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이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정형민 관장이 직무정지에 이어 불명예 퇴진한 이후 8개월을 끌어오던 신임관장 선임은 문체부의 최종 후부 부적격 판정으로 결국 재공모로 가닥을 잡았다. 유일한 국립미술관으로서 국립현대미술관의 수장이 오랜 기간 공석인 사태에 미술계는 허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으며 일각에서는 미술계에 대한 모욕이라는 성토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월간미술》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지금을 위기로 규정하고 난국을 타개할 방안을 미술계와 함께 고민하고자 한다. 우선 설문을 통해 사태를 바라보는 미술계의 시각을 전하고, 국립현대미술관의 문제를 짚어본다. 그리고 문제 원인 해소를 전제로 국립현대미술관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또한 신임 관장의 요건, 즉 디렉터십에 대한 박신의 경희대 교수의 글을 싣는다. 박 교수는 시대에 걸맞은 미션과 비전을 가진 미술관으로 재탄생하기 위해 신임 관장이 갖추어야 요소에 대해 일갈한다. 이번 인사 파문의 직접적인 당사자로 알려진 최효준 전 경기도미술관 관장의 글도 싣는다. 이와 더불어 이명옥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회장이 보내온 제언도 읽어보시길 바란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동시대 한국미술에 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하다. 다만 그 실체가 작금의 관장 인사 사태로 드러났다는 점이 유감이다. 선장 없이 표류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정상 항로로 진입하도록 유능한 선장 선임을 촉구한다.
초유의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재공모 사태,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재공모 건을 두고 미술계가 시끄럽다. 매끄럽지 못한 인사 문제가 도마에 오르자 미술계는 “미술계를 무시한 처사”라며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를 향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는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미술계는 오늘의 파행은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에 대한 책임운영기관 제도’ 도입 당시 이미 예고됐다고 입을 모은다. 이로부터 서울관 건립, 그리고 최근 관장 재공모까지 국립현대미술관을 둘러싼 주요 사건을 연보로 정리했다.
2006. 1
국립현대미술관 책임운영기관 체제로 전환
책임운영기관으로의 전환 여부를 놓고 치열한 찬반 논의를 벌인 끝에 2006년 1월 1일자로 책임운영기관제를 도입했다. 책임운영기관 제도란 “정부가 수행하는 사무 중 공공성을 유지하면서도 경쟁원리에 따라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한 사무에 대하여 기관장에게 행정 및 재정상의 자율성을 부여하고, 그 운영 성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도록 하는 제도”다. 제도 시행을 앞두고 미술계 내부에서도 “기관의 비효율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의견과 “극대화된 수익성 추구로 인해 예술의 공공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의견이 맞선 바 있다.
2009. 1
국군 기무사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부지로 선정
이명박 전 대통령은 ‘문화예술인 신년 인사회’에서 서울시 종로구 소격동 옛 기무사터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조성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이로써 서울시내에 국립미술관을 조성해야 한다는 미술계의 오랜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2009. 2
배순훈 제17대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선임
국립현대미술관 최초로 전문경영인이 관장에 선임되어 화제를 낳았다.
2010. 9
서울관 설계공모 당선작 발표
2010년 2월에 공모한 서울관 건축설계공모에서 민현준 홍익대 교수의 설계안이 최종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2011. 6
서울관 기공식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기공식이 정병국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각계 인사 6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2011. 12
배순훈 관장 사퇴
임기를 3개월 남긴 배순훈 관장이 전격 사퇴했다. 국회 국정감사에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이름을 ‘UUL’로 지은 것에 대해 질타하는 국회의원과 이에 답변하던 배 관장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고 이것이 사퇴를 촉발한 원인으로 지적됐다.
2012. 1
제18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으로 정형민 교수 선임
국립현대미술관 수장·보존센터 건립 추진 발표
정형민 서울대 동양화과 교수가 제18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으로 선임됐다. 정 관장은 국립현대미술관 최초의 여성 관장이었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청주 옛 연초제조창 건물을 활용, ‘국립미술품 수장·복원센터’(가칭)을 건립한다고 발표했다.
UUL 국립현대미술관 UUL국립서울미술관 브랜딩
2012. 8
서울관 건축현장 화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신축공사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4명이 사망하는 등 17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2013. 5
국립현대미술관 신규통합 MI 발표
과천관, 서울관, 덕수궁관, 청주관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표현한 새로운 통합 MI(Museum Identity) ‘MMCA’를 발표했다. ‘MMCA’는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의 이니셜 약자다.
2013. 11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
개관전 <시대정신>, 학연 논란 및 출품작 철거 외압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 기념 <시대정신전>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전시 출품 작가가 특정 학교 출신에 치우쳤으며 개관전에 걸맞은 전시 내용과 수준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게다가 일부 작가의 작업이 전시 직전 외압에 의해 철거됐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사면초가 상태에 빠졌다.
2013. 12
한국미협,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규탄대회
성명 발표
국립현대미술관 발전 TF팀 구성 발표
국립현대미술관은 12월 3일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일각에서 일었던 개관전 작품에 대한 균형성 미흡과 과천관과 덕수궁관 등에 대한 배려 미흡 지적에 대해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자문기구를 구성하겠다”며 “객관성과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의견수렴 절차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2014. 10
정형민 관장 정직(직위해제)
10월 10일 감사원은 정형민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 학예사 채용 과정에 부당하게 개입, 지인 2명을 합격시켰다고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또한 감사원은 정 관장에 대해 직권남용과 업무방해 혐의를 적용, 검찰에 수사의뢰했다. 이에 문화체육관광부는 10월 16일 정 관장에 대해 직위해제 조치했다.
2014. 11
개관 1주년 기념전 <정원> 개막
2015. 1
관장 공모(~2.9) 원서 접수
‘관피아’ 논란으로 신설된 인사혁신처를 통해 신임 관장 공모를 실시했다. 총 15명이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5. 2
관장 선임을 둘러싸고 잡음
자칭 ‘국립현대미술관 정상화를 위한 범미술행동 300’은 관장으로 선임되지 말아야 할 10대 사양 인물을 발표했다. 또한 관장 공모에 지원한 이 중 정계 출신 인사가 포함되어 낙하산 인사 논란이 일었으며 일부 후보자의 과거 이력과 로비 등이 입길에 올랐다.
2015. 3
최종후보 최효준 윤진섭으로 압축
2015. 6
문화체육관광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재공모 결정
문화체육관광부 6월 9일 보도자료를 통해 “적격자가 없다고 판단하고 재공모 등 후속조치를 추진하기로 하였다”고 밝혔다. 법적 근거로 ‘책임운영기관의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 시행령(제3조 제5항)을 들었다. 이에 다음 날 최종후보자 중 한 사람으로 거론된 최효준 전 경기도미술관 관장은 서울시내 모처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문체부로부터 자진 사퇴를 종용받았다”고 밝혀 파문이 일었다. 또한 그는 “인사혁신처의 심사를 적격으로 통과했음에도 문체부에서 이를 거부한 것은 하자가 없는 인사시스템을 무력화하는 전례를 만들 것”이라고 비판하며 “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문체부 장관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문체부는 즉각 보도자료를 내 “인사혁신처는 후보자를 추천하고, 적격자 여부는 주무부처에서 최종 결정한다”며 “문체부 임용심사위원회에서 문화예술계 의견, 국립현대미술관 근무 당시의 성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 ‘적극적인 업무추진력, 창의성과 혁신적 마인드 등 변화와 진취성이 요구되는 국립현대미술관장의 업무를 수행하는 데는 다소 미흡’하다고 판단하여 최종적으로 재공모를 추진키로 의결했다”고 해명했다. 또한 최 전 관장이 주장한 ‘사퇴 종용’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며, 사전통보 과정에서 적격자 없음으로 발표될 경우 후보자가 명예 또는 경력 훼손을 걱정해 스스로 사퇴하는 방법이 이야기됐다”고 밝혔다. 이후 김종덕 문체부 장관이 모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의 문호를 외국인에게도 개방할 것”이라고 밝혀 논란의 불씨를 지폈다.
정리・황석권 수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