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로 사는 법 — 과거와 오늘
《21세기에 소녀*로 살아가기!?
전통 회화에서 소셜미디어 시대까지》
박진아 미술사
World Report | LINZ

오이게니 브라이트후트-뭉크〈춤추는 아이〉 캔버스에 유채 115.8×90cm 1905 벨베데레 빈(Belvedere Vienna)
소장 제공: 렌토스미술관
오스트리아 린츠 렌토스미술관(Lentos Kunstmuseum Linz)에서 전시하는 《21세기에 소녀*로 살아가기!? 전통 회화에서 소셜미디어 시대까지》는 최근 급격히 두터워진 오스트리아의 젊은 세대 미술 감상자층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미술 기관과 대중 사이 대화와 의견 교류를 격려하는 한편, 미술을 매개로 일반 성인 대중 관객을 정치사회적 담론으로 포섭하고자 시도한 컬처 엔지니어링 접근법을 보여준다. 전시는 4월 6일까지 열린다.
오늘날 소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인류 역사에서 소녀라는 정체성은 어떻게 변천해 왔으며, 디지털 기술과 소셜미디어가 지배하는 21세기 현재 소녀란 어떤 존재를 뜻하나? 방대하고 야심 찬 화두를 내걸고 시작된 《21세기에 소녀*로 살아가기!? 전통 회화에서 소셜미디어 시대까지》는 과거 중세부터 현재까지 서양 미술사를 아우르는 미술 작품 150여 점을 통해서 소녀라는 개념에 담긴 정치사회적 의미와 그 변천상을 조망한다.
소녀들에게 “넌 뭐든 할 수 있다”고 독려하는 메시지는 양가적이다. 사회적으로는 스스로 독립할 수 있는 강하고 똑똑하고 현명한 자기 성취적 커리어우먼이 되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적이고 가정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착하고 수동적 태도를 내면화하며 성장했을 소녀들은 오늘날 교육 체제와 대중 미디어로부터 자신감 넘치고 드높은 성취력을 지닌 알파걸(Alpha Girl)이 되라는 기대와 독려를 받으며 어른으로 자란다.
전시 기획을 맡은 브리기테 로이트너-도네우스(Brigitte Reuthner -Doneus) 큐레이터는 아동기, 십대 청소년기, 여성성이라는 세 성장 단계와 여성성이 결합된 ‘소녀’라는 어휘의 개념을 9개 소주제로 조명하는 데 주력한 한편, 관객에게는 미술사 속 고전과 현대를 가로지르며 린츠 출신 고전 화가와 현대 오스트리아 작가의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근대 이전의 유럽 어린이들은 신체적으로 체구만 작은 ‘성인의 축소판’이자 미완성 상태의 어른이라 봤던 당시의 아동관을 내면화하며 성장했다. 그만큼 소녀들은 짧은 아동기를 거쳐 서둘러 성숙한 여성이 됐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관객을 맞이하는 첫 작품 〈춤추는 아이(Kindertanz)〉(1908)는 나이에 비해 놀랍도록 조숙해 보이는 표정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19세기 부유한 가문의 여성 초상화가였던 오이게니 브라이트후트-뭉크(Eugenie BreithutMunk)는 바닥에 끌리도록 긴 엄마의 실크 드레스를 입고 즐거워하는 어린 소녀의 모습을 그렸다. 하루빨리 엄마처럼 되고픈 어린 소녀가 곧 맞게 될 사춘기에 앞서여성 정체성 형성을 준비하고 있는 순간을 포착한 시대의 자화상이다.
근대 이후부터 전통적인 남녀의 역할 구분은 유연해졌지만 모름지기 소녀는 착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관념은 남아있다. 스위스의 극사실주의 초상화가 프란츠 게르치(Franz Gertsch)는 여자아이들은 어린 나이부터 타인의 시선을 감지하는 본능적 민감성을 지녔음을 관찰한 바 있다. 1972년에 로마의 신티 축제를 방문한 그는 해변가에서 얌전하고 천진난만하게 노니는 여자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생 마리 드 라메르 Ⅲ(Saintes Maries de la Mer Ⅲ)〉(1972)을 통해서 아동기 여아들의 ‘어린이일 권리’는 자연적 생득권(birthright)으로서 보호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도로테 골츠 〈진주 귀걸이〉(사진 왼쪽) 컬러 프린트, 디아섹 210×145cm 2009
《21세기에 소녀*로 살아가기!? 전통 회화에서 소셜미디어 시대까지》 렌토스미술관 전시 전경 2025
사진: Violetta Wakolbinger 제공: 렌토스미술관

마를린 해링 〈Because Every Hair is Different〉(사진 뒤쪽)
오프셋 리소그래피, 9매 빌보드 357×250(×2)cm 에디션 10점 2005/2013
《21세기에 소녀*로 살아가기!? 전통 회화에서 소셜미디어 시대까지》 렌토스미술관 전시 전경 2025
사진: Violetta Wakolbinger 제공: 렌토스미술관
순수 고결한 소녀에서 일하는 소녀로
기독교 신앙이 지배했던 과거 유럽에서 전설담이나 종교미술 작품 속 소녀 주인공은 종종 진선미(眞善美)의 미덕이 한 몸에 구현된 고결하고 순수하며 성(聖)스러움의 징표였다. 동시에 영웅 아키타입이 그러하듯 주인공은 종종 수난받는 피해자 혹은 구출의 손길이 필요한 역경에 빠진 소녀(damsel in distress)로 묘사되곤 했다. 예를 들어, 드보라 프리트(Dwora Fried)가 팝아트 식으로 제작한 멀티미디어 설치작 〈큰 빨간 두건(Big Red Riding Hood)〉(2018)은 유럽의 구전 동화 「빨간 두건(Little Red Riding Hood)」을 풍자한 패러디이다. 나체로 큰 흰색 구두를 신고 목과 손이 빨간 줄로 포박된 채 좁은 상자 안에 갇혀 있는 플라스틱 인형으로 형상화된 소녀 주인공을 통해서 작가는 예쁘고 착한 소녀 주인공을 둘러싼 동화 속 숨은 폭력성을 지적하며 세상의 모든 소녀에게 무서운 세상에서 신변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듯하다.
체이야 슈토이카(Ceija Stojka)는 어두웠던 역사로 인해서 평온해야 할 성장기를 공포와 불안으로 보낸 소녀 시절 이야기를 전한다. 화가는 집시라는 이유로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집단 수용소로 보내져 성장했는데, 이때 팔목에 새겨진 수용번호를 노출한 채 ‘디언들’이라는오스트리아의 전통 드레스를 입고 정원 한구석에서 서성이는 자화상을 반복해 그리는 것으로써 공포와 정체성 혼란으로 점철됐던 소녀 시절을 극복했다.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의 ‘소녀’는 “만 7세 이상의 여자성을 가진 어린아이와 스무살 이전의 십대 청소년기의 젊은 여성”이라는 연령적 정의를 제시한다. 반면 역사와 문화의 고찰 측면에서 볼 때 여자 어린아이 또는 소녀를 뜻하는 독일어 어휘 ‘멧헨(mädchen)’은 중세기 고지 독일어(11~15세기경)에서 가정 내 가사일을 하는 어린 여자 시녀를 뜻하는 ‘메그데라인(Mägdelein)’이 그 기원이라는 설이 있다. 근대와 현대를 거쳐 산업 혁명과 전쟁을 경험하는 동안 집 안에서 일하는 소녀는 외부 세상으로 박차고 나가 공장과 사무실에서 일하는 여성으로 거듭났다. 결혼이 미성년 소녀가 성인 여자가 되는 성인 신고식이었던 전통사회를 뒤로 하고 소녀들은 가정을 벗어나 도시와 사회로 나갔다. 소년과 동등한 공공 교육의 기회와 경제 활동 참여의 기회를 누리게 된 오늘날의 관객은 더 이상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유명작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1665)를 현대적으로 패러디한 도로테 골츠(Dorothee Golz)의 디지털 회화 〈진주 귀걸이(The Pearl Earring)〉(2009) 속 청바지 차림으로 찻주전자를 나르고 있는 소녀를 500년 전 화가의 집에서 마님의 시중을 들던 그때 그 시녀라 짐작하지 않는다.

드보라 프리트 〈큰 빨간 두건〉 혼합매체 어셈블라주 20.3×30.5×8.9cm 2018
사진: Joshua White Photography 제공: 작가
한 걸음 더 나아가, 골츠의 또 다른 출품작 〈프라다걸(Prada Girl)〉(2012)에서 작가는 15세기 화가 페트루스 크리스투스의 중세 귀족 여성 초상화를 차용해 오늘날 소녀들은 과거의 일하는 시녀에서 물질풍요 시대의 명품 소비자로 진화했다고 논평한다. 〈프라다걸〉 맞은편에 설치된 오스트리아 멀티미디어 작가 로자 렌들(Rosa Rendl)의 사진 〈난 피곤을 몰라(Never Tired)〉(2015)는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매개로 독립 수영복 브랜드를 디자인하고 솔로 뮤지션 데뷔를 계획하면서 창조와 소비를 겸하는 독특한 디지털 십대 소녀들의 청년 문화를 논평한다.
21세기 특유의 포용적 민주화와 매스 미디어 덕분에 지구 북반구의 선진 세계서 살아가는 소녀의 위상과 역할은 과거보다 많이 나아진 것 같기도 하다. 디지털 개인 모바일 기술을 등에 업은 틱톡,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가 외모와 옷차림에서 행동거지와 자기표현 방식에 이르기까지 어린 소녀와 젊은 여성에게 막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가운데, 사회와 가정은 성공한 유명인 여성들을 롤모델로 제시하며 ‘선구자로서의 소녀’가 되라고 북돋는다. 가령, 불가리아 출신의 보리야나 벤치슬라보바(Borjana Ventzislavova)는 정치적 사진작 〈나, 너, 그들. 안전한 자는 없다(Me, You, and Them. No One is Secure)〉(2008)에서 이민은 성인은 물론 어린 소녀에게도 나은 삶을 향한 기본권이라 역설하며 도전심을 자극한다. 또, 중국 태생 조각가 우샤오장(吳少湘)은 ‘모든 색은 아름답다(All Colors Could be Beautiful)’(2022) 시리즈를 통해서 다원적 사회는 다양한 소녀 정체성을 지원할 것이란 무지갯빛 낙관을 제시한다.

이자 쉬헤 연출〈여자 도둑들〉(스틸) 15분 단편영화 2023
제공: 이자 쉬헤, 렌토스미술관

체이야 슈토이카 〈나치수용자 번호 문신이 있는 자화상〉 2000년 경 빈미술관 소장 © Bildrecht, Wien 2025
제공: 렌토스미술관
그렇다면 오스트리아 국영 라디오 방송국이 실시한 2025년 청소년 설문조사가 밝힌 대로, 왜 이 나라 16~25세 연령대 청소년 중 80%가 자신의 미래가 어둡다고 비관하고 있을까? 문테안 & 로젠블룸(Markus Muntean & Adi Rosenblum) 듀오의 회화 작품 〈무제(Untitled (In the World We…))〉(2003)는 전쟁, 테러리즘, 빈부 격차, 인구 고령화, 이민자 증가에 따른 사회문제,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라는막중한 사회문제를 물려받은 채 인공지능과 자동화라는 디지털 신기술 혁명 앞에서 불안과 고뇌로 절망하는 청소년의 자화상으로 이 의문에 응답한다.
현대 대중문화는 세월을 거듭할수록 청년 문화를 숭배한다. 지난 반세기 간 십대 소녀층은 팝뮤직과 연예인을 중심으로 한 팬덤을 형성하고 모방하면서 자아 정체성을 모색하는 통과 의례를 거쳤다.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소녀들은 틱톡 인플루언서를 팔로우하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 같은 판타지 내러티브가 제시하는 페르소나로부터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가운데, 21세기 디지털 대중문화가 야기하는 십대 소녀들의 우울증, 섭식장애, 집단 따돌림 등 문제를 언급한 작품이 부재했던 것은 전시의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전시 타이틀에 등장한 소녀(Mädchen)의 어휘 옆에는 강조 표시(*)가 되어 있다. LGBTQ+ 운동과 특정 군소집단의 정치 주류화가 이끄는 정체성 선택의 자유 시대 속에서 소녀를 규정하는 범주 또한 더 넓고 다양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환기 신호다.

《21세기에 소녀*로 살아가기!? 전통 회화에서 소셜미디어 시대까지》 렌토스미술관 전시 전경 2025
제공: 렌토스미술관
앤 오클리(Ann Oakley)가 저서 『성, 젠더, 사회(Sex, Gender, Society)』(1972)에서 이론화했던 대로 남성성과 여성성 구분은 한낱 사회적 구성에 불과한 것인가? 최근 여러 국제 퀴어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주목받은 단편 영화 〈여자 도둑들(Die Räuberinnen)〉(2023)을 감독한 이자 쉬헤(Isa Schieche)는 젊은 트랜스젠더 여성 세 명이 남자 범인 가면을 쓰고 절도를 공모하며 예행 연습하는 과정을 그린 15분짜리 서사를 통해서 범죄 행동은 남성적이며 애정적 생활공동체는 여성적이라는 통념에 성공적으로 도전한다. 남성으로 태어났지만 여성으로 성전환한 세 배우의 섬세한 연기는 오늘날 소녀(girlhood)가 성인 여성(women)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일시적 과도 단계가 아니라,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변화와 함께 확장되는 ‘영역’의 개념으로 볼 것을 제안하는 최근 동유럽 예술계의 움직임을 상기시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