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This is not a tour

 

<로드쇼>의 뒷이야기

신보슬  토탈미술관 책임 큐레이터

길 떠나는 큐레이터 & 작가
큐레이터 18년차.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쇼핑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 그럴싸한 주제를 정하고, 그에 맞는 작가와 작품을 고르고. 어김없이 아티스트 비용을 제대로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오프닝을 준비하고, 사람들을 초대하고, 도록을 만들고, 못내 아쉬움을 내비치며 철수하는 사이클. 주제와 작가들은 바뀌지만 전시장을 채우고 비우는 과정은 언제나 비슷했고 마음은 점점 느슨해졌다. 생각해보니 작가들과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작업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오랜 시간 토론하고, (가끔은) 언성을 높이기도 하면서 서로의 생각들을 털어놓던 기억도 가물하다. 예술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창이라면, 작업실에만 있는 작가와 사무실에만 앉아 인터넷 서핑을 하는 큐레이터가 보여주는 세상은 별로 매력적일 수 없을 것 같았다. 뭔가 변화가 필요했다.   <로드쇼>의 시작이었다.

내성천에서 시작된 첫걸음
2011년 4대강 개발을 두고 갑론을박이 뜨거웠다. 이런저런 문제가 있지만 어찌 되었던 우리 경제에 새로운 활력이 될 거라며 밀어붙이려는 세력과 허무맹랑한 기획들을 낱낱이 밝혀내면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맞부딪쳤다.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음은 알았지만, 현장을 보지 않고, 섣불리 의견을 더하기는 조심스러웠다. 마침 뉴욕 아이빔에 있던 최태윤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직접 가서 상황을 보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4대강을 모두 둘러보고 싶었지만, 시간적, 재정적인 여유가 없으니 하나의 강이라도 제대로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아 첫 번째 <로드쇼: 대한민국> 낙동강 여행이 시작되었다.
최태윤 작가는 아이빔에서 Mary Mattingly, Fran Ilich, Nova Jiang, Jon chors 이렇게 4명의 작가를 초대했고, 박은선, 김화용, 이정민, 노순택, 연미, 최빛나 등 일군의 한국 작가들과 기획자들이 함께 했다.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관광버스 한 대에 몸을 싣고 여행을 시작했다. 일주일로 예정된 그 여행은 낙동강의 지천인 내성천에서 시작하여, 하구에 있는 을숙도까지 계속되었다.
로드쇼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대부분 무엇을 하는 프로젝트냐고 묻는다. 딱히 우리가 뭘 해야겠다는 의지보다는 함께 여행하고, 이야기하면서 서로를 좀 더 알아가는 것이 목적인 우리로서는 ‘여행을 한다’는 것 외에 딱히 그럴듯한 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액티비스트도 아니고, 저항이나 캠패인을 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여행이 상황을 바꾸기 위한 도구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꼭 뭔가를 해야 하나. 큐레이터와 작가가 함께 하는 여행의 결과물이 당장 새로운 작업으로 나오기는 힘들겠지만, 빠듯한 일상에서 일주일가량 일탈하여 함께 이야기하고, 생활하는 경험은 언젠가 좋은 작업으로 나오리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굳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다면, 여행에 집중하고, 우리가 만난 것과 생각했던 것들, 이야기 나눈 것들을 공유할 수 있는 후반 작업을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의 끝에 전시가 아닌 책을 만들기로 했다.
별다른 계획 없이 함께 여행하자고 시작된 프로젝트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들과 함께 한 낙동강 여행은 많은 것을 남겨주었다. 특히 4대강 이슈에 열정적이었던 리슨 투 더 시티의 박은선 작가, 그리고 내성천에 새롭게 둥지를 틀고 강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지율스님이 있기 때문에 그저 그런 여행일 수 없었다. 지율스님은 내성천에 왜 오게 됐는지, 낙동강의 모래톱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강을 걸어서 건넌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 자세히 설명해주고, 체험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4대강 계획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는지도 빼놓지 않았다. 해질 무렵 내성천 모래톱에 앉아 넓디넓은 하늘을 물들이는 석양을 보며 들은 이야기들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물론 많은 여행이 그렇듯 불편함과 갈등도 있었다. 외국작가 중에 채식주의자가 있어 매끼 메뉴를 고르느라 애먹은 순간도 있었고, 폐교를 개조한 숙소에서, 그것도 딱딱한 마룻바닥에서 단체로 취침하는 데 대한 불만도 있었다. 왜 인터넷이 안되느냐며 매일 인터넷 타령을 하던 외국작가도 있었다. 챙겨야 할 것, 설명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그만큼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 내가 발디디고 있는 땅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할 수 있었다. 로드쇼를 시작하고 얼마되지 않았을 때, 다시는 <로드쇼>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차라리 전시가 낫다고. 하지만, 여행이 끝날 무렵, 나는 이미 다음 해의 <로드쇼>를 기획하고 있었다. 서로 바쁜 일상에서 빠져나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며 생각을 나눌 수 있었던 일주일은 포기하기에 얻는 것이 너무나 많은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로드쇼의 몇 가지 규칙들
두 번째 <로드쇼>를 기획하면서 첫 번째 <로드쇼: 대한민국>를 돌아보았다. 즐겁고 좋은 추억이었지만 몇 가지 아쉬움이 남았다. 외국에서 초대하는 손님으로는 작가보다 큐레이터가 더 좋을 듯했다. 함께 여행하는 동안 참여한 한국 작가들의 작업도 소개한다면 여행과 홍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생겼다. 그리고 큰 차로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단체로 이동하는 것보다는 4~5명 단위로 나눠 그룹으로 이동하게 된다면, 여행의 경로도 좀 더 다양해질 수 있고, 같은 그룹에 있는 사람들끼리는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리고 여행 기간 뭔가 새로운 작업을 만들어내야만 한다는 과제는 여행도 부담스럽게 하고, 정작 작품도 제대로 나오기 어려우니, 여행이 진행되는 과정에 더욱 집중하자고 했다. 그렇게 이런저런 아쉬움을 보완하면서 두 번째 로드쇼의 새로운 규칙들이 만들어졌다.

첫째, 여행지는 기획팀과 이전 참여 작가들의 추천에 의해서 선정한다.
둘째, 해외 초청의 경우 가급적 큐레이터를 초청하되, 작가를 초청하는 경우 전시기획이 가능하거나 혹은 프로젝트를 함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선택한다.
셋째, 여행 중 작업에 대한 부담감을 주지 않는다. 신작을 해도 좋고, 퍼포먼스를 해도 좋다. 작업과 관련된 사항은 작가에게 맡긴다. 기존 작업을 가져오는 경우, 10분 안에 설치하고, 10분 안에 철수할 수 있는 게릴라형 전시를 준비한다.
넷째, 작가-기획자-해외 초청자가 골고루 섞이도록 그룹을 재구성한다.
다섯째, 여행지는 기획팀에서 설정하지만, 개별 여행 계획은 그룹 내에서 상의하여 조정할 수 있다.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로드쇼를 자연스럽게 ‘제주’로 이끌었다. 독일, 인도, 스페인에서 온 해외 참가자들은 서울이 아닌 제주도, 그것도 한국 작가와 기획자와 함께 하는 여행에 큰 관심을 보였다. 안타깝게도 로드쇼 기간 동안 세 차례 태풍이 오는 바람에 일정에 차질을 빚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태풍으로 인해 더 많은 추억거리가 생기기도 했다.
낙동강 여행과는 달리 제주에서는 게스트하우스를 한 채 빌려 베이스 캠프로 삼았다. 강정마을과 4・3 제주평화공원 등은 함께 방문했지만, 팀별로 한라산을 오르거나 아름다운 제주의 해변을 찾기도 했다.그리고 여행 중간중간에 버스 정거장에서, 둑방에서 퍼포먼스도 하고 게릴라식 전시도 했다. 그리고 밤이면 다시 베이스 캠프에 모여 번갈아가면서 식사도 준비하고, 서로의 작업에 대해서 프리젠테이션도 하고, 긴 토론을 하기도 했다.

로드쇼는 계속된다
세 번째 로드쇼는 백령도에서 진행되었다. 서해 최북단의 섬 백령도는 분단이라는 현실을 마주하게 하는 곳이다. 북한이 바라다보이고, 연평도 포격사건 현장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 천안함 피격사건 등 백령도는 여느 섬과는 다른 히스토리를 갖고 있었다. 루마니아, 스페인, 인도 등지에서 온 기획자(겸 작가)들이 한국 작가들과 함께 그곳을 찾았다. 섬을 여행하고, 바닷가와 심청각에서 퍼포먼스도 하는가 하면, 가지고 간 사진으로 설치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작업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질문을 받기도 했다. 전시장에서는 하기 어려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 작가와 큐레이터를 초청하여 <로드쇼:경주>를 마쳤다. 경주, 신라 천년의 고도(古都)이자 단골 수학여행지인 불국사와 석굴암, 왕릉으로 대변되는 경주를 새롭게 경험할 수 있었다. 사운드 장비를 가지고 재래시장에서 소시를 채집하는가 하면, 방폐장 앞에서 작업을 하기도 했다. 문무대왕 수중릉 앞에서 모든 참가자들이 함께 퍼포먼스를 하기도 하고, 이름 없는 사찰을 찾아 사진작업을 하는 작가도 있었다.
함께 여행하고, 작업하고, 이야기하면서 <로드쇼>에 중독성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로 마주하는 큐레이터와 작가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으로 함께 고민과 생각을 나누는 시간은 다음 번 로드쇼를 기대하게 한다. 2015년 로드쇼는 강릉에서 강릉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해보려 한다. 정해진 포맷이 없기에 매번 조금씩 변화하는 로드쇼. 그렇게 로드쇼는 계속된다.

로드쇼, 해외를 가다
최근 해외에서 <로드쇼>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아마도 전시에 비해 비용이 적게 드는 반면, 직접적인 홍보효과나 결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해외여행의 경우는 국내여행과 많이 다르다. 국내여행은 우리가 사전 답사도 하고, 여행지에 대한 내용을 사전 미팅과 스터디를 통해서 준비하여 해외 참가자들에게 소개해주는 입장이지만, 해외여행은 자칫하면 정말 관광에 그칠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다. 그래서 외국으로 나가는 경우, 현지에서 제대로 가이드를 해줄 수 있는 큐레이터와 작가 없이는 진행이 힘들다.
올여름, 로드쇼의 첫 해외편인 <로드쇼: 북동부 인도>편을 진행했다. 델리나 뭄바이와 같이 잘 알려진 도시가 아닌 방글라데시 위쪽의 북동부 인도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사뭇 달랐다. 크리스천 커뮤니티가 있는가 하면, 여전히 모계사회를 유지하는 부족도 있었고, 말로만 듣던 헤드헌터 부족이 살고 있는 곳도 있었다. 매일이 문화적 충격이었다. 다행히 현지 큐레이터가 있었기에 그저 관광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지 작가들을 만날 수 있었고, 현지 작가들과 조인해서 짧은 피크닉도 진행할 수 있었다.     <로드쇼: 북동부 인도>의 경우, 작가들 외에 로드쇼 이후의 다양한 프로덕션을 전담할 팀을 초청했다. 영상 촬영팀과 디자인팀이 함께 여행을 함으로써 작가와 큐레이터가 여행 자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가 하면, 중국문화원의 후원으로 <로드쇼: 실크로드>도 진행했다. 란저우에서 둔황까지. 서북 중국 역시 베이징이나 상하이와는 전혀 다른 사회이자 문화권이었다. 중국에서 만나는 이슬람 문화권, 말로만 듣던 황하. 함께 한 작가들은 부지런히 작업을 진행했다. 기존 로드쇼와 달리 <로드쇼: 실크로드>는 여행의 결과를 작은 전시로 풀어낼 계획이다.
이외에도 <로드쇼>에 대한 제안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 <로드쇼: 니스에서 마르세유까지>(프랑스),     <로드쇼: 뭄바이에서 고아까지>(인도), <로드쇼: 히말라야에서 바라나시까지>(인도), <로드쇼: LA>   (미국) 등. 큐레이터와 작가가 함께 하는 여행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로드쇼, 남은 이야기
마셜 맥루한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에즈라 파운드는 예술가를 세상의 안테나라고 했다”고 언급한다. 촉각을 세워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는 안테나. 그런 예술가들과 작업을 하는 큐레이터 역시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그러나 전시가 일이 되고, 작업이 일이 되는 과정에서 우리들의 안테나에는 녹이 슬고, 촉각은 무뎌진다. <로드쇼>에 대한 관심은 어쩌면 예술가들의 안테나가 다시 예민하게 작동하길 기대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당장 작업으로 나오는 성과보다는 예술가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기대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저 여행이나 같이 해볼까 하고 시작한 로드쇼는 ‘함께’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을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다시, 또, 짐을 싼다. 그저 그런 여행이 아니라, 알찬 우리들의 여행을 떠나기 위해.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시간에 우리들의 이런 경험은 또 다른 작업으로, 전시로 보여질 것임을 믿는다. ●

 안동병산서원 앞에 설치되었던 작가 연미의  작품 관람

<로드쇼 2011 : 대한민국>안동병산서원 앞에 설치되었던 작가 연미의 <뉴스 스탠드> 작품 관람

강정마을 앞에서 퍼포먼스 중인 이리스 드레슬러, 한스 D. 크리스트, 다니엘 가르시아 앙두하르, 권순관 그리고 촬영 중인 노순택

강정마을 앞에서 퍼포먼스 중인 이리스 드레슬러, 한스 D. 크리스트, 다니엘 가르시아 앙두하르, 권순관 그리고 촬영 중인 노순택

 

<로드쇼 2014 : 경주> 재래시장 골목에서 사운드를 채집하고 있는 파스칼 브로콜리키

로드쇼
Road Show
신보슬 토탈미술관 책임 큐레이터가 기획한 <로드쇼>는 국내외 작가와 기획자들이 여행을 매개로 만나 서로의 작품세계를 공유하고, 다양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플랫폼이다. 2011년 4대강 사업이 진행되는 낙동강 일대를 둘러보는 것에서 시작해 제주, 백령도, 경주를 여행하면서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해외 참가자들에게 소개하고, 서로의 시각을 확장시키며, 이해의 폭을 넓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올해부터 대상지를 확장해 인도, 실크로드 등 해외 지역을 여행하면서 다른 문화권 지역과 현지 작가들과의 교류를 도모했다. 이 프로젝트는 다양한 시각을 가진 개인들이 모여 함께 여행하고 생각을 공유하면서 다양한 이슈에 대해 장기적인 개입을 시도한다.
roadshow2014-gyeongju.tumbl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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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예술가와 기획자의 ‘이동’을 지원하는 프로그램

“예술은 움직이는거야”

창작자와 기획자의 역량 강화를 목표로 뚜렷한 성과보다 이들이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여행을 지원하는 제도가 눈에 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권영빈)에서 진행하는 노마딕 레지던스 프로그램과 예술경영지원센터(대표 정재왈)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 비아(Project Via)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이는 최근 국내 지원금 제도가 ‘작품’, ‘전시’와 같은 결과물 지원 일변도에서 벗어나 예술 활동을 육성하는 보다 근본적인 조건에 대한 지원에도 관심이 높아진 현상을 반영한다.

노마딕 레지던스 프로그램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아르코)에서 진행하는 노마딕 예술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2008년 몽골 노마딕 사업으로 시작해 이란, 남극, 인도, 러시아의 바이칼 호수 등 작가가 개인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을 체험할 수 있도록 지원해 창작 역량을 강화하는 사업이다. 이 사업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의 이동 이상으로 작가 개개인의 삶과 작업에 큰 변화를 준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또한 새로운 문화와 낯선 환경에서 현지 작가와 다양한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해 현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이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할 수 있다는 측면도 주목된다.
참여 작가의 경우 1회성으로 제한하지 않는다. 레지던스 팀은 기획자와 참여 작가로 구성되며 팀 구성은 기획자 재량이다. 이 프로그램은 기존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비해 전시, 출판 등 특정한 성과물을 보고하는 방식이 아니며 참여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작업세계에 반영하고 있다. 노마딕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3회 참여한 작가 김승영은 “기존 레지던스가 도시를 중심으로 진행된다면, 노마딕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도시로부터 떨어진 장소에서 자연과의 대면을 통해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과 성찰을 유도한다. 이를 통해 나 자신의 작품에 대한 개념에 좀 더 깊이 몰두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참여 소감을 밝혔다.
사실 이 프로그램은 자칫 잘못하면 예술가들의 오지체험으로 그칠 수 있는데, 사업 담당자인 시각예술팀 이동석 씨는 “예술가들이 처음에는 오지에 매료되어 참여했지만 사업이 성숙하면서 작가들 스스로 오지를 타자화하는 것을 분명히 경계하는데 동의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그리고 “아르코 측에서도 해외 기관과 동등한 입장에서 국제 교류를 진행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지난해에는 호주 파트너 기관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한국 작가들이 호주 중심부 사막 지역에서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 올해에는 호주 원주민 예술가들이 한국을 방문했다. 지금까지는 시각예술을 중심으로 진행됐지만 앞으로 음악, 영상, 무용, 영화 등 다양한 영역의 예술가에게 문을 열 예정이다. 2015년에는 몽골, 호주를 중심으로 진행될 계획이며 나머지 지역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노마딕 레지던스 Nomadic Residence

바이칼 호수 알혼섬에서 작가 안경수가 하루에 한 점씩 완성한 작품 이미지

바이칼 호수 알혼섬에서 작가 안경수가 하루에 한 점씩 완성한 작품 이미지

2014년 바이칼 노마딕 레지던시 프로그램 ‘미니마 모랄리아’ 단체사진 (기획 김현주, 작가 김승영, 안경수, 정재철, 홍진훤, 황연주)

2014년 바이칼 노마딕 레지던시 프로그램 ‘미니마 모랄리아’ 단체사진
(기획 김현주, 작가 김승영, 안경수, 정재철, 홍진훤, 황연주)

 

 프로젝트 비아(Project Via) 프로그램
예술경영지원센터(이하 센터)에서는 2013년부터 한국 현대미술의 해외 진출과 국제교류 활성화를 위한 시각예술 기획자 육성 프로그램, ‘프로젝트 비아’를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기획자들의 장-단기 리서치 지원, 워크숍 참가 지원, 파일럿 프로젝트 지원으로 구성되며 지금까지 총 78명, 3개 단체가 참여했다. 큐레이터를 비롯해 갤러리스트, 평론가, 기자 등 실무경력 5년 이상의 시각예술 및 시각예술 기반 다원예술 기획자(에듀케이터 제외)는 누구나 지원가능하다.
개별 리서치의 경우 주제・권역에 제한 없으며 작가 리서치, 미술계 현장 확인, 워크숍 참가, 심포지엄 발표 등 다양한 형태가 가능하다. 그룹 리서치의 경우에는 센터가 사전에 해외 협력기관과 기획한 리서치 프로그램을 현장에 가서 수행하는 방식이다. 단기 리서치가 주로 10일 내외의 일정이라면 장기 리서치(펠로십 지원)는 권역 제한 없이 3~6개월간 진행할 수 있다. 큐레토리얼 워크숍 참가지원의 경우 센터가 해외 기관과 공동으로 국제 워크숍을 개최하고, 국내 기획자들의 참가를 지원하는 방식이다. 지난 2년간 센터는 영국의 테이트 아시아태평양미술연구소와 공동 기획해 해외 이벤트가 많은 홀수연도에는 외국에서 개최하는 방식으로 진행했고 국내 이벤트가 많은 짝수연도에는 해외 미술 전문가들을 불러들여서 국내에서 워크숍을 개최해 강연, 토론, 현장리서치, 네트워킹 세션 등을 구성했다.
현재까지 참가자들이 진행하는 리서치 트립 비중을 보면 80%가 유럽과 북미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기획자들이 활발한 예술 신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해외 교류 역량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단순히 국내 기획자들이 선진국을 방문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쳐서는 곤란하다. 사업 담당자인 인력개발팀 안현숙 씨는 “센터 측에서는 다양한 협력기관을 개발해 대등한 관계에서 장기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며 “해외 기획자들에게 국내 신을 소개하는 역할도 겸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센터는 네덜란드 몬드리안재단과 협력해 올해 국내 참가자들이 유럽을 방문하고 유럽 지역의 기획자들이 자체 예산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교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센터는 앞으로 남미, 중동, 아시아 등 그룹 리서치 위주로 국내 미술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국제무대를 활발히 소개하고 국내 신을 해외에 알리는 플랫폼 역할을 수행할 계획이다.
‘프로젝트 비아’는 기존 지원제도가 작가 중심으로 운영되고, 전시나 출판 등 결과물에 치중한 반면 기획자들을 위한 지원이 전무했다는 점에서 현장의 호응을 받고 있다. 사업 담당자인 심지언 씨는 “기획자들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자극을 굉장히 많이 받는다. 그만큼 동기부여가 된다는 반응이 많다”고 말했다. 이 사업의 경우 중복 지원이 가능하다. 한 번의 리서치 트립으로 어떤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존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리서치 결과를 바탕으로 한 전시, 출판, 심포지엄, 워크숍 등 형식의 제한없이 파일럿 프로젝트 실행을 지원한다. 이 사업은 현장에 맞는 방식으로 조정하기로 해 일부 변화가 있을 예정이지만 기본 틀은 유지하며 장기적으로 진행될 계획이다. 2015년에는 중동, 아시아, 프랑스에서 그룹 리서치 프로그램과 큐레토리얼 워크숍이 진행될 예정이다. 이슬비 기자

프로젝트 비아 Project Via

프로젝트 비아 2014년 영국-그룹 리서치 프로그램에서 진행한 라운드테이블

프로젝트 비아 2014년 영국-그룹 리서치 프로그램에서 진행한 라운드테이블

[Exhibition Topic] Busan Biennale 2014

세상 속에 거주하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14 부산비엔날레가 9월 20일 개막했다. 11월 22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는 올리비에 캐플랑(Olivier Kaeppelin) 감독이 기획한 본 전시 <세상 속에 거주하기>와 동시에 한국 비엔날레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아카이브 전시 <한국 현대미술 비엔날레 진출사 50년>, 4명의 젊은 큐레이터가 아시아 현대미술의 현주소를 펼쳐내는 <간다, 파도를 만날 때까지 간다>라는 두 개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가 관객의 공감을 끌어내어 감독의 의도대로 ‘세상 속에 거주할 수’ 있을까. 감독선임을 둘러싼 논란에서부터 전시 준비 과정까지 그리고 이번 전시가 전달하는 내용과 개념을 정리해봤다.

Inhabiting the World

부산 (174)

필라 알바라신 <당나귀> 책더미, 박제 동물 가변크기 2010

한경우  나무, 와이어, 페인트 가변크기 2014

한경우 <그린 하우스> 나무, 와이어, 페인트 가변크기 2014

엘리아스 크레스팽  알루미늄, 나일론, 모터, 컴퓨터, 전자 인터페이스 200×960cm 2014

엘리아스 크레스팽 <플라노 플렉시오넌트 4>
알루미늄, 나일론, 모터, 컴퓨터, 전자 인터페이스 200×960cm 2014

 

Voyage to Biennale

<비엔날레 아카이브전> 한국 현대미술 비엔날레 진출사 50년

1958년 <제5회 국제현대색채석판화비엔날레>를 시작으로 우리나라 작가들이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비엔날레에 참여한 지 50여 년이 흘렀다. 이 특별전은 우리나라의 비엔날레 진출사를 정리한 아카이브 전시로 지금껏 비엔날레에 참여했던 작가 48명의 출품작을 포함한 그들의 작품 전반을 선보인다.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비엔날레 자체에 대한 성찰이자 그간의 현대미술 흐름을 살펴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리다.

최정화  Fabric, Motors, Timers, Electrical accessories, Steel frame 7m 2014

최정화 <과일나무>
Fabric, Motors, Timers, Electrical accessories, Steel frame 7m 2014

강애란  미디어 인스톨레이션 150×300cm 2014

강애란 <디지털 북 프로젝트>
미디어 인스톨레이션 150×300cm 2014

한국현대미술의 비엔날레 진출사를 보여주는 아카이브 열람실

한국현대미술의 비엔날레 진출사를 보여주는 아카이브 열람실

 

Going going until I meet the tide

아시안 큐레토리얼전- 간다. 파도를 만날 때까지 간다

바다를 주제로 젊은 큐레이터 4인이 공동 기획한 특별전이다.
중국 일본 한국 싱가포르를 포함 9개국 36명(팀)이 참여해 한국 산업의 역사적 현장인 고려제강 수영공장에서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다. 화이트큐브를 벗어나 공간이 주는 역사적 메타포와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로운(혹은 산만한) 분위기 속에서 각 큐레이터가 ‘따로 또 같이’ 해석한 세상의 거울로서의 바다를 선보인다.

이 열리는 고려제강 수영공장

<아시안큐레토리얼전>이 열리는 고려제강 수영공장

전시를 공동 기획한 4인 큐레이터(왼쪽부터 리우춘펑, 하나다 신이치,서준호, 조린 로)

전시를 공동 기획한 4인 큐레이터(왼쪽부터 리우춘펑, 하나다 신이치,서준호, 조린 로)

데니스 탄  24-channel sound installation, white cables, loudspeakers,  generative computer software 905×512×390cm 2014

데니스 탄 <무지개>
24-channel sound installation, white cables, loudspeakers,
generative computer software 905×512×390cm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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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아시안 큐레토리얼전> 큐레이터 서준호

바다를 둘러싼 네 가지 이야기

금선희  싱글채널 비디오, 퍼포먼스 설치 2014

금선희 <천국의 문, 화해> 싱글채널 비디오, 퍼포먼스 설치 2014

4명의 큐레이터가 공동으로 전시를 구성했다. 큐레이팅 진행 방식이 궁금한데 전시에서 담당하고 진행했던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부탁한다.
기획의도 등을 논의하며 위원회와 다른 큐레이터 사이에 조율이 필요했다. 영상장비 대여 업체, 전시장 조성 업체 등과 수차례 미팅하며 전시 공간 구성과 필요 물품을 체크했는데 심지어 해외 큐레이터들의 일정상 부산으로 먼저 가 국외 작품의 반입 상태를 확인하고 촬영하는 일까지 맡았다. 네 명의 공동 큐레이터에게 한 명의 코디네이터가 배정됐으나 역부족이어서 코디네이터 역할을 한 셈이다. 외국 작가의 통역, 월 텍스트 디자인, 작품 제목 번역뿐만 아니라 페인트 칠 작업부터 작가들이 요청한 작업 재료를 조달하고 추가로 요청한 가벽과 좌대를 한국 작가와 함께 제작하는 일까지, 설치 기간 내내 40여 명 작가들과 함께 쉴 새가 없었다. 결국 4명의 공동 큐레이터가 만드는 전시지만 누군가 전시 방법 등 여러 가지를 제안하고, 의견을 수렴한 후 위원회에 전하는 채널 역할을 해야 했는데 그 역할을 초청국 큐레이터가 맡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주제는 어떻게 선정했나. 주제에 대한 각 큐레이터의 이해가 달랐을 텐데 그 간극을 어떻게 조율했나.
4월 말 처음 4개국 큐레이터가 한데 모였을 때 사흘을 내리 함께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섹션 없는 하나의 전시를 만들자는 데 4명 모두 동의했고 실제 우리의 삶과 닿아 있는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문제에 접근하고자 했다. 처음 만났을 때 네 명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키워드로 포괄적이지만 ‘바다’를 설정했고 이후 각자의 바다에 대한 개념들을 더해 한데 섞는 방법에 동의했다. 어떻게 보면 전시에서 네 가지 개념이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업이 바다를 둘러싼 우리의 삶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섞여도 무리가 없다고 판단했고 그 속에서 관객들 스스로가 작업 각각의 의미를 읽어내고 해석하고 또 다른 질문을 던지기를 바랐다. 원칙이 명확했기 때문에 간극이 있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더해서 일본의 하나다 신이치 큐레이터가 나이가 제일 많았고 중심을 잘 잡아 주었다.
부산=임승현 기자

 

[Exhibition Topic] Busan Biennale 2014

 부산 비엔날레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생각한다

유진상  계원예술대 교수

부산비엔날레는 1981년에 지역 작가들이 주도적으로 기획한 ‘청년비엔날레’를 역사적 기점으로 삼는다. 이후 2000년의 부산국제미술제(PICAF: Pusan International Contemporary Art Festival)를 거쳐 2002년부터 ‘부산 비엔날레’로 정식 출범한 이 행사는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치러지며 부산시장이 조직위원장이라는 점에서 부산시의 위상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부산의 문화적 역량과 국제적 수준을 반영하는 대표적 이벤트인 셈이다. 부산비엔날레는 광주비엔날레, 미디어시티 서울과 더불어 한국의 3대 국제미술전 가운데 하나이며, 대부분 짝수 해에 열리는 아시아 비엔날레들 가운데서도 이미 상당히 알려진 대규모 미술전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부산비엔날레가 과연 어떤 성격을 지닌 프로그램인지에 대해 다소 의문이 생기고 있다. 비엔날레는 대체로 기획자나 운영조직의 변화에 따라 기복을 보인다. 타이베이, 이스탄불, 리용 그리고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등과 같이 상임 디렉터가 장기적으로 프로그램 운영에 간여하는 체제에서도 초빙 큐레이터나 아트디렉터에 따라 전시행사의에 질적인 변화를 보이기 마련이다. 하물며 매번 새롭게 구성되는 운영위원회와 잠시 기획을 맡았다가 떠나는 아트디렉터에 전적으로 운영을 맡기는 상당수의 한국 비엔날레 체제에서 안정적이고 장기적 전략을 지닌 비엔날레를 바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부산비엔날레는 현재 별도의 운영위원회를 두고 있고 비상근 운영위원장이 비엔날레 프로그램 전반에 대해 대처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초대 허황 운영위원장 이후 2006년에 황종찬 씨가 4대 운영위원장을 1년간 맡았으며 2007년부터 이두식 화백이 맡아 2013년에 타계할 때까지 총 3회의 비엔날레를 준비, 운영했다. 이두식 위원장이 살아 계셨다면 2008년 김원방 감독  (〈  낭비〉), 2010년 아주마야 다카시 감독(〈  진화 속의 삶〉), 2012년 로저 뷔르게 감독(〈  배움의 정원〉)에 이어 2014년 행사까지 연임하면서 전시감독을 뽑고 운영했을 테지만, 부득이 신임 운영위원장을 선임하는 과정에서 이번 비엔날레를 둘러싼 논란이 터져 나왔다. 전시감독 선정위원회와 운영위원회는 사실 별도의 임무를 띠고 있다. 운영위원장이 먼저 선임되어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거나 하지 못한 상황에서, 선정위원회에서 이미 결정된 내용을 수정하면 절차상의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부산비엔날레 역시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후의 사정은 잘 알려져 있다.
올리비에 캐플랑(Olivier Kaeppelin) 감독이 어떤 경위로 본전시 전시감독선정위에 추천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외국인 후보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추천되어 있다는 점도 놀랍고, 추천된 후보들 가운데에서만 감독을 선정한다는 것도 비엔날레의 속성상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운영위원장 공석 상황에서 발생한 문제라고 해도, 운영위원회의 임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전시감독 선임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시감독(차회부터는 ‘총감독’으로 명칭을 변경한다는 이야기가 있다)은 사실상 비엔날레의 내용을 결정짓는 핵심적 인사이기 때문에 비엔날레의 성공과 발전을 위해 전략적으로 선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전시감독은 대체로 국내 및 지역 인사와 국제적 인사들을 두루 고려하면서 장기적으로 보아 비엔날레의 취지와 목적에 걸맞은 기획방향을 확보하는 데 주안점을 두어 선정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부산비엔날레의 경우 2010년 전시감독을 맡은 고(故) 아주마야 다카시나 이번의 올리비에 캐플랑 감독 선임은 한국의 전문가들에게도 의외의 인사였을 뿐 아니라 선정의 맥락을 알 수 없어 모두를 놀라게 한 비-전문적, 비-전략적 비엔날레 운영의 대표적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아주마야 다카시는 이후 일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모두를 안타깝게 했다. 올리비에 캐플랑은 선임과정에서도 모두를 걱정시켰지만, 전시가 열린 지금은(비판 일색인 언론보도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패착’이었음이 여러 측면에서 드러나고 있다.
캐플랭 감독은 작년 10월경 전시감독 선임을 둘러싼 논란이 있던 시기에 어부지리로 주어진 전시감독 자리를 아무 의견 표명 없이 수락했다. 프랑스에 있었다고 해도 한국에서 일어난 논란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는 유일하게 함께 일할 큐레이터로 가까운 한국인을 선임했다. (이 큐레이터는 함께 도록에 글을 쓴 김수현 씨다.) 그와 가까운 한국 인사도 여럿으로 알려져 있다. 비엔날레가 국제적인 행사이고 정치, 사회, 역사적 이슈들이 빈번히 다루어지는 첨예한 예술행사란 점을 감안하면 해당 지역에서 벌어지는 논란에 대한 전시감독의 이 정도의 무관심은 의외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가 선임 후 5개월여가 지난 올 3월 말에야 처음으로 부산을 방문해서 공개한 비엔날레의 주제는 ‘세상 속에 거주하기’였다. 이러한 주제를 접하는 전문가들이나 일반 시민들은 ‘세상 속에 거주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으로서 공동체와 시민들과의 교감이나 공감대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로 돌아간 뒤 전시 준비기간이 되어서야 작가 리스트를 들고 한국에 다시 나타났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번 부산 비엔날레의 개막 심포지엄에 참여했기 때문에 작가 리스트를 조금 일찍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8월말이었다.) 캐플랭 감독은 ‘세상 속에 거주하기’라는 주제를 던진 채 부산과는 거의 상관없이 프랑스에서 ‘세상 속에 거주하는 데 대한’ 전시기획을 작성했다.

 사운드,식물,각철 200×300×300cm 2014

<큐빅하우스> 사운드,식물,각철 200×300×300cm 2014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
또 다른 문제는 전시작가 구성에서 불거졌다. 참여 작가 77명 중 프랑스 작가가 23명인데다가 대부분이 50, 60대 작가들로 구성되었다.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특정 세대에 한정되었다는 점이 문제라고 본다. (물론 비엔날레는 새로운 작가군이 등장하는 장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한국작가들 역시 10명 중 2명은 프랑스에서 유학했고, 1명은 프랑스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으며, 나머지 3명은 재불 화가로 활동 중이다. 여타 외국 작가 역시 상당수가 프랑스에서 유학했거나 활동 중이며 프랑스 시민권 보유자로 알려져 있다. 개막 심포지엄에서 이 부분에 대한 청중의 질문에 대해 전시감독은 ‘정직함(honesty)’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큐레이터로서 가장 잘 아는 작가들을 전시하는 것이 정직한 일이라는 대답이다. 물론 이는 국제 비엔날레를 기획하는 큐레이터로서 ‘잘 아는’ 작가들이 프랑스 관련 작가들로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고백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감독이 자신의 잘 아는 주변 인물들과 함께 ‘비엔날레’를 만드는 데 부산시민의 세금과 국고 42억 원을 썼다는 얘기가 된다. 2000년대 초에 한국에서 4년간 프랑스대사관 문정관을 지낸 바 있고 2008년 부산비엔날레 큐레이터로 활동했으며, 지금은 후쿠오카 주재 프랑스문화원장을 맡고 있는 프랑신 메울(Francine Méoule)조차 이 전시 개막식에 참여한 뒤 이런 비엔날레 전시구성은 ‘전문적이지 않다’며 놀라워했다.
개막 심포지엄 발제자들에게 이번 부산비엔날레에 대한 토론 대신 가급적 ‘세상 속에 거주하기’라는 주제에 대해서 토론해 달라는 전시감독의 요청을 받은 것은 개막식 며칠 전이었다. 개막식에서 처음으로 이 주제에 대한 그의 글을 읽고 느낀 것은, 당연히, 당대 세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적 관점은 대체로 기술적 변화에 대한 반감 혹은 불편함에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제기하는 문제는 전시장 입구에 게시된 다음과 같은 주제 설명문에 요약되어 있다.
“최근 들어 개인들의 비물질화, 대상들의 비물질화로서의 인간적인 활동의 비물질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비물질화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고 있다. 처음에는 이러한 관점이 사회의 기능에 이로운 것으로 간주되었었다. 왜냐하면 이 관점은 더욱더 신속한 교환과 더 나은 시간의 경제학,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공통 세계의 모델에의 참여를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장점들의 리스트는 매일 매일 늘어갔지만, 하지만 비물질화 경향의 귀결 혹은 부작용은 인간에게 새로운 상황을 야기했다. 가장 두려운 공포를 야기하고,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을 점점 더 인식불가능하고 포착할 수 없게 만드는 새로운 재현들을 만들어내었다. (중략) 개별적인 것들에 대한 새로운 실존적 혹은 형이상학적 정의들을 제시하면서, 우리는 이러한 태도들의 목록을 더 늘릴 수도 있다. 이러한 모든 반응들이나 투영들 중에서 예술과 예술가들의 반응은 종종 지나치게 간과되곤 한다. 우리의 현존의 위기와 ‘거기 있다’라는 말 그대로 물리적, 정신적으로 이 세계에 계속해서 살거나 혹은 살지 않으려 하는 우리의 의지의 위기에 대해 예술은 본질적인 반응을 제시한다. 예술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우리는 이미 유령인가 아니면 우리는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기 위한 살아있는 배우가 되길 욕망하는가?”
캐플랑이 ‘비물질화’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개막 심포지엄 사회를 본 임근준은 ‘포스트모던’이라고 요약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디지털이나 인터넷 등의 기술적이고 진보적인 변화들을 가리키는 좀 더 협소한 개념처럼 보인다. 그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당면한 세계는 그보다는 좀 더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사유를 요구하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비물질화’라는 개념만으로 우리에게 그 세계 안에서 살아있는 인간이 될지 혹은 유령이 될지의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어 보인다. 그 반대편에 ‘예술’이 자리 잡고 있다는 대칭적 구도도 그리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그러한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자칫 ‘국가적 근본주의’나    ‘종교적 근본주의’처럼 일종의 ‘예술적 혹은 형식주의적 근본주의(artistic or formalist fundamentalism)’로 읽힐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전시를 구분해 놓은 구성을 보면 어떤 생각으로 ‘세계 속에 거주하기’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지가 더욱 분명해진다. 거기에는 ‘운동’ ‘우주와 하늘’ ‘건축과 오브제들의 운동성’ ‘정체성’ ‘역사, 전쟁’ ‘동물들과의 대화’ ‘증인으로서의 자연’ 등이 열거되어 있는데, 이 소주제들은 비엔날레보다는 파리 시립현대미술관이나 퐁피두센터의 상설전시 섹션들을 떠올린다. 각각의 소주제들에 대해 모두 언급할 지면은 없지만, 우리가 비엔날레를 통해서 프랑스 모더니즘을 다루지 않는다고 모두 유령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두 번째로, 더욱 심각한 것은 그가 심포지엄 토론에서 현재의 동시대미술을 ‘혼돈’으로 표현하면서 어떤 ‘해결책(solution)’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지점이다. 이런 표현이 무엇을 떠올리고 왜 문제가 되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우리가 예술을 중시하고 비엔날레를 기획하는 핵심적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서로 다른 배경과 태도를 지닌 이들이 예술을 통해 ‘공존’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캐플랑 감독은 프랑스에서 다수의 중요한 전시를 기획한 인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국에서 보여준 모습은 상당히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제도개선위원회는 이번 부산비엔날레를 중요한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다음 번에는 모든 이가 수긍할 뿐 아니라 깊은 공감을 누릴 수 있는 부산비엔날레가 되길 기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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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잔치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부산 (1)

기자간담회 장 앞에서 벌어진 항의 퍼포먼스

부산비엔날레 2014의 기자간담회가 열리는 9월 19일. 부산시립미술관 지하 강당에 취재진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이미 전시감독 선정 문제로 홍역을 치렀고 작가선정에 있어 특정 국가에 몰렸다는 비판이 일어 캐플랑 감독의 답변에 관심이 집중됐다. 그럼에도 올리비에 캐플랑은 전시 개막이 임박하도록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이날 기자간담회는 캐플랑 감독이 전시 기획의도를 밝히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어 특별전 <비엔날레 아카이브전>과 <아시아 큐레토리얼전>을 맡은 큐레이터의 설명이 있은 후 기자 질의응답이 진행됐다. 단 하나의 질문만이 나왔다. 감독 선임과정에 불거진 잡음과 프랑스 작가 편중에 대해 비판 여론이 일고 있음을 아느냐는 것이었다. 캐플랑은 이에 대해 “내가 이곳에 오기 전 벌어진 행정적인 일에 대해서는 유감이다”고 즉답을 회피하면서 “그러나 최선을 다해 토론하고, 아이디어 공유와 대화를 통해 부산예술과 함께 하려 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프랑스에서 “한국작품이나 작가를 소개하는 것이 하나의 관심사였다”고 말했다. 이 같은 캐플랑의 발언에 대해선 아무런 질문도 나오지 않았다. 예상했던 뻔한 대답과 수개월에 걸친 비판 여론에 대한 피로감이 중첩되는 장면이었다.
한편 이날 기자간담회장 입구에서 부산대 미술학과 학생이라고 밝힌 여성이 프랑스 전통의상을 입고 바게트를 나눠주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부산비엔날레 파행 운영을 비판하고 항의하는 퍼포먼스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전시가 본격적으로 열리기도 전에 벌어진 이 두 상황은 이번 부산비엔날레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감독 선정과 작가 선정에 따른 비판 여론도 들끓었지만 이는 곧 지나친 지역주의나 배타주의가 아니냐는 반격을 받았다. 또한 오광수 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사퇴로 위원장 사퇴를 요구하면서 안티비엔날레를 주창하던 부산지역 문화예술단체가 명분을 잃어 사분오열된 모습도 엿볼 수 있었다.
이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온전한 운영 매뉴얼의 부재에 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2002년부터 10여 년에 걸쳐 부산비엔날레라는 이름을 걸고 행사를 열어왔다는 점에서 이마저도 주장도 왠지 옹색해 보인다. 전시를 둘러싸고 빚은 갈등이 남긴 상처도 깊지만 무엇보다 미학적, 비평적 언어로 평가받아야 할 전시가 그럴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번 부산비엔날레는 더욱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부산=황석권 수석기자

 

[Special Artist] 손동현

전통의 현대적 계승!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이렇게 낡고 철 지난 슬로건을 들먹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 손동현의 작품에선 자의건 타의건 여전히 이 화두가 유효하다. 작가는 지극히 전통적인 제작방식을 고수하며 동시대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다룬다. 그의 작품은 일견 가벼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각도로 진지하게 해석되는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다. 10월 24일부터 11월 13일까지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소나무>라는 타이틀로 그의 개인전이 열린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손동현의 작품세계를 살펴본다.

손동현과 그의 ‘동양화 친구들’

함영준  커먼센터 멤버

손동현은 크게 두 개의 키워드를 가진 미술가다. 동양화와 대중문화. 손동현은 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러나 너무 뻔하게 곡해될 소지가 다분한 만남을 거의 10년 동안 밀어붙였다. 일견 단순한 작업 논리로 인해 손동현의 작업은 꽤 접근하기 쉬운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는 동양화가 가진 특유의 공예적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재현의 대상으로 선택하는 소재가 접근하기 수월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1980년생인 그가 또래보다 빠른 시기인 2006년에 첫 번째 개인전을 열고, 미술계 호황의 끝자락에 잠시나마 걸터앉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이후 미술이 대중과의 만남을 자처하는 제스처를 취할 때 주로 이용하는 많은 기획에 참여하게 되었다. 현대미술은 난해한 것이고 동양화는 고고한 정신세계를 담은 것이라는 대중의 추측과는 반대로 슈렉이나 맥도날드 아저씨 같은, 아이들이나 반길 캐릭터를 장지에 옮겼기 때문이다. 만화와 미술의 만남이랄지, 본래의 발랄한 느낌이 많이 퇴색한 한국의 ‘팝아트’ 기획에서 주요 작가로 그림을 걸었다. ‘젊음’이나 ‘상상력’ 같은 단어에 어울릴 법한 행보였다.
이는 소위 ‘포스트-모던’한 행보로 독해되곤 했다. 1990년대를 전후해서 ‘포스트-모던’이 한국으로 유입되면서 문화의 다원주의라는 맥락은 문자 그대로 당대의 문화를 이해하는 키워드가 되었다. 만화라는 맥락을 화이트 큐브에 거는 ‘작품’으로 승격시킨 서구의 많은 작가가 주로 1960년대를 전후해서 탄생한 것과 비교해보면, 한국에서 ‘팝아트’란 1980년대의 3고(高) 호황에 따라 해외의 문화를 마치 제 것인양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세대를 통해 가능했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로 채택된 셈이다. 더 이상 현대미술의 재료는 진지하고 심각한 정치적, 사회적 혹은 개인의 도 닦기식 미학적 전통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는데, 주변의 모든 사물이 대중자본주의로부터 발췌된 문화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손동현이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낼 당시는 아마도 일본 만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이해했던 소위 ‘오타쿠 문화’가 상륙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하드코어하게 망가와 아니메에 미쳐있지 않더라도 한국에서 자란 소년 소녀들에게 ‘만화영화’는 또래끼리 이해하고 즐기는 문화의 한 종류가 된 시점. 5시30분에 오후 방송을 시작하던 공중파 티브이는 7시 언저리까지 계속해서 일본 만화영화를 방영했고, 일요일 아침마다 방송국은 오래된 미국 만화영화를 틀었다. 이는 주로 원산지가 불분명하게 번안되어 권선징악의 간단한 스토리를 반복했다. 대부분이 톤이 선명한 원색의 유니폼을 입은 소년 소녀가 회색톤의 유니폼을 챙겨 입고 기괴한 체격을 한 악당을 물리치는 이야기였으므로, 나중에는 착용한 옷의 색깔과 주인공의 외양만 보더라도 그가 어떤 행동을 일삼을 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한편,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손동현은 동양화에서 이야기하는 ‘진경’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두고 고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겸재를 비롯 무수한 한국의 동양화가에게 영감을 준 혁명적인 아이디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을 그림으로 옮기면서도, 동시에 그리는 이의 정신성을 반영한다는 수도사적 면모를 겸비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이러한 교육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행보였을 것이다. 현대라는 환경, 어쩔 수 없이 서구화가 진행되어 온 세계의 도시들이 엇비슷한 모양을 갖췄을 때, 과연 풍경화란 무엇인가. 영웅이나 스타로 추앙받는 인물이 부재했을 때 초상화의 소재가 될 수 있는 모습을 갖춘 대상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청년의 특권인 반항심이 결합되면서 손동현의 동양화는 동양화과라는 특이한 미술학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의 미술교육 제도, 혹은 여전히 철옹성을 자랑하며 변화를 거부하는 전통이라는 이름과 현대미술 작가로서의 개인이 어떻게 조응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품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손동현은 가장 가까운 곳부터 해결하고자 했다. 우선 자신의 유년을 살피고, 그리고 계속 유예되어 온 청춘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장지에 옮겼는데, 그것은 바로 대중문화에서 즐기던 이미지였던 셈이다. 그것은 초상이라는 소위, ‘전신사조’라는 철옹성 같은 방법론을 스스로에게 맞춰버린 결과였다. 첫 번째 개인전에서 그는 특히 3D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주목하는데, 이는 순전히 눈에 보이는 형체를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산술적 데이터의 산물이었으므로, 유독 대상의 정신성을 드러내야 한다고 믿어지던 동양화의 초상에 가장 잘 어울리는 대상이기도 했다. 게다가 무의미한 한자어로 음차해서 작품 제목을 정한 것은 단순한 언어유희를 넘어서 대중문화가 가진 ‘껍데기뿐인’ 혐의를 역이용하는 재기발랄한 시도였다.
그의 시도가 대중문화의 맥락을 좀더 세심하게 이용한 것은 현재까지 대표작으로 불리는 마이클 잭슨 연작이다. 총 40점으로 구성된 호기로운 초상화 시리즈인데, 마이클 잭슨이 팝이라는 대중문화의 큰 부분을 좌지우지했던 시절을 초상으로 점검함으로써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초상화라는 인터페이스를 연구함과 동시에, 현재를 아우르는 대중문화의 작은 역사를 작품의 흐름 속에서 포착할 수 있게 해두었다. 그리고 이후에 작업했던 <빌란(Villian)> 시리즈 역시 007이라는 대중 영화의 아이콘에서 묘사된 악당을 시대 순으로 감상할 수 있게 해서,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 중심의 대중문화가 과연 어떤 존재를 악당으로 설정해왔는지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후 약 3년간의 공백을 마무리하면서 이번에 윌링앤딜링에서 열린 전시는 <PINE TREE>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런데 기존과는 꽤 많이 달라진 모양이다. 마치 이전까지의 작업세계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작업으로 도약하려는 듯, 강한 의지가 엿보이는 호기로운 전시다. 총 8점의 작품이 걸려 있고, 전시마다 그렸던 문자도 1점과 드로잉처럼 작게 그린 족자 3점을 부록이라고 치면 전시장 정면에 걸린 커다란 초상 4점이 이 전시의 전부다. 이 초상들은 동양화에서 소나무를 이용하는 방식을 네 가지로 정리한 뒤에 각각의 방식의 대표성을 딘 것이다. <Pine the Great>는 창덕궁 옥좌 뒤에 있었던 <일월오봉도>(작가 미상)를 레퍼런스 삼아 군주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소나무다. 그리고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등장하는 화법과 소나무는 <Mister High Fidelity>라는 이름으로 표현되었다. <Shaman the Evergreen>은 악귀를 쫓는 주술적 의미로 그려지던 ‘까치호랑이’ 민화에서 차용한 작품이고, <Master Knotty Needles>라는 작품에서는 ‘십장생도’에서 장수의 상징으로 표현되어온 소나무를 참고했다.

 한지에 수묵채색 194×130cm 2009

Portrait of the King (30) 한지에 수묵채색 194×130cm 2009 한지에 수묵채색 194×130cm 2009

손동현Donghyun_Son_영웅수파만선생상The_Portrait_of_Hero_Mr.Superman_~

영웅수파만선생상(英雄守破慢先生像) 한지에 수묵채색 190×130cm 2007

문자도-코카콜라  한지에 수묵채색 130x320cm 2006

문자도-코카콜라 한지에 수묵채색 130x320cm 2006

21세기 초상화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다. 기존의 손동현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던 대상이나, 혹은 마치 이 시대의 영웅으로 추앙했던 ‘팝 아이콘’을 동양화의 화풍으로 옮기는 작업을 해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역으로 접근해, 대중문화에서 차용한 이미지가 아니라, 유명한 작품으로 전해져 오는 동양화의 대표적인 작품과 스타일을 차용해서 유사 대중문화의 캐릭터를 창조했다.
헌데 이러한 접근은 마치 원래의 텍스트를 재료 삼아 만들어지는 ‘동인’ 문화라는 서브컬처를 연상하게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등장한 이러한 문화는 기준이 되는 원래의 작품을 놓고, 그 작품의 팬들이 캐릭터를 다시 배열하면서 새로운 스토리를 창출하고 서로 공유하는, 소위 ‘2차 창작’ 행위를 그 기본으로 삼는다. 각 캐릭터의 특징 중에 유독 팬들의 지지를 받는 부분을 과장해서 표현해 적극적으로 스토리 요소에 첨가함으로써, 원래의 텍스트는 단지 캐릭터를 제공하는 수준으로 받아들여지고, 특별히 독특한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을 분리해서 집중적으로 감상하게끔 하는 문화다.
이러한 ‘선택과 집중’의 방법 중에 대표적인 것은 ‘모에 의인화’다. 이는 간단히 설명해, 사물에 캐릭터를 부여해서 마치 인간처럼 보이게끔 묘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에 의인화’의 대상은 단순히 동물이나 주변에 존재하는 사물뿐 아니라, 건축물이나 심지어는 눈에 잡히지 않는 시스템까지 포괄한다. 토끼라는 동물이 있다면 온순하고 겁이 많은 빨간 눈과 긴 귀를 가졌다는 점에 착안해서 비교적 단순하고 알기 쉬운 상징을 섞어 인물을 만들어낸다거나, 아파트라는 주거 시스템이 있다면 편리하고 깨끗하지만 아파트가 상징하는 경제적 의미를 눈치챌 수 있게끔 인체나 의상의 특징을 뒤섞어 인물을 만드는 행위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손동현의 작품을 순전히 ‘모에 의인화’를 거친 ‘동양화 동인지’라고 단정 짓기에는 여러 가지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우선 ‘모에 의인화’가 집중하는 부분이 원본이 가진 캐릭터의 특성을 데이터베이스화해서 팬끼리 서로 알아보는 것을 재미로 삼고, 어떤 특이한 부분을 참신하게 선택해서 표현하느냐에 성패를 두고 있다면, 손동현의 <소나무> 시리즈는 오히려 동양화라는 전통적이고 공예적인 매체가 기나긴 역사 동안 집중했던 ‘정신성’, 즉 화폭에 표현되는 모든 사물이 그리는 이의 ‘정신성(혹은 캐릭터)’을 표현해야 한다는 법칙을 대중문화의 방법에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성패가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동양화에 실린 소나무가 비단 식물의 한 종류일 뿐만 아니라, 군주의 권위나 잡귀를 쫓는 주술성, 탈속을 꿈꾸는 선비의 고고한 성정, 인간 본연의 욕망인 장수 등의 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손동현은 캐릭터를 등장시켜 초상화를 표현할 때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할 표정이나 근육, 포즈를 통해 그러한 의미를 대표하게끔 설계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동안 (맨해튼이 파괴되는 디스토피아를 병풍으로 그린 <섬> 시리즈를 제외하고는) 인물화의 양식적 맥락을 고민해 왔던 작가가 드디어 동양화의 가장 큰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산수화에 대한 대중문화적 언급을 통해 한동안 시도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데에 있다. 앞서 간단히 언급한 대로 동양화란 중국의 영향으로 유독 동아시아에만 전해져 내려오는 특별한 공예 양식 중 하나이자 불가피하게 미술대학에 속한 묘한 영역인데, 그동안 동양화가로서 훈련받은 손동현이 가장 염두에 두었을 법한 ‘산수’에 대한 저만의 해석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자신의 작품세계를 점검하기 위해 동양화라는 넓은 바다에 다시 뛰어드는 용기를 드러냄은 물론, 동양화 전체를 아우르는 화려한 준법의 난도 높은 기교를 마음껏 뽐낼 수 있는 계기도 될 터이니, 중견 작가로 접어든 작가의 의미심장한 한 수인 셈. 마치 자신의 앞날을 스스로 점치기라도 하듯이 손동현은 이번 전시에 부록처럼 걸린 (마치 미국 코믹스의 표지를 연상케 하는) 족자에 그려진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동양화라는 시스템에 대한 나름의 재해석을 예고하고 있다. ●

손동현은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2006년 아트스페이스 휴에서 첫 개인전 <파압아익혼(波狎芽益混)>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7회 개인전을 열었다. <메이드 인 팝랜드>(국립현대미술관), <애니마믹 비엔날레>(대구미술관) 등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쌈지스페이스 레지던시(2006~2007)와 몽인아트스페이스 레지던시(2013~2014)에서 작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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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4일부터 11월 13일까지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열리는 손동현의 일곱 번째 개인전 전시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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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갤러리2에서 열린 개인전 <villain전> 전시광경

 

 

[Artist Review] 정현

정현의 작품에는 인간에 대한 애정, 연민이 서려있다. 강렬한 표현으로 인간의 본질적인 면을 드러내는 정현이 10월 15일부터 11월 9일까지 학고재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다. 이번 전시에서는 재료가 가진 특성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조각과 드로잉 신작을 함께 선보인다. 인간이 근원적으로 짊어진 무게와 오랜 시간이 걸려 완성되는 ‘아픔 후의 성숙’이 그의 작업에 어떻게 반영됐을까.

소진된 물질들의 에코그래피

강수미  미학, 동덕여대 교수

6톤의 무쇠로 무지막지하게 만든 검은공과 1g이 채 안 되는 콜타르 용액은 어디서 만나는가? 몸체 전체가 쩍쩍 갈라져 그 틈새마다 검은 기름때로 눅진한 낡은 침목(枕木)과 바늘 한 점 꽂을 데 없이 단단한 흑색 석탄덩어리는 또 어디서 접점을 갖는가? 그것들 모두가 여타 소소한 사물들보다 자체의 강력한 물질적 속성을 외관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아니면 그것을 마주한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그로부터 제각각 다르지만 지각의 강도 면에서는 강렬하고 자극적인 질량, 밀도, 부피, 색채, 형태를 보게 된다는 점에서? 관점에 따라 다양한 관계를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 정현의 경우에 한정하면 그것들은 조각의 지평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 넘치는 강렬함과 표현성을 내장한 물질들은 정현의 창작세계에서 ‘인간’이라는 근원적이고 현실적인 예술 주제   (기의)를 가시화하는 모티프(기표)로써 접점을 형성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조각에서 인간의 몸을 보려 하지 않는다. 그의 드로잉에서 인간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는 쪽 또한 나이다. 여기 감상자로서 나는 그의 작품들이 내뿜는 막대한 물질적 존재감, 언어를 희박하게 만드는 시각적 표현력, 관객과의 즉물적(literal) 조우를 유도하는 설치의 힘을 인간적인 의미나 맥락으로 약화시키고 싶지 않다. 이를테면 국내 굴지의 철강회사에서 만들어 사용한 일명 ‘파쇄공’이 10여 년 간 25m 높이에서 수직 낙하돼 쇠의 불순물을 정제하는 동안 16톤에서 8톤으로 소진된 과정을 인간 시련의 역사와 유비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또 수십 년간 기차 하중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견뎌온 선로의 버팀목을 삶의 무게에 짓눌릴 수밖에 없는 인간 운명에 대한 존재론적 비유로 해석하거나, 검붉게 녹슨 철근들이 얽히고설킨 형상을 인생의 신산(辛酸)한 속성과 유비시켜 논하기를 원치 않는다. 통상 그런 해석이나 논리는 여차하면 센티멘털리즘으로 변질돼 사람들에게 상투적 위로만 남기기 때문에.
그런데 이런 나의 비평 방향과는 상관없이, 혹은 그런 차원에 앞서서 작가는 애초부터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작품을 했을 수 있다. 다르게는, 인간과 인간형상의 면대면 관계 및 교감에 자기 작업의 가치를 설정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작가는 오래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이 시대의 실존상, 뻥 뚫리고 찢겨지고 일그러진 절박한 인간의 순간순간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려고 한다.” 1992년《  월간미술》에 기고한 작가의 글에서 발췌한 이 문장은 조각가 정현이 둔중한 진흙덩이를 각목으로 퍽퍽 쳐내고, 딱딱한 석탄덩이를 끌로 깍깍 파 들어가고, 찐득한 콜타르를 종이 위에 쫙쫙 그어나가는 촉각적 표현법으로 무엇을 가시화하고, 어디에 도달하고자 했는지를 말해주는 것 같다. 그것은 문맥상 여지가 없듯, 인간의 실존적 고통을 시각적으로 수사(修辭)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휴머니즘적 미술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니 질척거리는 감상주의가 두려워 그의 미술에서 인간을 피하려 한 나는 틀렸다.
물질과 인간의 정밀 조영(照影/造營)
그런데 정현의 조각이 인간을 은유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좋다고 느낀 것일까? 그의 작품들이 감상자의 휴머니즘적 정서를 어루만지므로 감동적인 것인가? 둘 다 맞다 해도, 그것으로 충분한가? 이제까지 작가 자신은 물론 여러 논자들이 그의 작업에서 거의 예외 없이 인간을 향한 가치를 발견했거나, 반대로 인간적 가치를 통해 그의 미적 세계를 정의했다. 하지만 결코 감추거나 위축시킬 수 없는 정현 조각의 어떤 면모는 그 같은 순환논법과 순치된 인문주의로는 밝혀낼 수 없어 보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유는 사물/대상의 존재(objecthood) 자체, 행위(performance) 자체, 사물의 질서(order of thing) 자체가 정현의 미술을 결정화하는 절대적 속성 중 하나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인간중심주의의 의미망으로 포착할 수 없는 객체다. 어떻게 우리가 아스팔트 길닦이에 쓰는 아스콘의 질적 상태를, 기찻길 침목들에 가해진 압력의 강도를, 녹슬고 삭고 붉은 부스럼을 일으키는 금속의 시간과 생태를 인간적으로 전유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 물질들이 정현이라는 미술가의 개입을 통해 산맥처럼 강인한 인간 육체의 누운 모습을 연상시키는 조각이 되고, 대지 위에 두 다리로 버티고 선 인간 군상을 암시하는 설치작품이 되고, 자코메티의 그것처럼 바짝 마른 남자 입상을 환기시키더라도 말이다.
물론 이런 논의는 작가의 미술이 그간 어떻게 전개돼왔는지를 살펴봐야 균형을 이룰 것이다.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은 정현을      ‘올해의 작가’로 선정하고 개인전 개최와 함께 도록을 발간했다. 거기 글을 쓴 학예사 박수진은 작가의 작업세계에 대해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는 인체의 역동성이 표현상의 중심을 이루었다면, 1990년대 중반부터는 재료와 도구가 중심이 되면서 제작과정상의 우연성이 드러난다. 특히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는 재료의 물질성이 더욱 부각되는 시기”라고 설명한다. 나는 이러한 시기 구분에 동의한다. 하지만 2014년 현재 작가의 최근작을 고려하면, 그 변화의 핵심을 좀 더 구체적으로 추출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정현은 마닐라삼에 석고를 묻혀 골조를 만들고 그 위에 콜타르를 착색한 인체 조각에 매진하던 초기, 예술의 이름 아래 질료를 통치해 인간을 형상화한 것이 맞다. 하지만 점차 물질들의 본래 성질과 우연하고 가변적인 외적 조건에 자신의 예술적 의도와 표현 방식을 반향(echo)해가는 식으로 이행했다. 즉 작가의 조형적 목적에 물질들을 종속시켜 시각적으로든 의미상으로든 인간과 닮은 형상을 빚어내는 데서, 물질 자체가 발산하는 특성 및 주변 맥락에 작가의 의식과 감각이 메아리치듯 반응하는 식의 작업으로 나아간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얼마 전 17번째 개인전에 내놓은 ‘8톤의 파쇄공’에 이르러 정현의 조각은 한 사물의 존재부터 주어진 질서까지, 물   (物) 자체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제시하는 미술의 완성형에 거의 도달한 것 같다. 인간 형태적으로(anthropomorphic) 전유되거나 인간중심적 의미로 해석되기 전에 물질이 가진 자체의 속성과 외관, 그리고 그 물질이 온몸으로 겪은 전(全)역사를 긍정하는 미술이 그것이다. 이 미술은 그럼 비인간적인가? 이 미술에는 인간이 부재한가? 그렇지는 않다. 인간의 몸을 닮은 그의 1980~90년대 조각은 물론 격렬한 감정의 인간 얼굴을 연상시키는 요 근래의 드로잉들과 마찬가지로, 정현의 최근 조각에 인간은 근본 축으로 내재한다. 예컨대 파쇄공 조각처럼 물 자체인 작품에도 말이다. 다만 관계의 방식이 달라졌다.
이전 작품들이 말하자면 물질의 물질성을 녹여내 인간이라는 의미를 상징하고 표현하고 추상하는 데 창작 의의를 둔 것이라면, 현재의 작품은 물질에 대한 인간의 즉각적이면서 즉물적인 반향을 목표로 한다. 이때 반향의 첫 인간은 그 물질과 조우하고 거기서 예술의 가능성을 발견한 작가 자신이다. 하지만 그 물질이 일종의 ‘발견된 오브제’로서 미술작품으로 전시되었을 때 불특정 다수의 감상자가 얼마든지 그 인간에 해당할 수 있다. 그/녀는 거대한 크기와 무게감, 단단함, 그러면서도 긴 세월 강물에 잘 깎인 조약돌처럼 매끈함과 군더더기 없음을 갖춘 검은 파쇄공과 대면해 그 객체가 발현하는 객체성에 신경감응하며 특정한 상을 그리게 된다. 그 상을 우리는 감상자 주체의 주관에 따라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는 것이라 단정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컨대 10년간 셀 수 없이 많은 횟수로 공중 낙하하면서 물리적으로 마모된 거대한 무쇠 공은 사람들에게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동시에 간단히 말로 할 수 없는 응축된 통증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상상력을 발휘해 의미를 그렇게 각색하는 것이 아니라(우리는 그렇게 착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는 그 쇠공의 지금 여기 상태에 감상자가 감응해서 부지불식간에 드는 판단이다. 그 판단의 근거는 보는 이의 주관과 심리에 있지 않고 대상의 질적, 물리적 상태로부터 발현돼, 보는 이의 지각과 의식에 현상되는 것이다. 그 점에서 나는 정현의 몇몇 조각에 에코그래피(echography, 照影)라는 용어를 적용하고 싶다.
에코그래피는 의학에서 ‘초음파 검사법’ 또는 ‘초음파 조영술’ 등으로 불리는 진단법인데, 쉬운 예로 태아의 초음파 사진처럼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신체 내부의 상태를 고주파를 이용한 반향그래프(echo-graph)로 알아내는 방식이다. 데리다는 이를 철학적 논쟁에 도입해 인간과 텔레비전 사이의 상호작용을 내재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그와 비슷하게 나는 에코그래피의 방식이 우선 작가 정현과 그가 주목한 현실의 물질들 사이에 작동했고, 나아가 잠재적 관객의 미적 경험과 물 자체로 제시된 그 물질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유추해본다. 작가가 절반으로 마멸된 파쇄공, 해체된 침목, 부러진 철근 마디를 두고 “잘 겪은 시련은 아름답다”고 말할 때, 그러니까 그 아름다움은 의인화된 것이 아니라 정현이라는 인간의 눈과 피부에 투영된 물질의 질적, 외형적 상태다. 그것은 우리 앞에 일시적인 것으로 나타나지만 고유의 내력으로 그렇게 존재하게 된 것이며, 우리가 그렇게 여기는 것 같아도 사실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게 하고 생각하게 한다. 미의 주체와 객체 관계를 이렇게 역전시키고 복합화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정현의 최근 작업은 ‘인간’을 다른 지각의 조영술로 새롭게 조영(造營)하는 중이라는 비평이 개시될 수 있을 것이다. ●

정현은 1956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조소과와 파리국립미술대 조소과를 졸업했다. 1992년 원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연 후 서울, 도쿄, 베이징, 프랑스 등에서  17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그룹전 및 기획전에 참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금호미술관 외 다수의 기관에 작품이 소장돼 있으며 2014년 제28회 김세중조각상 본상을 수상한 바 있다. 현재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브론즈 316×92×62cm 2013(오른쪽)

<무제> 브론즈 316×92×62cm 2013(오른쪽)

 

[Artist Review] 박영남

 

붓 대신 손가락으로 색과 빛을 겹겹이 쌓았다. 손가락의 촉각성이 나타나는 추상회화로 널리 알려진 박영남이 금호미술관에서 개인전 <Self Replica>(10.16~11.9)를 연다. 이번 전시를 통해 그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디지털적인 빛의 미감을 만들어냈다. 무한한 자기복제와 변주로 열린 시각을 제시하는 그의 작품세계를 살펴본다.

복제(Replica)와 복수화(Re-pli)

강태성  미술비평, 국민대 교수

작가 박영남은 ‘self replica’라는 주제로 금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는 이 전시에서 세 가지 유형의 작품을 선보인다. 첫째 유형은 다채로운 사각형을 연결한 작품이고, 둘째 유형은 흑백 사각형 위에 사선과 흔적들이 있는 작품, 셋째 유형은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다. 전시장 1층 정면에는 10호 캔버스 21개를 길게 붙인 작품을 제시한다. 작가가 “색상이 형태가 되길 원한다”고 언급했듯이, 실제로 다양한 색상은 4각 형태를 만들며 다양한 리듬감을 표현한다. 이 공간은 2층의 공간과 대조된다. 2층 전시장은 완전한 흑백의 공간을 이루면서 무게감 있는 거대한 크기로 관람객의 동선을 압도한다. 흑백과 유채-무채색의 대조와 함께 손끝으로 검은 얼룩, 회색 얼룩을 이뤄내어 일종의 낙서의 자유로움처럼 지우고 덫칠하는 행위들을 표시한다.
3층의 좌측 공간에는 1층의 색채와 연관된 작품들이 전시되고 우측공간에는 2층의 흑백 작품들이 전시되어 대조를 이룬다. 특히, 3층에는 색채들이 손끝으로 화면을 더듬듯이 그려져 따뜻한 느낌을 갖게 한다. 손의 자취들은 촘촘하거나 듬성듬성하게, 정적이거나 동적으로 화면에 올라와 있다. 때로는 가로선이 세로선, 사선들과 만나며 조형적인 질감 표현과 행위의 의미들을 제시한다. 손끝으로 작게 찍어낸 물감의 느낌은 조용한 숨결처럼 담담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와 달리, 사선은 좀 단호한 자세로 소리 지르는 것같이 심상(image of mind)을 나타낸다. 그래서 작품은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심상의 재현도 포함한다. 인덱스(검지)와 같은 손가락은 구체적인 인덱스 없이 행위를 제시한다. 이 촉각적인 터치들이 이뤄낸 선들의 뭉개짐과 퍼짐은 추상표현주의적인 공간들과 연관된다.
이번 전시는 벽에 걸어 놓은 작품부터 벽에 기대어 놓은 작품까지 연출되고 심지어 비계까지 한데 놓여있어 전시장이면서도 작업실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러한 연출에서 ‘과정 중’이라는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비계의 형태들을 추상작품에서 만나게 된다. 이 형태적 만남은 작품과 세계가 ‘연속’된다는 것을 연상하게 한다. 그의 작품은 순수한 추상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 즉 현재의 물체들이 빛 속에서 새로운 구체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실제 추상주의자들은 어떤 사물성도 부정하며 색 자체이기를 강조하는 데 반해 그는 이러한 사물과의 연상성을 추상성에 포함시킨다.
지하 전시공간에서도 조형적 대조가 두드러진다. 좌측 공간에는 같은 크기의 10호를 다양하게 조합하여 4점의 회화작품을 제시하는데 이는 우측 공간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과 대조된다. 좌측 공간은 하나의 요소가 다양하게 변주되어 각기 다른 작품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가변적이고 정하지 않은 부정은 우측의 미리 정해놓은 조형성과 대조된다. 색채적으로도 안료의 색과 빛의 색이 대조된다. 또한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은 평면 위에 놓여있기보다 그 근원이 전시장 너머, 세상 너머의 초월적인 ‘광원’을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다르다. 작가는 이러한 흑백과 색조의 대조, 미리 정해진 작품과 정하지 않은 부정의 작품의 대조를 제시한다. 그는 이 대조를 통해서 관람객이 리듬의 강약처럼 이질적 공간을 여행하게 한다.
만짐과 부정
우선 그의 작품은 손으로 그렸는데도 마치 나이프나 다른 기구들을 사용한 것처럼 매우 다양한 기법을 보여준다. 손끝으로 찍어낸 듯한 그림, 손날로 빠르게 칠한 그림은 붓으로 그려낸 것과는 달리 좀 더 직접적이다. 손으로 만져내는 물질은 다른 도구보다 육체적으로 감각화된다. 작가는 손으로 다양한 색을 바르고 다시 그 위에 물감을 흘리고 미끄러뜨려 자취들을 만들어낸다. 신체의 움직임은 몸의 기록이자 자취로서의 움직임이다. 여러 색을 겹쳐 놓은 자취가 있는 추상의 형태(색채)들은 단순히 불투명한 덧칠이 아니라, 실제 색면이 있는 흔적(trace)이다. 이것은 색층 사이에 이야기가 있고 단순하게 밑의 색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흔적이 남아있는 부정이다. 즉, 과거가 공존하는 부정이다. 이는 차연(differance)으로서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부정하는 것이다. 손으로 그린 그림은 촉각적인 공간을 열어놓아 직접적으로 몸과 인접된다. 즉 캔버스와 물감(객체) 사이를 작가가 ‘만지고’ ‘만져지는’ 관계들을 제시한다. 메를로 퐁티의 ‘만지기’를 통해 주체와 객체 사이의 이분법을 부정한다. 만지기는 만져지기를 통해서 이뤄지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의 이러한 행위는 손끝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제스처’라는 의미들을 형상화한다. 이는 “감성적인 유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감의 유출처럼, 손끝에 의해서 빠르게 밀려나 흰색을 남기면서도 밑의 색을 드러내 순간적이며 시간적인 존재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간은 직접적이고 분출적인 마음과 물감의 유동성을 이뤄낸다. 이렇게 직접적인 촉각은 이성이기보다는 ‘욕망’과 같은 상징적인 동인들을 생각하게 하는데 이는 시각에 의존한 회화보다 회화의 육체화란 의미를 강조한다. 이러한 손의 직접성은 회화의 본질을 언어나 생각, 개념 이전의 상태로 바꾸어 놓는다. 롤랑 바르트의 표현처럼 박영남에게도 손은 욕망으로서 억제하는 합리성의 의미를 넘어서고 있음을 발견한다. 손의 욕망은 무수히 반복되는 손장난이나 낙서와 같은 자유로운 선들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울러, 작가는 물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손바닥으로 빠르게 긁어내는 행동, 뿌리는 행동, 그리는 행동, 찍어내는 행동 등으로 욕망을 다양하게 제시한다.
그렇다고 작가가 손의 욕망만을 형상화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살펴본 다양한 대조는 시각과 촉각 사이의 대조로도 나타난다. 사실 그의 회화는 거리를 두고 볼 때 강력한 조형적 구성이 존재한다. 시각은 생각과 관념, 본질 등과 어원적(idein-idea-ideology, eidos)으로 연관되는 것으로 명백함, 사유, 상상력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작가는 촉각적인 공간의 의미와 함께 이러한 시각적인 의미들을 용인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부정들이 공존하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의 부정의 몸짓은 차연을 포함하여 두 가지의 또 다른 부정을 제시한다. 하나는 부정(不正, 否正)하기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不定)의 부정이다. 마르셀 뒤샹이 제시한 ‘정하지 않은 부정’의 의미를 그에게도 연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박영남은 작품의 완성이 그 제시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작품의 완성이란 전시될 작품 한 단위의 완성이다. 이미 한정되고 결정된, 완성된 회화이기보다는 계속 변화하는 열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부정의 작품은 완성되었으나 역설적으로 진행 중이다. 그래서 그 작품의 외연은 열려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품을 조직하는 요소들도 열려있어서 ‘가능태’와도 같다. 이 ‘열린 작품’은 크기와 구성이 경우마다 다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 그것은 정하지 않은 부정이다. 아울러 이 개인전에서 작가는 <replica> 이외에 다른 작품 제목이나 제작 시기를 관람객에게 제시하지 않는다. 이 점 역시 ‘과정 중의 작품’처럼 한정하지 않고 열어놓는 개방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정하지 않은 부정(不定)으로서 작품의 일반적인 의미를 부정하며 열린 공간으로 관람객을 초대하는 것이다.
사각에 대해 작가는 ‘대지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설명한다. 작가는 여기서 수직과 수평의 격자를 추론했고 마치 수학에서 x와 y처럼 공간을 구성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이러한 시각은 현대회화나 조각,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시각적 요소인 그리드, 곧 격자와 같다. 그의 격자는 현대미술의 메커니즘, 추상성의 격자와 같은 시대성을 갖는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과거 추상작가들처럼 닫혀서 굳어진 형태를 띠지 않는다. 때에 따라서 두 개의 캔버스로 형성된 작품은 제작시기에 결정되었기보다는 완성 후에 다른 화면과 연합되기도 하고 또 다른 작품과 바뀌기도 한다. 특히, 이번 사각형의 연작을 통해 작기 복제라는 의미가 드러나는데 10호 단위에서 시작해 다른 작품들과 이웃하며 놓여진 것이다.
실제로, 그가 지난 한 해 동안 준비한 10호 작품은 모두 200점인데 이번 개인전에 70점을 사용하였다. 23개짜리 작품, 2개로 떨어진 연작, 24개짜리 작품 등으로 구성된다. 때로는 10호 9개의 같은 수의 캔버스가 다른 형태로 연출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웃하기는 실제로는 작품으로서 그 외곽의 모양을 완성시보다는 캔버스들을 이웃시키며 ‘형성’하는 과정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에게 ‘이웃하기’는 ‘하나’의 작품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사각의 확대는 우선 10호 내에 가로, 세로 각 3줄로 사각형 9개를 만들어내며 이것이 여러 개의 10호로 놓이면서 사각형은 여러 개로 증식한다(repliaca, replicare). 색의 단위로 구성하고 그 면을 9면의 사각형으로 나누어 색조를 조합하고 이것을 병렬로 제시하여 색면의 숫자를 늘려나간다. 이는 ‘자기복제’이고 ‘증식’이다. 즉, 복제(replica)는 다시 보면 “다시 주름잡기(re-pli)”인데 그는 화면을 1에서 9로 미시적으로 구분하면서 동시에 가장자리(repli)에 이웃시켜(竝列) 복수화한다(replicare). 이 어원(replicare)처럼 그는 화면을 뒤로 접어들어가거나 빛을 반사하는 행위들을 포함시킨다. 이는 무한으로 확장될 작품의 증식이다. 작가는 그 요소들(형태소 또는 의미소)처럼 단위를 형성한다. 이렇게 증식해나가는 작품 수는 색을 통해 형태를 전개해가는 ‘이야기’를 더 길게 하여 마치 장편영화처럼 늘려 놓는다. 이러한 수적, 양적인 팽창은 순수한 조형성의 이야기를 드라마처럼 늘리는 것이고 이때 전혀 다른 미술만의 ‘조형 이야기’가 형성된다. 또한 이때 사각은 디지털 세계의 링크되는 논리처럼 상호 연관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는 구조를 갖는다. 이러한 박영남의 사각(텍스트)은 마치 실제가 있는 하이퍼텍스트의 기능을 수행한다. ●

박영남은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서양화과와 뉴욕시립대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그는 1979년 고려화랑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제3회 김수근미술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아라리오갤러리 등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국민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캔버스에 아크릴 253×600cm 1999(왼쪽) 금호미술관 전시광경

<달의 노래> 캔버스에 아크릴 253×600cm 1999(왼쪽) 금호미술관 전시광경

 

[Artist Review] 정영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적멸의 화가, 정영렬전>(8.14~11.2)이 열렸다. 전후 앵포르멜에서 전통적인 한지작업까지, 추상화가 故 정영렬(1934~1988)의 30여 년 작업세계를 대표하는 60여 점이 소개됐다. 이번 전시는 단색화를 중심으로 인식되어 온 한국의 전후 추상미술 흐름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정영렬의 회화 그 진면목을 살펴볼 수 있다.

청년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김영호  미술 비평, 중앙대 교수

지난 8월 14일부터 11월 2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 정영렬 회고전이 열렸다. 53세, 지천명의 나이에 아쉽게 생을 마감한 지 26년 만에 열리는 국립 기관에서의 첫 개인전이다. 이곳 덕수궁 전시관을 찾은 신세대 관객들은 이 낯선 화백의 그림 앞에서 세 번 놀란다. 1960년대 전반에 제작된 비정형적 추상미술이 주는 질료의 강렬한 힘에 한 번 놀라고, 그 에너지를 명상의 세계로 급속히 전환시켜 ‘적멸의 세계’로 귀의한 1970년대의 작품 앞에서 다시 한 번 놀라는 것이다. 이윽고 캔버스의 틀을 벗어나 재료로서 한지 자체에 주목하면서 ‘종이조형’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 1980년대의 작품 앞에 서면 변혁의 시간을 살았던 작가의 치열한 삶에 고개 숙여 감복하게 된다. 그러나 전시회를 둘러본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는데 미술사가로서 한국 전후 추상미술의 현장을 그대로  반영하는 화백의 작품 발굴과 조명 노력이 미미했다는 자책 때문이다. 정영렬 화백이 운명을 달리한 1988년 이후 워커힐미술관의 <정영렬 유작전>(1995)과 타계 10주년을 맞아 광주시립미술관이 기획한 <정영렬-침묵의 빛>(1998)이 있었음에도 그의 예술은 여전히 대중에게 회자되지 못했다.
한국의 전후 추상미술 영역에서 ‘단색화’가 핵심적 경향의 하나로 정착된 지도 오래다. 그리고 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그 영향력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특정한 미술경향이 화단 현장에서 오랫동안 맥을 유지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전후 한국 추상미술의 맥을 잇는 새로운 경향이 등장하지 못하는 현실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한국 전후 추상미술의 세포분열을 위한 에너지가 모더니즘과 함께 고갈된 것일까? 주변을 보면 추상의 영역에서 새로운 형식의 개발과 매체실험을 묵묵히 전개하는 신세대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추상화 경향이 하나의 미술양식으로 정착되지 못하는 현실을 포스트모던의 기후 탓으로만 돌려야 할 것인가? 한국의 추상미술은 단색화에서 시작해 단색화로 끝나야 하는 것일까? 화려한 색채와 거친 질료의 실험들은 언제까지 단색화의 행로를 위한 수레바퀴로만 존재해야만 하는가? 전시장을 찾은 신세대 작가들에게 정영렬 화백은 자신의 분신인 작품을 통해 말한다. 모더니즘의 핵심 경향으로서 서구 앵포르멜 추상회화가 이 땅에 유입된 이래 자성(自省)과 비판(批判)의 과정을 거치며 펼쳐온 치열한 실험정신은 오늘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다시 묻는다 : 청년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정영렬, 적멸78-3, 1978, 캔버스에유채, 132x163,국립현대미술관

<적멸78-3> 캔버스에 유채 132×163cm 1978

정영렬과 동시대 한국미술의 맥락
정영렬 화백은 한국 현대미술의 도입(導入)과 모색(摸索) 그리고 정착(定着)의 시기인 195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에 이르는 30여 년의 기간 동안 화단의 중심부에서 활동하면서 미술계의 변화와 단절의 마디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뿌리를 선불교의 적멸사상에 접목시킴으로써 독자적인 세계를 정립했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정영렬 화백의 위상은 그가 남긴 예술적 성과와 국제전 참가 경력 그리고 전위적 그룹 활동을 통해 확인된다. 미술평론가 이일 선생은 그를 한국현대회화 12인의 한 사람으로 주목했으며, 동시대 평단을 주도한 평론가 유준상, 김인환 등과 미술사가 정병관 교수 역시 현대미술을 둘러싼 단절과 지속의 관계항 속에서 왕성한 활동을 전개해 온 정영렬 화백의 노정에 대해 합당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정영렬 화백은 격변하는 1960년대, 국내외 문화적 상황에 부응하여 한국미술이 국제화단에 진출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화가의 한 사람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유럽과 남미 그리고 인도와 일본 등지에서 개최되는 유수 비엔날레와 국제미술제에 연속적으로 작품을 선보이며 한국 현대미술을 국제적 네트워크에 접속시키는 데 기여했다. 1965년에 열린 <제4회 파리비엔날레>를 서두로 1967년의 <제9회 상파울루비엔날레>, 그리고 1970, 1975, 1977년에 열린 <제2회, 제7회, 제9회 카뉴국제회화전>에 출품했으며, 1975년에 열린 <제3회 인도트리엔날레>에 참여한 것이 이를 반증한다. 정영렬 화백이 차지하는 위상은 전후 한국미술의 전위적 그룹 활동에서도 드러나는데 1962년에 창립동인으로 참여한 미술단체 <악튀엘>의 위상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밖에도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현대작가초대전>과 <앙데팡당>, <서울현대미술제>, <에콜 드 서울>과 같은 실험미술 단체를 자신의 예술적 산실로 삼고 있었다.
이상에서 보듯 정영렬 화백의 위상과 예술적 성과는 급변하는 한국 현대 추상미술의 전개 양상과 발걸음을 같이했다. 세속과 타협하기를 싫어했던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인 정영렬 화백에게 작품이란 삶을 둘러싼 존재의 조건과 투쟁의 방식 그 자체였다. 작품의 미적 자율성이나 경제적 가치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만큼 그는 생전에 개인전에 대해 무심했다. 1969년 화백의 고향인 광주에서의 첫 개인전에 즈음해 가진 일간지와의 대담에서 그는 개인전 자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생각을 말한바 있다. “아마 내 개인전은 이것으로 끝날 것 같습니다.” 그 발언은 그 후 10여 년간 유효했고 1980년에 한국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기까지 지속되었다. 공공미술관이 아닌 국내 화랑에서의 개인전은 1983년 동산방화랑 전시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유일한 것이었다. 작품을 상품으로 여기지 않은 외곬의 성격 탓에 화백의 작품이 화랑이나 미술시장의 네트워크를 통해 소통되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작품 제작에 치밀하면서도 열정적인 화가였고 많은 양의 작품을 생산했으며 편집광적인 작업의 결실들은 고스란히 유족의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정영렬 화백의 작품은 캔버스와 종이작업으로 구분된다. 매체를 넘어 시대별로 전개되는 표현형식의 차이로 작품세계를 정리하면  ‘비정형적 추상의 시기’(1959~1974), ‘기하학적 추상의 시기’(1974~1978), ‘종이조형의 시기’(1978~1988)로 나눌 수 있다.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59년 <현대작가초대전>에 출품한 것을 데뷔시점으로 삼는다면 이후 전개되는 작가로서의 화력은 30여 년간의 노정으로 마감된다. 이 예술적 노정은 제3공화국 출범 이후 격변의 시기에 전개되었던 외래미술의 수용(受容)과 정착(定着) 그리고 극복(克復)이라는 한국 현대미술의 전개양상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정영렬 화백의 예술적 노정 30여 년은 명확한 마디와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전위적 예술가로서 그의 족적은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을 재차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영렬 화백은 동시대의 동료들에 비해 덜 알려져 있으나 결코 전위미술의 주변부에 속해 있지 않았다.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실험적 경향들이 미술시장과 타협하고 새로운 제도권미술로 정착한 이후에도 변방의 첨병 역할을 고집했던 그야말로 당대의 진정한 전위적 미술가였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정영렬 회고전의 의미는 우선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로 대변되는 전후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의 비정형적 추상회화의 발아와 성장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역사의 흔적으로서 현대미술의 모색과 정착의 시기로 불리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르는 그의 작품에서 ‘단색화’에서 ‘종이조형’으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미술사의 단면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회고전을 통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예술가의 극명한 예술의지와 선명한 작가정신을 발견하고, 추상회화가 지닌 항구적인 가치가 아직도 우리 화단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새로운 형식논리로 시대정신을 담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정영렬 화백은 지적인 풍모와 보스적 기질이 넘치는 화단의 리더였다. 한국적 형상과 빛깔에 대한 탐구와 동양사상의 전통을 예술의 언어로 담아내기 위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 제작에 헌신했던 치열한 정신의 작가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열풍과 함께 불어닥친 평면회화에 대한 도전과 예술의 위기상황에도 불구하고 예술충동의 한 본령으로서 추상미술은 오늘도 굳건히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정영렬 화백의 실험정신이 추상회화의 창작과 비평 원리로서 ‘평면에 대한 인식과 페인팅 자체의 프로세스 그리고 질료의 물성’에 대한 재해석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에너지가 될 수 있기를 삼가 바란다.●

故정영렬은 1934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1969년 광주 Y싸롱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6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1988년 작고 이후 워커힐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1962년부터 1986년까지 중앙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1976년 카뉴국제회화전 커미셔너, 광주현대미술제 운영위원, Ecole de Séoul 운영위원 등을 역임했다. 1968년 문예상(문교부)을 수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전시광경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전시광경

 

 

[Review] 드림 소사이어티 – X brid

드림 소사이어티  __  X brid

서울미술관 10.10~11.16

융・복합의 세상이다. 퓨전, 하이브리드, 잡종, 혼성, 융합, 통합, 교차, 혼합, 협업 개념에 동양적인 통섭, 총섭, 회통사상까지 더하니 세상은 온갖 종류의 만남들로 들떠 있는 것만 같다. 이번 전시도 서로 다른 이질적인 것들의 부단한 만남을 미덕으로 삼고 있는 이 시대의 정언명법 같은 흐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기업의 후원을 통한 산업과 예술의 만남이라는 고전적인 문제의식마저 갖고 있어 전시 자체도 흥미롭지만 그 탄생동학이나 전후 맥락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비판적인 예외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예술은 늘 사회나 기업의 여유 있는 후원을 원했고, 실제로 이러한 후원 속에서 얼마간 힘을 받아왔다. 그리고 그 부족함과 아쉬움을 여전히 미래의 희망으로 남겨둔 것이 현실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전시의 맥락과 배경은 어떤 면에서 희망이고 의미 있는 시도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작년 문화역서울 284 전시에 이은 두 번째 전시이고 이후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발전된 횡보를 더한다 하니 기대감마저 갖게 한다. 국내 대표적인 기업이 순수 예술의 대중화와 저변 확대를 위해 전시를 직접적으로 후원한 것도 그렇지만 국가, 기업, 개인을 망라한 모든 사람의 꿈이어야 할 드림 소사이어티라는 이상적인 캐치 프레이즈도 묵직하게 다가온다. 게다가 서구 모더니티 초반기의 미술공예운동, 독일공작연맹, 바우하우스, 데스틸,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이 꿈꿨을 것만 같은 예술과 사회의 통합이라는 유토피아적이고 아방가르드한 문제의식마저 담고 있어 단순히 미래를 향한 전시만은 아니란 생각이다.
이번 전시는 이렇게 과거 모더니티를 발흥시킨 테크놀로지, 기계미학의 감성과 산업과 예술의 행복한 만남을 향한 오래된 꿈에 더해 지금의 복잡한 현실의 다양한 상황들, 이를테면 확장된 환경이나 공공성의 개념, 그리고 인본주의적인 감성, 동시대예술의 위상 등을 복합적으로 되짚어보고 있다. 따라서 이번 전시를 단순히 미술, 건축, 패션, 사진, 미디어아트, 설치, 퍼포먼스 등의 다양한 장르가 혼합된 전시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미 서로 다른 것들이 부단히 만나는 세상이기에 이런 다양한 장르의 이질적인 만남 자체가 색다른 것이 아닐뿐더러 만남 자체만으로는 융・복합을 운운하는 이 시대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이한 만남들을 서로 통하게 하는 구체적인 방식이나 과정, 결과들의 깊이 자체가 더 문제가 되는 세상인 것이다.
이번 전시 역시 다양한 장르의 혼합형 전시라기보다는 이를 회통(會通)하게 하는 전시의 개념적인 방향 설정과 전시구성의 안정적인 짜임새가 돋보인다. 아마도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고, 가로질러 다시 사회의 미래 속에 자리하게 될 예술 본연의 의미를 추구하고, 이를 위한 다양한 분야와의 현실적인 네트워킹의 발판을 만들려 했기 때문인 듯싶다. 가시성 볼거리에 그치지 않는 이번 전시의 비가시적인 장점들이다. 이질적인 것의 혼합이라 할 하이브리드 개념을 넘어 미지의 수를 의미하는 X개념을 더한 엑스브리드(x-brid)라는 신조어를 통해, 아직은 규정되지 않았지만 늘 동시대예술이 관계하고 있는 무한한 창조적 가능성의 미래와 그 방향을 벡터항으로 설정한 것도 이와 연관된다. 사실 이번 전시에 참여하고 있는 작가들을 묶어낼 공통분모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이미 서로 너무나 다른 관심을 기반으로 한 고유의 작업 영역을 확고히 한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이를 조화롭게 엮어낸 이번 전시의 미덕이라면 이처럼 결이 서로 다른 작가들이 각기 고유의 작업을 펼칠 수 있도록 전시의 바탕이 되는 서울미술관 공간의 장소성을 잘 살린 세련된 세노그래피(scenography)가 아닐까 싶다. 앞서 말한 기업 후원, 협업, 예술의 공공적 실현이라는 현실적인 함의가 직접적으로 노출되지 않고 전시 자체의 자율적인 독립성이 더 돋보인 점도 이와 연동된다. 참여 작가들 역시 기업과의 협업이나 서로 다른 영역의 작가들과 어색한 만남을 의식하지 않고, 이미 다를 수밖에 없는 자신의 고유한 작업을 기반으로 각각의 공간들을 풀어냈다. 개개의 사물은 독자적인 현존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이 서로간의 다름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고, 무한히 비추면서 세상이 펼쳐지는 것처럼 말이다.
서울미술관이라는 이전에 미처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공간을 바탕으로, 서로 다른 것들이 이접해 새로운 장소성을 만들어낸 것이다. 아마도 전시를 관통하는 미지수 X라는 변수들이 계속해서 그 다르고 새로운 것들을 펼치게 했기 때문인 것 같은데, 그 기저에 서로 다른 지반에서 앞으로 도래할 사회와 예술의 미래 위상을 향한 작가들의 공통된 시선과 문제의식이 자리하지 않나 싶다. 참여 작가들의 전시를 통한 상이한 시간, 공간과의 새로운 접속들도 그렇지만 이윤 창출을 우선시하는 기업과 예술의 만남은 이렇듯 서로 다른 지반, 이를테면 사회의 미래적인 지향 속에서 조우하고, 작동되어야 함을 은근히 역설하는 셈이다. 통섭(consilience)의 어원이 ‘함께 뛰어오르기(jumping together)’라니 이 또한 귀담아들어야 할 대목인 것 같다. 이런 모습들이 기본적으로 동상이몽(同床異夢)이겠지만 이상동몽(異床同夢)으로도 향하기에 다성화음처럼 묘한 궁합을 이루어낸 것 같다. 이번 기획의 미덕도 바로 이런 미지의 미래, 그러나 현재 혹은 과거와 연결되어 늘 새로운 모습으로 도래하는 예술의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역할을 전시 동학으로 무리하지 않게 연결시킨 점에 있지 않았나 싶다. 예술과 예술 밖의 영역들을 자연스럽게 연동시켜내면서 말이다.
민병직·문화역서울284 전시감독

[Review] 홍순환 – 중력의 구조

홍순환  __  중력의 구조

자하미술관 10.10~11.2

존재는 안정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몸에 탈이 나면 몸이 알아서 자가진단을 하고 자가 치유를 하는데, 여기에 착안한 것이 자연치유요법이고 대체의학이다. 몸이 그렇고 마음도 그런데,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라면 기억을 왜곡시키고 없는 기억도 만들어내는 자기암시 내지 자기최면 내지 자기합리화가 그것이다. 몸이 그렇고 마음이 그렇고 사회도 그런데, 체제의 안정을 위해서 사회는 변화보다는 기꺼이 정체를 선택한다. 정체를 보존하기 위해서 사회는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고, 때론 이데올로기를 급조하기도 한다. 그렇게 모든 급진적인 것은 체제안정을 위해 흡수된다. 혁명의 기억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시들해지고, 아방가르드는 자본주의에 흡수된다. 이처럼 존재는 안정성을 추구하고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경향은 지구에도 있는데, 중력이 그것이다. 홍순환은 중력의 구조를 주제로 중력을 그리고 설치한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중력은 그저 지구가 사물을 끌어당기는 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안정성을 추구하고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존재의 경향성과 같은, 포괄적인 의미를 아우른다.
중력은 아래로 흐른다. 벽에 매달린 튜브다발처럼. 가지런히 벗어놓은 드레스처럼. 벗겨진 옷의 중력이 잠재적인 에로스를 욕망한다. 그러므로 중력은 욕망에 연동되고 에로스를 지향한다. 그리고 사각의 스펀지가 물을 욕망한다. 미니멀리즘의 구조와 반복과 패턴을 전유하면서. 한편으로 벽 아래쪽으로 흘러내려 쌓인 분필가루에는 먼지가 섞여있고, 벌인지 파리인지 모를 죽은 사체가 중력의 법칙에 순응하고 있다. 중력의 법칙은 캔버스에 바른 물감이 아래쪽으로 흘러내려 맺힌, 그리고 그렇게 비정형의 얼룩을 만드는, 그리고 그 얼룩이 관객에게 어떤 잠재적인 공감을 자아내는 경우와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처럼 중력은 물리적인(역학), 심리적인(욕망), 그리고 미술사적인(전유) 현상에 연동된다. 그리고 중력은 확성기로 대리되는 이데올로기와 프로파간다와 같은 사회학적 의미에 연동되기도 한다. 사람들의 의식을 짓누르고 무의식을 파고들어 자기를 실현하려는 제도의 관성에 중력이 작동되고 있는 것. 그리고 중력은 시간에도 작용한다. 작가는 벼룩시장에서, 아마도 가족사진이지 싶은, 슬라이드 필름 한 다발을 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필름을 사진으로 현상했다. 그렇게 모르는 사람들이, 익명의 주체들이, 어쩜 이미 죽었을지도 모를 혼령들이 되살아났다(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이 죽음이라고 했다). 그 유령들은 과거에 속한다. 시간적으로 과거는 현재에 중력이 작용한 결과로 볼 수가 있겠다. 현재에 연동된, 잠재된 현재며 현재의 침전물로 볼 수가 있을 것.
이런 중력 작용에 작가는 반기를 드는 제스처를 슬쩍 밀어 넣는다. 거의 눈에 띄지 않게 공중에 떠있는 카펫과 바닥에 고인 액체와 그것을 비추는 조명이 그것이다. 특히 바닥에 고인 액체는 중력의 결과랄 수 있겠고, 그 액체는 조명이 비추는 열을 받아 휘발될 것이다. 그렇게 휘발되는 액체가 중력에 반하는 실천논리를 암시하고 있는 것. 이로써 작가는 어쩜 중력으로 나타난 물리적 현상을 인문학으로 전유하는, 인문학의 배경으로서의 유물론을 증명하는, 그런 형식실험을 꾀하고 있는 것 같다.
고충환·미술비평

 

[Review] 신상호 개인전

신상호 개인전

금호미술관 8.29~9.28  예화랑 9.12~10.8  이화익갤러리 9.18~10.5

신상호의 작업은 사물의 수집, 그것들의 배열, 그리고 그로부터 연유한 일련의 오브제 작업, 도예의 확장된 영역에 걸쳐진 것 등으로 구분된다. 이른바 도조이자 건축적인 도조, 도조설치 등에 해당하는 작업이다. 오늘날 실용적인 차원의 도예작업을 벗어나 도조, 혹은 흙을 사용해 확장된 조형작업으로 전개되는 예는 쉽게 접할 수 있다. 도예를 확장시킨 대표작가로 알려진 신상호는 흙과 불이 만나 이뤄지는 도조에 다채로운 색상의 회화적 터치, 그리고 조각적 구조물을 연결하고 다양한 오브제와 유리, 거울, 스틸 프레임, 세라믹, 공업용 페인트 등을 두루 섞어서 매력적인 조형물을 만든다. 그는 이를 불 그림, ‘구운 그림(Fired Painting)’이라고 부른다. 다양한 재료와 사물들이 결합해 있지만 궁극적으로 흙을 불에 소성시키고 색을 입히는 과정에서 형성된 작업이다. 불은 그의 작업에서 그만큼 핵심적이다. 불은 인위성을 벗어난다. 그 예측할 수 없는 불의 힘이 흙의 상태와 색채의 스밈과 번짐을 조절한다. 150만 년 전에 출현한 호모 에렉투스가 최초로 불을 썼다고 한다. 그로부터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사물의 제작과 예술이 가능해졌다. 불은 빛과 열기의 근원이다. 불은 연금술이다. 그러니 꿈의 실현이다. “불은 그 자체가 광명과 연소, 정신과 물질, 창조와 파괴, 결합과 분리 등 양의성을 띤 것이고, 새로운 것과 낡은 것, 깨끗함과 불결함, 신과 인간, 이계와 현세 등 서로 다른 두 항 사이의 매개 작용을 하는 것이다.”(오쓰카 노부카즈)
그는 ‘흙으로 자연의 질감과 색을 깊이 있게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니까 흙이 지닌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려는, 그리고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려는 성질과 흙이 지닌 친환경적, 자연친화적 성질은 여전히 중요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도출할 여백을 그만큼 많이 지니고 있다고 본 것이다. 고온에 소성시킨 구운 그 흙그림은 바닥에 놓이고 벽에 가설되고 건축의 일환으로 서식한다. 소극적인 차원에서 실용성이나 전시장 공간이란 제한된 영역에서만 자리하는 작업이 아니라 삶의 공간으로, 환경으로 확산되고 파생되어 나가는 작업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것은 건축 공간의 벽이고 환경으로서의 벽이다. 하나의 사물, 조각으로 독립하는 동물형상의 도자작업이나 바닥에 직립하거나 건물 외벽에 부착된 창틀 형태는 풍부하고 견고한 색채를 지닌 회화이자 조각이고 사물이자 도조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것은 공간에 자립하고 자존한다. 커다란 사물이 되고 세계가 되었다. 이는 향후 도예, 도조작업의 가능성을 고려한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그의 작업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물이 자리한다. 그는 모든 사물에 대한 탐닉과 그 스스로 제작한 또 다른 사물들을 두루 섞어놓으면서 사물 자체를 매력적인 존재로 다시 보게 한다. 오랫동안 그는 한국, 중국, 유럽,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의 문화를 수용하면서 그 문화권에서 제작된 여러 사물, 골동을 수집해왔다. 이 수집행위는 그의 작업의 근간을 이룬다. 오래된 사물은 매혹적인 예술품이자 그의 몽상을 자극한 매개로, 시간과 공간을 함축한 텍스트로 다가왔을 것이다. 따라서 그로부터 영감을 얻어 제작한 작업들은 이른바 ‘원시성과 현대적 감성’이 어우러진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 받는다. 우리는 사물과 더불어 살며 사물들의 세계 속에서 살다 죽는다. 신상호와 같은 사물수집가, 감식가는 사물의 장엄함을 통해 삶을 맛보고 그 삶의 진경을 들여다보려는 자이다. 그러니 그에게 사물의 수집과 그로부터 발원하는 새로운 사물의 제작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사물들은 관념과 추상이 아닌 것들, 즉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들,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들, 무생물, 다양한 물건과 도구들을 포괄한다. 세계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물은 ‘사물-도구’들에 해당한다. 사물들은 삶을 공간으로 확장한 것이고 자아를 시간적으로 연장한 것이다. 신상호에게 사물의 수집행위는 취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오랜 세월 수집가로 살아온 그에게 수집은 단순히 물건을 구매하고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수집 대상이 품고 있는 시간성과 거기에 압축되어 있는 대상의 원산지, 용도, 종속산업 등의 변화와 추이로 대표되는, 일종의 시대성을 소유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의 작업은 수집된 ‘사물이나 사상이 시간을 견디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추이,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발견한 영감’을 시각화하고자 한 것이라는 뜻이다.
신상호의 작업은 과거와 미래, 가상과 현실이 뒤섞이며 이종 교배된 듯한 기묘한 형상들로 가득 차있다. 그리고 거대한 크기와 화려한 색채들, 온갖 재료의 병합 등 서로 다른 요소들이 엉키고 충돌하며 모종의 기운을 뿜어낸다. 불이 이룬 희한한 사물들이고 흙이 이룰 수 있는 가능성, 여백, 무한을 감지시키고자 한다. 그런 기운이 불꽃처럼 일렁인다.
박영택·미술비평, 경기대 교수

위·신상호 <Wow>(사진 가운데) 혼합재료 설치 2014 금호미술관 전시광경  아래·신상호 <Minhwa Horse> 도판에 유약, 쇠 228×60×170cm 예화랑 전시광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