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TOPIC brilliant memories:with
서울시립미술관과 현대자동차가 공동 주최하는 〈브릴리언트 메모리즈: 동행전〉이 3월 22일부터 4월 21일까지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렸다. 올해 2회째를 맞은 이번 전시에서는 공모한 사연 외에 작가와 탈북 새터민 등의 사연도 다뤄 자동차와 인간의 특별한 ‘동행’을 이어가고자 했다. 참여한 12팀 작가들의 설치, 영상, 조각 작품 등 12점이 소개된 이번 전시를 통해 점차 확대되어 가는 미술과 기업의 공생관계를 확인해볼 수 있다.
협업과 공존의 방식
안소연 미술비평
미술과 다른 영역의 만남 자체로 이목을 끌며 이슈를 만들어내던 때도 지났다. 미술의 오랜 폐쇄적 전통에서 벗어나 일상에 깊이 연루될 것을 자처한 수많은 미술가의 노력으로 ‘미술’과 ‘미술 아닌 것’의 연대가 가능하게 됐고, 이러한 결탁은 단순히 작가의 흔적을 제거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복잡한 입장들 안에서 숱한 협업자의 개입을 불러왔다. 서구에서는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며 현실 혹은 현실문제에 동화된 작가들이 일상의 다른 영역과 곧잘 왕래했으며, 이는 20세기 이래 몇 차례 등장했던 아방가르드적 사유에 기대어 각 영역의 진부한 경계를 허무는데 일조했다. 이제 단순한 결합을 넘어선 협업과 공존의 방식이 동시대 미술의 세련된 미덕처럼 제시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시립미술관과 현대자동차가 공동 주최한 전시 〈브릴리언트 메모리즈: 동행〉은 미술과 기업의 만남이라는 일련의 협업 조건에서 비롯된 예술적 실천 내지는 형식에 대한 다양한 층위의 논점들을 제공한다.
사물, 상황을 매개하는 형태
올해로 두 번째를 맞은 〈브릴리언트 메모리즈〉 프로젝트는 현대자동차의 브랜드 캠페인의 일환으로 기획된 전시다. 기업과 소비자를 매개하는 방안으로 채택된 이 예술적 실천은 2015년 〈브릴리언트 메모리즈: timeless village전〉을 시작으로 역동적인 사회의 표피 아래 가려진 한 개인의 사라져갈 기억과 작은 역사를 조명한다. 이를테면 이 프로젝트는 자사의 자동차에 얽힌 사용자들의 사연을 공모하고 채택된 사연을 소재로 한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형태와 태도를 아우른다. 이는 단지 하나의 사물이 정의되는 진부한 의미나 낭만적인 수식어들을 나열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개별적 상황들을 환기한다. 따라서 기업의 대량 생산품이자 현대인의 사적 소유물인 자동차를 소재로 한 〈브릴리언트 메모리즈〉 프로젝트에서는 여러 주체와 그들이 맺고 있는 수많은 관계가 근거리로 포착된다. 전시 제목이 〈브릴리언트 메모리즈: 동행〉인 것도 그런 의미의 타당성을 한껏 뒷받침해준다. 실제로 전시에 참여한 12명의 작가는 여러 관계와 상황의 틈새에 개입하는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행보를 보여준다.
정연두의 사진 콜라주 작업 〈여기와 저기 사이〉는 자동차에 얽힌 어느 탈북 새터민의 기억(사운드)과 1990년대 한국사회 중산층의 마이카 문화 단면 (이미지)을 중첩해 놓았다. 현실을 살아가는 삶의 주체들이 겪는 각기 다른 상황의 층위를 들춰내듯, 정연두는 여러 장의 사진을 부분적으로 잘라 몇 개의 공간 층을 유지한 하나의 꽉 찬 풍경으로 재구성했다. 풍경의 익숙한 표피로부터 내부의 낯선 상황으로 개입해 들어가는 작가의 시선은 여기와 저기 사이에 어중간히 서있는 관객들에게 가공된 이미지가 시사하는 권력의 기호와 소박한 진실의 격차를 미묘하게 드러내 전달한다. 이때 상황을 매개하는 사회적 산물로서의 자동차는 여러 입장을 대변하는 표상으로 작용한다.
한편 박경근의 2채널 영상 〈1.6초〉는 최첨단 자동차 제조 공장에서 역동적으로 돌아가는 스펙터클한 기계 장치들에 주목했다. 영상의 거대한 수직적 스케일과 화면 속 기계가 뿜어내는 시청각적 효과들은 적어도 현재를 매개로 한 과거와 미래의 역사를 꽤 근거리에서 체감하게 한다. 전형적인 수직적 기념비 형태를 띠는 김기라×김형규의 〈잘자요 내사랑!!〉도 자동차라는 하나의 사물이 함의하는 집단적 기억의 외피와 그 내부에 공존하는 익명의 작은 역사들을 주목한다. 어쩌면 전준호의 〈타틀린, 코발트 블루, 나부의 쏘나타〉도 일상의 리얼리티라는 측면에서, 폐차 직전의 자동차를 현재의 3차원적 실재 안에 여전히 작동 중인 무명의 실존 기념비로 세워놓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협업, 차이를 함의한 타인과의 공존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업은 대부분 몇 가지 공통적인 조건에서 출발한다. 기업과 예술가의 협업이라는 조건 하에 참여 작가들은 저마다 현대자동차라는 기업 브랜드를 공통의 소재 및 매체로 다룬다. 또한 작업 과정에서 몇몇을 제외한 작가 대부분은 현대자동차를 소유한 소비자와의 소통을 수반한다. 제한된 조건 속에서 대상에 접근해 가는 작가들의 예술적 실천은 현실과 관계 맺는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태도와 형식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작업을 통해 협업의 관계가 나이브하게 노출되지 않으면서도 각각의 협업자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를 통해 충분한 만남과 소통의 방식을 생산해냈다. 그렇듯 차이를 전제한 소통의 미덕이야말로 협업과 공존의 가장 적절한 모델이 아닐까 싶다.
또한 협업하는 방식을 기존 작업의 맥락에서 구체화한 작가도 있다. 그동안 〈아트 택시〉 프로젝트를 진행해 온 홍원석은 이번 프로젝트 사연자의 구형 그랜저 2.0을 이용해 〈아트 택시〉 프로젝트를 이어갔다. 타인의 물건과 이야기를 가지고 관객 참여형 작업을 지속해온 작가는 타인들의 접촉과 교환을 직접 주선하며 쉽게 드러나지 않는 개인의 소소한 실천을 기록해갔다.
다운라이트 디렉터로 전시에 참여한 박재영의 〈DownLeit Memory Simulator Vol.1〉은 일종의 기억 환기장치다. 한 개인의 특정 기억을 복구하기 위해 제작된 이 기계장치는 그 쓸모에 비해 굉장한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그것은 사연자와 관련된 특정 기억을 환기하는 심리적 기계장치지만, 사실 전시를 통해 타인의 자리에서 우연성에 기반을 둔 채 다수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그 우연성이란, 과거 다다이스트들의 전략처럼 수많은 차이와 간극을 내포한 것이며 동시에 미끄러지는 의미의 연쇄로 뜻밖의 공감과 소통의 방식을 고안해내는 실체다. 이처럼 미술과 기업의 협업 방식을 직접적으로 다룬 〈브릴리언트 메모리즈: 동행〉에서는 협업의 주체들이 각각의 상황에 매우 능동적으로 개입돼 있다. 그 말은 차이를 내포한 협력과 공존을 뜻하는데, 결국 사회적 틈새에 섬세하게 개입할 수 있는 예술의 유연한 태도야말로 이러한 협업의 성패를 좌우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