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만한 삶을 위해
ART BOOKS
황수진 기자
살 만한 삶을 위해
자본주의적 세계 질서, 차별과 폭력의 역사는 시대를 거듭하며 정교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잠식하고 있다. 전 지구적 위기의 현실에서 우리는 서로 얽혀 있는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즉 ‘상호 엮임’과 ‘상호 의존’이 필연적임을 실감하고 있다. 인간은 물론 기계, 동물, 비인간 존재들까지 서로의 생존과 번영에 영향을 미치는 공생 관계임을 인식해야 할 때다. 이러한 세계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 만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꿈꾸며, 주디스 버틀러의 표현을 빌려 ‘심호흡’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세계가 우리에게 도래하기를 열망한다. 이를 위해 공생의 의미를 되새기고, 지속 가능한 관계 맺기를 사유하도록 이끄는 네 권의 책을 소개한다.

사이보그가 되다
김초엽, 김원영 지음
367쪽 · 2021 사계절 · 17800원
공생을 이야기할 때 자연이나 생태계를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인간의 존재 조건에서 기술문명을 떼어놓을 수는 없다. 김초엽과 김원영은 장애인을 위한 기술이 시혜와 동정의 시선으로 설계되며, ‘따뜻한 테크놀로지’라는 이름 아래 결여를 보완하는 데만 초점이 맞춰지는 현실을 과감히 뒤집는다. 두 저자는 장애인을 결여된 존재가 아닌, 기술과 결합해 확장된 존재로 새롭게 정의한다. 사이보그로 살아온 그들의 삶은 기술과의 결합이 매끄럽지만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경험 속에서 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재구성하고, 함께 살아갈 미래를 구상한다.
김초엽은 ‘크립 테크노사이언스’라는 개념을 통해 장애를 가능성과 다양성의 자원으로 바라본다. 장애인은 기술을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존재에서 벗어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을 제작하고 설계하는 지식 생산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과정은 장애를 넘어 의존성과 취약함을 지닌 모든 사람에게도 유용한 지식과 기술로 확장될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김원영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존재를 ‘청테이프’에 비유한다. 결핍을 없애려는 완전함의 신화 대신 서로 연결되고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를 상상한다. 그는 취약성과 의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것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이 책은 장애를 고유한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며, 장애를 규정짓는 사회적 구조에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더 나아가 장애 중심적 기술과학이 정상성의 규범에서 벗어난 이들에게 포용적 세계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
최유미 지음
303쪽 · 2020 도서출판b · 22000원
최유미는 도나 해러웨이의 사상을 ‘공-산’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낸다. 해러웨이는 페미니즘, 과학기술학, 생태학을 넘나들며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기술의 이분법적 구분을 해체하고 새로운 관계 맺음을 주장한 사상가다. 이 책은 『사이보그 선언』에서 『트러블과 함께하기』까지 해러웨이의 주요 저서를 따라가며 상호의존적 관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이를 오늘날 한국 사회의 문제들과 연결해 다시 조명한다.
‘공-산’은 그리스어 ‘심포이에시스(sympoiesis)’의 번역어로 ‘함께 만들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저자는 ‘공-산’을 통해 모든 존재는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고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의존적 관계 속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생태 위기와 기후변화라는 절박한 현실에서 파괴된 관계망을 회복하고 새로운 생존 가능성을 모색하는 실천적 사유로 이어진다.
해러웨이는 이러한 상호의존성을 실천하기 위해 ‘촉수적 사유’를 제안한다. 촉수적 사유란 우리가 맺는 관계를 감각적으로 선택하고 연결하며, 기존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는 힘을 의미한다. 또한 그녀는 ‘실뜨기’라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서로의 일부가 되는 상호적 과정을 그려낸다. 이는 단순한 협력을 넘어, 이질적인 존재들이 만나 예측할 수 없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반려종 선언』에서는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성을 주목한다. 개와 인간의 관계처럼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을 넘어서 서로 의존하며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에서도 그러했듯 기존 권력관계를 해체하고, 경계 밖의 모든 타자와 함께 살기 위한 단초를 제공한다. 결국 이 책은 해러웨이의 사상을 따라 오늘날의 위기 속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로 응답해야 하는지 묻는다. 완벽하지 않아도 문제를 직면하고 행동에 나서는 것, 창의적이고 감응적인 관계를 통해 ‘두꺼운 현재’를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상호의존적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역할임을 상기시킨다.

떠오르는 숨: 해양 포유류의 흑인 페미니즘 수업
알렉시스 폴린 검스 지음 · 김보영 옮김
239쪽 · 2024 접촉면 · 17000원
이 책은 미국의 흑인 퀴어 페미니스트인 저자가 해양 포유류로부터 지구상 모든 종이 생존하는 지혜를 구하는 책이다. 이 책의 원제는 ‘Undrowned(익사하지 않는)’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은 ‘익사를 예방하기 위한’ 안내서다. 기후 위기로 인한 해면 상승, 자본주의 질서, 온갖 차별 속에서 숨을 쉬는 법을 찾기 위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유색인종 여성인 저자는 자신의 정체성과 해양 포유류의 경험이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 실감한다. 노예무역 시기에 생명을 잃은 흑인 선조들, 고래잡이의 잔혹함 속에서 학살당한 고래들, 이들의 역사는 차별과 폭력으로 얼룩져 존중받지 못한 존재들의 서사를 담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차별과 혐오에 익사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해양 포유류와 흑인들의 삶에서 공동 운명체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발견하고자 한다.
이 안내서 같은 책에서 저자는 협력하기, 맹렬해지기, 항복하기, 깊이 들어가기, 속도 늦추기 등 호흡법을 연습하기 위한 해양 포유류들의 구체적인 지혜를 소개한다. 예를 들어 줄박이돌고래는 25~27마리의 무리를 이루어 세대 간, 세대 내 학습과 보살핌을 통해 생존을 위한 조직적 구조를 형성한다. 한국 사회가 노령화와 1인 가구의 증가로 고립과 소외의 문제가 심화되는 시점에서 돌고래 무리가 보여주는 돌봄의 순환과 협력의 형태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제도화된 가족을 넘어선 친밀성과 협력의 모델은 우리 사회가 새로운 삶의 형태를 상상하고 실천해야 함을 일깨운다.
우리도 해양 포유류의 견습생으로서 이 안내서를 따라 첫 숨을 틔우기를 바라며, 저자는 이를 변화하는 세계에서 서로를 찾기 위한 진화적 실천으로 여긴다. 돌고래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바다의 흐름을 받아들이며 여러 세대에 걸쳐 등지느러미를 진화시켰듯이, 저자는 우리에게도 그러한 지혜를 통해 지속 가능한 협력과 사랑을 실천할 것을 주문한다. 마치 돌고래들이 수면 위로 올라가 첫 숨을 내뱉으며 생명을 이어가듯, 저자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첫 숨을 내쉴 것을 권한다. 이는 단순히 생존의 문제를 넘어, 서로를 배우고 돌보며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가자는 혁명적인 초대이다.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주디스 버틀러 지음 · 김응산 옮김
218쪽 · 2023 창비 · 16800원
주디스 버틀러는 미국 철학자이자 젠더 및 퀴어 이론가로, 팬데믹이라는 면역학적 위기를 개인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이 위기를 집단적 기억과 경험으로 받아들이며, 인간 행동의 조건과 한계를 드러내고 이를 재배치하는 계기로 삼는다. 책 제목인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는 이러한 유례없는 시기를 관통하며, 버틀러가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누군가는 왜 더 큰 위험에 처해야만 하는가?”, “누군가의 죽음은 왜 충분히 애도받지 못하는가?” 팬데믹은 우리가 공동의 세계라 믿었던, 그러나 아직 도래하지 않은 세계의 균열과 모순을 드러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결국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다다르게 된다. “무엇이 삶을 살 만하게 만드는가?” “무엇이 거주 가능한 세계를 구성하는가?” 이 책은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이다.
버틀러는 그 단서를 막스 셀러와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사유에서 찾는다. 셀러가 말하는 ‘비극적인 것’은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세계에 스며들어 지속적인 ‘기운’으로 존재한다. 이는 슬픔이나 상실을 넘어, 세계 자체가 그러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장소임을 드러내며 당혹감을 동반한다.
팬데믹은 호흡과 접촉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가치이자 상호작용을 제한하며 비극적인 감각을 강렬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위기는 가족의 경계를 넘어 돌봄의 공동체를 실험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다. 실존적 차원에서 “더 이상 이렇게 살아갈 수 없다”는결단에 도달할 때, 버틀러는 비로소 철학적이고도 사회적인 긴급한 질문 앞에 설 수 있다고 말한다.
버틀러는 이 위기를 통해 우리의 신체와 삶을 새롭게 해석한다. 신체는 독립적이고 경계가 명확한 개체가 아니라 외부와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는 ‘침투 가능한’ 존재이다. 공기, 타자, 세계와 깊이 얽혀 있는 신체는 우리가 상호의존적 존재임을 자각하게 한다. “무엇이 우리를 살 만하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공유하는 조건들 속에서 발견된다. 내가 살아야 타자의 안녕을 도모할 수 있고, 이는 더 이상 다른 생명체를 분리하여 사고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공기 중 바이러스와 같은 경험은 우리의 신체적 경계를 재정의하고, 비극적인 것에 대한 궁극적 감각을 심화시켰다. 팬데믹이 가져온 세계의 이해와 감각은 우리가 살 만한 삶을 위해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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