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캐슬린 김의 예술법 세상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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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의 자유 없는 예술의 자유는 허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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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런던의 어느 법정. 원고는 예술가, 피고는 예술평론가였다. 피고는 다름 아닌 당대 최고의 예술평론가로 인정받던 존 러스킨(John Ruskin)이었고, 사건을 법정까지 끌고 온 원고는 예술가 제임스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였다. 다툼의 대상은 휘슬러에 대한 러스킨의 평론이었다. 먼 훗날 《가디언》의 예술칼럼니스트인 조너선 존스는 이 사건을 에드워드 마네 등장과 함께 근대예술사의 양대 사건이라고 평가하게 된다.

러스킨은 처음부터 휘슬러의 작품들이 못마땅했다. 애초에 두 사람은 정치와 예술에 관해 완전히 상반된 견해를 갖고 있었다. 러스킨은 사회주의자였고, 휘슬러는 예술은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러스킨을 가장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은, 휘슬러가 자신이 《근대화가론》이란 책을 출판하면서까지 찬사를 보낸 윌리엄 터너의 주제와 스타일을 차용해 런던 템스 강변의 산업화된 도시 풍경을 아름답게 묘사했다는 데 있었다. 산업화의 이면과 도시의 환경오염을 도덕적 타락으로 바라보던 러스킨의 눈에 휘슬러의 작품들은 너무나 자본주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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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휘슬러 〈검정색과 금색의 야상곡: 떨어지는 불꽃〉캔버스에 유채 60.2×46.7cm 1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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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킨은 1877년 어느 날 주류 아카데미 예술계에 대한 대안적 공간으로 런던 화랑가에 새로 문을 연 그로스버너 갤러리를 방문했다. 갤러리는 라파엘 전파나 번 존스처럼 진보적 성향의 비주류 예술가들을 소개했다. 러스킨의 눈에 불편한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휘슬러의 〈검정색과 금색의 야상곡: 떨어지는 불꽃(Nocturne in Black and Gold: the Falling Rocket)〉(1875)이었다. 이 작품은 런던의 공원을 배경으로 한 6점의 회화 연작 중 하나로, 불꽃놀이 장면을 묘사한 것이었다. ‘안 그래도 못마땅한 예술가인데 이렇게 형체도 불분명한 추상화라니.’ 러스킨의 눈에 휘슬러의 작품은 캔버스를 다 채우지 못할 만큼 얇게 칠한 얄팍한 붓질과 물감이 덕지덕지 얼룩진 무성의한 장난처럼 보였다. “애정과 스킬이 함께 할 때 대작이 나온다”고 믿어온 러스킨의 관점에서 이 작품에는 어떠한 애정도 스킬도 없었던 것이다. 러스킨은 불편한 마음을 그저 담아둘 수만은 없었다. 자신이 발행하는 팸플릿 형태의 논평집 《포스 클라비제라(Fors Clavigera)》에 혹평을 쏟아냈다.논란이 된 문장은 이렇다.

“구매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휘슬러를 위해서라도 쿠트 린지 경(그로스버너 갤러리 설립자)은 저 못 배운 예술가의 교만한, 계획적 사기에 가까운 것을 갤러리에 전시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지금까지 런던내기들의 뻔뻔스러움을 수도 없이 보고 들었지만 대중의 얼굴에 물감통을 집어 던지며 200파운드를 요구할 자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휘슬러는 격분했다. 예술가로서 명예를 침해했고 자신에 대한 사회적 평판도 해쳤다며 1000파운드에 달하는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런던 예술계 인사들이 차례로 증언대에 섰다. 언론은 예술의 의미와 가치에 대하여 토론을 벌였다. 휘슬러의 작품은 당시만 해도 널리 받아들여지던 예술은 도덕적이거나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기존 관념에서 벗어난 파격이었다. 심지어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배심원 심리 과정에서 판사는 “러스킨의 비평이 공정하고 선의에 의한 것”인지부터 평의하라고 요청했다. 최종적으로 배심원단은 휘슬러의 손을 들어주었다. 판사는 이를 받아 러스킨에게 손해배상을 명했다.

사건의 법적 쟁점은 러스킨의 평론이 평론가들에게 주어지는 명예훼손 및 비방죄 등에 대한 한정적 면책사유인 ‘공정 논평’에 해당하는지 여부였다. 특히 판사나 배심원들이 문제 삼은 쟁점은 “계획적인 사기”라는 표현이었다. 배심원들은 해당 표현이 “거짓 중상에 해당하며 휘슬러의 인격에 대한 비난에 불과할 뿐, 예술가 또는 그의 작품에 대한 의견의 표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예술가의 작품에 대한 비판과 예술가의 인격에 대한 인신공격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소송에서 이긴 휘슬러가 승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둘 다 패자였다. 판사가 인정한 손해배상 액수는 그저 상징적인 동전 한 닢에 불과했다. 소송비용은 각자 부담하도록 했다. 휘슬러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혹평으로 자신을 비판한 러스킨을 상대로 법정에서는 승소했지만 현실에서는 파산했다. 러스킨 역시 비평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는 평론이 무슨 소용이 있냐며 교수로 재직 중이던 옥스퍼드 대학을 떠났다.

예술가는 작품을 공표하는 순간 평가의 무대에 오른다. 예술가를 준(準)공인으로 보는 이유다. 예술품을 창작하고 전시하고 공개한다는 것은 평가를 자처하는 일이다. 예술평론가는 물론이고 언론, 전시 관람객이나 대중도 작품을 평가한다. 찬사도 따르지만 때론 가혹할 정도의 혹평도 가해진다. 평론은 결코 예술가가 기대한 방향으로만 나오지는 않는다. 때론 평가는 예술적 평판을 넘어 예술가의 재산적 가치에 대한 감소 혹은 침해로 이어지기도 한다.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가를 자신에 대한 평판으로 받아들이기에 고통스럽다. 자칫 ‘러스킨 대 휘슬러’사건처럼 종종 말과 글을 통한 논쟁이 격화되어 법정 다툼으로까지 비화되는 경우도 있다.

예술창작의 자유, 예술표현의 자유, 예술비평의 자유는 모두 표현의 자유의 일부이자 시민의 기본권이다. 평론 혹은 비평은 필연적으로 예술가에 대한 상처일 수 있다. 그렇다고 예술평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순간 예술창작의 자유 또한 자연스레 위축될 수밖에 없다. 창작은 상처 속에 강해지는 법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평론가들이 명예훼손죄 등 법적 공포로부터 해방되어 공정하고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지가 예술법계의 과제였다. 이렇게 생성된 법리가 ‘공정 논평의 법리’다. 공정한 비평에 대해서는 명예훼손죄 등으로부터 면책해주자는 것이다.

영미 판례법을 통해 형성된 예술가의 명예훼손죄 주장에 대한 평론가의 항변으로서 공정 논평의 특권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건이 요청된다. 첫째, 공표한 것이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선의의 논평이어야 하며, 사람이 아니라 그의 행위, 즉 예술 활동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논평이란 사실을 적시하고 그 사실에 기초한 의견의 표명으로서 비평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둘째, 독자가 사실 관계를 바탕으로 논평 배경을 이해하고 스스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공정해야 한다. 셋째, 논평에는 공익 또는 공공의 목적이 있어야 한다. 넷째, 무엇보다 해당 논평의 전제가 되는 사실과 관련하여 미필적 고의로 진실을 묵살해서는 아니 되며 논평에 ‘실질적 악의’가 없어야 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유사한 법리가 존재할까. 대법원은 “의견 또는 논평을 표명함으로써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경우에는 그 행위가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항에 관계되고, 그 목적이 공익을 도모하기 위한 것일 때에는 그와 같은 의견 또는 논평의 전제가 되는 사실이,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 진실이라는 증명이 있거나, 그 전제가 되는 사실이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 진실이라는 증명이 없더라도 표현행위를 한 사람이 그 전제가 되는 사실이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위법성이 없다”(대법원 1999.2.9 선고98다31356)고 판시한다.

비평 없이 예술 없다. 평론 없는 예술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예술작품이 공적 토론의 장에 공개되는 이상 작품을 평가하고 감상하는 것은 시민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예술 향유권이요, 표현의 자유다. 그래서 예술에 대해 비평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것은 예술창작 및 예술표현과 동전의 양면 관계다. 예술평론가들은 작품이나 퍼포먼스를 분석하고 평가하고 때로는 견디기 힘들 정도의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기도 한다.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평론은 ‘건전한 비판을 넘어선 고의로 작가 자신이나 그의 작품을 비방하거나 사실이 아닌 내용을 적시해 작품의 가치를 훼손하고 예술적 가치나 경제적 가치에 손해를 입히는 경우’다. 앞선 러스킨의 사례처럼 작품 자체에 대한 비평이라기보다 작가의 인격 자체를 공격하는 경우다. 개인의 성품이나 도덕성에 대한 비판은 인신공격에 해당할 뿐 예술적 논평이 아니다.

영미법계에서 명예훼손으로 형사 처벌받는 일은 거의 없다. 이미 사문화된 법이다. 설사 법적 공방으로 이어지더라도 돈을 놓고 싸우는 민사소송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특별하다. 민사소송이 아닌 형사소송으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일단 명예훼손죄나 모욕죄로 고소장부터 제출하는 것이 우리의 법 현실이다. 민사소송보다 형사소송이 고통스럽다는 것은 당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우리 형법에는 심지어 ‘사자(死者)명예훼손죄’라는 특별한 범죄도 규정되어 있다. 고인의 명예를 보호한다는 일종의 유가적 전통에서 규정된 법이다. 사자 명예훼손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사자의 명예를 훼손’해야 한다. ‘허위의 사실’은 죽은 사람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2016년 4월 고(故) 천경자 화백의 유족이 “미인도가 가짜임에도 진품이라고 주장한다”며 전 · 현직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들을 형사 고소·고발했다. 검찰은 한 평론가를 사자 명예훼손죄로 약식 기소했다. 처음부터 징역형이 아닌 벌금형을 요구한 것이다. 참을 수 없었던 평론가는 정식재판을 요청해 스스로 법정에 섰다. 2017년 11월 3일 1심 법원은 사자 명예훼손에 대한 고의성과 위법성이 없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무죄의 이유로 “피고인(평론가)이 언론 기고문에 쓴 내용의 전체적인 취지는 미인도가 진품이라는 것”이고, 피고인으로서는 이를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타당한 사정이 있었으며” 기고문 내용도 “미술 평론으로서 합리성과 논리성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법원은 예술평론과 관련하여 “미술품은 완성된 이후엔 이미 작가와는 별개의 작품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작가에 대한 사회적 평가와 별개로 해당 작품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별도로 이뤄지므로 이를 작가의 인격체와 동일하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비록 피고인의 기고문이 “객관적 사실과 반한다고 하더라도, 미인도에 대한 사회적, 역사적 평가가 달라질 여지가 있”을 뿐 미술품 진위 논란이 곧바로 “망인의 사회적 평가 내지는 역사적 평가에 부적적인 영향이 발생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예술평론의 자유가 무제한의 자유일 수는 없다. 하지만 평론에 뒤따르는 형사처벌에 대한 공포가 예술평론의 자유를 얼마나 위축시킬지에 대해서는 함께 고민해야 한다. 예술가의 창작의 자유, 작품을 대중에게 공개할 자유 못지않게 작품에 대해 토론하고 비판하는 일은 작가와 작품의 예술세계를 가다듬고 더 높은 예술적 성취로 이끌어내는 ‘악마의 변호’다. 예술비평가들은 악의적 비방과 선의의 비평 사이의 차이를 고뇌해야 한다. 말과 글이 주는 상처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그렇다고 예술가들이 비평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평론의 자유 없는 예술의 자유는 허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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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캐슬린 김 | 미국 뉴욕주 변호사, 홍익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