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미공이라는 기념비 사이로 걷기
강재영 기자
Special Feature
6월 1일 《그런 전시》를 끝으로 인미공은 문을 닫았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기념비가 될 공간을 돌아보며 인미공은 왜 우리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 그 자취를 훑고자 한다. 프로그램 단위로 이루어진 여러 유형의 실천을 살피는 가운데, 이들이 어떤 토양에서 가능했는지, 어떠한 평가를 받아왔는지 검토한다. 인미공의 역할에 비추어, 이러한 공공 실험 공간이 정말 시효를 다해 사라져야 하는지, 아니면 여전히 그 필요성이 요구되는지 생각해 본다.
《선택의 조건》 인사미술공간 전시 전경 2006
제공: 인미공
기억 속 인미공이 역사 속으로
인미공에 대한 필자의 첫 기억은 2007년 무심코 열어본 인미공 홈페이지였다. 아직 현대미술이 무언지 막연하던 시기, 상단 메뉴바에 정갈하게 나열된 버튼은 하나하나의 기능과 역할을 구별하기보단 ‘무언가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라 느끼게 했다. 두 번째 기억은 2009년경 인미공이 아르코미술관과 통합되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돌던 때 한 작가가 작성한, 인미공 통폐합을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장문의 호소문을 읽은 일이다. 세 번째 기억은 ‘코디네이터’라는 직함 아래 ‘전시’라는 노동 현장을 겪어내던 시기, 정지현, 이미래, 정시우 등과 같이 인미공에서 열리는 또래 작가, 기획자의 전시 소식을 들으며 동경하던 것이다. 실제로 지원해 본 적도 없으면서 왠지 높아만 보이는 그곳을 올려다보았다. 그 이름은 2010년대를 지나가는 내내 빌딩숲 사이를 부유하는 비닐봉지처럼 머릿속을 떠다녔다.
이처럼 한 개인이 느낀 비선형적인 인상이 동시대 미술인의 기억에 공통적으로, 반복적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인미공이 단순한 전시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공기금으로 운영되는 대안공간이라는 정체성으로 시작한 인미공은, 그 특수한 지위를 권력화하지 않을 방식으로 단순 전시 지원을 넘어선 생산-유통체계로의 확장을 꾀했다. 미술을 둘러싼 제반 구조와 실천, 전시 이전과 이후, 그리고 작품을 매개하는 지식과 담론까지 포괄하고자 한 것이다.1 인미공은 어쩌면 주인공이기보다는 배경이었고 벽이었으며 조명이었다.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인미공은 일종의 둥지 같은 공간이었다.”2라는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인미공에 관여했던 백지숙의 언급은 인미공이 지닌 상징성을 일부 설명한다. 민간 단위의 실천은 항상 제도를 초과하여 작동하지만, 그만큼 안정적인 예산을 통해 실행되는 기관 주도의 실험이 지닌 추진력과 파급력도 다른 방식으로 거대하다. 인미공이 이렇게 기억에 남게 된 계기와 조건을 일별하는 것은 결국 인미공의 ‘실험’과 ‘실천’을 다시 볼 때 가능할 것이다.
이 글은 인미공의 주요 프로젝트를 불연속적으로 선택하여 소개하고 이를 잇는 과정에서 종료되는 인미공의 현재적 의의를 소환하고자 한다. 인미공 20주년 기념 출판물 『인미공 공공이공』과 인미공을 다룬 비평을 그러모아 외연을 살피고, 인터뷰를 통해 개별 프로젝트가 미술계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유기적으로 작동했는지 반추한다. 사례 분석에서 나아가 공공 지원의 창작 지원 공간이 레지던시를 제외하고 문을 닫고 있는 2025년 현재, 인미공의 종료에서 어떤 유산을 이어받을 수 있을지도 제안한다. 정치사회적 역학 변화가 만들어내는 정책의 변화에도 목소리를 내야 할 지점이 분명 존재하지만 이는 다음 과제로 미루어두었음을 먼저 밝힌다.
인미공의 실천들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인미공은 당시 미술관을 포함한 다른 대안공간에서는 실현하기 어려운 프로젝트들을 다층적으로 실천했다. 2008년 어느 날에 멈춰 있는 인미공의 홈페이지나 매년 발행했던 연간지를 살펴보면, 당시 이 공간이 표방했던 기능들은 지금도 인상적이다. 전시, 아카이브, 워크숍, 저널(BOL), 출판, 클립(IASmedia), 공연, 그리고 ‘화두’라는 기획 시리즈까지. 이는 오늘날 동시대 미술이 중요하게 여기는 거의 모든 실천 양식을 포괄하고 있다.
인미공이 전성기를 구가하는 실질적인 변곡점은 2002년이다. 인사동에서 공간을 옮기게 된 후 그 공백기 동안 열린 ‘2002 국제 대안공간 심포지엄-도시의 기억, 공간의 역사’와 《럭키서울》 전시는 당시 미술계의 필요를 반영해 제도적 기반을 구축하려는 시도였다. 해외에서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이 싹트던 시기였지만 외국 큐레이터들이 한국에 왔을 때 정보를 취합할 물리적 공간이 없었고, 민간이 운영하는 대안공간은 네트워킹에 관심은 있었지만 이를 실행할 여유가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인미공은 심포지엄을 계기로 국제 네트워크 형성을 주요 임무로 설정했다. 느슨하지만 수시로 담론과 정책을 동시에 논의하고, 이를 반영한 실험적인 정책을 실현할 수 있는 플랫폼 역할을 해낸 것이다.
인미공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으로 열린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과 부추마라의 합동 공연
‘부추스타쏘세지마라’(2007)
‘아카이브’의 제도적 수용은 인미공이 미술창작과 교류의 플랫폼으로서 기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인미공은 2005년의 주제를 ‘아카이브’로 삼고, ‘오후 다섯 시’와 같은 아카이브 주제 워크숍 프로그램과 전시를 통해 ‘누구를 위한 아카이브인가’라는 질문을 도출했다. 이는 분류와 적재로 이어지는 기록학 관점에서의 아카이브가 아닌 작품 창작의 영감이자 도구로서 살아있는 아카이브를 상상케 했다. 2006년 원서동으로 이전하며 피진 콜렉티브(임민욱, 프레데릭 미숑)와 함께 이러한 아카이브 지향을 담은 자료 목록을 구성하고, 이미경과 협업으로 2층을 아카이브 전용 공간으로 꾸리며 정체성은 더욱 명확해졌다. 인미공은 아카이빙을 단순한 문서 보존이 아니라, 전시의 앞과 뒤를 구성하는 담론의 장치로서 기획했고, 이는 워크숍, 커미션 프로젝트, 저널 출간과 같은 프로그램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각 프로그램은 트랙을 형성하고 상호 교차하며 미술 생태계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윤원화의 언급은 인미공 아카이브가 동시대 미술의 장면을 다변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주지시킨다. 미술이 전시-작품 작가에 몰입하여 개인전 발표를 반복하는 데에서 벗어나 전시의 앞과 뒤, 전시에 결합하는 수많은 사람들, 전시를 구성하는 지식과 정보를 모두 미술의 영역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제도화했다는 것이다.3
아카이브를 구성하고 국제 교류 프로그램를 진행하여 ‘싱글 채널 비디오 작업은 어떻게 소장하고 유통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끌어냈다. 직접적인 계기는 안톤 비도클의 싱글 채널 비디오 렌털 프로젝트 ‘evr(e-flux Video Rental) Seoul Branch’였다. 당시는 동시대 국제적으로 싱글 채널 비디오의 아카이빙이 주요 논점으로 떠오르던 시기였다. 이는 인미공의 미디어 아카이브-배급 프로그램인 IASmedia로 이어졌다. 김현진 큐레이터가 주도해 구성한 이 프로그램에서 다른 프로그램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배급에 대한 부분이었다. 실제로 ‘2006~2008년 IASmedia’라는 이름으로 소장품을 국제 미디어아트 상영회에 적극적으로 진출시켰다. 그 결과, 뉴질랜드 고벳브루스터 아트 갤러리와의 공동 기획 전시나 뉴욕 뉴뮤지엄의 ‘Museum as Hub’에 초청되는 등 한국 미술을 소개하는 플랫폼으로서 국제적 위상을 획득했고, 여러 작가들이 국제적으로 확장되는 비엔날레 무대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9년 아르코미술관과 기능이 통폐합되면서 IASmedia는 아르코미디어로 2016년까지 축소 운영 후 중단되었다. 이후 이와 같은 미디어 아카이브는 부산현대미술관, 울산현대미술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국립현대미술관 등에서 산발적으로 이어지고 있다.4
2006년 원서동 이전 직후의 인미공 3층 사무실 전경
최정화가 디자인한 샹들리에와 소반, 스툴이 보인다
제공: 인미공
인미공의 이러한 실험성은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 한국 현대미술계의 구조적 변화와 깊이 연결된다. 당시의 미술 생태계는 대학, 공모전, 일부 화랑 중심으로 고착된 경직된 시스템 안에 있었다. 대안공간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에 걸쳐 전개된 소그룹 운동의 역사적 바탕과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이라는 담론적 바탕 위에서 싹텄다. 이후 IMF외환위기를 전후하여 미술 유학파가 대거 귀국하여 활동을 시작하면서 이들은 제도 바깥의 공간을 구축하고 1999년 다소 화려하게 등장했다. 대안공간 루프,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 쌈지스페이스 등은 미국의 실험미술공간을 지칭하는 ‘Alternative Space’ 개념을 표방하면서도 자생적 맥락을 강조했다. 폐쇄적이고 보수적이던 한국미술계의 진입 경로가 본격 다변화하는 시작이었다. 기존의 한국 현대미술계가 작가를 소개하던 시스템에서 비껴간 ‘신세대’ 혹은 ‘차세대’ 혹은 ‘X세대’ 미술인들이 그들의 행동 양식과 작업의 특성에 맞게 소개할 수 있는 형식으로서의 공간으로, 말 그대로의 대안이었다. 경제적 위기 예술가들이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 증명하는 자발적 형식에 가까웠다.5
인미공에 대한 미술사적 평가는 일관되지 않다. 백지숙이 ‘이중 구속’이라고도 표현했던 이 상태는 2000년대를 정리하는 미술사 기술에서 인미공이 어떤 방식으로 서술되고 있는지 확인해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한국미술 1900-2020』(2021)에서는 인미공 아카이브를 컬렉티브의 활동 중 하나로 간략히 소개할 뿐, 대안공간 정체성으로는 다루지 않는다.6 윤난지는 인미공을 대안공간으로 소개하되, 주로 백지숙의 국제 큐레이션 활동을 언급하는 방식으로 제한적으로 기술한다.7 반면, 문혜진은 인미공을 동시대 대안공간의 흐름 속에 적극적으로 위치시킨다.8 김종길과 윤원화는 이 공간의 실천적 가치를 강조한다.9 특히 윤원화는 인미공이 단순히 전시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전시를 둘러싼 사유와 관계, 생산 조건 전체를 제도화한 점을 주목한다. 이는 기존 기관의 기능을 넘어 동시대 미술의 장면을 다변화한 핵심 기제로서 인미공을 평가하는 관점이다.
인미공의 실천을 가능케 한 조건들
그렇다면 이러한 실천이 가능했던 동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첫째, IMF 이후 귀국한 유학파들의 새로운 감각과 기존의 틀을 전환하려는 욕망이다. 둘째,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문화정책의 변화—문화예산 1% 배정과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는 실험의 토대를 마련했다. 셋째, 인미공은 이러한 정책적 환경을 안정적인 재정지원하에 주체적으로 활용했다. 프로그램은 정책에 의해 톱다운 방식으로 지정된 것이 아니라, 현장의 요청과 협업에 기반한 바텀업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넷째, 초기 인미공 내부의 신뢰와 수평적 조직문화 역시 중요한 요소였다. 구성원들은 서로를 ‘백공’, ‘강공’이라 부르며 협업했고, 인턴과도 유기적인 협업이 가능했던 안전하고 안정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는 실험이 일시적 프로젝트가 아닌 구조로 자리잡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인미공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으로 열린 장기하와 얼굴들의
‘얼굴좀 봅시다’(2008) 제공: 인미공
인미공은 공적 자금으로 운영되었기에 민간 대안공간에서 실현하기 어려운 기획과 인프라 구축에 주력했고, 이를 통해 전시를 둘러싼 생태계를 실험적으로 조직하고자 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미공의 특수한 위치가 형성된다. 미술계 내부에서는 때로 대안공간으로 보기 어려운 제도 기관으로, 때로는 제도화되지 않은 실험실로 인식되며, 독특한 긴장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해외 작가와의 즉흥적인 협업이나 타 장르와의 융합 시도 역시 빈번했는데, 이는 인미공이 단순히 기획된 프로그램이 아니라 살아 있는 창작 생태계였음을 보여준다.
2009년, 인미공은 아르코미술관에 통합되며 조직 개편을 맞이했다. 정책의 변화는 불가피했고, 예산의 축소와 함께 그동안 지속되었던 큐레토리얼 실험은 정지되었다. 이후에도 개별 큐레이터와 팀(이단지, 막후극, 월간 인미공 등)이 실천을 이어갔지만, 그것은 구조와 싸우는 개별적 저항에 가까웠다. 공공기관이 갖는 리스크—정책 변화에 따라 운영 방식이 급격히 바뀌는 구조—는 미술계를 불안정한 시스템으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이는 이후 생겨난 신생공간들과의 연속선상에서 다시 살펴봐야 한다. 인미공의 통폐합은 단순히 제도적 조정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사건이었으며 2025년 그 변화가 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제2회 비디오 릴레이 탄산》 스크리닝 전경 2014
제공: 인미공
제도적 토양으로서 인미공이라는 기념비
인미공이라는 ‘기념비’ 사이를 거닐어 본다. 이 기념비는 어쩐지 기억을 향한 질문의 형상이다. 사건의 종결로서 기념비가 아닌, 끝나지 않는 문장처럼 인미공이 흔적처럼 자리하고 있다. 최근 서교예술실험센터 등 여러 공공 창작 지원 공간이 사라지는 소식을 새삼 상기하며 기억을 향한 질문은 더욱 구체화된다.
인미공 초기 4년간의 활동을 정리한 《사년 2000–2004》 포스터 2004
지금의 지원금 시스템은 모든 부담과 기록의 책임이 개인에게 전가되는 방식이다. 공적 자본으로 활동했지만, 결과물은 개인의 자산이 되고, 이는 다시 사적으로 환원된다. 지금도 지원금을 통해 우수한 작가나 작품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작동하는 지원금 기반 생태계에 편입되지 못하는 작가들, 이들을 위한 공간이나 시스템은 사실상 없는 상황이다. 이런 작가들을 발굴하거나 교육해서 제도 안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는 곳이 지금은 없어 보인다. 지원금은 지원 신청에서 한 번 떨어지면 끝이고, 교부-집행-정산으로 이어지는 실행 구조는 실적 보고서만 남기고 나면 그것으로 마무리된다. 평가도, 아카이빙도 개인이 실현할 영역으로 치부되어, 실천의 축적이 불가능한 구조다. 반면 인미공은 단순히 신진 작가에게 전시 기회를 제공하는 공모형 제도를 넘어, 워크숍, 아카이브, 출판, 국제교류 등 입체적 프로그램을 통해 생태계 내부의 순환을 실험한 최초의 제도적 모델로 기능했다. 과거의 공모 중심 시스템이 신진 작가를 선발하는 데 머물렀다면, 인미공은 작가가 아카데믹 이후 제도 내에서 성장하고, 다시 현장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다층적 매개를 마련했다. 이를 통해 인미공은 단절이 아닌 순환의 구조를 설계한 몇 안 되는 공공기관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당대 미술 담론을 리드하고, 새로운 기획자군과 작가군을 배출하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했으며, 그것이 단지 시스템이 아니라 ‘기댈 수 있는 커뮤니티’로서 작동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인미공이 ‘동두천 프로젝트’로 참여한 《Museum as Hub》(뉴욕 뉴뮤지엄, 2008) 전시 전경
제공: 인미공
제도란 성취를 계량화하는 장치가 아니라, 실천이 반복되고 누적될 수 있도록 구조화하는 토양이어야 한다. 현재의 공공지원금 시스템은 실적 중심의 분배에 집중하고, 실패나 과정은 기록되지 못한 채 사라진다. 인미공은 그와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실험은 기록되었고, 그 기록은 다른 작가와 기획자들에게 다시 참고되고 영향을 미쳤다. 미술을 살아있는 생태계로 만들었던 순환 모델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순환을 유지할 의지를 점차 잃어가고 있다. 이는 공공이 예술에 개입하는 방식이 변화하고 있다는 신호이며, 인미공의 종료는 단지 전시공간의 폐쇄가 아니라, 하나의 실천 시스템이 사라지는 사건이다.
1 인미공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미니버스, 오르트 구름, ㄷ떨:안녕인사》(아르코미술관, 2025) 서문과 《그런 전시》(인미공, 2025) 서문을 참조할 것
2 백지숙과의 인터뷰 (2025.5.5)
3 윤원화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워크룸프레스 2016 pp.99~110 참조
4 김신재 「불완전한 아카이브의 소음과 신호: IASmedia와 싱글채널 비디오에 관한 짧은 노트」 『ㄷ떨: 안녕인사』 아르코미술관 2025 pp.204~211 참조
5 김홍희 「한국현대미술사의 신기원, 1990년대」 『X: 1990년대 한국미술』 현실문화 2016 pp.64~80 참조
6 구정연 「예술 생산의 새로운 형태로서 컬렉티브」 『한국미술 1900–2020』 국립현대미술관 2021 p.431 참조
7 윤난지 『한국 동시대 미술: 1990년 이후』 사회평론 2017 p.70 참조
8 문혜진 「청년작가-제도-공간」『X: 1990년대 한국미술』 현실문화 2016 p.108 참조
9 김종길 『한국현대미술연대기 1987–2017 ①』 디어북스 2018 p.1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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