 덴버가 머쓱해할 만큼 한바탕 웃음이 터져나왔다. 벨트가 늘어진 모양이다. 회전 속도를 조절하는 버튼을 눌러보고 카트리지의 이음새를 살펴보고 여러번 돌려보니 본래의 속도를 찾아간다. 존 덴버의 울렁증도 줄어들었다. 그제야 나는 낡아서 너덜너덜해진 종이재킷에 든 LP들을 박스에서 꺼낸다.
“세상에! 이게 언젯적 물건이야!”
리차드 클레이더만의 피아노, 폴 모리아 앙상블의 추억의 영화음악, 1980~1990년대 유행했던 음악들이 뛰쳐 나온다. 들국화, 015B, 이문세, 팻 매스니, 비틀스 베스트, 퀸, 조지 마이클, 그리고 유재하.
한 장의 앨범을 발표하고서 영면에 든 유재하. 그 빛나는 목소리를 들으며 뭉클한 시간이 흘렀다. CD의 선명한 음질과 다른, 먼 곳에서 들리는 듯하면서 조금은 느린 사운드가 스피커에서 울린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나 ‘여행스케치’처럼 낭만이 풀풀 쏟아지는 이름들 앞에서는 그만 머쓱해진다. 직경 30cm짜리 재킷을 더듬어보니 엉성한 레이아웃과 강렬하지만 빛바랜 컬러가 눈에 안긴다. 지금의 산뜻함, 세련됨과는 다른 손맛 나는 물건이라고 해두자.
1990년대의 풋풋한 대학생 밴드인 ‘015B’는 혜성처럼 등장했었지. 보컬 윤종신의 목소리가 더할 나위없이 맑고 곱다. 나는 무한궤도의 신해철을 더 멋진 아티스트라 여겼지만 윤종신의 감미로움을 멀리할 수는 없었던 기억이 난다. 20년 전에 말소된 소리들이 기억처럼 퍼져나온다. 음악은 기억과 접목되어 있다. 지금과 완전히 다른 존재로서 내 몸이 떠오른다. 음악을 듣고 노래를 따라 부르던 나, 혹은 우리. 영화 <더티 댄싱>의 사운드 트랙은 영화보다 아름다웠다. ‘헝그리 아이즈’의 신나는 리듬, ‘쉬 라이크 더 윈드’의 나긋한 발라드. 리듬이 분명하고 흥겨운 가사가 명쾌하다. 그땐 음악이란 들으면서 몸을 흔드는 거였다. 어쩌면 온몸을 관통하는 감미로운 ‘음악의 시대’였다. 지금과는 다른 음악의 시대를 살아왔던 것 같다.
턴테이블을 가져다두었다고 하니 친구들이 구경하러 왔다. LP를 모으고 듣던 세대들이라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책장 어딘가에 꽁꽁 싸인 채 꽂혀 있던 LP들, 그러나 아무렇게나 처분할 수 없는 것들을 작업실에 가져다주기도 했다. 하나하나 꺼내서 먼지를 닦아내고 플래터에 올리면 약간의 뜸을 들인 후 음악이 시작되었다. 그 잠깐의 무음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영화가 시작된 직전의 암전에서 느끼는 기대감과 같다고 할까? 아날로그 시대의 음악이란 그런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검은 비닐을 고르고, 먼지를 닦고, 바늘을 제자리에 두기 위해 움직이고 바늘이 검은 홈 사이의 굴곡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보고 굴곡의 신호가 모여 음악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이 시작되기 전 약간의 쉼표, 두어 마디 정도 튀거나 지지직거리는 소리도 감수하는 것. 수고로운 노력이 필요한 것들은 더 큰 아름다운 무언가를 돌려준다.
한번은 J가 LP가 한가득 담긴 상자를 들고 왔다. 오래 알고 지내던 선배의 LP라고 했다. 그는 하던 일이 잘 안 되어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해야 할 상황이었다. 오죽했으면 낡은 LP까지 모두 꺼냈을까. J는 LP 상자를 홍대 앞 중고 LP가게에 가져갔다. 가게에서는 이유를 대며 선배의 LP를 구입하지 않았다. J는 미안한 얼굴로 묵직한 상자를 선배에게 도로 가져갔다.
“차라리 다행이래.”
그날 저녁 J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옛 추억이 담긴 물건들인데 그것마저 모두 팔렸다면 얼마나 쓸쓸했겠냐며.”
LP 상자를 다시 받아들고 안심했을 선배를 생각하니,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버릴 수 없는 추억이 있음을 알겠다. 먼지가 자욱한 다락 한 켠에 놓여있더라도 추억이라 부를 수 있는 물건들이 있어서 우리의 슬픔은 줄어드는 지도. 무용해 보이지만 간절한 물건들이 있다. 이 물건들은 삶의 드라마를 하나씩 품고 있다. ●

CRITIC 한운성 디지로그 풍경

이화익갤러리 5.4~24

박영택 경기대 교수
한운성의 그림은 항상 특정한 형상이 화면 중심부를 차지하고 주변은 단호한 색면으로 마감되어 있는 형국이다. 구상(재현)과 추상이 공존하고 은유적인 이미지와 평면의 화면이 맞물려 있으며 익숙한 일상의 편린들이 느닷없이 발췌되어 나앉는다. 구체적인 삶의 공간에서 분리되어 적막한 화면에 내던져진 듯한 그 이미지는 작가가 현실에서 발견한 이미지이자 생각거리를 안겨준 이미지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마치 실존하는 것처럼 단단한 존재감을 구현하며 직립해 있다. 오로지 그 이미지만을 독점적으로 강조하는 연출은 사실적인 묘사와 경쾌하고 활력적인 붓질과 짙은 그림자를 거느리며 등장한다. 그리고 배경은 그 이미지를 강조해주는 모종의 막 기능을 하면서 펼쳐진다. 일종의 도상에 해당하는 그 이미지는 작가에게 있어 자신의 시대를 드러내 의미심장한 상징일 것이다. 찌그러진 콜라 캔을 비롯해 1980년대 초에 등장한 받침목과 이후 문, 벽, 매듭, 신호등, 박제, DMZ 풍경, 과일. 그리고 이번 전시에 출품된 건물의 외관을 그린 그림 등이 모두 그러하다. 특정 오브제를 채집하고 이 오브제를 평면의 화면에 배치, 배열한 후 그것의 존재성을 강렬하게 부각시키는 일련의 조형적 장치를 세심하고 감각적으로 부려놓은 그림들이다.
근작인 <디지로그 풍경> 시리즈는 디지털로 채집한 건물의 파사드 사진을 아날로그 방식인 그리기로 옮겼다는 의미인 듯한데 이를 통해 건물의 외관 뒤에 자리한 본질이 뭔지 질문하거나 괴이한 껍데기로 치장한, 천박한 한국의 풍경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이 작업은 이미 2011년 초반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한운성이 채집하고 배열한 상징적 이미지들, 오브제들은 산업사회와 인간 소외, 분단, 유전자 조작, 급변하는 한국 사회의 단면 등을 암시하는 징표들이다. 생각해보면 그가 오랫동안 그려온 이미지는 현대 문명과 동시대 한국사회가 대면한 여러 문제를 골고루 건드리고 있는 모종의 징후적인 이미지들이고 그 이미지를 빌려 현실을 응시하는 자신의 내면을 은연중에 투영해왔다고 본다. 작가는 감각적인 재현술을 지닌 그의 손의 기능을 발화시키면서도 일반적인 구상화의 관행에서 벗어나면서 동시에 현대미술로서 편입될 수 있는 구상, 다시 말해 평면성과 추상적 요소가 공존하는 구상화를 고려하는 한편 내용주의와 형식주의의 긴장감 있는 균형을 고려한다. 보편적인 구상화로 보이지만 실은 그 이미지는 매우 얇은 물감의 물성의 흔적, 납작한 화면의 평면성이 두드러지게 검출되는 화면이자 그러면서도 매우 환영적인 이미지를 다소 기이하게 드러낸다.
그 같은 그림은 결국 지난 1960~1970년대의 추상 일변도의 화단과 1980년대의 민중미술, 그 양극단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그 모두를 아우르는 나름의 전략적 측면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캔버스의 2차원성과 이미지의 3차원성을 혼재시키는 한편 미니멀리즘과 색면 추상을 껴안고 있고 다시 그 위에 사회성 짙은 메시지를 올려놓으면서도 여전히 손으로 그려지는 그림의 맛과 환영성을 올려놓고 있는 것이 한운성의 그림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써놓고 보면 한운성의 그림은 너무 많은 고려 속에서 풀려나온다는 느낌이다. 그것들은 기실 작가 작업의 알리바이를 만들어온 것들이자 그만의 그림 특성을 구현해온 것들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한운성의 그림을 일련의 틀/경계 안에서 제한해왔던 것은 아닐까?

위 한운성 <생텍쥐페리 기념관>(맨 왼쪽) 종이에 아크릴 2015

CRITIC 이상길 Contact

미부아트센터 5.13~6.23

김승호 동아대 교수
Contact. 조각가 이상길의 주관심사다. 형태가 공간으로, 공간이 형태로 드러나는 중견작가의 노정이다. 대작과 소작이 면적이자 구형적인 조각에 첨가되어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이 공존하고, 차갑고 화려한 형태들로 물질적이자 정신적인 경계마저 무색해지는 콘택트다. 중견조각가의 주관심사를 파악하는 기준이 보편적인 기준을 넘어선다. 이상길이 선택한 ‘콘택트’는 칼 세이건(Carl Sagan)이 1985년 발표한 공상과학소설의 제목이자 1997년 세계의 주목을 받은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서둘러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중견작가의 노정이 그다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콘택트>는 우주에 있다는 베가성의 아름다운 해안에서 아버지의 형상과 짧은 만남을 이룬 엘리 애러웨이(조디 포스터)가 지구와 우주를 넘나든다는 줄거리의 공상과학영화다.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면서 경험한 은하계의 수많은 정보와 여행 중 카메라에 찍힌 영상자료가 시청각적 증거물로 채택되었다. 우리에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고, 공상이 공상으로만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도 남겼다. 지구라는 현실세계가 가상세계인 은하계를 인식하는 조건인 반면에, 조디 포스터의 탐구 욕구와 교신 연구는 그를 마침내 보이지 않는 세계로 내몰았고 불가능이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까지 담았다. 우주선이 발사된 직후 바다에 추락하여 실패로 끝났다는 주변의 주장과 설득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18시간이라는 은하계의 시간이 기록되어 실재/우주와 가상/베가성의 경계마저 되물은 <콘택트>다.
Contact. 서구에서는 문화산업의 축이 된 반면에, 우주는 볼 수 있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아우르면서 우리들 삶 속에 스며 있다. 달에 계수나무와 토끼가 있다는 이야기는 우주를 눈으로 보려는 우리에게 상상력을 자극했고, 볼 수 없는 우주는 신비로움과 동시에 경외감을 갖게 하여 우리에게 이상길의 조각세계에서 경험해보라고 초대한다. 관조로 초대한 콘택트의 미술세계에 응할지 머뭇거릴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더라도 우주에 대한 호기심은 “보이는 것 너머에 대해 상상할 수 있을 때 예술은 풍요로워질 수 있다”(최태만, <내 마음의 우주선에서 보내온 신호>, 2006, 전시도록에서 인용)는 작가의 주장과 상반되지 않을 것이다. 물질과 제작 방식이 빚어낸 형태미를 꼼꼼히 뜯어보자. 촘촘하게 용접한 흔적이 안으로 그리고 밖으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원추형과 반원추형, 크기가 다양한 입방체의 작품들이 배치되어 우주공간으로 향하는 관객의 상상력이 풍요로워지고, 네거티브와 포지티브가 조우한 강한 원색의 추상적 형태(타원형)들로 촉각의 세계는 풍부해진다. 색이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강령이 내포된 최근의 신작들, 오목과 볼록의 각기 다른 형태가 상호 보완하는 변곡점들도 다양하다. 그러한 이계도함수f(x)의 부호가 바뀌는 방법마저 두 가지 색이 합쳐져 오목과 볼록의 상태가 바뀌는 지점들이 다채롭다. 수학적이자 과학적인 작품 제작 원리로 현대미술을 관통한 신작들이 눈에 띈다. 서둘러 해명하자. 볼 수 없는 우주가 작가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형태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선사한 반면에, 미술은 색이 형태이고 형태가 색이라는 형식미에서 구체화되었고 오목과 볼록의 변곡점들이 작품의 제작 방식에 예속된다는 것이 이번 전시의 특징이다.
2016년 이상길의 전시 는 공간으로 상상하고 볼 수 없는 세계와의 교신을 요구한다. 전시에서 작업 방식의 다양성이 획득된 반면에, 관조로 초대 받은 우리는 미지의 세계를 가시화하는 것이 미술의 임무라는 진리에서 상상하고 교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위 이상길 <Contact> 스테인레스 2016

CRITIC 박종규 Maze of Onlookers

리안갤러리 서울 5.12~6.30

윤진섭 시드니대 명예교수
이처럼 파당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단어를 쓰고 싶지는 않지만, 지역에 거주하는 작가가 서울에 올라와 작품을 발표하는 일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른다. 작품의 운송에서부터 설치에 이르기까지 신경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이다. 특히 지역에서는 유명할지 몰라도 서울 화단에 이름이 다소 생소한 작가의 경우, 모종의 심리적 부담감도 작용한다.
박종규의 경우, 서울 화단 입성을 대대적으로 알린 이번 개인전은 그의 존재감을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그는 지난해 경북 영천 시안미술관에서 가진 초대전이 큰 성공을 거둔 여세를 몰아 이번 전시에 임했다. 회화는 물론, 설치, 오브제, 미디어아트에 이르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다양한 매체를 동원하여 지난 수년간에 걸쳐 관심을 기울여온 주제를 성공적으로 구현했다. 원래 시안미술관의 전시 프로그램 목적이 주목받는 지역 작가를 선정하여 국제적인 작가로 육성한다는 데 있었던 만큼, 전시 규모 역시 타이틀에 걸맞게 대규모였고, 박종규는 그러한 목적에 부응해 자신의 전 역량을 전시에 투여한 바 있다. 따라서 그의 이번 리안갤러리 서울 전시는 말하자면 지난해 시안미술관 전시를 축소하여 서울에 선보이는 매우 의미있는 행사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상업화랑의 전시는 일정한 한계를 지니게 마련이다. 최근 들어서 일부 메이저급 화랑들이 설치나 미디어아트와 같은 비정형적인 전시 형태를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 리안갤러리 역시 정통적인 회화의 매체인 캔버스의 틀을 벗는 과감한 시도를 감행했다. 1층 전관을 이용해 벽면에 직접 작품을 설치하는 벽화 형태를 취한 것이다. 이 작품은 자신이 수년간 추구해온 컴퓨터 드로잉의 일부이다. 흑백의 선이 자아내는 과감한 시각적 콘트라스트가 압권인 이 거대한 설치작품은 지하 전시장으로 들어가기 전 긴장감을 유발하는 동시에 궁금증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박종규의 선과 점(dot)을 이용한 대형 그림들은 사물의 이미지에 대한 디지털적 번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인코딩(Encoding)’은 컴퓨터를 활용한 박종규의 작업 요체를 설명해주는 표제어이다. 흔히 ‘암호화하다 혹은 암호로 고쳐 쓰다’는 의미를 지닌 ‘인코딩’이란 단어는 실제의 세계를 기호의 세계로 변환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점자처럼 보이는 점은 점자가 의미하는 세계와는 관계없이 실제의 세계를 암호로 전환한 기호의 세계이다. 마찬가지로 바코드를 연상시키는 박종규의 선의 회화는 경제적 교환 기호체계로서의 바코드와 관계 없이 컴퓨터상의 픽셀(pixel)의 조합이 이루는 이미지의 세계이다.
박종규는 컴퓨터가 수행하는 이 픽셀의 조합 원리를 사용하여 특정한 대상을 찍은 사진이나 심지어는 음악조차 ‘코드화’하여 이미지로 전환한다. 따라서 박종규의 점이나 선 그림들은 지극히 기계적인 성격의 회화인 것이다. 이처럼 그가 시도하는 새로운 회화적 방법론은 작가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는 순수한 기계적 드로잉이라 할 수 있다. 그 기계적 드로잉을 입체로 구현한 것이 이번 전시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기계가 수행한 거대한 그림들과 각기 다른 장면을 보여주는 20여 개의 모니터가 매달린 구조물에 사운드와 시각물이 결합, 게다가 전시장에 들어온 관객의 모습이 투명된 모니터 등 박종규는 특유의 융합적 사고를 통해 전시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 나가고 있다.

위 박종규<2016 Maze-201651236-40>(왼쪽위) 포멕스, CNC 2016

CRITIC 권경환 & 금혜원 한숨과 휘파람

원앤제이갤러리 4.15~5.13

김남인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노래의 기원을 두려움과의 관계에서 찾기도 한다. 어두운 곳을 혼자 걸어갈 때,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아이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존재는 감지하지만 정체를 파악할 수 없을 때, 아이는 발소리를 크게 하고 노래를 부르며 자기 주변의 공기를 흩뜨려 본다.
권경환·금혜원의 2인전 <한숨과 휘파람>은 지금 시대의 이주(移住)와 정주(定住), 그리고 그것이 파생시키는 삶의 상태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권경환은 철제 앵글을 활용해 전시장 곳곳에 어떤 구조물들을 설치해 놓았다. 작품들은 최소 단위의 앵글들이 연결된 형태이기 때문에 조립, 분해, 재조립이 용이하지만, 추상적이면서도 아직 하나의 완결된 기능성에 이르지 않은 상태라 불안정해 보이기도 한다. 벽의 한쪽 구석이나 모서리의 형태에 맞춰 설치된 크고 작은 구조물들은 주어진 공간의 크기가 구조물의 규모를 결정짓는 공간의 메커니즘을 부각시킨다. 색이 칠해진 앵글들을 볼 수도 있는데, 이때 그가 사용한 재료는 외부 구조물의 부식을 막는 방청도료이다. 임시 구조물의 건축용 재료들은 작가에 의해 추상적, 기하학적 형태들로 만들어지고 전시장에 배치된다. “가정식 조각-균형”과 같은 작품 제목은 현재 주거문제로 말미암아 이동과 정착을 빈번히 반복해야 하는 사람들이 편의를 위해 선택하는 조립과 해체식 가구를 구체적으로 떠올린다.
권경환의 작업이 공간을 실질적으로 점유하고 그곳에 맞추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상기시킨다면, 금혜원의 사진작업들은 공간을 한때 점유했었으나 이제는 떠나가버린 삶의 흔적들을 보여준다. 5년 이상 사용되지 않는 공간으로 남아있던 질병관리본부의 건물 내부를 촬영한 작가의 사진들에는 무신경하게 놓인 판자, 영화 포스터, 낡은 의자와 전화기 등이 등장한다. 얼룩덜룩해진 녹색의 유리창 시트지를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빛은 절대적이면서도 상대적인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 캐비닛 안의 물건들은 정체를 쉽게 알아볼 수 없게 먼지가 자욱하고, 누가 누웠을지 모르는 침상은 그 부재의 존재감을 드러낼 뿐 시커멓게 때가 타 있다. 당직실이 갖는 공간의 임시성은 많은 사람이 머물러야 했지만 결국 주인 없이 방치될 수밖에 없는 공간의 운명을 예견한다. 사진의 구체적 시간성은 영화 <타이타닉>(1997)의 포스터와 같은 사물들의 존재로 암시될 뿐이다. 내부의 공간 곳곳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버려진 공간들로부터 어떤 정서들을 이끌어낸다. 한 개인이 사용했을 물건들이 버려진 채 나동그라져 있는 장면을 가만히 보다 보면 지금의 삶들에 존재하는 숱한 유기(遺棄)의 가능성이 떠오르기도 한다.
1층과 2층 전시장이 무게 중심을 달리해가며 두 작가의 작품을 공간상에 함께 배치했다면 3층에 전시된 <한숨과 휘파람>(2016)은 금혜원의 사진 속 공간이 물리적 공간으로, 권경환의 기하학적 조형물들이 내러티브의 단서들로 치환된 듯한 설치작품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본 설치작업에는 ‘소리’가 작품의 새로운 요소가 된다.
오랫동안 버려진 빈 공간에서는 어디서 나는지 알 수 없는 바람소리, 삐걱거리는 소리, 금속 울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짐을 정리하며 한동안 사용하던 책장을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이주자들이 있을 것이다.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공간을 찾고 그 공간 안에서 살아갈 방법들을 궁리한다. 그 궁리는 실질적이지만 또한 절박한 것이기도 하다.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자.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소리처럼 삶의 토대에 대한 두려움은 산포된다. 발소리와 노래를 말한 이유는, 이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길을 터가는, 옮기고 옮아가는 많은 사람의 움직임 속에서, 두려움을 헤쳐 나가는 예술 행위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두 작가의 작품이 서로의 이해를 도우면서 한편으로 새로운 문제의식의 지점을 환기시키는 전시였다.

위 원앤제이갤러리에서 열린 <한숨과 휘파람> 전시광경

CRITIC 허윤희 새의 말을 듣다

LIG 아트스페이스 한남 스튜디오 엘 5.12~6.9

김최은영 미학
간단하지 않았다. 목탄, 발, 나무, 별, 물. 낱개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상들이다. 이들은 허윤희의 움직임을 거치면서 더 이상 간단하지도 분명하지도 않게 된다.
현대 시각예술 작품을 마주할 때 파악되는 지점은 대부분 작가의 개념 즉 머릿속이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선 작가의 몸이 보였다. 거친 목탄을 휘두르고, 지우고, 다시 채워 넣고, 힘을 주고, 멈췄다가 휘몰아치는 행위 말이다. 여기서 작가의 손이라고 표현하지 않은 이유는 축적된 선과 지워진 흔적들이 손을 넘어 팔, 그리고 어깨와 허리 즉 몸을 사용해야 나올 수 있는 범위이기 때문이다. 몸은 예술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다. 그것은 대상으로서의 중요성뿐 아니라 체득(體得)이란 단어처럼 덕(德=得)을 깨닫는 것은 머리가 아닌 몸(體)으로 조어(造語)된 것에서 그 연유를 유추할 수 있다. 몸으로 얻은 진리는 머리로 학습한 지식과는 분명 다르다. 허윤희 그림과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이러한 풀이를 충분히 가능케 한다. 발이 나무가 되고, 혈관처럼 보이는 선이 나무의 결이 되는 모습은 기괴하지 않고 원래 그러한 것이 있는 양 자연스럽다. 게다가 작가의 행위가 중요한 흔적으로 화면에 남았다. 선은 흐르고 있다. 정지된 채 죽어버린 풍경이 아닌 움직이는, 살아있는 선이다. 그래서 <발-춤>은 또렷하게 발-춤으로 보인다. 낱개의 발과 춤처럼 간단하진 않고, 분명하게 ‘무엇’이라고 명명할 수 없지만 동감할 수 있는 시각언어다.
마르고, 울창하지 않고, 쓸모없어 보이는 산길에서 스쳤을 나뭇잎, 풀꽃, 이름 모르는 새는 목탄만이 가지고 있는 미묘한 색감과 거친 질감, 지웠을 때 뿌옇게 드러나는 효과를 통해 탁월한 감정을 부여받는다. 허망하고 애잔하다. 경쾌하진 않지만 절대 비극은 아니다. 존재했던 모든 것은 목탄처럼 지워질 것이다. 그러나 지워도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는 목탄의 흔적처럼 실존이다.
사라질 생명성에 대한 <헌화>와 아련한 기억 어디쯤에 있던 <새>는 아름답게 다듬어지고 정형화된 비례를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러나 마음을 움직인다. 보는 이의 생각을 흔드는 일. 감정이 움직이는 일. 예술의 역할이다. 허윤희는 비미(非美)적인 것에서 아름다움을, 터무니없는 조합에서 평범한 이치를, 마르고 썩은 것에서 생명의 의의를 추구하려 했다. 겉은 말랐지만 내용은 풍만하고, 옅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짙으며(外枯而中膏, 似淡而實濃), 현란함이 극에 도달하면 평담함으로 돌아간다(絢爛之極, 歸于平淡)는 소식(蘇軾, 소동파)의 이야기와 너무도 닮아 있다. 수많은 선이 중첩되고, 삭제됨을 반복하며 작가는 화면을 닦듯 마음을 닦았을 것이다. 그렇게 고스란히 담겨진 이야기는 울림이 된다. 사라질 숙명을 알면서 진행한 벽화작업과 명성이나 환금과는 거리가 먼 목탄회화는 얼마나 그 속성이 닮아있는지. 감탄과 감동을 강요받는 요즘의 시각예술 작품 속에서 간단하고 단순한 도구인 목탄을 쉽게 버리지 않은 작가의 공력은 이제 공감으로 되돌려 받아야 한다.

위 허윤희 <도시>(왼족) 종이에 목탄 2016

CURATOR’S VOICE

폐기된 사진의 귀환 – FSA 펀치 사진전
갤러리 룩스 5.3~6.4

박상우 중부대 교수
3년 전인 2013년, 사진 한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린 ‘괴상한’ 사진들을 처음 보았다. 그것은 1930년대 미국 농업안정국(FSA)이 자신의 이념에 걸맞지 않다고 판단되는 10만여 장의 필름에 펀치로 구멍을 뚫어놓은 것들이었다. 이 사진들은 ‘폐기된(Killed)’이라는 딱지가 붙어 수십 년 동안 미국 의회도서관 한쪽 구석에 버려져 있었다. 이 사진들을 처음 보았을 때 사진 중앙에 뚫려 있는 커다란 구멍의 압도적인 스펙터클에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진을 수없이 보아온 필자도 이 구멍 앞에서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시각적 충격에 휩싸였다. 하지만 펀치 사진에는 단지 이 같은 시각적 충격만이 아닌, 사진에 관한 좀 더 ‘근원적 요소’가 있을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곧바로 10만여 장의 펀치 사진을 온라인을 통해 보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와 관련된 광범위한 문서 자료들을 수집, 검토했다. 그리고 이 펀치 사진을 전시를 통해 국내에 소개하고 이에 대한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기괴한’ 사진에는 사진의 기존 담론을 뒤흔들 수 있는 결정적인 것이 숨어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펀치 사진을 파고들면 이전과는 현격히 다른 새로운 사진사를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FSA 사진에 숨겨진 이면의 역사를 드러내고, 다큐멘터리 사진, 나아가 기존의 사진사에 가려져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펀치 사진은 기존의 다큐멘터리 사진과 사진사 전체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 사진에는 숨은 역사 외에 사진에 관한 좀 더 심층적인 요소가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모든 사진에서 핵심적 행위인 ‘선택(selection)’이라는 실천이었다. 기존 사진철학은 ‘촬영하기’ ‘촬영되기’ ‘바라보기’라는 세 가지 실천에 주로 관심을 기울여왔다. 하지만 펀치 사진은 이 세 가지 외에 ‘선택하기’라는 또 다른 실천이 존재 한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일깨워줬다. 따라서 펀치 사진은 이전의 사진철학이 망각한 사진의 핵심 요소를 새롭게 정립함으로써 현대 사진철학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 같은 ‘이론적이고 개념적인’ 기획 의도하에 전시장에 배치될 사진을 선정했다. 아래층에는 FSA가 이 사진들에 구멍을 뚫은 기준에 따라 사진을 배치했다. 그 기준은 중복된 사진, 기술적으로 실패한 사진, 사진가가 실수한 사진, 다큐멘터리 사진에 맞지 않게 너무 예술적이거나 혹은 인물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있는 사진 등이었다. 위층에는 10만여 장의 펀치 사진 중에 가장 기괴하고 초현실적이면서 동시에 예술적인 사진 단 8장만을 골라 크게 프린트하여 전시했다. 이를 통해 차가운 도큐먼트 사진이 동시에 얼마나 예술적인 사진이 될 수 있는지를 제시하고자 했다. 한쪽 벽에는 네 개의 펀치 구멍을 크게 확대한 필자의 사진 (2016)을 걸어놓았다. 말레비치의 (1915)을 차용한 이 사진은 펀칭의 여파로 생긴 구멍 테두리의 선(線)들을 통해 FSA 권력, 나아가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 손’의 귀환을 암시하고자 했다. 전시장 혹은 웹상에서 누군가가, ‘폐기되고 버려진 사진을 어떻게 전시장에 걸 수 있느냐’고 거칠게 항의하기를 바랐는데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관객의 높아진 눈높이를 필자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 갤러리 룩스에서 열린 <폐기된 사진의 귀환> 전시광경

REVIEW

飛燕驚龍 : 제비가 날고 용이 놀라다
산수문화 4.26~5.26

개관 첫 전시로 노재운과 최윤의 2인전을 선보였다. 전시 제목은 대만의 무협 소설에서 차용해 인물, 무림, 이상향 등이 만들어내는 대담한 상상력을 비유했다. 두 작가는 영상, 설치, 회화 등 다층적인 언어로 풍부한 읽을거리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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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주_비컷 (3)

방명주 개인전
비컷갤러리 5.4~31

밥, 고춧가루 등 일상의 소재를 독특한 분위기로 표현해온 작가는 부산의 오래된 식물원을 앵글에 담은 시리즈를 선보였다. 온실 내?외부 풍경을 통해 생명의 아름다움과 상호 관계를 특유의 시선으로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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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아빈

심아빈 개인전
갤러리 2 4.28~5.31

전시장을 들어서면 각각 원, 삼각과 사각으로 이뤄진 기둥 설치물만 보인다. 작업을 보기 위해선 사다리에 오르거나 허리 숙여 구멍 속을 들여다보고, 고개를 들어 위편의 거울을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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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3)

누구의 것도 아닌 공간
아마도 예술공간 4.18~5.15

특정 시공간을 부유하는 기억과 남겨진 흔적을 추적해 개인의 기억과 경험을 현재로 소환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게끔 유도했다. 우리의 현실을 진단하고 나아가 다가올 미래를 가늠해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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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_에이루트 (2)

이경×서수한밴드
에이루트 아트플랫폼 5.12~27

작가 이경이 프로젝트그룹 서수한밴드와 협업 전시를 선보였다. 이경이 회화의 색채 작업에 집중했다면 서수한밴드는 거울이 내장된 커다란 캔버스를 제작하거나 캔버스를 마치 책처럼 진열해 평면과 입체 간의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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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

BIG: 어린이와 디자인
금호미술관 4.29~9.11

어린이를 위한 가구, 놀이기구 등도 기능성과 함께 심미성을 지닌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이 전시는 이러한 점을 감안, 빈티지 어린이 가구와 장난감 등을 어린이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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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김강

박지민 개인전
팔레 드 서울 4.26~5.1

‘사라짐의 흔적’이라는 부제를 단 작가의 개인전. 무엇인가를 태운 재와 그것이 연소할 때 생성되는 그을음을 통해 사라진 무엇의 흔적을 구현했다. 일상에서 쉽게 지나치는 사라짐을 복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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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순희김강

백순희 개인전
토포하우스 4.27~5.3

대자연과 그와 대비되는 빌딩,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작가의 개인전은 ‘평온의 한가운데 서서’로 명명됐다. 작가는 아크릴과 유채를 적층하여 표현에 깊이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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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자김강

장혜자 개인전
M미술관 5.2~31

일상에서 의식하지 못하고 놓치기 쉬운 자연은 사실 그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 작가는 우리와 밀접한 자연과 그것이 품고 있는 생명체가 가진 아름다움과 변화의 순간을 포착해 형상화한 작업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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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희재

허희재 개인전
가나아트스페이스 4.20~25

꽃을 통해 존재 자체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는 작가의 개인전. 작가는 꽃은 그 자체로 번식과 생존을 위해 존재하지만 관조자에게 스스로의 감각에 의한 느낌과 상상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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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중김강

이희중 개인전
인사갤러리 4.23~5.15

용인대 회화과 교수로 재직 중인 작가의 37번째 개인전. 작가의 기하하적 추상작업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구상성에 바탕을 둔 심상과 우주를 명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근작에는 우리 산수화와 문양이 상징성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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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옥

박인옥 개인전
서초 아트-원갤러리 4.3~5.1

작가의 12번째 개인전. 작가는 세월호 참사,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우리 시대의 아픔에 대한 위로와 동시에 산과 들, 푸른 하늘과 구름 등 자연에서 만나는 대상을 표현해 희망과 소망을 담은 작품도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