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면서도 낯선, 동시대 미술의 제도적 변천
2005년 이후 우리 미술계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2007년과 2008년 전반기 미술시장의 유례없는 활황으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됐다가 하반기 닥친 국제적인 금융위기로 허망하게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와 연관하여 미술계 분위기는 어땠으며 어떤 상황 등이 펼쳐졌을까? 필자는 이를 “가시적이고 외형적인 제도 및 공간 변천을 중심으로” 풀었다고 말한다.
미술계의 지난 10년을 돌아본다.
문혜진 미술이론
자신이 속한 시대를 역사화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2006년부터 현재까지 지난 10년간 한국현대미술의 변천을 정리해달라는 청탁을 받고 내내 머릿속에 맴돌던 질문이다. 평가와 정리는 시간적 거리감을 확보한 ‘밖’에서 가능한 일이지 떠내려가는 강물 ‘안’에서 함께 휩쓸리는 당대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20매가량의 짧은 분량에 갈수록 확장·가속화하는 동시대미술 신 전체를 포괄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해보였다. 10년간의 잡지 목차와 산처럼 쌓인 복사물을 바라보다가 가능한 선에서 범위를 좁히기로 마음먹었다. 상대적으로 가시적이고 외형적인 제도 및 공간 변천을 중심으로 지난 10년간의 한국미술 변화를 간략히 정리해볼까 한다. 해당 시기를 대표하는 전시나 작업 선정은 주관이 가미되는 일이라, 매체에서 배제된 전시까지 고려해 공정한 평가를 내리기에는 시간도 지면도 불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유례없는 미술시장의 과열을 화두로 2000년대 중반을 열어볼까 한다. 세계 경제의 호황과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투기 억제책 및 저금리 정책에 힘입어, 한국 미술시장은 2005년 말부터 2008년 상반기까지 전무후무한 상종가를 기록한다. 상승기류가 정점에 달한 2007년 서울옥션과 K옥션은 낙찰률 70%를 돌파하며 전년대비 배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같은 해 5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45억2000만원에 낙찰된 박수근의 <빨래터>는 국내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를 경신했고, 11월에는 홍콩 크리스티 아시아 컨템포러리 경매에 출품된 국내 작가들의 작품 52점 중 47점이 한화 약 49억8600만원에 낙찰돼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 2007년 한 해 동안 92개의 화랑이 신설되었고, KIAF는 입장객 6만을 돌파했으며 신생 경매사가 속속 등장했다.1
이러한 이례적인 호황은 같은 시기에 나타난 두 가지 현상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그중 하나는 중국미술 붐이고 다른 하나는 젊은 작가들의 제도권 진출이다. 신흥 미술시장으로 각광받는 중국 미술시장에 편승하기 위해 2006년부터 2007년 사이 베이징 동부의 지우창, 차오창디, 798 지구에 일련의 한국 화랑들이 입성한다.2 아울러 장샤오강, 팡리준, 웨민쥔, 왕광이 등 블루칩으로 부상한 중국 작가들의 국내 전시도 성황을 이루었다. 하지만 2008년 후반 미국발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치고 정치적 팝아트의 유행이 시들해지자 중국미술 열풍은 금세 꺼지고 만다. 불과 몇 년 후인 2010년 전후로 중국에 진출한 한국 화랑 대부분이 철수했음을 떠올리면, 한국화단이 외부 자극에 얼마나 취약하며 시류에 예민한지를 실감하게 된다. 한편, 시장이 활성화하자 새로운 투자 대상을 물색하던 화랑은 상대적으로 작품가가 낮은 젊은 작가들에 주목했다. 젊은 작가들의 제도권 진입절차는 1990년대 말에 등장한 1세대 대안공간들이 이미 마련해 놓은 장치지만, 2000년대 중반 시장의 과열은 과거 유지되던 일종의 검증 절차(대안공간이 발굴한 작가를 일정 기간이 흐른 뒤 미술관이나 상업화랑이 흡수하는 과정)를 무시하고 미술관과 화랑이 직접 젊은 작가를 선발하는 현상을 낳았다. 이 시기 가장 흔한 전시 제목은 ‘신진 작가 발굴’, ‘뉴스타트’, ‘영 아티스트’, ‘젊은 작가 발굴’ ‘이머징 아티스트’ 등이었고, 그 결과 젊은 작가의 기준은 35~45세에서 25~35세로 하향 조정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제도권이 직접 젊은 작가들을 흡수하는 시기, 1세대 대안공간들이 급격히 노화하여 사실상 대안의 기능을 상실한 것은 의미심장한 현상이다. 2005년 건물을 신축해 재개관한 대안공간 루프는 이러한 변화의 신호탄이 됐다. 다음해 인사미술공간과 대안공간 풀이 임대료 인상으로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고 한동안 고립되자, 대안공간이 주류 미술계에 끼치는 영향력은 더욱 줄어들게 된다. 대안공간이 하던 새로운 작가 발굴 및 전시방식이 이미 일반화한 상황에서 젊은 작가를 직접 지원하는 상위 기관이 늘어나자 이들 기관과의 차별성이 사라진 것이다. 이후 2000년대 후반 새로운 미술 공간들이 생겨나면서 담론의 중심은 더욱 빠르게 전환된다.
2000년대 중후반은 오늘날 한국미술계를 가능케 한 물적 토대가 대폭 확충된 시기다. 우선, 현재 주목받는 주요 전시 공간 중 다수가 이 시기에 설립되었다. 일례로 중형 기업 미술관 중 상당수가 2006~2007년에 세워졌다. 아뜰리에 에르메스(2006), OCI미술관(2006), 코리아나미술관(2006), 두산갤러리(2007), KT&G상상마당 갤러리(2007) 등이 그 예다. 국공립 레지던시 공간이 대폭 확충된 것도 비슷한 시기다. 국내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실질적으로 2000년대 초반에 시작되었으나3, 물리적인 자원이나 프로그램 운영, 실질적 효과 면에서 현재의 지위가 구축된 것은 2000년대 후반이라고 봐야 한다. 대표적인 예가 창의문화도시 구현의 일환으로 서울 곳곳의 유휴 공공건물이나 공장이전지를 재활용해 창작공간을 조성한 서울시창작공간이다. 2006년에 출범한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를 필두로, 2009년 서교예술실험센터, 금천예술공장, 신당창작아케이드, 2010년 문래예술공장, 성북예술창작센터, 2011년 홍은예술창작센터가 연이어 개관하면서 작가를 지원하는 물적 조건이 확장·개선되었다. 경기도의 대표적인 공립 레지던시 두 곳이 문을 연 것도 같은 시기다. 국내 최대 규모의 경기창작센터와 인천아트플랫폼이 2009년 개관하면서 수도권 레지던시 하드웨어의 기본 골격은 완성된다. 이들 레지던시가 대안공간이 무력화된 빈틈을 메웠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레지던시는 일차적으로 2008년 이후 시장의 거품이 꺼지면서 활동하기 힘들어진 젊은 작가들을 물리적으로 지원(작업실 제공 및 전시 후원)했고, 이차적으로는 단순한 작업실 제공을 넘어 인맥 형성과 비평가 연계, 국제교류 프로그램, 다양한 워크숍 등을 통해 과거 대안공간이 담당하던 기능(인적 네트워킹 및 정보 교류)을 일정 부분 수행했다.
한편 대형 미술관 및 비엔날레들도 2000년대 후반을 통과하며 꾸준히 증가한다. 백남준아트센터는 2008년, 문화역서울 284는 2011년 개관했고, 비자금 파문으로 잠정 휴관됐던 삼성미술관 리움 및 플라토 (구 로댕갤러리)도 약 3년 만인 2010년 재개관했다. 지방미술관 중에서는 2011년 문을 연 대구미술관이 <쿠사마 야요이전>(2013)의 흥행 돌풍 이후 지역을 넘어선 신화를 새로 쓰고 있다. 2013년에는 미술계의 숙원이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개관했는데,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전반이 국제적이고 동시대적인 기획으로 무게중심이 조율되었다. 또한 짝수 해마다 의무적 그랜드 투어를 조성하던 대형 비엔날레는 홍보 및 관광 효과를 노린 지자체 간 경쟁에 따라 포화상태에 도달했다. 기존의 3대 비엔날레인 광주(1995~), 부산(2002~), 미디어시티(2000~)에 이어 금강자연예술비엔날레(2004~), 대구사진비엔날레(2006~), 프로젝트 대전(2012~)이 차례로 문을 열었고, 플랫폼 프로젝트(2006~09),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2005~), 인천국제디지털아트페스티벌(2009~10) 등 준(準)비엔날레급 행사들이 양적 팽창에 가세했다. 동원을 위한 동원, 작품과 유리된 주제, 역치를 넘어선 피로감 등 비엔날레의 문제는 반복되고 있지만, 백화점식 전시의 효율성 때문인지 대안 없는 행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마지막으로 규모로는 비주류이나 최근 담론을 주도하는 독립 미술공간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이들의 대두는 스마트폰의 보급과 맞물려 있는데 2010년 하반기 즈음 활성화된 SNS가 인지도 및 트렌드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기 때문이다. 초기의 예로는 2010년대 초 짧고 굵은 존재감을 보인 이태원의 공간 해밀톤이나 꿀풀, 2010년 오픈한 더북소사이어티와 미디어버스의 독립출판 관련 활동들이 대표적이며, 최근의 사례로는 2013년 말에 생긴 커먼센터와 시청각, 2012~2014년 동시다발적으로 설립된 신생 공간들을4 꼽을 수 있다. 청년 세대의 감성에 맞는 감각적인 전시와 탈장르적이고 유연한 태도가 이들의 장점이겠지만, 일부 여론 주도자와 특정 집단의 취향이 (의도했든/의도치 않았든) 배타적인 권력을 형성한다는 것이 이들에게 불편함을 표출하는 주된 이유다. 이런 우려를 종식시키는 것은 이들이 생산해내는 유무형의 결과물이 기존 미술계에 얼마나 긍정적인 자극을 주는가에 달렸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성 제도권에 편입하기 힘든 젊은 작가들의 생존 실험인 신생 공간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귀결될지는 흥미로운 기대를 품게 한다. 새로운 플랫폼과 운영 방식이 (일시적이나마) 신선한 탈주 가능성을 낳을지 아니면 또 다른 진입 수단을 만드는 데 그칠지. 한 가지 희망사항을 덧붙이자면 운영 주체의 자립과 발언 외에 보는 주체의 권리도 고려했으면 하는 것이다. 힘들게 찾아간 관객이 받을 보상이라면 결국 작품과 전시/행사의 질이 아니겠는가. ●
주)
1더 자세한 정보는 다음의 두 글 참조. 반이정, ‘2007년. 사건과 시장의 해. 솔드아웃의 일장춘몽’, 《월간미술》, 2013년 9월, 182~185쪽; 서진수, ‘2007년 한국미술시장의 성과와 과제’, 《월간미술》, 2008년 3월, 164~166쪽.
2이음갤러리(798지구, 2005),아라리오 베이징(지우창, 2005), 표갤러리 베이징(지우창, 2006),갤러리 아트사이드(798지구, 2007), 두아트 차이나(2007, 차오창디), PKM갤러리 베이징(2006, 차오창디), 금산갤러리(798지구, 2007) 등이 대표적이다.
3초기의 대표적인 레지던시 공간으로 1998년에 문을 연 암사동 창작스튜디오(쌈지스페이스의 전신), 2000년에 개관한 영은창작스튜디오, 각각 2002년과 2003년에 설립된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와 고양레지던시를 꼽을 수 있다.
4구탁소, 교역소, 지금여기, 합정지구, 개방회로, 800/40, 노 토일렛 등이 대표적이다. 작가 겸 운영자가 기존 제도에 한계를 느껴 공간을 직접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로 임대료가 싼 지역에 위치하며 느슨하고 열린 공간을 지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