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Curator’s Voice & Critique
《Complexity 컴플렉시티》
《공생》
《노노탁 NONOTAK》
《다니엘 스티그만 만그라네: 산과 친구되기》
《서민우: 허물과 궤적》
정소영·황수진·강민지·노재민·강재영
Curator’s Voice & Critique
《Complexity 컴플렉시티》
노화랑 2025.11.21~2025.12.10
정소영 기자

〈에덴 동산〉(사진왼쪽) 캔버스에 아크릴릭 260.6×324.4cm 2025《Complexity 컴플렉시티》
노화랑 전시 전경 2025
감정의 복잡성, 번역의 회화
김태협의 작업에서 중심에 놓인 주제는 ‘복잡성(Complexity)’ 그 자체다. 작가는 자신이 직접 겪은 사건과 간접적으로 감지한 사회적 정서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제도와 관계의 틀 안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개인의 정체성을 탐구해 왔다. 현대 사회의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감정의 층위는 작가에게 세상과 자아를 연결하는 하나의 구조로 인식되며 그는 이를 ‘밝음’과 ‘웃음’이라는 고유한 정서적 도구로 재구성해 화면 위에 옮긴다.
만화적 형식과 긴장의 감각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요소는 원색의 대립과 선명한 만화적 윤곽선이다. 이 시각적 언어는 화면에 유쾌한 인상을 부여하는 동시에 쉽게 해소되지 않는 미묘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선과 패턴은 작가가 일상에서 마주한 혼란과 감정의 파편들을 정리하고 이해하려는 과정의 결과로 읽힌다. 김태협에게 형식은 감정을 숨기는 장치가 아니라 복잡한 감정을 견디기 위한 하나의 정돈된 틀이다.
감정의 층위를 통과하는 작품들
그림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과장된 웃음과 유난히 크고 반짝이는 눈은 기쁨과 슬픔, 불안과 희망이 뒤섞인 인간 내면의 복합적인 상태를 상징한다. 웃음은 낙관이나 가벼운 태도가 아니라 복잡한 감정을 스스로 감당하고 견디게 하는 긍정적 방식이다. 동시에 불안과 피로를 가리는 방패이기도 하다. 작가는 힘든 상황일수록 웃음을 선택하는데, 이는 복잡한 세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고유한 생존 전략으로 작동한다. 더 나아가 웃음은 외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작은 희망의 신호로 기능한다.
이번 전시는 감정의 혼란 속에 자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묻는 작가의 사유를 작품별로 구체화한다.〈온기의 층〉(2025)은 따뜻함과 슬픔이 교차하는 감정의 지점을 다룬다. 따뜻함 속의 슬픔과 슬픔 속의 평온을 동시에 느꼈던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한다. 무겁고 복잡한 감정을 밝은 색채와 단순한 형태로 나타내 시각적으로 가벼운 전환을 이뤄내는 작품은 감정을 제거하거나 지우는 것이 아닌, 변환을 시도한다. 눈을 감은 인물의 미소는 슬픔을 회피하지 않고 내면을 응시하려는 작가 자신의 태도를 반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Still there〉(2025)는 현실의 충격과 폭력 속에서 버티며 살아가는 존재들을 다룬다. 폭발을 연상시키는 배경 한가운데 기둥에 묶인 채 웃고 있는 꽃의 모습은 의지와 포기, 생존과 무감각이 뒤섞인 복합적 감정 상태를 드러낸다. 작품은 세상의 폭풍에도 웃음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저항의 증거임을 말한다.
벽면 전체를 차지한 대형 작품 〈에덴 동산〉(2025)은 아담과 이브의 낙원을 순수한 유토피아가 아닌 감정의 파편과 시간의 잔상이 뒤섞인 불완전한 공간으로 재구성한다. 선악과 웃는 꽃,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애벌레 등 다양한 상징이 얽혀 있는 화면 구성은 일정한 규칙과 배열 속에서 복잡함 속의 미묘한 안정감을 만들어낸다. 이는 감정의 혼합물이 생성하는 ‘복잡성의 정원’에 대한 작가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이다.
‘그가 나를 복제했다’ 연작은 자기 자신과 닮은 인물을 반복적으로 등장시켜 현대 사회에서 ‘보이는 자아’와 ‘느끼는 자아’의 간극을 드러낸다. 웃음이 반복될수록 감정의 결은 오히려 더욱 복잡해지고, 결국 웃음은 ‘진짜 감정’이기보다 감정을 감당해내는 하나의 방식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시각화한다.

왼쪽〈온기의 층〉캔버스에 아크릴릭 116.8×91cm 2025
오른쪽 위〈그가 그를 복제했다〉캔버스에 아크릴릭 65×65cm 2024
아래〈우리의 밤 무대〉캔버스에 아크릴릭 112.1×145.5cm 2025
제공: 노화랑
복잡함을 살아내는 기술
김태협은 감정의 충돌과 혼란을 회피하지 않으면서 이를 긍정적으로 소화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형태로 전환하는 예술의 긍정적 기술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 속 웃음은 단편적이고 가볍게 여기는 웃음이라는 행위의 이면에 깊고 다층적인 감정의 생태계가 공존함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에게 웃음은 개인의 표정에 머무르지 않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의 내면을 비추는 하나의 거울이다.
《공생》
수원시립미술관 2025.9.26~3.2
황수진 기자

윤향로〈오이스터〉 폴리에스터 캔버스에 아크릴릭, 리퀴드 크롬 잉크, 엡손 울트라 크롬 잉크젯 가변 크기 2025
도착하지 않는 통로
전날 서울에 폭설이 내렸다. 모든 숨이 여전히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시끄러운 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텅 비어 있는 전시장은 매시 정각 누군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적막만이 흐른다. 한쪽 벽면, 8.8m 높이의 천장에 윤향로의 〈오이스터〉(2025)가 매달려 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절벽에 튀어나온 바위처럼 구겨진 비정형의 표면이 보인다. 작품의 이름처럼 굴의 울퉁불퉁한 요철과 거무스름한 외양을 닮았다.
카펫의 보송한 촉감을 느끼며 각자 의자를 옮겨 앉는다. 정면도 단차도 없이 펼쳐진 공간에서 소설가 민병훈의 단편 「서로에게 겨우 매달린 사람들처럼」(2025)을 읽어 내려간다. 소설 속 화자는 네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매일같이 통로를 만든다. 그러나 그 기억과 시간은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지 않는다. 쌓이지 않고, 이어지지 않으며, 서로에게 겨우 매달린 채 흩어져 있다. 이 공간의 정적을 깨는 유일한 소리로 유지완의〈그 밤 꿈〉(2025)과 〈통로〉(2025)가 흐른다. 무성영화의 변사 목소리, 철썩이는 파도 소리, 채집한 일상의 주변 잡음들. 소리는 의미가 되지 못한 채 공간을 맴돈다. 전달되지 않은 말들만이 이곳에 머문다.
수원시립미술관 개관 10주년을 맞아 열리는 《공생》은 민병훈의 문학, 윤향로의 회화, 유지완의 사운드를 하나의 의미로 수렴하기보다 느슨하게 나란히 놓는다. 맞닿음보다는 거리, 합의보다는 어긋남, 이해보다는 머묾의 상태에 주목한다. 서로 닿지 못한 채로도 이미 얽혀 있고, 그 얽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민병훈의 소설은 ‘통한다’는 감각을 처음부터 유보한다. 화자는 너를 기다리며 통로를 만들지만 그 통로가 어디로 향하는지, 어떤 쓰임을 가질지 알지 못한다. 기억과 상상으로 채워진 통로는 관계를 성취하지 않고 시간은 쌓이기보다 흩어진다. 질문은 반복되지만 응답은 도착하지 않는다. 소설 속 ‘너’는 고정된 대상이 아니다. “벽과 벽 사이에서 갈라진 틈이자, 공중에 흩어진 입자이며,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웜뱃의 털 중 하나일 수도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일 수도, 이미 무덤에 들어간 망자일 수도, 망자의 꿈을 대신 꾸는 미래의 누군가일 수도 있다”는 서술은 ‘너’를 끝내 특정되지 않는 존재로 남겨둔다. 그럼에도 화자는 말한다. “나는 너로 구성된다.” 여기서 주체는 도착하지 않은 타자를 전제한 상태로만 성립한다. 이 소설에서 관계란 완결되지 않은 채 지속되는 시간으로 남는다.
민병훈 「서로에게 겨우 매달린 사람들처럼」 2025
《공생》 수원시립미술관 전시 전경 2025 사진: 최용준
제공: 수원시립미술관
유지완의 사운드는 남아 있는 시간에서 출발한다. 무성영화라 불렸던 것들에서 이미지는 사라지고 기록된 소리만 남아 있다. 그는 이 소리를 현재의 공간에 놓는다. 소리는 의미를 전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출처를 잃은 목소리와 파도 소리, 채집된 소음들은 공간을 떠돌며 하나의 장면을 이룬다. 〈통로〉라는 제목처럼 소리는 흐르지만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는다. 오래된 소리는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그렇다고 현재로 흡수되지도 못한 채 배회한다. 유지완의 사운드는 이미 지나간 것들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감각을 공간에 남긴다. 윤향로의 〈오이스터〉를 다시 본다. 이 작업은 굴의 외피를 재현하기보다, 굴 껍데기가 지닌 표면의 성질에 주목한다. 굴 껍데기가 하나의 시간의 증거물로 어떤 환경을 견뎌왔는지를 말하듯, 윤향로의 회화 역시 편집과 변형, 이동의 무수한 과정을 표면에 남긴다. 스크린과 캔버스를 오가며 여러 단계를 통과한 이미지들은 원본을 잃고 표면 위에 남은 흔적으로 존재한다.〈오이스터〉는 이러한 회화적 태도가 공간 안에서 하나의 몸으로 나타난 장면이다. 이 굴은 이미 발생한 관계와 흔적들이 닿아 멈춘 표면으로 서 있다.
또 다른 의미에서 〈오이스터〉는 굴의 또 다른 뜻, 굴(cave)의 외피를 드러낸다. 벽에 밀착되지 않은 채 매달린 형상은 굴곡 사이로 안과 밖을 동시에 노출한다. 작품과 작품 사이의 여백을 눈으로 더듬다 보면 하나의 통로가 만들어지는 듯하지만, 그 통로는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이 구조는 이번 전시가 호출하는 공생의 감각을 환기한다. 여기서 공생은 단일한 조화나 합의를 뜻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같은 시간과 공간을 통과하는 방식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카프카의 단편 「굴(Der Bau」(1923~1924)이 겹쳐진다. 카프카의 굴은 보호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끝내 안전한 장소로 기능하지 않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세한 소리는 침입을 증명하지 않으면서도 주체를 끊임없이 반응하게 만든다. 굴은 고립의 은신처라기보다, 타자의 가능성에 노출된 상태 그 자체로 작동한다. 윤향로의 〈오이스터〉는 민병훈의 도착하지 못한 통로와 유지완의 의미로 닫히지 않는 소리 사이에 놓이며 하나의 조건이 된다. 연결을 완성하지 않지만 분절된 상태들을 함께 둔다.
전시는 매시 정각에 시작해 한 시간가량 이어진다. 올지도 모르는 이들, 반갑지 않을 수도 있는 이들과 함께 시간을 나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완전히 고립되지도, 완전히 연결되지도 않은 채 타자의 흔적과 소리에 예민해진 상태로 머문다. 그 순간만큼 너와 나는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 관람객은 이 시간을 통과하며 닿지 않은 채 함께 있었던 감각을 경험한다.
이 전시는 ‘너에게 도달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통한다는 감각은 잠시 같은 시간 안에 머물렀다는 희미한 확인으로만 남는다. 여기서 말하는 공생은 이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이미 분절된 상태에서 서로를 전제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길을 잃고 헤매며, 아직 도착하지 않은 ‘너’를 가정하며 잠시 머무는 일. 이 체험은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의 감각을 미리 건네는 듯하다.
《노노탁 NONOTAK》
세화미술관 2025.8.30~2025.12.31
강민지 오디움 학예연구실장

노노탁 스튜디오〈히든 섀도 V.2〉LED 스크린, 비디오, 사운드, 사운드트랙 노노탁 스튜디오 21분 반복 가변 크기
시계의 시간이 멈출 때, 빛과 소리가 새긴 잔상
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반응한 감각은 시각이 아니라 청각이었다. SF 영화에서 우주선이 등장하기 직전의 기운을 떠올리게 하는, 깊은 에코의 몽환적인 사운드가 공간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하얀 벽과 매끈한 바닥은 어둠 속에 잠겨 윤곽만 희미하게 드러낸다. 관람객의 몸은 무언가를 ‘보려는’ 상태에서, 서서히 어두운 공간 안으로 ‘잠기는’ 상태로 옮겨간다. 전시실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감각은 현실의 시간과 미세하게 어긋나기 시작한다. 이곳에서는 손목시계나 스마트폰 화면에 찍힌 시간을 잠시 뒤로 미룬 채, 빛과 소리에 휘말린 감각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 결과 시간이 어떤 밀도로 느껴지는지를 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크리에이티브 듀오 노노탁 스튜디오는 오랜 시간 빛과 사운드를 치밀하게 매핑해 온 팀이다. 이들에게 작업은 닫힌 결과물로 규정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수정되고 갱신되는 과정을 전제로 한다. 제목 뒤에 붙는 ‘V.1’, ‘V.2’ 같은 표기는 단순한 연번을 넘어 매번 달라지는 조건 속에서 ‘임시저장’된 현재 버전에 가깝다. 작업은 전시 공간의 규모와 동선, 조도와 관람 환경에 따라 다시 조정되고, 상황에 따라 또 다른 버전으로 변형된다. 관람객이 마주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승전결로 정렬된 서사라기보다, 빛과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는 루프의 한 조각이다. 우리는 그 순환의 어느 지점에 우연히 들어섰다가 다른 지점에서 빠져나올 뿐이다.
〈데이드림 V.6〉(2021)은 이 루프의 입구와도 같다. 성인 보폭 정도의 간격으로 걸린 여섯 개의 직사각 프레임에는 시스루 패브릭이 팽팽하게 당겨진 채 끼워져 여섯 층위의 막을 이룬다. 한쪽 끝에서 투사된 프로젝션은 이 막들을 통과해 맞은편 벽까지 이어지며, 층층이 빛의 회화를 쌓아 올린다. 직선과 그리드, 직사각형과 원형의 도형들이 일정한 박자를 이루며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관람객은 그 사이를 천천히 걸어 들어가며 빛으로 짜인 복도를 지난다. 익숙한 패턴의 잔상은 떠다니지만, 선명한 구상 이미지는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속도와 패턴을 달리하며 점멸하는 빛의 리듬과 관람객의 조심스러운 보행은 끝내 맞물리지 못한 채, 지속적으로 어긋나는 감각을 남긴다.
〈히든 섀도 V.2〉(2025)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몸의 개입이 요구된다. 관람객은 신발을 벗고 작품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LED 바닥 위에 발을 올리는 순간, 빛의 패턴이 흐르는 장면 속으로 곧장 편입된다. 직각으로 맞물린 바닥과 벽면에서는 점과 선, 원과 사각형이 빠르게 생성되고 소멸한다. 벽에서 등장한 형상이 바닥에 그림자를 드리운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강한 백색 LED가 구조물 이곳저곳을 가로지를 때 시야는 초점을 둘 데 없이 흔들린다. 저음역의 드론 사운드는 긴장을 서서히 끌어올린다. 이 소리는 몸 전체를 눌러 오는 압력처럼 작동하며, 발걸음의 속도나 시선의 흐름을 무의식적으로 조율한다. 정교하게 설계된 알고리즘이 토대이지만, 관람객이 실제로 감지하는 것은 수학적 구조라기보다 몸에 축적되는 피로와 빛과 소리의 잔상이다. ‘숨은 그림자’라는 제목은 관람 이후에도 몸과 시야에 오래 남는 감각의 여운을 떠올리게 한다.
다음 전시실에서 맞닥뜨리는 〈내로우 V.2〉(2017)는 전시 중 가장 강한 긴장감을 일으키는 작품이다. 한 변이 2m 안팎인 마름모꼴 프레임 스무 개가 보폭 간격으로 줄지어 매달리며 하나의 통로를 형성한다. LED는 각 프레임별로 시간차를 두고 점멸하고, 좁은 회랑을 따라 빛이 질주하는 이미지를 남긴다. 구조물의 그림자는 벽과 바닥에 길게 투영되며 실제 프레임의 깊이와 빛의 그림자가 겹쳐지며 공간 전체를 장악한다. ‘내로우(narrow)’라는 제목은 통로의 폭을 가리키는 동시에 감각과 시야가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되는 상태를 암시하는 듯하다. 빠르게 이동하는 빛의 흐름과 사운드의 잔향 속에서, 시간은 압축되거나 늘어나며 터널처럼 체감된다.

노노탁 스튜디오 〈내로우 V.2〉 조명과 사운드 설치, 사운드트랙 노노탁 스튜디오 가변 크기 2017
사진: 양이언 제공: 세화미술관
전시의 끝자락에 놓인 〈나르시스 V.4〉(2025)는 응시의 장면을 응축한 키네틱 작업이다. 한 변 15cm 남짓한 정사각형 유리 패널 75장이 5열로 배열되어, 모터에 의해 일정한 패턴으로 앞뒤로 움직인다. 수십 장의 유리 패널은 서로 다른 리듬을 나누며, 하나의 거대한 몸체가 호흡하듯 유기적인 흐름을 만들어낸다. 천장에 설치된 강한 백색 조명이 켜지고 꺼질 때마다, 그리고 구조물 하단에 장착된 LED 조명이 번갈아 점멸할 때마다 벽면에는 반짝이는 그림자가 생성되었다가 이내 사라진다. 나르키소스가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던 장면처럼, 관객의 시선 또한 유리 패널이 만들어내는 빛과 그림자의 형상에 오래 머문다. 몽환적인 사운드 위로 빠른 심장 박동을 연상시키는 반복적 리듬이 겹쳐지고, 그 사이로 모터에서 새어 나오는 미세한 마찰음이 스며든다. 이 작은 소리는 빛과 이미지에 가려졌던 기계 장치의 물성을 조용히 드러내며 전시의 시간을 현실로 되돌려놓는다.
이 전시에서 빛은 작품을 비추는 조명 장치를 넘어, 공간을 깎고 쌓는 주된 재료로 기능한다. 사운드는 관람의 속도를 조율하는 보이지 않는 설계로 작동하며 긴장과 완화를 번갈아 만들어낸다. 프로그래밍된 코드와 LED 모듈, 모터, 금속 구조물 같은 구체적인 재료들 또한 곳곳에서 물리적 존재감을 드러낸다. 몰입과 현기증, 매혹과 피로가 겹치는 복합적인 체험 속에서 관람객의 몸은 어느 순간, 이 전시 환경에 정밀하게 매핑된 하나의 좌표로 놓여 있음을 깨닫게 된다.
약 한 시간가량 전시실에 머문 뒤 밝은 오후의 바깥으로 걸어 나왔을 때 여전히 귀에는 낮은 잔향이 맴돌고 시야에는 LED 섬광과 그리드 패턴의 미세한 잔상이 떠돌았다. 네 점의 작업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빛과 사운드를 단순 반복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반복은 관객의 체감 시간을 비트는 장치가 되어, 일상의 선형적인 시간 감각과는 전혀 다른 구조를 형성한다. 《노노탁》은 관객의 신체 전체가 감각의 매개가 되도록 전시 환경을 세밀하게 조율한다. 전시실 안에서 보낸 한 시간이 일상에서의 한 시간과 다른 밀도로 남는다는 사실은 비물질적 매체가 시간 감각을 다시 짜고 엮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시계의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흐르지만 전시 안에서 관람객이 겪은 시간은 여러 감각의 결이 겹겹이 응집된 하나의 덩어리로 각인되었다.
《다니엘 스티그만 만그라네: 산과 친구되기》
아뜰리에 에르메스 2025.11.28~3.8
노재민 기자

〈번개치는 정원〉(사진 오른쪽) 한국 소나무, 화산석, LED 필라멘트 전구 4개 가변 크기 2025
《다니엘 스티그만 만그라네: 산과 친구되기》 아뜰리에 에르메스 전시 전경 2025
자연과 공존하는 방식이 어떤 상태로 가능한가?
다니엘 스티그만 만그라네의 작업에서 자연은 결코 풍경이나 배경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인간과 분리될 수 없는 관계망으로 존재하며,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진입해야 할 환경으로 제시된다.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린 국내 첫 개인전 《산과 친구되기》는 이러한 작가의 세계관을 전시 공간 전체로 확장한 사례다. 이 전시는 자연을 재현하거나 상징적으로 호출하는 대신, 관람자가 자연과 ‘어떻게 얽히고, 개입하며, 반응하는가’라는 질문을 전면에 내세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람자가 공간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조정하게 되는가—즉 움직임, 선택, 망설임, 통과, 주의의 이동 같은 감각의 역학이다.
만그라네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를 기반으로 활동해 온 작가로, 유럽과 남미를 오가며 예술적 언어를 형성해 왔다. 어린 시절 생물학자가 되기를 꿈꿀 만큼 동식물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이후 미술가의 길을 택한 뒤에도 자연을 사유하고 관찰하는 태도를 작업의 중심에 두었다. 특히 그가 오랜 시간 탐구해 온 브라질의 열대우림은 ‘풍요로운 자연’이라는 도식과 반대로 작동한다. 토양은 모래질이라 영양분이 부족하고, 숲은 울창해 햇빛과 비가 지면까지 닿기 어렵다. 그럼에도 생태계는 붕괴하지 않고, 오히려 수만 종이 서로의 신진대사에 기대어 살아간다. 만그라네는 이 상호 의존적 생태 구조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아, 관람객과 공간, 작품이 서로 반응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상황을 꾸준히 구축해 왔다.
그의 생태학적 세계관은 자연을 인간의 외부에 위치한 대상으로 바라보는 근대적 이원론에 대한 비판에 기반한다. 만그라네에게 자연은 인간이 관찰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 역시 그 일부로 이미 얽혀 들어가 있는 살아 있는 네트워크다. 이는 메를로 퐁티가 말한 ‘세계 안에 이미 던져진 몸으로서의 주체’, 그리고 인간과 비인간 모두를 행위자로 보는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과도 맞닿아 있다. 《산과 친구되기》는 이러한 철학적 배경을 이론적 언급에 그치지 않고 관람자가 신체 경험을 통해 체득하게 만든다.
전시는 건축적 개입에서부터 이러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사선으로 어긋나게 배치된 파티션들은 전시장 전체를 한눈에 파악하려는 욕구를 번번이 좌절시키며 공간 인식을 지연시킨다. 초입은 최소 세 방향으로 열려 있고, 관람객은 어느 방향이 정해진 길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로 공간에 진입한다. 작가가 말하듯 그는 공간에 매듭을 만들어 관람객이 잠시 방향 감각을 잃게 만든다. 이때 관람객은 더 이상 작품을 외부에서 감상하는 주체가 아니라, 공간 속에서 길을 찾고 몸을 움직이며 반응하는 참여자가 된다. 걸음 속도를 늦추거나 고개를 돌리고, 다시 되돌아가고, 멈추고, 우회한다. 전시장 모퉁이마다 이 길 아니면 저 길이 나타나고, 매번 선택해야 한다. 전시는 주의를 모으는 것만큼이나 주의를 분산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유인하기, 혼란 주기, 디테일로 관심을 유도하기 같은 방법들이 전시의 기술로 구현된다.
알루미늄 커튼 설치 작업 〈산과 친구되기〉(2025)는 이러한 경험을 가장 직접적으로 체현하는 작업이다. 지중해 지역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성품 체인 커튼은 전시장 내 통로에 겹겹이 배치되어, 통과 가능한지 가로막는지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상태를 만든다. 관람객이 망설임 끝에 커튼 사이를 통과하는 순간, 오브제는 신체적 접촉과 소리를 동반한 3차원적 경험으로 전환된다. 몸에 닿는 차가운 촉감과 경쾌한 금속성 소리는, 사물과 신체 사이의 경계를 밀착시키며 감각을 환기한다.

〈산과 친구되기〉(사진 오른쪽) 크리스카 알루미늄 커튼과 레이저 컷 파우더 코팅 스틸 프레임 315×495cm 2025
《다니엘 스티그만 만그라네: 산과 친구되기》 아뜰리에 에르메스 전시 전경 2025
사진: 김상태 제공: 에르메스 재단
전시장 곳곳에는 돌과 LED 필라멘트 조명 작업이 반복적으로 배치된다. 가느다란 빛의 기둥은 번개를 연상시키며, 각기 다른 형태의 바위들은 ‘산’, ‘코끼리’, ‘사자’, ‘용’과 같은 별명으로 불린다. 이는 생물과 무생물, 자연현상과 인공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적 사유를 상기한다. 특히 이 조명들이 서울의 외부 날씨와 연동되어 밝기와 상태가 변화한다는 점은, 전시장 내부를 외부 세계와 단절된 공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응하는 하나의 유기체로 전환시킨다.
미로 같은 실내 공간을 통과한 끝에 관람객은 중정에 도달한다. 〈번개치는 정원〉(2025)은 현대식 건물로 둘러싸인 깊은 중정 안에 한국 소나무 두 그루를 심고, 검은 화산석으로 덮인 구릉 위에 번개처럼 떨어지는 빛을 설치한 작업이다. 이 비현실적인 풍경은 도시와 자연을 겹쳐 놓으며 자연의 스케일을 확장한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정원이지만, 그 안에서 관람객은 자연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중정과 마주한 영상 작업 〈물고기가 입맞추는 달〉(2025)에서 경주 월지에 떠오른 보름달과 물속에서 이를 향해 다가가는 물고기의 움직임은, 서로 닿을 수 없는 두 존재의 긴장을 느린 시간 속에 포착한다. 만그라네가 지속적으로 사용해 온 16mm 필름, VR, 홀로그램과 같은 매체는 자연의 순간성을 기록한다. 영상은 실내의 번개 작업과 중정의 정원과 조우하며, 지수화풍의 조화로운 장면을 완성한다.
《산과 친구되기》는 자연을 주제로 한 전시라기보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재배치하는 경험적 장에 가깝다. 이 전시는 자연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기보다, 자연과 함께 있는 방식이 ‘어떤 상태’로 가능한지를 묻는다. 다시 말해 관람객은 자연을 바라보는 주체가 아니라, 이미 자연과 얽혀 있는 존재로 다시 놓인다. 작가는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이고 모든 것이 얽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새로운 문화적 패러다임에 기여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 전시는 그 기여를 주장으로 밀어붙이기보다, 감각의 설계로 수행한다. 길을 잃고, 선택하고, 통과하고, 멈추는 동안 관람객은 어느새 전시의 일부가 된다. 만그라네의 작업이 제안하는 생태적 상상력은 자연을 보호의 대상으로만 호명하는 윤리적 제스처를 넘어, 인간의 인식 구조와 감각 체계를 재조정하는 시도로 읽힌다.
《서민우: 허물과 궤적》
아케이드 서울 2025.11.8~2025.12.3
강재영 기자

서민우, 이용빈 〈궤적들: bandpass〉스테인리스 스틸, 라텍스, 오디오 케이블, 풀레인지 스피커, 앰프, 음원: 공연
〈허물과 궤적: 궤적들〉녹음 220×70×100cm 2시간 40분 40초 2025
‘듣는 감각’의 가능성이 부상하고 있다. 소리는 미디어 기반 예술에서 오랫동안 시각 경험을 보조하는 감각적인 구성요소로 작동해 왔으나, 청각 경험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다시 인식하게 하는,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띤 감각으로 떠올랐다. 이러한 경향의 대두는 팬데믹과 신냉전 구도의 강화, 인공지능 서비스의 대중화로 개인의 감각이 점점 분열되고 녹아내리고 깨지는 2020년대 중반, 공통의 감각을 회복하고자 하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동시대 미술의 지형 속에서 서민우는 청각적 경험의 재현을 넘어, 소리가 생성되고 소멸하는 물리적 과정 자체를 탐구하며, 청취의 조건 자체를 비판적으로 질문한다. 그는 소리가 발생하고, 신체와 공간을 통과하며 흔적으로 남기까지의 전 과정을 하나의 예술적 실천으로 엮어냈다.
서민우의 실천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프레임은 ‘음반-공연-전시’로 이어지는 삼부작 구조이다. 이 세 단계는 분절된 개별 작업이 아니라, 하나의 아이디어가 각기 다른 시간과 매체를 통과하며 진화하고 순환하는 시스템에 가깝다. 첫 단계인 음반 〈나선형 수평계〉는 전체 프로젝트의 개념적 기조를 설정하는 청사진이다. 이 음반은 직접 녹음한 소리(현실 공간), 음악적 환영성을 가진 소리(심상 공간), 그리고 이 둘이 디지털 환경에서 뒤섞이며 발생하는 제3의 공간감을 지닌 소리를 기본 재료로 삼는다. ‘나선형 수평계’라는 제목은 완벽한 수평이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위계가 언제든 유동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역동적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수평성’에 대한 그의 생각을 함축하고 있다. 이 역동적 위계에 대한 사유는, 이후 그가 구체음악의 상반된 이론적 전통을 통합하는 방식의 개념적 열쇠가 된다.
지난 8월에 진행된 공연은 음반의 소스들을 통제된 스튜디오 환경에서 해방시켜 실제 공간 속으로 방출하는 단계다. 5개의 스피커를 각기 다른 위치에 두고 소리의 시작점을 다르게 설정함으로써, 작가는 청취를 고정된 감상에서 소리의 방향과 질감을 몸으로 추적해야 하는 신체적 ‘사건’으로 전환시켰다. 이를테면 바닥에 깔린 라텍스는 동선을 유도하기도 방해하기도 하면서 관람자의 신체에 개입하고 음향 구조를 감각하는 조건을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삼부작의 종착지인 전시 《허물과 궤적》에서 서민우는 앞선 공연의 결과물, 즉 관객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라텍스를 전시장으로 그대로 옮겨왔다. 가짜 뱀피를 본떠 만든 이 ‘허물’은, 음반 음원의 일부 요소들-필드 레코딩, 분절된 악기 소리, 노이즈 등-이 순차적으로 재생되며 기존 음반에 고정된 위계를 ‘나선형’으로 해체한다. 청취 사건의 물리적 잔존물뿐이다. 여기서 제목의 의미는 명확해진다. ‘허물’은 지나간 생명, 즉 부재를 통해정의되는 현존을 암시하며 청취라는 사건이 남긴 물질적 잔해(라텍스)를 상징한다. ‘궤적’은 보이지 않는 힘의 경로와 벡터를 암시하며 소리가 이동했던 길(케이블)을 가리킨다. 결국 전시의 제목 자체가 정적인 물질적 잔여와 그것을 생성한 동적인 비물질적 힘 사이의 핵심적인 긴장을 요약하는 셈이다. 이 전시는 소리의 부재를 통해 역설적으로 소리가 점유했던 시간과 공간, 그곳을 스쳐간 신체의 움직임을 감각하게 만든다.
작가는 직접 제작한 스피커 유닛과 그것을 감싸는 조형물, 그리고 라텍스와 같은 특정 물질들을 전략적으로 배치한다. 이 장치들은 단순히소리를 출력하는 도구가 아니라, 음파의 경로를 물리적으로 변형하고, 왜곡하며, 증폭시키는 능동적 매체다. 이를 통해 공간 전체는 소리의 진동과 물질의 저항이 길항하는 하나의 거대한 감각적 장치로 구축된다.〈해안선을 위한 사행 운동〉(2025)은 우로보로스 상징을 ‘잔여물’을 통해 구성한 조형물이다. 케이블을 근육으로, 라텍스를 외피로 삼은 이 구조물 중간중간에 달린 스피커에선 음반에 수록된 트랙 〈해안선〉(2025)의 요소들이 5개의 채널로 쪼개져 나온다. 전시장에서는 원래 소리가 어떤 것이었는지 찾는 것이 무의미하다. 서로 다른 간격으로 나오는 이질적인 소리들은 오직 현장에서 관객의 몸으로 즉흥적으로 감각될 뿐이다. 문래동 공장지대에 위치한 아케이드 서울의 지리적 조건은 이와 같은 감각을 증폭한다.

서민우〈해안선을 위한 사행 운동〉스피커, 라텍스, 오디오 케이블, 철, 스테인리스 스틸, 앰프, 나무에 수성 스테인,
음원:〈허물과 궤적: 나선형 수평계〉
수록:〈해안선〉(리메이크), 페리지 갤러리 공간 녹음 가변 설치 8분 28초 2025
제공: 서민우
그의 방법론은 일상의 소리를 수집하고 쪼개어 재조합한다는 점에서 그가 말하듯 구체음악의 원리와 조응한다. 필드 레코딩을 통해 채집된 소리들은 감정이나 서사를 전달하는 매개로 사용되지 않는다. 대신, 철저히 분해되고 비음악적 방식으로 재배열됨으로써 소리 자체의 물질성과 시간성을 드러내는 파편이 된다. 이는 소리를 음악적 문법 안에 가두는 대신, 소리가 가진 본연의 속성을 탐구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서민우의 사운드스케이프는 특정 기억의 파편이나 이미지의 부산물이기보다는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조각의 요소다. 소리가 어떤 지역이나 공간, 혹은 물리적 신체에 구속되지 않는 것이다. 그가 설정한 조건은 전시에서 허물이라고 하는 스킨, 외피와 스피커 선 전선을 적극적으로 비체적 형식으로 채용하는 과정에서 조각적으로 전유된다. 서민우의 작업은 ‘소리 조각’이라는 개념 아래 음반-공연-전시라는 연쇄적 구조를 통해 감각의 위계를 해체하고, 원본과 복제의 경계를 흐리는 다층적 전략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완결된 서사로서의 작업보다는, 소리와 물질, 현재의 감각과 과거의 흔적 사이를 부유하는 ‘불안정한 청취의 과정’ 그 자체를 드러내기를 원한다. 그의 조각들은 작가의 말처럼 연주되기를 기다리는 ‘악보’로서, 관객의 신체적 개입과 감각적 해석을 통해 비로소 활성화되는 열린 구조를 지향한다.
서민우는 소리를 물질로, 청취를 사건으로, 전시를 그 사건의 궤적으로 재정의해냈다. 그가 드러내고자 하는 ‘감각의 수평성’이란 음반, 공연, 전시로 이어지는 세 가지 재현의 과정 속에서, 서로 다른 위계에 존재하는 감각과 정동을 하나의 총체적이고 육화된 경험으로 불러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관객은 그의 비체적 조각들 사이를 거닐며 원본성이 사라진 소리를 감각하고 다가올 소리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끊임없이 떠도는 청취자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