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this is being art-5

예술은 경계가 아니라 관계다

김최은영  A-아트페어 예술감독

얼마 전 작고 50주기 기념전이 열린 작가 ‘손상기’에게 우리는 그 누구도 ‘장애’예술가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다. 물론 ‘쿠사마 야요이’도 마찬가지로 ‘여류’작가, ‘장애’작가로 불리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는 오늘 <제1회 장애예술인창작아트페어>라는 작위적인 제목의 페어를 준비하여 왜 굳이 ‘장애’라는 수식어가 필요한지 몸으로 알아가고 있다.
장애예술가라 일컬어지는 작가군은 어쩌면 신진작가, 지역작가나 여류처럼 특정단어의 보호장치가 필요한 또 다른 이름의 작가군일지도 모른다. 아이러니(irony)하게도 이들의 궁극 목적은 수식어를 삭제함에 있다.(사실, 필자는 이런 식의 분류법이 옳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으나, 진부한 설명이 오히려 이해를 돕기에 용이할 듯하여 사용하니, 지나친 오해는 없길 바란다)
신진작가는 기성작가의 예술적 능숙함에 상대적 가치절상의 위치에 놓이기 쉽다. 지역작가는 문화중심권인 서울(중앙이라고도 불린다)작가에 비해 발표의 기회나 장(場)이 계량적으로 적다는 박탈감을 안고 있다. 장애예술가는 신체적, 정신적 불편함, 인식적 소외 속에서 위치한다. 오늘의 사회는 상대적 약자를 배려하고자 한다. 그것은 정책으로 시작된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현실적 결과물에서 드러난 문제항목이 역으로 주장되어 사실이 정책에 반영되었거나 소수 식자의 배려로 마련된 새로운 관계항이다.
천재를 제외한 대다수의 신진 작가가 활동 10여 년의 작가와 동등하게 비교, 분석, 판단 대상이 된다면 순위 안에 들어 지원을 받고, 작품 활동의 도움을 받겠는가.
어떻게 입으로 붓을 물고, 발가락으로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평등’이란 명목에 같은 평가의 잣대에서 밀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 앞에서 ‘장애’를 떼고 ‘예술’로만 말하자 하면 그것은 ‘평등’이 아니고 ‘역차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시대의 예술가는 필요이상의 정규교육과정(미술교육에 한정)을 요구받는다. 전시도록에서 빠지지 않는 작가 약력의 영문인 CV는 Curriculum Vitae로 번역하자면 이력서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이 글에서 학력타파를 외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장애예술가 대부분은 후천적 장애, 다시 말해서 전혀 다른 분야의 정규교육을 받고 장애 전 사회생활을 했거나, 정규교육을 받을 수 없는 선천적 장애(자폐, 정신지체)로 미술교육과는 상관없는 사람이 대다수임을 말하고자 함이다. 이들은 불의의 사고로 후천적 장애를 입고 고뇌의 시간을 거쳐 제2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미술을 택한다. 여기서 이들의 선택이 절대적이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장애 이후의 수많은 재활교육이나 재교육을 통해 다른 직업군을 선택하는 경우도 상당하다는 점이 장애예술가들이 왜 하고많은 직업 중에서 미술을 선택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며, 이들의 선택은 장애가 없이도 일반교육에서 전문적인 미술가의 길을 걷기 위해 미술전공을 선택한 무수한 미술인의 선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주목해야 할 이들의 절대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미술교육 환경은 열악하고 체계적이지 못했다. 파운데이션 없이 테크닉을 배우고, 개념을 훈련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대상을 예쁘게 묘사하거나 기성작가의 그림을 그럴싸하게 흉내 내어 오늘 한 장의 만족스러운 자위로 작품의 수를 채워나가기 일쑤였고, 그것으로 만족했다.
진짜 문제는 이 지점부터 시작된다. 이 지점부터 진짜 예술가로 서기 위한 더 체계적인 교육이 뒷받침되던가, 아니면 그 만족의 지점을 마침표 삼아 아마추어 작가지만 행복한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으로 나뉘었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분류는 스스로 행하기 매우 힘들다. 이때부터 행정과 교육체계의 적극적 도움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이들을 이끌며 예술가와 취미미술가, 양쪽의 삶이 있음을 제시했어야 한다.
입문의 방식은 예술장르마다 조금씩 다르다. 언론의 공모에 당선되거나(문학), 불규칙적이지만 다수의 전시에 참여하거나(미술), 해당 분야에서 어시스턴트를 거치며 본인의 시나리오로 수장이 되는(영화) 등 다양한 방식이 있다. 그러나 그 어떠한 장르의 예술이든 아마추어와 프로 집단은 존재한다. 유독 장애예술작가(미술)만이 아마추어와 프로가 혼재되어 있다.

장애예술을 위한 인큐베이팅
필자는 현실적 범주 안에서 생각하기로 한다. 위에서 언급한 신진, 소외, 학습, 분류법 등을 떠나 오늘의 장애예술을 보기로 한다. 인큐베이팅(incubating) 없이 독자적으로 유지해 온 장애예술가 집단을 미적 평가 기준에 의거, 외면하거나 보호 속에서 무작위적 옹호론을 펼치고 싶지 않다. 다만, 그들에게 방치되어 홀로 버텨온 세월에 대해 기초가 없으니 ‘제대로’라는 명목으로 비장애의 잣대를 들이대며 걸음마부터 다시 시키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미 물리적 나이로는 기성작가의 연령을 가지고 있고, 전시 횟수나 수상 경력 등 그들만의 세계에서 벌여온 사투의 결과물이 너무도 선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련된 아트페어다. 소모적이며 의례적인, 그들만의 모임으로 끝나는 전시 말고, 현실적이며, 구현가능하고,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인큐베이팅을 객관화하여 제공하는 것. 아트페어를 통해 전시를 기획하는 갤러리, 혹은 전문 기획자에게 그들의 면목을 제시하는 것. 성과를 통해 현실의 자신의 위치를 깨닫게 하는 것. 단 한 명이라도 뛰어난 작가를 발굴하여 그들의 모델링으로 삼게 하는 것. 한 단계를 끝내야만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식 학습법이나 적용론이 아닌 동시에 골고루 끌어올리는 방법론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제1회 아트페어의 실제 목적이다. 동시에 기성작가와 협업을 통해 교집합으로 가지고 있는 조형적 감수성을 교류(access)하고, 장애라는 단어를 제외하고 작품만으로 보았을 때 그들에게 충분히 승산 가능한(able) 지점을 짚어주고 싶었다.
결국, 결론은 관계항이다. 장애와 비장애 사이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바라보는 지점과 소통의 고리들. 관계라는 예술이 결국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다차원적 지점과 문제들의 관계항 속에 그들을 자연스럽게 용해하고 싶었음을 고백한다. 분명하게 나뉘어 있어 불편했던 그들과 그들의 예술이 결국 한 덩어리, 한 가치로 섞여 있을 때 분류도 없고, 나뉨도 없어 불편하지 않게 되는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이룬 것과 부족한 것. 반성과 성찰. 성장하기 위한 선행 조건이며, 발전을 위한 출발점이다. 부족한 사회의 역할과 무관심 또한 더 이상 수준 높은 작품을 할 수 없는 그럴싸한 핑계나 불만이 되어서도 안된다. 장애가 있건 없건 이 시대의 예술가는 언제나 사회의 무관심과 미술계가 인정해주지 않는 ‘나의 노력’과 싸워왔다. 그 지루하고 반복된 싸움 속에서 진정한 ‘승자’가 되는 길은 장애가 있건 없건 같은 길일 것이다. 그리고 ‘승자’가 된 후 그 앞에 ‘여류’작가 아무개, ‘장애’작가 누구씨로 부르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그림 앞에서  보다 객관화할 것. 타자에게 들킨 예술작품의 부족한 점은 작가가 더 먼저, 더 많이 알고 있다고 믿는 필자다. 도망가지 말고 화면과 한판 정면승부를 펼칠 것! 그들은 손을 잃었을 때도, 떨리는 사지(四肢)를 가지고도 붓을 들지 않았던가. 삶과 작품을 분리하여 볼 수 없는 것이 예술이라 생각한다. 삶이 이미 예술인 그대들이다. 그대들의 삶의 열정만큼 그림의 열정을 객관적으로 보여달라. 그들이 펼치는 내러티브(narrative)에 흠뻑 빠져 미술계가 허우적거리도록!  ●

위.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쿠사마 야요이> 전시광경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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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view  <제1회 장애인창작아트페어> 6.9~13 문화역 서울284

장애미술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발판

장애 미술가의 작품 판로 개척과 장애 예술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해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고 (사)한국장애인미술협회가 주관하는 ‘제1회 장애인창작아트페어’가 6월 9일부터 13일까지 문화역 서울284에서 그 첫발을 내디딘다. 아트페어 전시, 콜라보 전시, 특별 전시, 미디어 전시 등의 다양한 전시 공간이 구성되며, 별도의 경매 프로그램도 진행하여 장애미술가들의 작품을 접할 수 있도록 다양한 기획을 마련했다.
공모를 통해 선정된 88명의 장애미술가와 관훈갤러리, 갤러리 담, 갤러리 이레, 갤러리 터치아트, 스페이스 오뉴월,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등 국내 22개 화랑과 전시공간이 공동으로 작품을 홍보하고 판매를 진행한다. 이번 행사를 계기로 지적장애를 가졌지만 꾸준한 작품 활동을 선보여온 작가 데니스 한과 갤러리 한옥이 전속 계약을 맺고, (사)한국장애인미술협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 김충현이 미술 전문 출판사 ‘헥사곤’과 출판계약을 체결한다.
이번 행사에는 장애작가뿐 아니라 김명범, 김태은, 노동식, 로와정, 박성연, 변대용, 하원 등 미술계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비장애 작가들도 참여한다. 권기수, 한진수, 장승효 등은 장애작가와 협업을 통해 장애와 비장애가 아닌 서로 다른 장점을 가진 작가들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특별한 결과물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번 행사의 예술감독을 맡은 전시기획자 김최은영은 ‘장애 예술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아트페어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고 밝혔다. “실질적으로 장애작가는 대중에게  인지도가 낮다는 평가를 듣는다. 하지만 장애 작가나 비장애 작가나 열정은 똑같다.” 김 감독은 그동안 장애 미술에 관한 행사가 많았으나 비효율적으로 진행된 측면이 많다며 이번 아트페어는 미술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마켓을 통해 장애작가와 비장애작가의 간극을 현실적으로 좁혀보자는 취지에서 개최됐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장애인의 경우 작품 값도 제대로 매겨져 있지 않고 들쑥날쑥하며 전체적으로 하향조정되어 있다. 이번 기회에 그들의 작품도 실력에 의해 정당하게 값을매길 것이다. 이를 계기로 장애작가와 화랑의 긴밀한 협조 체계가 마련돼  행사 종료 후에도 장애작가들의 예술 활동과 미술시장 진입이 수월해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www.a-af.or.kr

 

권기수+김태호 콜라보레이션 영상 스틸컷 2014

권기수+김태호 콜라보레이션 영상 스틸컷 2014

석창우  2014

석창우 <평택 농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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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잠실창작스튜디오 강득주 총괄매니저

 “작가들의 성장을 위한 인프라 구축에 힘쓴다”

잠실창작스튜디오 강득주 (2)

그동안 어떤 점이 달라졌다년 당시만 해도 작업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열악한 상황이었개월간 공사를 진행해 스튜디오가 입주.
 현재 입주 작가의 구성은 어떻게 됐나? 2013년 8월 입주한 6기 작가는 작가 12명, 기획자 1명으로 구성됐다. 지난해부터 기획부문을 신설했다. 기획자의 경우 현재 비장애인이다. 장애에 관심있고 활동성 있는 기획자가 늘어야 작가들도 성장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경우 장르가 한국화, 서양화, 사진, 설치, 돌조각 등 다양하다.
작가의 선정 기준은 무엇인가? 전업작가로 활동하는 작가로 한정하고 역량, 성장가능성을 중요시한다. 작업계획서를 받아 그 계획성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지 본다. 더불어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중요하다. 장애를 가진 경우 움츠려 있어서 소통이 활발하지 않고 사회성이 부족할 수 있다.
장애를 가진 작가들이 동시대미술에서 융화되지 못하는 부분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비주류, 언더그라운드 등 일반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와는 다른 리그로 보는 것 같다. 실제 장애를 가진 작가와 이야기해보면 작업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데 항상 장애인이라는 꼬리표가 먼저 붙으니까 스스로 위축되는 면이 있다. 그걸 해소해야 하는데 쉽지 없다. 또 개인적인 성향 차이도 있고, 선천적 장애인보다 후천적 장애를 가진 경우 성인이 되어 뒤늦게 미술을 시작하거나 대학에서 전공을 안하다보니 동시대미술의 변화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고 클래식한 작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고정된 틀에서 벗어도록 교육해도 자기 것으로 소화하기가 쉽지 않아,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그것 때문에 장애인 작가들끼리 모이는 것 같다. 비장애인과 함께 하는 프로젝트나, 협업도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젊은 작가들은 스스로 네트워크를 확장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기획자들도 장애를 가진 작가를 주목하고 작가 스스로도 밖으로 한발 더 나가서 비장애 작가들과 융화될 수 있는 활동을 많이 하길 바란다.
현재 스튜디오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동안 환경적 인프라는 충분히 잘 갖춰놨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씨티은행 후원을 받아서 사진 기자재, 전기 가마, 대형 이젤, 판화 프레스 등 기자재도 많이 구비했다. 이제는 내실을 다져야 한다. 먼저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다. 다른 레지던스 공간의 1회 프로젝트 비용이 이곳의 1년 예산에 해당한다. 예산을 늘려 직원도 늘어나야 작가들을 제대로 지원할 수 있다. 현재 저 포함해서 3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 장애를 가진 분들을 케어하려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작가들도 더 성장해서 모범적 사례를 보여줘야 스튜디오가 더욱 활성화될 수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새로운 작가를 발굴 육성하고, 장애를 가진 작가와 비장애 작가의 교류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1차적으로는 이곳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관심을 받아야 예산도 지원되고 새로운 서포터도 생긴다. 앞으로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내년에는 서울시창작공간 통합공모에 합류한다. 7기 입주작가부터는 어떤 식의  변화가 생길지 고민이 많다. 그리고 국제적인 교류 프로그램, 장애예술 관련 세미나 포럼을 기획하는 등 하고 싶은 일은 무궁무진하다. 예산이 뒷받침 된다면 신진기획자 인턴십을 통해 장애예술가 대상 기획전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싶다.

이슬비 기자

구족화가 김경아의 작업실 광경

구족화가 김경아의 작업실 광경

 

홍석민  합성수지 14.5×9cm

홍석민 합성수지 14.5×9cm

 

[특별기획] this is being art-6

거울 속의 나를 보듯 소통하기

최효준  경기도미술관 관장

2012년 가을 경기도미술관에서 <다른 그리고 특별한전>이 열려 한국 미국 일본의 발달장애인의 미술작품 400여 점이 전시되었다. 다양한 종류의 장애 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그래서 사회 적응을 위한 제도적 지원이 취약했던 발달장애 부문에 초점이 맞추어진 전시였다. 예술적 재능이 빼어난 발달장애인들이 독창적으로 구현한 미학을 바탕으로 전하는 그 다르고도 특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많은 이가 감명을 받았고 전문 미술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당시 전시의 의도는 각별하였다. 예술적 성취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한국, 미국, 일본의 발달장애인들의 엄선된 작품, 자기몰입 과정을 거쳐 ‘다름과 특별함’을 드러내는 창조적 결과물을 만나는 대중들 내면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일조하려 하였다. 장애 예술의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정규 미술관 전시를 통하여 관련 인프라 구축에 기여하려 하였고, 궁극적으로는 장애인 대다수가 재능에 상관없이 예술 창작을 통해 행복을 찾고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는 비전을 보여주려 하였다.
예술을 통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사회적 예술 프로젝트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온 경기도미술관이 주관한 이 전시의 한국 측 협력기관은, 2011년 개관하여 장애예술가들의 독보적 문화창작공간으로 자리매김한 수원의 ‘에이블 아트센터’와 비영리 소수자예술단체인 ‘로사이드’였다. 미국 측 협력기관은 방대한 수준의 창작 시설과 전시 공간을 갖춘 39년 역사의 장애예술가 전문기관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의 ‘크리에이티브 그로스 아트센터(Creative Growth Art Center)’였고, 일본 측 협력기관은 23년의 역사를 가진 장애예술가 전문 지원기관으로 국내에서 왕왕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는 나라 시의 ‘하나 아트센터’였다.
그간 장애인 문화 복지 관련 국내에서도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 작년에 장애인 문화예술 관련 업무가 종전 문화체육관광부 장애인체육과에서 예술정책과로 이관되었는데 여전히 담당 두 분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근간 장애예술가들의 아트 페어 행사를 치르게 되며, 숙원이던 장애인문화예술센터의 개관 사업을 한국장애인예술협회와 함께 초인적인 노력으로 만난을 극복하고 추진하여 2015년 개관을 앞두고 있다. 수원의 에이블 아트센터는 재정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인 장애 작가 발굴과 지원 프로그램을 꾸준히 운영하고 있으며 국립현대미술관의 주요 전시 관련 장애인 교육 프로그램을 위탁 운영하는 등 전문적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해야 할 바가 있다. 중앙 정부 차원에서의 정책 추진 등 관(官)주도의 사업 추진과 지원 방식은 분명 낙후된 여건을 비교적 단기간 내에 개선하는 데에 효과적인 한국형 모델이다. 그런데 그것은 절실히 필요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아 보인다. 사실 바람직한 것은 앞서 말한 미국, 일본, 그리고 수원 에이블 아트센터 사례에서 보듯 우리도 속히 민간 주도의 장애인 예술 진흥 인프라를 양적, 질적으로 꾸준히 성장, 심화해가는 것이다. 그것을 위한 여건을 정책적, 법제적으로 탄탄히 조성해 나아가는 면에서 관의 역할이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모든 책임을 관에 지우고 늘 관만을 바라보고 기대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보아야 할 터, 시민사회와 시민의식의 성숙이 관건이 될 것이다. 결국 대중의 인식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대중의 느낌이 바뀌어야 한다. 장애인미술 관련 전시가 본격적으로 더 열리고 널리 관심을 끌어 대중의 느낌이 바뀌고 그래서 “장애는 그저 다른 상태다”라고 장애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져야 한다는 것이다.
바라건대 바뀐 인식을 바탕으로 장애 예술 관련 프로그램에 대한 민간 지원이 크게 활성화되고, 그를 위한 여건이 정책적, 법제적으로 조성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효과가 검증된 민간프로그램에 대해서는 현재 까다롭고 거의 불가능한 관의 지원을 가능하게 하는 방안이 적극 모색되기를 기대한다. 이 부문에서 효과적인 민관 협치, 거버넌스가 필요할 것이다. 예술 활동, 특히 장애인들이 주체가 되는 예술 활동을 관 주도로 진흥시키기에 한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국 크리에이티브 그로스 아트센터(Creative Growth Art Center) 사례를 주목해보자.

크리에이티브 그로스 아트센터의 특별함
41년 전 플로렌스 루딘스-카츠와 엘리아스 카츠라는 선각자들, 정신과 의사와 예술가 부부에 의해 설립된 크리에이티브 그로스 아트센터는, 당시 함께 설립된 3개의 다른 자매기관과는 다른 발전 과정을 거쳤다. 오늘날까지 존속한 베이 지역의 다른 두 군데 기관 중 니아드 아트센터(NIAD Art Center)는, 미술과 무관한 배경의 디렉터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고 장애를 가진 작가들이 모본(模本)을 충실히 모사하는 식의 ‘공예’ 개념으로 작업을 하고 있어 크리에이티브 그로스 아트센터와는 확연히 다른 성격을 보여주고 있었다.
크리에이티브 그로스 아트센터의 경우, 디렉터인 톰 디 마리아(Tom di Maria) 가 표방하는 대로 ‘동시대미술(contemporary art)’의 공동 창작 스튜디오로서 운영되어 자유와 창의의 분위기와 활기와 열정이 온 스튜디오에 넘쳐났다. 장애인 작가들은 자신들의 상황에 만족감을 표시했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외부 방문객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자신들의 모든 것을 기쁘게 공개했다. 톰은 그들이 크리스마스 카드를 그리거나 상품 생산을 위한 단위 공정을 담당하는 등 공예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고, 그들과 함께 미술의 본령에 뛰어드는 입장을 취했다. 그들을 비숙련 노동에 종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 논리로부터 자유롭고 즐겁게 창의적인 작업에 몰두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톰은 그들의 미술을 ‘아르 브뤼’나 ‘아웃사이더 아트’와 같은 이름으로 범주화하는 것도 거부하고 그것이 오직 ‘동시대미술’로 불려지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센터에는 많은 작가가 스태프나 자원봉사자로 일하지만, 미술기법을 가르치거나 지도하지 않고, 오직 작가 개개인의 창의적 표현 통로를 열 수 있도록 도울 뿐이다. 이것이 바로 크리에이티브 그로스 아트센터의 성공 비결인 듯하다. 자유분방하고 창의적인 창작활동은 그들에게 내적 자유를 찾아주며 장애 극복과 자기실현을 가능케 해주는데. 미술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과정들이 동시대미술의 영역을 확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미술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인 예술이다. 그런데 센터에서는 협력적인 집단 창작 환경이 주효한 듯하였다. 이 점이 놀라웠고 마치 사회주의 국가의 ‘창작소’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여러 장애 작가가 한 장소에 모여서 개별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어떤 각별한 이점이 있는 듯하였다. 발달장애인 사회에서 통할 행복의 조건, 그것은 ‘협력’의 패러다임 같은 것이었다. 거기에는 ‘경쟁’의 패러다임을 ‘협력’의 패러다임으로 바꾸어야 할 이 시대 이 사회의 비장애인들이 배울 바가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센터 작가 대부분이 학교로부터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이들이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작가들을 이끌고, 지적으로 도전적인 자극을 주고, 그들에게 영감을 준다는 점이다.

미술 영역의 확장, 일상화, 보편화
디렉터 톰은 지난 10여년간 크리에이티브 그로스 아트센터의 주된 운영방향을 정하면서 동시대미술계 최고의 기준에 부응했다고 했다. 그 결과 뉴욕의 현대미술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된 댄 밀러, 주디스 스콧 등 여러 성공 사례가 만들어졌다. 내면의 창의성을 끌어내어 자기실현의 한 과정으로서 예술 창작 행위를 추구하는 것이 의미 있다고 할 때, 예술적 재능이 출중한 장애 작가뿐 아니라 예술적 수월성에서 뒤지는 대다수 장애인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이를 정착시킬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체육으로 치면 사회체육을 진흥시켜 저변이 넓은 피라미드를 만들면 그 정점에 자연스럽게 엘리트 체육이 꽃피는 경우와 비교할 수 있는데, 저기능 발달장애인의 경우, 주변의 인정이나 수월성을 기준으로 하는 평가를 떠나서 자기가 좋아서 즐겁게 일상적으로 예술적 표현활동에 몰입하곤 할 때 그 시도와 시간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며 그때에 모종의 자가 치유가 진행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런 기회가 누구에게나 충분히 주어지고 그런 활동이 장려되어야 할 터인데 우리의 경우 특수학교에서 ‘예술성’과 무관하게 그러한 보편적 표현활동을 장려하는 정규 또는 특별 교과 프로그램은 거의 없는 듯하다.
디렉터 톰은 자폐 장애를 가진 작가에 대한 조언을 요청받았을 때 “마음으로부터, 상상으로부터, 꿈으로부터, 걱정으로부터 무언가를 끄집어내어 그림으로 표현하라”고 말했다. 그러한 조언은 예술적 재능이 없는 장애인이나 비장애인 모두에게 유용하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 운영될 장애인문화예술센터가, 가정에서나 특수학교에서나 비록 예술적 재능이 없는 학생이라고 하여도 누구나 즐겁게 창의적 예술관련 활동에 몰입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을 연구, 개발하고 정책화하는 것을 그 주요 기능의 하나로 삼았으면 하는 기대를 갖는다.
비장애인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수많은 백화점의 아카데미에서도, 슈타이너의 발도르프 학교에서처럼 창의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미술수업이 이루어지고, 주체적 활동으로 신체적 정신적 성장을 이끄는 인간 중심의 예술 활동이 보편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모름지기 창작활동이란 수월성의 기준과 무관하게 오직 내면의 창의성의 발현으로서 가치가 판단되고 의미가 부여되어야 할 것이며 창의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개개인의 삶들이 토해놓은 큰 산의 정점에 빼어난 예술적 성취도 자리하게 될 것이다.
뇌과학자 올리버 색스(Oliver Sacks)가 저술을 통해 밝힌 것처럼 발달장애인의 소통언어는 독특하다. 우리가 그 독특한 언어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그들과의 전반적인 소통을 보다 심도 있게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먼저 그들이 그들의 언어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판을 만들어주고 그것을 ‘해독’하려 노력하고 그 노하우를 축적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회화적으로 왜곡, 변형, 생략 등의 기법을 썼을 때 비장애예술가라면 의도적으로 그리하였겠지만 발달장애 작가들의 경우에는 실제로 사물을 그렇게 보았고 이해했고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어 그리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시대적 유행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본 대로 느낀 대로 표현했을 것이다. 여기서 미술이, 통상적으로는 비장애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발달장애인들의 자기 표현 방식으로서, 의사소통과 감정 전달을 위한 일종의 ‘언어’ 기능을 할 수 있는지가 화두가 된다.
크리에이티브 그로스 아트센터 작가들을 촬영하여 책을 출간한 사진작가 레온 보렌츠타인은 자신이, 장애인들과 자신을 갈라놓는 얽히고설킨 거미줄 밖의 국외자라는 느낌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센터의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통하여 미술은, 그 거미줄을 걷어내고 장애작가들과 비장애인들을 통하게 하여 양자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드는 효과적인 언어가 된다고 하였다. 그렇게 거울 속의 나를 보듯 소통하는 것이다. 장애인은 비장애인의 참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어 소중한 존재이다.  ●

크리에이티브 그로스 센터  소속 작가 댄 밀러의 작품  그의 작품을 신디 셔먼, 뉴욕 현대미술관(MoMA) 등이 소장하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그로스 센터 소속 작가 댄 밀러의 작품 그의 작품을 신디 셔먼, 뉴욕 현대미술관(MoMA) 등이 소장하고 있다.

위.2012년 경기도미술관에서 열린 <다른 그리고 특별한전>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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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발달장애 자녀를 둔 펠트 작가 이재범, 한상미 부부

“펠트회화를 통해 장애를 보듬다”

이재민, 한상미 (2)딸의 이야기를 소재로 그림책 《마냥 7살 송이》(이서원, 2013)를 펴냈다. 이 책을 펴내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사실 자녀가 장애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부모로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노력한 것 같다.
이재범 예전에는 자녀가 장애라는 사실을 감추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송이가 발달상태가 더뎌서 3세 이전에 알게 됐는데 처음에는 충격을 크게 받았지만 장애라는 사실을 빨리 받아들인 편이다. 작업을 하는 부모로서 이 아이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그림책의 중요성을 알게 됐고 우연히 송이 이야기를 가지고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년 동안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이 사회에서 송이만 장애를 가진 아이가 아니다. 이 책을 보면 송이에게 해당되는 내용도 있지만 타 지적장애인들에 해당하는 증상까지 함께 담으려고 노력했다.
한상미 송이는 처음부터 일반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학교에서도 초반에는 지적장애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부족했다. 송이 학교에는 특수반이 없어서 특수반을 만드는 문제부터 교육청뿐아니라 교장실, 교무실을 수없이 드나들며 치열하게 노력했다. 그리고 언제 돌발 행동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매일 학교에 가서 교실 앞 복도에 숨어서 대기상태로 있었다. 송이는 모르지만 아이들은 내가 항상 거기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쉬는 시간에 와서 나를 위로하는 아이도 있고, 송이가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물어보는 아이도 많았다. 일반 아이들이 지적장애를 이해할 수 있도록 송이를 위한 일종의 가이드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접근하는 데 그림책만한 것이 없다. 아이를 가진 부모 입장에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림보다 글을 쓰는 데 참 고민을 많이 했다. 이 책을 통해 아이들의 인식에 변화가 일었으면 좋겠다.
송이는 생각주머니가 다르다는 식으로 표현한 점이 흥미롭다. 실제로 다른 세계가 있다고 할 수 있나?
한상미 송이가 유치원 다닐 때 선생님이 또래 아이들에게 생각주머니라는 표현을 쓰더라. “송이는 너희보다 생각주머니가 작아서 그래.” 실제 지적장애인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주머니 용량보다 작지 않을까. 송이와 같이 생활하는 친구들 눈에는 이해 안가는 부분이 꽤 많다. 당연히 해야 하는 부분을 못하기 때문이다. 저희가 생각하기에 송이의 경우 포커스를 두는 부분이 엉뚱한 데 꽂혀있다. 예컨대 전교 학생, 선생님의 이름을 모두 외운다. 저희가 생각하지 못한 어마어마한 대용량을 외우고 있긴 하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이지 않을 뿐이지 나름의 독특한 세계관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아이를 키우면서 힘들어서 때땔 좌절하지만 재밌는 상황도 많이 벌어진다. 우리는 울상만 짓고 있지 않다. 물론 상황을 인정할 때까지는 많이 슬펐지만 오히려 이 아이 그 자체로 바라보고 함께 생활하다보니 겸손해지고 아주 기본적인 것에도 감사하게 된다. 장애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공감하실 것이다.
그림책을 펠트로 표현한 점이 독특하다. 양모의 따뜻한 느낌에 수공적인 느낌이  더해져 그림책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이재범 국내에서 펠트회화는 우리가 처음인 것 같고 해외는 아직 잘 모르겠다. 송이도 의미가 있지만 작업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의미를 찾자면 기존에 없던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실험이라고 생각했다. 이 작업을 계기로 펠트를 회화적으로 평면화하는 작업들이 이어지고 있다. 올해로 17년째 수제 펠트로 작업을 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많은 편인데 국내에서는 펠트를 전문적으로 하는 작가가 5명도 안 된다.
펠트 작업의 매력은 무엇인가?
이재범 펠트는 양털뿐 아니라 머리카락도 재료가 될 수 있다. 웬만한 동물의 털은 다 된다고 보면 된다. 머리카락처럼 불규칙한 동물의 털이 힘에 의해 결합이 되어 엮어진 부조직의 직물이다. 아무리 힘을 가해 분리하려고 해도 찢을 수 없다. 그림책에 사용된 회화적인 표현은 니들펠트라고 해서 한 땀 한 땀 특수바늘로 누르면서 작업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긴 하지만 무엇보다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 펠트는 서양 사람이 많이 이용하는 재료이지만 원래 중앙아시아에서 유래했다. 유목민에 의해서 발전된 기법이고, 우리나라에서도 8세기에 펠트로 제품을 만들었다고 문헌에 기록돼 있다.
장애에 대한 이해가 작업세계와 어떤 관계성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재범 어려운 질문이다. 초기 작품이 한때 ‘치유’에 포커스를 두었다. 당시에는 나의 내적 치유에 집중했는데, 지금은 함께 바라는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치유가 되기를 바란다. 작업을 하면서 공예 쪽은 순수미술에 비해 형식은 완벽하지만 내용이 약하다는 점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제가 공부할 때는 공예가 순수미술을 많이 받아들이는 편이었고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 나중에 사회생활을 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아이와 어른 구분 없이 모두에게 메시지를 줄 수 있는 <로드킬> 작업으로 이어졌고 그림책으로도 표현된 것 같다.
앞으로의 계획은?
이재범 우리 작업을 필요로 하는 그림책이 있으면 추진하고 싶다. 지난 4월 갤러리 이앙에서 개인전을 열었는데 앞으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면서 다양한 작업을 선보일 계획이다.
 이슬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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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Focus] ARTSPECTRUM 2014

삼성미술관 Leeum이 2014년 첫 전시로 한국 현대미술의 신진작가를 소개하는 <아트스펙트럼 2014>를 연다. <아트스펙트럼전>은 유망 작가들을 발굴하여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짚어낸다는 취지로 2001년 격년제로 시작했다. 2006년 전시 이후 중단됐다가 2012년 재개돼 올해 5회째를 맞았다. 이번 전시는 리움 개관 10주년을 맞아 다각적인 시선을 반영하기 위해 리움의 큐레이터뿐 아니라 외부 평론가와 큐레이터가 작가 선정에 참여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10인의 작가는 개인사부터 사회경제사까지 아우르는 주제와, 전시장 곳곳에서 일어나는 퍼포먼스에서부터 관객의 참여로 완성되는 작품까지 한국미술의 확장된 다양성을 담고 있다. 한편 리움은 올해부터 작가들의 창작의지를 고취시키는 취지에서 <아트스펙트럼 작가상>을 수여한다. 신선한 변화와 기발한 창의를 주도하는 작가 10인의 신작을 중심으로 한국미술의 잠재력을 살펴본다.

이야기의 힘, 노동의 진지함, 공감의 전달

진휘연  성신여대 교수

현대미술의 화두는 무엇일까? 단순하지만 비교적 분명한 변증법적 발전을 해오던 현대미술은 1990년대까지 다양한 주제들을 섭렵하면서 확장 또는 융합의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미학적 요구가 조금씩 뒤로 밀리면서 작가들은 개념에 몰입하였지만, 동시에 자본력과 결탁한 대규모 스펙터클이나 자극적 이미지를 통한 반(反)자연적이고도 충격적인 연출 경향도 강해졌다. 변화가 빚어내는 가변적이면서 혼재된 상황에서도 감동적이고 아름답고 신기하고 재미있는 볼거리를 요구하는 관객의 더욱 커져만 가는 요구에 맞서 젊은 작가가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은 어떤 것일까?
올봄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열린 <아트스펙트럼 2014>는 형식적인 새로움이나 특별한 주제, 강렬한 개념 등은 눈에 띄지 않았다. 언뜻 이질적으로 보이는 작가 10명의 작품들은 그러나 개인의 수고,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이야기와 장인정신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단순하지 않은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작가 개인이 던지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 속에서 감상적 낭만적 기분으로 흐르지 않으면서도 관객과의 교감의 층위를 넓히는 작가들의 솜씨는 예사롭지 않아 보였고 그중 몇몇은 작품 구성이나 이야기의 힘, 모두 컸다.
이완은 직접 동남아시아를 돌면서 한 끼의 식사, 아침을 마련하는 과정을 통해 소비자와 생산자의 구분을 거부하고, 자신의 필요를 직접 채우는 생산/소비자로 변신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메이드 인>은, 캄보디아에서 쌀, 미얀마에서 금, 대만에서 설탕, 태국에서 실크 등을 제작하는 작가를 영상에 담고 그 결과물을 함께 전시했다. 그는 사탕수수밭에서 수수를 채취하고, 몇몇 과정을 거쳐 설탕을 만들고, 그것을 먹는다. 누에고치를 가져다가 삶고, 실을 뽑고, 직조해서 실크천을 만들며, 이후 그것으로 옷을 제조한다. 노천광산에서 돌덩이를 가져다가 정련하고 손톱 반 크기의 금덩이를 얻어낸다.
그의 작품은 아시아 경제와 산업화, 후기자본주의 사회와 개인의 삶에 대한 관찰이란 거창한 개념을 지향하지만, 그보다는 작가의 구체적인 노동의 가시화, 개인적 소용에 닿는 필요한 무엇을 완결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돋보였다. 이완의 작품은 인간 노동의 가장 구체적이고 근원적 이유를 보여주었다. 일상적 소모품 뒤에 가려진 노동과 생산품으로부터 소외되는 생산자들의 모습을 거부하면서, 자본이나 제도적 관습에 의해 미술작품으로부터 소외되는 예술가의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는 작품의 층위는 다양했다.
숙련되지 않은 아마추어의 손놀림으로 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다니며 이방인처럼 작업하는 작가는 21세기의 낮은 노마드의 모습을 드러내주었다. 전 지구적이라는 상향적이고 화려한 노마드가 아닌, 부가가치 낮은 산물이나 손이 많이 가는 작업 환경 안에서 떠도는 그의 모습은 노동의 현실과 지역적, 산업적 소외라는 사회적 문제를 부각해주었다. 우리가 소비하는 일상적 생필품에는 수많은 사람이 흘리는 땀과 시간의 흔적이 있지만, 모두 가려진 채 재화를 통해 그저 교환 대상으로 변화한다. 작가는 그 부분을 자신의 노동으로 끈질기게 파고들면서, 교환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로서의 사물을 가시화하고, 자본의 논리로 확대되고 재생산되는 현재 미술의 재화적 존재의 모순을 함께 지적한다. 이 작품의 가장 강한 메시지인 ‘노동’은 예술의 근원적 발상, 실천 과정과도 닿아있기에 더욱 친밀함이 느껴졌다.
송호준은 작품과 작가의 경계가 모호한 지점을 가리킨다. 그는 공학 전공자로서 공개된 정보들을 모아서 인공위성을 만들고 직접 쏘아 올려서 우주 궤도진입에 성공한 특이한 이력의 주인공이다. 그의 작품 <인공위성 퀴즈 쇼: 통신 모듈편>은 이런 업적을 중심으로 인공위성에 관한 퀴즈쇼 형식을 취하고, 인공위성의 부품들, 정확한 답을 보낸 관객들에게 줄 상품, 그리고 질문에 대한 관객의 답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본질은 인공위성도 퀴즈쇼도 아니었다.
송호준은 자살 방지책으로 죽음을 미리 경험하도록 돕는 <방사능 보석>을 제작한 바 있다. 그는 아마존 사이트에서 방사능 물질을 구입하고 완성된 목걸이를 이베이 사이트에서 판매했다. 그의 작품은 먼저 우리가 가상적으로 관계 맺고 있는 거창한 대상들, 즉 인공위성이나, 방사능 물질 등이 실은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얼마든지 나와 구체적인 관련을 맺을 수 있음을 알려준다. 같은 맥락에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데 필요할 것으로 여겨졌던 국가, 정보, 자본, 군사력, 기술력, 전문기구 등에 대한 믿음도 허구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더 많은 것이 가능하고 그것은 아직 타진되지 않았을 뿐임을 말하는 송호준은 제도적 통제나 능력의 한계로 인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도전적 사고가 부재했음을 강변한다. 이 점은 현대미술이 그토록 오랫동안 논의해오던 사고의 전환, 즉 허구적이고 가상적 믿음인 이데올로기의 파괴라는 논제와 일맥상통한다. 그의 작품은 상호성을 염두에 둔 관객 참여형태를 띠지만, 송호준이 도전한 진짜 참여만큼의 재미를 주지는 못한다. 그가 인공위성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 도전 정신은 현대사회의 지식의 권력화, 자본의 권력화, 통신의 권력화, 국가 및 제도의 권력화, 결과물로서의 정보의 독점화 등 여러 권력구조에 대한 전복이자 이 시대 우리를 둘러싼 관습적 사고에 대한 해체이다.

10人10色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더욱 놀라운 것은 몇 년에 걸쳐 직접 인공위성을 만들어낸 그의 수고로, 준비하고 제작하고 끈기 있게 완성해내는 모습이 바로 창조의 전형임을 기억할 때, 예술가를 코스프레(가장함)한다는 송호준은 잊혀진 예술가의 본질적 모습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박보나의 작품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을 말해드립니다 2>는 매우 단순할 뿐 아니라, 약간 진부해보인다. 3명의 인물을 선택, 그들의 전문분야 – 개그, 연기, 노래 – 를 보여주고, 각각의 인터뷰 영상과 교차 편집했다. 이들이 몸담고 있는 분야는 경쟁이 매우 치열하고, 재능이 성공을 담보하지 못하는 곳이다. 현실의 벽에 부딪힌 젊은이들의 연기와 공연은 이런 현실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이야기가 특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오늘날 한국의 대형 방송사들이 앞 다투어 만드는 여러 종류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자주 등장하는 진부한 상황들, 어려운 현실에 대한 토로와 인간적 호소가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들의 이야기와 공연 장면은 전시장을 나와서도 계속 강렬하게 머릿속에 남았다. 3명이 보여주는 소위 ‘진정성’이 얼마나 강력할 수 있는지를 깊이 느끼게 되는 부분이다. 이런 면에서 박보나의 시나리오 구성과 편집력은 뛰어나다고 하겠다. 영상 속 3명이 모두 공연전문가란 점에서 높은 전달력과 표현력이 작품의 내용을 대신했고, 그들의 짧은 공연장면은 흡입력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그들의 인터뷰는 관객의 여러 정서에 강하게 어필했기 때문이다. 일상적이고 특별하지 않은 내용의 이 작품은 진부한 현실들, 즉 자본의 힘, 방송사와 거대 권력, 제도 안의 작은 개인들, 스타의 애매한 탄생 과정, 평가의 선정성과 우연의 개입 등의 반영에 끝나지 않고 결국 관객을 움직이는 것이 이야기의 힘이라는 점을 부각하는데 성공했다.
장현준의 <(  ) 수행>은 개념미술의 맥락하에 있다. 그의 설치+퍼포먼스+영상+관객참여형 작품은 지극히 반미학적이며, 어떤 것도 결정되어 있지 않은 열린 형식의 무대였기에 통합성이나 전달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이 작품 속에서 작가가 그의 부친이 만들고 디자인한 설치물을 통해 부친을 관찰하고 그와의 관계를 강화하려는 주관적 목적이 강하게 내재되어 있음을 알게 되면, 이런 산만함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김민애는 <블랙박스 조각> <플랫> <세 작가>란 제목을 붙인 3작품을 전시했는데, 공간 속의 사물과 건축적인 부속품들 간의 깨어진 틈, 오류와 착각, 환영 등을 기술적이고도 재치 있게 교합함으로써, 공간과 시각적 이미지, 그리고 언어 간의 겹침과 아이러니를 구현해냈다. 장소특정성에 기초해서 전시장의 엘리베이터나 벽, 공간의 특이함을 구성에 잘 이용한 작가는 전통적인 미술어법에 충실했다.
천영미의 <구름기둥 불기둥>이나 <완벽한 원> 등은 미술의 기본적인 솜씨 또는 수행력과 종교나 물리학, 그리고 예술적 상징성을 결합시켰다. 애니메이션과 드로잉의 화면이 만들어내는 모정과 비정한 사회의 이야기를 다룬 심래정의 작품에는 표현과 주제의 다이내믹한 에너지가 보였다. 성과 금기의 문제를 결합하고 섬세하면서도 경계가 모호한 방식의 주제와 표현을 보인 이은실의 작품은 매체와 주제 선택의 시너지가 돋보였다. 즉물적 사진이 보여주는 현실 너머의 공간감에 관한 상반된 깊이와 내용을 다룬 정희승, 전통화법을 대표하는 선원근법과 그리기의 전통을 21세기의 시각으로 재구성한 제니조 등, 10명의 작가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과 흥미로운 시각으로 전달했다.
삼성미술관 리움이 개관 10주년을 맞았고, <아트스펙트럼전>은 올해로 4회째다. 스펙트럼전이 이제까지 미술계의 신인 등용문 역할을 했고 될성부른 나무를 잘 뽑았으며, 유명한 작가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는 점을 성공 잣대로 내세워서는 안 될 것 같다. 오히려 작가들의 이후 입지보다는 오늘날 미술계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다양한 예술적 실천에 대한 수용이 계속되어야 한다. 알려진, 유명한, 인기 있는 작가가 되기보다는 그것과 반대되는 노선을 걷는 젊은 작가들, 그들의 작품이 비록 완성도가 떨어질지라도 굳어진 우리의 시선을 깨워준다면 <아트스펙트럼전>은 계속 의미 있는 위상을 갖게 될 것이다.
이번 전시에 등장한 작가들은 현실적인 문제부터 미술사의 주제까지 여러 소재를 다룬다. 디스플레이 방식이 달라서 서로 조금씩 충돌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 작품이 미학적 가치관이나 개념 대신, 진솔한 이야기와 집약된 노동력을 보여줌으로써 오늘날 현실에서 권력이 되지는 못하지만, 가치 없다고 치부되지 않는 소중한 요소들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것을 발견하는 전시는 그래서 잔잔한 울림을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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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애 (2)

에스컬레이터 밑에 있는 작품은 <블랙박스 조각>이고, 오른쪽 벽면의 작품은 <플랫>(위)과 <세 작가>(부분)다

KIM MINAE
김민애

1981년생. 서울대 조소과 동대학원 졸업
런던 로얄 컬리즈 오브 아트 조소과 석사 졸업

김민애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기반으로 나-오브제-공간-그리고 문맥 사이의 관계 양상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중재하는 독특한 조각, 설치를 선보여 온 작가다. 비록 임시적이고 장소제한적이라는 조건을 전제하지만, 작가가 제안하는 이 건축적 상황극에서는 억압되고 가려져 있던 존재들이 무대로 초대되고, 기능과 미학의 기존적인 위계와 선후관계가 무효화되며, 다양한 욕망과 목적이 충돌하며 발생하는 틈새와 역설적 상황이 있는 그대로 노출된다. ― 곽준영

 

이은실 (1)-1

<선을 넘는다. 얼마든지 넘을 수 없다> 장지에 수묵채색 244×720cm 2014

LEE EUNSIL
이은실

1983년생
서울대 동양화과 졸업 동대학원 수료

욕망과 억압의 자극적인 상황을 세필 묘사로 적나라하게 또는 불편하리만치 과장되게 묘사하는 이은실의 작품은 소리 없이 공격적이었고, 충분히 껄끄러웠다. … 성적 욕망과 보수적 가치가 충돌하는 이은실의 작업은 성적인 표현에 있어 운신의 폭이 좁았던 젊은 여성 작가가 사회에 날리는 화끈한 조롱이었다. ― 태현선

 

제니조 (1)

<원을 그리며 뒤로 달리기(말레비치를 따라)> 캔버스에 유채 각 160×180cm 2014

JENNY CHO
제니 조

1985년생
뉴욕대 순수미술과 졸업

내 작업에서는, 실제 촬영한 대상을 사진 부조로 재배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개인되는 ‘시간성’과 ‘반복성’의 개념이 매우 중요하며, 이 과정을 통해 도출되는 페인팅에선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재현해 내는 것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 의미로 다가오는 모든 것을 통합적 시지각으로 표현하고자 애썼다. 나는 이를 “인-비트윈(In-Between)”의 개념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 제니 조

 

송호준

<인공위성 퀴즈 쇼: 통신모듈 편> 설치 2014

SONG HOJUN
송호준

1978년생. 고려대 전기전자전파 공학부 졸업
KAIST 공학부 대학원 수료

송호준의 작업들이 흥미로운 점은 그가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현란하게 보여주지 않는 데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문화와 기술, 소비문화를 비틀어보게 하는 질문. 이는 분명, 미디어아트가 노리는 지점이 기술, 즉 테크놀로지에 한정되어 있지 않음에 대한 또 다른 반증이자, 송호준의 작업이 지향하고 있는 지점이고, 우리가 미디어아트에 대해서 한번쯤 다시 생각하게 되는 이유이다.  ― 신보슬

정희승 (2)

‘회전문이 있는 방’이라는 이름이 붙은 공간으로 <테이블-디드로=테이블>과 <회전문이 있는 방> 사진액자 <끝나지 않은 문장 1,2>

CHUNG HEESEUNG
정희승

1974년생. 홍익대 회화과 졸업
런던 컬리지 오브 커뮤니케이션 사진과 석사 졸업

정희승은 3차원의 현실 세계를 2차원의 이미지로 ‘실재와 매우 유사하게’ 재현하는 사진의 특성에 집중하여, 여기에서 파생되는 사진의 매체적 한계와 가능성을 탐구해왔다. … 그의 사진-설치에서 우리는 내러티브 대신 사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작가의 반응을 발견하고, 그가 사진의 한계에 대해 탐구하며 역설적으로 그 지평을 넓혀가는 것을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진아

 퍼포먼스, 혼합설치, 필름 2014

<( )/수행> 퍼포먼스, 혼합설치, 필름 2014

CHANG HYUNJOON
장현준

1982년생. 한예종 조형예술과 졸업
한예종 무용원 창작과 졸업

몸은 우리가 외부세계를 대면하고 수용하며 인식하고 겪는 모든 사건들의 시작이자 통로이다. 그 사건들 속에는 제도, 시스템, 구조뿐만 아니라 그 바깥도 포함되는 것 같다. … 상황과 협업은 즉흥을 차용함으로써 해소되는 것들이라고 말할 수 도 있을 것 같다. 현상과 현상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것들은 계획과 예측을 벗어나는 새로운 현상들을 수용 가능하게 해준다. ― 김장언

 건축재료 150×150×1000cm 2014

<구름기둥 불기둥> 건축재료 150×150×1000cm 2014

CHUN YOUNGMI
천영미

1978년생. 한예종 조형예술과 졸업
첼시 컬리지 오브 아트 앤 디자인 파인아트학과 졸업. 동대학원 석사 졸업

천영미의 작업에서 등장하는 알 수 없는 개인적 시선이나 3차원적인 오브제 설치에 담기는 이미지적 즐거움은 보는 사람에게 꽤 만족감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에게 오브제가 등장하는 공간은 조각적인 물리적 관계에 대한 것이기 보다는 우화적 이미지를 만드는 오브제들 간의 은밀한 시적 대화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작업들은 일견 일상을 지시하는 듯 하면서도 비범하고 특수한 사건이 되는 어떤 특수한 상황으로 다가오게 된다. ― 김현진

 드로잉 애니메이션 1분23초 2013

<슬리핑 타임> 드로잉 애니메이션 1분23초 2013

SIM RAEJUNG
심래정

1983년생
서울과학기술대 조형예술과 동대학원 졸업

심래정의 작업에서 살인은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죽음이라는 사건이 내 주변에서 목격할 수 있는 여러 사건들 중의 하나이며, 아무 예고 없이 다가오는 일상에서 맞는 어이없는, 순간적인 일일 뿐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작품을 통해 죽음이 단지 끝이 아니며 삶과 죽음은 끊임없이 수환하는 것임을 말하고 싶어한다. ― 우혜수
 

 전시장 가이드 퍼포먼스 2014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을 말해드립니다 1> 전시장 가이드 퍼포먼스 2014

PARK BONA
박보나

1977년생. 서강대 영문·신문방송학과 졸업. 한예종 조형예술과 졸업
런던 골드스미스 컬리지 오브 아트 석사 졸업

박보나의 작업은 두 개의 리얼리티 사이를 횡단한다. 우선 우리가 겪고 살고 있는 수만 가지의 현실 가운데에서 ‘거래’에 의해 만들어지는 개인과 사회 간의 관계가 갖는 리얼리티와 예술의 장에서 전형화되고 형식화된 시스템으로 드러나는 리얼리티이다. 그의 작업은 매체나 형식에 의한 양식적 속성을 갖기보다는 작가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 속에 내재하는 제도화된 구조를 작업으로 전유하여 실존적 현실이 드러나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접근은 리얼리티를 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리얼리티를 전유한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정현

 

이완 (8)

<메이드 인 미얀마(금)> 전시장 전경 2014

 

LEE WAN
이 완

1979년생
동국대 조소과 졸업

이런 생산수단에 대한 관심이 시스템으로, 노동력에 대한 관심은 사람-개인과 집단-으로 향하게 되었다. 나는 구조가 개인과 집단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키는지에 주목해왔다. 예를 들어 내가 가진 이념이나 성향들은 대부분 외부에서 온 것이다. 또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태어남과 동시에 한국 근현대사라는 역사적 인과에 투입되었다. 그 결과 어쩔 수 없이 나와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 보고, 나와 타인의 삶이 비슷하거나 다른 이유들을 찾기 위해 시스템을 탐색하는 것이다. ― 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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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아트스펙트럼2014 작가상> 수상작가 이완

소비자이자 노동자인 우리의 조용한 저항

이완인물 (3)수상을 축하한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시상제에 대한 부담은 없었나. 작가로 활동한 지 10년 만에 첫 수상이라 그 자체가 영광스럽다. 작업의 완결이 아니라 연속선상에 있는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기 때문인지 시상제도에 대한 부담이나 압박감은 전혀 없었다.
금, 밀, 실크 등의 전체 생산에 개인이 직접 참여한 모습을 담았다. 소비자와 노동자의 관계에 주목한 작업인데 그 작업의 전개과정이 마치 노동자의 노동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가와 노동자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예술이 노동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노동조건이 성립하려면 생산수단을 가진 자에게 내가 가진 근력과 시간을 제공하여 고용주와 노동자가 원하는 것을 서로 교환해야한다. 예술은 이와 다르다. 나의 모든 작업이 노동의 과정이지만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이는 하나의 ‘발표’가 되지 ‘노동의 결과물’로 교환되는 성질은 아니다.
<아트스펙트럼2014 작가상> 수상과 함께 2016년에 플라토에서 전시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많은 작가가 전시에 부담을 느끼는 공간이다. 아직 이르지만 구상한 전시내용이 있는가. 이전의 몇몇 작업과 <메이드 인> 시리즈 그리고 이후의 작업을 연결해서 완결은 아니지만 현재 구상하고 있는 전체 내 작업의 중간과정을 보여줄 것이다. <메이드 인> 시리즈는 내년쯤 완결해 선보일 것이다. 이전 작업의 경우 씨앗에서부터 나오는 상품이 가지는 역사적, 국제적 관계를 엮는 작업으로 <메이드 인> 작업과 연결된다. 플라토라는 공간이 어렵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려운 것을 극복하는 자체가 나의 즐거움이다.
개인 삶에서 드러나는 신자유주의 사회 시스템에 따른 생산과 소비, 고용과 노동 등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매니페스토를 꿈꾸는가. <메이드 인> 시리즈는 개인이 하는 무모한 행동을 보여준 것이다. 비효율의 극단을 실행에 옮긴 셈이다.
작년 8월부터 대만에서 2달, 태국에서 1달 반, 미얀마와 캄보디아에서는 합쳐서 1달 정도 생활했다. 순금 3g을 캐기 위해 떠난 미얀마의 경우, 도심에서 1000km 떨어진 금광에서 작업했다. 작업이 너무 고되서 돌아오는 버스에서 울기도 했다. 서울에서 약 15 만원으로 살 수 있는 양의 금을 위해 최대의 비효율적 과정을 거친 것이다. 이는 일종의 저항의 퍼포먼스였다. 저항인 동시에 현대 생산 시스템의 과정을 보여주는 행위다. 무엇이 올바른지를 이야기하기보다 사람들에게 이 현상과 과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려 한다. 조용한 저항. 나는 아래에서 위로의 혁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관된 주제임에도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고 있다. 작품의 형식을 결정하는 기준이 있는가. 형식은 내용(context)의 하위구조라고 생각한다. 음악, 영상, 다큐멘터리, 설치 등 구애하지 않고 주제를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매체를 찾아서 취하고 있다. 형식은 작업에서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앞으로의 작업 계획이 궁금하다. 식민지시대 이후 정치·경제적 이데올로기가 급변해왔다. 최상의 효율성을 추구하며 케인스주의, 하이에크의 이론 그리고 새로운 이론이 필요한 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거대한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지배하면서 개인은 소비자 혹은 노동자 중 하나가 될 뿐이다.
많은 부분을 놓치고, 무엇인가에 통제되어 살아간다. <메이드 인>이 아시아의 자본식민주의를 다뤘다면 앞으로는 금융을 주제로 작업하려고 한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제국주의 국가를 방문하여 <메이드 인>과 대척점에 있는 내용을 다루면서 두 시리즈의 대립을 보이고 싶다. 한국은 수출주도형 국가. 원자재를 수입해서 그것을 재가공하는 것이 한국의 특수성이다. 환율에 영향을 크게 받는 우리나라의 경제시장을 바라보며 금융에 대해서도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올해 8월 <메이드 인> 작업을 위해 중국과 인도네시아를 방문할 예정이고, 7월부터 12월까지 뉴욕 두산 레지던시에 참여한다.

임승현 기자

 비디오 13분 36초 2013

<메이드 인 미얀마(설탕, 설탕스푼, 설탕그릇)> 비디오 13분 36초 2013

[Exhibition Topic] 역사적 상상-서용선의 단종실록

Historical Imagination  The King Danjong Stories  by Suh Yongsun

28년간 단종과 관련한 비극적 역사를 소재로 작업한 서용선의 개인전 <역사적 상상-서용선의 단종실록>이 5월 2일부터 7월 27일까지 아트센터 화이트블럭에서 열린다. 서용선의 작업은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묘사하거나 교훈적인 내용을 담는 것이 아닌 현재의 입장에서 과거에 대해 사유하게끔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겸재정선기념관 관장을 맡고 있는 이석우 전 경희대 교수가 서용선 작가를 만났다. 이 대담을 통해 역사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색다르게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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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와 사학자, 단종의 비극을 말하다

이석우(이하 ‘이’)  반갑습니다. <역사적 상상력-서용선의 단종실록> 그 전시 제목부터 범상치 않습니다. 서 작가의 전시가 조선시대 역사를 다시 몰고 온 느낌이에요. 대담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단종의 등극부터 영월에서의 죽음까지 과정을 간략히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단종은 1441년에 태어나서 1457년에 17세로 생을 마감했죠. 아버지 문종의 병약함과 어머니 현덕왕후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단종은 태생부터 비극적인 삶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단종은 12세이던 1452년부터 1455년까지 약 3년 동안 재위했어요. 그런데 왕으로 등극한 바로 다음 해 1453년 10월 수양대군이 ‘계유정난     (癸酉靖難)’을 일으킵니다. 이후 단종은 1455년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이 되었습니다. 1456년 6월 사육신의 단종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1457년 9월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가게 되고 같은 해 9월, 금성대군(수양대군의 이복형제)이 단종을 복위하려 역모를 일으켰지만 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지요. 이를 빌미로 단종은 노산군에서 평민으로 또 강봉되고, 10월에 죽임을 당합니다. 정순왕후도 평민이 되었고 82년 한 많은 세월을 살았지요, 단종은 영월에 5개월 동안만 머물렀는데도 수백 년의 역사를 넘은 오늘에 새로운 역사로 되살아나는 것을 보니 역사의 회복력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100여 년 후, 1511년(중종 11년) 묘역이 정해지고 간간이 사신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중종은 스스로가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지라 단종에 대해 애절한 연민의 마음을 갖지 않았을까 해요. 이어 1681년(숙종 7년) 신원을 시켜 노산군으로 추봉하고 1689년(숙종 15년)에 왕으로 복위해 단종으로 칭하고 묘역을 장릉으로 꾸몄죠. 저는 이번 서 작가의 전시를 보면서 우리의 미래 과제를 오늘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역사의 경구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문제가 복잡할수록 역사를 통해, 우리의 전통을 통해 창조적으로 그 해답을 구해야 된다고 봅니다. 이제 전시로 돌아와 질문을 드려보죠. 서 작가에게 역사란 무엇입니까? 지난 30여 년간 이 소재를 끈질기게 천착하며 탐구해 온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그 갈증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서용선(이하 ‘서’)  저는 역사의 일부를 소재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역사 전체를 파악하지는 못하지만 단종과 그 외 6·25전쟁 등 한국의 역사를 소재로 작업하고 있어요. 제 작업의 주 관심분야는 인간에 대한 호기심입니다. 특히 단종에 대해서는 그것 자체로 역사이기도 하지만 현실과 쉽게 분리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합니다. 처음부터 ‘역사’라는 넓은 영역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는데 작업이 쌓이다보니 역사를 주제로 한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일부 동의하면서도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의문을 가지면서 작업을 하고 있어요. 미술을 시작하고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를 배우면서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매우 크게 느껴졌습니다. 서구 역사를 보면서 서구 미술의 주제의식과 형식이 왜 다른가 의구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시 조선시대 미술을 한국미술의 대표적인 형식으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서구와 비견할 만한 역사가 있을텐데 왜 그것이 그려지지 않았나 하면서, 그것을 주제로 한 작품에 욕심을 냈어요. 그러던 중 우연히 영월을 다녀오게 된 겁니다. 그 현장, 영월을 보기 전부터 이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이지요. 그런데 더 길게 생각하면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더 주를 이뤘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사회와 관계를 이루는 것에 대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방법을 몰랐던 것 같아요. 내 초기 그림을 보면 그냥 인물이 혼자 서있는, 도시사람을 그리거나 했죠. 내용을 전달하는 데 한계를 느낀 겁니다. 그래서 그러한 이유들이 모여 역사적 내용의 그림을 그려봐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조선을 세우고 초기 국가로서의 면모를 띄어가는 과정이 이후 일제강점기 식민지 통치 거쳐 광복을 맞이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던 과정과 비교해 볼 때 그 흐름이 매우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런 몇 가지 내용을 갖고 작품을 그려나갔고 시간이 흐르게 된 거죠.
이  어느 역사학자가 “역사의 인간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역사이기도 하다. 역사 속에 사는 것도 인간이지만 또한 역사를 만든다”고 한 말이 떠오릅니다. 또한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지요. 역사는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말하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말하는 역사란 그것 자체가 기록이 되어야 이뤄집니다. 그 기록의 행위는 쓰거나 그리거나 하는 것들이겠지요. 역사에 그것을 기록하거나 그리는 사람의 바람과 한과 원망이 투영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역사적 진실과 화가적 진실이 다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역사적 기록이 사실을 제대로 담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어요. 특히 단종에 대한 기록이 그렇더군요. 바로 이러한 의심이 제가 작업을 하는 이유입니다. 사실 역사를 소재로 작업하면서 역사와 그림이 별개인가라는 질문에 확실한 결론과 답을 내놓지 못합니다. 그런데 역사를 기록하는 대개의 경우인 문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제 생각을 검증하는 것에 대해 관심이 있어요. 그런데 단종과 관련된 역사는 제가 보기엔 매우 의도적인 허구라고 느껴진다는 겁니다. 제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시기가 나이가 꽤 들어서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에 대한 이해를 갖고 시작했는지, 어떻게 하다보니 이런 전공을 갖게 된 작가로서의 운명에 대해 스스로 명쾌한 해답을 갖지 못했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문자와 그림 중 어떤 것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에 확신도 없어요. 저는 어떻게 보면 의혹이 더 깊어지는 상황에 있지 않나 합니다.
이  역사의 객관성에 대한 한계와 예술가로서의 가능성에 대해 본인의 생각을 잘 정리해주셨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세조의 집권과정이 세조의 입장에서 기록되어 서 작가가 의혹을 갖는 것은 역사의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는 계유정난은 일종의 권력투쟁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단순히 세조 개인의 야심인가? 아니면 조선시대를 관통한 왕권과 신권의 대립양상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단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름에 따라 왕권은 김종서 등 재상들에게 거의 위임되어 약화됐음을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서 작가의 작업을 보면 당시 사건을 윤리적 측면으로만 조명하여 단종에 대한 애련의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조도 역사적으로 보면 공(功)이 없다고 볼 수 없지요.
  기본적으로 세조라는 한 인간이 가진 권력지향성, 투쟁성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맞춰 주변에 다른 세력이 합쳐지게 됐지요. 안평대군과 세조를 비교해 봅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역사의 흐름을 보면 비판거리가 생기며 긍정할 것과 부정할 것이 생기지요. 저는 일반적인 인간의 성향으로 봐서 자신의 형제를 처단하지 않고 국가를 끌어갈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 이후에 만들어진 역사를 부정적으로만 볼 순 없겠지요. 현실과 역사의 양면성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세조 같은 사람이 탄생했는가? 이전 시대 역사의 배경이 궁금해집니다. 저는 그래도 윤리적 측면에서 좀 더 좋은 왕권이 발휘되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듣고 보니 좋은 말씀이에요. 작품으로 돌아가 보지요. 작품 내용은 설명을 듣지 않으면 알 수 없어요. 그런데 등장하는 인물이 형태는 매우 모호하지만 흡입력이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서  이 얘기는 이 전시를 기획한 이윤희 큐레이터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는 것이 어떨까요? 전시를 준비하면서 이 큐레이터와 주제에 대해 수없이 논의했으니까요.
이윤희  작가는 역사와 관련하여 오랫동안 작업을 진행한 바, 저는 특히 단종과 관련한 작업을 집중해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 제안에 작가가 흔쾌히 응했죠. 흡입력을 이야기하셨는데 관람객의 입장에서 여러 요인에 의해 그것이 발생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과감한 원색의 사용이랄지, 장엄한 스케일의 지향, 서로 만나지 않았을 것 같은 인물이 한 화면에 등장하는 화폭의 운용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포함하여 작업을 바라보게 만드는 주요한 이유는 방금 말씀하셨듯이 모호한 인물의 표현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인물이 누구인지도 모호하지만 그들의 표정도 매우 모호합니다. 비극적인 상황인데도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있어요. 그래서 관람객이 문정왕후나 김시습의 입장이 되어 감정을 투사하게 됩니다. 그럴 여지를 열어주고 있어요. 그래서 결말이 내려지지 않지요. 서구에서 역사화는 특정한 메시지, 관점이 전달되어 결말을 지정해두고 있지만, 서 작가의 작업은 그렇지 않아요. 따라서 관객은 상상력을 발휘해 작품을 대하게 됩니다.
  형태가 모호한 이유는 그 인물을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웃음) 그러나 그것과 함께 사람을 그리는 데 있어 상당히 고민했습니다. 제 작품뿐만 아니라 ‘그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도 못하는 입장에서 역사적 사건을 완벽히 이해하긴 힘들겠지요. 인류에게 역사는 동적인 성질을 지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림은 그려지는 순간, 정지되죠. 무척 고전적인 생각인데 이러한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의 해답을 구하지 못했지요. 이는 재현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특히 현대에 와서 회화는 좀 더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고 봅니다. 회화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표현에 희망을 갖는 이유는 예술과 삶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제가 현대미술을 둘러싼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 속에서 동적인 문제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한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회화에서 표현이 신중하지 않으면 현실과 차이가 나는 문제를 아무렇지 않게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추상미술에서 그러한 문제가 잘 해결됐다고 봅니다. 우리의 삶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아도 우리의 감정을 그것에 동조하게 만듭니다. 그저 닮음을 목적으로 하거나 인물을 그리는 등 재현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작업이 매우 달라지기 때문이죠. 저는 작품을 제작하는 이가 갖고 있는 감정의 흐름을 어떻게 다른 매체로 환원시키거나 치환하고, 그리고 감정을 전달할 것이냐에 집중합니다. 제 작업에 흡입력이 있다면, 아마 거기에서 비롯한 것이겠죠.
비극, 자기 정화의 계기가 되다
  앞서의 질문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서 작가의 화폭에서는 짙은 비극성, 비애감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그 감정이입의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서  200여 명의 사람이 희생된 사건의 그림이라서 더 그럴 것입니다. 그것 외에도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을 그렸을 때 굳이 즐거운 표정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는 물어보신 질문의 답을 잘 모르겠어요. 저는 매번 어둡거나 슬픈 내용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 자신은 밝게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내가 살아온 삶이 전쟁의 분위기가 채 가시지 않았던 않은 전후(戰後)시대를 지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도 예술의 형식에서 비극적 내용을 담았지만 아름다운 작품들이 있었음을 보아왔기 때문에 우리가 겪은 일에 위로를 주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 아닌가 합니다.
  단종이 겪은 형태의 비극을 모양과 시기만 다르지 현실적으로 아픈 삶을 살고 있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긍정적으로 살아남은 것도 이들 한을 잘 승화시키는 능력과 저력에서 비롯합니다. 그래서 서 작가의 작품이 단종의 비극을 그리면서도 많은 이에게 힘을 낼 수 있는 자기정화의 계기가 되는 이유가 전환의 발판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면 정치와 예술의 관계는 이 시대를 사는 작가의 쟁점이 되는데 서 작가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서 작가는 역사적 산수화란 말을 쓰고 있어요. 풍경화, 역사적 풍경화, 또는 진경산수와 어떻게 다른 것인지요?
  제가 보기에 정치와 예술이 겹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면서 자기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지역에 따라서도 그것이(예술과 정치의 관계가) 반드시 어떤 원리에 따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분리되어야 한다거나 기본적으로 언어 자체가 다르니까 기능이 다르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때는 예술이 정치적 역할을 하기도 하고 정치가 예술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도 봅니다. 제가 풍경화, 진경산수화, 산수화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지 10년도 채 안된 것 같습니다. 특히 단종과 관련된 이런 역사적 풍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최근에, 이번에 글을 쓰신 조인수 선생님께서 지난번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서 그런 유적지에 대해 언급하셔서 제가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산수화라든지 풍경화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인물화를 염두에 두고 시작했기 때문에 특별히 어떤 생각을 가지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풍경화라는 용어도 우리가 옛날에 쓰지 않던 것이죠. 일본사람들이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동양에 유입된, ‘landscape’를 일러 서양의 용어와는 다른 말을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서양의 ‘landscape’와 ‘풍경’은 직역을 해도 의미가 좀 다른 거죠. ‘경치’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지만  ‘풍경화’라 하면 약간 낭만적인 느낌도 들어갑니다. 어떻게 보면 당시 일본인들이 서양의 전형적인 ‘landscape’를 자기네 식으로 옮기면서 넓은 의미를 갖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진경산수화는 가치를 주관적으로 보는 것이어서 사실 어느 것이나 다 진경이죠. 진경. 또한 우리의 땅만 진경이라고 할 수는 없죠, 사실 진경이라는 말 자체가 한국과의 관계에서 중화사상과 연관된, 조선시대에 그런 사고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써도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넓게 봐서 산수화나 진경산수화 같은 장르적 개념은 인간이 시대적 상황, 어떤 정치적 상황에 처했을 때 더 다가오지 않던가요? 예를 들자면, 진경산수나 조선시대 산수화를 보면 사대부들이 정치적으로 거리를 둘 때 자연을 더 깊이 있게 보게 되고, 자연에 더 애정도 가는 것처럼 정치와 예술의 관계는 굉장히 유동적으로 흘러가지요. 또한 현대에 와서 서양에서는 정치와 예술은 따로 떨어져야 한다고 보지 않습니까? 이런 순수목적의 예술을 향하는 것이 한국에 반드시 적용되는 것도 아니고, 특히 중국 송대의 미술이 서구보다 훨씬 더 발전해 있었을 때, 그 미술이 정치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없는 것 같아요. 제 생각으로는 한국에서는 정치와 예술에 관한 논의가 더 많아져야 할 것 같고, 그런 점에 대해서 얘기가 된 것은 이제 뭐 1970, 80년대 문학, 미술 쪽에서 현실문제가 좀 노골적으로 다뤄졌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너무 짧아 깊이 있는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게 훈련이 잘 안 되어있어요.
  괴테는 “감정의 반향 없는 객관적인 색채란 없다”고 했습니다. 서 작가의 작품에서 색채가 갖는 위력은 어느 정도일까요?
  저도 처음에는 원색을 즐겨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서야 의식적으로 원색을 쓰게 됐지요. 학부 시절 단순히 ‘그림 그린다’는 생각만 했는데 대학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됐어요. 그때 굉장히 당황했는데 결국 서양화를 선택했지요. 제도를 원망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당시 제가 시류에 쏠려 선택한 것은 아닌가 하는 자책의 시기를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가졌어요. 그래서 어떤 동양화, 산수화를 보면 좋은 그림 같긴 한데 서양화를 선택했기 때문에 깊이 있게 들여다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쪽으로 관심을 가지다보니까 서양화는 색채가 활발하게 사용되고 동양화는 수묵을 사용하는 현격한 차이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제가 동양화에 대한 지식이 얕아서 그랬을 겁니다. 동양에도 수묵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색채를 화려하게 사용한 불교미술, 원시미술, 동굴미술도 있지요. 저는 그렇게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우선 동양화라하면 수묵화만 생각했어요. 고려시대에 불화도 있었는데 말이죠. 이러한 반성의 소리도 일부 비평가들이 언급했어요. 그때 저도 동의했고, 근본적으로 왜 서양 사람들은 현대회화에서 색채를 다양하게 쓰는데 우리는 왜 거기에 소극적이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색채를 사용하게 되었죠. 사실 저 자신도 색 쓰는 것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는데 색채를 잘 쓰는 것보다, 일단 저의 색채에 대한 생각을 바꿔보고 싶었습니다. 예를 들면 원근법, 공기원근법에서 색을 섞어서 부드러운 색을 만들어 공간감을 재현하는 방법을 쓸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내가 가진 생각을 파괴하기 위해 원색을 쓰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또 이것을 반성해요. 어떤 때는 무채색을 가지고 정신의 깊은 면을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또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기도 해서 한 번씩 시도는 해보는데 왠지 마음에 안들어 다시 원색을 쓰게 됩니다. 그래도 그런 것을 조금씩 더 도입해보고 싶어요.
  당시 안평대군은 정치, 예술, 문화 영역에서 미묘한 위치에 있었던 것 같은데, 안평대군을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또 기린교를 안평대군의 집터로 보는 근거는 무엇인지요? 안평대군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요?
  제가 단종과 연관된 그림을 그리면서, 조선 초기 중요한 그림 중 하나인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관심이 갔습니다. 그 당시 정치 상황과 맞물린 굉장히 중요한 작품이지요. 그런데 그것과 연관된 안견과 안평대군에 대한 자료가 매우 빈약하더군요. 그런 자료를 찾는 방법을 잘 모르기도 했지만 안평대군에 대한 많은 기록이 세조에 의해서 철저하게 지워졌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안견의 생애도 세조와 안평대군의 관계로 봤을 때 결코 순탄치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2년 전 외교관을 지내신 김경임이라는 분이《  몽유도원도를 찾아서》라는 책을 내신 것을 매체를 통해 접하고 그 책을 읽게 됐지요. 읽어보니 제가 궁금해 하던 부분들을 그분이 찾아서 추적하셨더라고요. 그 책에 기술된 내용이 모두 사실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최근 단종과 연관되어 가장 흥미롭게 본 내용이기도 합니다.
  단종은 운명을 넘어 신화화되었다고 합니다. 단종의 행적이 신화화된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요?
서  방금 제가 한 말과 좀 모순되지만 사람의 삶이 결국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대상으로서의 사람은 희극적인 요소를 가졌다고 보기에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누군가를 바라보고 살아가면서 그것을 통해 자신의 어떤 면을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과 살면서 본능적으로 다른 이에게 공감하기도 하고. 그게 인간의 본성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단종이 신화화해 나가는 과정을 보면 왕이었다가 비참하게 죽음으로 가지요. 그 과정이 독특한 하나의 사건 모델로서 기억되거든요. 영월과 그 일대에 있는 단종의 흔적을 보면 사당과 산신각, 위패를 모신 허술한 슬레이트 구조물 등이 있어요. 또한 산신령으로서 단종이 모셔진 곳도 있지요. 또 답사를 가서 보니 음력 정월 초하루에 마을 사람들이 단종을 모시는 제사를 지내더군요. 그분들에 따르면 예전에 새마을운동을 하던 시절 정부의 철거 지시도 거부하고 그것을 지켰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분들이 자신보다 더 힘들게 살다 간 단종의 삶에 의탁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뿐만 아니라 이러한 내용을 문학작품, 혹은 그림으로 남기거나 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존재가치가 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이들에 대한 각각의 평가는 어떤지 궁금합니다. 세조를 비롯해, 김시습, 김종서, 현실적이기도 했던 신숙주, 애잔한 삶을 살다간 정순왕후 등 말이에요.
신화화 되는 단종
  깁시습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중 하나이지요. 게다가 뛰어난 문장가이며, 특히 지식을 실천한 결단력이 강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유교, 불교, 선교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시인으로서, 문장가로서, 또한 문인으로서 파악해보고 싶은 인물입니다. 세조도 결단력에는, 약간 망설이는 태도를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혁명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결단력이 있는 인물로 보입니다. 혁명이란 인간이 동물적 감각으로 일으킨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 역사에서 살아남은 사람이죠.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도 제어하지 못하는 권력에 휘둘렸다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단종을 죽였지만 안평에 대한 질투심과 맞물린 감도 없지 않은데다 사안을 좀 회유하려 했던 의도도 보이거든요.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선의 없는 용기가 얼마나 큰 화를 불러오는지를 내다보는 혜안은 갖지 못한 인물이 아닌가 합니다. 또 김종서는 일반에게는 무인적 기질이 다분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뛰어난 문인이기도 하죠. 역시 시대 흐름에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신숙주는 제가 말하기 가장 망설여지는데 정말 재능도 많고 그에 비례해 높은 지식을 쌓았지만 좋은 의지를 가지진 못한 것 같아요. 의롭지 못하다는 말이지요. 현실에서 이런 형의 인간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죠. 마지막으로 정순왕후는 기록이 일천해서 뭐라 하긴 그렇지만 성품이 진중해서 굉장히 신중하게 처신했다고 보입니다. 남아 있는 기록이 매우 호의적이예요.
  우리는 왕왕 현실에 매몰되어 역사의식이 없이 살아갑니다. 서 작가의 역사화는 관람객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요?
  여러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겠지요. 저는 한국에 역사화가 무척 필요하다고 봅니다.
현대미술에서 역사화는 주류가 아니지만 한국이 가진 역사는 이미지로 표현될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주제로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창조적 생각일 수가 있어요. 조선시대에 권력의 지각변동을 가져온 사건이 왜 이미지로 나오지 않았을까를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어요.
  그렇게 보면 6·25전쟁에 대한 그림도 별로 없습니다. 그런 처절한 사건에 대한 기억을 잊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 다음을 묻죠. 한국미의 본원, 본질은 어디에 있다고 보며, 그런 미감이 이번 단종실록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다고 보시는지요?
  이런 내용을 정리한 적은 없지만 이런 느낌은 있습니다. 외국에 갔다가 돌아와 제가 사는 양평 산골을 걸으면, 땅, 하늘, 주변 환경, 자연이 내 몸을 당기는 것 같은 느낌, 어떤 애정을 느끼게 됩니다. 자연에 관심을 갖다보면 당연히 자연은 우리 몸속에서 느껴지고 그것이 작업으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특징으로 생각한다면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아기자기하고 변화가 많은 것이 우리지형이고 금수강산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고 느끼고 있어요. 더 나아가 자연 환경에 과거로부터 압축되어온 인간, 우리들의 생각이 종교적인, 특히 불교 쪽에서 갖고 있는 인자함이나 자애정신이 예전에는 소극적이라고 생각하여 자연주의적으로 빠지는 것을 경계했는데, 이제 그런 부분을 극복해야한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그림 속에서 그런 생각이 배어나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참 절실한 내면의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혹시 서 작가의 그림이 세계화의 길을 열어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윤희 큐레이터에게 여쭙고 싶은 내용입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그렇게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을까요?(웃음) 최근 한 10년 사이에 외국에서 전시를 한 경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올바르게 주어진 기회들은 아니었어요. 저는 외국에서 공부하지 않았고 주로 국내에서 활동하면서 전시를 열었지만, 서구나 다른 나라에서 금방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만큼의 사람들이 와서 보지도 않았어요. 우연한 기회에 전시를 하였지만 특히 이런 역사 소재 그림은 한두 번 보고 느낌이 와닿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외국인이 이해하려면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사전에 기초적인 소통이 없이 그림만 봤을 땐 추상적인 느낌을 받지만 서술적인 면에서는 전달이 잘 되지 않고 스토리를 얘기하면 아주 단순하게 이해하는 점에서, 아 이건 힘들다 생각했습니다. 방법이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내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중간 매체를 개발하지 못했다는 점도 걸리고요. 외국인에게 스토리를 이야기했을 때, 자기네 나라에서 있었던 일을 환기해서 이해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도 우리나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공감각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전달방법은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갤러리에서도, 저도 많은 글을 써놓았더니 그 글을 통해서 이해하려는 사람도 많이 있고 또 공감했거든요. 마찬가지로, 외국에서도 그러한 방법을 시도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굉장히 어렵습니다. 한두 번의 번역과 또 그것을 보여주려는 사람이 중간에서 어떤 방법을 개발해서 전달하느냐에 따라서 결과에 큰 차이가 나거든요. 그림을 보는 사람 또한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지식 한도에서 보려고 할 때, 그 접합점을 찾아내는 것이 또 하나의 숙제입니다. 그래서 노력하고 있지만 저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힘든 점이 있다는 것.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단종 문제에서는 조금 더 어려운 점이 있고, 자칫 제가 속한 지역에 대한 호기심만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조심스럽습니다.
  단종의 복권을 보면서 역사의 정의를 믿어도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단순히 비극을 통해 카타르시스에 이르면 되는 것일까요?
  정의라는 형태가 어떻게 드러나느냐에 대한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요. 특히 복권은 당사자가 죽어 없어졌기에 현실적으로 다시 돌이킬 수는 없지만, 인간의 본질 속에 과거, 역사를 돌아보는 지혜가 있다고 봅니다. 단종의 복위는 시간이 지나면서 형태가 갖춰지지만 사실 죽은 직후부터 그러한 운동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사육신조차 그게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전혀 몰랐던 것 같아요. 그런데 1, 2년 후에 세조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고려할 때 정의구현의 힘 같은 것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서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거대한 역사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어요. 시공간을 넘나들고 문학과 역사와 미술을 아우르며, 우리의 영감과 의식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작품 제작에 대한 작가 기록에서도 문장력이 힘차고 감성과 현장감이 넘칩니다. 이번 대담에서도 작가로서의 문제의식을 잘 정리해 주시어, 얘기 자체가 매우 즐거웠습니다. 다시 한 번 전시 축하드립니다.
정리・황석권 수석기자, 김선영 객원기자

(사진 맨 왼쪽) 캔버스에 아크릴 181.5×227cm 2014 (사진 맨 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

<송씨 부인>(사진 맨 왼쪽) 캔버스에 아크릴 181.5×227cm 2014 <왕과 신하들>(사진 맨 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 162×130.5cm 2014

 

 캔버스에 아크릴 300×500cm 2014

<백성들의 생각_정순왕후> 캔버스에 아크릴 300×500cm 2014

 

서용선(왼쪽)은 서울대 회화과와 동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2009)에 선정됐다. 서울대 미술대학 서양화과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양평에서 작업하고 있다.

이석우 겸재정선기념관 관장은 경희대 사학과 교수, 대학 사학회장을 역임하고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림, 역사가 쓴 자서전》, 《역사의 들길에서 내가 만난 화가들-상, 하》 등 다수의 저서와 역서, 논문이 있다.

[Exhibition & Theme] 밖으로 나온 은둔의 문화재 왕국 간송미술관

봄과 가을 정기전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었던 간송미술관 소장품이 76년 만에 처음으로 바깥 나들이를 했다. 얼마 전 화제 속에 개관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는 <간송문화전(澗松文華展)>이 바로 그것. 제1부 ‘간송전형필’(3.21~6.15)과 제2부 ‘보화각’(7.2~9.28)으로 나뉘어 열리는 이번 전시는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 선생이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를 지키려 고군분투해 모은 소중한 소장품 중 대표작을 볼 수 있는 기회다. 간송의 평생 업적이 모여 있는 전시장을 거닐어 본다.

밖으로 나온 은둔의 문화재 왕국 간송미술관

김태식  연합뉴스 문화부 기자

“평일인데도 관람객이 많네요?”
“예, 하루 평균 2000명 정도입니다.”
“관람료는 성인 한 사람 기준 8000원이지요? 유료 관람객 비율은 얼마인가요?”
“중고생은 4000원입니다. 99% 유료라고 보시면 됩니다. 우린 초대권을 안 뿌려요.”
<간송문화전>이 개막한 지 약 한 달 만인 4월 17일, 평일인 목요일 오후임에도 최근 서울시가 옛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으리으리하게 개관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한쪽 1485㎡(약 450평)의 제법 넓은 전시실엔 관람객이 적지 않았다. 아마도 간송 (澗松)이라는 이름과 그의 컬렉션이 토대를 이루는 간송미술관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반영하는 현상이 아닌가 싶었다. 취재차 현장을 둘러보고 관련 사진도 촬영하고 싶다는 전갈을 미리 넣고 들르니, 간송씨앤디(C&D) 큐레이터가 나를 맞았다. 그에게 관람객 현황을 알아보고는 운영 현황을 물어보았다. 그의 이야기인즉 DDP가 필요에 따라 간송 측에 제안을 해서 이번 전시가 이뤄졌으므로 별도 임대료나 대관료는 없다고 한다. 또, 간송이 DDP 배움터 내 디자인박물관(2층)을 3년간 사용하기로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대신 전시실 운영 전반은 간송 측에서 맡아 한다고 했다. 전시장 코너 곳곳에 배치된 진행요원들도 간송이 고용한다고 했다. 내가 들렀을 때 얼추 헤아려 보니 이런 진행요원만도 스무 명은 족히 돼 보였다. 적지 않은 운영비를 부담하는 셈인데, 입장료 수입과 도록 판매 대금으로 충당하긴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관전 치고는 ‘간송문화(澗松文華)’라는 다소 밋밋한 타이틀을 내건 이번 전시는 간송미술관이 근자에 보인 행보, 그리고 향후에 보일 행보와 관련해 여러모로 주목받는다. 그것은 무엇보다 ‘은둔의 문화재 왕국’이라 할 만한 신비주의 행보를 벗어버리려는 시금석으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호암미술관, 호림박물관과 더불어 국내 3대 사립박물관으로 꼽히는 간송미술관으로서는 1966년 개관 이래 이번 전시가 사상 첫 외부 나들이다. 물론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외부 기관이 간송 소장품을 대여받아 소개한 전시는 자주 이뤄졌다. 하지만 간송만을 단독으로 내건 외부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미술관 운영 주체로 지난해 8월에 출범한 간송미술재단은 이번 전시회 개최에 즈음해 언론사에 배포한 관련 보도자료에서 “(DDP 설립 주체인) 서울시가 우수한 콘텐츠를 확보하려는 의지가 강했고, 간송미술문화재단 역시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현대적 전시장소를 강력히 바랐다”면서 이런 자리가 “소프트웨어 파워와 하드웨어 파워의 절묘한 만남”이라고 자평했다. 그러면서 재단은 “이번 전시를 계기로 시대적 조류에 맞추어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다양한 기획전을 DDP 디자인박물관에서 계속해서 진행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앞으로 대중과 만나는 기회를 넓히겠다는 뜻이라 하겠다.
이번 전시가 어떤 과정을 거쳐 준비되었는지 나로서는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그 전조(前兆)라고 할 만한 징후는 여러 곳에서 감지됐다. 그런 움직임이 본격화한 신호탄이 지난해 재단 설립이다. 그 이전 미술관은 간송의 차남 전성우와 삼남 전영우 씨가 등록 없이 운영한 임시 조직에 지나지 않았다. 재단 설립을 발판으로 그 해 12월에 충남 부여에 소재하는 문화재청 산하 한국전통문화대학교와 전통문화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대학원 전문연구과정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이 협약에 따라 전통문화 관련 국내외 연구기관이나 산업체 등지에서 6개월 이상 전문연수를 해야 졸업논문 청구 자격을 부여받는 이 대학 산하 전문대학원인 문화유산융합대학원 재학생들은 간송미술관에서 그런 자격을 충족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나아가 간송미술관은 지난 1월에 네이버와 협약을 맺고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을 비롯한 소장 중요문화재를 온라인으로 공개하기 시작했다. 종래와 비교할 때 가히 광폭 행보라 할 만하다. 이번 DDP 전시도 그 일환이다.
간송미술관은 그 컬렉션 토대가 된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이 타계한 뒤인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 부설 미술관으로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서 시작을 알렸다. 주축 건물은 간송이 1938년에 지은 보화각(寶華閣)이다. 미술관은 발족 이후 1971년 봄 <겸재전(謙齋展)>을 시작으로 이 보화각에서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각각 2주 가량 전시회를 열었다. 이것이 미술관이 대중과 만나는 유일한 통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정기전은 관람료가 없다는 점에서 국내 사립박물관계에서는 신선한 시도였고, 무엇보다 사유재산임이 분명한 소장 문화재를 대중에게 공개한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사회적 기부’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립박물관이라고 해도《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한 소장 국보만 12점에 달하는 곳이 상설전시실을 운영하지 않고(혹은 못하고) 극히 제한된 시기에 소장품 일부를 공개함으로써 그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송미술관은 신비에 싸인 곳이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심어준 것도 사실이다. 나는 간송미술관의 정기 기획전 방식을 보면서 매양 그 모델이 일본 나라(奈良)국립박물관에서 매년 개최되는 정창원(正倉院) 특별전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주지하듯이 정창원은 일본 고대 천황가의 보물창고로서, 그것을 관리하는 궁내청은 매년 가을 한 차례씩 2주가량 나라박물관에서 기획전을 열어 일반에 공개한다. 이와 같은 방식의 전시 역시 정창원과 천황가에 대한 신비감을 높이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그렇다고 나는 간송미술관이 반드시 일부러 신비주의를 채택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외부에서는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더불어 그 컬렉션 창립자인 간송에 대한 대중 사회 전반의 이미지도 간송미술관에 대한 신비감을 더하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간송이라고 하면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반출되는 우리 문화재를 지켰고, 사재를 털어 반출된 문화재를 사서 들여온 문화재 수호자로서의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다. 이제는 중학교 1학년이 된 내 아들이 보는 위인전에도 간송이 실려 있을 정도이니 문화재 분야에서 이만한 대중성을 확보한 인물은 없다고 할 만하다. 요컨대 한국사회가 요구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표상으로서 간송은 우뚝 선 것이다.
나아가 간송미술관을 발화점으로 삼고 ‘진경산수화’라는 화살을 장착한 ‘간송학파’라는 용어는 특히 사학계와 미술사학계를 중심으로 하는 지식인 사회에서 간송의 이름을 우뚝 서게 하는 데 일조했다. 겸재 정선을 염두에 둔 진경산수화라는 용어는 이미 미술사학계를 평정하고 그 영역을 더욱 넓혀 일반화했거니와, 그에 더불어 우암 송시열을 필두로 하는 노론 중심주의 역사관을 견지하는 간송학파는 기존 남인 중심의 이른바 주류적인 역사관과 쟁투하면서 각종 논쟁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간송과 간송미술관의 명성을 더욱 높이는 촉매제가 되곤 한다.

간송,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문화재 현황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간송 사후인 1960년대에《고 간송 전형필 수집 서화목록(故澗松全鎣弼蒐集書畵目錄)》 상·하권을 발행하고, 곧이어 소장품 중에서도 한적(漢籍) 2000여 질을 정리한《간송문고 한적목록(澗松文庫漢籍目錄)》을 간행했지만, 이것이 전모는 아니다. 그 정확한 컬렉션 규모는 공개된 적이 없다. 사립박물관에 모든 재산목록 현황을 공개하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다. 하지만 기존에 공개된 컬렉션의 양과 질이 이미 막대한 상황에서 간송미술관 수장고에는 공개되지 않은 더 많은 보물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다.
여하튼 여러모로 묘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밖에 없는 간송미술관이 마침내 은둔 혹은 신비의 이미지를 벗고 밖으로 나선 신호탄을 쏘아올린 자리가 이번 DDP 전시라고 할 수 있겠다. 이번 <간송문화전>은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라는 부제가 암시하듯이 간송이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었다. 간송미술관 측은 이를 위해 이번 전시를 2부로 나누었다고 밝혔다. 전시장을 두 부분으로 나눈 것이 아니라 순차 전시 방식을 택했다. 즉, 오는 6월 15일까지는 ‘간송 전형필’이라는 이름 아래 “주요 수집품을 중심으로 간송이 우리 문화재를 모은 이야기를 스토리로 풀어내는 전시”로 꾸미고, 7월 2일부터 9월 28일까지는 ‘보화각’이라는 타이틀 아래 “간송이 모은 미술품 중 백미라 할 수 있는 주요 소장품들을 장르별로 나누어 전시하는 명품전”으로 꾸민다. 이번 1부 전시에는《훈민정음 해례본》을 필두로 현재 심사정의 <촉잔도권>이 전면을 펼쳐 공개 중이며, 혜원 신윤복의《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에 수록된 풍속화 30점도 처음으로 전면 공개를 한다. 또한 1936년, 간송이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국제변호사로 활동하던 영국인 존 개스비(Sir John Gadsby)에게서 사들인 국보 도자기들인 <청자기린유개향로>와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 <청자오리형연적>,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 등도 전시한다.
이처럼 이 전시는 간송미술관의 첫 외부 나들이라는 의미 외에도 간송미술관 명품들을 한자리에 모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깊다. 더불어 전면 전시가 힘들었던 화첩들을 온전하게 펼쳐놓았다는 점은 신선한 대목이다. 반면 아쉬운 대목도 적지 않다. 스토리텔링을 기획했다고 하지만, 그런 점이 전시장에서는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박물관 전시에는 어울리지 않는 조명을 그대로 사용한 점은 향후 전시에서 대폭 손보았으면 한다. 이번 전시 소장품은 대부분이 회화와 도자기류다. 그에 맞게 조명을 해야 각각의 문화재가 제 가치를 발할 것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현재의 조명은 대낮과도 같다. 가뜩이나 백색 계통의 DDP 내부 환경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반사가 극심해 관람과 감상을 방해한다. 이런 점들에 대한 개선을 기대해 본다.●

심사정  종이에 담채 58×818cm 1768 간송은 훼손이 심했던 이 그림을 당시 돈 5000원에 구입하였고 수리비로 6000원을 지불하였다

심사정 <촉잔도권(蜀棧圖卷)> 종이에 담채 58×818cm 1768 간송은 훼손이 심했던 이 그림을 당시 돈 5000원에 구입하였고 수리비로 6000원을 지불하였다

장승업    (왼쪽부터) 38×159.5cm(각)

장승업 <호치비주(豪馳飛走)> <몽니정관(蒙泥靜觀)> <종미환행(從尾環幸)> <어자조련(御者調練)>(왼쪽부터) 38×159.5cm(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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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om in  간송미술관의 옛이름 보화각(葆華閣)

“간송미술관 소장품, 76년만의 외출”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이하 ‘DDP’)가 최근 개관했다. 외관이 마치 우주선을 닮았다고 해 화제를 모은 이 건물을 더욱 이슈의 중심에 서게 한 전시가 열리고 있으니, 바로 <간송문화전>이다.
알려진 바대로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 1962)은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 약탈과 말살에 맞서 이를 지켜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 전영기(全泳基)는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을 지내고 가업인 미곡상을 운영한 거상이었다. 휘문고보와 일본 와세다대 법과를 졸업한 전형필은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춘곡 고희동, 김용진 등과 교유했다. 당시 우리 문화재는 약탈과 밀거래의 대상이었는데 도굴된 문화재임을 공공연히 밝히며 거래되는 경우까지 있었다. 간송은 이에 맞서 우리 문화재 유물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전형필은 1938년 성북동 북단장에 보화각(葆華閣)을 건립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이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보화각은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란 뜻으로 그 설립은 여러 의미를 지닌다. 당시 사립박물관은 조선의 생활자기를 수집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세운 조선민족미술관이 유일하였다. 보화각은 소장품의 질과 수에 있어서 최고로 평가받았다. 또한 보화각은 삼국시대부터 근·현대까지의 우리나라 고미술이 보존되고 연구된 고미술사학의 중심지였다. 또한 오세창, 고희동, 삼불 김원룡, 혜곡 최순우, 수묵 진홍섭, 초우 황수영, 박길룡, 청전 이상범 등 우리나라 근대기에 문화·예술계의 중요인사들이 모여서 사상과 세계관을 교유하던 곳이기도 했다. 1962년 간송이 타계하자 그 후손과 후학들은 1966년 북단장에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 보화각을 간송미술관으로 개명하고 봄, 가을 정기전을 개최하면서 《간송문화(澗松文華)》를 펴내고 있다.
DDP에서 열리는 <간송문화전> 2부의 타이틀은 바로 ‘보화각’이다. 7월 2일부터 9월 28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에는 불상, 도자, 회화, 서예, 전적 등 분야별로 간송미술관의 베스트 컬렉션이 선보인다. 불교미술로 <금동삼존불감>,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     <금동여래입상> 등 7세기 불교미술을 일견할 수 있는 유물이, 또한 조선 초기 문법서 《동국정운》과 거문고 악보인 《금보》 등의 진적이 전시되어 당시의 문화정책과 사상을 살펴보는 자리가 마련될 예정이다. 회화로는 정선의 <풍악내산총람>, 《경교명승첩》 속 <압구정>, 김홍도의 <황묘농접>, 김득신의 <야묘도추>, 그리고 신윤복의 <미인도> 등이 선보일 예정이다. 서예는 안평대군, 한호, 김정희 등의 글씨가 출품된다.

황석권 수석기자

이마동이 1956년 보성학교 개교 50주년을 기념해 그린

이마동이 1956년 보성학교 개교 50주년을 기념해 그린 <간송 전형필 초상>

 왼쪽·피난 중(1951)에도 자녀를 데리고 석굴암을 답사했다. 앞줄 오른쪽부터 전영우, 간송, 뒷줄 오른쪽부터 전성우, 서원출 보성고 교장, 전성우 친구

왼쪽·피난 중(1951)에도 자녀를 데리고 석굴암을 답사했다. 앞줄 오른쪽부터 전영우, 간송, 뒷줄 오른쪽부터 전성우, 서원출 보성고 교장, 전성우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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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간송미술관 관장 전영우

“간송은 한마디로 ‘정말 착한 분’”

_MG_1282소장품이 간송미술관을 떠나 열리는 최초의 전시다.  매년 봄과 가을 정기전을 통해 43년 동안 86회의 전시를 열었다. 처음으로 외부에서 여는 전시라 크게 이슈화된 것 같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이하  ‘DDP’)라는 초현대식 건축물과 전통 유물이 조우해 어떻게 비칠지 많은 고민을 했다.
간송미술관과 DDP에서 여는 전시를 비교한다면?  그간 간송미술관이 너무 비좁아 관람객이 길게 줄을 서서 전시를 봐야 했다. 관람객에게 죄송하고 뭔가 이런 상황을 개선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DDP가 건립되어 전시를 열게 됐다. 전시장이 비좁아 관객들이 입장을 하고서도 어깨너머로 유물을 보지 않게 되어 좋다.(웃음)
간송 전형필 선생을 지근거리에서 봐오셨던 분으로서 “간송께서는 이런 분이셨다”는 한 말씀 부탁드린다.  돌아가실 때까지 옆에서 모시고 살았으니. 두 가지 측면에서 간송을 말하고 싶다. 인간 간송, 아버지로서 간송. 인간 간송은 70여 년을 살면서 가장 겸손하고 검소하고 한마디로 정말 ‘착한’ 분이셨다. 아버지로서는 옛날부터 부모님을 표현하는 말 중 ‘엄부자모(嚴父慈母)’가 있는데 우리 집은 ‘자부엄모(慈父嚴母)’라 할만하다.(웃음) 아버님은 평생 매 한 번 드신 적이 없었으니. 또 ‘내유외강(內柔外剛)’이란 말을 쓰는데 간송 선생은 ‘외유내유(外柔內柔)’였다.(웃음) 겉도 부드러우셨지만 속도 부드러우신 분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격동의 근대화를 거친 이로서는 갖기 힘든 성품을 지니셨다.
간송의 의외의 모습을 본 적이 없나?  조용하고 올곧은 사람도 과음으로 실수를 하고 간혹 일탈스러운 행동을 하지만 간송은 한 번도 그러시지 않았다. 재밌는 일화가 있다. 간송은 영화를 좋아하셨다. 당시 극장이라는 곳이 지정좌석이 없었는데 줄을 서서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보는 형식이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섰는데 저녁이 되도록 오시지 않았다. 어찌된 일이냐고 물으니 맨 앞자리에서 영화를 보시다가 다음 회에 몰려든 인파를 미안해서 헤치지 못하고 3회를 보셨단다.(웃음) 그게 간송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일화다. 일전에 어느 인터뷰에도 밝혔지만 간송은 좋은 도자기를 담는 오동나무 상자 같은 분이셨다. 웬만한 자기 보관함이 대부분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것은 무르기에 쉽게 상처가 나지만 충격을 흡수하고 방충작용을 해서다. 이렇듯 귀중한 우리 미술품을 곱게 간직한 간송은 오동나무 상자와 같다고 생각한다.
간송미술관은 특히 학술기능이 특화되어 있다고 본다. 이른바 ‘간송학파’가 그 중심이 되고 있다. 특히 전시 때마다 펴내는 《간송문화》는 미술사 연구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  어느 미술관이라고 학술기능의 중요성을 모르겠는가? 그런데 우리 미술관의 자랑인 학술적인 성과는 아이러니하게도 ‘가난해서’라고 생각한다.(웃음) 우리는 모든 일을 우리 힘으로 하다보니 식구 같은 연구위원들의 자생력이 생겨 우리 학예연구실의 학적 토양을 비옥하게 하지 않았나 한다. 적당히 가난해야 좋은 작업이 나오는 것과 같다.(웃음) 미술관의 적당한 궁핍이 오히려 학문적 순결과 학구적인 분위기를 형성해 곁길로 가지 않고 다소 엉뚱한 결과를 낳았다고 본다.(웃음)
그간 전시 중 기억에 남는 전시가 있는가?  한 번도 거르지 않은 정기전을 준비하면서 힘들고 어렵고 시행착오도 겪고 속상한 일도 있었다. 정말 전시가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오듯” 했다. 기억에 남은 전시는 1971년 가을 제1회 전시로 열렸던 <겸재전>이다. 《간송문화》를 제작하려 인쇄소에서 밤을 새던 일도 기억난다. 그런데 첫 전시는 일반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애호가나 학문을 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당시 미술사에 대한 저변이 없었으니깐. 과연 몇이나 올까 했다. 그게 엊그제 같은데 관람객이 입장하려 100~200미터 줄을 서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이다. 또한 2012년 <간송 50주기 추념전>을 열었는데 감개가 무량했다. 간송 임종 후 반세기가 흘렀다니! 간송 50주기라는 타이틀에서 가슴이 미어졌다.
간송미술관 관장으로서 간송미술관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간송미술관은 ‘간송을 닮은 미술관’이라는 것. 간송은 남에게 드러내거나 자랑하기 좋아하는 성품이 아니셨다. 욕심을 드러내 남에게 보여주려는 미술관이 아니다. 조용하게 우리 민족미술문화를 사랑하는 여러분께 다소곳이 다가서는 문화공간이다.
그간 간송미술관은 소유주가 드러나지 않는 행보를 보였다. 간송 선생과 유족의 의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라 하겠다.  간송미술관은 간송의 DNA를 물려받아 여유롭고 호화로운 분위기는 바라지도 않고 향유하지도 않는다. 다만 쾌적하게 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데. 지나고 나니 이것도 하나의 개성처럼 되어버렸다. 그런데 간송이 살아계셨으면 아마 이보다 더하면 더했을 것이다.(웃음)
개인적으로 유독 끌리는 소장품이 있다면 무엇인가?  흔히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짓궂게 하나만 골라라 하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가 돼서가 아니라 간송도 큰 애정을 갖고 평생을 아끼셨고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이 깃들어 있는, 세계 어느 문자보다 과학적인 한글의 창제 정신을 담은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간송컬렉션의 백미라 할 만하다. 사실 DDP 전시장을 설계할 때 맨 처음 입구에 들어서면 《훈민정음 해례본》을 만나도록 했었지만 사정상 변경했다.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다. 후학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학생에게 늘 하는 말이 있다. 어떤 전공이든 조형예술을 업으로 삼고 평생 그것에 임해 살겠다고 작정을 했다면 끊임없이 작품을 접하라고. 항상 그것을 염두에 두는 생활패턴을 가져라. 그러다보면 무엇인가 보인다. 박물관과 미술관에 자주 가라. 무엇인가 눈에 보면 느끼게 되고 애정이 생기고 일상에서 표현이 되는 법이다.
이번 전시를 간송미술관의 대외 행보 변화의 신호로 봐도 좋겠는가?  미술관 공간이 협소하고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다는 이유로 그렇게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간송미술관의 정기전은 계속된다. DDP전시는 대중적인, 대중친화적인 전시, 간송컬렉션 중에서 잘 알려지고 인구에 회자되는 유물 위주로 개최하고 간송미술관에서는 학문적인 체계를 이어가는 전시를 개최할까 한다. 지역분관도 생각하고 있다. 많은 제안이 있었고. 진행 중이지만 확정된 것은 없다.

황석권 수석기자

전영우 관장은 간송의 3남으로 상명대 미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간송미술관 관장직을 맡고 있다.

[작가리뷰]오치균

오치균의 그림은 서정적이다. 질퍽한 물감의 물성이 살아있는 듯 꿈틀대는 화면은 따뜻하고 감미롭다. 그것이 풍경이든 정물이든 마찬가지다. 거대 도시 뉴욕의 마천루와 뒷골목,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는 뉴멕시코 산타페와 탄가루로 뒤덮인 탄광촌 사북의 풍경이 그렇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주황색 열매가 별자리처럼 매달린 감나무는 또 어떤가?
오치균은 비로소 말한다. 지금까지 자신이 천착했던 회화의 근원은 바로 ‘빛’이었음을 다시한번 깨닫게 됐노라고.
6월 11일부터 25일까지 인사동 노화랑에서 열리는 개인전에서 오치균의 최근작을 볼 수 있다. 자연-야외에서의 빛과는 다르게 실내에서 포착된 빛과 색감의 향연은 오치균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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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프> 캔버스에 아크릴 50×73cm 2013

화가 오치균에게 그림이란 무엇일까?

이은주  미술비평

그의 그림은 늘 두꺼운 물감 덩어리들이 얹히고 또 얹혀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붓이 아닌 손으로 찍어 바르는 화면기법은 오치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물론, 물감을 여러 겹 덧바르고, 거친 마띠에르 효과를 드러내는 작업은 익히 알려진 인상주의 화가들을 비롯하여, 국내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작가에게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오치균의 화면은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평면에 재현하되, 손가락 끝으로 느끼는 감각은 3차원의 대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손가락으로 물감을 찍어 바르는 까닭에 그의 작품에서는 사물과 사물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다. 흔들리는 풍경 속에서도, 정지된 사물들 사이에서도 명확한 경계가 보이지 않는다. 손가락은 날카롭거나 매끈한 작업매체가 되지 못한다. 빛이 들추어내는 각각의 색 덩어리들에 의해서 형태가 드러날 뿐이다.
오치균의 작품들은 눈앞에 보이는 사물들을 재현하고 있지만, 시각보다는 촉각이 강하게 작용한다. 그것은 재료를 다루는 그의 방법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사물을 어루만지면서 느끼게 되는 감촉을 손가락 끝에 담아 그대로 캔버스 위에 옮겨놓는 행위이다. 손에 전해지는 촉감을 그대로 재현하다 보니, 사물의 고유한 성질이 그대로 화면에 드러난다.
<뉴욕> 시리즈의 다양한 작품들이나, <사북> 풍경, <감> 시리즈, 이번 노화랑 전시에서 공개된 <빛>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들에서는 두꺼운 물감 덩어리들이 화면을 구성한다. 그런데 그의 작품 하나하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품 속에서 꿈틀거리는 물감덩어리들은 모두 같은 표정이 아니다. 1986년 뉴욕생활이 시작되면서 뉴욕의 다양한 표정들을 담은 <뉴욕>시리즈 작품들-눈 내리는 겨울 풍경, 회색도시의 모습들, 뉴욕의 사람들-모두가 각각 다른 표정의 마티에르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감> 시리즈의 작품에서는 유난히도 푸른 늦가을, 하늘빛과 대조를 이루는 붉게 물든 감과 그 감들을 매달고 있는 감나무의 꿈틀거림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마치 용틀임을 하듯 굽이굽이 뻗은 가지들, 여기저기 갈라진 두터운 나무껍질로 덮인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20대 시절, 난 이른 아침 기차를 타고 대전역에 내려 동학사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 동학사를 거쳐 계룡산을 넘어 갑사로 내려오는, 그런 여행을 몇 번 했었다. 특히 가을이 좋았다. 갑사 주변의 산과 들에는 감나무들이 즐비했는데, 잎을 모두 떨군 채 붉은 감들만 매달려 있는 풍경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갑사의 늦가을 정취는 아직도 내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오치균의 감나무를 보는 순간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근처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에도 그런 감나무가 많았었나 보다. 작가는 대상에 몰입하면서 그것을 어루만지듯 물감을 바른 손가락 끝에서 사물의 감촉이 느껴질 때 비로소 화면에서 손을 뗀다.
소설가 김훈의 글을 빌리자면, “연필로 글씨를 쓰는 나는 오치균의 손가락과 그의 손가락이 화폭에 남긴 흔적들에 각별한 친밀감을 느낀다. 연필로 쓰기는 몸으로 쓰기다 (중략) 오치균이 손가락으로 물감을 으깰 때 재료가 육체와 섞이는 그 확실한 행복감을 나는 짐작할 수 있다. 재료를 장악하고 그 재료를 육체화해서 재료를 마소처럼 부릴 수 있는 자만이 예술가인 것이다. 언어는 기호이고 또 개념인 것이어서, 나는 오치균이 색을 부리듯이 말을 부리지는 못한다. 그래서 나는 오치균의 손가락을 대책없이 부러워한다. 손가락으로 색을 바르는 행위는 세계의 사물성과의 불화일 터인데, 그는 그 불화의 흔적을 남기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 흔적들이 모여서, 시간의 지속성, 미래에 도래할 새롭고 낯선 색깔의 흐름을 보여줄 때 그의 화폭은 아름답고 강렬하다.” – 김훈 <무너져가는 것에서 빚어지는 새로운 것(2008)> 중에서

 캔버스에 아크릴 108×162cm 2014

<작업실> 캔버스에 아크릴 108×162cm 2014

빛은 곧 생명이다
오치균이 1980년대 후반부터 그린 뉴욕의 다양한 풍경들, 2000년대 초부터 그린 사북의 풍경들, 그리고 함께 그려온 감나무 시리즈의 작품들에는 항상 빛이 존재했다. 이것은 의도적이기 보다는 야외에서 태양광이 뿜어내는 자연스러운 빛이었으리라. 그 빛들은 각각의 대상이 가지고 있는 각기 다른 마티에르 기법과 결합되어 조명이 비추는 방향에 따라, 작품을 보는 시점에 따라 각기 다른 효과를 누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새롭게 선보인 작품에서는 소소한 대상 안에 자신의 강한 의지를, 놓치고 싶지 않은 한 줄기 희망을, 꺼지지 않는 영원한 빛을 표현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빛은 희망이고 염원이다. 빛은 우주 만물의 존재를 알리는 하나의 광선이고, 생명체들이 살아가게 하는 자양분이고, 각 사물에 고유의 색을 부여하는 물감 같은 존재이다.
“그동안 내 작품들 속에서 보여지는 빛이 의도된 것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작업을 하고 나면 항상 내 작품 속에서 상징 같은 것이 되어 있었죠. 그런데 이번 작품들에서의 ‘빛’은 나의 신체적 장애와 심리적 불안 속에서 나온 의도된 빛이예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촛불 작품을 봤어요. 촛불이라는 것은 희망과 염원을 담고 있죠. 하지만, 촛불은 작은 흔들림에도 꺼질 수 있는 아주 약하고 순간적인 존재예요. 그래서 나는 그것보다 강하고 영원한 빛을 생각했어요. 심지어 나의 생명이 다해도 남아 있을 수 있는 빛, 영원히 잡아둘 수 있는 빛, 그 안에 내 희망과 의지를 담고 싶었던 거죠.”
그 후 오치균은 작은 공간에 잡아둘 수 있는 빛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빛이 시간적, 공간적 영향력을 가진 자연의 빛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사라지지 않는 인공의 빛으로 영원을 바라는 것이다. 어쩌면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도 자신의 심리적, 신체적 간절함을 그대로 담아낸 작품들이라서 작가는 더욱 집착하고 매진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오치균의 작업에서 빛은 생명이다. 그것이 의도되었든 의도되지 않았든, 삶을 비추고 온기를 불어넣고 강한 에너지를 뿜어내야 할 생명인 것이다.
오치균 작업실의 작은 전시 공간에는 새롭게 제작된 10여 점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이제 그의 대상은 넓고 푸른 바깥 풍경에서 좁고 어두운 실내 풍경으로 옮겨져 왔다.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한 줌의 빛이 실내의 작은 사물을 감싸고 있거나, 좁은 방구석에서 어둠을 드러내고 있는 작은 실내등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런 소소한 소재의 작업들이 그동안 보여주었던 여러 시리즈 작업들을 접고 나온 전혀 새로운 작업은 아니다. 뉴욕 시리즈나 감나무, 사북 풍경들을 그렸을 때에도 그의 시선 한곳에서는 작은 사물들을 관찰하고 있었지만, 그 관심이 증폭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사람들은 오치균하면 감나무 작가로 기억해요. 하지만, 난 감나무만 그린 건 아닙니다. 보통 어떤 대상에 관심을 가지면 거기에 몰입하게 되지만, 너무 빠져든다 싶으면 손을 놔요. 한 가지만 계속 그리다 보면, 나중에는 작품을 찍어내듯 그릴까봐 두렵고, 또 다른 걸 그리기가 너무 힘들어져요. 그런데 감나무 그림은 그린 기간이 좀 길어졌어요. 한 4~5년 정도. 감나무 그림을 그리면서도 이것저것 관심가는 것들을 그렸는데, 사람들은 감나무만 기억해요. 그러다가 작년 전시를 마치고 나서 하반신 마비가 왔어요. 나 자신으로서는 견디기 힘들었고, 나의 생명이 다하는 건가 두려웠죠. 나는 계속 작업을 하고 싶고, 이렇게 살아있다고 외치고 싶은데, 작품을 할 수가 없었어요.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집 안에서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그 때 눈에 띈 것이 실내의 사물들이었어요.”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온 한줄기 빛, 그것조차 허락지 않을 때는 좁은 구석을 비추는 작은 전등 빛이 아마도 작가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빛을 받은 실내의 사물들에도 어김없이 작가의 손으로 문질러댄 물감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사물들 위에 쌓인 물감 덩어리들은 이전에 자연물들 위에 얹혀진 물감덩어리들과는 달리 사물의 단단함, 무정함, 절제된 느낌이 묻어난다. 이것은 그동안 관심을 가져오던 작은 사물들(그러나, 다른 작품들로 인해 관심을 받지 못했던)이 그의 삶과 맞닥뜨려 떨어진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의 작업에서 담아낸 빛은 바깥 풍경 속에서, 감나무 위의 붉은 감에 비추어진 따뜻하고 부서질 듯한 눈부신 자연광이었다. 그러나 이번 작품들에서 담아낸 빛은 인공적이고 의도적인 빛이다.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온 자연광도 그 작은 공간을 절대 떠날 것 같지 않은 확고한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으며, 그보다도 더 인위적인 전등의 불빛은 사람들의 시야를 벗어난 구석진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관심에서 멀어져가는 것들 모두 빛에 의해 다시 태어난다. 빛은 희망이고 생명이다. 빛은 우주이다.
영원히 꺼지지 않기를 바라는 작가의 이 소소한 빛들은 어쩌면 작가에게 실낱같은 하나의 희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빛을 비추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의지를 발산하고, 작가로서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의미가 담긴 빛이리라.●

오치균은 1956년 충남 대전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뉴욕 브루클린 컬리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5년 백악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뉴욕으로 건너가 1987년 소호 핀다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가나화랑, 부산 공간화랑, 갤러리 아트링크, 부산 도시갤러리, 갤러리 현대, 갤러리 H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캔버스에 아크릴 213×142cm 1993

<뉴욕> 캔버스에 아크릴 213×142cm 1993

 

[작가리뷰]유휴열

올해로 개관 10주년을 맞은 전북도립미술관에서 작가 유휴열의 대규모 개인전이 열렸다. <신명난 生/놀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4월 25일부터 6월 1일까지 열린 전시에는 1970년대 초기작부터 알루미늄을 이용한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40여 년을 헤아리는 작가의 작업 여정에서 엄선된 작품 120여 점이 선보였다. 회고전 성격의 이번 전시는 작가 유휴열이 몸담고 살아온 시간과 장소에 깃든 예술적 성취를 확인하는 기회였다.

(왼쪽) 캔버스에 아크릴 195×260cm 2001∼2002

<추어나 푸돗던고>(왼쪽) 캔버스에 아크릴 195×260cm 2001∼2002

예술이라는 놀이를 통한 삶의 관조와 유희

이태호  익산문화재단 사무국장

우리나라 명산 중 하나인 모악산자락 밑에 작업실을 마련해놓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선보이는 작가 유휴열은 전라북도를 대표하는 지역작가이자 예술가로서의 전형(典型)과 모범을 보이는 작가이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각종 미술실기대회를 휩쓸면서 두각을 나타낸 그가 중앙이 아닌 지역에서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면서 꾸준하게 창작의욕을 불사르고 있는 점도 대단하거니와 끊임없이 새롭고 다양한 변화와 실험을 거쳐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은 더욱더 커다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유휴열의 작품을 논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비단 방대한 양의 작품 숫자로부터 기인한 것만이 아니라 지난 50여 년 동안 그가 보여주었던 변화무쌍한 작품 성향 때문일 것이다. 필자가 알고 있는 유휴열은 타고난 재능과 예술가적인 기질, 그리고 여기에 성실함마저 겸비한 작가다. 작가는 모든 것을 작품으로 말한다. 그의 작품을 보면 그가 창작을 위해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1982년 전주 금하미술관에서 연 첫 개인전을 시발점으로 하여 1990년대 초반에 그가 보여주었던 독창적인 조형세계는 이미 많은 평론가와 이론가들에 의해 그 진가(眞價)를 인정받은 바 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서 안주하지 않았다. 작품이 변화무쌍하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깊은 반성과 성찰이 선행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유휴열 작품의 이런 변화무쌍함은 그의 예술가적인 기질뿐만이 아니라 전위적(前衛的)인 아방가르드(avant-garde) 정신과 더불어 실험정신으로부터 파생된 결과물이다. 삶과 창작에 대한 그의 열정은 고요한 수면을 견디지 못하고 끓어 넘치는 활화산과도 같다. 그의 작품에 보이는 강렬한 색채와 역동성, 독특한 마티에르는 작품에 대한 열정의 분출과 다름없다. 이번 전북도립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 형식의 <유휴열의 生/놀이>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감각적인 세계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감각 너머의 세계를 표현해내고 있다. 보들레르가 인간의 우울과 이상을 동시에 그리려고 했던 것처럼, 랭보가 감각을 활짝 열어서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들여다보려고 했던 것처럼, 유휴열은 감각적인 세계를 추구하면서도 감각 너머의 세계를 표현해내고 있다. 전북도립미술관 전시 제목인 <유휴열의 生/놀이>는 이런 그의 작업들을 포괄하여 총망라하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화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휴열의 生/놀이>는 단순히 작가 개인적 삶과 인생을 담아내는 것을 넘어 우리 모두의 삶과 인생의 철학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고 나아가 우리 민족의 얼과 흥, 신명뿐만이 아니라 한(恨)까지 내포되어 있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화두이기 때문이다. 삶과 인생 자체를 하나의 놀이이자 축제로 인식하는 그는 이번 전시 <유휴열의 生/놀이>에서처럼, 작가 개인의 자의식뿐만이 아니라 우리네 민중의 한(恨)과 욕망, 울분 등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승화시키면서 예술을 일종의 삶의 정화이자 축제로 펼쳐보인다. 필자는 이것을 ‘예술이라는 놀이를 통한 삶의 유희’로 정의하고 싶다. 따라서 <유휴열의 生/놀이>는 비단 연작의 제목이라기보다는 그의 예술적 화두에 가깝다.

 캔버스에 아크릴 227×908.5cm 2013~2014

<엄뫼, 모악> 캔버스에 아크릴 227×908.5cm 2013~2014

삶의 총체로서의 예술
그의 자유로운 정신은 필연적으로 전위적이고 다양한 실험들을 통하여 파생된 다양한 성향의 작품들로 귀결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고 있고, 작품에서도 정형화되고 틀에 박힌 기존의 개념들을 해체하고 거부하면서 늘 새롭고 신선한 방향으로 정진(精進)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재료 또한 마찬가지이다. 회화로부터 조각 및 설치작품으로 변화하는 작품의 성향뿐만이 아니라 회화물감, 흙과 도료, 한지와 합판, 돌, 수지, 알루미늄 등 재료 선택에서도 다양한 실험정신을 발현해내고 있는 그의 작품들은 마치 카멜레온과도 같이 변화무쌍하다. 의미를 전달하는 모든 소통 과정에는 메시지 운반자로서의 매개수단 혹은 의미의 내용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매체(medium)가 필요하다. 즉 모든 소통과정은 ‘매개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매체는 커뮤니케이션 행위를 위한 ‘절대적인 전제 조건’이자 그 절차의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가 된다. 예술작품과 표현 활동이 의미 소통의 수단이자 과정이라고 본다면, 그 매개인자가 되는 기술적 보조수단과 물질적인 표현수단을 일차적으로 매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전통적 의미의 매체가 표현을 위한 재료나 단순한 도구의 중성적 성격이었다고 한다면, 유휴열이 다양한 재료를 통해 다양한 작품의 성향을 보이는 이유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비록 재료가 바뀌고 표현방식이 달라졌다 해도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자연적인 소재와 삶의 방식이 ‘놀이’라고 하는 예술적인 소재와 행위 자체로 전이되어 작품에 전착된다는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놀이로서 살아있는 삶과 인생 그 자체이며, 그러한 재료들은 작가가 살아있음을 중개하고 매개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작고하신 미술평론가 이일 선생은 유휴열의 작품세계를 한마디로 ‘삶의 총체로서의 예술’이라고 정의하면서 그의 작품에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삶에 대한 애착, 그리고 인간의 아픔에 대한 진지한 공감, 삶에 대한 수용의 너그러움이 깔려있다고 하였다. 그 끈끈하고 너그러운 열기가 그의 작품에 인간적인 밀도를 지니게 한다는 것이다. 오광수 선생은 유휴열의 작품에서 음악성이 흘러넘쳐 가락과 리듬과 기운이 넘치고, 시각적인 대상이 쉽게 청각적인 것으로 전이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의 작품은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현실세계를 예술이라는 놀이를 통하여 감각적으로 담아내는 부정형의 카오스(Chaos)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런 카오스 속에서도 질서와 법칙(Cannon)을 발견할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 엿보이는 카오스적인 ‘무질서’는 다시 자연의 질서와 법칙에 다가가 세계에 활력을 주면서 새로운 생명질서를 창조해내고 있다. 그의 작품 전반에서 엿볼 수 있는 생명의 원시성과 놀이를 통한 유희성의 회복은 다름 아닌, 물질문명에 물들어가는 인간존재에 대한 회복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진정한 휴머니스트(Hu- manist)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언제부터 삶과 인생 자체를 ‘놀이’라고 하는 은유적인 언어로 표현하게 되었을까. 여기에서 잠시 그의 화력(畵歷)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유휴열의 작품 시기는 크게 몇 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 그가 작업을 시작해서 다양한 탐색과 실험을 통해 지속적으로 변화를 모색한 1970년대와 1980년대 후반, 다음으로는 1990년대 초반 흙을 주재료로 활용하여 <生/놀이> 연작이 제작되는 무렵부터 2004년 <추어나 푸돗던고> 연작에 이르는 유휴열 특유의 작업방식이 안착한 시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알루미늄 작업을 통해 빛과 놀이의 지평을 새롭게 확장하면서 삶의 원형적 세계를 담아내는 최근의 작품들이 그것이다. 초기작에는 구상(具象)작품뿐만이 아니라 앵포르멜 형식의 추상작업, 1970년대 후반부터는 남관(南寬) 선생의 작품이 연상되는 반(半)추상 작품들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에는 합판작업을 중심으로 일종의 탈(脫)캔버스 작품의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이후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에는 프랑크 스텔라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해체주의적 비정형 회화작품이나 액션페인팅 및 독일 신표현주의 성향의 작품 등 다양하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유휴열의 회화작품에 공통적으로 엿보이는 내면세계에 대한 강렬한 표현욕구와 자유분방한 붓 터치를 통한 독특한 마티에르, 색채구성 등은 미국의 액션페인팅이나 독일 신표현주의의 그것과도 닮아 있다. 하지만 유휴열의 작품이 언뜻 즉흥적이거나 충동적인 자기표출의 표현방법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삶과 인간적인 체험을 곱씹으며 그것을 오늘의 인간 조건의 차원으로 여과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로써 풀어내지 못한 것을 그림으로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서 풀어내는 일종의 한(恨)과 같은 것이 작품에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1990년대 후반 판소리의 장단을 주제로 한 일련의 시리즈와 군무(群舞)의 춤사위를 주요 소재로 2000년대에 연작으로 제작되었던 <추어나 푸돗던고> 시리즈는 이 시기의 절정을 이루고 있는데, 이때부터 다층적인 놀이 개념이 그의 작품에 직접적으로 구현된 것으로 보인다. 최근 알루미늄을 재료로 활용한 작품들도 매우 신선하다. 그가 알루미늄이라는 재료를 사용하는 것은 삶의 그것처럼 작품의 울림과 리듬이 빛으로 확장되기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해와 달, 장생도, 토끼와 거북이, 꽃과 새, 만다라 등 우리의 민간신앙을 통해 전수되어 내려온 고대 이래의 신화적 세계나 불교적 세계 같은 삶의 원형적 세계를 지속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필자가 서두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유휴열이 자신의 작품에서 던지고 있는 화두인 <生/놀이>는 작가의 인생과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관조를 통한 투영(投影)이자 투각(透刻)이라고 말할 수 있다. 50년이란 내공 깊은 화력(畵歷)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예술을 삶의 정화이자 축제로 인식하는 그의 작품 전반에는 삶의 유희성뿐만이 아니라 삶에 대한 해학, 삶과 인생에 대한 진지함마저 담겨 있다. 유휴열의 작품에는 그의 모습과 심성뿐만이 아니라 우리네 인간들의 희로애락 역시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가 최근에 그린 대형작품 <모악산의 춘하추동>은 우리네 인생의 희로애락 또는 생로병사와도 많이 닮아있다. 그렇다! 유휴열의 그림은 우리의 모습, 우리네 이야기인 것이다. 우리네 서민들의 삶에 대한 한과 신명, 슬픔과 기쁨이 내포되어 있다. 원초적인 욕망, 삶과 인생에 대한 발산과 응어리진 마음을 물감과 몸짓을 통하여 표현하는 그의 작품들은 회화적 몸짓과 다름없다. 그의 작품에서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굴곡진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묵묵히 자리 잡고 있는 모악산처럼, 그는 어느새 모악산을 많이 닮아있었다. ●

유휴열은 1949년 정읍에서 태어났다. 전주대학교 미술교육과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1982년 전주 금하미술관에서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40여 회의 개인전과 500여 회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현재 전주 모악산 자락 작업실에서 작업하고 있다.

(왼쪽) 알루미늄, 자동차 도료 183×366cm 2013~2014  (오른쪽) 알루미늄 260×157cm 2006

<리듬>(왼쪽) 알루미늄, 자동차 도료 183×366cm 2013~2014 <律>(오른쪽) 알루미늄 260×157cm 2006

 

 

 

[Review]회화를 긋다

회화를 긋다

갤러리 세줄 4.18-5.31

갤러리 세줄에서 ‘회화를 긋다’라는 주제로 중진작가 최병소, 박기원, 장승택, 도윤희의 그룹전이 개최되었다. 뉴미디어 장르의 복잡하고 화려한 이미지, 시대를 풍자한 팝아트, 협업의 공존개념 작품들이 넘쳐나는 한국의 여느 전시장과는 달리 꾸준히 자신의 작업에 몰두하면서 예술의 이상적인 목적에 접근하는 작가들의 전시는 오랜만에 미학적 안도감을 가져다준다. 1980년대 한국의 미술계는 민중미술의 경향과 한국적 추상과 미니멀리즘, 개념작업의 계보를 잇는 작가들로 양분되어 있었다. 1990년대는 해외유학파들이 들어오면서 포스트모던의 일상적 소재를 다루는 작가들이 등장하고 2000년부터 상업적 명성을 떨치며 미술계를 장악한 젊은 블루칩 작가들이 본격적으로 대중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이번 전시는 하나의 스타일을 만들어 섬세한 변화를 추구해 자신만의 세련된 감각을 연마해온 작가들로 구성되었다. 시각예술의 본질에 해당하는 회화 장르 안에서 최소한의 선과 색채만 사용하는 작가들의 작품은 천장이 높고 넓은 면적의 화이트큐브 전시장과 잘 어울리며 내재된 에너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1층에는 장승택과 박기원의 작품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장승택은 물감과 붓이 아닌 화학적 질료를 통해 시대적 회화를 실험하며 세련된 현대성 안에 잠재되어 있는 연약하고 불안한 것들을 표현한다. 이번 작품은 색채를 사용하여 약간의 변주를 준 화면 안에 최소한의 움직이는 선을 통해 감각의 미세한 부분을 흔든다. 하나의 엷은 표면에 원을 그리고 층층이 쌓아 만든 화면은 정지된 형태가 움직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며 보는 이를 뿌옇고 모호한 심연으로 깊이 빠져들게 한다.
박기원은 장지로 된 화면을 비스듬한 선으로 분할하고 그 면 안에 촘촘하게 선을 그어 다양하게 작동하는 공간의 질서와 변화를 그려낸다. 사각 평면이라는 주어진 공간 안에서 비정형적으로 분할된 면들과 그 안에 각각 다른 감각으로 표현된 선들은 시간에 따라 축적된 세계의 조합이다. 사계절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인간이나 사물은 선으로 대입되어 선이 만든 면, 그리고 그 면들이 만든 공간 안에 감정이 흘러들어가는 명상적 작품이다.
2층 전시장에서 도윤희의 대작들과 최병소의 신문지 드로잉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도윤희의 회화는 형태의 흔적과 선들의 분절이 무채색 화면에 섬세한 감각으로 혼합되어 화면 전체로 퍼져나간다. 배경의 무의식적이며 원초적인 성층의 표현은 시간의 다양한 흔적들을 암시하고 그 위에 씨앗, 줄기의 시작과 같은 형태를 연결시킨다. 이렇게 생성된 비정형의 유기적 형상은 식물의 뿌리처럼 보이거나 산과 같은 자연풍경의 일부가 된다. 확실한 형태와 명확하지 않은 부분의 이중구조로 그려진 회화는 감각적인 것과 비감각적인 것을 느끼게 하며 존재의 비밀에 섬세하게 다가가게 한다. 최병소의 작품은 신문지의 한 면은 그대로 보여주고 다른 한 면은 연필로 내용을 지워 검은 화면을 만든 것이다. 그는 매일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싣는 신문의 활자를 볼펜으로 지우고 연필을 사용해 검은 색이 전면을 뒤덮을 때까지 그려 한 폭의 추상화로 표현했다. 작가는 편향, 왜곡, 변질이라는 매체 안의 숨은 속성에 대한 시니컬한 거부의 표현으로 모든 것을 지우고 예술의 순수함 속에 그것들을 가둬놓는다. 그려지면서 내용은 비워지고 채워지면서 화면은 비워지는 조형과 삶의 근본구조가 함께 수반된 작품이다. 검은색 표면은 흑연으로 축적된 두께와 작가의 반복적 드로잉에 의한 힘의 밀림으로 요철이 생성되면서 추상표현의 예술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현실 참여에 대한 관심과 개념적 태도에서 출발한, 관조적이지만은 않은 열린 개념의 새로운 추상이다.
이번 전시가 갖는 의미는 시대가 원하는 반짝이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영리한 작가들의 작품이 각광받는 미술계에 묵묵히 충실하게 자신의 세계를 깊이 파 들어가며 초월적 감각을 보여주는 작가들의 작업을 상업화랑에서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한국의 상황은 모더니즘을 경험하기도 전에 포스트모더니즘에 돌입하였기에 이상을 추구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예술의 진정한 감상을 해보지 못했다. 현란한 이미지의 제공과 투자의 수단으로 전락한 현재의 우리 미술계는 예술의 원래 목적인 본질을 깊이 사고하게 하는 중진, 원로들의 작품을 조명할 기회를 많이 마련해 삶과 예술이 나아가야 할 진정한 가치를 찾고 또 갖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김미진・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

[Review]소음인가요

소음인가요

서울시립미술관  5.13-6.22

사운드아트 전시를 표방한 <소음인가요>는 19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국내에서 즉흥음악, 전자음악, 실험적 테크노 등 다양한 장르의 활동을 전개해 온 뮤지션 19명의 작업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들의 사운드스케이프는 현대예술에 민감한 관람객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권병준, 최준용, 트랜지스터헤드 등 국내 인디음악에서 잘 알려진 이들 이외에도 초대된 뮤지션은 모두 2000년대 이후 국내 각종 전시에 특별 이벤트나 개막공연의 형태로 활발하게 참여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전시는 국내의 아방가르드 음악과 현대예술 분야의 크로스오버를 점검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것이다. 지금까지 독립적인 장르보다는 전시행사의 부속물로 수용되어 온 낯선 소리들과 비트들을 어떻게 현대예술의 맥락에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가, 또한 이 뮤지션들의 공연이 가진 본원적인 일회성과 덧없음(ephemerality)을 넘어서 이들의 작업을 보존하고 경험하는 데 적합한 인터페이스는 무엇인가라는 두 가지 문제의식이 이 전시를 둘러싼 분위기(ambience)가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의식 중 <소음인가요>는 두 번째 문제의식의 분위기를 불어넣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지금까지 서구 현대예술에서 사운드아트가 미적 대상이자 독립적인 연구주제로 부상하는 데 있어 핵심적으로 작용한 키워드들인 노이즈, 청취, 침묵, 물질성, 잠재성, 시공간 등은 이 전시에 참여한 뮤지션들의 작업들에서 다양한 진폭과 주파수로 환기될 수 있다. 하지만 전시의 구성이 이러한 키워드들 대신 아방가르드 음악과 전자음악의 장르들을 분류체계로 활용하기 때문에 관람자가 사운드아트의 개념과 위상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대신 전시는 국내 전자음악의 역동적이고도 다채로운 사운드스케이프를 망라할 수 있는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이 아카이브에 접근하고 경험하기 위해 효과적인 인터페이스를 마련하는 데 상대적으로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전시장에 설치된 19개의 아날로그 텔레비전 모니터는 사운드아트의 경험적 대상인 소리들을 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하드웨어의 물질성을 환기시키며, 찰나성에 사로잡힌 공연에 일정한 시공간적 지속성을 부여한다. 아울러 뮤지션들의 홈페이지와 사운드클라우드(Soundcloud)를 함께 소개하여 관람의 경험이 디지털 네트워크로 연장될 수 있도록 배려하였고, 관람자가 특정 뮤지션의 음원과 소개자료를 직접 CD로 구워 DIY 리플릿을 제작할 수 있게끔 했다.
비록 현대예술에서 사운드아트의 경향과 미학적 논점들을 이해하기에는 다소 부족하지만, 이 전시에 참여한 뮤지션들의 작업을 살펴보면 서구 사운드아트의 맥락에 비추어 볼 때 국내 뮤지션과 예술가들의 작업들에서 어떤 영역들이 상대적으로 활성화되어 있고 어떤 영역들이 부족한지를 파악해볼 수는 있다. 전자음악과 즉흥음악은 발달해왔지만 비주얼 뮤직(visual music)이나 갤러리 설치작품의 형태로 청각적 시공간을 구축하는 예술적 경향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소음인가요>전은 오늘날 국내 사운드아트의 현주소를 소개하는 동시에 앞으로의 가능한 발전방향들을 암시하고, 해당 분야를 테마로 한 더욱 본격적인 전시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김지훈・중앙대 교수

 

[Review]임승천 – 네 가지 언어 The Omnibus

임승천  __  네 가지 언어 The Omnibus

성곡미술관 5.2-7.27

‘네 가지 언어’라는 부제로 열린 임승천 개인전은 4막으로 구성된 옴니버스식 연극 같다.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는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설명하려는 가설이지만, 사실보다 더 사실처럼 다가오게 하는 강력한 가설이다. 거기에는 문학이나 연극, 영화같은 서사가 있지만 그러한 시간적 형식이 공간적 형식으로 번역될 때 간극이 발생한다. 막과 막 사이에는 도약과 비약이 있는 것이다. 서사적 요소들은 선형적 배열이 아니라, 관객의 상상력에 따라 다르게 조합되어 읽힌다. 열린 이야기이긴 하지만 서사와 형상은 서로를 받쳐주기 때문에 의미의 방향타는 존재한다. ‘상실’로 이름 붙은 1전시실은 심해의 풍경처럼 연출됐다. 제 몸보다 작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려 애쓰는 큰 물고기는 비대한 욕망의 덩어리이며, 주변에 배치된 사실적 혹은 신화적 인물들은 이 괴물의 희생자다. 희생자들은 발이 묶여있고, 등골마저 빨린 상태이다. 전시실 앞의 여주인공은 손에 피를 묻힌 채 경고하고, 이 모든 광경을 숙고하는 눈이 셋인 괴물/선지자 캐릭터는 작가의 또 다른 자아이다. ‘노시보(Nocebo)’로 이름 붙은 2전시실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라 할 수 있는 남녀 사이의 거짓말이 야기하는 비극의 무대다. 여성의 거짓말로 남성이 거인으로 석화되는 신화적 장면이다. 욕망은 상징계, 즉 언어와 사회를 무대로 하며, 언어에 실린 욕망이 주체와 객체를 모두 상징적 구조의 노예로 만든다. ‘고리’로 이름 붙은 3전시실은 희로애락의 4개 가면을 쓴 무뇌인들이 발목이 묶인 채 줄줄이 연결된 군상의 무대다. 이 집합적 정체성은 실제로는 원자화되어 있기에 강제적 연결이 필요하다. 연결망은 자연에서 발견되는 생명의 그물 같은 멋진 생태계가 아니다. 이성 및 합리성과 거리를 두는 이 분열적 개체들은 연좌제처럼 죄를 공유하는 클론들일 뿐이다.
‘순환’으로 이름 붙은 4전시실에서 서커스 천막 안 4단 케익 같은 구조는 조트로프(Zoetrope)처럼 돌면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천막 안의 구조물은 위로부터 시스템의 지배자/관리자/향유자/파괴자 순으로 배열된다. 체제를 선전하는 요란한 깃발, 감시하는 시선, 캉캉 춤 같은 소비의 향연 아래에서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벽을 치는 노동자는 시스템의 최말단 희생자이자 그에 도전하는 세력이다. 빙빙 도는 이 순환적 구조는 이익을 창출하는 기술로 환원된 사회를 상징하며, 각 계층을 이루는 문화적 정체성은 권력이 동원하는 요소일 뿐이다. 작가는 막간극에 잠시 등장한다. 막과 막 사이의 공간에는 가면 쓴 얼굴과, 원근법의 소실점에 위치하면서 세상에 대한 궁금증으로 흐릿한 유리창을 손으로 닦는 자폐적 인물이 보인다. 그는 가면이나 층층의 구조 뒤에 숨어있지만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세상에 대한 관심을 표한다. 보이지 않는 구조는 주인공들 못지않게 힘을 발휘한다. 심해처럼 색을 칠한 <Missing>은 무의식과 상실의 무대를 말하며, <Nocebo>에서 멀리 마주한 남녀를 연결짓는 것은 언어의 망이다. <Link>와 <Circle>은 사회 속 인간들이 맺는 관계망 그 자체이다. 구조는 인간들 사이의 드라마를 만드는 주된 요소이다. 인간은 그러한 구조의 산물이며, 익명적 구조에 얼굴 표정을 부여한다. 거대 물고기는 촘촘한 비늘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만 제 몸도 못 가눌 정도로 굼뜨다. 목적을 상실한 채 스스로를 유지 확대하는 것에만 몰두하는 현대의 비대화된 관료제를 닮았다. 비슷한 것들이 줄줄이 엮인 4면상의 군상은 4지 선다형 문제를 푸는 학생처럼 주어진 것 안에서만 자율성과 자유를 구가할 따름이다. 임승천의 작품은 이러한 체계 속에서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나 내밀한 자아도 왜곡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이선영・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