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HAN SEOKKYUNG
분단과 잃어버린 장소에 대한 기억을 주제로 한 기획전에는 거의 언제나 한석경의 이름이 있다.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던 외할아버지가 그에게 사적 물건만이 아니라 분단과 실향이라는, 시대와 민족을 가로지르는 작업에 대한 사명을 남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의 설치는 여러 면에서 점차 팽창하고 있다. 서울 화곡동 출신 작가는 10년 거주를 계획하고 최근 강원도 고성의 한 마을로 이주했다. 38선 이북의 이곳은 6 · 25전쟁 격전지로, 아직도 텃밭에서는 탄피가 나온다. 철조망이 걷힌 이 마을에서 작가는 새로운 대지와 역사의 뼈를 발굴할 테다. 그리고 그 유물들은 다시금 물려받은 가구 위에 마련된 작은 신당에 보관될 것이다.
전리해, 한석경 2인전 《안녕, 인공존재!》(공 - 원, 2022.12.14~1.4) 전시 전경. 〈대지의 뼈〉 수집물, 고가구, HD비디오 3분 7초 37×120×47cm 2022 (사진 박홍순)
한석경은 1982년 태어났다. 동덕여대에서 회화를, 홍익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현재를 지탱하고 있는 개인, 물건, 장소, 역사를 꿰어 공간 설치를 꾸려나가는 작업을 주로 하는 그는 《시간채집: 잃고 잊고 있고》(보안여관, 2011)를 시작으로 《유사한 사유》(오픈스페이스 배, 2013), 《시언: 시대의 언어》(DMZ 예술구락부 통/화곡통 컨테이너, 2019), 《사사(私事)》(아트포럼리, 2020) 등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낯선 전쟁》(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0), 《흰 밤 검은 낮》(경기도미술관, 2020), 《2021 DMZ 아트&피스 플랫폼》(고성 제진역) 등 150여 회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2014년 미얀마 양곤의 New Zero Space, 2017년 서울 평화문화진지, 캔 파운데이션과 독일 베를린의 ZK/U, 2020년 제주 예술곶 산양 등의 레지던시를 거쳐, 현재 고양의 신평예술창작공간 새들과 강원 고성을 오가며 작업 중이다.
한 장의 무덤
김유빈 | 신평예술창작공간 새들 학예연구사
머문 레지던시와 참여한 전시만 얼핏 훑어도 알 수 있듯, 한석경은 분명히 분단과 접경지를 이야기하는 작가다. 그래서인지 미술계 내외로 6·25전쟁 관련 전시나 콘퍼런스 등의 행사에 자주 초대받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거국적 담론 너머는 작가가 발전시켜온 사적이고 섬세한 언어가 탄탄히 뒷받침한다. 이 글에서는 그 가려진 부분에 좀 더 주목하고자 한다.
어떤 장소와 사물을 다루는가? 2008년부터 한석경은 특정 장소와 관련된 수집물을 작업 전면에 내세운다. 여기서 장소는 작가가 물리적으로 시간을 보낸 공간과 그 주변이며, 그곳에서 작가에 의해 선택된 물질들이 작업으로 발전했다. 주로 역사적 서사가 깃든 공간과 버려지고 남은 물건 중 사연이 있는 것이 선택의 기준이었다. 모뉴먼트로 남은 역사적 상징물과는 달리 시간 속으로 사라진 희생자와 가해자의 한이 서린 공간, 주류 역사에서 배제된 소수자의 감정이 서린 물건, 그리고 공적으로 등록되지 못한 채로 남은 사소한 기록처럼 미약하지만 분명히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들을 일부러 찾고 조명한다. 그러나 작가가 같은 사건이라도 체화하는 기억이 다르다는 인식을 마주하면서부터 작업에서 달라진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언: 시대의 언어》(2019) 화곡동 컨테이너 전시 전경과 상세 이미지
젖어든 시간, 멀리서 응고하기
먼저, 직접 선택하지 않은 장소와 사물로 이야기 폭을 넓혔다. 실향민 3세대로서의 정체성 인식이 그 분기점이 되었다. 〈진지하다〉(2018)와 〈시언: 시대의 언어(이하 시언)〉(2019) 두 작업 모두 작가 자신이 앞세대와는 다른 온도로 전쟁과 분단을 감각하는 것을 다룬다. 한석경은 서로 다른 세대의 사유체계와 감각이 역사에 능동적으로 작동하는 힘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특히 2019년 개인전에 이어 《낯선 전쟁》(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020), 《DMZ, Art&Peace Platform》(제진역, 2021)에서 차례로 보인 〈시언〉은 실향민이었던 작가의 외조부가 한평생 고향을 그리며 당신의 공간에 모아 보관한 북한 관련 물건을 전시장에 재현한 작업이다. 자신의 것이 아닌 외할아버지의 것, 즉 해당 역사의 당사자가 직접 수집한 물건과 그것을 담은 공간을 한석경이 다음 겹의 시간으로 희석하여 옮긴 모양으로 전시되었다. 이러한 거리두기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발견된 창고에 작가가 발을 들인 순간, 북한 관련 수집품 덩이 속에서 자신이 느낀 기묘함마저 예술로 떠내고자 실천한 방식이었다. 아마 순식간에 과거로 빨려 들어간 듯한 시공간적 이질감과 평생 이곳을 혼자만의 비밀에 부친 외조부를 향한 애증 섞인 배신감을 느꼈을 터다. 이러한 타자성의 성찰을 필두로 작가는 가지 못한(하는) 장소와 겪지 못한(하는) 사건에 접근하고, 이를 자신만의 언어로 다시 꺼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최근 경기도 연천에서는 연고도 없는 수복민 여성과 3주간 동고동락하며 그의 삶을 기록한 영상, 〈점점 느리게〉(2022)를 남겼다.
다음으로, 장소와 사물을 점점 압축한다. 2톤 분량의 외할아버지 수집품을 옮겨온 〈시언〉을 통해 전이된 감각 층위를 넓고 자유롭게 훑었다면, 이듬해 경기도미술관 《흰 밤, 검은 낮》에서 발표한 〈늦은 고백〉은 수집품 가짓수를 대폭 줄여 뾰족하게 감상하는 작업이었다. 관객이 한 대상을 밀도 있게 감상하게끔, 할아버지의 책상 앞에 앉아서 하나씩 들추게 하거나 액자 프레임 속으로 집중하도록 벽에 걸어 두었다. 작업이 작업인지라 국내 모든 비무장지대 주변을 ‘도장 깨기’하듯 떠돌던 한석경은 급기야 2022년에 들어 강원도 고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더구나 지금의 작업실은 고양시 ‘DMZ 평화의 길’의 군 막사 중 하나를 개조한 레지던시, ‘신평예술창작공간 새들’이다. 서쪽 한강하구와 동해안 최북단의 철책선을 양 끝점 삼아 경계의 언저리를 가로로 횡단하는 (여전히) 유목민적인 삶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한석경의 최근 전시에서는 동해를 사이에 두고 남북한 사이에서 유영하는 물체들, 가령 고성 해변에서 발견된 수십 년 된 북한 샴푸통이나 철조망 철거 잔해 따위가 사려 깊게 진열된 장면을 볼 수 있다. 바다와 강을 타고 흘러가는 분단의 시간이 압축된 이러한 물체는 마치 화석처럼 다층의 시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같은 맥락에서 최근의 영상들은 점차 시(詩)의 언어를 공유한다. 최근 공-원의 《안녕, 인공존재!》 전시에는 ‘동해안 군 경계철책 철거사업’이 내포하는 정치적 움직임을 은유적으로 담은 바닷가 영상 〈명파〉(2022), 그곳에서 수집한 물질을 하나의 서사로 연결 짓는 영상 〈대지의 뼈〉(2022) 등 한석경이 최근에 연구하는 수사 방식이 집약되어 있다.
〈점점 느리게〉 수집물, 고가구, HD비디오 17분 6초 37×70×109cm 2022 《안녕, 인공존재!》 설치 광경
〈기억의 커튼#1〉독일신문, 독일 수집물 79×94cm 2017
“한 사람이 한 세상을 살았고,” 1
“미체험” 2자의 시선으로 역사에서 탈각한 언어들의 잔해를 좇고, 남겨진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이러한 기질은 각종 미디어에 의해 고착된 역사의 재현과는 다르다. 한석경이 역사적 키워드를 끊임없이 작업에 연결 짓는 움직임은 남은(을) 사람들이 어떻게 그것과 관계 맺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지는 퍼포먼스에 가깝다. 그는 통독 이전의 베를린에 살았던 어릴 적 짧은 기억과 실향민의 후손으로서 남한의 삶을 동시에 더듬어 겨우 역사와의 연결고리를 발견하고, 이를 구태여 세상에 반복적으로 표현한다. 그 이유는 본인이 납득할 만한 언어로, 신체로 느낀 감각 그 자체로 정직하게 그것을 옮기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즉, 한석경은 이미 우리 주변에 상투적, 인위적으로 굳은 경계의 뜻을 접어두고, 세대를 거듭하며 몸을 통해 체화(embodied)한 경계를 물질로 체화(materialize)시키는 번역을 성실히 해내려는 작가다. 그래서 북방한계선(NLL)이라는 물리적 경계로 나뉜 양극이 어쩔 수 없이 합류하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하듯, 무엇이 되지 못하고 사그라지는 수많은 선을 뭉쳐 점으로 만들고 다시 잇는 작업을 한다. 마치 진행 중인 분단에 의도적으로 흠집을 남기는 것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는 만큼의 정동을 이어 가는 것이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니 베를린 레지던시 ZK/U에서 보인 〈기억의 커튼〉(2017)이 이러한 수고로움의 단초였다. 읽고 나서 버려진 옛 독일 신문을 베를린 곳곳에서 모아 실처럼 낱낱이 자르고, 이를 다시 직접 만든 베틀로 몇 달에 걸쳐 엮은 커튼이다. 집 속의 외딴섬처럼 북한의 시간에 멈춘 외할아버지의 방을 서울의 전시장에서 다시 흐르게 한 것처럼, 베를린에서는 저마다의 사건 사고를 빼곡히 품은 신문의 단어 뭉치를 헤쳐 스튜디오 안의 커튼이라는 생경한 물질로 치환했다.
한석경은 이렇게 매일 어딘가를 걷고, 무언가를 모으고, 기록하는 습관에서 나아가 창작에서마저 강박적일 정도로 성실함을 증명한다. 역사 틈에 나 있는 언어의 공백을 채우려면 실존하는 것들로 계속해서 움직여 놓아야 하니 도무지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차마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주변의 모든 것을 틔워 주려는 듯한 그의 바쁜 움직임은 개개인의 “사사로운” 기억을 어떻게든 공적으로 기워내 수면에서 의미를 부여해주려는 듯이 처연하다. 외할아버지가 남긴 것을 “시대의 언어”라고 정의한 작가의 명쾌함에 용기를 얻어 한석경의 움직임 또한 지금의 시대적 언어라고 말하고 싶다. 휴전선 라인을 수평으로 오가는 작가의 요즘 몸짓은 세대를 수직으로 가로지르던 이전보다 과감해졌지만, 모으고 드러내는 것은 역설적으로 더 작고 연약해졌다. 그는 쉽게 생각하고 쉽게 말로 뱉어 아무렇지 않게 되는 것들로 가득한 삶의 공백을 비집고 들어가 세심하게 그 주변을 그러모은다. 그렇게 모은 것들로 자신의 자취 더미를 남기고는, 또 떠난다. 그 더미들이 두껍고 높아질수록 무엇으로 남을지 마치 알고 있는 듯이. 자신의 고통을 태워 다른 존재를 정성껏 장사(葬事) 지내주듯이. 가장 근래의 작품 〈대지의 뼈〉에서 한석경은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나요?”라는 물음에 “흙무덤”이라고 대답했다.
- 한석경 「작가노트」 『사사((私事)』 전시 팸플릿(대안공간 아트포럼리, 2020)
- “(아직) 끝나지 않은 분단 상황”을 은연중에 내포하는 의미로, 분단 문학에서 한국전쟁의 비당사자를 일컫는 데 기술되곤 한다. 배주연 「포스트메모리와 5.18 –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을 중심으로 -」 『서강인문논총』 57집 2020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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