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원작가 4인
김영은·김지평·언메이크랩·임영주
《올해의 작가상 2025》2025.8.29~2.1
기획·진행 편집부
Artist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은 국공립 기관으로서 한국 동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를 지원하며 미술계의 지형도를 주도적으로 제시해 온 상징적 후원 제도다. 특히 2025년부터는 키아프프리즈 서울을 염두에 두고 전시 시기를 조정함으로써 국내 작가들의 활동 무대를 국제적 맥락으로 확장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다.《올해의 작가상 2025》에 선정된 네 명 (팀)의 작가 김영은, 김지평, 언메이크랩, 임영주는 각기 다른 출발점에서 우리가 익숙하고 당연하다고 믿는 세계의 작동 방식을 비판적으로 멈춰 세우는 공통분모를 가진다. 청취를 통한 권력 구조 해부, 동양화라는 제도적 전통의 재해석, 인공지능이 그린 미래 청사진의 허점 파고들기, 미신과 기술이 엮인 믿음의 구조 탐색까지, 이들의 작업은 동시대 한국 사회의 복잡하고 누락된 층위들을 예리하게 건드린 다.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미술이 지금 어디를 응시하며 어떤 문제에 답하고 있는지 심층적으로 들여다본다.
김영은/ 1980년생. 캘리포니아대 산타크루즈, 필름과 디지털 미디어 박사 과정 재학 중. 2026 ACC 미래상 수상. 제15회 광주 비엔날레 《판소리》(2024),《Beyond the Crest》(M+,2023), 《소리의 틀》(송은, 2022), 《Bones of Sound》(LA 비지터웰컴센터, 2019) 외 다수 전시 참여
김영은 Kim YoungEun
정소영 기자
김영은은 소리를 감각의 기록으로 다루며 사회와 역사가 축적된 층위로서 탐구한다. 그의 작업에서 듣기는 보이지 않는 권력관계와 사회적 규범이 감각 속에 스며드는 방식이다. 일상에서 쉽게 지나치는 소리와 공인된 기록에서 누락된 음성, 개인의 경험과 집단의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을 작품으로 재배치한다. 그는 실제로 남아 있는 사료를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기록되지 않았거나,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소리를 사변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을 취함으로 역사 속에서 충분히 성찰되지 못했던 이들의 존재 방식과 그들이 놓여 있던 사회적 조건을 다시 사유하게 한다.
소리 민족지학(Sonic Ethnography)을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방법론으로 활용하고 있다.1 공식적으로 기록된 역사를 넘어 식민 폭력과 근대화 과정에서 배제되거나 억압된 틈을 메우기 위한 방식으로 소리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이번 전시 작품을 예로 들어 설명해 달라.
소리 민족지학은 최근 가장 집중하고 있는 작업 방식이다. 문화기술지적 표현 안에서 소리가 수행하는 역할에 주목하며 음향 공간의 묘사나 과정 중심의 사운드 기록을 통해 소리와 청취가 지닌 민족지적 잠재력을 탐구한다. 작업에 따라 과거의 사운드스케이프를 사변적으로 재구성하거나 서로 다른 커뮤니티의 고유한 청취 방식이 역사와 맞물려 형성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소리는 역사적 산물이자 유물이며 청취는 역사적으로 구성된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미래의 청취자들에게Ⅲ〉(2025)에서는 남성의 음원을 아일랜드 여성 이민자들의 합창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소리를 사변적으로 만들어내는 방식을 취했다. 여성의 소리라는 역사적 기록 속에 남지 않은 목소리를 호출하고, 기록되지 않았기에 충분히 성찰되지 못했던 존재 방식과 당시 사회상을 다시 사유하고자 했다.〈듣는 손님〉(2025)은 이주 경험을 통해 이민자들의 청취 방식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묻는 작업이다. 이주민들이 어떤 소리를 의미 있게 듣는지, 그 소리를 어떻게 듣는지, 혹은 그들이 타인에게는 어떻게 들리는지와 같은 직접적인 질문과 응답을 통해 살폈다. 여러 차례의 인터뷰와 일상 장면 촬영을 병행한, 비교적 전통적인 제작 방법을 따른 작업이다.
〈Go Back to Your〉(2025)는 한국계 여성 이민자가 경험하는 사운드스케이프를 재구성한 작업이다. 에세이, 뉴스 기사, 소설에서 발췌한 텍스트와 지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 소셜미디어 게시물, 그리고 개인적인 경험이 뒤섞인 소리로 구성된 사운드 저널에 가깝다.
작품에서 소리와 영상은 긴장과 지지의 관계를 동시에 형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청음 훈련〉(2022)에서는 화면에 드러나지 않는 소리가 공간의 감각을 먼저 조직한다. 전시장 초입의 〈붉은 소음의 방문〉(2018)에서는 영상의 색과 소리가 교차하며 그 특징이 더 두드러진다. 작품을 구성할 때 소리와 영상의 연계 방식은 어떻게 설정하는가?
작업은 의식적으로 구성되는 부분과 무의식적으로 선택되는 부분이 함께 작동한다고 본다. 〈붉은 소음의 방문〉, 〈청음 훈련〉, 〈Go Back to Your〉로 이어지는 연작은 형식적으로 이미지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텍스트, 색채, 소리가 유사한 비중을 가지며 서로를 지지하거나 긴장시키는 관계를 형성한다.
작업 초기부터 이미지를 배제한 이유는 소리의 내러티브를 따라가는 데 시각 이미지가 필수적이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과거의 소리를 바탕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에서 구체적인 이미지가 오히려 관객의 몰입과 상상을 제한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텍스트, 색채, 소리 세 요소가 긴장 관계 속에서 서사를 이끌어가도록 구성했다.
작업을 “감각되는 것의 역사를 드러내는 실천”으로 설명하며 소리의 물질성과 정치성을 강조해 왔다. 소리를 통해 정동을 불러일으키는 방식과 정치적 장면을 구성하는 방식의 균형은 어떻게 설정하는가?
두 요소를 분리해 의도적으로 비교하며 작업한 적은 없다. 다만 결과적으로 보면 작업마다 서로 다른 비중으로 함께 작동해 왔다. 〈붉은 소음의 방문〉 에서는 통금 사이렌과 남북을 오가던 라디오 전파라는 상반된 성격의 소리를 다룬다. 통금 사이렌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감각과 신체를 통제하려 했던 소리였고, 라디오 전파는 극히 제한된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었던 소리였다. 이 두 소리는 모두 특정한 정치적 장면을 구성한 소리였으며, 관객 또한 이를 그렇게 인식한다. 통금 사이렌과 관련된 장면에서는 실제 경험이 없는 세대와 달리, 윗세대 관객들이 당시의 감정과 기억을 강하게 환기하며 반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소리를 완벽히 재현하지 않았음에도 공감이 발생하는 지점에서 소리의 정동적 힘을 확인했다.
〈청음 훈련〉은 일본에서 특정 집단이 경험한 매우 특수하고 기이한 청각적 사건을 다룬다. 관객이 직접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니지만, 하나의 낯설고 충격적인 역사적·청각적 사건으로 인식되며 강한 동요를 유발한다. 이처럼 정동과 정치성은 작업마다 상이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소리에는 침묵과 같은 비언어적·비발화적 요소도 포함된다. 작업에서 이러한 ‘비소리’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작업에서는 언어적 소리보다 비언어적 소리가 주제이자 핵심 재료로 더 많이 다뤄진다. 통금 사이렌, 라디오 잡음, 비행기 소리, 잠수함 엔진 소리, 욕설을 가릴 때 사용되는 ‘삐’ 소리 등이 중요한 참조의 예이다.
언어적 소리가 등장하더라도 관객이 먼저 인식하는 것은 의미 이전의 음성 신호인 경우가 많다. 〈듣는 손님〉에서는 이민자들이 부정확한 발음과 억양으로 한국어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관객은 언어의 의미보다 발음과 악센트, 음성의 질감을 먼저 듣는다.
침묵은 언어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고 본다. 〈미래의 청취자들에게Ⅰ〉에서는 한국 전통음악 레코딩이 점차 분절되고 소거되며 마지막에는 거의 들리지 않게 된다. 이 과정에서 소리가 사라지는 순간 오히려 의미가 증폭된다. 작업에서 비언어적·비발화적 소리는 언어적 소리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왼쪽 위 〈붉은 소음의 방문〉 단채널 비디오, 4K, 컬러, 사운드(스테레오, 바이노럴) 12분 14초 2018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아래 〈청음 훈련〉 단채널 비디오, 4K, 컬러, 사운드(스테레오, 바이노럴) 15분 2022
오른쪽 위 〈듣는 손님〉 단채널 비디오, 4K, 컬러, 다채널 사운드 38분 2025 국립현대미술관, SBS문화재단 제작지원
ⓒ 김영은 《올해의 작가상 2025》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 전경 2025 언어적 소리가 등장하더라도 관객이 먼저 인식하는 것은 의미
아래 〈Go Back to Your〉 단채널 비디오, 4K, 컬러, 사운드(스테레오, 앰비소닉) 9분 47초 2025 국립현대미술관, SBS문화재단 제작지원 ⓒ 김영은
사진: 홍철기 제공: 김영은
소리 민족지학을 작업 방식으로 활용한 이후, 작가의 지각과 청취에 대한 태도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소리 민족지학을 작업 방식으로 택한 가장 큰 계기는 이주 경험이었다. 미국으로 이주하며 주변의 사운드스케이프가 변화했고 정체성을 새로 정립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청취 방식 역시 재구성되었다. 당시 중요한 질문은 “한국인으로서의 청취 방식이 존재하는가”였다. 특정한 소리나 음악에 대한 선호가 단순한 개인적 취향이 아니라, 한국과 동아시아, 더 나아가 세계사의 맥락 속에서 형성된 감각일 수 있다는 인식에 이르렀다. 감각은 개인에게 고유하지만 동시에 역사 속에서 구성된다. 이러한 접점을 탐색하는 과정은 정치적 관점의 변화로도 이어졌다.
관람객은 작품을 ‘듣는’ 청취자이자 ‘주체’가 된다. 작품에서 관객의 청취 역할을 어떻게 상상하고 구성하는가?
관객이 전시를 통해 일상 속에서 놓치고 있던 소리를 다시 인식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연작에서는 관객이 소리를 듣는 주체가 되도록 구성했다. 헤드폰을 통한 3D 사운드, 1인칭 청각적 시점, 1인칭 서술의 내러티브를 통해 관객이 과거의 시점에서 소리를 듣는 인물이 된 것처럼 경험하도록 했다. 동시에 타인의 청취 경험을 대리하되 해석이 고정되지 않도록 여지를 남겼다. 그러므로 관객이 받아들이는 의미는 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
작업을 하면서 많은 영감이 되었던 기형도의 시(詩) 「소리의 뼈」는 한 학기 동안 침묵을 한 김 교수의 행동에 대한 학생들 저마다의 해석이 나열된 시이다. 그리고 그 시는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나의 작품을 본 관객의 경험 역시 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는 지점에 이른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2025년 ACC 미래상 수상과 올해의작가상 후보 선정 등 의미 있는 한 해였다. 2026년의 계획은 무엇인가?
현재는 ACC 전시 준비에 집중하고 있다. 아직은 멀티채널 사운드 인스톨레이션을 계획하고 있다고만 말할 수 있겠다.
1 소리 민족지학 관련 참고는 케이시 메시아 「김영은과 경계의 청취」 《올해의 작가상 2025》 비평문 참조
김지평/ 1976년생. 이화여대 동양화 학사, 동 대학원 미술교육 석사 졸업.《없는 그림》(인디프레스 갤러리, 2023), 《기암열전》(갤러리 밈, 2019), 《평안도》(아트컴퍼니 긱, 2015) 등 개인전 다수. 2024 부산비엔날레 《어둠에서 보기》(2024),《민화와 K팝아트 특별전: 알고 보면 반할 세계》(경기도미술관, 2024),《제21회 송은미술대상전》(송은, 2021) 등 다수 전시 참여
김지평 Kim Jipyeong
강재영 기자
김지평은 정체성을 규정하는 모든 구조와 체계를 의심하고 개념 기저의 본질을 끌어낸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재, 중심과 주변, 생물과 비생물, 역사의 생성과 소멸 등 매겨진 ‘언어적 정의’ 들이 그 대상이다. 과거와 현재가 시차를 뛰어넘어 연결되고 이곳과 저곳이 서로를 넘나들며 교차-충돌한다. 그는 몸에 밴 해체적 사유로 동양과 서양, 전통과 동시대, 어제와 내일을 바쁘게 연결하는 매개자이자 편집자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건 자신과 사회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설정하고, 중심과 주변의 관계를 위계 바깥에서 사고하는 그의 자유로운 태도와 시선이다.
올해의 작가상 전시 이후, 요즘 깊이 빠져든 게 있다면?
늘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뭔가를 계속 소비하고 본다. 그런데 전시를 마쳤는데도 거북이 리서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번 전시도 ‘코즈믹 터틀(Cosmic Turtle)’이라는 큰 주제로 꾸몄는데, 고궁박물관에서 본 거북이 인장부터 사극 속 이미지까지, 일상에서 자꾸 거북이 도상이 보이고 수집하게 된다. 전시를 위해서는 범위를 좁혀야 하는데, 오히려 끝나고 나니 거북이 세계가 계속 확장되고 있다.
‘코즈믹 터틀’을 여는 출발점은 어디인가?
고대 중국 신화에는 ‘낙서(洛書)’와 ‘하도(河圖)’라는 신화가 있다. ‘거북이와 용마가 각각 등에 새겨진 도형을 인간에게 전해주고, 그 도형으로 방위와 법과 문자를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신화는 사실을 말한다기보다 진실을 알려주는 방식이라고 믿어왔다. 이전 작업 ‘평안도’ 연작(2014~2016)에서도 민담과 신화를 많이 참조했는데, 신화적 세계관이 내 인식 바깥의 차원을 넓혀주기 때문이다. 낙서, 하도 신화는 동아시아 서화의 뿌리이자 ‘도서관’이라는 말의 기원이다. 그래서 이번 전시 전체를 상징하는 중심 개념으로 놓고, 일상에 남아있는 ‘동양화’의 뿌리, 신화의 기원을 펼쳐 보이고 싶었다.

〈코즈믹 터틀〉(부분) 조각한 나무 패널 위에 잉크와 혼합재료 2025
그 신화가 ‘지금’과 맞닿는 지점은 어디였나?
몇 년 전 신문 기사에서 ‘거북이가 삐라를 먹고 죽었다’는 이야기를 봤다. 환경 다큐나 해양 생물의 죽음은 흔히 접하지만, 삐라를 해초로 착각해 먹었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인간에게 문자를 선물로 줬던 거북이가 문자를 먹고 죽은 셈인데, 그 문장은 이념 선동의 문자이자 혐오와 갈등의 언어다. 아름다운 신화가 문명의 파괴로 되돌아온 장면처럼 보였고, 언어의 붕괴·문명의 붕괴·생태의 붕괴가 한 지점에서 겹친다고 느꼈다. 동시대 기술발전에 대한 나의 우려와 함께, 보도기사와 신화 사이에서 전시 준비가 시작됐다.
8점의 목판화 연작은 어떤 방식으로 읽히길 바랐나?
거북이 등딱지의 육각형 패턴을 보며, 옛사람들이 밤하늘의 별이나 우주가 거북의 등에 비친 것을 상상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낙서 하도’ 신화가 별자리에서 왔다는 이설도 있다. 그래서 ‘거북이의 등에 비친 무늬-문자-세계’로 이어지는 연결을 ‘별자리’ 이야기로 만들었다. 목판화 중 하나엔 여러 언어로 ‘별’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데, 마치 상형문자처럼 보일 것이다. 동아시아 서화에서 ‘쓰기’와 ‘그리기’가 붙어 있다는 감각, 즉 그림은 문자처럼 그리고 문자는 그림처럼 쓰는 관계를 구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삐라를 먹은 거북이가 말해주듯, 문자와 언어가 무너진다는 건 문명이 흔들리고 파괴되는 일이다. 목판화 중에 ‘디스-애스터(dis-aster)’라고 쓴 것이 있는데, 실제로 ‘별이 없는 상태’는 재난(disaster) 이라는 단어의 기원이다. 별이 없다는 건 문자가 사라지는 일이기도 하고, 자연이 파괴된 상황이기도 하며, 더는 밤하늘을 신화로 읽지 못하는 상태이기도 하다. 그래서 파국을 비극적으로 재현하기보다, 지금 시대의 속도를 조금 늦추는 쪽을 제안하고 싶었다. 거북이처럼 느린 시간을 견디며 다시 관찰하고 다시 감각하는 쪽으로 말이다.

〈산수화첩〉(부분) 화첩 위에 중고 병풍에서 떼어낸 산수화로 혼합 재료 콜라주,
유리 쇼케이스, MDF, 인테리어 필름, 벽돌, 시멘트 약 165×46×25cm 2023 
〈다성 코러스〉 2023~2025
전시 공간이 마치 산수도 안으로 들어간 것처럼 연출되었다. ‘산수문화’라는 공간도 운영한 바 있다.
미술관 안에 다시 누각을 짓는 것을 염두에 뒀다. 다만 전시장에는 이미 벽과 천장이 있으니, 사방이 트이고 작품을 조망할 수 있는 벤치 같은 구조로 만들었다. 팔각 누각 위에는 거북이가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도형인 낙서를 새기고, 그 아래에는 작은 연못과 미니어처 산수를 놓았다. 산수의 기본 단위인 돌과 물, 그리고 누각이 함께 있는 차경(借京: 경치를 빌리다)의 원리를 도입한 것이다, 그것을 조형적으로는 미니멀하게 두되 ‘앉는 자리’로 기능하길 바랐다. 더 나아가 이 누각은 전통 정원과 뜰의 축소판이자, 동아시아 우주관 안에 앉는 감각에 가깝다. 흥미로운 건 이런 전통의 흔적이 지금도 ‘팔각정’이란 이름으로 놀이터나 쉼터 같은 ‘파빌리온’으로 무심히 남아있다는 점이다. 열화된 형태로 남은 그 상징들을 통해, 기원과 현재가 접속되는 순간을 보고 싶었다.
논리적이고 선형적인 역사 재현을 위한 재구축이 아니라, 중심으로 인해 밀려난 ‘주변’에 주목하는 듯 보인다. 작가가 말하는 ‘주변’은 무엇인가?
중심과 주변의 축은 계속 변하지만, 늘 중심보다 주변이 더 자유롭다고 느낀다. 메이저보다 마이너 대중문학이 더 재미있고, 커뮤니티도 더 활성화되는 경험처럼, 나만 찾아봐야지 하는 감각이 청소년기부터 있었다. 그런 관심이 ‘동양화’, 전통으로도 이어져 왔다. 흥미로운 건 비서구 미술이 서구 미술의 주변이라면, 비서구 전통 안에도 메이저와 주변이 있다는 사실이다. 산수화·문인화만이 아니라, 젠더적 공감이 생기는 계보로서 민화나 부적, 장식 같은 서화의 주변에 관심이 간다. 주변은 중심을 흔들기도 하고, 반대로 중심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재야(在野)의 미술사’로서의 미술의 자취를 탐닉하게 된다.
〈캐리〉(2017)가 과거의 작업과 현재의 작업을 이어주는 포털처럼 느껴졌다.
〈캐리〉는 하도낙서 도상이 처음 등장한 작업이다. 산수화가 ‘자연과의 합일’이나 ‘무위자연’ 같은 말을 반복할 때, 그 사유를 여성으로서 어떻게 체현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영화 〈캐리〉(1976)의 서사와 산수-풍경의 사상을 연결해 보며, 변화하는 세계를 읽는 다른 문장을 만들고 싶었다. 이번 전시에서도 하도낙서 도상이 다른 방식으로 조응하길 기대했다.
병풍은 이번 전시에서 어떤 매체가 되었나?
병풍은 한때 제사와 예법의 중심에 있었지만, 코로나 이후 제사 관습이 더 급격히 약해지면서 집집마다 쓰임을 다한 물건이 되었다. 나는 당근마켓에서 나눔되거나 버려지는 병풍을 받아, 그 안의 요소들을 다시 사용했다. 어떤 가정에서 소중히 쓰던 물건을 ‘재활’하는 일이다. 한편 미술의 관점에서 병풍은 지지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구 제도비평이 캔버스·나무 같은 지지체를 질문해왔듯, 나도 서화의 구조를 살피는 방식으로 병풍을 읽고 싶었다. 병풍은 사람 시선 높이에서 왔다 갔다 하며 인체를 반영하는 매체이기도 해서, 여러 ‘옷’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의 군상을 펼쳐 보일 수 있었다.
‘재활’이라는 개념이 흥미롭다.
쓰고 버린 병풍을 재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재활용(recycling)의 의미도 있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재활(revitalizing)한다는 감각이 중요했다. 내가 강조하고 싶었던 ‘재활’은 ‘다시 활성화한다’, ‘다시 살아난다’가 더 맞다. 사물들의 속살거림이나 거북이 신화가 말해주는 애니미즘적 세계도 중요했고, 병풍을 소박하게 다시 세워 보게 하는 것(pop-up)1도 그 연장선이다. 다루는 재료 역시 살아 있다. 한지와 천은 온도와 습도에 민감해서 그 표면이 고르지 않을 때, ‘한지가 운다’고 표현하는데, 나처럼 오래된 미디어를 다루는 작가에겐 이렇게 재료가 살아 있다는 감각이 늘 함께 존재한다.
〈없는 그림〉(2021)도 개념적으로 재활과 맞닿는다. 없는 전통을 애도함과 동시에 자유로워지면, ‘없음’의 자리는 오히려 새롭게 만들어질 ‘있는 것’들로 가득할 것이라는, 역설적 방식의 재활이다.
〈다성 코러스〉(2025) 앞에서 소리가 없어 조금 당황했다.
〈없는 그림〉처럼 ‘비움’을 통해 또 다른 감각을 환기하길 바랐다. ‘다성(多聲, 다양한 목소리)’에 대한 상상은 관객의 몫인 것이다. 물리적 ‘부재’를 통해 표현할 수 있는게 점점 많다고 생각하게 됐다. 대중문화
1 〈산수화첩〉(2023~2025)의 영문 제목이 ‘Pop-up Sansu’다. 편집자 주
언메이크랩/ 2016년 결성. 최빛나, 송수연으로 구성된 콜렉티브.《인기생물》(보안여관, 2023) 등 개인전 다수. 제15회 광주비엔날레《판소리, 모두의 울림》(2024),《예측 (불)가능한 세계》(국립현대 미술관 청주, 2024) 등 다수 전시 참여.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미디어 버스, 2024) 등 집필. 2017년부터 포킹룸을 기반으로 연구 활동
언메이크랩 Unmake Lab
황수진 기자
언메이크랩은 기계가 데이터를 학습하고 생성한 이미지에 주목하며, 그 작동 방식에 스며든 인간 사회의 욕망, 개발의 논리, 역사 인식을 탐색한다. 이들은 인공지능의 학습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와 어긋남, 우연적 산물에 시선을 두고, 그 지점에서 사회적·생태적·역사적 맥락으로 이어지는 질문을 끌어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은 거대한 기술 담론을 개인의 감각과 구체적인 장소로 다시 불러들이며, 인공지능을 통해 우리가 세계를 인식해 온 방식과 그 전제를 되묻는다.
‘언메이크랩(Unmake Lab)’이라는 콜렉티브 이름의 의미를 설명해달라.
‘언메이크(unmake)’는 ‘다르게 만들기’, ‘망치기’라는 사전적인 의미를 지닌다. ‘구축하기’와 ‘해체하기’를 동시에 포함하는 단어라는 점에서 콜렉티브 이름으로 삼았다. 콜렉티브 이전에 문래동에서 일시적인 연구실 형태로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랩(lab)’이라는 단어가 붙었다. 이 단어에는 사람들과 공통 지식의 교류가 중요한 토대가 됐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최근 인공지능 작업이 늘어난 가운데, 언메이크랩은 기술을 어떤 태도로 바라보고 작업하고 있나?
기술을 ‘전복’한다기보다는 ‘오용’하는 쪽에 가깝다. 시니컬하지만 농담처럼, 기술이 실패하거나 실수하는 순간에서 흥미로운 지점을 포착해 작업으로 끌어온다. 기술은 워낙 거대한 담론이어서 그것을 다루려 하면 늘 작아지는 느낌이 든다. 우리가 건드리는 지점이 사소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 거대한 기술을 다시 개인의 차원으로 회수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농담이나 유머 같은 방식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이런 태도는 기술의 거대함 앞에서 느끼는 일종의 ‘웃픈’ 감정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작업마다 사용하는 기술이나 언어 모델이 다른데,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나?
먼저 작업의 내용과 맥락에 어떤 기술적 접근이 적절한지를 본다.〈알고리드믹 워커스〉(2018)는 오래된 도시를 다루는 작업이기 때문에 최신 언어 모델보다는 오히려 마르코프 체인(Markov chain) 같은 초기 인공지능 모델을 사용하는 편이 더 흥미롭겠다고 판단했다.
반대로 기술을 실험하는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게 의미를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가정 동물 신드롬〉(2023)은 생성적 적대 신경망(GANs)으로 실험하던 과정에서 작업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가 다시 작업의 의미를 만들어냈다. 일정 수준 이상으로 기술적 구조를 이해하게 되면 그다음 작업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경우도 많다. 인공지능의 시각, 특히 객체 인식 인공지능을 다루는 과정에서 〈신선한 돌〉(2020), 〈시시포스 데이터셋〉(2020)과 같은 작업들이 나왔다. 이 작업들은 하나의 연결된 기술적 토대를 공유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다루는 과정에서 ‘데이터셋-팅(dataset-ting)’을 중요하게 이야기해 왔다. 왜 이 개념을 강조하나?
‘데이터셋’이 인공지능의 가장 하부 구조라는 점은 이제 많이들 알고 있다. 우리가 ‘데이터셋-팅’을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사회적 맥락이 담긴 데이터를 직접 수집하고 그 과정에서 마주친 현실을 데이터셋으로 구성한 뒤, 이를 학습한 인공지능과 연결해 하나의 서사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시시포스 데이터셋〉에 사용한 돌은 4대강 준설 현장에서 발견한 것이다. 데이터셋으로만 보면 그저 깨진 돌에 불과하지만, 데이터셋-팅의 관점에서 보면 개발주의를 이야기할 수도 있고 그 돌이 어디에서 어떤 상황 속에서 수집되었는지에 대한 서사와 맥락이 결부돼 있다. 우리는 그 맥락을 통과해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한다. 사변적이거나 은유적인 데이터셋을 스스로 구성하고, 그 구성 과정에서 마주친 현실을 데이터에 실어 말하는 것 자체가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뉴-빌리지〉 기록영상, 게임엔진, 단채널 비디오, 4K, 컬러, 사운드(스테레오) 24분
2025《올해의 작가상 2025》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 전경 2025 사진: 홍철기
컴퓨터 과학의 기준으로 ‘실패’로 보일 수 있는 결과를 어떻게 작업으로 이어가나?
데이터셋에 없는 형상이 나오면 컴퓨터 과학의 영역에서는 실패로 간주된다. 그런데 왜 데이터에 없는 형상이 나왔는지, 왜 학습이 이런 방식으로 진행됐는지, 왜 실패가 발생했는지를 질문하다 보니 그 지점에서 의미에 도달하게 됐다. 그런 지점들이 작가가 다르게 이야기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가정 동물 신드롬〉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결과 역시 학습 과정 중에 일시적으로 나타난 데이터다. 안정화된 모델을 가져와 다시 학습시키는 과정에서 기존 학습의 가중치 위에 우리가 넣은 데이터가 전이되며 순간적으로 생성된 결과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이미지를 ‘목격’했다고 표현한다.
사실 단일한 인공지능도 하나의 고정된 개체는 아니다. 이 결과가 나올 수도 있고 나오지 않을 수도 있으며 특정한 순간에만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마치 자연과학과 같이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편적인 지식이나 고정된 사실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이 작업을 작품으로 제시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술적 접근과 컴퓨터 과학적 확인이 겹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술적 은유와 컴퓨터 과학에서 설명이 가능한 지점 사이에서 작품을 만들려고 한다.
〈시시포스의 변수〉(스틸) 4K, GPT-3, 게임엔진, 가상인간, 모션 트래킹 16분 2021
( 2024 재편집)
작업을 보면 4대강 준설 현장이나 불탄 산, 스마트 시티처럼 현장에서의 경험이 중요한 출발점처럼 보인다.
항상 작업을 염두에 두고 필드 리서치를 나가는 것은 아니다. 관심이 생기면 먼저 가보고, 그 경험을 기록해 둔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다른 것들과 연결되는 지점이 생긴다. 〈시시포스 데이터셋〉 역시 그런 방식에서 출발했다. 15년 전 4대강 개발 현장을 보고 기록해 두었던 기억이 있었고, 코로나 시기에 산에서 우연히 발견한 돌 하나가 그 기억과 맞물리면서 다시 현장을 찾게 됐다. 예전에 관찰했던 모래산에는 나무와 풀이 자라 하나의생태를 이루고 있었고, 그 안에는 여전히 4대강 사업 현장에서 나온 돌들이 박혀 있었다. 그 지점에서 다시 작업이 시작됐다.
이렇게 계속 걷고 현실을 보려는 태도는 기술과만 관계하지 않게 만드는 중요한 동력이 된다. 기술 위에 사회적 층위를 얹을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는 세계를 만나기 위해 걷는다고 느낀다. 그 과정에서 늘 어떤 것을 끌어냈고, 작업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배우는 것이 정말 많다.
이번 신작 〈뉴-빌리지〉(2025)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알고리드믹 워커스〉부터 도시를 둘러싼 노동, 개발 등 도시에 대한 관심사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는지?
맞다. 의외로 우리는 도시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계속 도시를 보고 다녔지만, 작업으로 드러난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는 〈알고리드믹 워커스〉와 〈뉴-빌리지〉를 한눈에 보이게 배치했다.
〈알고리드믹 워커스〉는 구로공단에서 출발한 작업이다. 구로공단은 국가 시범 단지였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산업 구조가 IT 중심으로 바뀌며 구로 디지털 단지로 전면 재개발됐다. 구로공단은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한 장소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런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지점에서 한 도시가 노동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생겼다. 도시는 이렇게 뒤집히듯 재개발됐는데, 왜 노동의 조건이나 상황은 반복되는가 하는 질문에서 이 작업이 시작됐다.
〈뉴-빌리지〉 역시 스마트 시티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다. 스마트 시티에 대한 관심은 10년도 넘게 이어져 왔고, 부산 에코델타 시티의 경우에는 4~5년 전부터 주목해 왔다. 그곳은 낙동강 철새 도래지 바로 옆의 삼각주 지역으로, 과거에는 도시 외곽에 해당하던 곳이다. 4대강 친수구역 특별법을 계기로 개발이 가능해졌고, 그 지점에서 스마트 시티와 4대강이라는 이슈가 만나 작업으로 이어지게 됐다.
이 지역은 원래 대저토마토 품종을 많이 재배하던 곳이기도 하다. 스마트 시티가 들어섰음에도 토마토 생산량이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났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래서 이 도시를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으로 토마토를 알레고리로 사용하게 됐다. 상업적으로 가축화된 방식의 토마토 품종을 도시의 서사나 ‘스마트주의’라는 층위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스마트 시티는 특히 그렇지만 도시는 기술의 집약판이기 때문에 생각해 볼 지점이 많다.
최근 렉처 퍼포먼스 〈기계의 우화〉에서 공개한 〈뉴럴 타이거〉는 현재 구상 중인 작업이라고 들었다. 이 작업은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2023)에서 다뤘던 박제와 어떤 문제의식을 공유하는가?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에서 일부 다뤘듯, 인공지능이 표피로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과 인간이 박제를 인식하는 방식 사이에 흐릿한 연관성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당시에는 박제 자체보다는 우리가 호피를 뒤집어쓰고 퍼포먼스를 했던 장면과 더 연결돼 있었다. 구상 중인 작업에서는 박제가 가진 표피성과 인공지능 신경망이 대상을 인식하는 표피성 사이의 접점을 다루고 싶었고, 그 이야기를 〈뉴럴 타이거〉에서 보여주려고 한다.
지금의 인공지능은 디지털 미디어라기보다는 합성 미디어에 가깝다. 이 합성 미디어가 어떤 세계를 만들어내고, 또 어떻게 재현하는지 이야기하려고 한다. 작업 제목 역시 신경망을 뜻하는 ‘뉴럴 네트워크’에서 가져왔다. 예를 들어 ‘데드 타이거’라는 프롬프트를 입력하면 윤리적으로 정화된 상태의 마치 잠든 듯한 호랑이 이미지가 생성된다. 우리는 그 이미지를 ‘뉴럴 타이거의 박제’라고 부른다. 신경망이 재현한 생명의 이미지와 박제가 보여주는 생명의 이미지가 겹치고, 그 안에 식민의 역사까지 포개지는 지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작업에서 인공지능은 인간의 인식 체계와 사회적 전제가 어떻게 학습되고 재현되는지를 드러내는 장치처럼 보인다. 이런 점에서
인공지능을 벤야민이 말한 ‘시각적 무의식’을 오늘날 다시 작동시키는 매체로 볼 수 있을까?
예전에는 인공지능을 만든다는 것이 곧 데이터셋에 접근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프롬프트만으로도 대부분의 작업이 가능해지면서 기술의 내부 구조보다는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문화적·정치적·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작업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술적 메커니즘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환경에서 기술의 메커니즘을 통해 무엇을 볼 수 있는지를 계속 고민하고 있다.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하나의 관찰 렌즈다. 인공지능이 재현하는 이미지에서 인간의 어떤 측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야기들이 담론적으로 더 풍성하게 확장되기를 바라고 있다.
임영주/ 1982년생. 홍익대 회화과 학사 및 동대학원 석사 수료. 개인전 《차르르 차르르》(갤러리 조선, 2020), 《미련》 (페리지갤러리, 2024) 등 개최.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독일 루트비히 미술관, 아트선재센터 등에서 열린 단체전 참여. 『고 故 The Late』(나선프레스, 2025), 『인간과나』(나선프레스, 2021) 등 저술. 프리즈 서울 아티스트 어워드 (2025) 수상. 부산현대미술관, 서울시립 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임영주 Im Youngzoo
김소정 기자
“각자의 인생을 걸고 모든 기술을 사용해야 원하는 새를 볼 수 있어요.” 길 잃은 새의 사후 세계를 따라가는 60분짜리 영상 〈고 故 The Late〉는 비가시세계의 실존성을 강하게 드러내며 인간의 믿음을 재고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임영주는 현대의 기술이란 가시세계 너머의 것을 보려는 인간의 오래된 욕망에서 촉발되었음을 알리며 확장된 다매체 작업을 통해 관객의 감각, 또는 ‘원하는 새’를 볼 수 있을 제3의 눈을 일깨운다.
무속의 모티프를 가지고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작업의 출발점이 궁금하다.
어렸을 때의 경험과 의문들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첫 번째 전시에서 미신과 과학을 다루게 됐다. 사실 미신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다. 우리는 늘 비가시적인 세계를 다루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으며, 과학적인 태도를 견지한다면서도 미신적인 상황을 수긍하기도 한다. 양쪽 세계에 살면서 마치 다른 쪽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자주 접했다. 그들에게 다른 세계가 과연 보이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작업 초기부터 지금까지 그와 같은 주제를 이끌어 온 데에는 다른 무엇보다 개인적인 경험이 강하게 작용했을 듯하다.
그렇다. 개념이라기보다 감정의 작용이 크다. 어린 시절 느꼈던 어떤 강렬한 감정이 성인이 되어서도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지 않나. 어린 시절의 좋은 기억은 대부분 무속 세계와 연관된 것인데 비해 부정적인 감정은 그로 인해 주위에서 배척당하는 것 같았을 때 느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이러한 감정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큰 사건들과 관련됐다. 무속과 연관된 여러 정치적 사건에 대해 사람들이 놀라는 모습을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요소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을 처음 작업에서 시도했다.

〈고 故 The Late〉 영상, 소리, 물체, 퍼포먼스, 웹사이트, 책 60분 2023~2025
올해의 작가상 후원으로 제작 제공: 작가
한국에서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열기가 점화되고 시간이 지나며 사그라드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 에너지의 전환이 빠르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무속은 크게 에너지의 트랜스 상태로 설명할 수 있다. 한국 특유의 성향이 무속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내 작업에 무당이 등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도 사람들이 무속적이라고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작업에서 보여주는 에너지 전환 과정, 그러니까 두 개를 병렬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이 동시에 일어나는 상황을 연출하거나 긴장을 보여주는 방식을 차용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번 전시는 압도적인 디스플레이를 보여준다.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말 그대로 다른 세계에 머물다가 나온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전시장을 ‘빈 무덤’으로 상정했다고 알고 있다. 그 배경을 설명해달라.
‘빈 무덤’은 관람자가 쉽게 체감할 수 있는 표현을 찾으며 썼다. 전시는 ‘빈 공간’에 대한 이야기다. 빈 공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국에서 오래된 관습인 허묘(虛墓)를 떠올리게 됐다. 2021년 고양 레지던시에 있을 때 작업실 창문 앞에 늘 무덤 하나가 보였는데 어느 날 그것이 빈 무덤인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봐왔던 무덤이 이상하게 달리 보였다. 당시 외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코로나 기간이기도 해서 혼자 여러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문득, 무덤이 비어 있으니 내가 한번 들어가 볼까 싶었다. 내 자리가 있다는 점이 의외로 힘이 됐다. 그러면서 메타버스를 상기하게 됐다. 허상의 세계를 만들어 허상의 나를 위치시키는 것. 그런 배경에서 ‘내 몸 뉘일 곳’인 빈 공간을 생각하며 전시를 준비했다.
작가가 의도한 바와 관람객이 실제로 체험한 바 사이의 격차가 생길 수밖에 없는 주제다. 관람객이 어떤 체험을 하길 기대했나?
전시장 한쪽에서 더미 인간(인형)이 VR 헤드셋을 쓰고 누워있다. 나는 이〈故 VR〉의 환영을 관람객이 보는 것이라고 설정했다. 그러니 전시장에서 보는 모든 장면은 VR 속 공간이 되며, 사람들은 VR 없이도 앞·뒤·양 옆을 보고 자기 몸도 보면서 돌아다니는 셈이다. 죽음 직전에 더미 인간의 뇌에서는 찰나의 생존을 위한 주마등1 을 돌리고, 관객은 이를 화면에서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더미가 되기도 하고 귀신이 되기도 한다.
처음 메타버스에 들어갔을 때 뭘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그 시간을 관객도 체험하길 원해서 그렇게 공간을 구성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전시장에서 각 사람은 어디에서 어떤 모양과 형태로 놓일지를 선택하는데, 이에 따라 각기 접하는 이야기들이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전시장에서 관객이 암묵적 동선 없이 작업을 따라다니며 헤매는 모습이나 서로를 응시하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영상 화면을 마주해서 배치하거나 천장에 설치된 영상 작업과도 시선이 교차된다. 이러한 연출에 특별한 의미가 있나?
시점이 핵심인 작업이다. 시점은 보통 과거, 현재, 미래를 의미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나와 타인의 시점도 적용된다. 시점이 이동하는 흐름, 여러 시점이 섞이는 지점이 매우 중요했다.
일반적으로 전시장에서는 관찰자와 작업이 유동적으로 섞이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는 누워있는 관객을 작품(속 인물)이 바라보거나 이 광경을 반대쪽에서도 보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상황이 자연스럽기 위해 시점들이 계속 흘러야 했다. 사람들이 서로를 귀신처럼 여기고 이들의 움직임을 의식하되 무시하며 전시장을 돌아다니는 상황을 만들고자 한 시도였다.
시점의 다른 측면, 시차의 개념을 살펴보자. 구작과 신작이 섞여 있기도 하고, 제목처럼 고(故)와 더 레이트(the late)에서 나타나는 시차가 돋보인다. 둘 다 고인을 지칭하는 말이면서도 언어에 따라 서로 다르게 발생하는 차이를 짚어낸 점이 인상 깊었다.
‘고’가 오래된 과거의 일을 뜻한다면 ‘레이트’는 최근에 가까운 단어다. ‘고’는 고인의 입장에서, ‘더 레이트’는 고인을 (늦게) 찾아온 사람의 입장에서 쓰기에 적합하다. 단어에 붙어 있는 여러 의미와 시차를 염두에 둔 이유는, 전시를 보러오는 관객에는 사람뿐 아니라 귀신도 있을 것이고 새나 눈이 6개 달린 카메라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상 시작 부분에 ‘미신주의’, ‘과학주의’와 같은 문구를 넣었다. 안내문에는 “귀신이면 벽에 붙어 보고, 새라면 높은 곳에서 보고, 눈이 6개 달린 카메라는 어디서든 다 볼 수 있을 것이니 아무 곳에서나 서서 보고, 눈이 앞에 두 개 달린 사람은 한계가 많으니까 최선을 다하세요”라는 식으로 적어놨다.
인간의 눈은 앞을 향해서만 달려있기 때문에 좁은 시야각을 갖는데, 여기서 인간 고유의 아름다운 생존 기술이 나왔다. 원시시대에는 한 사람이 본 것을 전수하고 여기에 다른 관찰자의 시점을 조합하며 대상의 총체적 상을 추론해 내는 집단적 생존 기술이 필수였다. 관객 역시 시야의 한계에 도전하면서도 각자 가진 생존 기술을 발휘하며 감상하길 원했다. 관객은 결국 모든 것을 다 보지 못하므로 실패가 전제된 의도다. 60분짜리 영상을 끝까지 감상했다 하더라도 모든 화면을 놓치지 않고 동시에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VR은 일종의 태도”라고 했던 말에 깊이 공감한다. 결국, 가상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와 범주의 문제가 아닌가. 그러한 차원에서 매체별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층위도 서로 다를 것이다. 매체별로 어떤 고민이 있었나?
나에게 VR은 헛것을 보는 것에 대한 제스처에 가깝다. 사실 내가 돌구멍을 보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관객 앞에 돌 구멍을 뚫어주는 것과 VR을 씌워주는 것은 비슷한 일이다. 그리고 시선의 끝에 ‘빈 공간’이 있다는 것도.
비디오는 한쪽으로 흘러가는 이야기인데, 되감기를 하지 않는 이상 일방적인 방법으로 제시된다. 웹사이트는 한번 들어가면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어서 내가 한없이 접을 수도, 쌓을 수도 있다. 책은 물성이 있어서 직접 만지며 처음과 끝을 알 수 있고 그 사이를 언제든지 오갈 수 있다. 작가가 어떤 감상을 유도하든지 간에 관객에게 책을 쥐여주는 순간, 그는 한 페이지에서 10시간을 머물거나, 첫 페이지에서 마지막 페이지로 가거나, 그냥 책을 덮어버릴 수도 있다. 나의 의도가 통용되지 않는, 관객이 주도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 시간이 책 속에 있다. 이번 전시에 나온 책『고 故 The Late』(2025)는 전시의 무게추처럼 작동하고 있다. 여기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먼저, 글자로 가득한 두꺼운 책이 전시장에 놓이는 것은 이례적이다. 이 책을 다 볼 수 없을 것이라는 가정, 즉 앞서 언급한 실패의 상황을 상정했고 첫 장의 제목에 ‘실패의 책’이라고 적었다. 두 번째로, 책의 무게가 대략 1.5kg인데 이는 인간 뇌의 무게와 비슷하다. 책장을 넘기는 것은 단순해 보여도 소뇌의 제어력이 필요한 고도의 행위다. 반면 텍스트를 읽으며 ‘빈 공간’, ‘헛것’ 등을 떠올리고 상상, 추론하는 것은 대뇌의 영역이다. 그래서 뇌의 무게와 비슷하게 책을 만들어 놓으면 관람객이 결국 누군가의 뇌를 주무르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고 故 The Late』 책 2025 제공: 작가
미신, 무속, 전통은 과거의 잔해를 상기시킨다. 기술은 그 반대로 미래지향성을 함축하고 있다. 두 단어의 시점을 접목해서 보여주며 관람객을 어떻게 설득하고자 했는가?
인간이 본인의 신체(적 한계)를 벗어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믿고자 하는 열망은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를 위해 과거에 무수한 시도를 했고 그것이 쌓여 지금의 기술이 됐다. 지금 보면 주술적이지만 당시에는 과학과의 구별이 없었다.
그 열망이 기술로 변환된 것이 지금의 테크 산업이고, 경제적으로 분출된 것이 암호화폐라고 생각한다. 둘 다 태생적으로 헛것을 믿는 믿음 위에 존재하는 요소이며, 인류가 애초에 가상의 금인 화폐를 만들어서 “이게 사실은 금”이라고 여기도록 강요한 사회적 믿음에서 출발한 것이다. 현실 경제 대부분은 빈 공간에 헛것을 만들어 두고 믿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오늘날 기술의 발전과 성공은 껍질 같은 것이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계속 실패해 왔다는 것이 핵심이고, 그 실패를 전시에서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기술사회라고 불리는 오늘날, 작업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주는 기술적 맥락이나 접점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코로나 시기를 지나면서 사람들의 움직임이 제한되던 때에 기술적인 도약이 있었다. 특히 VR 관련한 새로운 기술 담론이 꽤 생성됐는데, 종말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공간을 인지하고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에 대한 욕구가 커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기술은 그래서 작가에게는 태도로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기술은 빈 공간, 빈 무덤을 구현하는 ‘마음을 둘 곳’이다. 전시장에서 관객이 자신의 경험과 환경에 맞춰 링크되는 지점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1 ‘주마등 走馬燈 Life Review’ 프로젝트는 단채널 비디오 작품인 〈삼 세 번〉(2025), 더미 인간이 VR 헤드셋을 쓴 설치 작품 〈故 VR〉(2025) 및 두 개의 단채널 비디오 〈백 번 만나는 자리 百會穴〉(2025)과 〈웨이팅 M〉(2025)을 포함, 관객이 누운 상태에서 영상을 볼 수 있는 공간 구조까지 아우르는 작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