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청주공예비엔날레

《세상 짓기》
문화제조창 본관 및 청주시 일원 9.4~11.2

황수진 기자

Theme Feature

위 프란체스코 시메티 〈열광〉 프린트된 텍스타일, 전구 가변 크기 2025
아래 구세나 〈교차 시리즈〉(사진 앞쪽) 도자에 드로잉 가변 크기 2023~2025
《세상 짓기》 문화제조창 본관 전시 전경 2025
제공: 청주공예비엔날레


가난한 풍요의 시대, 공예가 던진 질문
황수진 기자

제14회 청주공예비엔날레가 9월 4일부터 11월 2일까지 청주 문화제조창 본관과 청주시 일원에서 “세상 짓기(Re_Crafting Tomorrow)”를 주제로 열렸다. 강재영 예술감독이 기획한 이번 행사는 16개국 148명의 작가가 30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이며, 디지털 문명이 불러온 이미지 과잉과 속도의 시대, 값비싼 명품과 일회용품이 공존하는 ‘가난한 풍요의 시대’에 공예가 어떤 응답을 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 감독은 이를 “함께 만들고 함께 나누는 행위”라는 키워드로 풀어내며, 본전시를 네 개의 장으로 구조화했다.

카티야 트라불시〈영속하는 정체성 시리즈〉(사진 오른쪽)
나무, 대리석, 도자, 레진 80×20cm 2016~2025
《세상 짓기》 문화제조창 본관 
전시 전경 2025
사진: 황수진

첫 번째 섹션은 “이것이 과연 공예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전시장 입구 천장에서부터 내려오는 프란체스코 시메티의 대형 설치는 비디오 게임에서 가져온 자연 이미지, 실제 기계 사진, 챗GPT가 생성한 한국의 산수와 나무가 겹쳐진 화면으로 전통적 공예 전시를 기대했던 관람객의 예상을 뒤흔든다. 이 섹션 ‘보편문명으로서의 공예’는 인간의 삶에 필수불가결했던 공예가 오늘날 어떤 방식으로 다른 예술 장르와 접속하고 확장되는지를 묻는 장이다. 공예를 “모든 문명의 모어(母語)”라 정의한 강 감독의 선언은 이후 전시 동선에서 그 의미가 점차 드러난다. 강석영은 500여 개의 도자 프레임을 캐스팅 기법으로 제작해, 구멍 낸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 구조물을 통해 도자가 건축적 규모로 확장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청주 장인들의 낙화·소목·사기·악기·궁시 공예품은 정자 무대에 놓여, 풍류와 문화가 결국 공예라는 물질적 토대 위에서 가능했음을 환기한다. 이 섹션은 공예의 DNA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그리고 특정 재료나 기술에 국한되지 않고 문명과 예술의 언어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 섹션 ‘탐미주의자를 위한 공예’는 시각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에 공예만이 제공할 수 있는 경험, 곧 손의 감각과 노동의 축적, 재료의 저항을 직시하는 과정을 전면에 내세운다. 바로 그 지점에서 공예는 시·회화·건축에 못지않은 독립된 예술로서 설득력을 얻는다. 김희찬의 신작은 얇은 베니어판을 휘어 구리선으로 엮어낸 구조물로, 매끈한 완결을 거부하며 뒤편의 매듭과 결절을 통해 노동의 흔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모나 오렌은 밀랍의 투광성과 취약성을 살려 연잎과 꽃잎을 극사실적으로 재현하며, 불안정성이 시적 아름다움으로 전환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숙련의 극치에 이른 작업들도 눈길을 끈다. 구세나는 13번의 소성과 채색을 거쳐 피부 질감을 구현한 도자 손으로 통각적 관찰의 끝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 섹션은 완벽한 숙련만을 탐미의 조건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구로다 유키코는 상실의 경험 속에서 깨진 그릇을 수리하며 치유의 미학을 실천하고, 최기룡은 유리 속 기포를 금박으로 메워 결함을 장식으로 전환한다. 실패와 불완전함이 극치의 미학으로 도약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홍림회 〈검은산〉 2025
《세상 짓기》 문화제조창 본관 전시 전경 2025
사진: 황수진

카이 무라이 〈내 모든 기도에 대한 답은 내가 결코 묻지 않았던 질문 속에 있다〉
천연 인디고, 표백하지 않은 손으로 
직조한 직물, 남인도 전통 방식으로
제작한 청동 종, 비나 줄, 전통 사원 장인이 정교하게 조각한 화강암 구체, 사운드 설치 가변 크기 2025
《엮음과 짜임》 문화제조창 
본관 전시 전경 2025
제공: 청주공예비엔날레

세 번째 섹션 ‘모든 존재자를 위한 공예’는 인간의 욕망과 소비를 넘어선 자리에서 공예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른바 ‘크래프티비즘(craftivism)’이라 불리는 공예의 사회적·생태적 확장이다. 레바논의 카티야 트라불시는 전쟁의 상징인 미사일을 각국의 문양과 장식으로 치장해 폭력의 도구를 치유의 서사로 전환한다. 미국 작가 멜리사 카메론은 금속 주얼리를 매개로 총기 사고라는 사회적 비극을 기록한다. 그는 하루 동안 총으로 목숨을 잃은 73명의 희생자를 조사해, 당시 사용된 총기의 형태를 본뜬 오브제를 제작하고 이를 군번줄처럼 엮어냈다. 몸을 장식하는 장신구가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공예는 사회적 사건을 환기하는 감각적 언어로 기능한다.

전시의 마지막 장은 ‘공동체와 함께하는 공예’다. 공예가 개인의 기술을 넘어 공동체와 삶을 짓는 행위임을 드러낸다. 홍림회는 산불로 불에 탄 나무를 지팡이로 되살려낸다. 82명이 힘을 모아 만든 130자루의 지팡이는 재난의 상흔을 기억하고 치유하는 집단적 실천이자, 후세에 어떤 자연을 남길 것인가를 묻는 상징적 장치다. 폴란드의 한 마을에서 세대를 거쳐 전승된 가는 레이스 뜨개는 가족과 마을 단위로 이어진 문화적 정체성을 보여준다. 특정한 교육 제도 없이도 한 세대의 손길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공동체의 유대는 더욱 단단해진다. 이 섹션은 공예의 본질이 결국 ‘함께’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손의 노동으로 빚어진 물건이 누군가의 삶을 지탱하고 또 다른 세대로 이어지는 순간, 공예는 단순한 기술을 넘어 공동체적 윤리로 확장된다.

본전시가 공예의 내적 언어를 해부했다면 특별전과 국가관, 국제 공모전은 외부와의 접속으로 지평을 넓혔다. 현대자동차와 협업한〈현대 트랜스로컬 시리즈〉는 그 첫 무대를 청주에서 선보였고, 영국 휘트워스 미술관과 인도 국립공예박물관이 공동 기획한 《엮음과 짜임》은 각 지역의 공예 전통을 리서치와 신작으로 엮어내며 지역적 정체성이 초지역적 네트워크 속에서 다시 짜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주빈국관 태국전 《유연한 시간 속에서 살아가기》는 상업화와 속도의 압력 속에서도 고유한 공예 문화를 지켜온 태국의 면모를 드러낸다. 윗 핌칸차나퐁의 〈미로(Labyrinth)〉(2025)는 불교 사원에서 실제 의식에 쓰였던 천을 오랜 시간 모아 만든 설치 작업으로, 관람객이 천 사이를 걸으며 명상적 시간을 경험하도록 한다. 국제 공모전에는 역대 최다인 71개국 990명이 참여해 청주가 공예의 글로벌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했음을 확인시켰다. 대상작 이시평의 〈일지(Log)〉(2024)는 목재와 금속, 소리를 결합해 감각을 확장하는 공예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위 이시평 〈Log 일지(日誌)〉 레드오크, 스테인리스 스틸 최대 75×152×(h)53cm 이내 2024
《물성의 서사》 문화제조창 본관 전시 전경 2025
제공: 청주공예비엔날레

아래 왼쪽 니띠 수탐마루크 〈얼굴(제3동 내 얼굴을, 내 거처를, 내 시간을, 갇혀 있는 상태를 봐)〉
천에 자수, 치앙라이 
중부교도소 제3동의 남성 재소자 약 20명과 협업 2021~2023
《유연한 시간 속에서 
살아가기》 문화제조창 본관 전시 전경 2025
사진: 황수진

오른쪽 윗 핌칸차나퐁 〈미로〉 2025
《유연한 시간 속에서 살아가기》 문화제조창 본관 전시 전경 2025
사진: 황수진

2025 청주공예비엔날레는 규모 확장이나 참여 작가 수치로 평가하기 어려운 깊이와 밀도를 드러냈다. 이는 2023년에 이어 연임한 강재영 예술감독의 집중과 축적된 기획력이 가능케 한 성과였다. 전회 비엔날레가 공예의 지형도를 이론적으로 탐구했다면, 이번 ‘세상 짓기’는 생명과 공동체라는 시대적 질문에 응답했다. 이번 비엔날레는 ‘경물’, ‘시적 탐미’, ‘공동체적 윤리’라는 키워드를 축으로 삼아 공예의 정체성과 미적 가능성을 새롭게 구조화하는 동시에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윤리적 역할로까지 확장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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