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윤색하는 기술

윤일권  Ilkwon Yoon

Up-and-Coming Artists

사진 : 박홍순

1990년 출생. 홍익대 판화과 및 영국 왕립예술대학 판화 전공 졸업. 현 홍익대 판화과 초빙교수. 개인전 《A Grasp at the Air》(2024, 별관), 《사라짐을 기억하는 방법》(2024, 시청각 랩) 등 개최, 단체전 《OCTO-》(2024, 페이지룸8), 《Climate》 (2020, Research House of Asian Art, 시카고) 등 참여. 2019 Artsdepot 주최 공모전 대상, 2018~2019 영국 국제 원판 공모전 최종후보 선정, 2018 Solo Award 공모전 대상 등 다수 수상


기억을 윤색하는 기술
강재영 기자

현대사회에서 예술작품은 신화적 지위를 갖기도 하지만 때로는 일상적이기도 하다. 빠르게 변화하는 하루하루에 방향과 속도를 맞추어 살아가야 하는 도시 속 현대인에게, 예술은 휴게소일 때도 있다. 판화의 기술적 요소로 현대인의 기억과 망각을 다루는 윤일권의 작업은 그런 의미에서의 예술에 가깝다. 최근 별관과 IBK 본관 로비에서 잇따라 개인전을 연 작가는 판화의 이미지 제작 과정을 도해하고, 이를 아크릴, 두루마리 휴지, 티슈 등의 물성과 결합해 기억과 도시의 관계를 엮어낸다. 곧 사라질 것들에 흑백으로 찍혀나온 초등학교 졸업앨범 속 동창생의 얼굴, 여러 겹으로 쌓인 일련의 기억-이미지로 만들어진 정육면체 등은 관람객의 기억 속 유년의 편린을 자극하고 공명케 하여 방향도 모른 채 달려가는 삶의 속도를 잠시 멈추도록 한다.

2018년 영국 솔로 어워드 수상을 안긴〈Memory〉는 흔히 갑티슈라고 부르는, 종이 뭉치의 단면에 초등학교 앨범에 등장하는 동창의 얼굴을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하고 이를 쌓아 올린 작업이다. 얼굴이 온전히 찍힌 뭉치가 있는가 하면, 중간중간엔 뭉쳐진 종이가 겹겹이 끼워져 있다. 작가에 따르면 이 뭉쳐진 종이는 기억에 없는 이가 인쇄된 티슈를 실제로 사용하고, 이를 갈아 만든 것이다. 질량과 무게를 상상하기 어려운 추상적 상태로서 기억은, 윤일권의 작업 속에서 분명한 형태와 무게를 지닌 것으로 관객에게 제시된다.

IBK 기업은행 본관 로비에서 열린 개인전《도시 속 시선》에서, 작가는 〈Memory〉를 포함한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거대한 직육면체로 이루어진〈Huge Mass: Ways of Remembering〉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그가 만들어 온 아크릴 정육면체가 증폭된 듯하면서도, IBK
로비의 보이드(Void)를 축소시킨 것 같은 착시를 일으키는 이 구조물은 네 면에 각각 자신의 대표적 작업을 전시하거나, 그 비율을 증폭시킨 것이다. 작가는 사라지는 주변의 것을 기억하는 방법으로서 판화를 소환해냈다. 눈길을 끈 작품은 〈사라짐을 기억하는 방법-버스정류장〉(2024)이다. 작가는 많은 사람들의 삶의 흔적과 역사를 담고 있고, 자신의 기억 일부이기도 한 버스정류장을 정사각형의 여러 기억-이미지 조각의 콜라주이자 모자이크로 구성하여 실제 크기로 재현했다. 중첩된 이미지들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비틀어지고 흔들린 채로 어딘가 존재하는 각각의 기억의 조각을 암시하는 듯했다.

〈Memory〉(부분)
냅킨 위에 실크스크린 120×180cm 2024

별관에서 열린 개인전 《A Grasp at the Air》에서는 더욱 적극적인 공간 연출을 통해 기억을 감각하게 했다. 별관 바닥 일부를 가득 메운 〈Foot-Print〉(2024 )는 관객의 발자국에 의해 점차 더러워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로운 형태로 변모한다. 관객의 참여를 통해 작품이 변형되는 과정에서 추억의 편린인 타일 속 이미지는 더욱 도드라지게 된다. 작가는 이렇게 음각된 선 안에 채워진 먼지도 일종의 ‘잉킹(Inking)’이라고 말했다. 작가는 관객의 잉킹을 통해 타일에 담긴 기억 이미지와 현재의 시차를 가시화하고, 이를 거대한 판으로 유비하여 판화 개념을 계속해서 확장해 나가고 있다.

스마트폰 시대에 카메라로 이미지를 만들고 전송하고 유통하는 일은 인류 역사상 가장 쉬워졌다. 기억과 기록이 가장 간편해진 시대, 이미지 대량 생산술로서 판화는 그 자리를 잃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윤일권의 작업은 판화가 여전히 독창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레이어와 잉킹 과정을 통해 판화라는 매체를 시간과 공간에 유비하며, 공통 기억으로서의 유년 시절을 장소와 사물, 놀이 등의 상징으로 재현해낸다. 윤일권이 만드는 중첩되면서도 분절된 기억 이미지는 특정 사건이나 인물을 지시하기보다는 불특정 다수의 어린 시절을 불현듯 떠올리게 만든다.

〈Huge Mass: Ways of Remembering〉 2024 왼쪽 면에
〈사라짐을 기억하는 방법-버스정류장〉이 보인다
《도시 속 시선》 IBK 본관 로비 전시 전경 2024
사진: 박홍순

〈사라짐을 기억하기 위한 드로잉 모음 육면체〉
조각한 판 위에 잉크 10×10×10cm

2024 제공: 작가

윤일권은 판화를 기반으로 하되, 전통적인 판화의 영역을 넘어선 물성을 만들어낸다. 판화는 잉크와 프레스기를 만나야 가치가 생기지만, 판 그 자체로서도 독립적인 존재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색 판화나 UV인쇄는 네 가지 판을 만들어 자연색을 모두 구현하는데, 각각의 판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종이에 상이 일그러져 인쇄된다. 이를 교정하는 작업이 완성도를 가늠한다. 그러나 윤일권의 중첩된 아크릴 평면은 보는 각도에 따라 면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듯한 착시를 일으킨다. 어느 면에서는 중첩된 판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기법은 아크릴판을 하나의 기억-레이어로 보고 물리적으로 쌓아 올려 시간의 축적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이미지 제작술로서 판화의 제작 과정을 작품의 의미망과 절묘하게 얽어낸 것이다.

그는 기억을 공간으로 이해한다. 앞으로 공간 전체를 자신의 작품으로 채우는 꿈을 꾸고 있다고 밝혔다. 유년 시절의 기억을 담은 이미지들로 구성된 독립적이고 몰입감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에게 기억은 과거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다층적이고 유동적인 것이다. 윤일권은 기억과 잊힌 가치들을 판화의 이미지 제작술을 유비한 다매체적 작업을 통해 재현하는 방식으로 기억하는 법, 기억을 인식하는 감각을 촉진한다. 즉 기억의 다층적인 본질을 떠올리게 하고 그것을 과거에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여 영향을 주고받도록 하는 것이다. 앞으로 윤일권이 만들어낼 공간을 기대하게 하는 이유다.

〈사라짐을 기억하기 위한 드로잉 모음-구령대〉
조각한 판 위에 잉크 40×40cm 2024 제공: 작가

© (주)월간미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