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약속

『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

김소정 기자

Art Book

『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
윤혜정 지음 · 을유문화사
504쪽 · 2025
25000원

“예술이 너의 삶을 바꿀 수 있어!”1

병오년 새해 첫 주, 영국 일간 『가디언』이 발랄하고 희망찬 제안을 건넸다. 새해 결심과 다짐을 다루는 기사에서 그간 주로 할애하던 운동이나 요가보다 그림을 그리거나 연극과 전시회를 감상하는 활동으로 채우며 정신건강을 돌보자는 취지가 담긴 일종의 예술 처방전을 냈다. 일상에서 시작해 삶의 태도와 주변 환경까지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을 펴면서, 나를 포함한 의심 많은 몇몇 독자의 코웃음을 의식했는지 의학적 연구 결과와 전문가의 의견도 첨가하여 설득에 힘을 보탰다. 새해가 되었으니 삶을 한번 재정비하자는 신년 의식성 마케팅도 내키지 않았지만, 그것이 예술 하나로 가능하다고 보는 무모한 확신이 한 편의 신화처럼 들렸다.

현대미술을 업으로 삼아 살아온 긴 여정의 길목에서 자주 마주하는 문구, ‘예술이 삶을 바꿀 수 있다’에 대해 나는 늘 의문을 품어 왔다. 이는 순진하고도 호기로운 선언인 동시에 유달리 재촉을 가하는 촉구문(“왜 네 삶은 아직도 바뀌지 않았어?”) 같은 압박이기도 했다. 예술이 주 생계 수단인 까닭에 그랬을까? 어쨌든 삶을 바꾼다는 것은 거창한 일인 데다가, 정량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예술의 효능에 대한 고민을 간헐적으로나마 붙잡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저자 윤혜정의 신간 『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온전히 예술의 편에 서서 예술을 예찬하는 책이다. 그러나 그의 예찬론은 ‘예술이 너를 구원하리니’ 식의 수사법을 저만치 벗어난,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전문적인 경험에 기댄 진술에 가깝다. 저자는 미술계 한복판 혹은 세계와의 첨예한 경계에서 만난 전시와 작가들, 기억과 기록의 형태로 남아 영원히 회상되고 전달될 진득한 순간들을 들려준다. 동시에, ‘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책 제목은 반대로 ‘어떤 예술은 사라질 수 있다’라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다만 저자는 그가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판단한 예술 작품과 작가, 이들을 둘러싼 예술적인 환경과 태도를 촘촘히 밝히는 데 집중하고, 사라질 예술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선택하면서 이 책이 비평서로 읽힐 여지를 막아뒀다. 그러나 ‘어떤’이란 단어를 ‘예술’ 앞에 덧붙인 또 하나의 선택에서, 예술에 대한 가치판단은 예술만큼이나 필연적이라는 저자의 믿음, 의도 혹은 꽤 뾰족한 진리가 완연히 드러난다. 이를 염두에 두고, 나는 이 글을 통해 크게 시간과 변화라는 두 측면에서 저자가 소개하는 예술의 영속성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시간을 초월하는
우선 그가 예술의 가치를 논하는 지점은 흥미롭다. 저자는 예술이 세상에 바짝 접해 있으면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떨어져 있어도 안 되는 자생적인 위치를 점한 상상의 산물임을 전제로 이 속성의 중요성과 위대함을 말한다. 가령 그는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평범한 대다수의 작가를 떠올”리며 “어마한 인류의 시간을 압축한 예술가들의 가치는 바로 그들 자신의 시간을 초월하는 지점에 새겨진다는 확신이 뒤따랐다”고 적었다. 그런 면에서 양혜규의 다른 주요작을 제쳐두고 〈멀미 드로잉〉(2016)을 출발점으로 삼아 미술계의 (비)가시적 움직임이라는 개념을 빌 비올라라는 거장으로 까지 확장해 나간 책의 첫 장은, 저자가 예술을 사유하는 방식이 선험적 권위에 기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비디오라는 매체를 지독한 사유의 도구로 승화시킨 빌 비올라의 작품은 그 어떤 작품보다 관람객의 밀도 높은 시간을 요한다. 특히 슬로모션 으로 점철되는 긴 러닝타임은 시간의 문제이기보다 집념과 헌신의 현현 이다. 저자는 여기서 “세상의 흐름과 다른 속도로 흐르는 시간”을 감각하고 세상과 고립된 공간에 잠시 빠졌다가 깨어난 경험을 공유한다. 이러한 종류의 경험을 단지 명상적이라고 하기에는 내면에 이는 파동이 제법 거세기 때문에, 또는 그러하도록 설계됐기 때문에, 예술 작품의 감상과 개인의 명상 간에는 차이가 존재하며, 작가에 대한 오랜 이해와 애정, 축적된 연구를 바탕으로 한 저자의 글은 이 구분을 다시금 자각하게 도와준다. 그의 묵직한 통찰은 디아비컨의 깊은 지하실에 마련된 스티브 매퀸의 작업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도 빛을 발한다. 미술계와 영화계 양쪽에서 독보적인 작품을 발표해 온 매퀸의 압도적인 비물질 작업 〈Bass〉(2024 )를 통해 저자는 매퀸이 만든 그간의 영화들을 참조하며 현 세계를 지탱하는 ‘감정’의 힘을 상기하는 시간을 갖는다. 매퀸의 빛과 사운드에 이끌려 다차원의 시공간을 잠시 여행했다가 돌아온 저자는 예술에 대한 본질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예술의 쓸모, 요컨대 예술이 괴로움을 잊게 하는지, 덮는지, 아니면 인지하게 하는 것인지 알아내는 데도 노력을 요한다. 내 안의 이 느낌은 감정과 마음에 대한 것이며,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발견’이다.”

그런가 하면 1989년 구겐하임에서의 첫 전시 이후 35년 만에 또 한 번 미술사에 길이 남을 개인전을 연 제니 홀저에게는 말 그대로 시간 덕분에 축적된 유산을 기리는 책의 한 장(章)이 헌정됐다(비록 저자는 이 장의 첫 문장을 “시간의 흐름은 무의미하다”라고 썼지만 말이다. 이는 특별히 구겐하임의 나선형 경사로를 돌고 도는 홀저의 설치작을 두고 한 말이지만 작가의 작업 세계, 무엇보다 저자가 여러 번 경탄한 그의 유머 감각을 놓고 보았을 때도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홀저는 오래된 경구로 현대인에게 경고를 던지는 사회적 발화자, “전쟁으로 향하거나 전쟁 안에 있거나” 한 투사, 베니스비엔날레 미국관을 대표한 성공한 예술가로 생생히 묘사됐다. 아울러 저자는 몇 년 전 진행된 서면 인터뷰에서부터 전시를 앞두고 방문한 홀저의 스튜디오에서 직접 나눈 대화를 소개하며 왜 그의 작품이 자신의 마음을 그토록 사로잡았는지를 술회한다. 구체적인 시대 배경에서 탈착된 것처럼 보이는 대부분의 경구(예컨대 “당신은 살고 싶다(You Want to Live)”와 같은)가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이유는 이들이 동시대의 사회정치적 불협화음과 조응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은 현대사회를 향한 저자의 안타까운 마음, 나아가 애정이 유독 크게 읽히는 지점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성격의 애정이 바로 사라지지 않는 예술에 대한 그의 탐구를 재촉하는 것이다.

스티브 매퀸〈Bass〉2024 디아비컨 전시 전경 2024
© Steve McQueen 사진: 뉴욕 Bill Jacobson Studio 제공: Dia Art Foundation

변화의 확증
고대 그리스어에 따르면 ‘변화(μεταβολή)’란 단순히 바꾸는 것을 넘어서 하나의 본질에서 새로운 상태로 전환되거나 이동하는 모든 상태나 행위를 포괄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변화를 겪는다. 여기에는 물리적인 이동이 있겠고 주변 인물이나 환경에 반응하며 오르내리는 기분도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작품이 건네는 말, 머리를 내려치는 깨달음, 고민에 잠기게 하는 서사, 심미적 만족감이 차오르거나 그 반대로 불쾌한 쓴맛이 입가를 맴도는 순간 등, 작품 앞에서 일어나는 내적이고 인체-화학적인 상호작용을 변화의 카테고리 내에서 인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를 통해 저자가 남긴 내밀한 감정의 서술은 사실상 이러한 변화의 기록이다. 사적이고 주관적인 만큼 고차원의 경지를 보여주는 변화. 그러한 차원에서, 시대를 좇거나 대표해 온 인간 고유의 창작-감상행위는 비가시적인 변화를 헌신적으로 만들어왔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역설적이게도 어떤 예술(가)의 명멸 여부와는 상관이 없다. 저자가 “인생 전시”로 손꼽은 베를린 신국립미술관의 두 전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베를린을 위한 100점의 작품》(2023)과 테칭 시에의 《테칭 시에》(2023)를 독특한 구조로 교차해 낸 장을 읽으며 깨달은 점이다.

미술사 전공자로서도 좀처럼 일관된 관점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대작가 리히터에 대한 전문적이고 통찰력 있는 설명도 그렇거니와, 그를 ‘미지의 작가’라고 부른 부분은 마음에 쏙 와닿았다(“작품을 보고 있어도 알기 힘들고, 안다고 해도 이해하기가 더 어렵다”). 현대미술의 가공할 만한 힘을 체감한 것은 그보다 테칭 시에를 소개한 대목에서였다. 극한을 넘어서 “미친 짓”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한 번도 아니고 여섯 번씩이나 진행했다는 사실은 가히 놀라웠으나, 나를 더 큰 충격에 빠뜨린 것은 다름 아닌 시에가 가진 신념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시에는 이 정신 나간 퍼포먼스가 운명과 맞먹는 의미를 지닌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에게는 시에가 미술계가 이를 예술로 받아들일 것이라 믿었다는 것이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혹자는 그가 거창한 신념이나 의지 없이 그저 자신이 만든 예외적인 규칙을 삶에 적용했을 뿐이라 하겠지만, 〈13년 계획〉(1986~1999)과 같은 행위를 그러한 신념도 없이 시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베를린 신국립미술관은 시에의 작품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그의 인생 한 편을 떼어내어 전시함으로써 이 신념에 응답한 셈이다. ‘인생 전시’를 보고 나서 저자는 “아, 시에여! 아, 인간이여!”라고 탄식했다. 나는 불현듯 현대미술계가 일종의 광기 집단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됐다.

그러고 보면 예술은 대상이 무엇이든 본래의 무언가를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에서 그 힘을 끌어온다. 고대 인류가 생존을 위해 들어갔던 동굴이 제의적 장소로 변화하는 과정에는 인간의 창작물인 벽화가 있었다. 화이트큐브의 아성은 해체된 지 오래이지만, 작품으로 채워진 전시 공간은 여전히 전환적인 힘을 행사한다. 저자는 심지어 베니스비엔날레에서는 전시장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행위조차 관람으로 치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2024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전시를 보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면서 비엔날레의 정체성, 당위성, 유효성, 역대 전시별 특성을 곱씹으며 ‘베니스 백서’ 차원의 방대한 지식을 들려준다. 나는 이 장을 가장 즐겁게 여러 번 읽었는데, 이는 그가 한 시간 동안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린 끝에 관람을 포기했다는 반전 때문만은 아니다.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이 베니스비엔날레를 위시한 현대미술계의 풍경을 사유한 기회로 전환됐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체르토사섬을 찾아 이질적인 사운드 작업들을 만날 수 있게 되면서 기억에 남을만한 하루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예술이 삶을 바꾼다는 거짓말 같은 진리가 반복적으로 설파되며 또 저항 없이 수용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과정은 유레카와 같은 찰나의 순간이라기보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며 형태를 파악하는 지난한 학습과 유사했기 때문에, 예술을 예찬하는 저자의 글은 무엇보다 촉각을 자극하며 다가왔다. 얼마 전에 인터뷰 차 만난 한 작가가 들려준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언어가 고도로 발달하기 이전의 고대인들은 한 사람씩 한 각도에서 사냥감을 관찰하고 나중에 모여 여러 명의 관점을 종합해 대상의 전체적인 형체를 추론했다고 한다. 동일한 작가, 작품, 전시에 대한 저자와 나의 서로 다른 기억과 감정이 포개어지기를 여러 번. 나는 사라지지 않는 어떤 예술의 형체를 마침내 희미하게나마 목격한 기분이 들었다.

돌이켜보니 예술은 내 삶을 바꿔주겠다는 어떠한 약속도 한 적이 없었다. 이 글의 서두를 열었던 문제의 문구, 오래된 경구 같은 캐치프레이즈를 붙든채 맺어진 적 없는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짐한 건 나 자신일 뿐이었다. 어떤 예술이 사라지지 않는 건 인간의 이러한 다짐 덕이다. 잊힌 약속을 복기해 본다. 예술이 건네는 기쁨을 가감 없이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을. 예술의 앞선 걸음을 늦지 않게 좇겠다는 태도를. 그것이 던지는 예리한 비판과 변화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겠다는 결심을.

1 Daisy Fancourt “Art Could Save Your Life! Five Creative Ways to Make 2026 Happier, Healthier and More Hopeful” The Guardian 2026.1.7 (https://www.theguardian.com/lifeandstyle/2026/jan/07/art-could-save-your-life-creative-ways-make-2026-happier-healthier)

2026년 2월호 (VOL.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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