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토픽] 미디어아트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안경화│백남준아트센터 학예팀장

지난 2월, 도쿄의 롯폰기와 에비스에서는 미디어아트에 대한 서로 다른 접근 방식을 보여주는 두 개의 전시 <일본문화청미디어예술제(Japan Media Arts Festival, 이하 ‘미디어예술제’)>와 <에비스영상제(The Yebisu International Festival for Art & Alternative Visions)>가 열렸다. 한국의 문화부에 해당하는 일본 문화청과 국립신미술관에서 작품을 주최하고 <미디어예술제>는 아트, 엔터테인먼트, 애니메이션, 만화의 4개 부문에 걸쳐 공모를 받고 수상자를 선정하는 콘테스트 형식을 취한다. 미술관에서 펼쳐지는 미디어아트 전시에 애니메이션과 만화가 포함되는 경우는 많지만 엔터테인먼트부문이 공존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미디어예술제>의 이러한 장르적 특성은 미디어아트를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및 컴퓨터, 그 외의 전자기기 등을 이용한 예술”로 정의한 일본의 ‘문화예술진흥기본법’ 덕택에 가능한 것으로, 이는 <미디어예술제>에 대한 찬반 양론을 불러일으키는 소지를 제공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미디어아트에 관한 정의에 긍정적인 이들은 실험적인 예술과 엔터테인먼트 사이에 경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 반대하는 이들은 부가가치 창출이라는 문화의 산업적인 특성만을 지나치게 중시한다는 측면에서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미디어예술제>에는 또 다른 비판이 가해지고 있는데, 두 번째 논쟁은 심사위원 구성과 관련되어 있다. 주최 측은 이번 대회에 84개국의 4,327점이 출품되었고 이 중에서 일본 출신 아티스트의 작품이 2,000점이라는 사실을 들어 예술제가 국제적인 행사로 성장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예술제의 심사위원이 전원 일본인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은 수상작 선정에 있어서 자국 작가의 작품과, 일본의 문화적 감수성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해외 참여자의 작품이 유리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이 점은 애니메이션부문의 대상 수상작으로 14년 만에 해외 작품이 선정되었다는 사실로도 어느 정도 뒷받침된다.) 진정한 국제행사가 되려면 이제 절반이 넘는 해외 참가자들에게 공정한 잣대를 제시할 수 있도록 심사제도의 정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와 같이 겉으로 드러난 문제점과 몇 십 년 만에 도쿄에 내린 폭설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예술제> 는 줄을 서서 봐야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심지어 출품작에 비해 전시 공간이 비좁을 뿐만 아니라, 공간 구획 없이 모든 작품을 한 장소에 모아놨기 때문에 작품 감상이 쉽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전시 이외에도 백남준이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의사”라고 칭한 엔지니어 슈야 아베의 공로상 수상 기념 심포지엄 <엔지니어링! 백남준>을 비롯하여 스크리닝, 토크, 워크숍 등의 부대 행사에도 많은 청중이 참석하였다. 이처럼 수많은 관객의 자발적인 참여는, <미디어예술제>가 애니메이션부문 우수상을 받은 히데아키 안노의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Q>와 만화부문 대상작인 히코 아라키의 <죠죠의 기묘한 모험 8부>를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작가들의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한 자리에서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근본적인 요인으로 미디어아트 전반에 대한 일본인의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들 수 있다.
올해 아트부문 대상을 수상한 카르스텐 니콜라이는 알바 노토(alva noto)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알려진 노이즈 음악가이도 하다. 기술적인 장치를 이용하여 사운드와 비주얼을 결합한 작품을 제작해온 니콜라이의 은 텔레비전 모니터에 자석을 대고 움직이거나 코일을 부착한 후 전기를 흐르게 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던 백남준의 실험 TV 시리즈를 연상케 하는 작업이다. 벽면에 설치된 4개의 네온 튜브에서 발하는 빛이 카메라를 통하여 CRT 텔레비전에 전달되면, 텔레비전 모니터에는 4개의 선이 나타난다. 이 선들은 천장에 매달린, 끝 부분에 자석이 부착된 기다란 추가 불규칙적으로 모니터 위를 움직일 때마다 색채와 형태가 왜곡되고, 이러한 자기장의 파동은 사운드 시스템으로 전달되어 소리를 발생시킨다. 작가가 와타리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한 백남준 추모 콘서트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는 이 작품은 그동안 소개된 니콜라이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최고의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대상은 이란 개별 작업이 아닌, 예술과 과학을 가로지르며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펼쳐 온 아티스트 니콜라이에게 수여된 것으로 보였다

 

다른 컬러, 동일한 컬러, 그리고 세계화

대상 수상작 보다 관객들을 집중시킨 작품은 심사위원 추천작으로 전시된 에이 와다의 이었다. 구형의 오픈 릴(open reel) 자기(磁氣) 녹음기를 사용한 작품과 퍼포먼스를 꾸준히 진행해 온 와다는, 앞면에 투명한 아크릴이 부착된 4개의 높은 단 위에 자기 녹음기 한 대씩을 설치하였다. 4대의 자기 녹음기에 부착된 릴이 회전함에 따라 릴에 감겨 있던 자기 테이프가 풀려 나가고, 풀어진 테이프는 추상적인 형상을 만들면서 단 속으로 떨어진다. 자기 테이프가 끝까지 풀린 순간 릴이 반대로 회전하기 시작하고, 이어서 테이프는 릴에 다시 감겨 올라가게 되는데, 이처럼 조금 전과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는 동안 테이프에 녹음된 음악이 큰소리로 재생되면서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이 작품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용도 폐기된 테크놀로지의 산물에 새로운 기술을 덧대어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다른 매체로 변환시킨 와다의 재능은, 이미 오래된 텔레비전의 내부를 조작하여 텔레비전을 드럼과 같은 악기로 변모시킨 전작 <브라운 튜브 재즈 밴드>(2010 일본문화청미디어예술제 우수상 수상작)에서 빛을 발한 바 있다.
<미디어예술제>의 출품작들이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기반을 두거나 직접적으로 움직임을 연출하는 특성을 보이는 반면, <에비스영상제>에 소개된 작업은 대부분 사진, 비디오, 필름과 같이 미디어아트의 역사에서 ‘고전’의 영역에 속하는 매체들로 표현되었다. 도쿄도사진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인 만큼 매체의 형식보다는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이미지’에 중점을 둔 이 영상제는, 매년 동시대의 상황을 드러내고 삶의 다양성을 탐구하는 주제에 맞춰 작가를 선정하는, 지극히 전통적인 주제전이자 그룹전의 형식을 띠고 있다.
<제6회 에비스영상제>의 <트루 컬러(True Colors)전>은 세계(globalization)라는 익숙한 주제를 선택한 만큼 얼마나 참신한 이야기를 끌어내는지가 관건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기획자는 18명의 작가(팀)가 참여한 전시 이외에도 심포지엄, 토크, 강연, 그리고 15종류의 스크리닝 프로그램과 에비스 가든 플레이스에서 열린 시징맨의 퍼포먼스를 통해 세계화의 서로 다른 목소리를 대변하는 무대를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페스티벌 디렉터인 히로미 기토자와가 세계화에 대하여 언급하려는 내용은 전시 제목인 <트루 컬러>에 대한 해석, 즉 본성·본색·개성의 의미를 지닌 ‘트루컬러’가 다양한 국가와 인종을 배경으로 동시대에 공존하는 각기 다른 문화·전통·사상·자연환경 등을 제시하는 데 적합한 단어라는 언급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전시 작품들 중에서 색색의 페인트를 칠한 오래된 건물들을 촬영한 앙리 살라의 <내게 색채를 줘>는 기획자가 의도하는 세계화와 지역화의 복잡하고도 미묘한 관계, 세계화로 인한 예기치 못한 현상 등을 함축적으로 암시한 영상이다. 공산주의 체제가 휩쓸고 간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의 도심 재건사업 중 하나를 촬영한 이 작업은, 자유가 주어진 사회에서 오히려 지역적 특성과 개별적인 맥락이 사라져가는 역설적인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내게 색채를 줘> 이외에도 살라의 초기 영상 6점이 스크리닝의 첫 번째 섹션으로 구성되었다. 기획자가 살라의 작업을 집중적으로 소개했다는 사실에서 개인과 전체, 지역화와 세계화와 같은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진 양 극단의 개념들이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엉켜있고, 모든 일에는 명과 암이 공존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기록한 그의 작품들이 <트루 컬러전>의 주제를 포괄적으로 전달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계화의 다양한 양상에 초점을 맞춘 이 전시에는 세계화의 한 측면을 스포츠와 전체주의의 속성에 빗대 표현한 타란 질과 필라 마타 듀퐁의 <실내 체육관>, 카메룬과 에티오피아의 일상을 인류학자의 시각으로 기록한 다이스케 분도, 이츠이 가와세의 비디오와 함께 서양의 시각으로 바라본 아시아의 정형화된 모습을 비판하고 이를 넘어서려는 아시아 출신 작가들의 영상이 다 수 소개되었다. 하지만 각 지역의 특수성에 집중한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특히 대형 스크린을 통해 티베트의 종교 의식인 코라의 과정을 고화질로 촬영한 리우(Jawshing Arthur Liou)의 비디오를 보면서, 이 작업이 티베트를 바라보는 기존의 시선에 동의하거나 그 시선을 강화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이완 출신으로 미국에 거주하는 작가는 티베트 불교의 성지인 카일라스 산과 컬러풀한 색상의 옷을 입고 황량한 설산을 오르는 순례자들을 공들여 촬영하였다. 하지만 아시아인의 작업임에도 ‘문명화되지 않은, 순수한, 미지의, 성스러운’과 같이 티베트를 떠올릴 때 쉽게 연상되는 형용사들로부터 이 비디오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오히려 <코라>는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거나 무시하거나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아시아인인 필자 역시 전 지 구적으로 획일화된 시각에 맞춰 아시아를 바라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는 작품이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세계화의 트루 컬러는 이미 우리를 동일한 컬러로 물들인 것이다. ●

[월드 리포트] 고기와 케이크가 있는 풍경

박진아│미술사

오스트리아의 중세 무역도시 크렘즈(Krems)에 위치한 포룸 프로너 현대미술 전시관(Forum Frohner)에서는 <미술 속의 음식: 쾌락과 덧없음(Eating in Art: Pleasure and Transience)전>(2013.10.20~ 3.23.)을 열어 현대미술 속에 음식거리와 요리가 어떻게 표현되어 오늘날 우리의 일상을 반영하고 있는지 조명하고 있다.
지난 몇 년 구미권에서는 텔레비전 전파를 타고 불기 시작한 쿠킹쇼 유행에 힘입어 음식과 요리를 주제로 미술작품을 탐색해 보는 시도가 눈에 띄었다. 2009~2010년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할레에서 기획돼 여러 도시를 순회한 <우주를 먹다(Eating the Universe)전>을 시작으로, 2011년 뉴욕 로버트 맨 화랑(Robert Mann Gallery) 기획의 <생각거리(Food for Thought)전>, 2012년 시카고대 스마트 현대미술관(Smart Museum of Art)에서 열린 <잔치 후대(Feast: Radical Hospitality in Contemporary Art)전>, 그리고 최근인 2013년 연말부터 올해 초까지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열린 <미술과 식욕: 미국회화로 본 요리와 문화(Art and Appetite)전>은 20세기부터 현재까지 음식과 요리, 식사문화를 창조적 모티프로 삼은 현대미술 작품들을 연대적 흐름으로 정리한 전시회들이다.
최근 기획되는 전시나 문화이벤트는 음식과 요리를 21세기적 소비문화학 관점에서 보다 경고성 짙은 논조를 띠는 추세다.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음식거리가 양적으로 풍족해진 과잉 풍요의 글로벌 21세기, 과연 음식은 현대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진화해왔을까’라는 문제의식을 관객에게 던지고 음식을 둘러싼 과잉 대 부족, 포식 대 기아, 맛좋음 대 역겨움이 공존하는 역설적 현실을 숙고해 보라고 권유한다. 예컨대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아리아나 박물관은 유엔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12년에 <푸드(FOOD)전>을 기획해 2015년까지 전 세계 순회전시를 앞두고 있다. 현재 오스트리아 크렘스 쿤스트할레 포룸 프로너관에서 전시 중인 <미술 속의 음식: 쾌락과 덧없음>은 한층 더 깊은 철학적 논조를 띤다. 음식이란 인간의 육신에 자양분을 주고 미각에 쾌락을 안겨주지만 결국 일시적이고 부질없는 생(生)에 대한 은유일 뿐이라며 관객에게 자기성찰과 겸손을 제안한다. 과잉 풍족의 시대인 21세기 오늘, 현대인이 ‘희귀’한 먹거리도 쉽게 구하고 무심하게 버리는 ‘일용품(commodity)’ 정도로 취급하고 있지는 않냐고 넌지시 꼬집는다.
음식거리가 서양미술에 모티프로 등장한 것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과음과 과식을 7대 죄악의 하나로 보았던 기독교 사상에 근거해,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정물화는 육체적 쾌락에 쉽게 유혹받는 인간 무리를 쉽게 상하고 벌레먹어 썩는 음식거리에 빗대어 인생무상(vanitas)을 경고했다. 그 연장 선상에서, 에덴의 동산에서 지식의 열매 사과를 따먹은 후 원죄의 타락에 빠진 인간상을 일관적으로 그려온 오스트리아 화가 아돌프 프로너(Adolf Frohner)는 이번 전시에 <식료품(Das Lebensmittel)> 칸막이 그림 시리즈를 선보여 재조명받고 있다.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서 음식을 먹고 마시고 소화하고 배설한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음식을 섭취하는 행위는 육신과 외부 세계, 자아와 타자 사이의 물리적 간격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이며, 한걸음 나아가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인간에게 생명을 멈추지 않고 돌아가게 도와주는 매개물이기도 하다. 이 전시 <미술 속의 음식: 쾌락과 덧없음>은 1960년대 빈 행위주의 (Wiener Aktionismus)야말로 바로 이 철학적 착상에 근거하여 음식재료나 잔치 의례를 퍼포먼스적 요소로 적극 도입한 대표적인 미술운동이었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돼지 도살장에서 죽은 동물의 피와 내장을 갖고 펼친 헤르만 니치(Hermann Nitsch)의 난교극장(1962~1998), 장황한 테이블세팅과 요리를 활용해 벌인 루돌프 슈바르츠코글러(Rudolf Schwarzkogler)의 <결혼피로연>(1965), 온몸에 음식물을 뒤범벅시키는 난장판을 연출했던 오토 뮐(Otto Muehl)의 <푸드 테스트(Nahrungsmittel Test)>(1966)는 모두 음식물에 빗대어 인간의 생로병사와 원초적 성욕을 은유한 강력한 퍼포먼스였다.

미술, 음식문화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다

오스트리아의 실험주의 영화가 페터 쿠벨카(Peter Kubelka)는 요리란 자연상태의 식재료에 열과 조리술을 가해 자연과 문화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임을 넘어서 자연(식재료)을 예술적 조형물(완성된 요리)로 구현하는 고도의 창조과 정이라 정의했다. 그런가 하면 요리란 동물이든 식물이든 살아있는 생명을 죽여야만 하는 잔인함을 내포한다. 사진가 하인츠 치불카(Heinz Cibulka)는 가축 도살 장면을 촬영한 <사진 퍼포먼스> 시리즈를 통해서 요리란 “죽이고, 먹고, 살아가고 잉태하는” 순환과정의 은유라고 정의하면서 동시에 먹이사슬 최상단에 놓인 인간조차도 결국 그 같은 생사의 대섭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기억하라고 촉구한다.
음식(飮食)문화는 시대마다 변천하면서 호모 소셜리스(Homo Socialis) 즉, 사회적 인간의 단면을 보여주는 바로미터 노릇도 했다. 태곳적부터 오늘날까지 문화권을 막론하고 여러 사람이 모여 술과 조리된 먹을거리를 나누고 먹고마시는 식사 관행은 인간 사회 속의 여러 기능을 윤활하게 촉진시키고 질서를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종교적・사회적 의례(ritual)였다. 인류의 모든 종교는 제각각 음식과 관련된 독특한 상징체계와 섭생규칙을 가르친다. 전투에 임했던 장군과 병사들은 잔치를 거나하게 열어 먹고 마시면서 사기를 북돋웠고, 고위 정치가나 중대한 계약을 앞둔 사업가는 성찬을 베풀어 손님을 극진하게 대우하는 것으로써 신뢰를 다졌다. 예나 지금이나 구애는 남성이 여성을 저녁식사에 초대하는 것에서 출발하며, 혈연과 혼인으로 구성된 가족이란 함께 살면서 한솥밥을 나눠먹는 식구(食口)들을 뜻하게 되었다.
이 ‘사회적 의례로서의 식사’ 라는 범인류적 주제에 착안해 음식과 미술를 교접한 음식미술의 선구자로 미술계는 스위스의 조각가 다니엘 스푀리(Daniel Spoerri)를 꼽는다. 1960년부터 1970년대까지 계속된 스푀리의 이른바 ‘이트 아트(Eat Art)’는 요리한 음식을 잘 차려낸 밥상에 둘러앉아 여럿이 나눠먹는 식사 의례란 개인과 개인, 나아가서 세대와 세대 간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의 순환(life cycle)을 뜻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는 “인간은 낯선 그 무엇을 잡아 잘게 썰고 뒤섞고 꾸며 담아내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값싼 석유에 의존한 물류 및 운송력, 첨단 포장과 보관기술, 세련된 식품가공기술 덕택에 슈퍼마켓만 가면 원산지나 제철과 무관하게 사실사철 먹거리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초간편의 시대 21세기, 현대 인류는 음식물이 어디서 어떻게 제조되어 우리 곁으로 오는지 모른 채 점점 더 자연과 멀어져가고 있다. 이를 환기시키려는 듯 요제프 보이스의 <내게 꿀을 다오(Gib mir Honig)>는 인간과 자연 간 깨지기 쉬운 공생(symbiosis)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꿀벌과 벌꿀통에 빗대어 표현한 개념주의 설치물이다. 디터로스(Dieter Roth)는 초콜릿 덩어리를 깎아 만든 자화상 조각 <사자로서의 자아(Lowenselbst)>(1967년)에서 재료에 내재된 부패와 사멸의 운명을 작품의 일부로 포함시켰다. 유엔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전 세계서 생산되는 식품 중 3분의 1이 소비되지 못한채 폐기된다. 이에 대한 논평으로 오스트리아의 사진작가 클라우스 피힐러(Klaus Pichler)는 <3분의1(One Third)> 시리즈에서 바로크 정물화풍을 빌려서 식품산업계가 그토록 집착하는 유통기한제의 진정한 의미를 재고한다. 탈가족화 추세 속에서 전에 없이 1인가구가 많아진 요즘, 마르쿠스 하나캄과 로즈비타 쉴러(Markus Hanakam & Roswitha Schuller) 2인조팀은 플라스틱과 인조가죽을 삼각형으로 잘린 조각 케이크로 형상화해 대량 생산된 기계가공식품으로부터 영양을 섭취하는 현대인의 식생활 양태를 지적한다.
미술 속의 음식을 인류문화사를 이해하기 위한 문화적 자취로만 이해하는 단계는 지났다. 예컨대, 태국의 리르크릿 티라바냐(Rirkrit Tiravanija)는 전시장에서 커리를 요리해 관중에게 나워주는 퍼포먼스(뉴욕 모마, 2012년)를 통해서 요리, 미술, 외교를 연결했다. 2012년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한 아트 프로젝트는 젊은이들이 슈퍼마켓에서 버려지는 음식물을 구제해 파티요리를 만드는 단편영화 <쓰레기 속에서(Days in Trash)>를 제작해 소비주의의 병폐를 창조적으로 극복할 것을 제안했다. 빈에 있는 티센-보르네미자 아트 컨템포러리(Thyssen-Bornemisza Art Contemporary)가 운영하는 서퍼클럽(Supper Club) 이벤트는 미래의 연회 메뉴와 식사문화를 탐색해보는 문화실험소다. 이제 현대미술은 음식을 인간 행동을 변화시키고 미래 문화를 창출하기 위한 문화적 실험 도구이자 적극적인 참여 수단으로 응용하고 있는 것이다. ●

[월드 리포트] 시끌벅적한 추도식장에 펼쳐진 이미지의 향연

contents 2014.2. world report | 시끌벅적한 추도식장에 펼쳐진 이미지의 향연
신원정│미술사
여러 차례 계획의 변경과 연기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2013년 겨울 쿤스트베르크에서 막을 올리게 된 전시는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크리스토프 슐링엔지프의 작업을 포괄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룬 첫 회고전이라는 점에서–지난 2011년 베니스비엔날레의 독일관을 비롯해 그간 열린 전시들은 고인을 추모하는 행사에 더 가까웠기에–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슐링엔지프 작업의 방대한 스펙트럼을 감안할 때 ‘회고’적 성격의 전시를 베를린에서 열기에는 최소한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 정도의 규모라야 어울릴 듯하지만 전시가 실제 열리고 있는 곳은 그리 크지 않은 쿤스트베르크이다. 전시
를 기획한 큐레이터는 작가의 작업을 남김없이 총괄하기란 불가능하기에 그 보다는 관람객이 그의 예술세계를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강조했다. 큐레이터의 말에서도 드러나듯 장소가 다소 협소하다는표면상의 단점은 ‘선택과 집중’을 가능케 해준다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한 듯하다. 이뿐만 아니라 베를린의 현대미술현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가지는 전시 기관인 쿤스트베르크가 가진 장점 중 하나인 주전시실 공간을 인상적으로 활용한 점 또한 이번 전시가 이곳에서 열려야 하는 당위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지상과 지하를 아우르는 높이와 상당한 크기의 주전시실은 한때 마가린 제조 공장이었던 쿤스트베르크 건물의 고유한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소이자 무엇보다 대규모 설치작품을 전시하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어두컴컴한 홀에 일곱 개의 굵직한 나무 기둥이 설치되어 있고 그 꼭대기마다 사람이 앉아있는 광경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아무런 미동 없이 독서를 하거나 드물게 고개를 들다 자신을 관찰하는 관람객들과 눈이 마주치기도 하지만 이내 무심하게 시선을 옮기는 이 <주상 고행자>들은 슐링엔지프의 2005년도 작 <두려움의 교회>의 한 부분이다. 전시실 한가운데에는 회전무대인 <아니마토그래프>의 독일판인 <파르지파크(라그나뢰크)>(2005)가 자리하고 있다. 영화, 연극, 음악, 퍼포먼스와 오페라가 한자리에 모여 녹아내리고 서로 섞이는 현장이다. 여러 개의 세트가 나란히 설치되어 있고 조명이 극적 분위기를 강조하는 회전무대는 누구나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다. 장중하게 울려 퍼지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은 공간의 밀도를 조율하고 무대 위 오브제, 벽에 붙은 포스터와 그림, 영사기에서 나오는 영상이 빚어낸 이미지들은 전시실 공간을 시각적으로 재단한다. 관람객이 천천히 돌고 있는 무대 위로 올라서서, 쏟아지는 조명과 영상을 온몸에 직접 맞으며 스스로 이 움직이는 극장의 일부가 되는 순간 비로소 작가가 꿈꾸었던 총체예술작품은 완성된다. 한편 바그너의 오페라를 들으며 아돌프 히틀러의 초상화를 보노라면 어느새 느껴지는 개운찮은 뒷맛에 독일 출신 작가의 전시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될지도 모른다.
강한 정치성을 표방하는 슐링엔지프의 퍼포먼스 작업은 부조리하고 냉혹한 현실을 가감 없이 다루는데 공개될 때마다 온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을 만큼 도
발적이지만 그 전복성과 병행하는 신랄한 조소와 탁월한 비틀기는 다양한
층위를 갖춘 복합적인 작품의 탄생에 일조한다. 서바이벌 방식의 인기 TV프
로그램 ‘빅 브라더’의 포맷을 차용한 퍼포먼스 <오스트리아를 사랑해주세요>
는 2000년 빈 예술축제 기간 중 진행되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빈
국립오페라극장 앞에 설치된 컨테이너, “외국인을 추방하라”는 문구를 담
은 큰 배너가 붙은 이 컨테이너 안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다는 외국인 12명이 1주일간 고립된 채 생활한다. 그들의 모습은 TV로 생중계되고 오스트리아 국민은 전화나 인터넷으로 송환자를 뽑는 투표를 할 수 있다. 투표 그 결과에 따라 매일 저녁 8시에 두 명씩 강제 송환을 위해 컨테이너를 떠나게 된다. 최종 우승자를 기다리는 것은 상금과 합법적인 오스트리아 국적 취득이다.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근본적인 윤리적 화두에서부터 인권과 직접(외국인 난민 및 정치적 망명자) 혹은 간접적(리얼리티 쇼 프로그램에서 참가자들을 대하는 시선)으로 관련된 테마들, 그리고 외국인 혐오 현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이 극단의 자본주의를 대변하는 TV 예능프로그램의 달콤한 탈을 쓰고 평온한 일상을 가장한다.
아힘 폰 파첸스키와 공동으로 제작한 <프릭스타 3000>(2003)는 2002년 6월 8일부터 방영되었던 6부작 TV 프로젝트
를 편집한 비디오작업이다. 당시 독일 청소년들에게 선풍적인 화제를 불러일으킨 캐스팅 프로그램 <독일이 슈퍼스타를 찾다>와 비슷하면서도 뚜렷하게 다른 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은 바로 넘치는 끼를 주체할 수 없는 장애인들이다. 캐스팅 과정부터 최종 밴드 멤버 선정 그리고 앨범 발매에 이르기까지 캐스팅 쇼의 전반적인 메커니즘이 화면에 담겼다. 시간이 지날수록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회·관습적 구분은 모호해지고, 자연스러운 감정 표출에 제약을 받는 이는 실상 어느 쪽인가 하는 의문이 강하게 제기된다.
전시의 주인공, 슐링엔지프의 부재(不在)가 아쉬운
슐링엔지프의 작업에서 표출되는 정치성의 정점을 찍은 두 건의 사건을 보자. 먼저 그는 1997년 8월 말 제10회 도쿠멘타가 열리던 카셀에서 당시 독일수상 “헬무트 콜을 죽여라”라는 문구를 담은 포스터를 내건다. 이로 인해 퍼포먼스 현장에 긴급 투입된 경찰이 작가를 체포하고 일시적으로 구금했다. 그로부터 1년 뒤 연방의회선거에 기해 “당신 자신에게 투표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찬스 2000’이라는 이름의 정당을 창설하고 특히 전국 600만 실업자에게 헬무트 콜 총리가 여름휴가를 보내는 볼프강호수가 범람하여 총리의 별장이 물에 잠겨버리도록 <볼프강호에서 수영하기> 퍼포먼스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언론의 엄청난 주목에 비해 실제 참가자 수는 100여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비록 최종 선거에서 0.058%의 지지를 얻는 데 그쳤지만 “실패는 기회”라는 창당 슬로건부터 시작해 계속된 미디어의 관심과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영상예술에서 출발한 뒤 1993년부터 연극 쪽으로 활동영역을 넓힌 작가는 2004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초대되어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을 연출하게 된다. 페스티벌 총감독 볼프강 바그너와의 사이에서 빚어진 갈등으로 인
해 상당히 시끄러웠던 준비 과정–후에 폐암 판정을 받은 작가는 이때 받은 스트레스를 발병의 원인으로 꼽았다–과 연출을 맡은 슐링엔지프의 존재로 인해 예술계 악동이 만드는 <파르지팔>이 과연 얼마나 센세이셔널할 것인지에 대한 기대감이 날로 고조되었지만 정작 막이 오르고 나타난 것은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무난한 무대였다. 평단과 관객의 호평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사실 피에르 불레즈가 지휘한 오케스트라였다는 사실이 다소 아이러니하다.
현 시대의 잔인한 현실 앞에서 절대 고개 돌리거나 외면하지 않은 슐링엔지프의 작업은 필터 없이 바라본 세상을 담고 있기에 다소 불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지만 그 속에 담긴 메시지는 작가의 진정 어린 진심에서 비롯된 만큼 강렬한 설득력을 지닌다. 독일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소년이 성장하며 꿈꾸었던 삶과 예술의 일치는 서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공화국에 그가 세운 <오페라마을>에서 작가가 저 세상으로 떠나고 없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2011년 10월에 문을 연 초등학교에서는 현재 아이들이 교육을 받고 있고 약 5헥타르에 달하는 면적 위에는 초등학교와 관련 건물(카페테리아, 녹음실) 외에도 진료소가 완공된 상태이며 그 외 일반 주택과 극장, 작가 레지던스 건물 등이 앞으로 건축될 예정이다.
조형예술과 음악, 연극 장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크리스토프 슐링엔지프의 작품세계는 그 복합성과 장르 해체적 급진성 때문에 미술전시장이라는 맥락 안으로 끌어들이기가 결코 용이하지 않다. 많이 알려진 유명한 작업들이 주를 이루는 이번 베를린 전시는 그런 점에서 영리하고 현실적인 기획이었다고 하겠다. 또한 수많은 비디오작업과 설치작품들은 작가의 조형예술가적 면모를 확실하게 각인시켜준다. 전시장을 가득 채운 이미지들은 보는 이를 혼란스럽게도 하지만 이런 어지러운 무질서함 또한 슐링엔지프 작업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클라우스 비젠바흐가 공동 큐레이터로 참여한 이 전시는 2014년 1월 중순에 막을 내린 후 3월에 뉴욕으로 옮겨가 모마 PS1 현대미술센터에서 다소 달라진 모습으로 개막할 예정이다.
여러모로 성공적인 이번 전시에서 딱 하나 아쉬운 점을 들라면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주인공의 부재를 꼽을 수있을 것이다. 살아생전에 제도적 전시공간을 항상 비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접근했던 작가가 이번 전시를 함께 기획했다면 그 결과물은 분명히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을 테니. 외국인에 대한 인종적 혐오와 극우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결코 변하지 않는 정치판에 대한 불만과 불신 등 민감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의성 넘치는 테마를 다루었던 작가가 바라본 2013년의 세계는 과연 어떤 모순으로 얼룩진 모습이었을지 궁금하다. ●

이번 전시가 열리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이 당신이라고 들었다. 이 전시를 기획하게 된 상황을 설명해달라.
크리스토프 슐링엔지프의 작업은 미술과 정치의 경계가 사라지고 모든 관람객이 직접 행위의 주체가 되는 것을 지향한다. 그의 작업에 투영된 독일의 역사와 사회정치적 주제들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시의적이다. 전시를 열려고 생각한 시기는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작가와 구체적으로 논의하며 작업의 조형적 측면을 중점적으로 조명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다루는 주제들은 굉장히 복합적이지만 작가는 스스로의 작업을 강한, 어떤 의미에서는 도상학적인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전시 준비과정에서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작가는 하나의 완결된 작품보다 계속해서 현 시대의 문제를 제기하고 그를 심사숙고하는 작업을 중요시했고 이렇게 과정에 중점을 두는 것은 그에게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전시를 기획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끝없이 서로 맞물리는 개별 작품들을 전체적인 틀 안에서 바라보고 이해해야 했던 점이었다.
주인공인 작가의 부재가 전시에 끼친 영향이 있는가.
그는 생전에 엄청난 창작력을 발휘했으며 쉬지 않고 항상 뭔가를 만들어냈다. 어마어마한 양을 자랑하는 그의 작업은 그럼에도 부분적으로는 잘 기록되어 보관되고 있다.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퍼포먼스 작업의 경우 작가의 직접적인 지휘와 개입, 실행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그는 자신의 작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빈자리가 정말 크게 느껴진다.
전시작은 어떤 기준으로 선정했는가?
그간 작가가 다루었던 주요한 테마와 장르를 고루 전시하려 노력했다. 작업 초기부터 후기까지 그리고 영화,연극, 오페라, 설치작품과 퍼포먼스 등 모든 종류의 작업을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전시는 3월에 뉴욕에서도 선보일 예정이다. 독일어가 많이 등장하는 작품과 외국(영어권) 관객 간 원활한 소통을 위해 큐레이터의 어떤 대책이 필요할까.
나는 슐링엔지프의 작업이 조형적 측면에서 그간 지나치게 저평가되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업 속 이미지들의 영향력은 매우 강렬하고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한편 작가는 <100년 동안의 히틀러>나 <독일 전기톱 살인사건> 등에서 볼 수 있듯 오랜시간 독일의 역사와 전형적인 독일적 주제들을 깊이 탐구해왔고 또 서구권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식민주의나 인종차별, 종교와 교회, 질병과 죽음 등의 주제도 즐겨 다루었다. 그러므로 감상하는 데 언어로 인한 어려움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나머지는 전시실의 작품 설명문과 미술관 교육 프로그램으로 보완할 수 있을 거다.
관람객이 전시를 보고난 후 어떤 것을 얻어가기를 바라는가?
작가는 항상
관람객들에게 스스로 사고하고 사색하며 능동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해
왔다. 우리 개개인이 얼마나 큰 정치적 책임과 힘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전시를 방문한 이들이 숙고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수잔네 페퍼(Susanne Pfeffer, 1973년生)는 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후 쾰른 쿤스트페어라인과 이후 프랑크푸르트 현대미술관에서 전시 어시스턴트로 일하며 실무경험을 쌓았다. 브레멘 퀸스틀러하우스 관장을 지낸 후(2004~2006) 2007년부터 베를린 쿤스트베르크에서 큐레이터 겸 예술 감독으로 활동하며 뉴욕 모마 PS1 현대미술센터의 자문위원도 겸했다. 2013년 카셀 프리데리치아눔 쿤스트할레 관장으로 임명되었다.
베를린=신원정 통신원

[월드 토픽] 아름다운 케이오스, 21세기의 앗상블라주

contents 2014.2. world topic | 아름다운 케이오스, 21세기의 앗상블라주
서상숙│미술사
“이제 더는 다른 사람의 예술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죠. 아니면 다른 사람의 예술에 대한 관심을 끓었다고 할까요. 그저 제 작품만 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더 이상 그런 일들로 나 자신을 버겁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건 원하질 않아요. 난 지금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2007년 베니스비엔날레를 앞두고 독일관 큐레이터인 니콜라스 샤프하우젠 (Nicolaus Schafhausen)이 선정작가인 이사 겐즈켄(Isa Genzken, 1948~)을 상대로 진행했던 인터뷰에서 21세기에 들면서 급격하게 변화한 작업에 대한
겐즈켄 자신의 대답이다. 당시 59세였던 겐즈켄이 이제 다른 작가들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만의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확언하고 있는 것이다. 중견을 넘어선 작가, 그리고 세계 미술계에 잘 알려진, 영향력 있는 이 작가의 놀랍도록 솔직한 고백을 독일관 카탈로그를 통해 읽으면서 무더운 날씨에 들이켜는 차가운 한잔의 얼음물처럼 시원함이 느껴졌다. 그 후 6년이 지난 올해 뉴욕의 근대미술관(MoMA, Museum of Modern Art)에서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대규모의 겐즈켄 회고전(2013.11.23~3.10)이 열리고 있다. 초기의 포스트 미니멀리즘 작업부터 최근의 앗상블라주까지 150여 점이 연대기 순으로 전시되고 있다.
이사 겐즈켄은 독일 출신의 조각가이다. 비중있는 미술관에서의 전시는 물론 베니스비엔날레(2007)와 세 번의 도쿠멘타에 선정되는 등 유럽에서는 매우 잘 알려진 작가지만 미국인에겐 비교적 낯선 작가이다. 아마 겐즈켄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미국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장미 한 송이를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높이 90미터가 넘는 조각품, <장미Ⅱ> 정도일 것이다. 1993년 작을 2007년 다시 만든 것으로 2010년부터 뉴욕 뉴뮤지엄 건물 앞에 3년 가까이 전시되었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작가들의 작가’라고 불리우는 겐즈켄을 미국에 대대적으로 소개하는 전시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프로타주 페인팅 등 초기 작품들도 다수 전시되고 있어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겐즈켄은 독일이 나치와 히틀러 그리고 유대인 학살이라는, 결코 잊힐 수 없는 오욕과 상처를 남긴 2차 세계대전(1939~1945) 직후인 1948년에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가 나치였으며 전쟁으로 인한 물질적, 정신적 폐허를 복구하
려던 전후 독일에서 성장했다. 몇몇 대학을 거치며 미술에 점점 흥미를 느끼게 된 겐즈켄은 당시 남자친구이자 뒤셀도르프 대학에서 미술이론을 가르치던 벤자민 부흘로 (Benjamin Buchloh, 1941~)의 소개로 1973년부터 1977년까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1932~)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자신의 인생과 작품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현재 하버드 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인 부흘로는 1945년 이후의 전후 현대미술을 논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가 중 하나다. 겐즈켄의 전남편이며 지금까지 생존하는 작가 중 최고의 가격으로 그림이 거래된 바 있는 게하르트 리히터 작품에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결정적 인물이며 겐즈켄에 관한 책 《그라운드 제로》의 저자이기도 하다.
당시 뒤셀도르프 대학에서는 독일의 통념, 인습, 주류를 타파하는 급진적인 사고를 가진 교수들을 중심으로 개념주의에 기초한 사진과 퍼포먼스 아트 등이 실행되고 있었다.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1921~1986), 동독 출신의 리히터를 비롯 개념주의 작가 마르셀 브루타스(Marcel Broodthaers, 1924~1976) 등이 교수로 재직했다. 겐즈켄이 태어난 1948년은 전후 독일 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보이스가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던 전쟁에서 돌아와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뒤셀도르프 미술대학(Kunstakademie Dusseldorf)에서 공부하던 시기다. 보이스는 1961년 이 대학의 조각과 교수가 되어 겐즈켄이 입학하기 한 해 전인 1972년 낙방한 학생들을 위한 시위를 벌이다 해임되었으나 겐즈켄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겐즈켄은 도시건축과 환경, 사진 등에 지속적인 관심을 두고 있으며 1990년대까지 테크놀로지에 바탕을 둔 포스트 미니멀리즘, 개념주의, 비디오, 사진, 필름 등 여러 분야에서 조심스러운 탐구를 이어가던 아카데믹한 작업을 지속하다가 2001년 9월 11일 뉴욕에서 월드트레이드센터 테러 현장을 직접 목격한 후 급격한 변화를 보인다. 테러 이후 변화한 도시풍경, 미국이 이란·이라크등 중동에서 벌이는 전쟁이 야기한 긴장이 흐르는 앗상블라주 작업들이다.
<엠파이어/벰파이어(Empire/Vampire)>(2003~2004) 시리즈,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2007~2008) 시리즈, <오일(Oil)>(2007) 시리즈, <배우들(Schauspieler)>(2013) 시리즈 등이 테러 목격 이후의 대표적인 작업이다. <엠파이어/뱀파이어> 시리즈는 2001년 뉴욕 월드트레이드 센터가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그룹에 의해 공격당한 현장을 소재로 한 시리즈다. 미니어처 장난감 병정들이 총을 겨누고 어린아이들이 무너진 건물더미 위에 쓰러져 있으며 피로 범벅이 된 여성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서사적이며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이 같은 끔찍한 이야기의 전개가 실제 현대인의 도시 생활 주변에서 구한 레디메이드 오브제들을 조합해 만든 사실적 조각작품인 앗상블라주라는 방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테러와의 전쟁으로 시작한 21세기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그린 이 타블로(Tablau)들은 갠즈켄을 통해 재생산되면서 절망이나 위협을 넘어선 따뜻한 연민으로 승화돼 보는 이들과 소통한다. 그 소통을 통해 피로 얼룩진 전쟁터는 복구를 희망하는 아름다운 폐허로 변화하는 것이다.
겐즈켄의 미국, 특히 뉴욕에 대한 애정은 남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교시절 뉴욕을 처음 방문한 후 작업실을 얻어 장기적으로 머무는 등 지속적으로 방문했고 많은 작가와 교류해왔다. <나는 뉴욕을 사랑한다/열정이 넘치는 도시(I love New York/Crazy City)>(1995~1996)라는 사진책 형식의 작품을 만들기도 했고 시카고에서 스카이스크래퍼를 본 후 창문과 고층빌딩을 연상케 하는, 수지와 철 그리고 콘크리트로 만든 일련의 작품, <X>(1992), <창문(Fenster)>(1994) 시리즈가 나왔다.
2000년에 만든 <개 같은 바우하우스(Fuck the Bauhaus)> 시리즈는 뉴욕 등 미국의 견고한 건축물을 독일의 그것과 비교하면서 기능만을 강조한 ‘싸구려 건축물’인 바우하우스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시리즈는 겐즈켄의
본격적인 앗상블라주 조각의 시대를 예고한다. 예를 들어 <개같은 바우하우스 2>는 합판으로 박스를 대충 만들어 건축물을 상징하고 차이나타운에서 구한 “동성 팬시 (Dong Sung Fancy)”라는 상호가 선명한 종이 쇼핑백, 오렌지색의 공사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네트, 피자박스, 조화 등이 테이프로 얼기설기 붙어있고 돌, 플라스틱 인조나무, 노란 장난감 뉴욕택시 등이 바닥 여기저기에 놓여 있는 작품이다. <바우하우스 3>과 <바우하우스 4>에는 합판으로 급조한 구조물 표면에 조개껍데기를 붙였다. 나이 40이 넘은 가난한 시인이 미술가가 되기로 작정했던 마르셀 부르타스를 연상케 해 미소를 짓게 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조개와 텍스트를 즐겨 사용했던 대선배에 대한 존경의 제스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낸 여성작가의 삶의 기록
모마의 6층 특별전시장 입구에는 겐즈켄의 최근작 <배우들> 시리즈가 전시되고 있다. 마네킹에 로큰롤 스타일의 자유분방한 패션을 입혀 놓은 작품들로 전시장 입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싸구려옷과 장신구들로 치장된 마네킹들은 분주한 주말의 도시풍경을 연상케 한다. 게이나 레즈비언, 혹은 클럽에 가려고 재미있게 한껏 드레스업한 사람들처럼 흥분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벽에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로큰롤 스타일의 패션이 눈길을 끄는 겐즈켄의 대형 사진과 마이클 잭슨이 포함된 그의 사진콜라주 등이 붙어있는데 한때 앤디 워홀에게 전화를 걸어 마이클 잭슨과 함께 밴드를 결성하자는 제의를 했던 작가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들이다. 화려한 <배우들>이 설치된 모마의 전시장 입구를 지나 들어서게 되는 첫 번째 갤러리에는 겐즈켄의 초기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다. 두 개의 가느다란 막대를 세워놓은 <무제>(1974), 112개의 각기 다른 색을 칠한 단색 종이작업을 차례로 늘어놓은 <평행사변형(Parallelogram)>(1975>, 당시 일반인에게는 생소했던 컴퓨터로 무게중심을 계산해 바닥에 떠있는듯 놓여지도록 만든 <평행면/쌍곡면(Ellipsoids/Hyperbolos)>((1976~1983) 시리즈, 그리고 뉴욕거리에서 지나가는 행인들의 귀만을 찍은 <귀(Ohr)>(1980)도 전시되어 있다.
두 번째 전시실에는 겐즈켄의 1980년대와 1990년대의 플래스터와 콘크리트, 수지 작업들이 소개된다. 건축물, 특히 빌딩 이미지를 보이는 미니멀한 선과 형태를 지키면서 거친 표면을 실험한 것들이다. <밍 페이(Ming Pei)>(1985), <은행(Bank)>(1984) 등 콘크리트 작업과 <X>(1992), <창문(Fenster)>(1992) 등 수지와 철을 재료로 역시 빌딩을 연상케하는 한층 가벼워진 이미지의 모던한 추상작업들이다. 특히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프로타주 페인팅 등 1990년대 초반의 회화작업이 함께 소개되고 있다. 겐즈켄이 리히터와 이혼하기 직전의 작품들이다. 겐즈켄의 작업은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급격한 변화를 보인다. 평범한 오브제를 자유롭게 조합하고 변형한 사실주의 콜라주와 앗상블라주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1993년 게르하르트 리히터와 11년간의 결혼생활을 청산한 이후부터 마치 자신을 억누르는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듯하다. 겐즈켄의 초기 막대작업을 리히터는 “뜨개질 바늘”이라고 불렀고 그에 대해 겐즈켄은 “무기”라고 반박한 일화는 그들의 예술적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이혼 후 주거지를 콜론에서 베를린으로 옮기고 게이와 젊은 작가들과의 교류, 나이트 클럽을 통해 접한 테크노 음악의 세계 등 작가의 라이프스타일이 크게 변화한 것도 큰 영향 중의 하나로 꼽힌다. 현재 겐즈켄의 작업이 그의 나이와 관계없이엘리자베스 페이튼 등 젊은 작가들과 함께 기획 전시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만한 점이다.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요셉 보이스의 유명한 발언은 당시 유럽의 많은 젊은이에게 영향을 끼쳤는데 겐즈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베니스비엔날레에 출품한 <오일 XI>(2007)은 고양이, 렘브란트의 사진 등 콜라주가 붙여진 여러 개의 여행가방이 바닥에 놓여 있고 미국의 우주인 3명이 천장에 매달려 있는 작품으로 보이스의 <고통의 방(Schmerzraum)>(1984)을 연상하며 작업했다고 작가가 직접 밝힌 바 있다. <장미> 역시 보이스의 <직접적인 민주주의를 위한 장미(Rose for Direct Democracy)>(1973)를 연상케 한다.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말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점은 마르셀 뒤샹의 <샘(Fountain)>(1917)이 현대미술의 사고에 끼친 영향이 증명하고 있다. 겐즈켄의 2000년 이후의 작업은 이 두 가지의 개념을 동시에 실천한다. 전후 독일에서 성장했으며 자신의 스승이었던 유명 작가와의 결혼과 이혼, 알코올 중독,바이폴라 우울증 등 개인적인 아픔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작품세계를 찾아 이루어낸 갠즈켄의 작업들은 묵묵히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낸 한 여성작가의 삶의 기록이기도 한다. 특히 겐즈켄의 조각은 1960년대 이후 잊혀졌던 아상블라주의 복귀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냈으며 그에 따르는 일련의 작가군이 형성돼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또 그가 오브제를 찾아 모으고 붙이고 자르는 복잡한 작업과정을 보조작가를 두지 않고 직접 한다는 것도 아이디어만 내면 작업 자체는 보조작가들이나 테크놀로지가 대신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현대의 미술계 풍토에 수제작업의 의미를 다시 한번 일깨우는 것이다. ●

이번 이사 겐즈켄 회고전은 로라 합트먼(50)이 지난 2010년 10월 모마의 큐레이터(조각과 페인팅부)로 임명된 후 수석 큐레이터 사비나 브레트바이저(미디어와 퍼포먼스부 Sabine Breitwieser)와 함께 2년여에 걸쳐 준비한 야심작이다. 합트먼은 1995년부터 2001년까지 모마 드로잉부의 부(副)큐레이터였으며 그 후 피츠버그 카네기미술관 현대미술부장을 거쳐 뉴욕의 뉴뮤지엄에서 일했다.
합트먼은 재능있는 작가를 유명해지기 전에 알아내는 ‘발굴자(picker)’라는 평판을 받고 있다. 현재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오른 존 커린, 엘리자베스
페이튼, 뤽 튀망 등이 그가 발굴해낸 스타들이다. 이사 겐즈켄은 그가 뉴뮤
지엄에서 큐레이팅했던 <언모뉴멘털: 21세기의 오브제(Unmonumental:
The Object in the 21st Century)>에 젊은 작가들과 함께 초대했을 만큼
그가 “21세기에 주목할 만한 가장 영향력있는 작가”로 평가하는 작가다.
그는 겐즈켄에 대해 “지난 40년간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대담함으로 다양한 장르의 작업을 해온 작가”라며 “급진적인 사고방식과 창의력으로 일련의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밝힌다. <엠파이어/뱀파이어>, <그라운드 제로> 시리즈 등 뉴욕을 소재로 한 작품이 대량 전시된 것에 대해 “뉴욕 작업에 초점을 맞춘 전시는 아니다”라고 설명하면서 “2000년 이후의 작업은
대형작업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개 같은 바우하우스>를 포함, 주로 뉴욕을 소재로 한 것들이다”고 밝힌다. 그는 <그라운드 제로> 시리즈에 포함되어 있는 <오사마 패션스토어(Osama Fashion Store)>(2008)와 <디스코 순(Disco Soon)>(2008)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이라면서 <창문>, <귀>, <하이파이>, <월드 리시버> 시리즈처럼 초기 작품 이후 겐즈켄은 “현대사회
에서의 소통”에 지속적인 관심을 두었으며 그가 그리는 것은 “절망보다는 희망이다”라고 말한다.

뉴욕=서상숙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