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서재 3: 전소정
글 전소정 진행 노재민
Art Books
전소정은 〈싱코피〉(2023)에서 국경과 시간의 경계를 진동시키는 소리의 리듬을 탐색한다. 덜컹이는 열차의 진동, 모어 바깥에서 발화되는 음성은 가속의 시대를 횡단하는 존재들의 흔적이며, 작가는 이를 따라 감각의 정치학을 사유한다. 〈싱코피〉와 공명하는 배수아의 텍스트 「아야미, 움브라 가르텐」, 소설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2019)는 말 이전의 리듬과 존재 이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한다. 전소정은 ‘이해’를 전제로 한 해석의 언어를 유예한 채, 감각과 리듬의 언어로 세계를 다시 구성하고자 한다. 이는 낯선 언어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발화되지 않은 말과 해석되지 않은 감각들이 머무는 풍경을 구축하려는 시도다.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배수아 지음 워크룸프레스 2019
“이 소설은 낭독을 위한 것입니다.” 배수아는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이하 『우루』)를 두고 그렇게 말했다. 낭독은 단순히 텍스트를 소리 내어 읽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목소리를 거쳐 몸에 닿는 문장의 리듬이며, 의미 이전의 감각이다. 그는 독자가 ‘해석’하기보다는 ‘입으로, 귀로, 호흡으로’ 문장과 함께 머물기를 바란다. 우루 이름을 되뇌어보니 몸을 훑고 지나가는 진동은 그것이 불리기를 기다리는 이름임을 알려준다. 최초의 도시에서 빌려온 이름 우루는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소리이자 무대이며, 그곳에서 문장은 오히려 말해지기 이전의 상태로 존재한다. 이는 일면 소리 내어 읽었을 때 낭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버전을 새로 만들도록 이끄는 차학경의 『딕테』를 떠오르게 한다. 『우루』는 문장이 말이 되기 직전의 낯선 리듬을 몸으로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 낯섦은 오늘의 미술이 잠시 잊어버린 자리일지도 모른다.
『우루』의 문장은 계속해서 컷과 컷을 달리하며 충돌하는 영상 같다. 숨가쁘게 미끄러지다 멈추고 이내 다시 이어진다. 어딘가에서 흘러온 속삭임, 방향을 알 수 없는 호출, 이름 없는 존재의 부름이 반복된다. 주인공은 실재하는 장소에 도착했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한 채 풍경과 목소리, 그리고 기억되지 않는 잃어버린 시간을 따라 걷는다. 배수아의 문장은 여기서 사건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과 언어의 사건 이전 상태, 말이 되기 전의 어둠, 발화되기 직전의 어지러움 속에 머문다. 문장의 리듬은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라 ‘같이 숨 쉬게’ 만든다. 이 호흡은 곧 하나의 무대이고, 독자는 낭독자의 몸을 통해 그 무대에 참여한다.
배수아는 글쓰기의 즉흥적 창작방식을 껴안는다. 그 가운데 예측 불가능한 자아와 문장이 스스로 꺼내어지는 경험을 기다린다. 문장의 흐름에 자신을 열고 스스로 허물어지며, 자신이 쓴 문장조차 낯설게 느끼는 상태, 자신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이미지가 갑작스럽게 튀어나 오는 상태를 그녀는 가장 바람직한 창작의 리듬으로 여긴다. 『우루』는 분산되고, 목소리는 안개처럼 흩어진다. 주어가 명확하지 않은 문장들, 누가 누구에게 건넨 것인지 알 수 없는 대화들, 문법을 벗어난 시간들. 그것은 자기 서사의 전유가 아니라, 자기로부터 비워진 말하기의 실험이다. 문장이 자기 해석을 포기할 때, 오히려 그 문장은 더 많은 타자에게 열린다. 만약 『우루』가 김혜순과 허수경, 그리고 차학경의 글들과 함께 놓인다면, 그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모두 몸과 목소리, 죽은 자와 산 자, 여성성과 언어, 시간과 소리의 경계를 글쓰기로 가늠하는 작가들이 아닌가. 『우루』는 그런 시도 속에서 최초의 여성 ‘우루’를 세상에 불러낸다.
세계는 분리할 수 없는 눈들이 동시에 꾸는 꿈과 같았다. 나는 글과 목소리라는 이중 구조를 가졌다. -「아야미, 움브라 가르텐」 중
2023년, 책 『싱코피』를 준비하며 배수아를 떠올렸다. 이 책은 동명의 영상작업 〈싱코피〉(2023)가 만들어지는 시간과 함께 쓰여진 글들을 묶는 시도였다. 배수아는 당시 연락이 잘 닿지 않아 이 책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뒤늦게 도착한 배수아의 글은 미술관 도록에 실렸다. 나는 이 글 「아야미, 움브라 가르텐」을 가끔씩 꺼내어본다. 이 글은 〈싱코피〉를 비추지만, 또 많은 부분 멀리 있다. 멀리 서서 또 어딘가로 나를 움직이도록 몰아세운다. 『우루』가 낭독이라는 비신체적 텍스트의 전환을 실험한다면, 「아야미, 움브라 가르텐」은 그것이 파문처럼 확장된 감각적 풍경이다.
「아야미, 움브라 가르텐」에서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형상 중 하나는 이름이다. 이름은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흘러 다니고 잠시 머무는 장소처럼 등장한다. 여니, 아야미, 밀. 이 이름들은 명확한 인물의 고유표지가 아니라, 잃어버린 몸, 재, 정령이 깃드는 자리이다. 소설 속 인물은 타인의 이름을 빌리고, 자기가 만든 이름을 다시 타자에게 나누어주며 존재를 이동시킨다. 이름은 고유하지 않으며, 소유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름은 관계이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떠도는 것, 선물로 주어졌다가 다시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정령은 속삭임이다. 배수아는 정령을 ‘깃든 목소리’라고 쓴다. 말이 아닌 기운, 음성의 잔향.
몸을 잃은 정령은 소설 속 인물에게 깃들고, 그녀는 자신이 그 정령이었음을 깨닫는다. 이 모든 과정은 하나의 음성으로 구성되며, 읽기보다 듣기, 이해보다 체류에 가까운 것이다. 배수아의 인물들은 설명하거나 증명하지 않는다. 그들은 목소리를 흉내내고, 재가 되어 남은 감각을 따라 걷는다. 그것은 문학적 시간 이전의 언어, 혹은 아직 언어가 되지 않은 정령들의 필연적인 ‘머무름’에 가깝다.
「아야미, 움브라 가르텐」이 〈싱코피〉와 일으키는 공명을 따라가 보는 것은 흥미롭다. 시간의 비연속성, 잃어버린 기억, 시작되지 않은 이야기의 파편들. 편지와 열차, 돌과 침묵, 재와 빛, 그리고 여니와 아야미, 밀이라는 이름들.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여러 개의 목소리, 여러 개의 꿈이 겹쳐진 상태. 그것은 〈싱코피〉의 세계이기도 하다. 구미호의 목소리를 흩어 놓고, 여러 시공간에서 울리게 하는 것. 단 하나의 실체를 구성하지 않는 것. 그렇게 해서 이야기되지 않는 이야기, 혹은 말해지기 전의 말, 잃어버린 이름이 잠시 머무는 장소를 만드는 것. 그것은 〈싱코피〉가 바라보고 싶었던 세계일지 모른다.
‘싱코피’는 음악 용어에서 가져왔지만, 이를 시간의 비동시성으로 번역해 보자. 리듬이 탈구되고, 박자가 어긋나는 상태. 익숙한 리듬이 이 외재화의 문법으로 쓰인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말하는 주체는 아니라, 약간 비틀린, 그래서 더 생생하게 살아있는 시간. 배수아의 글은 소설의 시간과 함께 바로 그런 싱코페이션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장의 리듬이 ‘다르게’ 적힌다는 것, 그것은 언어를 다시 느끼게 하고, 우리가 익숙하게 소비해 온 의미 체계를 낯설게 한다. 해석되지 않는 문장, 그러나 들리고, 반복되고, 생동하는 문장. 이 작품은 독자를 이해의 행위로 초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가 잠시 이 문장의 심연에 머무르기를, 음성의 리듬에 몸을 맡기기를 요청한다.
현대미술은 종종 재난, 전쟁, 이주, 젠더, 기후 등 전지구적 위기에 대해 즉각적 반응한다. 작품은 사회적 의제를 다루며, 비판적 메시지를 내놓고, 특정한 ‘이해’를 요구하거나 해석의 정당함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곤 한다. 물론 그러한 태도는 정치적 윤리와 책임을 담보하는 차원에서 의미가 깊다. 그러나 그 명료함은 예술이 ‘정답’을 요구하는 윤리의 자리에 머무르게 하기도 한다. 예술이 미학과 정치학이라는 두 축으로 작동할 때, 때로는 그 ‘내용’이 형식의 실험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되묻게 된다. 그럴수록 감각과 인식의 방식으로서의 미학은 해석의 욕망 앞에서 무력해질 수 있다. 예술이 사회적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해야 한다는 믿음은 강력한 윤리적 동기가 되기도 한다. 그에 따라 비평은 메시지를 해설하고 해석하는 도구처럼 기능하기도 한다. 하지만 해석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예술, 독해되지 않으면 배제되는 예술은 점차 더 예측 가능한 언어, 안전한 형식 속에 머물게 될 위험도 안고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감각의 폭을 제한하고, 예술이 제기할 수 있는 존재론적 질문의 가능성을 위축시킬 수 있다. 정답을 전제한 예술, 구원 서사를 기반으로 한 창작은 때로 정치적 긴장조차 미학적으로 감당하지 못하는 지점에 이르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 소설을 해명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해를 구하는 작가가 아니다”라는 배수아의 말은 일면 윤리적 용기로 다가온다. 해석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비평적 조건, 메시지 중심의 현대미술이 정답을 제시하고 세계를 구원하리라 믿는 순간, 미학과 실험은 설 자리를 잃는다. 예술이 단순한 재현이나 고발의 자리를 넘어서, 경계 위에서 조율하고, 실험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 필요한 것은 세계를 ‘이해’시키기보다는, 그 세계 안에 잠시 ‘머무르게’ 하는 언어일지 모른다.

전소정 Sojung Jun |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아트를 전공했다. 영상 언어와 글쓰기를 중심으로 인터뷰, 역사적 자료 및 고전 텍스트에서 차용한 내러티브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며 개인의 삶에 내재한 미학적이며 정치적인 요소를 드러냈다. 《올해의 작가상 2023》(국립현대미술관, 2023), 제11회 광주비엔날레(2016) 외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으며, 제18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과 제14회 송은미술대상 등을 수상했다. 국립현대미술관,서울시립미술관, 리움미술관, 오사카국립미술관 등 국내외 주요 기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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