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표류하는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에 대한 제언

《월간미술》이 실시한 설문의 마지막 항목은 국립현대미술관에 대한 제언이다. 이는 “좌표를 잃고 표류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을 향한 질타와 충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국립현대미술관의 정상화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미술인들은 신랄한 비판과 제도적 개혁 방향에 대해 의견을 쏟아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대한 미술인들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때론 단호하고 따끔하게, 때론 담담하게 건네는 미술인들의 제언을 가감없이 전한다.

-재공모 자체가 사태의 본질적인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이와 같은 국립현대미술관장의 장기 공석 사태에 대한 책임은 따져야 할 것이다. 재공모 결정을 지나치게 시일을 끈 상태에서 발표, 이제 와서 외국인에게도 개방한다니, 한국에는 자국의 국립미술관 수장을 맡을 만한 인물도 없는 것으로 비칠까 심히 걱정스럽다. 공모를 공고할 당시에 처음부터 외국인에게도 개방한다고 했다면 모를까, 지금은 아닌 것 같다. 이번 사태는 현 행정부의 문화예술에 대한 무관심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한 나라의 대표적 미술관의 위상을 위정자들 스스로 무너뜨리고, 나아가 한국 문화예술계 전반에 큰 상처를 입히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향후, 작금과 같은 우를 범하지 않도록 현 공모제의 한계를 극복할 만한 정책 연구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배종헌

2년 임기의 관장을 뽑는다며 8개월을 허송세월하고도 책임 있는 자리에 앉아있는 자들은 미술계에 사과 한마디 하지 않는다. 미술계가 그만큼 만만한 것이다. 후보자들의 능력이 부족했던 탓이라며 이번에는 외국인을 받을 수도 있다고 한다. 관료들이 운영해도 미술관이 굴러는 갈 것이고 국립현대미술관이 없어도 우리 미술에는 크게 달라질 것이 없을 것이다. 문화융성을 공약으로 내세운 정부에서 한심한 일인데, 아무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게 더 한심한 일이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장기 공석과 임용 무산은 근본적으로 시스템 즉, 제도적 문제에 기인한다. 국제적인 현대미술관의 운영시스템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관장을 맡고, 이들이 집행하는 전시기획, 운영방식, 인력운용 등에서 필연적 파행은 예고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관장 선임 방식이 정부기관의 간섭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하고 인사권의 자율성이 없는 게 문제다. 이번 사태에서 보듯이 형식은 책임운영기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인사나 예산 등에서 정부의 간섭을 피할 수 없는 구조다. 현재로선 이사회를 제대로 구성하여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받아야 하고 이 이사회에서 관장임명추천위원회와 같은 기구를 만들어 이사회에서 추천, 임명을 결의하는 방식이 최선의 방책이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은 문화체육관광부의 산하기관일 뿐이다. 차제에 서울관 개관을 계기로 관장의 직급도 차관급으로 격상해야 한다. 장동광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공모는 책임기관운영제로 행안부에서 한다고 들었다. 심사위원 구성에서부터 비전문가들이 참여하면 제대로 된 관장을 뽑을 수가 없다. 이 공모 운영 권한을 문체부가 되찾아야 한다. 행안부에서 심의위원을 선정하더라도 문체부에서 추천하는 인사들로 구성하면 현행 공모제도하에서도 어려움을 피해갈 수 있다. 김정헌

-그동안 미술계가 비판의 목소리에 인색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양은희

한 나라의 미술계를 대표하는 기관의 장을 선출하는 방식이 개편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미술계가 납득할 만한 인물이 선출, 임용되는게 상식이지만 그렇지 못해왔던 게 사실이라면 그 방식을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상적으로는 내부에서 승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실정이 그렇지 못하다면 적어도 경험있는 내부 인력들의 의견을 수렴해 참고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까지 임용방식을 보면 위에서 정해놓고 공무원들이 심사를 조정하는, 주로 ‘짜고 치는’ 식으로 진행돼왔다. 이것도 수정돼야 하지만 누구든지 임용공모에 참여하는 것도 고쳐야 할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재공모와 관련 외국인 전문가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겠다는 기사를 보았다. 참 우스꽝스러운 현실이다. 한 나라의 국립현대미술관의 미래적 방향이 걸린 관장직을 다른 나라 인재로 대체하려 한다는 그 사대주의적 발상이 참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 같은 발상을 하는 문체부에 모두 같이 나서서 적극 대응책을 촉구하자. 우리의 미래지향적 방안과 우리의 미래 창의적 계획을, 오늘의 형편에서 우리의 미래를 창출해갈 기획을 창안해내야 할 막중한 자리를 어찌 남의 손에 맡기려 하는가. 대통령을 다른 나라 국민에게 맡겨도 된다는 말인가? 우리들의 과제, 우리들의 고민, 우리가 연구해 나갈 방향은 우리들이 구축해야 한다. 문체부 생각이 참 너무 꼴불견이라 큰 걱정이다.

내국인/외국인, 미술전문가/비전문가의 구분을 떠나, 현 시점에서 국립현대미술관에 필요한 관장은 관료조직화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방대한 조직에 적합한 미션을 정립하고, 이에 맞춰 각 관별의 정체성을 수립하며, 학연 및 지연보다 개개인의 능력에 맞춰 인사를 단행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이러한 관장 아래에 전문성을 갖춘 인사들이 각 관별로 부관장 또는 실장으로서 적합한 사업을 기획해 나가야 한다. 이제 국립현대미술관은 한 명의 관장이 모든 사업을 총괄하는 현재의 조직구도로는 효율적인 운영이 어려울 만큼 방대한 기관이 되었다. 관장 선임과 함께 기관 조직, 인사, 운영에 대한 총체적인 컨설팅이 필요하다.

-첫째, 만병의 근원으로써 기형화된 책임운영기관 체제로부터 해방시켜 국립기관으로 환원하거나 법인으로 전환해야 한다. 둘째, 하나뿐인 국립미술관 관장의 직급이 2급 국장에 해당하여 장관에 굽실대는 하위직급인데 국내는 물론 국제 위상에 적합하도록 최소 장차관급으로 격상하는 동시에 그 위상에 적합한 관장을 초빙, 임명해야 한다. 셋째, 형편 없는 소장품 구입예산을 최소한 100억 원대로 증액하고 특히 서구 근현대미술품 소장을 위한 특별예산을 책정해야 한다. 최열

이번 사태는 단순히 관장 개인의 능력에 대한 판단이나, 정치적 코드인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술계 전체에 대한 국가의 인식을 보여준다. 미술계는 국가로부터 자율적인 제도로서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제도의 안정성과 권위는 내적으로 미술인들 사이의 주관적 신뢰로부터 나오며, 그 주관적 신뢰를 바탕으로 객관적 제도가 만들어진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그 제도의 정점이자, 국가와 사회에 대해 미술계를 대표하는 관문이자 거점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미술계의 와해를 보아왔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소수만을 위한 전시, 비평, 미술언론. 미술인 스스로 외면하는 미술계. 국립현대미술관을 보는 국가의 시선은 한 단면일 뿐. 김동일

-국립현대미술관을 문화정치의 기초로 삼지 말라. 국립현대미술관을 검열과 통제 그리고 통치의 방식을 실현하는 장으로 만들지 말라. 미술계 내 이념적 이항대립을 조장하여 갈등을 일으키고 적대와 혐오를 거듭하는 사태를 일으키지 말라. 풍문과 소문 대신에 사실과 진실 앞에 서도록 투명한 제도적 운영과 절차를 실천하라.

한 나라의 미술계를 대표하는 기관의 장을 선출하는 방식이 개편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미술계가 납득할 만한 인물이 선출, 임용되는게 상식이지만 그렇지 못해왔던 게 사실이라면 그 방식을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상적으로는 내부에서 승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실정이 그렇지 못하다면 적어도 경험있는 내부 인력들의 의견을 수렴해 참고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까지 임용방식을 보면 위에서 정해놓고 공무원들이 심사를 조정하는, 주로 ‘짜고 치는’ 식으로 진행돼왔다. 이것도 수정돼야 하지만 누구든지 임용공모에 참여하는 것도 고쳐야 할 것이다.

정치 권력에 대한 예술인의 자율성 확보 요구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현 사태에 관한 미술인들의 반발 또한 자율성 확보를 위한 ‘투정’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선임 문제를 불투명한 이유로 백지화한 행태는 현 정부의 문화예술에 대한 낮은 인식을 그대로 옮겨놓은 예라고 본다. 윤규홍

무엇보다도 개화기 이후 한국근현대미술의 전개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 특히 제국 일본의 식민주의 규율과 2차대전 후 미국/소련이 이식한 냉전적 규율이 20세기 우리 미술에 드리운 부정성을 세계사적 문맥에서 비판하며 해체할 수 있는 그런 문제의식과 안목과 식견을 지닌 전문가를 관장으로 채용해야 함. 그렇게 하려면, 완고한 민족주의 정체성 담론에 물든 이들, 파인아트라는 식민지근대적 유령에게서 놓여나지 못한 이들, 국제적 규준을 추구하지만 실제로는 사대주의자에 불과하거나 자기-식민지화에 앞장서는 이들을 경계해야 함. 김학량

전시기획 운영 등에서 자율적인 조직 정체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어떤 개혁도 무위. 낙하산 관장, 학맥 관장 시비 걷고 리더십의 새 모델 제시해야.

-정치와 미술은 분리되어야 한다. 이 사태는 분명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미술관장직에 대한 오래된 편견에 대해, 그리고 대한민국 국립현대미술관의 정체성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미술관장직은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권력이 아니라 전문 인력들이 제대로 일할 수 있게 독려하고 방향을 잡아주는 직이다. 또한 해외의 유명한 관장을 영입하는 것이 국립현대미술관의 위상을 격상시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립현대미술관은 스스로 자유롭게 일어서야 한다. 백곤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선출 논란을 계기로 미술계 내부가 반성의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미술(관)에 대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덕망 있는 미술인이 관장으로 선출되기를 바란다. 국내 기관장 선출에서 늘 문제시된 ‘무능’과 ‘부정’을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전문성’과 ‘도덕성’이 중요하다. 따라서 이번 관장 선출 논란을 계기로 전문성과 도덕성을 갖춘 미술인이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으로 선출될 수 있도록 선출제도와 심사제도를 재정비하기를 바란다. 류병학

[장기 표류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을 바라보며 미술계와 문화체육관광부에 촉구한다]
0. 미술계는 국립현대미술관의 특수법인화 전환을 능동적으로 수용하라. 미술계는 작금의 사태를 숙의하며 개혁의 향방을 다각적으로 논하라.
1. 국립현대미술관을 이끌어갈 관장을 채용하는 과정을 합리적으로 개선하라. (서울대 홍대 미협 민예총 등 파벌과 인맥을 등에 업은 구시대적 인물을 원천 배제하라.)
2. 국민과 미술인 사회는 관료주의적 운영을 극복하고 유연한 리더십을 발휘할, 현대적 감각을 갖춘 관장을 바란다. 청년 예술가들을 파트너로 포용하는 미술관을 창출해낼 리더를 널리 구하라.
3. 국립현대미술관장도 (국립중앙박물관장처럼)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직급을 차관급 정무직으로 격상해야 마땅하다.
4. 특수법인화와 함께 전면적 구조 조정을 실시하고, 신규 재계약 학예직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라. (관장 이하 학예직의 국적 제한과 장벽을 철폐하라. 유교적 연공 서열에 따른 관리직 진급 시스템을 철폐하라. 학예직을 위한 유연근무제와 연구안식년제를 도입하라.)
5. 신자유주의적 초대형 미술을 지향하는 서울관의 시대착오적 전시공간 구획을 휴먼스케일에 맞게 재조정하라.
6. 서울관에 청년 작가를 위한 (적당한 크기의) 실험적 프로젝트 스페이스를 신설하라.
7. 청년 작가, 큐레이터, 평론가들에게 도움이 되는 형식의 유기적 프로그램—예컨대 초청 큐레이터/평론가 연구 지원 제도—을 도입하라.
8. 허울 좋은 미술은행제도 당장 폐지하라.
9. 국립현대미술관은 1987년 이후의 한국 컨템포러리미술의 얼개를 총괄하는 소장품/대여품 장기 전시를 서울관에 마련하고, 비평적-역사-쓰기 작업에 나서라.
10. 우수 전시의 여타 지방 국공립미술관 순환 전시를 실시할 수 있도록 협의체를 구성하라.
11.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현대미술사의 주요 다큐먼트를 영역(英譯)하는 작업을 위한 번역기금을 조성하고 자율적 번역사업을 실시하라.
12. 국립현대미술관은 풀서베이 전시와 회고전 실시 과정에서 사실 확인 작업을 위한 엄격한 진실성 검증 단계를 도입하라.
13. 고 임영방 관장의 업적을 기리는 회고전을 실시하고, 그의 이름을 건 큐레이터십 시상 제도를 마련하라.
14. 미술계의 파벌들은 투서와 모함과 음해 공작을 중단하라.
15. 미술관의 운영 방침 논의 과정에서 아트딜러의 상업적 개입과 상업화랑에 긴밀히 연루된 인사의 부정한 개입을 차단하라.
임근준(이정우)

-우리나라 미술계의 역량은 최근 여러 측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 미술계의 전시나 비엔날레 등이 질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이를 다루는 공무원 행정은 아직도 처참한 수준이라는 사실이 이번 사태를 통해서 드러났다. 미술관장을 뽑는 인사 과정에 미술전문가들이 참여하지 못하고 정무적인 판단에 의존하는 현재 시스템은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백기영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은 예산과 인력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없다. 직원 개개인이 각자 맡은 업무에서 전문성과 창의력을 발휘하여야 한다. 미술관 스스로 업무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해 보며 자율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그냥 커다란 조직 구조에 의해 굴러가는 국방부 직할부대 및 기관 체제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김달진

국립현대미술관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를 해결 또는 분담하기 위해선 우선 국립근대미술(박물)관이 설립되어야 한다. 근대의 시기 설정이 모호하더라도 이미 진행된 조형예술에 대한 시기적 구분은 가능하다. 창작의 입장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하나의 기관에만 의존하면서 생기는 오해들이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의 경우 학예실의 고용 안정화는 물론 그 업무역량을 실제적으로 강화시키는 것이 시급하다. 비대해진 행정 서비스 조직으로 전락하지 않고 예민한 창작의 실험실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학예실의 권한을 더 키워야 할 것이다. 최금수

-미술관장은 단순한 관료 자리가 아니다.
우리 미술을 통한 우리의 사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이해하고 이를 윤리적 태도로 보여주기 바란다. 사회적 출세나 자기 과시의 자리가 된 이 시기에 관장은 무엇보다 상업성과 정치적 자장력을 고려하지 않고 이 시대의 사유와 상업화에 대응할 윤리성과 전문성을 갖춘 인물이길 바란다. 국립미술관다운 존재 가치는 그럴 때 인정받을 수 있다. 강선학

이번 최종후보 두 사람이 임명되지 않은 것은 과정은 잘못되었는지 몰라도 결과는 잘된 것이다. 관장보다 중요한 직은 학예실(장)이다. 학예실장 임명은 여론을 수렴하여 신중하게 하고 임기를 길게 보장하여 소신껏 일하도록 해야한다. 관장은 문화 예술에 대한 이해와 소양이 있으며 행정과 경영능력이 있는 자 중에서 추천을 받아 임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재공모 사유에 대해 문체부 장관이 미술계 내부의 반목과 인물 부재를 거론한 것은 미술계 전체를 깎아내리는 처사라 사료됨. 이 부분에 대해서는 문화계 수장으로서 반드시 사과와 입장 표명이 있어야 함.
2. 문체부에서 직접 재공모 대상자를 물색하거나 외국인 관장 영입을 추진하겠다는 식의 언급 역시 국내 미술계를 평가절하하는 처사로서, 국내의 인물을 양성하고 역량을 발전시켜야 할 문체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봄.
3. 따라서, 발상의 전환과 적극적 전략이 필요하며 국내 미술계가 당면한 산적한 문제들을 어떻게 선결해 나가야 할지에 대한 정책과 비전을 제시해야 할 것임. 유진상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최종 후보자 2명(최효준, 윤진섭)에 대한 탈락 사유가 불분명하고 이해가 안가는 게 문제입니다. 결격사유가 명확하다면, 불필요한 오해와 소모적인 논쟁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런게 아니고, 우려하는 것처럼, 청와대 내정설이나, 학연 때문에 배제됐다면, 한국미술계에 엄청난 혼란과 반목을 조장할 것입니다. 미술계는 반드시 책임자 문책을 요구하고 투명한 사후 조치를 지켜봐야 합니다. 손성진

-국립기관답게 장기적이고 일관된 관점으로 전시를 기획해, 스쳐 지나가는 전시가 아닌 쌓여나가는 전시, 연구 가치가 있는 전시를 보여주기를 바란다. 동시대 서구미술을 발빠르게 소개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트렌드보다 더 중요한 국립기관의 의무는 한국근현대미술사를 정리하고, 서구미술을 주체적으로 해석하며, 소장 가치가 있는 도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미술기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관장 자리가 정치적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관장 자리는 기획자의 자리가 아니며 미술에 대한 비전과 신념을 바탕으로 미술관 내부 기획자들의 기획을 서포트하는 등 경영능력이 우선되는 이가 관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현재 2년 계약의 비정규직 기획 인력은 기획력의 저하를 초래할 뿐 아니라 장기적인 과정이 수반되는 좋은 전시를 만들 수 없는 구조다. 학예인력의 고용안정이 우선되어야 하며, 관장 임명 과정은 투명성을 담보해야 하는 만큼 더욱 공개적인 절차가 필요하다. 서준호

바보야, 국립현대미술관은 전시하는 곳이 아니야! 시각문화를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정체성과 한민족이라는 민족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이를 통해 유대감을 지님으로써 한 개인이 국가 구성원으로서 국가를 사랑하고 믿고 일체감을 갖도록 하는 정치적 기관이야. 바로 이런 정치적 이유 때문에 근대국가들이 탄생하면서 모두가 국립미술관과 박물관을 설치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때문에 이러한 위기가 온 것.(이 답변으로 17번 이하 답변을 대신함)
그리고 《월간미술》이라는 대한민국의 미술 전문지조차 이런 국립미술관의 존재 이유를 모르고 단지 전시시설의 하나로 보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상” 정준모

학예기능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제도적/법적 장치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고 이를 수용하고 이끌어갈 관장이 선임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장의 권한과 역할이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모든 대한민국 미술관 관장이 큐레이터가 되는 기이한 현상이 중장기적으로 한국미술계에 미치는 영향은 불 보듯 뻔하다. 서상호

1. 관장이 있을 때나 지금이나 미술관 운영에 큰 차이를 보이지 않음. 오히려 없는 편이 이상한 관장이 재직할 때보다 나은 듯도 함.
2. 미술관 내부 학예연구직에게 기획과 운영의 자율성을 주고, 현 직급의 관장은 학예직에서 임용하는 것이 최선일거라 생각됨.
이태호(명지대 교수)

1. 관장 선임 방식에 따른 폐해성이 가장 큰 문제. 널리 인재를 구해 쓴다는 공모제의 도입 취지와 달리, 진정 덕망 있고 능력 있는 관장들이 응모를 하지 않는 것이 문제. 그래서 관장 인선은 추천제와 임명제의 혼합형이 바람직하다고 봄.
2. 학예인력들의 폐쇄성 혁신이 시급. 미술관의 정체성 확립과 콘텐츠 능력은 결국 학예인력들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

국립현대미술관장은 한국 현대미술계의 수장 역할을 맡은 인물이다. 이에 전문성과 책임감을 지니고 미술계를 선도하고 국립현대미술관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인물을 선택해야 한다. 이에 미술의 전문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활동 인물의 인프라가 미약한 점을 감안하여, 공모제를 폐지하고 초빙하여 관장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하고 책임과 권한을 함께 주어야 한다. 조은정

1. 관장 심사를 누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투명성이 없다
2. 국립현대미술관의 학예사나 큐레이터의 기획력이 미흡하다.
3. 장기적 전문성을 확보할 기회가 부족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을 통해 홍콩바젤 등을 지원하겠다는 충격적인 내용의 기사를 봤다. 부디 한국현대미술이 나아갈 좌표를 설정하셔서 국립현대미술관 건물을 채우는 전시가 아니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해야만 하는 당위성 있는 전시가 많이 개최되었으면 한다.

-현대미술관에 대한 개념적 접근이 사실상 실종된 채, 지나치게 지엽적인 시각이 난무함. 문제가 있다면 우리 미술계의 총체적인 현실과 직결돼 있음을 직시하고 보다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해결을 희망한다. 문화 현상이야말로 미래를 내다보는 원거리의 넓은 시야에서 활성화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윤우학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공모 사태가 벌어진 근본 원인은 미술계 주요 기관의 대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미술계 다수 구성원의 여론과 무관하게 관료와 교수 등 권력 중심부에 있는 소수 관계자만의 리그였다는 데 있다. 그 점에 있어서 언론의 역할이 미약했다. 이번 사태를 통해서 미술계의 중요 사안에 대해 여론를 수렴하고 반영할 수 있는 미술계 자체의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이선영

그간 개별 전시 내용이나 수준, 관장 공석 사태 등의 문제가 지적되거나 불거져왔지만 그런 문제들을 만들어내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정체성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왜 존재하는지 어떤 기능을 하는 기관인지가 뚜렷하지 않은 상태에서 당면한 문제들이 풀리기를 기대하는 건 모순된 일이다. 정부나 관계부처에 내맡기거나 비판만 할 게 아니라, 모든 미술인의 주체적인 의견 개진과 참여를 통해 국립현대미술관의 정체성을 만들어야 한다. 양지윤

-관장을 비롯한 각 직책에 대한 역할과 책무를 정확히 설정해 장기적 비전과 기획의 견고성을 확보해야 한다. 박우홍

국립현대미술관은 늘어난 외형적인 규모에 비해 질적으로는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문광부 장관이나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등 특별한 몇몇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미술관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사건을 계기로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의 공석 문제뿐만 아니라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미술관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마스터 플랜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미술계 외부에 미술의 중요성과 미술 행정의 자율성에 대해 이야기하기엔, 미술계 내부의 연대와 성취를 이루기엔 미술판이 이미 이익지향적 오합지졸의 판이 되어 쉽지 않을 듯. 몇몇 사람에 의해 찻잔 속의 태풍이 되거나, 적당히 포기하고 무관심으로 자기 활동에 몰두하면서 사태가 가라앉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국립현대미술관 관련 담론이 미술계 성골, 진골 싸움인 듯하여 관심두지 않는다.

장관은 ‘미술계의 여론이 워낙 나빠 논란을 감수하고 부적격 판단을 내렸다’는데(《한겨레》 2015. 6. 11), 장고 끝의 부적격 판단과 관장 장기 공석에 대한 미술계의 여론은 왜 듣지 않는가. 남선우

미술계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엄격한 검정 과정을 통과할 사람이 과연 있느냐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사람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나름의 결점을 가지고 있다. 상식적인 수준의 결점이라면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전 검정은 필요하겠지만, 후보자에 대한 먼지 털기식 암행은 문제가 있다. 사전에 충분한 의견 수렴 과정을 거친다는 전제하에 임명제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충환

현행 공모제보다는 전문성과 리더십(행정 및 경영능력)을 갖춘 적임자를 발탁해, 임명하는 임명제가 나을 듯하다. 임기는 최소 5년으로 하고, 한 차례 연임가능케 해 깊이있고, 장기적인 프로젝트도 시행할 수 있다. 관장이 미술관 운영을 책임지되 철저히 책임을 묻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술관 전시 및 작품 구입 예산이 너무 적다. 스폰서십과 멤버십 구축에 획기적인 전략이 시급하다. 큐레이터별 전문성 구축도 이뤄져야 한다. 이영란

1. 다른 방식들은 공모제보다 문제의 소지가 더 클 것이기 때문에 공모제가 능사는 아니겠지만 기본적으론 공모제를 찬성함
2. 8개월간 관장 직무대행이 운영한 것은 그 자체로 관련 부처 장관과 나라의 직무 유기이다.
3. 나라 예산을 줄이기 위한 애국심이 반영된 것은 아닐 텐데 서울관 전체 학예직이 계약직이라는 것은 희대의 코미디이다. 김지원

관장을 비롯하여 학예사는 미술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미술관 운영의 모든 책임을 지는 의무와 소명에 투철해야 한다. 그 이면에는 전문인들을 믿고 밀어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야한다. 여론이나, 정부고위 관료의 압박, 재정적 압박 등등 외부에서 오는 부정적인 요인들은 미술관을 망치게 한다. 이는 결국 우리 미술문화를 좀먹는다. 조광석

SPECIAL FEATURE 표류하는 국립현대미술관

누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으로 적합한 인물인가?

이명옥 한국사립미술관협회장

“미술계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문화체육관광부다. 이에 더해 국립현대미술관장 후보들에 대해 입방아를 찧는 몇몇 미술인이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그들은 겉으로는 미술계의 앞날을 걱정하지만 속으로는 누가 관장이 되면 자신에게 유리할지 저울질하는 처세꾼들이다.”

국립현대미술관장 재공모 소식이 언론 보도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던 날, 한 미술인이 내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답답한 심정을 전했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는 없겠지만 실체도 없이 떠도는 소문을 부풀려 퍼뜨리거나 심지어 악의적으로 가공하는 미술인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훼방꾼들이 국립현대미술관장 선임을 더욱 꼬이게 만들고 첩첩산중으로 몰아가는데 일조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왜 창작의 산실이자 비판적 지성의 공론장인 미술계가 실력보다 학연과 인맥 관리에 열중하는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이번 관장 재공모 건을 계기로 미술계는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내 편 네 편 가르기’, 내 이익만 좇는 ‘줄 세우기’ 등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또 한 가지는 누가 신임관장으로 가장 적합한가, 즉 관장의 자질과 역할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일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추구하는 핵심 가치와 미션, 목표는 일반 공공기관이나 기업과 다르다. 따라서 특별한 리더십이 요구된다. 리더십이 부족하거나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관장이 되면 국립미술관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미술계에도 피해를 주게 될 것이다.
국내 유일한 국립미술관장이라는 대표성 때문인지 덕망과 인품을 갖춘 미술계 원로가 차기 관장감이라고 주장하는 미술인들이 있다. 혹은 빼어난 학식을 가진 미술사학자나 평론가, 탁월한 기획력을 인정받은 기획자, 유명작가, 경영마인드가 뛰어난 스타급 최고경영자(CEO), 문체부 고위관료, 심지어 미술계의 히딩크 같은 외국인을 전격 영입하자는 파격적인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들 중에서 과연 누가 책임운영기관으로 법인화를 추진 중인 국립현대미술관의 각종 문제점과 미술관 내부 갈등을 잠재울 수 있는 후보일까?
정답은 없겠지만 이철순 양평군립미술관장의 <예술기관 CEO에게 요구되는 덕목과 사례연구>와 정진우 임보영 류영아의 <책임운영기관장의 리더십 유형이 조직 몰입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관장은 예술기관장을 다음과 같이 크게 4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이들 중 바람직한 리더는 예술 전문성과 행정 전문성을 모두 갖춘 인물이라고 말했다. 첫째 유형은 ‘공무원 기관장’으로 오랜 공직 생활과 관리직 경험으로 조직 관리가 능하지만 예술적 전문성이 부족해 예술적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둘째 유형은 ‘예술가 기관장’으로 예술가이므로 예술 창조에 관심을 갖고 추진할 것이며, 그 결과 예술적 성과가 기대된다. 반면에 조직관리 경험 부족으로 예술기관 운영에서의 조직 관리는 철저하지 못할 것이다. 셋째 유형은 ‘일반기업 CEO 기관장’으로 대기업 조직관리 경험으로 조직을 잘 관리할 것이 기대되지만 예술적 가치와 수익성의 충돌로 예술적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다. 넷째 유형은 ‘예술경영자 기관장’으로 오랜 예술기관 경험이 조직 관리에 적합할 수 있고, 본인이 예술가는 아니지만 예술 기관에서의 경험은 예술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예술적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정진우 임보영 류영아는 ‘변혁적 리더십’을 책임운영기관장의 자질로 꼽았다. 변혁적 리더십이란 조직 구성원에게 미래에 대한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고 비전을 실현시켜나가는 과정에서 동기를 부여하며 적절한 성취 수단을 제공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예술전문성과 행정전문성, 변혁적 리더십을 갖춘 최적의 인물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다. 차선책은 세계적인 리더십 전문가 존 맥스웰의 조언에 담겨 있다. “위대한 리더는 자신의 리더십 강점 영역을 더욱 향상시키되, 약점 부분은 그것이 강점인 구성원들을 찾아 팀을 꾸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기 관장에 대한 윤곽이 드러난 셈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리더로서의 잠재력을 지닌 인물을 관장으로 뽑고 최고의 미술전문가들을 운영자문위원으로 위촉해 리더의 주위를 채우는 것이다. ●

SPECIAL FEATURE 표류하는 국립현대미술관

많은 사람들이 꿈꾸면 현실이 될 수 있다

최효준 전 경기도미술관 관장

지난달 초순, 베니스를 거쳐 파리로 가 루이비통재단의 미술관을 찾았다. 100% 전기로 달리는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줄을 서야 했고 입장을 위해서도 기다려야 했다. 프랭크 게리 건물의 성가(聲價)와 개관 특수 덕이기도 했지만 차가운 전시와 따듯한 전시를 함께 여는 전략적 접근과 디테일을 완벽하게 챙기는 치밀함, 공간 속에 절묘하게 녹아든 마케팅 센스 등을 접하며, “앞으로 기업이 작심하고 뛰어들면 공립 공영 미술관은 당해낼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좋은 전시를 보여주는데도 한산하고 쇠락한 기운이 역력한 파리시립미술관의 처지가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껴졌다. 앞으로 관심 있는 한국의 여러 기업인이 루이비통재단 미술관을 방문하고 벤치마킹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외국인에게 한국의 대표 미술관으로 인식되는 삼성미술관 리움을 필두로, 공공 설치미술로 잘 짜여진 프로젝트를 연이어 선보이는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제주시 구도심의 면모를 일신한 아라리오 제주미술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확실하게 특화된 공간과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대림미술관 등기업에서 운영하는 사립미술관들의 성공적인 행보는 공립 공영 미술관장으로 10년 이상 일한 필자에게 늘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미술관 공공 서비스의 불가피성은 절대적일까? 미술관의 공공성은 공사립을 막론하고 공통적 성격이며 공공의 신뢰(Public Trust)를 먹고사는 것이 미술관이지만 공영이 불가피한 다른 행정 서비스와는 달리 민영의 효율성과 성과가 세계적으로 갈수록 인정되는 것은 아닌가? 적어도 한국에서 바람직한 미술관 거버넌스의 모델은 무엇일까? 이런 화두(話頭) 같은 것이 가슴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난달까지 마크 로스코의 전시가 서울에서 열렸다. 파리, 나고야 등지에서 같은 작가의 회고전을 여러 차례 보았지만 그보다 더 충실한 내용이 놀라워 몇몇 아쉬운 점을 지나가듯 지적해 주었고 별다른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조명, 레이블링 여러 면에서, 하나를 말했는데 서너 가지가 개선된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후 특정 공간에서 촬영 허용에 따른 감상 방해가 워낙 심해보여 조심스럽게 지적했는데, 즉시 “촬영금지를 했다”는 답이 왔다.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을 과감히 시도해서 그것의 주효함을 확인하고 미진하면 계속 보강하기로 작심한 듯 기획 운영의 대표자는 거의 늘 전시장에 있었다. 이런 것이 모두 영리 추구의 힘일까? 그렇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공립 공영 미술관의 프로그램에서조차 분명하게 전제되지 않는 전시를, 오늘 여기에서 왜 하는지, 타깃은 누구인지, 그들에게 어떻게 소구할 것인지 등에 대한 명확한 답을 가지고 접근하는 모습은 퍽 인상적이었다. 전시장 입구에 쓰여진 ‘위로, 치유, 화합’이라는 세 단어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여기서 드는 의문이 있었다. 미국의 유일한 국립미술관의 대대적인 개보수 정보를 국내 유일 국립미술관에서 파악하고 온 노력을 쏟아 부어 이런 전시를 기획 유치할 수는 없었을까? 만일 섭외하여 전시를 개최했다면, 그렇게 대중적인 호응을 끌어내 성과를 낼 수 있었을까? 관람객들의 반응을 적극 수집하고 예민하게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상황을 부단히 개선해 나아갔을까? 도록과 상품을 그렇게 창의적으로 기획하고 다양한 연계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전방위적인 프로모션을 할 수 있었을까? 국립현대미술관 근무 경험이 있고, 현재 여건, 조직문화, 분위기를 잘 아는 필자가 낼 수 있는 답은 불행하게도 거의 모두 ‘아니요’였다.
입장료 환불을 요구하는 민원을 제기했다는 한 관람객의 에피소드를 들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은 예산과 큰 조직을 자랑하는 국내 유일의 우리 국립미술관에 대한 만족도가 그토록 낮아졌을까? 접근성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전 미술인이 합심하여 서울관의 개관을 보았는데 물리적 접근성 말고 내용적, 심리적 접근성의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개관전 <시대정신>, 1주년 기념전 <정원>, 이런 것들은 정말 낯 뜨거울 정도였다. 큐레이터들은 그런 미흡함이 관장의 전횡 때문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그래서 관장 공석 중에 많은 규정을 개정하여 관장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개혁(?)을 단행했는가 보다. 이해는 간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운영은 미궁에 빠졌다는 자조 섞인 탄식이 나오는 이즈음, 법인화를 반대했던 이들조차 법인화의 불가피성을 이야기한다. 과거 연극계 출신의 모 장관 시절 문체부 산하 법인화 대상 기관이 운 나쁘게 국립극장에서 미술관으로 바뀌었다고 하고, 그 이래 법안은 계속 상정되었다가 폐기되었고, 이제는 올려도 상임위 법안소위원회 소속 의원조차 그런 사실을 모른 채 본부 내 담당 부서도 담당자도 없이 으레 결국 폐기되려니 모두 생각하고, 주관부처인 행안부에서조차 “티오를 줄이는 그런 결정을 해당 부처에서 적극 추진할 리 있겠느냐?”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미술관은 미궁에 빠졌다
전문직들은 아직도 극히 취약한 미술계를 보호 육성하기 위해 법인화는 불가하다 하고, 법인화되면 주무 부처와 완전 갑을 관계가 되어 운영여건이 지금보다 훨씬 악화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타당한 우려다. 재정자립도 80%라는 믿을 수 없는 수치를 자랑하는 예술의전당이 국립현대미술관의 미래 모습이라면 누군들 반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예술의전당 팀은 자신만만하다) 법인화가 불가피하다면 적어도 5년간 수천억 원의 국고 출연과 같은 지원이 보장되어야 하며 30%를 재정자립의 상한선으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옳고, 기부를 촉진하도록 세제 등 법제도를 영국 미국 프랑스와 같이 바꾸기 위해 과거 조윤선 의원이 발의했던 법안류가 다시 심의, 통과될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견해도 옳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여기서 드는 생각. 그것은 서울관의 분립 법인화이다. 현행 정부조직법상 모기관과 자기관의 운영체제가 다를 수 없어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렇겠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이 만든 법(法)인데 길이 없을까? 모기관으로부터 자기관을 제급(除給)내어 버린다면? 듣자하니 지금의 미술관 관장대행 체제에서 방대한 서울관을 과천관의 일개 과로 전락시켰다고 한다. 계약기간이 1년도 안 남은 서울관 직원들이 과천관, 덕수궁관의 전시를 4~5개씩 맡아 한다고 한다. 과천의 정규직들은 그 반도 안 되는 전시 업무를 맡고 있고. 지금의 서울관. 엄청난 덩치의 일꾼이 족쇄를 차고 굼뜨게 움직이며 비능률적으로 실수를 연발하며 일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이제 서울관의 분리 법인화를 그려보자. 그래도 포기해야 할 티오가 없으므로 정부조직의 정규 공무원들이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없다. 5년 정도의 계약기간으로 강호에 숨은 고수들을 널리 찾아 전문계약직으로 고용하고 그들이 합심하여 보통의 시민들이 호응할 미술관을 만드는 과업을 해내도록 하는 것이다. (그들이 퇴임할 때쯤은 순수 민간부문에 그들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질 것이다.) 의식과 열정이 있는 기업인으로서 자체 미술관 건립까지 생각하지 않는 이들을 모아 이사회를 구성하고, 서민들의 욕구와 필요를 철저히 파악하고 세계의 사례를 수집하고 분석 연구하며 국내외 전문가와 전문기관과 연대하고 제휴하여 수년 내에 모마, 퐁피두, 테이트모던과 순회전을 공동 기획하는 데까지 가는 것이다. 집단 지성을 결집하여 미술 저변의 확대와 심화에 민관협치 방식으로 온 노력을 기울이고 강도 높은 자체 개혁과 함께 미술 교육, 제(諸) 미술제도의 근본적 개혁을 선도하는 것이다. 과천관은 직원의 직업 안정성을 보장하는 현 공영체제를 유지하며 연구, 수장, 교육 기능과 참신한 전시 기획에 매진하게 하여 법인화된 서울관과 선의의 경쟁관계와 협력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물론 서울관이 과천의 소장품을 제한 없이 활용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 필수적이다.) 서울관의 성공을 바탕으로 강원, 충청, 영남, 호남, 전국 4개 권역에 중앙정부-지자체 협력형 분관을 속속 건립하는 것이다. 공영의 기본 틀을 유지하며 민영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도 느낀다. 모마, 퐁피두, 테이트 모던, 그리고 앞서 예시한 기업 운영의 미술관 프로그램들이 뭘 잘 모르는 내게도 좋게 와 닿는다는 것을. 보통 사람들도 느낀다. 앞에 언급한 일개 기획사의 공들인 전시가 추상화가 전혀 와 닫지 않던 내게도 감동적이라는 것을. 요즈음 같이 “미술관은 미궁에 빠졌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 때, 공중의 기대가 강렬하게 모아지고 공공의 지원이 대폭 이루어지는 법인화된 국립서울미술관의 희망적인 비전을 뚜렷하게 그려보면 어떨까? 많은 사람이 꿈꾸면 현실이 될 수 있다. 문체부의 수장이 결심하고 전방위로 노력하면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절차가 다시 필요할 국립현대미술관의 새 관장 취임보다 빠를 것 같은 문체부 새 수장의 취임 이후 말이다. ●

EXHIBITION TOPIC Yinka Shonibare MBE

< High Tea Ⅲ >(맨 왼쪽) 마네킹, 더치왁스, 패턴천 등 혼합재료 410×122×80cm 2015

나이지리아계 영국 작가 잉카 쇼니바레 MBE의 대규모 개인전 <찬란한 정원으로> (5.30~10.18)가 대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그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역사를 풍자적으로 표현해 역사의 이중적인 측면과 문화의 혼종성을 드러낸다. 그의 작품은 일본 제국주의를 경험한 한국적 상황과 동시대성을 가지고 있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예술은 마술이자 연금술이다

이필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

잉카 쇼니바레는 영국이 자랑하는 멀티미디어 작가로서 회화, 조각, 공예, 의상디자인, 사진, 연극, 오페라, 영화 등 다양한 예술 장르를 넘나드는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은 쇼니바레의 국제적인 명성과 작품세계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가 단순히 영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가가 아니라 나이지리아 태생 흑인이자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임을 인지하고서야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의 가닥이 풀린다. 작가 입문 시절 흑인이 왜 아프리카 미술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당황했다. 변호사를 아버지로 둔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 양질의 교육을 받고 강한 지적 호기심에 자존감도 강했지만, 영국사회에서 그에게는 나이지리아 출신 흑인 작가라는 주변적인 정체성이 부여되었다. 자신의 내면과 외부에서 규정하는 정체성의 불일치에 대해 고민하지만 그는 외부에서 부여하는 정체성을 거부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타협함으로써 예술적으로 승화시킨다.
자신에게 부여된 문화적 인종적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그는 아프리카 문화의 정체성을 작품에 담고자 ‘더치 왁스(Dutch-wax)’ 염색 직물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는 향후 그의 작품에 필수적인 주재료가 된다. 일명 ‘아프리카 천’이라고 불리는 이 직물은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 시장을 겨냥해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된 면직물인 바틱(Batik)과 유사하게 제조한 것으로 인도가 시장의 매력을 잃자 아프리카로 유입되어 크게 유행하게 되고 이제는 아프리카에서 자체 제작할 정도로 아프리카화한 유럽 제품이다. ‘아프리카 천’은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이라는 것이 허구적인 개념임을 드러내는 문화 혼종(混種)의 실제적인 예로서 문화적 혼종성을 예찬하는 쇼니바레에게는 더없이 적합한 재료이다. 그의 작품은 외부에서 요구하는 아프리카성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규정하는 문화적 정체성의 실체가 얼마나 근원 없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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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Victoria philanthropist’s Parlour >(맨 오른쪽) 더치왁스 패턴천, 카펫, 가구 등 혼합재료 259×487×508cm 1996~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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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rash Willy >(오른쪽) 실물크기 마네킹, 더치왁스 패턴천 등 혼합재료 132×260×198cm 2009

분노? 그런 건 없습니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열리는 대규모 쇼니바레 개인전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는 이번 전시는 그의 작품이 제국주의를 비판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며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국이었던 한국의 역사적 경험이 그의 작품과 깊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의 작품이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냐고 묻자 그는 자신이 분노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대답한다. 그는 과거 유럽의 제국주의가 현재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한 거부할 수 없는 역사임을 인정한다. 나아가 그는 제국주의가 양산한 문화의 혼종성을 진정으로 즐긴다. 그에게 제국주의는 인간의 역사에서 문화가 어떻게 뒤섞이게 되었는지를 탐구할 수 있는 흥미로운 역사적 사례이며, 자신의 성장 배경은 그러한 제국주의가 한 개인에게 적용된 과정이다. 그는 그 과정에서 형성된 문화적 혼종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적극 수용한다. 제국주의가 양산해낸 문화의 혼종성 시대, 그리고 그것을 환영하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는, 자신과 같은 흑인 장애인에게 예술의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는 제국주의의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과 수용이라는 이중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영국 미술계의 인종차별 문제에는 신랄하다. 1980년대에 그는 해체주의에 열광하고 데리다와 프란츠 파농을 공부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의 작품 곳곳에 백인중심주의적 역사와 정치에 대한 비판이 들어있다. 그가 영국에서 학교를 다닐 당시 뼈저리게 경험한 ‘차별’은 흑인작가에게 전시와 활동 기회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학교를 졸업하고 작가로서 첫발을 떼려 할 때, 중심무대에서의 활동은 요원해 보였다. 그는 많은 인터뷰에서 1990년대 초 그가 골드스미스를 졸업할 당시 단 한 명의 흑인 작가도 런던의 갤러리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이는 그가 성공을 거둔 후 작품만을 평가하여 작가에게 전시 기회를 주는 대안공간을 연 이유이기도 하다.
어떻게 흑인 작가로서 생계를 꾸려갈지 막막하던 그에게 모델이 된 것은 미국의 페미니즘 미술운동이었다. 그는 미술계의 소수집단인 여성들, 특히 미국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는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을 모델로 하면서도 지나친 정치성이 예술의 근본적인 목적을 상실하는 경향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정치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 예술의 정치적 표현은 형식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 이러한 그의 신념은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사고와 피상적인 문화적 인종적 정체성에 대한 정치적인 질문을 예술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킨 동력이었다. 예술성을 강조하는 그의 작품은 제국주의나 자본주의 같은 사회적 구조나 자신의 신체적 장애에 대한 저항이나 분노보다는 아름답다는 미적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예술가적 기질과 재능을 타고난 그는 모든 인터뷰에서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예술을 통한 재현의 정치학, 혹은 재현의 정치학에서 예술성의 확보임을 강조한다. 쇼니바레에 의하면 작품의 형식미는 관객과 소통하는 창구 구실을 한다. 아름다움을 가지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인종차별에 대해 비판해야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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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ary of a Victorian Dandy(19.00 Hours) > C 타입 프린트 183×229cm 1998

 필름 14분28초 2005

< Odile and Odette > 필름 14분28초 2005

엄숙한 역사의 무게 덜기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의 문화적 혼종성의 근원인 제국주의적 역사에 대한 탐구와 비판적 재현은 쇼니바레 작업의 중요한 축이다. 그러나 그는 엄숙한 역사의 무게를 예술적 유머와 위트를 가미해 덜어낸다. 1962년생인 그는 자신을 68세대로 규정하면서 역사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인 세대라고 말한다. 그 무거운 역사를 가볍게 공중에 띄울 수 있는 것은 마술사이자 연금술사인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영국의 제국주의에서 시작된 영국과 나이지리아 문화의 충돌과 결합에서 잉태된 문화의 혼종성과 자본주의를 후기-식민주의 세대 특유의 거리두기와 유머와 위트로 표현한다. 그의 두 문화의 혼종성에 대한 역사적 인식과 개인적 체험은 광범위하게 전지구적인 관점에서 국가 간, 인종 간의 역학관계를 통찰하게 이끈다. 찰스 황태자로부터 MBE(Member of the Most Excellent Order of the British Empire)상을 기꺼이 받고 그 이후 자신의 이름을 ‘Yinka Shonibare MBE’로 쓰는 점도 문화의 혼종성을 수용함과 동시에 제국주의라는 역사의 엄숙주의를 예술로써 공중에 띄우는 그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의 위트는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나타난다. 한 관객이 구체적인 작품 제작 방법을 묻자 쇼니바레는 마술사가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알려주는 걸 봤냐면서 말해줄 수 없다고 재치 있게 답한다. 역사의 무게를 던 가벼움은 관객에게 오히려 역사의 실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대구미술관 기자회견장에서 본인이 가지고 있는 장애가 작품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쇼니바레는 직접적인 답을 피했다. 자신이 어떻게 팀을 운용하여 작품을 제작하는지 기술적인 문제만 간단히 언급했다. 하지만 수년전 인터뷰에서 같은 질문을 받은 그는 당당하게 본인의 모습을 닮은 목발 짚은 18세기 귀족의 상을 제작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흑인이라는 제약과 몸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 그는 예술의 연금술을 통해 누구라도 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일까. 현실을 넘어선 그 지점에서 예술이 시작된다는 믿음은 인간 쇼니바레의 신념이며 그를 지탱하는 힘이다. 그의 몸은 갈수록 약해지고 말의 속도마저 느려지고 있다. 그러나 몸이 약해질수록 그의 작품 규모는 커져가고, 쾌활한 유머와 위트를 가미한 그의 작품세계는 더욱 깊고 넓어진다. 그가 앞으로 마술과 연금술 같은 예술의 날개를 달고 현실의 제약을 벗어나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세계를 어떻게 시각화할지 더욱 기대된다. ●

EXHIBITION FOCUS John Baldessari

존 발데사리 (7)

위 < Storyboard (In 4 Parts): Arm of Chair With Mans’ Hand Resting On His Knee >(왼쪽) 혼합재료 82.8×132.7cm 2013   아래 < Double Bill:…And Manet > (왼쪽) 혼합재료 152.4 ×152.4cm 2012

일상적 소재와 새로운 매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유분방한 작업으로 20세기 현대미술의 방향을 상징하는 작가, 존 발데사리의 개인전이 6월 3일부터 7월 12일까지 PKM갤러리에서 이어진다. 이번 전시는 국내에서 1996년 개인전이 열린 이후 처음 열리는 전시로 2008~2015년에 제작된 작품 15점을 선보인다. 80세가 넘은 현재, 팝아트와 개념미술 계보에서 출발한 그의 작품경향은 어떻게 변모했을까?

현대사회의 단편성들, 그 넌센스의 조합자

진휘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파편처럼 등장하는 일상적 장면들과 그 속에 숨은 현대사회의 민낯, 평이함에 가려진 모순들을 세련된 방식으로 전달하는 작가 존 발데사리 개인전이 서울 PKM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그는 모더니즘이 주도했던 1950년대, 미술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탈-모던, 반-모던의 해체적 관점과 대중문화의 급부상을 작품의 중요한 요소로 수용했다. 팝아트의 일상적 소재와 매체의 다양화에 영향 받은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가볍고 자유분방한 취향을 바탕으로 텍스트, 영화 스틸, 사진과 인쇄기법, 동영상, 퍼포먼스, 입체, 설치와 디자인 등 폭넓은 소재의 활용과 작품 제작으로 주목받았다. 특히 하나의 의미로 수렴될 수 없는 부조화의 기호들을 병치하고 분명한 주제의 전달을 방해하는 분절적 방식을 채택하면서 현대 도시와 개인의 삶을 반영하는 작가로 평가되었다. 이런 그의 미술은 20세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와 현대미술의 방향성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개념미술의 역사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오늘날까지 미술계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마르셀 뒤샹이후 언어기호의 사용과 그 구조분석에서 오는 기묘함-탈이성이나 범이성이라고 하기보다는, 단순한 신뢰와 수용에 대한 거부와 확대-을 이용하거나 미술과 예술에 대한 예술, 메타-아트는 꾸준히 탐색되고 시도되었다. 1960년대 이후 이런 경향은 일상과 미술의 관계, 미술과 하위미술(광고, 디자인, 상업적 이미지 등)의 관계, 매체의 전형성과 제작 방식의 회의로 이어지면서 재료와 내용, 작품의 존재 등에 변화를 가져왔다. 개념미술의 또 한 경향은 이미지의 차용인데, 특히 영화나 기타 대중매체에서 생산된 이미지를 선택하고, 그것에 변형을 가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낯익은, 익숙한 이미지의 분절적 상황은 이성적이고 일관된 이해를 좌절시킴으로써, 분명하게 도출되지 않는 기의를 더듬어내는 과정에서 관객들의 다양한 경험을 자극하고 즐거움을 유발할 수 있다. 동시에 로고스로 대표되던 합리적 인식과 기호의 투명성에 대한 반발을 가져왔고, 이것은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자 현실문화의 한계로 이해되었다.

개념미술의 반미학적 반관습적 시각
이런 경향을 선도했던 미국 서부 개념미술의 대표적 작가 존 발데사리는 팝아트와 개념미술의 계보에서 출발했다. 처음에는 시각적 요소보다는 문자, 언어를 주로 사용한 회화작품인 글자 작업을 시도했다. 자신의 필치가 작가의 흔적이자 특징이 될 수 있기에 이를 거부하고, 글자를 쓰는 다른 사람을 고용해서 문자를 제작하게 했다. 또는 보편적 언어의 패턴, 공적 글씨 스타일을 빌려오고 장식 없는 글자체를 사용하는 등 작가의 주관성, 창조자로서의 신화를 해체하려고 노력했다.
1970년에는 자신의 대학시절 작품인 1953년부터 1966년에 제작된 회화를 모두 불태우는 〈화장〉프로젝트를 시도, 다 타고 남은 재를 모아 과자로 구워내고 유골함에 넣었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처럼 작품도 종결될 수 있음을 주장한 것으로, 작품의 영원성, 가치의 불변성 등을 거부하려는 시도였다. 이후 작품들은 주로 영화의 스틸컷을 비롯, 사진이미지와 문자(텍스트)를 결합한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예를 들어 〈wrong〉연작에선 의미를 발견하기 어려운 여러 장면과 글자를 함께 보여준다. 일상의 비틀기는 헛웃음이 나오는 유머를 느끼게도 하지만, 어떤 메시지도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만든다. 그는 시각적으로 화려하거나 매력적으로 보이는 작품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미술과 장인정신의 고리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이런 점에서 발데사리는 개념미술의 반미학적 반관습적 시각을 강하게 지지했다.
영화 속 배우들의 얼굴이나 이미지를 둥근 원으로 가리고, 서로 일치하지 않는 장면과 전혀 문맥을 파악하기 힘든 문서의 일부(주로 기술적 설명서에서 자주 차용)를 화면 안에 병치하는 방식도 기호의 전달에 스며든 각각의 채널과 상호간 소통의 장애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마 발데사리는 대중적 매체, 예술의 표현들에 숨어있는 어법의 전형화를 꼬집고, 이를 통해 무언가 공감을 창조할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을 거부하길 원하는 듯하다. 이런 그의 작업은 신디 셔먼, 로버트 롱고, 바바라 크루거, 리처드 프린스 등에게 영향을 주고, 1980년대 이후 미국 미술의 중요한 방식의 하나로 자리 잡는다.
오랜 기간 여러 장르의 작품들을 제작하면서 발데사리의 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무심함, 심각하지 않은 태도, 그리고 미학적 기술 없음이다. 물론 최근에는 작업방식이 훨씬 깔끔하고 미학적 완성도가 높아졌지만, 작가의 의도는 굳이 그것에 큰 정성을 들이지 않는다. 미국 동부, 즉 뉴욕을 중심으로 한 개념미술은 언어와 그 구조 속에 깃든 인식의 편재함, 관습적 사고와 미술제작의 전통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매체의 서열과 이데올로기, 자본력에 저항했다.
이와 달리 서부 개념미술 작가들은 특별한 사조에 공통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서부 작가들은 모더니즘적 전통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고, 또한 미술사적 관습에 대항하는 방식에서도 조금 자유로웠다. 그들은 감성을 강조하거나 작가마다의 개별성을 존중하고, 이질적 상황이나 내용을 연결시켰다. 발데사리는 그런 점에서 서부 개념미술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그는 할리우드 영화산업이 생산한 다양한 대중적 이미지를 적극 사용하고, 그것에서 어떤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기보다는 맥락과 부분의 관계에서 보이는 애매성, 소위 메시지의 본질과 매체의 속성에 대한 질문, 그로부터 파생된 단편성과 유머, 재미 등을 추구했다. 언제나 영화, 문학, 기술 등 일상적 소재를 적극 수용하고 쉽고 단순한 이미지를 생산하지만, 동부의 남성성이 이끄는 거대하거나 치밀함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이번 서울 전시에서 작가는 그의 특징적인 작품들을 보여준다. 〈Double Bill〉에선 미술사 거장들의 회화와 현대 이미지를 결합시켜서 이미지를 모호하게도, 동시에 대가들의 특징을 부각할 수 있도록 작품을 구성했다. 〈Pictures & Scripts〉는 영화의 한 장면과 상관없는 텍스트의 결합을 시도했는데, 발데사리의 대표적 구성법이다. 이질적이고 상이한 방향과 해석을 지향하는 기호의 충돌은 결국 어떤 의미로도 수렴될 수 없는 딜레마를 제공한다. 〈Board play〉 연작은 한 작품을 구성하는 주된 색채를 도출하고, 그것과 관련되기도, 관련 없기도 한 다른 이미지들을 병치하는 일종의 스토리보드 형식을 가져왔다. 영화나 광고에서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작가는 통일을 위한 과정이지만, 파편화되고 분절된 실체를 갖는 이상한 조합을 보여주었다. 전시에서 다 볼 수는 없었지만, 여러 매체, 다양한 레퍼런스들, 복합적 차용의 역사가 느껴졌다. 이런 긴 작품 활동을 이어오면서 그가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기호들의 모호함, 언어, 시각적 이미지들과 그것의 수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허위의식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비판한다고는 할 수 없다. 불일치를 받아들이고 다양성을 통해 시각예술의 범주를 확장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 발데사리 미술의 특징으로 보인다. 단편화된 기호들과 파편화된 문장들을 표현함으로써, 현대 대중문화의 속성뿐 아니라, 단절과 몰이해, 소통의 부재와 표피적 관계의 일상성을 가리킴으로써 관객들에게 자연스럽게 침투한다. 도시의 일상, 시각기호로 가득 찬 공간의 모습이 소외되고 주변화된 인간들의 모습으로 이어지는 것도 공감을 불러온다.
이번 전시 작품에서 보듯, 그는 화면을 그리드처럼 나누고 부분과 관계의 독립된, 또는 모호한 관계를 강조한다. 병치와 화면분할이란 형식과, 하나로 융합되지 못하는 관계라는 주제는 서로를 보완하고 더욱 굳게 한다. 작품의 어법과 메시지의 불변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그의 작품을 알고 있는 관객들에게는 새로운 소통의 대상이 발견되기는 어려웠다. 그의 개인전이 시기적으로 훨씬 앞서 열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부분이기도 했다. 또한 점차 장식적으로 변해가는 화면도 거장이기보다는 노장으로서 발데사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기운 빠지는 대목이었다.●

SPECIAL ARTIST 김윤신

한원 (15)

아르헨티나의 자연을 담은 작가 김윤신은 80의 고령에도 청년작가보다 에너지가 넘친다. 전기톱으로 통나무를 잘라 조각하고, 햇살 머금은 빛깔로 캔버스를 가득 채운다. 오로지 조각의 재료에 매료되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터를 잡고 오랜기간 작업해온 작가 김윤신의 화업 60년을 되짚어 보는 대규모 개인전이 6월 11일부터 7월8일까지 한원미술관에서 이어진다. 1세대 여성 조각가의 작품에 담긴 영혼의 울림에 귀를 귀울여 보자.

맑은 영혼이 엮은 생명의 얼개, 김윤신의 회화와 조각

최태만 국민대 교수

6월 11일부터 7월 8일까지 한원미술관에서 〈영혼의 노래·김윤신 화업 60년전〉이 열린다. 1980년부터 상명여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김윤신은 1983년 겨울 아르헨티나를 여행하면서 그곳의 자연과 문화, 사람에 매료돼 아예 학교를 사직하고 그곳에 정착했다. 그가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후 진화랑(1988), 현대갤러리(1990), 동아갤러리(1995), 박여숙화랑(2003) 등의 초대를 받아 국내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으나 2007년 국민일보갤러리에서 회화를 중심으로 개인전을 가진 이후로 보면 이번 개인전은 근 8년 만에 한국에서 개최하는 전시다. 그것도 팔순을 맞아 조각과 회화를 엄선하여 보여주는 전시라는 점에 각별한 의미가 있다. 전시 개막을 앞두고 부에노스아이레스 플로레스 지역에 있는 김윤신미술관의 김란 관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김윤신과 함께 연구실을 방문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한국현대조각사를 연구하며 1970년대 그의 나무 조각 자료를 수집한 바 있던 나는 그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를 만났다. 팔순의 원로작가임에도 활달한 그를 직접 대하였을 때 평생 작업에만 전념해온 한 예술가의 강한 아우라를 느꼈기 때문에 다른 분들은 김윤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그중에서도 1988년 진화랑 개인전에 이일이 쓴 글이 인상적이었다. 이일은 1960년대 중반 파리에서 김윤신을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단발머리에다 블루진 바지차림의 그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언뜻 분간하기 힘들었고 행동거지가 또한 그러했다”고 썼다. 과연 그러했다. 내가 만난 김윤신은 작업에 전념하다 방금 작업실에서 출발한 양 수수하다고 표현해도 과장이 아닐 차림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말하면서 ‘어느 때부턴가 나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 생각 속의 잡념을 모두 지워버리고 마음과 머릿속을 깨끗이 비우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다. 조각가 최종태 역시 어느 날 나에게 ‘이 나이가 되니 머릿속의 전쟁이 사라지고 생각이 투명해졌다’라고 말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난 요즘이야 80의 나이가 무색하게 활발하게 활동하는 어르신을 일러 ‘노익장’이라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공자 때만 하더라도 나이 70에는 ‘마음먹은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하여 종심(從心)이라 했으니 80쯤 되면 온갖 집착과 잡념에 얽매이지 않는 경지에 이르는 모양이다. 어쨌든 나에게 김윤신은 투명한 정신을 지닌 원로예술가로 비쳤다. 그런 맑은 영혼은 그의 회화작품에서 깨끗하고 밝은 원색으로 표현된다. 그의 회화에서 특징적인 이 원색의 향연은 팜파스 대평원의 녹색과 푸른 하늘, 광활한 자연에서 성장하는 다양한 나무와 풀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가 하면 그의 화면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지그재그의 선은 산수를 단순한 형태로 표현한 고구려 고분벽화를, 그리고 적·청·황·흑·백색은 한국의 전통 오방색을 연상하도록 유도한다. 이 색채와 형태들로 직조된 화면은 말 그대로 낙원의 이미지이자 마음의 풍경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자연에서 추출한 모티프가 분명하게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면을 분할하는 면과 면을 연결하는 곡선의 율동은 이 작품들을 서정적인 색면추상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답고 우아한 회화는 그냥 순수한 추상화이거나 색채로 표현한 서정시가 아니라 작가의 신앙고백과도 같은 것임을 다음과 같은 작가노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나의 회화작품은, 창세기부터 하느님의 말씀으로 모든 만물의 생명이 잉태된 순간부터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까지, 영원한 삶의 나눔을(合과 分)주제로 하였다. 나눔의 본질은 사랑이며 그 깊은 내면에는 원초적 생명력이 뿌리 깊게 박혀있다. 그것을 향한 내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영혼의 노래, 그 영혼의 소리는 다양한 색상의 파장으로 선과 면을 이루어 사랑과 나눔을 표현하였다.”

어쨌든 나로서는 김윤신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특정한 형태를 입체로 표현하면 그의 조각이 될 것으로 믿는다. 단일한 것이 아니라 수평과 수직의 형태가 결합된 형태 속에 재료 자체가 지닌 결과 다른 결을 더 붙인 조각의 경우 회화와의 관련성이 더 높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조각이 앞선 시기에 제작된 경우가 많으므로 조각의 입체적 구조가 회화에서 평면적인 구성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추측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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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알가로보 50×47×45cm 2014

아르헨티나에 정착하다
1959년 홍익대학교 조각과를 졸업하기 전해에 열린 제7회 국전에서 〈아침>으로 특선을 하며 조각가로서의 전도가 양양했던 그는 홍익대 미대 재학 중 구상인체조각을 추구하던 김경승으로부터 로댕의 조형을 터득했다는 평가를 받는가 하면 미국에서 철 용접기법을 배우고 돌아와 용접 실기실을 개설한 김정숙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용접기법을 이용한 철조작업을 발표한 것은 학교를 졸업한 이후부터였으며 사진자료만 보더라도 한때 이 새로운 기법에 깊이 매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철조작업보다 앞선 초기 작업이 민간신앙으로부터 영감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 반면 철조에서는 재료기법의 특성 때문인지 형태를 구축하려 했음이 두드러진다.
1964년 파리로 유학을 가서 파리국립미술학교를 다닐 때는 한국의 박을 이용한 부조와 판화에 전념했다. 귀국 후 1970년대부터 그의 작업은 목조에 집중된다. 특히 긴 통나무를 사용해 마치 돌탑처럼 표현한 조각에서는 토템을 현대조각의 논리로 소환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그가 민속적인 것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음을 십자가의 형태에 부적에서 볼 수 있는 조형적인 형태를 해체, 재구성하여 새긴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관심은 그가 파리 유학시절 제작한 판화에서도 나타난다. 자신의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구축할 즈음인 1973년 그는 권영우, 김구림, 김종학, 김창열, 송번수, 이우환, 정건모 등과 함께 제12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가했다. 당시로서는 작품만 출품했지만 이것이 남미에 대한 그의 관심을 자극했는지 모른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는 아예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1974년에는 서울대 미대 출신인 이양자, 안성복 등과 의기투합하여 한국여류조각가회 창립에 앞장섰다. 여성조각가들의 활동무대가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미술계에서 ‘한국미술의 발전을 도모하고 여류조각가의 권익을 옹호하며, 여류조각가의 국내외 활동과 상호간 활발한 협조를 증진’시키려는 목적으로 1974년 1월 12일에 창립한 이 단체는 그해 9월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33명의 창립회원이 출품한 작품들로 창립전을 개최했다. 당시 청주사범대학에 재직 중이던 김윤신은 초대 총무로 활동하며 한국 전통목조건축의 가구(架構)인 공포(栱包)를 연상시키는 작품을 출품했다. 같은 해에는 대학의 한 해 후배인 정관모가 회장으로 활동한 한국청년작가회도 창립했다. 이러한 단체에 왕성하게 활동하던 김윤신은 1983년 12월 학기말을 이용해 조카가 살고 있던 아르헨티나로 떠나 한 달간 여러 지역을 여행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기왕 아르헨티나를 방문하였으니 관광만 하지 않고 대표적인 미술관에서 전시를 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타진해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지에 도착하면서 그는 광활한 대지와 때 묻지 않은 자연 경관, 특히 유럽이나 미국에서 보지 못한 재료인 단단한 재질의 나무가 지천에 널려있음을 발견하고 아르헨티나에 흠뻑 매료되었다. 그래서 다짜고짜 주아르헨티나 한국대사관을 찾아간 그는 이복형 대사에게 아르헨티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대사와 공보관의 주선으로 로베르토 델 비자노(Roberto del Villano)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립미술관장을 만난 것은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김윤신으로부터 전시를 하고 싶다는 말을 들은 비나노 관장은 먼저 작품부터 보자고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의 빈민촌에 임시로 마련한 작업실을 방문한 비자노 관장이 부에노스아이레스식물원의 야외공간을 전시장소로 주선하여 시립미술관 초대로 1985년에 열린 전시가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자 그는 귀국을 포기하고 아예 아르헨티나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그 후 그는 국립미술관(Palais de Glace)을 포함하여 아르헨티나의 여러 도시의 주요 미술관은 물론 멕시코의 국립예술의궁전 등에서 작품을 발표하며 한국에서 온 중남미의 여성조각가이자 화가로서 자기 위상을 구축했다.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후 김윤신은 한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알가로보, 팔로산토, 케브라쵸와 같은 나무를 재료로 한 조각을 제작했다. 팔로산토는 전기톱을 사용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단단한 재질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무겁고 단단한 나무를 자르고 켜는 과정이 마치 성직자의 수행과도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김윤신의 조각은 대체로 수직적인 것이 많다. 그것은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수직적으로 성장하는 나무의 생명력에 대한 그의 예찬이 추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피안〉연작의 경우 축은 수직이지만 그것을 횡으로 감싸고 있는 고리와도 같은 형태가 많은 큐브로 구성돼 단순함 속의 복잡함, 질서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 규칙적이지만 그것을 단순 반복하지 않음으로써 작품에 운동과 리듬을 부여한다. 겉으로 드러난 형태(shape)가 작품의 옷이라면 그곳에 새겨진 요철과 빗금은 조각의 피부이자 혈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내부로 우리의 시선이 틈입할 수 있는 공간의 여유를 허락함으로써 그의 작품은 정중동(靜中動)을 획득한다.

20130729

20131018

부에노스아이레스 작업실에서 작업 중인 김윤신

성장하는 생명에의 예찬
1987년부터 브라질에서 구한 오닉스와 같은 준보석의 돌을 사용한 작품도 발표하고 있다. 톱으로 자른 표면의 무늬는 이 돌에 축적된 시간의 궤적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나무와 다른 정서, 즉 무한에의 동경, 대지의 알인 바위가 품고 있는 시간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나아가 그의 조각은 수직적이면서도 수평의 구조가 교차하고 있기 때문에 건축적으로 비치기도 한다. 수직으로 직립한 두 개의 나무를 세워놓은 작품은 당간지주를 연상시키고, 나무의 표면에 새긴 사선의 흔적은 대지의 주름을 연상시킨다. 회화에서 보여준 낙원에의 동경이 조각에서는 그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나무들로 향한 생명예찬으로 나타난 것이다. 단순하면서도 변화가 있는 형태와 재료의 질감을 존중하면서 작가의 의지가 깃들어있는 표면의 작업의 흔적은 그의 생각이 자연 너머의 절대자를 향하고 있음을 추측게 만든다. 그것은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초월을 향한 수행의 기록인지 모른다. 아마 그에게 노동에의 헌신은 기도의 또 다른 방법일 것이다. 잡념을 비우고 작업한다는 그의 말, 그것이 최근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는 전기톱으로 나무의 표면에 상처를 내면서도 그것을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와 일체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합이합일(合二合一)’은 그래서 왠지 불교의 불이(不二)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아가 장자의 만물여아위일(萬物與我爲一)의 경지를 추구한다고 할까. 그 궁극에 조물주를 향한 신앙고백이 있을 것이지만 나에게 그의 작품은 맑은 영혼이 엮은 생명의 얼개로 보인다.
불이(不二)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더 나아가면 장자의 만물여아위일(萬物與我爲一)의 경지를 추구한다고 할까. 그 궁극에 조물주로 향한 신앙고백이 있을 것이지만 나에게 그의 작품은 맑은 영혼이 엮은 생명의 얼개로 보인다. ●

김 윤 신 Kim Yunshin
1935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1970년부터 14년간 홍익대 상명대 성신여대 등에 출강했다. 1984년 아르헨티나로 이민, 정착해서 활동하고 있고 2008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김윤신미술관을 개관했다. 아르헨티나와 서울 등지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열었고 단체전에 참여했다.

ARTIST REVIEW 김대수

DF2B2041

위 < Break oneself > 182×102cm(각) 1988, < The spirit age・nsa1994607 > 180×88cm(각) 1994

사진은 재현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현실을 보는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며 현대미술의 중요한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김대수는 1980년대에 회화, 판화, 설치 등 타 매체를 적극 활용해 사진의 경계를 해체하는 작업을 선보여 한국 사진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끌었다. 6월 6일부터 8월 19일까지 고은컨템포러리사진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The New Wave in Korean Photography 1988-1998 DAE SOO KIM>을 통해 다양한 사진적 실험을 통해 내면 세계를 표현한 김대수의 초기 작업을 다시 만날 수 있다.

그 때를 아시나요?

최건수 사진비평

나보다 년식이 십년쯤 앞선 사람들은 영화 ‘국제 시장’을 보았다. 그리고 보신 분들은 눈물샘을 자극하는 영화의 이미지에 몸을 맡겼다. 오래 묵은 기억 속에 가라앉아 있는 전쟁과 가난이라는 유산은 그리 쉽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영화는 관객의 눈물로 스스로 증명했다.나 같은 7080 초노는 영화 ‘세시봉’을 선택했다. 학교 수업을 빼먹고 명동 맥주집이나 하드 락카페를 전전했던 세대들이 선택한 영화들이다. 주말이면 통기타 하나 달랑 매고 교외선 기차에 의탁하여 일영이나 송추로 향했다. 거기서 봉두난발 장발을 휘날리며 미친 듯 고고와 트위스트를 췄다. 그 시절의 낭만이고 모던의 몸짓이었다.내가 낭만과 모던에 투신했을 때, 김대수는 미국으로 유학(1981)을 했고, 내가 1980년 내내 군사정권에 맞선 데모대 뒤꽁무니를 따라 다니며 반독재 구호를 외칠 때, 홀연히 귀국(1987)하여 대학 훈장(1988)이 됐다. 그리고 어느 날 한국 사진의 ‘새로운 물결’의 한 아이콘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게 1988년 워커힐 미술관에서 열린 <사진 새 시좌전>이다. 이 전시는 사진가 구본창이 기획했는데, 결과적으로 기존의 한국 사진을 근본부터 뒤흔들 정도로 파괴력이 컸다. 당시 이 전시장을 찾은 내 입장도 그랬다. ‘이것도 사진인가?’라는 의문으로 시작해서, 대체 유학을 가면 이런 사진을 배우는 것인가라는 생각에, 이제까지 보고 해온 사진을 전면적으로 점검해 볼 이유가 생긴 것이다. 여하튼 이 전시회에 참여했던 사진가들(구본창, 김대수, 이규철, 이주용, 임영균, 최광호, 하봉호, 한옥란)은 이후 승승장구하고 한국사진의 전위대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은 곱씹어 볼 일이다.(이규철은 작고)그 이후, <11월 한국사진의 수평전(1991/1992/1994)> 은 이 전시의 확대 재생산 성격이 더 강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1988년부터 1994년까지의 한국 사진에 밀려 온 새 물결은 무엇일까? 그게 ‘바람 찬 흥남부두’가 2015년에 ‘국제 시장’으로 환유되듯이 전통적 의미의 사진이라는 도그마에 환몰 되었던 족쇄가 비로소 풀리고 그것들을 일시에 뽕짝 수준으로 밀어낸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김대수의 초기작 같은 이미지에 충격을 받고 열광하는 사진가가 있다면 그 또한 아마 그 의식의 밑바닥에는 여전히 ‘국제 시장’ 언저리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한 증거이다. 오늘날은 지지고 볶는 것이 얼마나 현란한지. 또한 얼마나 빠르게 바뀌는지. 그 수준에서 다시 김대수의 초기 사진을 대하니, 어쩌랴 그만 영화 ‘세시봉’이 생각나고, 그의 사진을 ‘세시봉’과 등가의 위치로 자리매김하고 싶은 것이다.‘그 때를 모르시는 분’들은 의아해 할 것이다. 대체 무엇이 어쨌다는 것이야? 인화지 위에 오일 페인팅을 하고 그것을 다시 긁어내는 것이 뭐 그리 신기하다고? 동판 위에 사진을 인화하고 부식하여 보여주면 사진이 아니라고? 미술 판에서 성공 못하고 대접 받지 못하니까 사진판에 기웃 거린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재현과 복제라는 미덕에 기댄 ‘바람찬 흥남부두’ 세대가 틀림없다.조금만 관심 기우려 세계 사진의 흐름을 살펴보면 변화는 당연한 것이다. 이런 사진의 경향은 소위 만드는(make) 사진이라고 알려져 있다. 기록과 재현 사진 반대 축에 진영에 속한다. 사진 초기부터 끊임없이 타진되었고 1980년대에 들어서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적으로 확산 되었다. 이 시기는 김대수를 비롯한 유학 1세대들의 유학 시기와 겹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변화 현장에서 그 흐름에 합류했던 것이다. ‘사진은 사진이다.’ 라는 구시대를 지나 ‘사진이 예술이 되고 이미지’가 되는 새 시대에 호응했다. 물론 만드는 사진도 표현 방법에 따라 구성 사진(Fabricated photography), 연출사진(staged photography), 손질된(Manipulated photography), 창조사진(Invention photography), 계획사진(set-up photography) 등, 다양한 이름을 얻게 된다. 변화는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순수한 모던사진은 지루해졌고, ‘라이프’ 혹은 ‘룩’같은 화보잡지의 폐간과 맞물려 다큐멘터리 사진은 용도 폐기 될 위험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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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생 이후・nba1990103 >(오른쪽) Archival pigment print 120×150cm 1990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기 위한 사진적 실험
이런 환경 변화에서 스스로 물어 볼 수밖에 없었던 질문이 ‘사진이 사진이어야 하는가?’일 것이고, 혼돈 속에서 사진가들은 스스로의 작품을 통해서 답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사진은 기계적 재현의 한계를 극복하고 예술적 표현의 도구로서 점검 받게 되었다. 사진의 역사 내내 꿈꾸어 왔던 세계가 실현 가능해 진 것이다. 기록의 용도로부터 벗어나 적극적인 표현 도구로 그 지평이 확장 된 것이다.김대수의 초기 사진은 이 지점에서 만날 수 있다. 1988년 귀국 후 첫 개인전이었던 <창조 그리고…>는 지금은 없어진 갤러리 한에서 열렸는데, 그 때 나는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던 것을 기억한다. “표현 방법이 새롭다. 그러나 더 궁금한 것은 이것이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떻게 읽혀지기를 원하는가?” 그는 말했다. “자유롭게…, 아이들은 모두 부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부모 생각대로 크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외적 요인 속에서 스스로 한 독립 된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작품은 작가가 만들었으나, 작품의 행로는 작품이 스스로 결정한다는 뜻으로 들었다. 이미지가 품은 다층적 발화의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이다. 귀국 후 초기 십년간은 세계 사진의 흐름 속에 있었다. <빛으로 탐구>(1983) 와 <창조 그리고…>(1985), <태초에>(1990), <탄생 이후>(1990), <영의 시대>(1994)> 그리고 <지혜의 땅>(1996)이 그것이다.이것들의 주제는 ‘생명’ 혹은 ‘죽음’ ‘영(靈)’ 같은 인간의 기본적 문제와 그가 몸담은 기독교적 관심에 천착하고 있었던 까닭에 묵직했다. 그는 이런 이미지를 만드는데, 찍는다는 사진적 행위 만에 의존하지 않았다. 물감을 바르고, 수없이 많은 선을 그어보고, 바른 물감을 걷어내는 예술 행위들의 흔적들을 작품 속에 고스란히 남길 수 있었다. 순간을 잡아내는 사진가의 모습이 아니고, 스스로 해야 할 예술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위해 몸의 예술을 사진에 녹여내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기존의 사진이 미치지 못하는 지점을 언급한다는 측면에서 신선했다.<사진 새 시좌전> 이후 25년이 지났다. 오늘 날의 한국 사진은 거침이 없다. 좌고우면하면서 눈치 보지 않는다.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 씨앗들은 뿌려 준 것이 세시봉 시대의 모던 사진가들의 형식실험이 밑거름이 아닌가 싶다.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그 시절의 대표아이콘인 김대수의 작품을 다시 보게 되어서 반갑고 즐거운 것이다. ●

김 대 수 Kim Daesoo
1955년 태어났다. 홍익대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미국 파슨스 디자인학교 사진학과에서 학사, 프랫 인스티튜트대학원 사진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1983년 뉴욕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1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현재 홍익대 미술대학원에서 사진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ARTIST REVIEW 방정아

2015__낯선고요

오른쪽 페이지 <낯선 고요> 캔버스에 아크릴 91×116.8cm 2015

2015_the Hal

< The Hall > 캔버스에 아크릴 181.8×259cm 2015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절묘하게 표현하는 작가 방정아가 부산 공간화랑에서 개인전 <기울어진 세계>(4.22~5.5)를 열었다. 작가는 하나의 스타일에 안주하지 않는다.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태도에 주목하고 삶의 리얼리즘을 여실히 드러낸다.

납작한 세계에 납작하게 매달리기

조선령 부산대 교수

방정아의 작업을 이야기할 때면 하나 하나의 작품을 개별적으로 보기보다 작가가 통과해온 시대의 두께들이 작품들과 공명하는 지점을 다소 거창하게 고찰하는 작업을 먼저 해야 할 것처럼 생각된다. 지금까지 작가의 작품을 지켜봐온 사람이 느끼는 개인적인 의무감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역사적 임무가 항상 비평적 임무에서 시작된다는 벤야민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하나의 작품 속에서 ‘시대의 불씨’와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 비평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작품을 시대의 반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이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시대의 공기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그것을 가시화하는 지점을 포착하는 작업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방정아의 1993년작 <바다 끝에 선 여인들>과 2015년작 <The Hall>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시대의 ‘공기’와 관련된 지점에서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80년대’라는 명칭이 아직 낯설지 않을 무렵 그려진 <바다 끝에 선 여인들>은 첫눈에도 시퍼런 결기로 뭉쳐있다. 날카로운 선과 강한 붓자국, 신경질적이지만 적극적이고 다채로운 색채, 무게있는 볼륨감, 그리고 화면을 꽉 채운 채 당당하게 서 있는 인물들의 배치가 보인다. 마치 뒤러의 <네 사람의 사도>를 연상시키는 이 구도는 거친 삶을 살아온 익명의 여인들의 육체에 기념비적 엄숙성을 부여한다. 화면 중앙에 비어 있는 공간을 둠으로써 인물들을 좌우로 나누는 조형적 배려를 하고 있음에도 결국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인물들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인물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구심적인 에너지는 캔버스 틀 바깥으로 공간을 확장시킨다.
반면 이번 공간화랑 전시에 출품된 <The Hall>은 비어있는 공간이 없는데도 빈 공간이 무수히 발견된다. 아니 공간 그 자체가 스스로를 비워내는 것으로, 아니면 더 이상 공간이 아닌 어떤 것으로, 혹은 공간의 입체성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것으로 변화하는 순간을 포착하는 듯하다. 볼륨감은 극소화되고 세계는 납작해졌다. 선은 더 이상 강렬하지 않고 뭉그러지고 으깨진 채 어디론지 방향 모를 곳으로 흘러내린다. 인물들은 마치 인체 데셍의 기초를 무시하듯 삐뚤게 묘사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파스텔톤이라고 하는 중성적이고 온화한 색채를 사용했지만 아크릴 물감의 무딘 금속성 느낌이 극대화된 화면은 형상을 만들어내는 기능을 포기한 채 제멋대로 발라진 물감들로 인해 무기력한 둔중함으로 응고된다. 이 같은 변화는 같은 전시에 출품된 다른 작품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낯선 고요>에서 몇 개의 거친 붓질로 단순하게 나누어진 무의미한 면들은 역시 공간이 삭제된 납작한 세계를 보여준다. 박제된 사슴의 텅 빈 눈과 같은 쓸모없는 잡동사니들이 이 세계가 카드로 세워진 위장물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있다.
두 작품 사이의 차이는 회화라는 매체의 표현 가능성에 대한 작가의 실험이자 어쩌면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했을 어떤 이행의 과정이며, 시대의 공기를 포착하는 변화된 감수성의 차이일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오늘날 세계는 납작해졌다. 아감벤의 말처럼 더 이상 어떠한 가능성도 없는 이 극단적인 현실성의 사회는 단순하고 평면적이고 노골적이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꽉 차 있어서 동시에 아무런 의미도 소유하지 못한다. “대체가능성”이 모든 잠재성의 공간을 차지했다. 앞뒤와 두께를 가진 풍경 대신 들어선 깊이 없고 비밀 없는 장면들, 생명을 상실한 듯한 비유기적인 인물들은 그대로 오늘날의 세계를 보여주는 징후들이다. 이 세계는 한편으로 사적인 것을 말소시켰지만 동시에 공동체 역시 삭제시켰다. <바다 끝에 선 여인들>에서 빈 공간은 인물들을 결합시키는 역할을 했지만, <The Hall>에서 그러한 결합은 없다. 인물은 원근법 법칙에 들어맞지 않게 제멋대로 배치되어 있으며, 일관된 크기도 없고, 적절한 장소도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한 개의 공간이 아니라 여러 개의 오려붙인 공간, 아니 차라리 공간의 부재라고 해야 할 어떤 것이 발견된다.

〈아일러브커피〉(맨 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 97×130.3cm 2014

〈아일러브커피〉(맨 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 97×130.3cm 2014

중심이 비워지는 풍경
두 작품 사이에 있었던 작가의 전시들 중에서, 필자는 2008년 대안공간 풀에서 개최된 개인전 <세계>를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 꼽고 싶다. 이 전시가 <바다 끝에 선 여인들>과 <The Hall>의 차이를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방정아는 정확한 원근법적 공간 혹은 널찍한 하나의 장소를 등장시켰는데, 이러한 공간의 제시는 단지 그 공간이 와해되는 지점을 포착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작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중심이 비워지는 풍경 혹은 공간이 스스로를 말소하는 지점의 다른 이름임을 이 전시에서 보여주었다. 작가는 언뜻 보기엔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 듯한, 그러나 한쪽 구석에서 발생한 보이지 않는 파국이 은밀하게 중심을 삼키고 있는 소름 끼치는 풍경들을 보여주었다. <재개발구역>에서 그것은 하수구에서 흘러나온 검은 액체로, <자연사>에서는 한쪽 구석에 널브러진 동물의 사체로, <안 보이는 사람>에서는 불길한 녹색 연기로, <세계3>에서는 땅을 잠식하는 보라색과 회색의 덩어리들로 표현되었다. 모래사장, 풀밭, 도로, 하수구, 연기 등의 형태를 띤, 그러나 사실은 더 이상 공간이나 형상이 아닌, 흘러내리면서 화면을 지우는 이 덩어리들은 방향과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입체적 공간을 지워버리면서 세계를 납작하게 만드는 어떤 산사태 같은 것으로 묘사된다.
우리는 그렇게 공간이 지워진 세계를 <기울어진 세계전>에서 만난다. <기울어진 세계전>의 작품들은 더 이상 그린다는 행위의 결과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작품들은 마치 캔버스 표면 위에 기름처럼 얹혀서 화면을 기울이면 한쪽으로 흘러내릴 듯한 미끌미끌한 껍데기 같다. 두께 없고 방향 없고 중심 없는 이 그림들은 시대의 납작함과 기묘한 방식으로 공명한다. 아니, 기묘한 방식으로 저항한다. 납작한 세계 속에서, 아니 세계에 ‘매달려’(납작한 세계 속에는 공간이 없기 때문에 그 속에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살기 위해서는 ‘납작 엎드리기’가 필요하다. <네…>와 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조롱하는 것 같기도 하고 체념하기도 하는 것 같기도 한 태도는 형식에서도 반향된다. 묘사가 필요없다는 듯이, 공간과 볼륨과 색채가 다 귀찮다는 듯이 납작 엎드려 있는 그림. 이러한 그림은 아감벤 말마따나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의 사례, 그리고 이러한 ‘비선택’이 가능하게 하는 역설적인 저항의 사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

방 정 아 Bang Jeongah
1968년 태어났다. 홍익대 회화과와 동서대 디자인&IT 전문대학원 영상디자인과를 졸업했다. 1993년 갤러리 누보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19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2002년 부산청년작가상과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상을 수상했다. 현재 부산에서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ARTIST REVIEW 백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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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 기우제 > 점토 바세린 3.5×12m 2015

화면에 구축된 대상을 표현하는 재료는 바로 그 대상에서 추출했다. 열에서 전기, 다시 열로 변환하는 에너지의 순환을 통해 생명이 탄생한다. 수분을 상실하여 쩍쩍 갈라진 흙 사이는 바세린겔로 메워 더 이상의 건조를 막는다. 이렇듯 백정기가 구축한 작품은 비가시적인 운동의 기운을 구체적 장치와 행위로 보여준다. 모두 그의 개인전 <Mind Walk>(두산갤러리, 6.3~7.4)이 이야기하는바, 백정기가 작품에 녹여낸 ‘수행’의 과정을 살펴보자.

의사(擬似, 意思)적인 공감의 미술

민병직 대안공간루프 바이스디렉터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상대의 조건이 되고 그렇게 인연이 되어 서로에게 복잡, 미묘하게 영향을 끼치면서(연기론(緣起論)) 중층적으로 이어진다(중중무진(重重無盡))는, 불가(佛家)의 가르침처럼 이번 백정기 개인전도 우연하게도 가뭄이라는 지금의 심각한 자연재해를 떠올리게 해서 기묘한 느낌이 앞섰다. 가뭄으로 타들어가는 대지처럼 보이는 <기우제> 때문인 듯싶은데, 물론 작가가 이 작품을 지금의 현실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런 마음을 담은 기우제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 것이다.
전시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바깥 현실과의 이러한 연결들은 사실 외적인 것이고, 개인적인 느낌에 불과한 근거 없는 것들이겠지만 세상사란 어쩌면 이렇게 근거 없는 것일지라도 마음의 동(動)함에 따라 현실에 특정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가뭄으로 세상이 타들어가니 자연 앞에 무력한 한낱 인간으로서 그 비과학적인 효능효과와 상관없이 기우제라도 지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고, 다시 말해 근거 없는 믿음이라도 가지고 싶은 심정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한 간절한 마음이 쌓여야 세상의 어떤 변화들이 생기는 법일 테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작업을 굳이 동양적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그 바탕에 서양의 이성 혹은 과학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혹은 그 한계에 대한 인식이 작동한다고 할 수는 있겠다. 물질과 정신,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구획, 분리하는 사유의 흐름들 말이다.
작가는 이러한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의 설정들을 문제시하고, 그 분리 이전의 통합된 원형 상태를 지향한다. 곧 세상 만물이 서로 교류, 융합되어 있어 끊임없이 상호간에 영향을 끼치면서 돌고 도는, 혹은 주름 짓고 펼쳐지는 그런 사유체계에 대한 선호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작가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서구의 과학적인 방법론과 테크놀로지를 차용한다. 서구의 과학적 사유의 한계를 드러내고 비판하기 위해 다시 과학적인 방법론을 ‘전용(appropriation)’하는 셈인데, 그런 면에서 일종의 의사(擬似, pseudo)과학, 혹은 주술이나 연금술에 가깝고, 과학적 원리의 엄밀한 작동보다는 특정한 의미의 연결이나 발현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은 예술적 실험이나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작가의 의중이 드러나는 작업이 <기우제>다. 전시장 한 벽면을 흙으로 바르고 흙과 함께 벽면에 접착시킨 물이 증발하면서 생겨난 균열된 틈을 바세린으로 메운 이 작업은 작가가 지향하는 바를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비가 오기를 소망하는 행위에 불과한 기우제는 인간의 어떤 행위나 물건들이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다는 (잘못된) 생각과 믿음으로, 그러한 힘을 이용해서 목적을 달성하려는 일종의 주술 행위이다. 비/반과학적 행위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대지의 갈라진 틈을 메울 수 있도록 상징적 염원과 소망으로써, 대자연을 치유하고 순환케 하는 각별한 의미를 담아내는 행위인 것이다.
작가 역시 이러한 의미에 더해 자신의 작업 일반을 함축하는 (예술적) 대상의 갈라진 틈을 메우려 한다. 이때의 갈라진 틈은 실재 작업에서 갈라진 물리적 틈일 수도 있겠지만 대지와 자연의 갈라진 틈, 나아가서 물질과 정신,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적인 간극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이러한 간극과 틈을 메우려는 행위는 그렇기에 분리되고 구획된 것들을 연결 접속하고 봉합함으로써 대자연의 원리가 서로 순환하여 흐르도록 하는 근원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자연 속 물의 역할처럼 말이다. 이런 이유로 작가의 작업에서 특히나 물을 소재로 한 작업이 많은데, 2008년 <Pray for Rain: Mhamid>는 사막화가 진행되는 모로코에서 작가 스스로 샤먼이 되어 한국의 전통 기우제의 요소를 접목한 퍼포먼스 작업이고, 2010년 <Sweet Rain>은 전시공간에 사카린을 섞어 단맛이 나도록 한, 이른바 단비가 내리게 한 관객 참여형 설치미술 작업이다. 이때의 작업들도 실재의 ‘비’라는 물리적인 현상보다는 대지를 순환케 하는 상징적 촉매재로, 물의 특정한 의미를 발현시키는 데 더 관심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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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화기: 촛불과 흙> 달걀, 초, 식물, 열전소자, 백열램프, 유리, 나무, 스틸, 혼합재료 가변설치 2014

의미의 확장과 공감의 전파
작가는 이처럼 어떤 현상의 물리적인 작동 자체보다는 그 물리적 작동과 연동되어 발생하는 의미의 발생과 구현에 더 비중을 둔다. 의미의 구동장치로 테크놀로지를 ‘활용’하고 ‘전용’한 셈이다. 이러한 의미의 발현은 다시 더 많은 의미로 연결, 확장되기도 하는데, 이번 전시에서 물 대신 바세린을 사용한 점은 물(바소르, wassor)과 기름(오레온, oleon)이라는 서로 다른 것들을 융합시키는 바세린의 어원상 의미도 있겠지만 화상으로 인해 신체적 고통을 치유해야 했던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도 연결되는 식이다. 앞서 말한 의미들에 치유라는 의미가 더해지는 것이다. 2007년 <Vaseline Armour> 연작부터 사용한 바세린은 작가가 생각하는 치유의 의미를 잘 드러낸다. 바세린으로 장갑, 투구, 갑옷을 만들어 전신을 보호하는가 하면 건물의 갈라진 틈을 보수하려 했던 이 작업은 작가의 치유 개념이 개인적인 치유인 동시에 사회적인 치유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피부 보습제에 불과한 바세린을 상처를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으로 사용한 것은 ‘플라시보 효과’ 같은 비과학적인, 하지만 어떤 믿음 때문일 것이다. 주술일 수도 있겠다. 작가 역시 자신의 작업이 가진 이러한 주술적인 면모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번 전시의 <접촉주술: 새싹, 개나리, 진달래, 영산홍> 연작과 <접촉주술: 16개의 보> 작업은 작품명 자체를 접촉(감염)주술(contagious magic)로 설정했으니 말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 연결 융합되어 있으니, 떨어진 후에라도 어떤 기운에 의해 서로 영향을 미치고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유감주술(homeopathic magic)’로 명명된 작업도 있는데, <유감주술: 매화>는 작가의 아버지와 함께 협업한 신작으로 예부터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매화를 전기가 통하는 전도성 먹으로 그리고 라디오 전파를 송출하게 안테나 구실을 하게 함으로써, 매화의 신묘한 기운을 도처에서 받을 수 있도록 한 작품이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그러한 기운과 에너지를 받느냐 못받느냐 아니라 그 기운을 확산시키려는 마음, 곧 공감(empathy)의 차원일 것이다. 믿음이나 소망 말이다.
유사한 것은 유사한 것을 발생시킨다는 유감(모방)주술은 사실 잘못된 미신이거나 그 자체로 과학적 타당성, 유효성도 없는 것이겠지만 그 기저에 깔려 있는 간절한 마음이나 선용(善用)의 차원이 더 중요하지 않나 싶다. 기우제 역시 마찬가지다. 비나 물을 바라는 마음을 습한 속성을 유지하게 하는 바세린으로 대체하여 의미를 확장시키고 안테나처럼 널리 전파되는 매화그림으로 매화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널리 공감시키려는 그러한 마음, 혹은 시도 자체가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다시 시도된 <무제: 부화기와 촛불>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촛불의 열로 전기 에너지를 만들어 계란을 병아리로 부화시키는 가시적인 기계적 작동과 장치에 앞서, 간절한 염원을 상징하는 촛불로 밤의 불길한 기운을 몰아내고 새벽을 알리는 닭을 탄생케 하려는 그 (엉뚱하기만한) 의도가 의미를 갖는 것이다. 작가가 활용하는 과학이나 테크놀로지는 이처럼 마음을 경험하고, 가시화함으로써 이를 관객과 공감하려는 그저, 한낱 장치일 뿐이다. 그렇게 작가는 대립된 세상의 간극과 틈을 연결, 교류, 융합시키려는 엉뚱하지만 의미 있는 실험과 경험들을 통해 과학, 주술, 연금술과 비슷하지만 결국은 그 무엇도 아닌, 자신만의 의사(擬似, 意思)적인 공감의 미술을 펼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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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類感)주술: 매화> 한지, 전도성 잉크, 송신기, 라디오, 혼합재료 가변크기 2015 전파를 수신할 수 있는 잉크로 그린 그림을 안테나로 삼아 송신기에 연결하고 전시장 내부의 라디오에서 전파를 수신한다

백 정 기 Beak Jungki
1981년 태어났다. 국민대 입체미술과를 졸업했다. 영국 첼시 미술학교에서 순수미술을 수료하고, 영국 글래스고 미술학교 순수미술과(석사)를 졸업했다. 국내 및 슬로바키아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 국내외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출품했다. 현재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

 

WORLD REPORT| NEW YORK

새 휘트니 미술관은 최근 뉴욕의 명소로 급부상한 하이라인 파크가 끝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하이라인 파크의 일조권을 침해하지 않고 미술관 입장객들에게 뉴욕시 전망을 즐길 수 있도록 미술관 뒤쪽은 계단식으로 디자인되었다. (photograph by Nic Lehoux 2015)

America Is Hard to See

1930년 거트루드 반더빌트 휘트니(Gertrude Vanderbilt Whitney)가 설립한 휘트니뮤지엄이 50여 년 만에 이사를 감행했다. 새 보금자리는 로어 맨해튼 웨스트빌리지 미트패킹 디스트릭트의 갠스부어트가(街). 뉴욕시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천문학적인 건축비를 들여 렌조 피아노가 설계하고 완공한 휘트니뮤지엄은 개관전 <America Is Hard to See>(5.1~9.27)을 시작으로 관람객을 새집에 맞이했다. 허드슨강을 바라보며 우뚝 선 뉴욕 미술의 자존심 휘트니뮤지엄의 집들이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허드슨 강변에 세워진 미국 현대미술의 메카

서상숙 미술사

2008년 프리츠커 상 수상자이며 미술관 건축의 노장, 렌조 피아노(77)가 설계한 새 건물의 디자인을 발표하고 2011년 5월 기공식을 함으로써 큰 기대를 모은 미국 현대미술의 메카, 휘트니 미술관이 완공되어 지난 5월 1일 개관했다. 새 주소는 99 Gansevoort St. New York City, NY 10014. 맨해튼 서남단 허드슨 강변에 위치한 전망 좋은, 422억 달러짜리 9층 빌딩이다.
개관전은 <America Is Hard to See>(5.1~9.27)로 휘트니의 컬렉션에서 고른 작가 400여 명의 작품 600여 점이 전시된다. 그중 25%가 처음 수장고를 벗어난 작품들이다. 1900년 이후 현재까지 유일하게 미국에서 작업하는 작가들의 작품만을 수집해온 휘트니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미국현대미술사를 재조명하는 중요한 전시라고 할 수 있다.
하이라인 파크가 끝나는 곳인 미트패킹 디스트릭의 갠스부어트가(街)에 위치한 새 휘트니는 폐쇄된 고가철도를 공원으로 만들어 2009년에 개방한 후 (현재도 구간을 늘려가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600만 명이 방문한 것으로 집계되는 등 뉴욕의 명소로 각광받는 하이라인 파크와 더불어 새로운 문화명소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또 지리적으로 뉴욕의 가장 큰 화랑가인 첼시와 맞닿아 있고 뉴뮤지엄과 그 주변에 형성된 새로운 화랑가 로어 이스트 사이드(LES)와 더불어 뉴욕 현대미술의 중심지를 다운타운으로 옮기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개관 며칠 전 휘트니가 기자들을 초대해 49년 만에 옮기는 집들이(프레스 프리뷰)를 하던 날은 새집으로 이사하는 여느 가족과 다를 바 없이 흥분과 기쁨이 넘쳤다. 하루종일 미술관 직원들과 렌조 피아노 건축사무실과 시공사 직원들이 그룹으로 나뉘어 미술관 구석구석을 소개했는데 “이 보존연구실은 미술관이 처음으로 갖게 된 것” “극장을 처음으로 갖게 되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이제 테라스가 생겼으니 야외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등등 ‘처음’이라는 단어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앙증맞은 모양에 맛도 일품인 미니 피자와 컵케이크도 무한정으로 제공되었다. 집들이에 음식이 빠질 수 없는 건 세계 정상의 미술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49년 전 2000여 점이던 소장품이 현재 2만2000여 점으로 늘었고 21세기에 들어 현대미술 장르가 급격히 확장되면서 1966년 지어진 업타운 메디슨 애비뉴 건물의 한계성을 절감한 휘트니가 이전을 결정하고 8년에 걸쳐 지은 이 건물은 휘트니와 57억 달러를 쾌척한 뉴욕시의 야심적인 프로젝트였다.
2001년 다운타운인 월스트리트의 쌍둥이 빌딩을 테러리스트에게 잃은 뉴욕시는 2007년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 뉴뮤지엄을 유치하고 이어 휘트니 미술관까지 이전하도록 도움으로써 다운타운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두 미술관의 다운타운 이전/개관은 단순히 경제를 회생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부서진 집을 새로 지어주고 불타버린 옷을 새로 사 입히듯, 상처받은 다운타운의 뉴요커, 나아가 전 뉴요커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희망을 주는 프로젝트여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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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휘트니 미술관은 허드슨 강변에 세워져 멋진 전망을 자랑한다. 동시에 태풍, 홍수 등 자연재해에 대비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photograph by 서상숙)

미술관 기능을 우선시 한 설계
뉴뮤지엄이 개관하면서 로어 이스트 사이드는 갤러리가 모여 들어 새로운 화랑가로 각광받고 있을뿐만 아니라 음식점, 호텔, 패션스토어가 잇달아 문을 열어 마약중독자와 홈리스들의 거리에서 개성있는 예술의 거리로 탈바꿈했다.
휘트니가 위치한 미트패킹 디스트릭은 본디 정육점과 정육기구들을 팔고 포장하는 공장이 있던 곳이다. 1960년대 게이 나이트클럽이 처음으로 이곳에 문을 연 이후 현재까지 입장하기가 까다로운 나이트클럽이 많은 지역이며 1990년대 후반부터 알렉산더 매퀸, 스텔라 매카트니,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 등 고가의 패션스토어가 문을 염으로써 패션의 거리로 탈바꿈했다.
휘트니 미술관은 10여 년 전 미술관이 소유한 인접 빌딩들을 연결해 기존 미술관을 확장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단계에서 구조적인 문제에 부닥치면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여러 장소를 물색하다가 지난 2009년 뉴욕시가 소유하던 현재의 부지를 매입함으로써 이전이 확장되었다. 몇 블록 떨어진 곳에 미술관 설립자이자 미술가였던 거트루트 밴더빌트 휘트니 여사(1875~1942)가 1918년 휘트니 미술관의 전신인 휘트니 스튜디오 클럽을 연 곳이자 1930년 미술관을 연 그리니치 빌리지도 있어 더욱 그 의미가 깊다고 한다.
새 휘트니 미술관은 무엇보다 미술관 기능을 우선순위에 놓고 지어졌으며 ‘소통’과 ‘배려’가 곳곳에서 느껴지는 구조를 띤다. 완공 전 빌딩 외관에 대해 회의를 표명한 사람들조차 개관 후 일제히 찬사를 보내고 있다.
《아키텍스 뉴스페이퍼》의 앨런 브레이크는 “전시실의 알맞은 조명, 신중하게 계산된 도시와 강의 전망, 묵상의 순간들을 제공하는 휘트니는 뉴욕에서 가장 만족할 만한 미술관 환경을 갖춘 곳”이라고 극찬했다. ‘모양보다 기능’에 충실한 렌조 피아노의 디자인은 그가 설계한 파리의 퐁피두 미술관에서 그 좋은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2003년 이후 휘트니의 미술관장으로서 이번 이전개관을 총괄해온 애덤 와인버그는 “퐁피두 미술관처럼 전시공간과 더불어 사람들이 모여 미술을 매개로 소통하는 광장의 개념으로 새 휘트니를 짓고 싶었다. 그것이 렌조 피아노를 설계자로 선택한 이유”라면서 “메디슨 애비뉴의 브루어 빌딩에서 아쉬웠던 점이었는데 이번 새 건물은 1층을 입장료 없이 누구나 들어와 즐길 수 있도록 개방했다”고 밝혔다. 34가에서 시작돼 2.33km에 이르는 하이라인 파크가 끝나는 곳에 있어 뉴욕시의 명소와 만나는 광장의 개념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새 휘트니 미술관은 총면적 20,500m2의 9층 건물로 전시공간은 4600m2다. 구건물에 비해 전시공간이 50% 이상 늘었다. 바닥은 재활용 소나무를 깔았으며 최대한 자연광이 비치도록 설계되었다. 기둥을 없애 공간을 자유롭게 구획할 수 있다. 특히 5층은 기둥이 없는 뉴욕의 미술관 중 가장 큰 전시실을 자랑한다. 비디오와 영화 상영, 퍼포먼스 등을 할 수 있는 최대 204석의 작은 극장도 옛건물에 없던 것. 이 극장은 야외 테라스로 연결된다. 보존수복센터와 교육센터 역시 새로운 공간이다.
허드슨 강변의 입지를 살려 전시공간을 최대한 확보하면서도 강이 보이는 전망을 즐길 수 있도록 통창을 설치하고 관람객들이 쉴 수 있는 소파를 놓았다. 그리고 4개의 야외 테라스를 설치해 허드슨 강과 뉴욕의 스카이라인, 하이라인 파크로 이어지는 전망을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야외 테라스로 이어지는 8층의 카페는 그 전망만으로도 들러볼 만하다. 특히 하이라인 파크 쪽의 일조권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미술관의 조망권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설치한 계단식 테라스는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씀이 돋보이는 디자인으로 감탄을 자아낸다.
휘트니는 강 옆에 위치함으로써 홍수와 태풍의 위험을 간과할 수 없다. 이를 고려해 건축자재를 선택하고 설계에도 반영했다. 특별히 3층 이하에는 전시실이나 작품 수장고를 만들지 않았다. 1층에는 손쉽게 운반할 수 있는 소품들을 전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남쪽과 동쪽에는 홍수 때 침수를 막을 이동식 벽이 설치되어 있으며 하수구도 대량의 물이 한꺼번에 빠져 나갈 수 있도록 특별히 설계되었다고 한다. 연료 탱크, 물을 빼내는 펌프와 더불어 비상시에 전력을 가동하는 시설도 갖추었다. 미술관 북쪽에 뉴욕시 소유 공터가 있어 필요하다면 확장할 수 있다는 것도 휘트니의 새 건물이 지닌 장점이다.
이전 개관 후 휘트니는 부관장 겸 수석큐레이터로 38살의 스캇 로스코프(Scott Rothkopf)를 임명하고 2004년 이후 부관장 겸 수석큐레이터를 맡아온 다나 드 살보(Dana De Salvo)를 국제협력관계 담당 부관장으로 발령해 안팎으로 휘트니의 새로운 시대를 예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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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모리스의 조각이 놓인 7층의 아웃도어 갤러리. 야외전시장인 구 휘트니에 없던 새로운 전시공간으로 관람객들에게 뉴욕의 전망을 즐기며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photograph by Nic Lehoux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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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 크루거, 도널드 마펫, 프레드 윌슨, 데이비드 해몬스 등 1980년대의 정치사회적 기류를 상징하는 작품. (photograph by Nic Lehoux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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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전엔 휘트니 소장품 중 1900년 이후 현재까지를 아우르는 600여 점이 전시된다. 백남준, 제프 쿤스, 찰스 레이등의 작품이 보인다.(photograph by Nic Lehoux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