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인〈다섯 극〉&
이베타 강선영×뭎〈현장설명회〉
아트선재센터
김정현 미술비평
Performance
홍영인 〈다섯 극〉 아트선재센터 퍼포먼스 전경 2025
사진: 남서원 제공: 아트선재센터
믿음과 정치
김정현 미술비평
김영환 〈자화상 풍경〉 캔버스에 유채 66×100cm 1962 유족 소장
투쟁 이후
골목길은 고작 건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편과 저편의 풍경을 아득하게 갈라놓는다. 옛 궁전의 담벼락을 마주한 구역에 오밀조밀 펼쳐진 종로구의 이 동네는 국내외 방문객을 쉴 새 없이 끌어들이는 매혹적인 관광지가 된 지 오래되었다. 그 한복판에 있는 아트선재센터에서 홍영인의 개인전이 열린 5월 거리의 북적임에는 묘한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전시장 지척에 있는 헌법재판소에서 지난 연말 불법 계엄령을 선포한 대통령의 탄핵 심판 선고를 마친 후였다. 적어도 거리에는 일상이 돌아왔다. 인기 상점 앞에 길게 늘어선 줄과 꽃나무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는 인파를 헤치고 전시장에 들어섰다.
가벽 없이 넓게 트인 전시장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날은《다섯 극과 모놀로그》 전시 연계 프로그램으로 퍼포먼스 〈다섯 극〉의 두 번째 극이 발표되기 때문인지 관람객이 적잖게 모였다. 공간 전체에 작품이 흩뿌리듯 놓여있었다. 줄에 매달거나 몸통을 받치는 거치 구조를 지닌 비교적 큰 규모의 조각 이외에, 말 그대로 어린아이의 장난감처럼 바닥에 흩뿌리듯 늘어놓은 공과 막대기 등이 보였다. 전체적으로 고루 밝힌 실내에 오브제가 산재하지만 이 공간에는 분명하게 구심력이 작용했다. 자수 원형 벽화가 전시장 한가운데를 넓게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네 조각으로 나눈 원형 띠 모양의 틀을 천장에서 드리운 줄에 매달아 관객의 대략적인 눈높이에 맞췄다. 이 원형 프레임은 공중에 떠 있지만 마치 바닥에 선을 그은 듯이 무대를 구획하는 듯하다. 앞서 언급한 자잘한 오브제가 대부분 그 안의 바닥에 놓였는데, 미술관 관람객의 소극적인 관람 습성으로 인해서인지 발길은 프레임 너머로 향하지 않았다.
다른 관객의 시선과 동선을 방해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홀리듯이 중앙의 태피스트리로 다가갔다. 자수로 그린 벽화에는 국내 여성 노동자의 역사가 새겨져 있었다. 전시 소개에 따르면 여기 새겨진 인물은 “기생 출신 독립운동가 현계옥과 정칠성, 임금 삭감에 맞서 을밀대 지붕 위에서 1인 시위를 벌인 강주룡, 호미를 들고 독립운동에 나선 제주 해녀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위험한 노동 현장에서 일했던 수많은 소녀 노동자들, 노동자 인권을 위해 싸운 이소선과 동일방직 노조를 이끈 이총각, 그리고 섬유 공장 여성 노동자의 삶을 기록으로 남긴 신순애”다. 여덟 개로 나눈 서사는 각각 대여섯 개의 장면으로 압축되어 있다. 각각의 장면을 묘사하면 앞서 인용한 소개글보다는 조금 더 자세한 내용을 전할 수 있겠지만, 각 인물의 노동하고 투쟁하는 삶을 들여다보기에는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요약문에 불과할 것이다.
홍영인〈퍼포먼스 다섯 극을 위한 매뉴얼-원형 프레임 외벽〉
(부분) 삼베에 자수, 8점 각 244×56cm 2024
사진: 남서원 제공: 아트선재센터
홍영인 〈다섯 극〉 아트선재센터 퍼포먼스 전경 2025
사진: 남서원 제공: 아트선재센터
자기 수행과 일시적인 감각의 공동체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 참여와 정치적 역량이 과소 평가되고 역사적으로 간과되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놓여있는 한편에서 한국 및 동아시아 페미니즘이 부상할 만큼 여성주의적 인식과 실천이 문화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최근의 관객에게 홍영인의 태피스트리에 수놓인, ‘남성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배제되어 온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급진적 정치화보다 익숙한 공감대의 형성으로 이어질 것이다. 서로 다른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가 원형 프레임을 따라 맞물려 흐르는 시각적 구조화는 미술의 공간적 상상력을 잘 보여준다. 서사적 구조의 시작점이 공간적으로 다변화하기 때문에 관객은 각 인물의 생애사 어느 지점에서든 시작하고 돌아가고 다른 인물의 것과 중첩해서 수용할 수 있다. 다만 원형 프레임의 시각 구조와 배치되며 각 이야기의 시작마다 친절하게 번호를 매겨 표시한 제스처가 걸리적거린다. 그보다 더 미심쩍은 것은 시각예술의 역량이 내용보다 형식에서 발휘된다고는 하지만 태피스트리에 축약된 인물사가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것이다.
홍영인의 리서치가 치밀하지 않았다고 지적해야 할까? 동시대 미술관에서 익숙한 리서치 형식의 작업이 정보 과잉의 양상을 지니는 것에 비해, 홍영인의 작업에서 글과 내용은 읽을 수 있을 만큼 주어진다. 인쇄물과 수집 자료를 진열하는 대신 자수 형식을 채택한 것도 이와 관련된다. 시각예술가의 리서치는 통상적인 의미보다 확장되어 사용되고는 한다. 새로운 지식에 도달하기 위한 연구의 과정이라기보다, 작가 개인의 주제적 몰입과 습득의 과정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이러한 지식의 아마추어들은 저마다의 관심사를 시각적 역량으로 가시화하고 강조한다. 결과물은 그 분야의 전문가에게는 부족하게, 그 특수한 관심사에 무지한 어느 관객에게는 흥미롭게 다가올 것이다. 리서치의 표피성은 종종 인터뷰나 현장 답사와 같은 다큐멘터리적 수행으로 알리바이를 마련한다. 그러나 홍영인은 변명 없이 과장 없는 이해의 삽화를 제시한다. 그는 만남이나 답사의 형식 대신 자료 조사와 읽기의 방식을 통해 자신의 관심과 염려를 붙들어 매는 것이다.
이베타 강선영×뭎 〈현장설명회〉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오픈스튜디오 2025
기록: 최연근 제공: 작가
이베타 강선영×뭎 〈현장설명회〉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오픈스튜디오 2025
기록: 최연근 제공: 작가
저널리스트, 역사학자, 노동운동가, 심지어는 사진가나 다큐멘터리 영상 작가와 비교할 때 미술의 형식으로 발화되는 것은 내용적으로는 색다르거나 특출난 점이 없어 보인다. 사회적 실천의 방법을 모색하거나, 잊힌 역사적 사실을 사료의 발견을 통해 실질적으로 발굴하거나, 사회적 억압의 현실을 생생하게 고발하는 역할을 하기에 관내 전시는 사후적이고 추상적이다. 전시장 너머 다른 골목에서 펼쳐지는 역사의 현재를 떠올려보라. 여성 노동의 역사와 정치가 겹겹이 기입되고 되살아나는 현장의 삶은 그것의 지나간 시제를 침묵 속에 재현하는 전시를 볼 때마다 비교해서 생각하게 한다. 홍영인의 모놀로그를 들어보라. (두루미를 마주한 경험을 말하는 〈우연한 낙원〉(2025)에서)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기적이자 진정한 의례다. (…) 그렇기에 나는 두루미 소리가 듣고 싶은 것이다. 대체되지 않는 직접적 말들로 내면을 채우고 싶다. 경계들을 지워낸 진정한 표현, 그 가능성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예술가로서의 여정이 (…) 두루미의 춤처럼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인간 역시도 언어의 한계를 깨고 분리된 감각을 넘어 하나가 되는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장소에의 여정이길 바란다.” 예술의 행위와 작업을 매개로 한 감각의 공유를 신뢰하(고자 하)는 바람을 담고 있기 때문인지, 혹은 그것을 실현하는 증폭 장치로서, 그가 도입하는 퍼포먼스는 제의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관객 A~Z, 관람의 정치성
탄핵 정국이 마무리된 5월의 주말에는 그간 밀린 도심 이벤트가 속속 열렸다. 홍영인의 아이디어와 감각에 공명해서 극도로 몰입한 퍼포머들의 모습에 30분간 집중했다가 풀려난 길에서 마주한 것은 저녁 이벤트에 맞춰 저마다 어디론가 분주히 향하는 구경꾼들이었다. 이날 저녁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오픈스튜디오 행사의 일환으로 이베타 강선영의 퍼포먼스 〈현장설명회〉(뭎(Mup:)과 협업, 2025)가 열렸다. 개별 작가의 오픈스튜디오 종료 시각(7시) 전후의 애매한 시간대(6:26~7:41)에 1시간 15분이라는 묘하게 긴 시간 동안 이어진 퍼포먼스는 먼저 보고 온 것과 놀랄 만큼 대조되었다. 파독 광부이자 정치 활동가인 이영준의 아카이브에서 출발한 스코어와 몸짓으로 구성했다는 이베타의 작업은 홍영인의 작업과 노동이라는 소재를 공유했다고 할 수 있다. 홍영인의 작업이 의례의 공간을 상기시킨다면, 창작스튜디오가 입지한 난지하늘공원을 다른 장소로 가정하고 가상의 시나리오를 들려주는 이베타의 작업은 게임의 공간이 된다.
건물 복도, 작업실 내부, 야외 정원, 옥상 등의 공간을 순회하며 펼쳐지는 퍼포먼스는 관객에게 독특한 수행을 요청한다. 관람하는 동안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 입장하여 동영상을 촬영하고 파일을 공유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후속 작업의 관람을 위한 이벤트이자 〈현장설명회〉 퍼포먼스의 중요한 ‘비/관람’ 장치이다. 안내에 따라 일제히 휴대전화 카메라를 치켜든 관람객의 참여나 협조가 75분의 러닝타임 중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겠는가. 그날 모인 관객 중 누군가의 혼잣말처럼 ‘이거 꽤 힘든 일’, 노동이다. 건물 이곳저곳을 이동할 때마다 7분의 자유 관람 시간을 설정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창작스튜디오의 일상적인 공간에 역사적 서사를 중첩시키는 놀이에서 구경거리 없이 주어진 7분의 시간은 몰입을 깨트린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산만한 연출은 집중 관람 형식과 다르게 저마다 다른 관객의 성향이 발현되도록 한다. 이것은 단지 시선의 입장 경로를 다양하게 하는 추상적 공간화가 아니라, 관람의 정치성을 유발하는 의도와 의미의 틈새 만들기이다.
이베타 강선영×뭎 〈현장설명회〉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오픈스튜디오 2025
기록: 최연근 제공: 작가
관객 A는 제한된 자유 시간을 지켜 75분의 시간 동안 퍼포머의 가이드를 충실하게 따라가며 수많은 영상을 남겼고, 나 같은 관객 Z는 퍼포먼스 현장의 언저리를 서성이다 휴게실을 오가며 건성으로 분위기를 파악했다. 인파와 공간 구조와 늘어진 시간의 지루함에 가려 보지 못한 부분은 오픈채팅방에 올라온 수십 개의 파편적인 영상으로 가늠한다. 제의는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정치는 한쪽을 믿지 않는 자에게도 다른 방식으로 필연적으로 작동한다. 홍영인이 호명하는 감각의 공동체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을 듯한 진지한 관객들조차 이베타 강선영의 작업에서는 A~Z로 분화한다. 이베타의 작업은 노동을 소재로 하여 기념비화된 아카이브의 허구성을 드러낼 뿐 아니라, 관객의 관람을 노동으로 변화시키며 관람성에 관해 질문하게 한다. 동시대 미술(퍼포먼스)에서 예술가-샤먼론과 제의 형식이 각광받는 이유 중 하나가 동시대 미술의 은밀한 비정치화와 관련되는 게 아닐까? 비판적 판단과 실천적 개입을 포함한 비평이 아니라 지지만을 요구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예술의 자기도취적 문화를 퍼트리고 있지 않은가 하고 자기반성과 함께 의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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