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토끼 소금: 살아 있는 제의》
광주시립미술관 2025.8.29~1.2
늦게 온 보살이 건네는 금빛 소금-상실의 시대를 위한 살아 있는 제의
김종길 미술비평
Exhibition

박찬경 〈범종각〉(사진 가운데 벽면 왼쪽) 캔버스에 유채 100×72.5cm×2, 145×90cm 2025
박찬경 〈고란사〉(사진 가운데 벽면 오른쪽) 캔버스에 유채 70×70cm×3 2024
《장미 토끼 소금: 살아 있는 제의》 광주시립미술관 전시 전경 2025
이미지 제공: 광주시립미술관
이수경의 〈번역된 도자기〉는 깨지고 흩어진 것들의 사리탑이었다. 황금빛 불 숨으로 기워낸 그 찬란한 파편들의 탑을 지나자 비로소 ‘홀림’의 붉은 장미와 신비로운 왕관들이 눈에 들었다. 이 화려하고 엄정한 성소를 건너가면 박찬경이 마련한 ‘신령한 재난’과 맞닥뜨린다. 그런 다음 계단을 타고 2층에 다다르면 김주연이 펼쳐놓은 초록 생명의 나무들과 흰 소금에 발을 담그게 된다. 나는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공간을 휘돌아다녔다.
전시를 다 보고 난 뒤에 들어왔던 그곳으로 나서는 순간, 뇌리에 강렬하게 스친 잔상 하나는 불화(佛畵) ‘감로도(甘露圖)’였다. 아귀도에 떨어진 영혼들의 고통(하단), 그들을 위로하는 성반과 제의(중단)를 거쳐 마침내 불보살이 강림하여 구원하는(상단), 그 수직적인 구원의 서사 말이다. 이 깨달음 때문이었을까? 글의 순서를 재배열했다.
비록 발걸음은 이수경의 황금빛 위로에서 시작되었으나, 이 거대한 제의는 고통을 직시하는 박찬경의 ‘바닥’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치유는 상처를 확인하는 데서 비롯된다. 구원은 언제나 가장 낮은 곳, 텅 빈 지옥에서 쏘아 올려지는 법. 이제 기억을 되감아, 물리적 입구가 아닌 서사적 입구, 즉 박찬경이 묵묵히 지키고 있는 현대의 아귀도(餓鬼道)부터 이 글을 시작한다. 이것은 거꾸로 올라감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우리 시대 감로도의 재구성이다.

이수경 〈달빛 왕관_용의 신부〉(사진 왼쪽 앞) 철, 황동, 유리, 에폭시, 나무, 진주, 24K 금박, 자개 162×90×90cm 2018
《장미 토끼 소금: 살아 있는 제의》광주시립미술관 전시 전경 2025
텅 빈 지옥, 도래한 악마들
서늘한 옥색 벽면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 기둥에는 셰익스피어의 희곡『템페스트』의 한 구절이 주련(柱聯)처럼 박혀 있었다. “지옥은 비었고 모든 악마들이 여기 있다”. 이 문장은 이곳이 ‘감로도’의 도상학적 구조 중 가장 낮은 곳, 즉 ‘밑바닥’임을 선포한다. 고통받는 아귀들이 우글거리는 그 지옥이, 바로 우리가 발 딛고 선 ‘여기’로 소환된 것이다.
박찬경이 축조한 현실의 ‘밑바닥’은 역설적이게도 고요하다. 작품〈후쿠시마, 오토래디오그래피〉(2019)와 〈늦게 온 보살〉(2019)에서 재난은 형체가 없다. 작가는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라는 참혹한 비극을 다루면서도, 부서진 건물의 잔해 대신 보이지 않는 방사능의 공포에 주목한다. 그는 필름을 반전시킨 네거티브 기법과 방사선 감광 이미지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도처에 존재하는 ‘죽음-그림자’를 묵묵히 드러낸다. 검고 흰 화면에서 숲은 아름답고 기괴하다. 흰 하늘에 흩날리는 눈(雪)은 검은 낙진처럼 쏟아진다. 마치 소설가 김성동이『만다라』(1979)에서 “병 속의 새는 꺼내야 하겠는데, 병을 깨뜨릴 수는
없고 새를 죽일 수도 없는 딜레마”라고 되묻는 것과 같다. 재난이라는 병 속에 갇혀버렸으나, 삶의 터전(병)을 깰 수도 없고 그 안의 생명(새)을 포기할 수도 없는 현대판 아귀도의 현실! 박찬경은 이 서늘한 진실을 통해 현대 문명이 은폐하려 드는 ‘이곳의 지옥’을 적나라하게 들이댄다. 우리는 과연 번뇌를 일깨우고, ‘나’라는 본래의 참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까?
감로도의 ‘윗하늘’에는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불보살이 강림한다. 그러나 박찬경의 세계에서 구원은 언제나 한발 늦다. 작품 〈늦게 온 보살〉은 석가모니 장례식에 제자 가섭이 뒤늦게 도착했다는 곽시쌍부(槨示雙趺) 설화를 비틀어 놓았다. 설화에서 붓다는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밀어 늦게 온 제자를 위로하지만, 박찬경이 주목한 것은 그 기적이 아니라 ‘지각’이라는 처참한 시차(時差)다. 재난은 이미 벌어졌고, 사람들은 죽었으며, 방사능은 유출되었다. ‘모든 것이 다 끝나 버린 뒤에야’ 도착한 보살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지점은 한강이『소년이 온다』(2014)에서 “니가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가 되었다”는 문장과 뼈아픈 공명을 일으킨다. 날벼락 재난 뒤에 남겨진 자들의 시간은 멈춰버린 장례식과 같다. 박찬경의 카메라는 이 절망적인 ‘밑바닥의 시간’을 가만히 응시한다.

이수경 〈이동식 사원 2024〉 비단에 광물성 안료 각 160×74cm×6 2024
그렇다면 밑바닥에 희망이 없는 것일까? 그는 전시장 중앙의 설치 작품 〈맨발〉(2019)로 역설적인 대답을 내놓는다. 두 개의 나무가 오가는 단순한 기계 장치는 관 밖으로 나온 붓다의 두 발이다. 신비로운 아우라가 거세된 이 기계 움직임은 건조하고 무력하다. 그런데 그는 이 행위를 ‘의미 있는 헛수고’라고 짐짓 둘러댄다. 구원은 비록 늦었을지라도, “육신은 침묵하나, 두 발을 내밀어 산 자와 죽은 자가 여전히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하니, 이것은 기적이 아니라 간절한 기다림의 응답이다”라는 곽시쌍부의 변용처럼, 늦게라도 찾아와 발을 내미는 그 행위만이 유일한 끈이기 때문이다. 이는 재난을 이겨낼 희망의 출처는 제도나 이념이 아니라, 비극의 현장에 찾아와 늦게라도 애도를 표하는 그 사소하고도 간절한 몸짓 속에 있음을 웅변한다.
〈모임(Gathering)〉(2019)은 이 ‘밑바닥’ 세계를 견디는 존재들의 초상이다. 쌍림열반도 속 붓다의 관 주변에 모인 동물들을 찍은 이 사진 연작은, 슬픔을 공유하는 ‘애도 공동체’이다. 박찬경은 이들을 하나의 화면에 담지 않고 각각 분리된 프레임으로 ‘홀로’의 슬픔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들이 ‘죽음’이라는 공통된 사건 주변에 함께 모여 있음을 연출한다. 그 공간에 들어서면 ‘너나’도 다 그들과 하나다. 결국 그가 구축한 감로도의 밑바닥 지옥은 먼 곳에 있지 않다. 구원은 제때 오지 않는다. 우리는 텅 빈 지옥에서 보이지 않는 악마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이 서늘하고도 명징한 ‘재난의 직시’를 바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상처를 깁고 넋을 위로하는 다음 단계인 ‘가온자리의 제의’로 나아갈 길을 열 수 있다.
금으로 깁는 상처, 장미의 제단
서늘한 밑바닥 지옥을 빠져나와 바깥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공기 온도가 바뀐다. 이곳은 감로도의 허리, 즉 밑바닥에서 울부짖던 아귀와 고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상을 차리고 법석(法席)을 여는 가온자리다. 이수경의 공간은 바로 이 ‘제의’를 위해 마련된 거대한 제단이다. 제단 위에 올려진 성물은 〈번역된 도자기〉(2017)다. 그는 깨뜨려 버려진 도자기 파편들을 모아 잇고, 그 틈을 금으로 메웠다. 이는 흙의 육체가 소멸한 뒤 불의 뼈로 태어난 백자와 청자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는 통찰과 닿아 있다.
이 작업은 소설가 박상륭이 『죽음의 한 연구』(1975)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존재의 좌표를 옮기는 일이다. 찢어진 육신을 기워낸 자리는 흉터가 아니라, 다음 세상으로 건너가는 문이 된다”고 갈파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파편의 틈새를 흐르는 황금빛 선들은 단순한 봉합선이 아니다. 부서진 것들을 하나의 새로운 원형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생명의 혈관이다. 그는 스스로 활활거리는 불이 되어 파괴된 것들을 이어 붙이고 새로운 질서를 부여했다. 이 아름다운 제기(祭器) 위에서 밑바닥 상처들은 비로소 존엄한 아름다움으로 번역되어 좌표를 옮긴다. 이는 버려진 것들을 위한 헌사이자, 이승의 상처를 끌어안아 저승의 구원으로 연결하려는 치열한 중재의 행위다.
제단 뒤편으로 펼쳐진 회화 연작 〈오, 장미여!〉(2024)는 이 제의를 집전하는 샤먼의 춤사위이자 영혼을 부르는 주술이다. 붉고 푸른 안개 속에서 피어오르는 장미들은 작가가 최면 상태에서 마주한 전생의 기억과 무의식의 파편들이다. 이청준이 『서편제』(1976)에서 “한(恨)을 삭이고 삭이면 소리가 되고, 그 소리가 사무치면 비로소 꽃이 된다. 상처는 덮는 것이 아니라 소리로 풀어내어 피워 올리는 것”이라고 말했던가. 캔버스 위에서 무의식의 상처는 덮어지는 것이 아니라, 붓질이라는 소리로 풀려나와 마침내 붉은 장미꽃으로 피어올랐다.
붉은 장미는 내면 깊숙이 자리한 트라우마의 불꽃이자 생명력의 표상이다. 관객은 이 몽환적인 꽃밭을 거닐며 자신의 내면에 억눌려 있던 ‘사라진 기억과 억눌린 감정’을 마주할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불은 부동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잠잘 때도 살아 움직인다”라고 말했듯, 이수경의 불꽃은 멈추지 않고 타오르면서 영혼을 정화하고 위로한다. 제의의 정점에 위태롭게 솟은 〈달빛 왕관〉(2018)이 있다. 온갖 종교적 도상이 뒤섞인 이 탑은 하늘 땅을 잇는 안테나다. 마치 씻김굿 무가(巫歌)의 한 구절인 “이승에서 맺힌 고(매듭)는 풀고 가소. 맺힌 것은 풀고, 묶인 것은 트고, 닫힌 문은 열고 가소”라는 염원을 시각화한 듯하다.

김주연 〈기억 지우기 V〉 소금, 의자, 사용설명서, 책 가변 설치 2017 / 2025
이수경은 이 화려하고도 슬픈 왕관을 통해 우리 내면의 엉킨 매듭을 풀어내고, 밑바닥의 고통받는 영혼들이 윗하늘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해원(解冤)을 완성한다.
작가는 이 왕관들을 통해 “성스러움과 세속성을 넘나들며, 찬란한 외형 속에 감춰진 결핍과 상실의 감각을 환기”시킨다. 화려하지만 어딘가 기괴하고 슬픈 이 오브제들은, 재난 이후 남겨진 우리들이 붙잡고 있는 희망의 실체가 얼마나 연약하고도 간절한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신을 부르기 위해 세운 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면의 폐허 위에 세운 위령비이기도 하다. 이수경이 마련한 가온자리는 치열하다. 이곳은 밑바닥의 비극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단순히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황금’과 ‘장미’, 그리고 ‘불’이라는 예술적 연금술을 통해 승화시키려 애쓴다.
박찬경의 밑바닥에서 목격한 차가운 죽음은 이수경의 가온자리에 이르러서 따뜻하게 위로받는다. 나의 상처가, 우리의 비극이 버려지지 않고 귀하게 대접받고 있다는 위로. 이수경의 제단에서 위로받은 영혼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시선은 2층, 김주연의 공간으로 상승한다. 관객은 이 화려한 제단 앞에서 비로소 안도감을 느낀다.

김주연 〈Metamorphosis XI〉 신문, 나무파레트, 이끼 660×286×268cm 2025
《장미 토끼 소금: 살아 있는 제의》 광주시립미술관 전시 전경 2025
수직의 천도(天度), 초록빛 감로(甘露)
김주연의 공간은 감로도의 윗하늘, 즉 불보살이 강림하여 고통받는 중생에게 단비를 내리고 그들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상단의 세계다. 먼저 눈을 사로잡는 것은 〈수직 정원〉(2025)이다. 에메랄드그린 15그루가 바닥에서 천장을 향해 꼿꼿이 솟아 있다. 이는 법구경 제1장의 “모든 것은 서로 잇대어 있다. 꽃은 흙에, 흙은 비에 잇대어 있듯, 나의 생명은 너의 죽음에, 너의 죽음은 다시 나의 생명에 잇대어 흐른다”는 말씀처럼, 땅(현실)과 하늘(초월),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거대한 생명 줄기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천도(薦度)의 사다리다. 박찬경의 밑바닥이 땅으로 꺼지는 무거운 공간이었고, 이수경의 가온자리가 옆으로 퍼지는 춤의 공간이었다면, 김주연의 윗하늘은 중력을 거스르고 위로 솟구치는 ‘승화(昇華)’의 공간이다.
나무들 아래 바닥에는 “숲에 쏟아지는 별들”, “경계를 지우는 안개”, “우주를 삼킨 돌” 같은 문구들이 새겨져 있다. 마치 지상에 남은 미련을 끊고 하늘로 오르는 영혼들을 위해 읊조리는 독경 소리 같다. 이 수직의 나무들은 밑바닥의 고통을 하늘로 올려보내는 ‘천도’의 안테나이자, 지상의 물리적 세계와 천상의 영적 세계를 접속하는 통로일지 모른다.
천도의 길목에 놓인 하얀 소금산 〈기억 지우기 V〉(2025)는 이 제의의 절정이다. 감로도에서 아귀들이 음식을 먹기 위해선 먼저 불보살의 감로수로 목구멍의 불을 꺼야 하듯, 상처 입은 영혼들에게는 정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소금은 부정을 씻고 신성한 공간을 마련하는 의식의 재료이자 부패를 막는 불변의 상징이다. 한강이 『흰』(2016)에서 “나는 당신에게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지 않는 것, 결코 더럽혀질 수 없는 어떤 흰 것을”이라고 썼던 그 마음과 닿아 있다. 작가는 재난과 오염으로 얼룩진 밑바닥 세계를 지나온 관객에게,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 흰 소금을 건네며 영혼을 닦아준다. 관객이 맨발로 소금산에 오르는 행위는, 밑바닥에서 묻혀온 재난의 먼지와 가온자리에서 미처 털어내지 못한 슬픔의 찌꺼기를 완전히 닦아내는 성스러운 의식이다. 죽음의 공포는 소멸되고 영혼은 비로소 투명해진다.
정화를 마친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가. 작가는 〈Metamorphosis XI〉(2025)을 통해 그 답을 제시한다. 5톤에 달하는 신문지들이 거대한 지층처럼 쌓여 있고, 그 위로 푸른 이끼가 뒤덮여 자라난다. 신문은 한때 ‘오늘의 진실’이었으나 시간이 지나 버려진 ‘죽은 언어’이자 ‘과거의 사체’다. 그는 이 죽음 덩어리에 물을 주고 씨앗을 뿌려 생명을 틔운다. 한국 자생철학의 ‘산알이론’이 말하듯 “육신은 흩어져 흙으로 돌아가도, 생명의 씨알인 ‘산알’은 죽지 않고 다시 뭉쳐 새로운 생을 도모한다. 썩음은 사라짐이 아니라, 산알을 품어 안는 거룩한 거름이다”라는 생태적 진리를 보여준다. 불교에서는 이숙(異熟), 즉 ‘다르게 익어감’은 곧 죽음이 생명으로, 과거가 미래로 순환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깨달음이다. 밑바닥의 방사능이 죽음을 잉태하는 재앙의 씨앗이라면, 윗하늘의 이끼는 죽음을 먹고 자라는 치유의 생명수, 진정한 의미의 감로(甘露)다.
광주시립미술관은 전시장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입체적 감로도’로 구축해냈다. 관객은 박찬경의 밑바닥에서 냉혹한 현실의 재난을 직시하고(지옥), 이수경의 가온자리에서 깨진 마음을 깁는 위로를 받으며(제의), 마침내 김주연의 윗하늘에 이르러 죽음을 생명으로승화시키는 정화(천도)를 경험한다. 이 여정을 마친 관객이 전시장을 나설 때, 그들의 가슴속에는 ‘장미’의 아름다움과 ‘토끼’의 슬픔, 그리고 ‘소금’의 정결함이 하나로 녹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삶을 다시 이어가게 만드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제의’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