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자연 대 자연 송창&유근영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2014.10.17~2014.12.14

송창과 유근영의 <자연 대 자연>은 철학자들이(혹은 인류가) 자연을 인식하고 사유해 온 두 개의 신화적 사건을 배치한 것으로 읽힌다. 신화의 탄생지에서 신의 실체는 대체로 무수한 대자연의 사건과 인간의 사건들 사이에서 빛을 발한다. 엄청난 스펙터클의 자연적 사건들은(축복보다는 재앙의 경우가 더 많다) 나약한 인간으로부터 신의 절대성을 상승시키고, 반면 전쟁과 사냥에서 벌어진 인간적 사건들은 영웅을 탄생시켰다. 신의 절대성과 영웅이 혼합되고 묶이면서 ‘신화(神話)’라는 초현실적 서사는 민족지학의 방대한 뿌리가 되었다. 뿌리가 되면서 스펙터클의 자연적 사건들과 인간적 사건들은 둘로 구분할 수 없는 상태로 뒤섞였고, 자연이라는 ‘존재’가 인간의 사건을 초래하거나 인간이 스스로 자연의 사건을 생각하며 자연과 인간의 신화를 엮어내기도 했다. 아마도 바로 그즈음에서 인류는 ‘퓌지스(Physis)’라는 철학적 대상으로서 자연을 갖게 되었는지 모른다. 자연으로부터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사유’를 묻게 된 것이다. 자연철학은 그렇게 탄생했다.
송창이 그리는 자연은 무수한 인간의 역사적 서사를 함축하는 자연이다. 그의 자연은 오래전부터 우리 눈앞에 스스럼없이 현존해 온 본래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심지어 생래적이고 본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그의 화면에서는 미학적 의문을 제기한다. 저렇듯 아름답고 생기에 찬 자연이야말로 ‘스스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그리고 더 은유적으로는 저렇듯 아름다운 자연은 자연이 아니라 어떤 것들의 어두운 그림자일 수 있다는. 그렇다면 그 의문의 실체는 무엇일까? 우리는 우선 그가 그리는 풍경의 대상지가 한반도의 허리를 자르고 있는 비무장지대 접경지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소나무 숲이고 들녘이며 하늘이 아니라 한 국가의 분단을 ‘실체적으로’ 인식시키는 장소들에서 맞닥뜨리는 숲이고 들녘이며 하늘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그의 숲들은 해방 이후 그어진 38선과 6・25전쟁이라는 냉전의 제노사이드가 남긴 유령들일 수 있다. 그러니까 그는 한반도의 냉전 사건으로부터 자연과 인간의 존재사유를 묻는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1982년에 창립한 ‘임술년’ 멤버로 참여하면서 탄생시킨 자연은 단 한 번도 그러한 냉전신화의 자연으로부터 한 발짝 비켜선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냉전신화의 상징이라는 역사성을 더 구체화하는 쪽으로 작업의 방향을 옮겨왔다. 다시 말해 그가 최근에 그리는 자연들은 접경지의 풍경이라는 구체성을 더 좁혀서 실제적 사건들의 장소들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연철학이 궁극적으로 밝히고자 하는 존재론의 문제를 푸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유근영의 자연은 무엇일까? 그의 자연은 송창이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쪽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연철학자들이 사유했던 것처럼 자연을 자연으로서 본다. 이때 ‘자연으로서’라는 표현은 그가 ‘인간으로서’ 자연을 보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자연의 내부에서, 자연의 바깥에서 그는 한 존재자의 시각으로 자연을 톺아보는 순수의지를 발현시킨다. 즉 그가 마주하는 자연은 스펙터클한 자연적 사건은 아니지만, 자연이 스스로 현존하는 것에 대한 사건을 보여줌으로써 자연이 가진 미학적 숨결들을 화면에 배치하고자 한다. 그런데 유근영의 작품들이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은 작품 속 자연이 구체적인 현실 속 자연의 안팎이 아니라 유근영이라는 한 작가의 내면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자연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평생 자신의 내부에 회화적 자연이라는 정원을 가꾸어왔다. 물론 그것들은 우리 눈앞에 현존해 온 자연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 앞에 섰을 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이질성이 아니라 이국적인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유근영의 내부에서 화면으로 옮겨 온 그것들은 분명히 어딘가에 현존하는 자연으로 읽히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미학적 실체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자연 신화는 실재계가 아니라 상상계와 상징계를 혼합한 신화라는 것을. 송창이 실재계와 상상계를 혼합해서 상징계라는 미학적 화면을 구성했다면, 유근영은 상상계와 상징계를 혼합해서 오직 그만의 실재계를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실재계는 어쩌면 인류가 시나브로 상실했거나 파괴해 온 퓌지스의 존재사유일지 모른다.
자연철학자 김진에 따르면 퓌지스는 물질적인 존재들을 존재하게 하는 존재의 근거와 원인들에 관여하기도 한다. 자연은 우리의 존재사유를 밝히는 가장 근원적인 철학적 명제이지 않은가! 송창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인간 존재를 묻는 자연을 그리고 있다면, 유근영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자연 존재를 묻는 심연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 둘 모두 서로 다르면서 동일하게 이어지는 지점은 자연철학이 던지는 존재사유의 질문이다.
김종길 미술비평

CRITIC 이동기 무중력

갤러리 현대 2014.11.20~2014.12.28

이동기 하면 생각나는 것은 ‘비주관적 작품’이다. 그리고 대중문화와 팝아트. 지금까지 그가 경계하고 저항했던 것을 필자가 억지로 말을 만든다면 ‘개념미술적 작가중심주의’가 아닐까 한다. 먼저 이동기는 서구 개념미술에 반기를 든 제프 월(Jeff Wall)을 이야기한다. 개념미술에서 출발한 월은 그 한계를 절감하고 대중문화(광고판)와 작품의 물리적 크기에 주목했다. 즉 공허한 개념을 떠나 실제 작품을 보고 느끼라는 것. 사실 개념과 논리가 득세하는 최근 한국 미술계를 보면 월의 태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음은 작가중심주의. 이동기는 일전에 “작가는 작품의 창조자이고 마치 신과 같이 작품의 의미를 100% 규정해왔다. 작품의 관람자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야만 했다”라고 지적하며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작품읽기가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했었다. 일찍이 사이 톰블리(Cy Twombly)는 위계질서가 없는 낙서 같은 그림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감소시키고 익명성을 부각시켰다.
이번 전시에서 톰블리와 관련해 눈에 띄는 작업은 이다. ‘Doodling’은 지루한 수업이나 회의에서 딴 생각하며 낙서하는 행위를 지칭한다. 이 작품에는 이동기가 무심코 그린 낙서가 포함되어 있다. 더불어 화면 전체엔 다양한 색의 작은 사각형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이 사각형의 정체는 색종이라고 한다. 크리스마스 때 색종이가 흩날리는 장면을 찍어 보도한 사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색종이가 날리는 모양은 사람의 통제를 벗어나 우연적으로 만들어진다. 이동기는 이 작품을 ‘절충주의’라고 부르는데, 절충주의의 대표작은 규모가 상당히 큰 과 이다. 에는 전단지의 글귀, 명랑만화, 광고 이미지, 작가의 낙서, 북한 포스터, 보도사진, 추상적인 그림, 패턴과 문양 등 실로 다채로운 이미지들이 무작위로 혼재되어 있다. 그는 완성된 형태를 정해놓고 그림을 시작하지 않기 때문에 중간에 형태가 변형되는 것은 다반사이다. 그리고 소위 ‘추상’ 작업이 2층에 3점, 1층에 4점, 지하 1층에 2점 등 전시장 곳곳에 걸려있다. 이는 어떤 논리와 개념에 기반을 두지 않은 채 무의식, 우연, 즉흥으로 빗어낸 물감 덩어리이다.
이처럼 이동기의 작품에 나타나는 무의식적인 낙서, 화려한 색채, 자유로운 형상 배치, 강렬한 북한 포스터, 상상력이 기발한 만화, 광고 이미지, 거대한 화면, 장식적인 패턴 등은 모두 개념주의적 작가중심주의에 의문을 제기하고 회화가 가진 본연의 힘을 복권시키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물론 그의 작품에 개념적인 요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개념만 보여주고 끝나는 작품이 아니라 개념 이외에도 다양한 요소가 있다는 것을 제안하는 그림이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때론 복잡하고 혼란스럽지만, 그의 그림은 요즘 그가 관심을 갖는 ‘무중력’과 통하는 듯하다.
류한승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위 이동기 <파워 세일> 캔버스에 아크릴 360×840cm 2014

CRITIC 김효숙 꿈의 도시, 적당한 거리

관훈갤러리 2014.11.26~2014.12.16

허물어지고 해체되어 무중력 상태의 파편들처럼 뒤죽박죽 섞이는가 하면 회오리가 지나간 듯 부유하는 난장 속 건축 현장, 그 속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정체불명의 잿빛 사람들이 주춤거리며 배회하듯 서성인다. 김효숙의 회화에서 자주 목격되는 이러한 상황에는 일말의 따뜻한 기운이나 위로, 유머조차 담겨있지 않으며 그렇다고 노골적인 냉소도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산산이 흩어진 잔해더미를 통해 존재의 파괴와 상실을 증거하고 어딘가에 남아있을 그 흔적들과 의미들을 가차 없이 지우고 또 거두어가는 듯하다. 이러한 분열적인 상황은 어린 시절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수도권 신도시 주변으로 빈번히 이사를 다니면서 목도한 도시개발 현장의 냉혹하고도 폭력적인 풍경을 되뇌고, 어디에서도 쉬이 정착하거나 적응하기 어려웠던 자신의 심리적 괴리감과 소외감을 고백하는 행위로 이어졌다. 인간의 생존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일방적인 자연 파괴 행위를 버젓이 합리화해온 도시개발정책, 그리고 그러한 강압적인 정책 논리에 따라 자신들의 삶의 구조를 결정해야 하는 현대인의 비극적인 현실. 그는 자신이 겪은 삶의 형태가 도시를 중심으로 자행되어온 인간 중심의 이기적인 행보에 의한 것이었고, 다시 그 구조 속에 강제적으로 함몰되어 살아야했던 무기력한 상황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자각하고 그것을 부단히 폭로해왔던 것이다.
이번 전시 <꿈의 도시-적당한 거리>는 그러한 사적인 차원의 ‘은폐의 고발’에서 나아가 오랜 시간 도시 위에 축적된 인간의 꿈과 욕망, 상실과 절망, 기만과 망각의 표정을 보다 넓게 추적하고 있다. <꿈의 도시 Ⅰ>은 지인의 죽음을 통해 산 자와 망자가 도시 위에 경계 없이 혼재하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인식하고, 도시와 함께 꿈꾸며 삶을 영위했던 존재들과 그들의 꿈을 품고 있는 도시의 관계를 환기한다. 결국 인간은 도시와 불화하면서도 적당히 고슴도치의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연민의 감정이 서려있는 듯하다. <꿈의 도시 Ⅱ>는 6・25전쟁 당시 1만4000명의 피난민을 구조하기 위해 원칙을 무시하고 생사를 넘나드는 위험을 무릅쓴 미군함정 ‘메러더스 빅토리호’의 미담을 다루었다. 작가는 인간만의 논리로 이룬 도시의 삭막하고 무자비한 현실이 결국 인간 스스로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인간 존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투신했던 ‘메러더스 빅토리호’와 같은 흔적들을 찾아 도시와 인간의 관계망을 보다 유연하게 확장하고 있다.
작가는 그동안 서울, 인천, 베이징, 프랑크푸르트, 시드니, 오클랜드 등 많은 도시를 여행하고 경험했다. <서해 5도>, <숲-푸른산> 등을 비롯한 다양한 드로잉은 그 도시들이 간직해온 독특한 분위기와 표정을 살피고, 그 속에서 희로애락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구조와 실존의 의미를 찾고 있는 듯하다. 어린 시절 무기력한 상태로 이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던 도시 속의 불편한 경험은 이제 자신의 능동적인 의지에 의해 선택하는 도시 속의 온전한 생활로 전환되었고, 또한 오래전부터 누적되어온 자신의 상처에 대한 기억은 인간 자존의 의미를 추적하는 이번 전시의 행보를 통해 부지불식간에 회복되고 있는 듯하다.
최정주 OCI미술관 수석큐레이터

CRITIC 이샛별 인터페이스 풍경

자하미술관 2014.12.5~1.4

이샛별의 작품에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많은 도상이 등장한다. 도상들을 한 화면에 접어 넣는 방식은 다양하다. 2층의 작은 작품들에서는 가지 많은 나무 뒤에 신원미상의 인물들을 얽어놓았고, 1층의 큰 작품들에서는 병풍처럼 펼쳐진 면들에 여러 기원을 가진 불연속적 이미지가 병렬된 유화가 있으며, 아크릴로 그린 작품은 위아래로 긴 풍경 형식을 취하면서 군데군데 여러 도상을 삽입한다. 계통수처럼 가지를 뻗어나가며 때로는 뿌리줄기 같은 방식으로 어지럽게 자라나는 식물적 구도가 있으며, 창인지 거울인지 그림인지 알 수 없는 프레임을 줄줄이 연결해 공간 저편으로 나아가는 방식도 보인다.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야생의 숲 속 큰 나무들의 세로축을 따라 미술관의 최고 높이까지 뻗어 오른다. 모두 한 화면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작품이 크든 작든 사방팔방으로 열린 구조를 가진다. 그러한 복잡한 구조 사이에 삽입된 도상들 또한 수수께끼이다. 수수께끼의 정점에 있는 것은 두건과 망토를 둘러쓴 무리이다. 그것은 계몽의 시대는 가고 다시 맹목의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전령사일까. 빽빽하고 어두우며 아래로부터 무너져 내리는 숲은 ‘그렇다’고 대답하는 듯하다. 소음이 무의미를 야기하듯, 공간공포증적으로 채워진 것들은 허무를 말한다. ‘인터페이스 풍경’이라는 전시부제는 필연과 우연이 한데 얽혀있는 상호연결망의 세계에서 왔음을 알려준다. 풍경이라는 단어에는 어지러운 병렬에 내재된 모순을 굳이 해결하지 않은 채 거리를 두고 관망하겠다는 심미적 태도가 깔려 있다. 이샛별의 작품은 비의적이지만, 우리를 둘러싼 크고 작은 인터페이스에서 늘 경험하는 일상의 원리와 비슷하다. 친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을 정지된 큰 화면에서 음미하게 함으로써 낯선 면을 증폭시킬 뿐이다. 아크릴로 그린 드로잉 작품은 색이라는 차원을 감축한다. 창백한 검푸른 색은 이질적인 병치를 하나의 분위기로 감싸 안는다. 그렇다고 장면 또는 풍경 사이의 균열이 감춰지지는 않는다. 괴리감과 불협화음 한편에 마술 같은 도약과 비약이 횡행한다. 문장으로 친다면 플롯, 시점, 화자, 시제 등이 온통 뒤죽박죽인 부조리한 이야기에 해당된다. 이 전시에서 풍경은 근래에 다녀왔던 제주와 호주의 풍경이 섞여있는데, 작가는 두 장소에서 아름다운 풍경의 이면을 주목했다. 제주의 풍경 뒤에는 무고한 양민이 대량 학살되었던 역사적 사건이 깔려있고, 호주의 경우에도 원주민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경험에서 감추어진 폭력을 보았다. 투시경 같은 시점에 의해 은폐된 층위들이 되살아나 유령같이 떠돌면서 풍경은 더 복잡하게 꼬이고, 피상적 아름다움은 괴기스러워진다. 이샛별의 이전 작품은 괴상한 인물이 주인공이었지만, 작가의 분신들은 이 전시에서 풍경으로 전이된다. 현실의 나, 상상의 나, 그리고 사회가 규정한 나라는 삼각구도 사이의 모순 속에 기이하게 비틀린 인물은 풍경화가 된다. 수족관, 어항, 식물원 등으로 나타나는 아름다운 자연의 컬렉션에는 선택과 배제라는 폭력적 원리가 관철되지만, 제어되지 않는 야생의 자연은 그리기라는 야생적 행위에 힘입어 억압된 것으로 회귀한다.
이선영 미술비평

위 이샛별 <인터페이스 풍경>(맨 왼쪽) 종이에 아크릴 409.4×282cm 2014

CRITIC 김성수 얼굴없는 장소들

갤러리 스케이프 2014.11.5~2014.12.19

세상을 살아나가는 것은 삶의 조각을 묶어나가는 것이다. 조각글들을 묶어 한 권의 책을 만들고, 조각 이미지들을 묶어 하나의 전시를 만드는 것처럼. 살아가며, 어느 정도까지는 묶는 행위가 어렵지 않다. 그러다 삶의 조각을 맞춰나가는 일이 점점 힘들어진다. 그리고 알게 된다. 세상이 우리를 허락할 때만 조각을 끼우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림을 그리는 것도 조각을 묶어나가는 것이다. 삶의 조각을 묶어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고, 그 이미지를 묶어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것처럼. 그려나가며, 어느 정도까지는 묶는 행위가 수월하다. 그러다 삶의 조각을 그려나가는 일이 점점 버거워진다. 그리고 깨닫는다. 세상이 그리는 자를 허락할 때 조각을 끼우는 일도 가능하다는 것을.
결국 미술은 삶이요, 삶은 미술이다. 그 진부함이 미술을 견디게 한다. 미술이 없는 세상을 나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미술이란 그리는 것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지우개가 없는 글쓰기를 생각할 수 없듯이(김훈), 지움으로써 그리는 그림의 경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도시 풍경의 폐허, 그 ‘얼굴 없는 장소들(non-lieu)’을 그리는 김성수의 그림 덕분이다.
김성수가 그려낸 풍경은 양가적이다. 디지털 방식과 아날로그적 집착이 한데 고여 있고(사진과 포토샵으로 가공한 이미지를 OHP 필름으로 출력해 캔버스에 투사해 옮긴다), 세파를 견디지 못한 폐허의 풍경은 도리 없이 숭고하다. 그의 그림은 어쩔 수 없이 슬프다. 세상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 속에서 움직이는 것들 때문이다. 그것들이 빚어내는 세계는 추악하면서도 아름답다. 그 움직임이 더 이상 허락되지 않을 때 우리는 슬픔으로 떠나보낸다. 그런데 김성수의 그림은 그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는다. 세상에 흔적을 남기려는 것이 화가의 열망일 텐데, 그는 재현의 대상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그 당연함에 저항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본래의 풍경이 지워져가는 흔적 속에서 우리는 풍경의 본연을 눈으로 만지게 되고, 뒤로 숨는 풍경에서 실루엣을 어루만진다. 그렇게 처연히 사라져가는 것들을 회상하며 존재의 무게를 측량한다.
회화가 한줌의 이미지로 소비되는 지금, 미술의 노정이 무거워 보여 마음이 편치 않다. 그래서 더더욱 김성수가 옳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겠다는 태도와 그리는 것과 지워지는 것 사이에 동요치 않는 단단함에서 위안을 얻는다. 우리는 세상 모든 것에 능통할 필요가 없다. 세상살이에 무능한, 그래서 그릴 수밖에 없는 자라면 더더욱 서툴러야 한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자의 인생이 아름답고, 그림의 한계를 아는 그림이 세상을 제대로 감각한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윤동희 북노마드 대표

위 김성수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130×162cm 2014

CRITIC 차승언 아그네스와 승환스

살롱드에이치 2014.11.27~2014.12.23

줄 매기의 달인 차승언이 작정하고 직조기에 앉았다. 대학에서 섬유미술을 전공하고 미국 유학을 통해 회화와 설치작업으로 변화를 시도한 차승언은 귀국 이후 2011년 첫 개인전에서 설치와 퍼포먼스, 비디오 등의 작업을 선보였다. 이때 작업의 주제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살아가는 태도 등에 대한 성찰을 투명 줄이나 검은 실 등으로 가시화하는 것이었다. 이후 2012년 무렵부터 장르적으로는 복고적이며, 양식적으로는 과거 회귀적인 직조 작업을 다시 시도하고 있다.
섬유미술 전공자로서 늦깎이 미국 유학을 통해 애써 섬유공예의 장르에서 벗어났다면,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섬유예술의 작업 방식 중 하나인 직조기를 다시 등장시킨 차승언은 어쩌면 스스로 벗어나고자 했던 것, 스스로 거부하고자 했던 것을 다시 돌이켜 보는 방법을 택한 것 같다. 더욱이 이번 개인전에는 희미한 미색 실을 베틀에 걸어 몇 가지 패턴으로 직조해낸 천을 규격 캔버스 틀에 메운 작품을 집중적으로 선보였는데, 이렇게 완성된 작품은 20세기 추상회화의 전형적인 외형을 닮았기에, 그의 의도가 20세기 미술사의 주요 전제였던 회화와 공예, 공예와 회화의 구분을 되새기는 데 집중되어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직조기로 짜낸 작품은 전체적으로 회화의 지지체 그 자체를 상기시키는 백색 캔버스를 닮았으며, 직조 과정에 사용된 짙은 톤의 염색사는 캔버스 틀을 거울처럼 반사함으로써 직조로 반추한 회화의 의미, 패턴으로 되새긴 평면의 의미를 거듭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캔버스 틀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형태로 직조된 캔버스 천은 어느 순간 날실만 남기고 배경의 틀을 드러내기도 하고, 이면의 뼈대를 드러낸 날실은 서로 엇갈려 꼬이기도, 연속된 캔버스 사이에 포물선을 그리며 드리워지기도 한다. 또한 직조된 천 위에 기하학적 형태를 채색으로 부과하는 방법으로 차승언은 회화와 섬유공예, 시각적 이미지와 촉각적 실체, 그리기와 짜기, 이미지와 패턴, 칠하기와 염색하기, 이념과 물질의 문제를 의도적으로 집요하게 반추하고 있다.
상반되지만 함께 하는 의미는 전시 제목에도 드러난다. ‘아그네스와 승환스’에서 ‘아그네스’는 차승언이 그렇게 불러내어 되새기는 추상미술의 정점, 즉 미니멀리즘 시기 미국의 여성 추상미술가 아그네스 마틴에 대한 오마주이며, ‘승환스’는 작가의 주변 사람들, 즉 ‘승언’이 삶을 이어가고 관계를 형성하는 주변 사람들의 존재를 의미하는데, 이는 다시 말하여 차승언의 삶을 구성하는 작업과 생활, 예술과 신앙의 문제를 대유법적으로 지칭한 것이다.
서구에서 발원한 모더니즘의 시대에 추상은 새로운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혁신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러한 신화를 믿지 못하는 21세기에 추상은 미래지향적인 의미를 갖지 못한다. 폐기된 추상의 미학을 반복적인 직조기법으로 되뇌는 차승언은 아무런 혁신도 미래도 논할 수 없는 상실의 시대에 비록 불발에 그쳐버렸을지라도 과거의 이상을 다시 불러내야 하지 않냐고 묻는 것 같다. 순수 미학이 애써 떨쳐버리려 했던 장식과 공예의 기법으로 완고하게 소환해낸 추상의 미학은 다시 무엇인가를 바라는 것, 무엇인가를 지향해야 하지 않냐고 묻는다. 차분하지만 단호한 직조의 방법으로 부활한 캔버스 평면 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추상의 미학을 다시 생각한다.
권영진 미술사

CRITIC 금민정 격.벽.

갤러리 세줄 2014.12.11~26

2층 전시장에서 상영되는 5편의 영상 속에는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여러 개의 격벽을 배경으로 춤을 추는 무용수와 움직이는 격벽이 담겨 있다. <역사가 된 세트장을 위한 연출_격벽장>이 전체 구조가 부채꼴임을 알게 해주는 조감도라면, 나머지 4편의 영상은 다양한 시점에서 포착한 모습을 상하 또는 좌우 대칭으로 배치한 2채널로 보여준다. 영상 속 빛과 그림자의 움직임은 동이 트고 해가 지는 과정으로 보이고 이것은 작품의 제목처럼 삶과 죽음의 오래된 비유임이 짐작되며, 무용수의 안무와 따로 또 같이 물리적으로 움직이는 벽은 삽입된 숨소리 덕분에 공간이 호흡하는 환영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명쾌한데, 왜 가슴 한 켠이 먹먹하고 찌릿해오는가. 도대체 무엇이 작품 앞에서 한참을 응시하고 머무르게 만드는가.
이 작업의 공간적 배경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복원된 격벽장이다. 이곳에서는 수감자들을 단체로 운동시키되, 상호 간에 대화를 방지하고 용이하게 감시하기위해 여러 개의 두꺼운 벽을 치고 벽 사이의 좁은 칸에 수감자들을 분리 수용했다고 한다. 사상범들의 신체를 구속할 목적으로 세워진 감옥에서 신체의 건강 유지나 증진을 목적으로 운동을 시키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다는 연옥처럼 삶과 죽음의 격벽 그 사이 공간에서 희망과 절망을 번갈아 경험했을, 갇혀 있고 감시 받지만 자신의 몸을 움직여 신체의 건강을 도모하는 인간의 심리적인 혼돈을 무용수의 몸짓과 견고하고 단단한 건축적 요소들의 물리적 움직임으로 표현해낸다는 것은 더더욱 아이러니다. 그런데 바로 이 흥미로운 아이러니가 금민정의 작업을 보다 중층적이고 깊게 한다.
금민정 작가는 그동안 작품이 될 장소를 찾고, 그 장소를 소재로 영상작품을 만든 후 이를 다시 그 장소에 설치하는 장소특정적인 작업을 해왔다. 주로 무형무취의 물리적인 공간 자체를 움직이는 환영으로서의 숨에 천착했다면, 지난해 문화역서울 284에서 퍼포먼스와 함께 보여준 <숨쉬는 벽>을 시작으로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공간이 보다 깊고 풍부하고 다층적인 숨을 쉬게 한다. 그 숨은 인간의 본질과 가치를 대신하는 상징이자 감정의 주체이며, 영상 속 빛은 정신적인 영의 움직임이다. 무용수가 다가오는 죽음과 갇혀 있음의 공포, 슬픔과 애통의 감정을 몸을 움직여 표현하면, 금민정은 영상 속 공간에 혼을 담는 것이다.
2층의 전시장에서 안무가, 사운드아티스트와 함께 진행한 협업의 결과물을 비디오 설치로 보여준다면, 3층의 전시장에는 10여 점의 비디오-조각을 보여준다. 서구 열강의 침입으로 부침을 겪은 대만 무역항구 탐수이(Tamsui) 지역의 역사적 장소들을 소재로 한 2~3점의 작업과 함께 작가는 한국 근현대사를 기록한 역사책들을 서대문형무소의 벽, 계단, 문의 비디오 이미지와 조형적으로 연결시키고, 모니터 2~3대를 결합해 여옥사의 건축물과 공간을 확장했으며, 사형장 앞에 서서 한맺힌 인간사를 목도했을 <통곡의 미루나무>를 설치했다. 이 작업들을 보노라니 작가가 조각과 출신임을 새삼 상기하게 된다. 주객의 구분 없는 매체의 융합이 중요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비디오는 단지 시간성을 갖는 움직이는 영상이 아니라 흙이나 돌과 같은 전통적인 조각의 질료과 다를 바 없다. 질료 자체에 혼이 스며 작가는 적합한 형상을 찾아주면 된다고 생각했던 미켈란젤로처럼 말이다.
윤형주 가인갤러리 큐레이터

위 금민정 <시나리오_삶과 죽음의 미네르바>(오른쪽) 비디오 설치 가변크기 2014

CRITIC 김윤철 백시(白視)

대안공간 루프 2014.12.8~23

전시장에서 나는 ‘백시’를 경험한다. 백시(白視). 화이트아웃. 하얗게 드러남과 하얗게 지워짐의 현기증 나는 중첩. “늘 보던 말을 새삼 바라보는 눈 내린 아침”의 바쇼. 백시는 매터링을 통해 가능해진다. 매터링은 물질과 그것의 (언어적 시각적) 재현 사이에서 물질 자체로 방향을 돌려 ‘물질의 물질 되기’라는 생장의 흐름에 온몸을 맡기는 실험이자 수행이다. 김윤철에게 물질은 명사 matter가 아니라 현재진행형 동사 mattering이다. 기실 물질은 몇 개의 성분과 특성들로 나뉠 수 없는, 이질적 원소들이 하나로 뒤섞인 덩어리 자체, 흐름 자체, 출렁이며 스스로 생육해가는 관계 자체가 아닌가. 기실 물질은 한 번도 순수하고 본질적인 적 없는, 끊임없이 변하는 잡(雜) 자체여서 무한한 생성에의 잠재성을 품고 있지 않은가. 김윤철은 현재진행 중인 물질의 물질 되기라는, 물질이 주체인 변화 과정에 휘젓기, 가열하기, 관찰하기 등등의 실험적 수행을 통해 ‘참여’한다. 그리고 그의 참여를 통해 전시장에 ‘현시’되는 물질되기의 과정에 나도 참여하게 된다. 하여 나도 바쇼처럼, 늘 보던 물질을 새삼 바라보게 된다. 서구인들은 물질과 인간을 분리하고, 물질을 호명함으로써 물질의 ‘그림자’들의 체계, 재현의 체계를 구축해왔다. 호명과 분류를 통해, 물질에 ‘대한’ 풍경으로서의 세계가 인간 앞에 세워졌다. 모든 것이 재현인 세계, 모든 것이 그림자이자 우상인 동굴의 시공간인 세계, 거기서는 인간의 삶조차 통째로 재현이며 그림자다. 이 도저한 재현의 경계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불교적이면서 도교적인 이 질문은 현대예술의 가장 중요한 화두이며, 현대과학이 양자역학을 통해 봉착한 의미심장한 위기의 어떤 생성적 가능성에 대한 요청이다. 김윤철은 매터링에 몸을 던짐으로써 현대예술과 과학이 벌이는 재현과의 고군분투를 놀랍도록 가볍게, 놀랍도록 무겁게 뛰어넘는다. 재현된 세계 풍경, 호명된 이름과 특성들의 연쇄를 하얗게 지우며 동시에 드러나는 (전시장을 흐르는) 이 끊임없는 물질 되기의 과정들…. 그것은 생장하는 현존 그 자체다. 날마다 획을 긋고 또 그었던 선비들의 무한정한 수행을 통해 현시되는 일필휘지의 무거운 가벼움. 부단한 실험을 통해 연금술사들이 불러내던 물질의 정령들의 빛나는 어둠. 동서가 공유하는 물질 되기의 실천, 예술과 과학이 공유하는 탈재현에의 화두, 김윤철의 <백시전>은 이 모두에 정진하는 한 수행자가 나에게 건네주는 놀라운 선물이다.
박영선 사진가, 고등과학원 초학제연구원

위 김윤철 <백시> 하이드로젤, 산・염기 혼합액 유리, 폴리비닐 아세탈 가변설치 2014

CRITIC 매뉴얼 Part & Lavour

문화공장오산 2014.11.14~2014.12.14

미술가는 작품의 아이디어를 내고, 일반 참여자가 미술가가 작성한 매뉴얼에 따라 제작한 작품으로 이루어진 전시. 종종 볼 수 있는 방식의 프로그램이기도 하지만 미술관에서 특별하게 설정한 의도와 목표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경우 역시 드물다.
이번 전시는 “기획자가 동일한 재료들을 제시하고 작가들은 그 제한된 재료 안에서 작품을 구상”하며, “그 구상된 작품은 하나의 지시서(매뉴얼)로 제작되어 작가의 도움 없이 제3자의 손에 의해 제작”된 작품을 전시했다. 이를 위해 오산 시민 60여 명이 참가, 5일간 작업 지시서를 바탕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워크숍을 진행했다.
“작가를 작품을 제작하는 창조자의 역할이 아닌 주어진 재료 안에서 작품을 구상하는 연출자의 역할로 제한하고, 작품 제작과정에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의 활동을 통해 예술작품 탄생 과정에서 간과되기 쉬운 ‘노동’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려는” 목적을 표방했다. “현대예술이 담고 있는 의미를 ‘재료’와 ‘노동력’이라는 새로운 측면에서 고찰해 볼 기회를 관람객에게 제공”하려 했다는 것이다.
관람객을 그저 감상자나 향수자로서의 역할로부터 불러내어 완성된 작품의 한 부분이나 작품 완성을 위한 참여자로서 끌어들이는 것은 현대미술의 한 경향 가운데 하나이다. 메일아트 등의 개념적인 미술도 그렇고, 전자기기의 발달에 의해 점차 복잡하고 정교해지는 인터랙티브 아트 형식의 작품 또한 그렇다.
그러나 이번 <매뉴얼전>은 기성예술이나 제도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메일아트나 유희적인 성향이 강한 근자의 인터랙티브 아트와 달리, 작품 아이디어와 제작방식을 미술가가 담당하고 참여자는 그 지침을 벗어나지 않는 한도에서 자율성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실제 작품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많이 다르다. 마치 작곡가의 음악을 자신의 해석을 담아 연주하는 연주자와 유사하다고 할까.
미술가가 제작한 매뉴얼, 그것도 지정된 재료라는 제한 속에서 제작한 매뉴얼은 자연스럽게 미술, 미술행위, 작품 등에 관한 작가의 관점이나 이념이 드러나리라 생각한다. 나아가 이러한 취지(특히 미술(가)와 관람객의 접촉이나 교류 또는 미술교육 등과 관련된)에 대한 평소의 생각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참여한 작가로서도 자신의 미술과 행위가 무엇에 근거하고 있으며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한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자신의 작업이 구체화되는지를 되돌아보고 반성해볼 수 있는 훌륭한 기회라고 생각된다. 관람객으로서도 미술에서 재료와 노동의 의미를 고찰해보도록 한다는 기획의도도 물론 성과가 있겠지만, 미술이나 미적 활동에 대해 평상적인 관람과는 다른 관점과 태도로 접근하도록 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좋지 않은 조건 때문에 참여를 고사한 몇몇 작가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쉽다. 교육을 표방하는 오산시로서도 예술교육이 단지 ‘즐기며 체험하는’ 것에만 있지 않음을 확인하고 숙고와 준비를 거친 전시를 통해 예술의 의미를 깊이 있게 교육하는 미술관을 만들어가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박정구 독립 큐레이터

위 문화공장오산에서 열린 <매뉴얼> 전시광경

CRITIC 리경 역전이(逆轉移)

도쿄 메종 에르메스 2014.10.31~1.7

현대 건축의 거장 렌조 피아노가 디자인한 도쿄 긴자의 메종 에르메스는 건물 자체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와도 같이 대기와 빛의 변화에 반응해, 투명한 아이스큐브를 쌓아놓은 듯한 유리 표면은 한낮의 하늘과 구름의 표정을 담아내고 밤에는 실내의 불빛으로 황금색을 머금는다. 자신과 외부를 물리적으로 규정하고 구분짓는 건축물의 외피가 대기의 변화를 컨트롤하기보다 겸허히 받아들이는 까닭에 ‘빛’을 주제와 소재 삼아 작업해온 리경에게는 전시 공간 자체가 영감이자 작업의 출발점이 된다.
대기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빛’의 흐름을 담기 위해 작가가 택한 재료는 ‘자개’다. 전시장 바닥을 오색의 영롱한 빛깔로 뒤덮은 자개는 이른 아침 서늘한 연못이 되고, 정오의 햇살 아래 찬란의 빛의 향연을 펼치다가 도시의 현란한 네온사인을 배경으로 차분히 밤을 맞이한다. 빛을 발산하거나 반사하는 것이 아니라, 빛을 ‘품는다’는 표현이 적합하겠다. 대기와 건축물과 리경의 신작이 함께 만들어낸 경이로운 풍경은 시간에 따라 방향과 톤이 바뀌는 사운드와 어우러져 보이지 않는 태양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강렬한 빛을 발산하는 전구와 초현실적 공간감을 만들어내는 레이저 등 인공광을 주로 사용해온 작가가 햇살을 가득 머금은 텅빈 갤러리와 조우하는 순간 빛의 근원인 태양을 강렬히 의식하고 이를 작업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이기로 한 것은 빛을 ‘만들기’보다 ‘받아들이기’로 방향을 전환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과 태도의 전환은 빛의 시각 효과를 넘어선 총체적인 신체 경험을 통해 절대 가치에 대한 방법적 회의를 거듭해온 그가 바로 인식의 주체인 자기 자신으로부터 작업의 여정을 다시 출발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신작 <뱀의 키스(Serpentine’s Kiss)>와 2003년에 발표한 바 있는 <선악과(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 Evil)>로 구성된 리경의 이번 개인전은 ‘역전이(Countertransference)’ 라는 심리학 용어를 제목으로 삼고 있다. 이는 심리 상담에서 환자가 주변 인물들에게 느끼는 감정을 치료자에게 옮기는 전이 현상에 대한 영향으로서 치료자가 환자의 무의식에 반응하는 현상을 가리키는데, 이러한 심리적 과정을 통해 작가가 자신과 동일시하는 대상은 현실의 존재가 아니라 전설 속의 인물 ‘아사녀’이다. 햇빛을 머금고 수면처럼 반짝이는 자개 바닥은 사찰에 격리된 채 불상을 제작 중인 남편 아사달을 만나기 위해 국경을 넘어 왔다가, ‘불탑이 완성되면 연못에 탑 그림자가 떠오른다’는 스님의 말을 믿고 연못가를 지키던 중 기다림에 지쳐 물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의 한 장면이 된다.
리경은 이러한 이야기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야기한 ‘기다림의 대상’이 무엇인가는 질문한다. 결코 연못에 떠오를 리 없는 불탑의 그림자, 그리고 아사녀의 속절없는 기다림에서 뚜렷한 목표도 그에 따른 보상도 보장받지 못하는 예술이라는 활동을 통해 앞만 보고 질주하는 사회인들이 이미 의식의 뒷구석에 봉인해놓은 인식론적 질문들을 끌질기게 되묻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다. <뱀의 키스>는 <마지막 희생(Last Sacrifice)>, <(하나님이) 아담을 불렀다(He called to Adam)>, <선악과(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 evil)> 등의 제목이 암시하듯, 특정 종교의 언어와 도상을 빌려 지각과 인식의 이율배반이라는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어온 그의 작업 맥락에서 연속성을 가진다.
바다에서 태어난 자개가 하늘의 빛을 반사하여 수만 가지 색을 만들어내듯이, 작가는 자신을 성경과 전설의 인물에 투영함으로써 그들이 발신하는 메시지를 증폭시킨다. 빛이 자개에 부딪혀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듯, 그들이 작가를 통해 우리 개개인에게 새로운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 신의 아들 예수, 세속적 순교자 아사달과 아사녀가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루어진 리경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수많은 의미는 전시장 입구에 쓰여진 가스통 바슐라르의 글귀로 함축할 수 있겠다. “그 자신을 소멸시키며 순수하게 타오르는 것은 바로 자신의 불순물이며, 이는 순수의 양식과 재료가 된다.”
임근혜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과장

위 리경 <역전이-Serpent’s Kiss> 자개, 합판, 멀티채널 사운드, PAR 조명, 자연광 가변설치 2014
ⓒ Naca’sa&partners Inc. / Courtesy of Foundation d’enterprise Her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