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EFING

어떤 장면들

# 1. 먼저 특집 얘기부터 하자면, 결국 곽세원 기자가 해내고 말았다. 월초 편집회의 때 나는 기자들에게 이런 망언(妄言)을 자주 한다. “이 특집기획, 다음 생(生)에 해보시라”고. 반성한다. 이번 특집 기획안도 바로 그런 예였다. 사실 기획안을 처음보고 실현가능성이 낮은 안건이라고 단박에 무시했다. 솔직히 더 중요한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미적취향에서 비롯된 선입견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이미 아는 사람은 알 듯, 나는 비디오 영상작업이나 최첨단 테크놀로지 운운하는 이른바 뉴미디어 계열 작품에 몹시 거부감을 지닌 인간이다. 그런데 하물며 ‘인공지능과 미술’이라니. 모르긴 해도 당시 곽 기자는 나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절대 이 결혼 허락 못 한다”는 막장드라마 속 옹고집 노인네처럼 여겼으리라. 아무튼, 곽 기자는 오기가 발동한 듯 꾸역꾸역 기어코 보란 듯이 이렇게 특집을 만들어 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속속 들어오는 초고상태 원고를 읽으며 “이거 ‘보그 병신체’ 아니냐”는 망언을 또 쏟아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편협하고 옹졸하고 무심하고 무례한 나를 스스로 꾸짖고 반성하며 사과한다. 그럼에도 낯선 외래어 개념과 용어, 처음 맞닥뜨린 이름으로 넘쳐나는 글을 보면 여전히 골치가 아프다. 아마도 일부 독자도 나와 같은 반응일 수도 있겠다. 공부하는 자세로 차분히 읽어 내려가자. 그러다보면 ‘인공지능과 미술’의 실체에 반 발짝쯤이라도 다가 설수 있지 않을까?

# 2. 모든 가치판단이 그런 것처럼 나이 많음과 적음 역시 상대적이다. 그럼에도 일상에서 새삼 나이를 적잖이 먹었다는 걸 실감할 때가 종종 있다. 좌식 식당에서 배불리 밥 먹고 일어설 때 나도 모르게 “에구구~” 소리를 낸다거나, 누군가에게 명함을 받아 들곤 좁쌀만 한 글씨를 보겠다고 안경을 들추는 것도 모자라 코앞까지 갖다 댄다거나, 남들 다 웃는데 뭔 얘긴지 혼자 못 알아듣고 멀뚱멀뚱 뻘쭘할 때처럼 말이다. 상태가 이 지경이니 인기 있다는 TV 프로그램 얘기에 끼지도 못하고 SNS 용어와 신조어에도 거의 까막눈 수준이다. 그렇다고 완전 구제불능은 아니다. 지난달 원앤제이 갤러리에서 열린 〈룰즈〉와 두산갤러리 〈사물들 : 조각적 시도〉를 보고 그냥 ‘좋~다’가 아니라 ‘안구정화(眼球淨化)!’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최근 몇 년 동안 일부 젊은 작가들이 내놓은 수준이하 작품을 보고 오염됐던 눈이 이 두 전시를 본 후 말 그대로 깨끗해지고 맑아진 느낌을 받았단 말이다. 역시 개인적 취향에서 비롯된 말이지만 이 정도는 돼야 비로소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3. 안구정화에 이어, “○○○ 안 본 눈(目) 삽니다”라는 요새 말처럼 나는 “○○○ 안 들은 귀(耳) 삽니다”라고 외치고 싶다. 지난달 부산시립미술관에서 만난 某 선생은 나를 보자마자 “왜 그렇게 마리 관장을 미워하고 싫어하냐”며 가르치듯 이렇게 연설(?) 하셨다. “일찍이 네덜란드로부터 조총(鳥銃)을 수입한 일본이 그것을 앞세워 임진년에 조선을 침략했던 것처럼, 우리도 유럽 미술계에 네트워크가 넓은 외국인 관장을 이용해 국제무대에 한국미술을 알리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이다. 헐~! 마침 그 양반을 만나기 전에 낮술도 한잔 했던 터라 자칫 흥분할 뻔 했지만, 다행히 조곤조곤…. 지금 생각해도 정말 그 말 안 들은 걸로 하고 싶다.

# 4. 스페셜 아티스트 박은태. 여러 면에서 인공지능 특집과 대척점에 서있는 작가다. 작품의 내용이나 형식뿐 아니라 삶과 일치된 작가의 태도라는 측면에서 더욱 그렇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겉멋만 들어 작품은 개떡처럼 해놓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라며 ‘아티스트 피(fee)’를 요구하거나, 꼴같잖은 공간 운영자라며 공공기금 따먹기에 혈안 된 일부 젊은 세대와 박은태 같은 작가의 시대정신 차이는 무엇일까?

편집장 이준희 dam2@unitel.co.kr

HOT PEOPLE John Berger 1926 – 2017

《Ways of Seeing》 되돌아보며

전영백 | 홍익대 교수

존 버거(John Berger, 1926~2017)가 향년 90세로 일생을 마감했다. 그는 미술비평가이자 저술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사상적으로는 마르크시즘에 기반을 둔 리얼리스트였다고 말할 수 있다.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서 1940년대 후반에 화가로 등단, 전시도 가졌으나 이후 미술비평으로 입문, 본격적인 활동으로 다수의 글을 발표했다. 소설가로서도 두각을 나타냈던 버거는 1958년 첫 소설 《우리 시대의 화가(A Painter of Our Time)》를 시작으로, 1972년 실험적 소설 《G》로 부커상(Booker Prize)를 수상했을 정도다. 그가 36세이던 1962년, 프랑스로 망명하여 줄곧 퀑시(Quincy)의 농촌공동체에 살면서 1980년대에 주요 저서를 발표했다.1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 우리에게 익숙한 버거의 책이 바로 〈보는 방식들(Ways of Seeing)〉(1972)이다. 판형이 작고 얇은 책이건만, 국내에선 책 속의 내용보다 책의 제목이 특히 잘 알려져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가장 쉽게 풀어주는 문구인 셈이다. 말하자면, 미술작품은 본유적인 정해진 의미를 갖는 게 아니라, 관람자(독자)의 입장과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방식들’이라 하여 복수를 쓴 것도 유념해야 하는 바, 하나의 ‘정전(canon)’이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는 이 책에서 미술작품을 둘러싼 권위와 신화, 그리고 자본주의 상품화를 폭로하고 비판했다.

1970년대 초 당시 시대를 뒤흔든 버거의 시각은 리얼리즘과 마르크시즘이 학술적으로 체계화된 영국이었기에 가능했다. 영국의 미술계는, 같은 영미권이라도 보수적이고 자본주의 소비문화가 팽배한 미국의 그것과 현격히 다르다. 사회주의에 기반을 둔 급진적 이론이 지적체계를 확보했고, 보수와 진보가 공존하여 그 논의가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 후자는 다른 유럽과도 차별화되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술사 방법론에서 현격한 기여를 한 ‘신미술사학(New Art History)’이 1970년대 영국에서 출현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영국 내 미술이론(미술사와 미술비평)의 분위기에서 버거와 같은 파격적 비평가가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버거의 〈보는 방식들〉은 본래 1972년 BBC에 방영된 TV 시리즈였다. 방송 자체로만 볼 때, 그 내용과 스타일 모두에서 파격적이었다. 당시 영국의 미술 프로그램이란, 정장 차림의 신사가 멋진 별장의 벽난로 앞에서 거들먹거리며 찍던 게 일반적이었다. 반면, 버거의 방송은 전기상품 창고에서 녹화되었는데, 카메라 앞에 선 그의 모습과 말하는 방식은 오늘날의 눈에도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장발에, 프린트 무늬의 셔츠만 입은 이 좌파 지식인은 카메라 앞에서 거침없고 도발적인 주장을 펼친다. 한마디로 비(非)엘리트적이다.2

〈보는 방식들〉에서 버거가 주장한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순수미학과 학문적 권위에 관심을 쏟는 일반적 비평가와 달리, 그는 유럽의 고급 미술(high art) 배후에 작용하는 자본주의와 식민지 이데올로기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는 과거의 명작들이 어떤 방식으로 엘리트 경제체제와 ‘공범’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밝히면서 이를 비판했고, 미술교육에 개입한 가치체계를 여지없이 노출시켰다. 또 전통 미술의 여성 이미지에 대한 페미니스트 비판을 강력히 제시했다. 그렇듯 과감한 그의 강의는 위대한 거장들의 작품과 키치적인 광고나 복제품을 넘나들며 양자 사이의 분리를 폐기했다.3 여기서 그의 페미니스트 입장을 설명하자면, 예컨대 앵그르의 〈거대한 오달리스크(Grande Odalisque)〉를 포르노 사진과 비교하면서, “양자는 그림을 보는 남성에게 제시된 것이며

그의 성(性)에 호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그녀의 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4

버거의 파격적 TV 강의에 대한 영국 내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찬반의 격론을 불러왔다. 주간 《Sunday Times》는, “우리가 그림을 보는 방식을 확실히 바꿨고, 이제까지 보지 못한 것을 열어 보였다”고 격찬했다.

그러나 비난 또한 대단했다. 대표적인 것으로, 마르크시스트인 그가 미술의 거장(master)을 인정하지 않고 그와 같이 개인적 ‘신화’를 만드는 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 점이다. 당시 제도권 미술사에서는 미술의 대가들을 우상화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이는 오늘날도 어느 정도 여전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개인의 천재성이 가진 신화를 그토록 비판했건만, 미술가의 개인 신화가 얼마나 고질적인지 알 수 있다. 하물며 1970년대 초는 아직 포스트모더니즘이 일반적으로 인식되지 않은 시기였다. 버거가 받았을 비난의 강도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5

다양한 재능과 창의력, 그리고 실천력과 일관성을 갖춘 지식인 존 버거. 미술 실기와 비평, 그리고 문학과 영화를 넘나든 그를 어떻게 하나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까? 애매모호한 명명일지 모르나, 일종의 ‘시각 사상가(visual thinker)’로서 버거는 미술의 시각언어에 대한 대중적 이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하다. 더불어 말이나 글뿐이 아닌 실천적으로 사회의 불평등과 불의에 저항한 의식있는 지식인으로 남을 것이다. 미술인에게 이보다 더 큰 명예가 있을까? ●

1) 주로 유럽인 농부가 겪는 실제적 체험을 기반으로 농촌에서 도시로의 경제적, 정치적 이주와 도시의 빈곤을 다룬 책들이다.
2) BBC의 〈보는 방식들〉은 네 부분으로 편성되어 방영되었는데, 예상했듯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 내용과 방식에서 당시 미술사의 소위 ‘정통’을 대표하는 케네스 클락(Kenneth Clark)의 〈문명(Civilisation)〉 시리즈 반대쪽에 위치한다. 버거의 소통 방식은 모니터를 중간에 놓고 한 사람의 시청자에게 직접 말하듯 했고, 그 내용은 클락과 같은 미술사가가 속하는 기존 담론의 권위와 정전을 깨는 것이었다. 더불어 그는 아방가르드의 정신을 혁명적 의식으로 강조했다.
3) 이러한 버거의 시각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글,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 빚지고 있다.
4) 미술작품 속 여성을 보는 클락과 버거의 시각 차이는 이들의 누드에 대한 다른 인식에서 잘 알 수 있다. 버거는 클락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클락은 자신의 책에서 ‘벌거벗었다(being naked)’는 것은 단순히 옷을 몸에 걸치지 않는다는 뜻이라 했다. 그에 따를 때, 누드(nude)는 예술의 한 형태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본다. 즉 벌거벗은 것은 그 자신이 되는 것이고, 누드가 되는 것은 타인에 의해 벌거벗겨져 보인다는 것이다. 누드는 누드가 되기 위해서 하나의 대상으로 보여져야 한다.”
5) 이와 더불어, 버거에 대한 ‘합리적 비판’을 들자면, 그가 다양한 시각을 위해 작품 본래의 시각적 참조를 너머 그 의미를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확장한 것이라는 점이다.

위 존 버거의 50년 지기 장 모르(Jean Mohr)가 1999년 찍은 존 버거 초상사진

EXHIBITION TOPIC 욕망의 메트로폴리스

디스토피아의 우울한 판타지

이영준 | 김해문화의전당 예술정책팀장

부산시립미술관에서는 거대 도시를 다양한 관점으로 재해석한 “욕망의 메트로폴리스”전을 선보였다. 부산을 비롯해 서울 일본에서 작가 18명이 참여한 이번 전시는 크게 3개의 부문으로 구성돼 있다. “환영의 도시”, “도시의 이면들”, “아래로부터의 사람들”이라는 소주제로 도시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성찰한다. 이번 전시는 우리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환경적 요인 중의 하나인 ‘도시’를 정면으로 다룬다는 점과 큐레이터의 시각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전시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사실 도시는 세계인구의 절반이 만나는 환경이다. 공기처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이 숭고한 구조는 너무도 상식적이고 일상적이어서 그 존재를 감각하기 어렵다.
하지만 산복도로의 비좁은 골목길을 많은 사람이 찾는 이유는, 이곳에서 알 수 없는 편안함과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도시의 허울 좋은 욕망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얼굴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이번 전시는 도시를 거울에 담아 비춰줌으로써 우리의 잃어버린 감각을 상기시켜준다. 그 감각은 잘 보이지도 드러나지도 않지만, 불편한 우리 ‘욕망의 형태’들이다.
욕망은 현실에서는 채워질 수 없는 무엇이며, 그 부재의 공간에 판타지가 개입한다. 도시의 판타지는 당연히 유토피아적인 공간이다. 높이 솟은 건축물들은 이러한 우리들의 욕망을 수직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안세권의 작품은 도시의 수직적 욕망에 대한 일종의 기념비이다. 작가는 일찍부터 도시에서 사라져가는 것을 극명하게 기록해왔다. 이번 전시 출품작 중에서 압권은 해운대 해수욕장과 수직적인 건물을 합성한 <해운대파노라마>다. 희미한 안개 너머의 도시와 해변의 인물이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며 묘한 긴장을 자아내고 있다. 신기루처럼 처리된 도시 이미지는 더는 오를 수 없는 욕망의 임계점이나 순간 사려져버릴 것 같은 허무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조세피나 리는 세계의 마천루들을 3D 프린트로 재현해 놓은 <신바벨도시>를 비롯해 진입 금지를 알리는 러버콘 158개로 <금지된 영역 – LCT>를 선보였다. 김태연은 영상작품 <웰컴 투 더 시티>를 통해 장소성이 사라진 특색 없는 근대도시의 미적 획일화를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정혜련의 작품은 일종의 ‘공간 드로잉’이다. 이 작품을 구성하는 것은 공간과 이에 반응하는 작가의 감각이 유일하다. 그리고 이 공간 드로잉은 하나의 선이 새로운 선을 호출하는 연쇄적인 반응의 산물이다. 그런 면에서 정혜련의 작품은 욕망이 또 다른 욕망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도시적 삶에 대한 추상적인 형태일지도 모른다.

정혜련 〈예상의 경계〉 광확산 PC, LED, 파노라마컨트롤러, 670×1200×485cm

안세권 〈해운대 파노라마〉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50×750cm 2014

도시 이미지의 페러독스

도시의 이면들이라는 소주제를 통해 압축 성장한 한국 근대도시의 어두운 그림자를 읽을 수 있다. 가령 조형섭의 경우 국가가 개인의 수면 시간까지 통제했던 – 197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로 시작하는 ‘새마을노래’를 매일 새벽 6시에 들어야 했다. 박정희 시대에 새마을운동과 함께 가장 많이 등장한 시각적 상징이었던 “근대화”를 다룬다. 그 시리즈 중의 하나가 바로 <근대화 슈퍼>다. 조형섭은 한국 근대화의 과정에 뿌리깊게 새겨진 ‘집단적 무의식’을 탁월하게 호출해낸다.
또한, 서평주의 <새천년 생명체조>는 위험으로 가득 찬 도시적 삶에 대한 패러독스다. 위험시설인 고리원자력발전소 앞에서 건강을 위한 체조를 선보이는 상상력은 서평주만이 가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냉철한 시선에서만 가능한 작품이다. 너무도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는 일상적인 삶에서 허술한 구조를 발견해내는 이광기는 모순으로 점철된 우리 삶을 위트있게 비판해왔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세상은 생각보다 어이없이 돌아간다>라는 3분24초의 싱글채널비디오는 현대인의 삶을 은유하고 있다. 수족관 물고기가 횟감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담은 작품 속 물고기는 소모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닮았다.
그 외에도 영도 한진중공업 노동자의 구술을 기록한 김정근의 <그림자들의 섬>, 도시의 생성과 소멸, 계층 간 상반된 이미지를 대비시킨 허병찬의 <기억의 풍경>, 공간에 대한 어긋난 기억을 이야기하는 임봉호의 <콘크리트 맛 솜사탕>, 일상이 된 불안의 풍경을 보여주는 정주하, 시대의 흐름과 미시적인 삶의 관계를 드러낸 김아영, 영상에 대한 메타비평적 의미를 탐구하는 변재규, 재개발의 폐허에서도 남아있는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박자현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아래로부터의 사람들은 도시의 이미지에서 배제된 ‘말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백현주는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촬영장소에서 주민들이 기억하고 있는 영화의 장면들을 재구성해 새로운 영상을 만든다. 세대와 거주 형태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된 영화에 대한 기억을 통해 공동체의 여러 문제를 환기한다. 감윤경은 홍티아트센터에서 진행했던 <A Piece of Cake <달콤한 무지개>>를 통해 개념에 짓눌린 현대미술을 관계의 미학으로 치환한다. 소통과 참여의 가치를 강조하는 작가의 작품에서 예술 속에서 지워진 이름 ‘관객’을 호출하는 정성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감윤경과 기타가와 타카요시는 공동 프로젝트로 작품 ‘찾자! 챗!(Chat)!’ 과 ‘차차차 프리즘’을 통해 부산시민들을 만나고 함께 부산을 발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정윤선의 <도시 그 욕망의 계보학 ‘Dienamic-K’>는 도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오마주이다. Dynamic에서 착안한 Dienamic은 개발과 동시에 삶에서 멀어져간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부산시립미술관 박진희 큐레이터는 도시를 ‘욕망’이라는 키워드로 재구성하고, ‘유토피아의 환상이 사라진’ 우울한 공간으로 재현했다. 그 우울의 원천은 도시가 인간이나 생명보다는 이면에 숨은 자본이나 권력의 욕망을 더욱더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의미를 반성하고 성찰하려는 기획자의 선명한 의지는 작가와 작품 선정에서 뚜렷한 맥락을 보여주었고 큐레이터십이 살아있는 의미 있는 전시를 만들었다. 그러나 개념에 너무 깊이 천착한 나머지 관람객의 생각이 개입할 어떤 여지나 여백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시종일관 진지한 작품의 나열이 피로감을 불러일으켰다는 한계는 있지만 이 전시의 장점에 비하면 애정 어린 투정에 불과하다.
결론적으로 부산시립미술관의 “욕망의 메트로폴리스”가 보여주는 이미지는 ‘디스토피아의 우울한 판타지’로 가득하지만, 우리가 성찰해야 할 도시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

 

SPECIAL FEATURE Artificial Intelligence & Art

정문열, 황세진 〈생명의 탄생〉 디지털 회화 2013

정문열, 황세진 〈생명의 탄생〉 디지털 회화 2013

인간과 기계의 창의력

정문열 | 서강대 영상대학원 교수

최근 화제가 된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경기는 기계가 인간과 같이 직관력과 창의력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에 본 글에서는 인공지능 기계의 ‘창의력’과 인공지능 기계가 ‘미술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직관력과 창의력은 인간 고유의 능력이며, 기계는 근본적으로 이런 능력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최근에 인공지능 바둑 기계 알파고가 세계적인 프로 바둑 기사 이세돌을 압도적으로 이기자 이런 생각이 흔들리고 있다. 즉 기계도 직관력과 창의력을 가지도록 설계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즉 다음과 같은 입장이 가능해졌다 : 인간은 뛰어난 직관력과 창의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는 인간 고유의 능력만은 아니다. 기계도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의 직관력과 창의력을 가질 수 있다. 인공지능 바둑이 가능하다면, 인공지능 예술도 가능한가 하는 질문도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인공지능 바둑보다는 어렵겠지만, 가능한 길이 있는지 모색해 보고자 한다.

알파고의 영향과 평가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은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필자도 이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전 대국을 실시간으로 시청했다. 이 경기 결과에 대해 도올 김용옥은 JTBC 방송에 나와 손석희 앵커와의 대담에서 “바둑이 아무리 복잡하다고해도 착점의 수가 유한하므로 빠른 연산능력을 가진 컴퓨터가 인간을 이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즉 이것은 근본적으로 불공정한 게임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알파고는 프로그램일 뿐 지능이 아니라고 했다. 어떤 변호사는 알파고가 엄청난 컴퓨터 연산 능력을 이용하여 모든 수를 미리 다 두어보고 승리로 이끄는 수들을 미리 확인한 다음 착수를 한다고 말했다. 이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자신이 둘 수 있는 모든 수와 상대가 둘 수 있는 모든 수의 조합을 다 시도해 본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두는 것은 바둑의 원리를 마스터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알파고는 진정한 의미에서 바둑을 둔 것이 아니며 이번 경기는 구글이 벌인 사기극이라 했다.

반면에 문병로 서울대학교 컴퓨터 공학부 교수는 《중앙일보》에 ‘알파고가 우리에게 남긴 것’이란 글을 기고했는데 알파고 작동방식에 대한 그의 설명을 토대로 알파고의 착수 추정능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번 대국에서 알파고는 한 수에 평균 1분이 조금 넘는 시간을 썼다. 바둑의 승패가 결정되려면 보통 200수 넘게 진행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사는 현재 상황을 토대로 다음에 두고자 하는 수의 효과, 즉 이 수가 경기를 승리로 이끌 가능성을 추정해야 한다. 자신의 수와 상대의 수에 대한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시도해보는 것은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바둑기사는 오랜 경험과 이에 근거한 직관을 이용하여 착수의 효과를 추정한다. 물론 알파고도 예외는 아니다. 알파고도 수많은 기보를 학습 데이타로 이용하여 착수의 효과를 추정하는 능력을 학습하며, 다른 알파고와 많은 경기를 함으로써 그 능력을 개선한다. 각 착수의 효과를 추정하는 능력으로 보았을 때 알파고가 프로 바둑 기사보다 못하지만, 수많은 컴퓨터를 동시에 이용하는 막강한 계산능력으로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전체적으로 프로 바둑 기사를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착수의 효과를 추정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추정능력이 없으면 계산능력을 아무리 보강하더라도 평균 1 분 안에 착수의 효과를 평가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알파고의 착수효과 추정능력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직관력과 창의력과 유사한 능력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또한 인간의 직관력과 창의력이 그렇게 신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인공지능의 한계

알파고가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는 입장은 알파고의 작동 방식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하지만 아주 빗나간 평가라 하기는 어렵다. 알파고의 지능이 동물이나 인간보다 부족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이를 몇 가지 점에서 살펴보면, 첫째, 알파고를 비롯한 인공지능 기계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의식이 없다. 예를 들어 중국어를 잘 하는 인공지능 기계가 있다고 했을 때 자기가 중국어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며 따라서 중국어를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알파고와 이세돌 대국을 해설한 프로기사들은 알파고가 두는 어떤 수들이 파격적이고, 이해하기 힘들다고 하며 그런 수를 두게 된 알파고의 생각을 알고 싶어 했으나 알파고는 그런 질문에 답을 할 수 없다. 둘째, 현재 인공지능 기계는 외부 환경에서 발생되는 정보를 획득하는 능력이 없거나 매우 부족하다. 우리는 보통 정보라는 것이 외부 환경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어서 유기체가 이를 단순히 집어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기체가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외부의 신호에 반응하고 행동하는 과정에서 정보가 생성되고 분류되므로 그 전까지 외부 신호는 의미 없는 잡음에 불과하다. 전통적인 인공지능에서는 기계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생성하고 분류해준다. 사실 이 과정이 제일 어렵고, 이것이 해결되면 고급 지능을 구현하는 작업이 간단해진다. 셋째, 현재 인공지능 기계는 주어진 과업은 잘 수행하지만, 주변 환경이 조그만 달라져도 이에 대응하는 능력이 매우 부족하다. 이것은 위에서 설명한 두 번째 한계와 연관이 있다. 이것은 인공지능 기계가 주변 상황에 따라 외부의 신호를 자기에게 적합한 정보로 바꾸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기계는 이 세상에서 생존하면서 진화할 수 없다. 특수한 과업은 거의 인간에 못지않게 수행하지만, 실제 세계에서 생존하는 능력은 원시적인 벌레에도 미치지 못한다.

인공생명

현재의 인공지능 기계는 프로그래머가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특정 과업을 수행하는 능력을 학습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생명체처럼 이 세계에서 생존하고 사람을 비롯한 다른 유기체와 어울려 살아갈 수 없다. 이를 보완하고자 원시적이지만 생명 현상 자체를 인공적으로 구현하려는 연구 분야가 있다. 바로 ‘인공생명(Artificial life)’이다. 인공지능의 한 지류로 볼 수 있지만 주류 인공지능 연구의 패러다임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대안적 인공지능이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하다. 원시적인 기능만을 갖고 있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생존 가능한 벌레 로봇을 구현하거나 소프트웨어적으로 생명체를 진화시킨다. 인공생명체의 진화는 유전체(genotype)가 돌연변이와 결합해 새로운 유전체로 변화하고 이로부터 발생한 표현체(phenotype)가 가상공간에서 적자생존을 통해 선택되는 과정을 거친다. 인공생명 기술은 당장 실용적인 기계를 구현하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위에서 지적한 인공지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인공지능 예술의 가능성

바둑처럼 정의된 문제에 인공지능 기술을 적용하면 인간을 능가하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의 고유한 영역으로 인식되는 예술은 어떠할까? 이 분야는 아직 논쟁거리가 많이 있다. 대표적 이슈는 “기계가 새로운 것을 창출할 수 있는가”, “인간의 미학이 형식화(절차화)될 수 있는가” “작품이 기계적으로 생산될 수 있다면, 예술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등의 문제가 제기된다. 예술작품이 기계적으로 자동적으로 생산될 수 있다면, 예술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예술 창작에 정형화된 문제해결 방식인 전통적인 인공지능 기술을 적용하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점이 있다. 그래서 인공지능 예술을 시도하는 작가들은 보다 유연하고 생명체의 능력을 더 잘 반영하는 듯이 보이는 인공생명 기술을 이용하는 경향이 많다. 그 중 대표적인 예가 생성예술이다. 생성예술은 완전히 동일한 개념은 아니지만 인공생명예술, 알고리듬 예술, 시스템 예술 등으로도 불린다. 생성예술에서는 이미지나 형태를 만드는 과정과 시스템 자체를 구현하는데, 이 과정과 시스템 자체를 예술작품이라고 보고 이것이 만들어 내는 이미지나 형태는 예술 작품의 내면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이 과정과 시스템은 자율적인 변화를 나타낼 수 있도록 생물 진화 및 발생 과정과 비슷한 방법으로 구현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도 수정란이 세포분열과 이동, 그리고 세포간의 결합을 통해 하나의 유기체로 발생되는 과정을 모방한 이미지 자동 생성 시스템을 구현한 바 있다. 생성예술은 아직 논쟁의 대상이다. 그러나 작가가 작품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은 편견이다. 부모가 자식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다고 해도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의미가 반감되지 않듯이 작가가 스스로 작품을 생성하는 과정과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작품을 직접 만드는 것과는 다른 즐거움과 신기함을 제공할 수 있다. 전통적인 시각예술에서는 움직이지 않는 물체를 표현했으나 점차 운동이나 움직임 자체에 관심을 가쳐 ‘키네틱아트’가 등장했다. 더 확장하면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어떤 과정과 시스템 자체도 예술창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과정과 시스템은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핵심이므로 인공지능기술의 도움을 받으면 그 완성도가 높아질 수 있다. 따라서 예술 창작의 대상이 이렇게 확장되면 인공지능기술이 예술가의 중요한 도구가 될 것이다. ●

 

SPECIAL FEATURE Artificial Intelligence & Art

2016년 1월 다보스 포럼(Davos Forum)에서 세계경제포럼 회장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이 내뱉은 한 단어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큰 변혁을 앞두고 있는지를 가늠케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4차 산업혁명”. 인류는 이미 빠르고 편리한 자동화 기기로 무장된 삶을 살고 있지만 더 나아가 가까운 미래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빅데이터(Big Data), 클라우드(Cloud) 등 우리가 미처 예상치 못한 지능정보기술을 통해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사회 전 분야에서 융합이 시도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분명 삶의 근본적인 체제와 사회적 패러다임을 바꿀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이 모든 변화와 그에 따른 수많은 논의의 화살은 모두 ‘인간(人)’을 향한다는 것.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윤리, 철학, 법학과 같은 인간을 다루는 학문에 관심을 두며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색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미술에도 영향을 미쳐 과학과 미술의 융합을 시도하는 전시, 교육, 포럼 등이 활발히 열리고 있다.
이런 상황 인식을 전제로 《월간미술》은 인간의 영역으로 간주해온, 이른바 ‘창의성, 감정적 교감, 직관적 판단’ 등에 주목해 “인공지능과 인간 그리고 창의성의 정수 ‘미술’의 관계”를 살펴보고 앞으로의 행보를 전망하고자 한다. 예측하기 어려운 인공지능의 결과값을 창의성의 범주에 넣어야 할까? 창조행위의 정수는 미술인 것인가? 미술과 창의성의 개념적 재정의가 필요한 건 아닐까? 자칫 무모하고 답이 없는 논쟁처럼 비칠 수 있는 주제에 의견을 들어보고자 이 분야 전문가를 지면에 초대해 미술과 과학의 융합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현장을 소개한다. 나름의 방향성으로 미래형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 및 인공지능 기술을 비롯해 첨단 과학기술을 접목한 작가들의 현주소를 살펴본다. 이를 통해 지금껏 우리가 예술이라 여겨온 영역의 확장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진행=곽세원 기자

하싯 아그라왈 〈탄뎀(Tandem)〉 구글 딥드림 라이브러리, pc(Ubuntu Linux OS), 터치모니터 2016 ⓒ Art Center Nabi

하싯 아그라왈 〈탄뎀(Tandem)〉 구글 딥드림 라이브러리, pc(Ubuntu Linux OS), 터치모니터 2016 ⓒ Art Center Nabi

머신러닝과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

최두은 | 아트센터 나비 겸임 큐레이터, 다빈치 크리에이티브 2017 예술 감독

이제는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이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하고, 소설을 쓰고, 영화를 만들었다는 기사가 새롭지 않다. 이러한 인공지능 창작물의 배경에는 빅데이터와 프로세싱 능력(processing power)에 힘입은 머신러닝(machine learning) 및 딥러닝이라 하는 인공지능 분야의 혁신적인 도약이 있다. 현재의 인공지능은 다양한 인공신경망(artificial neural network) 알고리즘을 통해 분석, 분류, 추론, 예측, 회귀의 과정을 반복하며 스스로 학습하고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게 되었다. 딥러닝의 최고 권위자 앤드류 응(Andrew Ng) 박사는 “인공지능은 마치 전기, 인터넷이 처음 등장했던 때처럼 지금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한다. 예술 분야도 예외는 아니어서 기존의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을 넘어 서서 ‘예측 불가능한’ 공동의 창작자로서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실험 중이다. 이제 막 시작된 인공지능 창작물에 대해 성급한 예술적 가치 평가를 하기보다는, 다양한 예를 공유하는 것으로 이해를 돕고자 한다.

하싯 아그라왈(Harshit Agrawal)의 〈탄뎀(Tandem)〉은 인간이 인공지능과 함께 그림을 그려볼 수 있는 그림판이다. 구글의 머신러닝 기반 이미지 소프트웨어인 딥드림(DeepDream) 알고리즘의 일부를 활용하여 제작되었다. 인간이 터치스크린 위에 밑그림을 그리고, 기쁨, 슬픔 같은 개인화된 감정 키워드를 선택한 후 구상화인지 추상화인지를 정해 ‘상상’ 버튼을 누르면 이 입력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인공 신경망(artificial neural network)이 그림을 완성한다. 제목에서 시사하듯 인간과 기계가 짝이 되어 서로 다른 언어를 가르쳐주며 하나의 예측 불가능한 그림을 만들어간다.

만약 인간이 그린 그림에 인공지능이 음악으로 답을 한다면? 안드레아스 레프스가르트(Andreas Refsgaard)와 진 코건(Gene Kogan)의 〈두들 튠즈(Doodle Tunes)〉에서는 낙서가 악보가 된다. 참여자들이 종이 위에 악기를 그리면 이미지 데이터 베이스인 이미지넷(ImageNet)을 기반으로 훈련된 합성곱 신경망(Convolutional Neural Network)이 어떤 악기인지 분류해내고 라이브 퍼포먼스를 위한 음악 소프트웨어인 에이블톤 라이브(Ableton Live)와 연결하여 키보드, 베이스 기타, 색소폰, 키보드, 드럼 등 각 악기에 해당하는 음악 시퀀스를 가져와 실시간으로 라이브 음악을 연주한다.

또한 딥 합성곱 신경망(DCNN: Deep Convolutional Neural Network)이 도시의 패턴을 읽어내는 작업도 있다. 골란 레빈(Golan Levin), 카일 맥도날드(Kyle McDonald), 데이비드 뉴버리(David Newbury)가 제작한 〈테라패턴(Terrapattern)〉은 오픈스트리트맵(OpenStreetMap)이라는 지도 데이터를 기반으로 학습한 후 구글의 위성 지도에서 구조적으로 유사한 도시 내 다른 지역의 지형들을 찾아주는 일종의 위성 이미지 검색엔진이다. 현재까지 뉴욕, 샌프란시스코, 피츠버그, 디트로이트, 마이애미, 오스틴 그리고 베를린까지 총 7개의 도시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는 일반인에게 인간이 만들어 놓은 도시의 흔적들을 인공지능의 시각을 통해 새롭게 보여주고 잘 드러나지 않던 특정 패턴에 관심을 갖게 한다. 뿐만 아니라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더해 현재 급속히 상업화 및 군사화하는 인공지능 기술에 대한 대안으로, 인도주의 단체, 사회운동가, 시민 연구자, 저널리스트 등이 지도상에서 인간적 · 사회적 · 과학적 · 문화적 의미를 갖는 유사 패턴을 빠르게 찾을 수 있도록 오픈 소스로 제공한다.

〈테라패턴〉이 지도가 예술이 되는 작품이었다면, 예술작품을 재료로 새로운 가상 지도를 만들어내는 작업들도 있다. 시릴 디안(Cyril Diagne)의 〈티-스니 맵(T-SNE MAP)〉은 수천 점이 넘는 예술작품을 티-스니 알고리듬(t-SNE algorithm)을 활용해 다른 메타 정보와 상관없이 시각적 유사성에 따라서만 분류하고 비슷한 이미지들이 가까이 있도록 배치한다. 관객들은 이 새롭게 생성된 무리 안에서 다른 시각으로 예술작품들을 감상하며 기존에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를 찾기도 한다. 마리오 클링에만(Mario Klingemann)의 〈엑스 디그리오브 세퍼레이션(X Degree of Separation)〉은 관객이 두 점의 작품을 선택하면 두 작품 사이를 징검다리처럼 단계별로 다른 작품과 이어가며 한 작품에서 다른 작품에 이르는 관계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렇게 이어진 관계들 속에서 예상치 못한 ‘뜻밖의 재미(serendipity)’를 발견하기도 한다.

한편, 머신러닝 기술을 이용해 현재의 인공지능의 한계에 대해 질문하는 작품들도 있다. 신승백, 김용훈의 〈동물 분류기(Animal Classifier)〉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The Analytical Language of John Wilkins)’에 기술된 독특한 동물 분류법을 이용하여 머신러닝에서의 분류의 모호함에 대해 말한다. 어떠한 기준점도 찾을 수 없는 총 14가지로 동물을 구분한다. 각각의 모호한 분류 항목에 맞추어 작가들이 다시 한 번 임의로 선택해서 분류한 초기 이미지 데이터를 바탕으로 기계가 학습하고 찾아낸 이미지들이 14개의 모니터에 나타난다. 인공지능 분야 중 비교적 정확도가 높다는 이미지 영역을 다루고 있지만 최초의 자의적 분류법에 작가적 임의성이 더해져 모호한 결론에 이른다. 분류의 문제와 더불어 인간의 개입에 의한 데이터의 왜곡성과 편향성에 대한 환기이기도 하다.

양민하의 〈해체된 사유(思惟)와 나열된 언어(The Listed Words and the Fragmented Meanings)〉는 인공지능 분야 중 가장 불완전하다고 하는 언어 학습(language learning)의 문제를 다룬다. 장단기억 순환신경망(LSTM RNN: Long Short-Term Memory Recurrent Neural Network)을 사용하여 기계가 자아를 지니면 어떤 행동을 할지 탐구하는 철학자와 과학자들의 텍스트를 학습시킨 후 ‘사유의 언어’를 생성해내는 작업이다. 브루스 매즐리시(Bruce Mazlish),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 레브 마노비치(Lev Manovich) 등이 저술한 총 9권의 책에서 약 35만 문장을 학습한 인공지능이 생성해낸 언어는, 문장으로서의 형식은 갖추었으나 의미적으로는 해체되어 있다. 저자들의 각기 다른 글쓰기 방식과 아직 충분하지 않은 데이터 때문일 것이라 짐작해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인공지능 중에서도 최신 상급 신경망 중 하나인 장단기억 순환신경망을 쓰는 이 작업을 위해 작가는 기계가 이해할 수 있도록 문서를 정렬하는 매우 단순한 노동에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고 한다.

이처럼 머신러닝을 기반으로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려는 시도는 활발하다. 하지만, 이 과정에 아직까지는 인간의 초기 데이터 입력, 분류, 감독, 평가 등의 도움 또는 개입이 필요한 것 또한 현실이다. 어쩌면 인공지능 예술의 존속 가능성은 인간의 도움 또는 개입이 얼마나 진정하고 창의적이냐에 달려있지 않을까? 여기에 예시된 작품 대부분을 소개한 아트센터 나비의 전시 제목이 〈아직도 인간이 필요한 이유: AI와 휴머니티〉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만약 현재 인공지능 예술의 한계 원인이 인공지능이 학습할 양질의 관련 데이터 부족 혹은 이제 막 빛을 보기 시작한 인공지능이 예술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숙련되기 위한 절대 시간 부족에 있다면 근미래에 예술이 더 이상 인간의 전유물이 아닐지도 모른다. 실제로 〈티-스니 맵〉과 〈엑스 디그리오브 세퍼레이션〉 모두 구글의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제작된 작품으로, 구글은 현재 전 세계 문화 기관과 협력 관계를 맺으며 방대한 양질의 예술 관련 데이터를 축적 중이며, 이를 바탕으로 예술가들과 구글 엔지니어들이 함께 인공지능 예술의 가능성에 대한 실험을 진행 중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알파고처럼 한 가지 특별한 분야가 아닌 인간처럼 종합적이고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한 강인공지능(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의 완성을 위해 지금의 기술적 한계를 극복할 새로운 돌파구를 예술가의 특별한 상상력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예술가의 창의력은 도전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시대적 필요에 의해 그 어느 때보다 주목 받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만약 인공지능 예술에 도전해보고 싶다면 ‘예술가들을 위한 머신러닝(Machine Learning for Artists)’이라는 사이트를 추천한다. ●

 

REGIONAL NEWS

광주

미시적 일상으로의 초대
〈The Room; 사색의 공유〉 1.20~3.1 롯데갤러리

농익은 기교와 필력으로 한국화의 현대적 해석을 시도하는 두 여성 작가의 전시가 한창이다. 전시는 개인의 감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심리적 공간으로 ‘방(Room)’을 설정하고 이를 맘껏 엿볼 수 있도록 펼쳐놓았다. 응집된 내면의 세계를 현실 속 이미지들로 조합하거나 섬세한 감성과 관찰력으로 자연스러운 일상의 모습을 포착한 작품으로 이루어졌다. 권인경은 동양화의 부감법을 활용하거나 수묵화 표현기법을 적절히 차용하여 독특한 구도의 화면을 구성했다. 기억된 이미지의 파편인 고서를 콜라주한 화면 중심부를 향해 켜켜이 포개어 자신만의 내면의 요새(fortress)를 견고하게 구축하였다. 임남진은 사적인 공간에서 반복되는 일상적 보편성에 주목했다. 침실을 점령한 널브러진 술병과 빨래건조대, 텅 빈 식탁에 홀로 앉아 조촐한 식사를 하는 어느 중년 남성의 뒷모습 등 애처로운 도시인의 자화상을 화면에 담았다. 작품을 보며 괜스레 부끄러워진 이유는 일주일째 방치된 내 방 침실과 식탁에서 혼밥을 즐기는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이부용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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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제주의 과거와 현재의 교차지점에 대한 탐색
〈라이브쇼 – 개○예정 편〉 2016.12.30~2.24 제주시 관덕로 14

제주_옥인콜렉티브 워크숍

옥인콜렉티브〈제주 개더링 – 제주와 떡국〉프로그램 현장

제주에서는 지역 밀착형 리서치와 커뮤니티 아트를 기반으로 제주 원도심을 재탐색하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제주종합문화예술센터(가칭) 개관 사전 팝업 프로젝트이기도 한 〈라이브쇼 – 개○예정 편〉은 제주 원도심의 장소성과 역사성, 그리고 지역 주민들의 삶을 연결 짓는 과정에서 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이번 프로젝트에는 권혜원, 박금옥, 세시간 여행사(윤세라, 이예지), 옥인콜렉티브(김화용, 이정민, 진시우+ 객원 아티스트 박주애), 이원호, 조윤득, 진나래, 최정수 등 총 8팀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제주종합문화예술센터가 제주대학병원 건물을 개조해 사용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이전의 흔적들을 기록하거나 성곽길을 답사하면서 현황을 리서치하고 원도심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마련하였다. 이외에도 리서치, 워크숍, 좌담회, 상영회, 퍼포먼스 등을 통해 제주 원도심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지층을 지역 사회와 함께 탐색한다. 또한 원도심 내에 유휴공간(제주시 관덕로 14)을 커뮤니티 룸으로 개방해 언제든 지역 주민들이 프로젝트를 참관하거나 참여할 수 있게 만들었다. 결과물뿐 아니라 과정도 함께 공유하는 형태로 같은 공간에서 2월 17일부터 24일까지 전시될 예정이다.
예술가와 지역 주민이 제주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지점을 함께 탐색한다는 점에서 이번 프로젝트가 더욱 의미 있으며 개관을 앞둔 센터의 방향성과 역할을 알리는 예고편이기도 하다. 원도심 내 문화예술 거점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센터의 역할을 기대해 본다. 이승미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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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창 앞에 낭만이 가득하다
〈낭만창전(浪漫窓前)〉 1.9~2.25 경북대학교미술관

대구_.STUDIO1750

경북대학교미술관은 2017년 첫 전시로 〈낭만창전(浪漫窓前)〉을 개최한다. ‘창 앞에 낭만이 가득하다’는 의미의 조어(造語)를 제목으로 내세운 이 전시는 자연을 즐기며 자연의 이치로 만물을 만들어 기른다는 ‘화육(化育)’을 주제로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낭만적 태도 또는 분위기를 작품으로써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16명(팀)의 작가는 회화, 조각, 설치, 영상 등 32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권기수는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의 뒤에 행한다”는 공자의 ‘회사후소(繪事後素)’에서 영감을 받아 기존 작품을 지우개로 지우거나 낙서하는 과정을 통해 내면의 본질을 담아냈다. 신성환은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는 뜻의 ‘천지현황(天地玄黃)’을 머리는 하늘에 두고 육체는 땅(현실)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의 실존으로 해석하여 삶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작품에 담는다. 무나씨의 4연작은 사과 씨앗이 싹을 틔우고 사과나무가 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씨앗에 담긴 우주의 섭리와 자연의 순환을 말한다. 박방영은 ‘꽃의 기운이 천지에 가득하다(화기천지(花氣天地))’는 작품 제목처럼 자연의 강한 생명력과 에너지를 표현한다. 전시를 기획한 이남미 큐레이터는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이 동양의 자연사상을 바탕으로 우주와 자연을 담아내는가 하면 낭만에 젖어 음유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익숙하고 일상적인 소재 ‘자연’이 낭만이라는 감성의 옷을 입고 관람객의 마음을 감싸 안는다. 이민정 미술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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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아름다운 순간에 대한 어떤 통찰
〈아름다운 순간〉 2016.12.13~2.19 대전시립미술관

권여현 〈원숭이소나무〉캔버스에 유채 181×227cm 2010

권여현 〈원숭이소나무〉캔버스에 유채 181×227cm 2010

아름답다고 느끼는 ‘순간’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아름다움 자체는 개념화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순간’을 포착하는 시선 끝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은 공감할 수 있다.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아름다운 순간〉은 양민하, 김세일, 권여현, 윤종석, 백한승, 복진오, 이민혁, 차이밍량 등 총 8인의 작업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촘촘한 시스템 망 사이로 빠져나오는 아름다움의 ‘순간’을 통찰한다. 전시는 3가지 섹션으로 구성된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의 이상은 무엇인가’ ‘아름다움은 구원에 이를 수 있는가’. 예컨대 김세일의 조각 〈하늘〉에서 우리는 철선 구조물 사이에 갇힌 새를 통해 무한히 펼쳐져야 할 하늘을 연상하며 ‘아름다움의 실체적 조건’으로서의 공간을 앙망하게 된다. 윤종석의 얼굴작업은 주사기로 쏘아 두꺼운 층을 이루는 인물-풍경이다. 이는 순간의 기억이 켜켜이 쌓인 풍경으로, 기억을 통해 ‘아름다움의 이상’에 접근함을 이야기한다. 차이밍량의 영상작업 〈Beautiful 2012, Walker〉는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아름다움을 고찰한다. 홍콩 도심의 빠른 리듬 사이로 먹을거리가 들어 있는 봉지를 든 채 천천히 걷는 승려의 걸음을 대비시키는 영상에서 속도의 간극을, 그리고 삶의 덧없음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어떤 아름다움 혹은 비애미가 느껴진다.
유현주 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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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막연한 나누기(÷)
〈2016 안녕, 예술가전 [+,-](더하기, 빼기)〉 오픈스페이스 배 2016.12.16~1.31

사진 오른쪽 이한솔 〈~를 위한 잔상〉혼합재료 가변설치 2016

사진 오른쪽 이한솔 〈~를 위한 잔상〉혼합재료 가변설치 2016

어떤 현상에 대한 반성 혹은 비평의 편에 서서 이뤄지는 모임은 언제나 흥미로워 보인다. 2015년 첫 시작을 알린 〈안녕, 예술가〉는 부산에서 활동하는 ‘젊은 작가’들이 모여 오픈스페이스 배의 지원을 받아 작업하는 모임이다. 비슷한 주제로 고민하는 작가들이 서로를 동료로서, 예술가로서 지원하고 지역 미술계가 안고 있는 공공의 문제를 가시화해 비평의 기능을 하고자 하는 프로젝트형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간 총 2번의 〈돗자리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이는 부산시립미술관 잔디밭이나 부산비엔날레 전시장 앞 공터에서 일시적인 담론 공간을 생성해 각각의 제도권 미술이 지닌 문제를 직접 언술하는 퍼포먼스였다.
〈2016 안녕, 예술가전 [+,-](더하기, 빼기)〉는 지난 2016년 한 해의 행적을 소개하고 〈안녕, 예술가〉라는 청년 작가 모임이 각 멤버에게 미친 영향을 작업 형태로 드러내는 전시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술에 대한 새로운 사유는 대체로 ‘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당대를 지배하는 주류의 사유를 전복하고, 또 다른 사유에 다시 전복당하는 흐름 자체만으로 결과 여부를 떠나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지난
3년 여 동안 한국에서 소위 ‘청년’ 예술가가 주축이 되어 내놓은 발언들은 이와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매체나 미적 사유에 대한 새로운 언어를 가진, 급진적인 정치 감성을 가진 존재로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모호한 비판이라던가 물리적 생존에 대한 연민에만 치우쳐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게다가 그 막연함이 작업의 주제가 되었을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재사유할 수 있을까?
박수지 독립큐레이터, 《비아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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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제주 어멍, 바당의 딸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등재기념 ? 〈제주해녀문화 특별전〉 2016.12.6~3.31

전주_제주해녀문화전 전시장

인류의 무형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제주해녀문화’를 종합적으로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전시가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열리고 있다. 제주해녀의 역사, 제주해녀의 물옷과 물질도구, 제주 해녀의 뭍의 일과 살림, 신앙, 예술로 화한 해녀의 삶, 해녀공동체, 출가해녀와 해녀노래 등의 이야기가 100여 점에 달하는 유물과 미술작품, 다양한 영상과 체험품 등으로 표현됐다. 그중에는 제주도 해녀박물관 소장품 80여 점이 함께 전시되어 해녀의 물질을 위한 의복과 도구를 비롯해 해녀들의 삶 전반을 육지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기회가 되었다.
이번 특별전은 제주 해녀를 소재로 활동한 대표적 작가 장리석의 작품과 수년에 걸쳐 제주 해녀와 호흡하며 그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아낸 김흥구·김형선·김다운의 사진도 전시되어 현대미술의 어법으로 표현된 제주해녀문화를 감상할 수 있다. 이밖에 관객 참여형 영상작업 〈디지털 해녀바당〉, 어린이 불턱 체험공간, 도서관이 운영되며 전시 기간에는 제주해녀를 소재로 한 영화가 상영된다.
양승수 소리문화의전당 문화부장

CURATOR'S VOICE 룰즈 RULES

2016.12.22~1.26 원앤제이갤러리
최정윤 | 독립 큐레이터

대학 시절 처음 미술을 접한 것은 모작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부터였다. 모네, 드가, 고흐, 피카소 등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컬러로 출력해 유화물감을 사용해 따라 그리고, 학기가 끝날 때 즈음이면 전시회를 열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밤의 사람들〉, 오치균의 〈풍경〉 같은 그림을 좋아했다. 조금 덜 흔한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 화집을 뒤적이고, 미술 관련 교양 수업을 듣다가 본격적으로 미술사를 공부하게 됐고, 지금에 이르렀다. 동시대미술 현장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회화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작가들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나 개념에 맞는 형식, 매체를 작품에 맞추어 선택하였고, 형식적 한계를 먼저 받아들이고 내용을 구상하는 경우는 줄어드는 추세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회화작품은 오늘날에도 만들어지고 있고,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추상표현주의, 단색화, 민중미술, 신구상회화, 극사실주의 등 다양한 회화적 경향이 한국 현대회화사의 시대별 주요 쟁점으로 언급되어 왔다. 하지만 동시대 회화 작가들은 다양한 주제를 각기 다른 기법을 활용해 그리고 있다. 오늘날 기획자, 평론가, 작가 할 것 없이 미술계에 종사하는 모든이가 직면한 가장 큰 어려움은 아마도 ‘어떤 미술을 할 것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방향 설정이 온전히 개인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공통적으로 합의된 의제가 없는 상황에서 작가들의 작업은 지극히 개별적인 성취이다. 그럼에도 특정 시대의 삶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작품에서 느슨하게나마 어떤 경향성을 읽어낼 가능성은 있다고 보았다. ‘요즘 젊은 세대 회화 작가들의 작품에는 뭔가 다른 분위기가 있다’는 말을 수차례 들었다.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는 것은 기획자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몇몇 작가를 만나면서 그들이 가시적인 세계를 그대로 재현해내는 것에 큰 거부감을 보이고 있음을 알게 됐다. 텔레비전, 광고, 영화 등 이미지 포화의 시대에 자신이 만들어낸 작품/이미지가 유일성을 갖기를 원하는 듯 보였다. 회화가 가져야 할 고유하고 독자적 특성을 평면성이라 여긴 그린버그의 형식주의적 태도와 일부 통하는 지점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색, 선, 면 등 평면회화를 구성하는 요소들로 화면을 구성하고 있었다. 재현적 요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형태의 형식 실험이었다. 구체적 대상의 재현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이나 색의 활용방식이 더 대담했다. 전시장에서, 대학의 졸업전시에서 지인의 소개로 이 같은 작품을 제작하고 있는 작가를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작품을 구성하는 내적 요소 그 자체를 활용한 실험이라는 측면에서 전시의 키워드를 ‘규칙 (rules)’으로 정했다. 룰즈(rules)는 참여 작가 모두가 자신이 온전히 ‘통치(rules)’할 수 있는 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규칙(rules)을 고수해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붙였다. 보통 규칙은 여러 사람이 같이 지키기로 작정한 법칙이자 질서를 의미하지만, 전시에서 지시하는 각 작가의 ‘규칙’은 온전히 각 개인에게만 해당되며, 그 규칙을 명확하게 남에게 설명하거나 공표할 이유조차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규칙이라는 단어의 원래 뜻과는 차이가 있다. 작가들이 제시하는 자못 객관적이고 명확해 보이는 규칙마저 실상은 그 목적이 지극히 불투명하고 자의적이다. 참여 작가 7인의 작업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면, 첫째로 감정이나 경험을 시각화하는 경우(김미영, 최수인, 에이메이 카네야마), 둘째로 선, 색, 형태, 재료 등 회화 구성 요소의 실험에 집중하는 경우(이환희, 고근호, 성시경),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화 혹은 회화적 재료에 관한 회화(이상훈)를 제작하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전시의 의도를 읽으려면 언어로 설명하는 것보다도 출품 작품을 직접 대면하는 물리적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빛, 촉각적 느낌, 분위기와 같은 감각적 체험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2017년, 이 시점에 작가들은 왜 이런 형식 실험을 하는 것일까? 정치사회적 이슈나 특정 내러티브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형태이기 때문에 외부세계와 단절된 세상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그림들을 말이다. 사회적 맥락과 미술의 맥락에서 그 이유를 각각 생각해볼 수 있다. 어쩌면 작가들이 만드는 것은 개인 차원에서 즉각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실현 가능한 형태의 소규모 유토피아였을지도 모른다. 몇몇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 둔 하나의 게임 속에서 유희적 태도로 온전한 창작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미술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형식 게임 말이다. 그곳에서 이들은 개인에게 주어진 자유와 해방감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현실에서 작가들의 삶은 녹록지 않다. 그래서 오히려 작품이라는, 스스로가 만든 가상의 공간 안에서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자신이 만든 규칙대로 그 세계를 통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봤다.
미술의 맥락에서는 조금 다르게 접근 가능하다. 패션이나 음악 분야에서도 트렌드가 돌고 도는 것처럼, 미술, 회화에서도 마찬가지로 구상적이고 재현적인 회화, 또는 추상적이고 형식 실험이 중요한 회화가 다시 등장하고 또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20세기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진보의 역사가 하나의 선처럼 한쪽 방향으로 이어져나갔다면, 이제는 다양한 경향이 한데 섞여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제는 특정 경향에 관한 선호가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는, 온전히 취향의 문제가 됐다.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하는 여러 자산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 역시 자유다. 기존의 다양한 스타일을 재조합함으로써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다양한 경향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상황이라고 보았다.
‘전시기획’을 왜 하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기획자마다 각기 다르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시의적으로 이야기해봄직한 의제를 설정하고, 해당 주제에 관해 고민하는, 잘 알려져 있지 않더라도 흥미로운 작업을 하는 작가를 소개하는 것을 중히 여겼다. 또한 지금, 여기에 살아가는 젊은 작가들과 ‘우리’의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나가고자 했다. 무엇이든 미술이 될 수 있는 오늘날, 〈룰즈〉를 통해 가장 전통적인 방식으로 미술을 살핀다.
위 김미영 〈Between Jungles〉 캔버스에 유채 210×180cm 2016

CRITIC 윤향란 線의 詩學

2016.10.4∼12.3 환기미술관
박춘호 |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문학박사

화가 윤향란’이 6년 만에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그녀가 금속 파이프를 불로 달구고 망치질하여 제작한 조각 작품을 전시하였다. 평면에서 입체로의 전환이다. 전시장 한가득 그녀의 손길에 의해 생명을 얻어 살아 꿈틀거리는 금속 파이프들이 넘쳐난다. 장관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일탈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변신이라고 해야 할까?
윤향란의  〈선의 시학?〉?은 화가가 평면작품을 실체로서 현현하고자 하는 충동을 발산한 전시라 할 수 있겠다. 6년 전 그녀는 화가로서 파리에서 오래 거주했음에도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드로잉으로 표현한 작품을 선보였다. 명암을 배제하고 선만으로 그린 추상화였다. 당시 전시한 드로잉 작품 중 일부는 이번에 전시한 드로잉 작품과 유사하다. 윤향란에게 드로잉은 여느 작가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실제 작품을 위한 검토 과정의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작업을 시작하기 전 그녀는 감각의 촉을 세우기 위해 마치 운동선수가 워밍업을 하듯이 드로잉을 한다. 이렇게 쌓인 드로잉 중에 선별한 것을 그녀는 캔버스에 조합해 붙이고 다시 떼어내기를 반복하며 드로잉 작품을 완성한다. 한편 그녀의 목탄 드로잉을 보노라면 재료는 다르지만 서예에서 추구하는 필묵의 기운생동과 유사함이 느껴진다. 그녀의 드로잉은 그야말로 오랜 습작기를 거쳐야만 드러날 수 있는 선의 맛이 돋보인다.
이번에 전시한 철조 작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전시장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드로잉 작품들과 똑 같은 방법으로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그녀는 각각의 성형된 파이프들을 여느 조각가들과 달리 용접으로 완성하지 않았다. 먼저 그녀는 평면에 선을 긋는 것과 같이 파이프로 각각의 선을 만든다.
그 후 캔버스에 조합하듯이 그녀는 각각의 선들을 철사로 묶어 조립하여 형태를 만들어 나간다. 입체이기에 작업 중 여러 방향에서 살펴보며 묶고 풀기를 반복해 작품을 완성하였다. 그러니 현장 조립이자 가변설치라 할 수 있겠다.
한마디로 윤향란에게 평면작품과 입체작품은 전혀 별개의 작업이 아니다. 차이점이라고는 이차원에서 삼차원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불로 달구고 망치질하고 구부려 만든 금속 파이프 선들의 느낌이 드로잉 작품에 드러난 선의 느낌과 너무나 흡사하다. 금속 파이프를 이 정도로 다룬 것을 보면 지난 3년간 화가인 그녀가 이 전시를 위해 얼마나 많이 노력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화가가 느끼기 힘든 노동의 기쁨을 그녀는 이 작업을 하면서 참으로 만끽하고 있는 거 같다.
이번 전시가 앞으로 ‘화가 윤향란’의 작업에 새로운 돌파구가 되리라고 기대한다. ‘화가’ ‘조각가의 구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가 윤향란’ 작품에서의 진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금도 그녀가 자신의 작업을 낯설게 바라보며 성찰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오랜 시간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작업하는 그녀를 보며 ‘혁신은 항상 중심부와 일정한 거리를 둔 곳에서 시작될 가능성이 크다’는 말에 귀 기울이게 된다. 그래서 그녀의 다음 전시를 더욱 기대하게 된다.

위 윤향란 〈선의 시학〉 전시광경

CRITIC 이호진 공(空)의 매혹 Emptiness

1.11~2.24 갤러리 조선
민은주 | 미술비평

이호진의 회화는 일반적으로 추상표현주의의 범주에서 이야기되어 왔다. 초기 칸딘스키의 유동적인 작품을 설명하면서 사용되었던 이 단어는, 형식적으로는 추상적이나 내용적으로는 표현주의적이라는 의미에서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라 칭하게 되었는데, 기하학적이거나 유기적인 형태의 형상이 표현되는 전통추상회화와는 달리, 화면의 원근감을 깨뜨리고 형상과 배경의 구분을 없애며 작가와 화면을 동일화 시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도구로서의 작가가 매체를 화면에 옮기는 행위와 과정이 작품의 일부로 나타나면서 작가의 ‘즉흥성’과 표현의 ‘우연성’은 현대 추상표현주의 회화를 설명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호진의 작업이 최종 추상표현적인 회화로 나타나게 된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작가가 존재하는 공간’에 대한 불안함이 지표로서 표현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초기 그의 작품은 그가 생활하는 일상적 공간과 경험에 대한 상징적인 기호를 바탕으로 전개가 되었는데, 시간을 거치면서 주관적 표현이 배제되며 공공화된 공간으로 보여져 왔음을 알 수가 있다. 이번 전시, 〈공(空)의 매혹〉은 작가의 주관적인 공간이 객관적인 공간으로, 그리고 부재하는 공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그 공간에 대한 ‘존재성’의 불안감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가 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작가는 프랑스의 철할자 장 그르니에 (?jean Grenier)의 소설에서 지칭하는 ‘부재’에 대한 사유를 지침으로 “자신이 보는 풍경 안에 실재의 자신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반복되는 타자로서의 삶을 받아들이며 존재가 없는 풍경을 만들어 간다”고 하였다. 이전의 작업들이 화면을 채워나가며 ‘존재성’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불안함을 극복했다면, 이번 작업에서는 채워진 화면을 지워 나가며 ‘부재성’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삶이 이루어지는 시공간에 대한 불안감을 극복하고, 즉흥적으로 드러나는 회화적 표현을 통해 궁극적으로 ‘초월하는 공간’을 지향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은 시공간의 흐름 속에서 서술적 의미와 본질을 찾아 내려는 많은 작가들의 고민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는데, 이호진은 그의 추상적인 회화 속에서 존재하나 그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정의 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스스로 인식하면서 회화를 통한 미적 체험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작가의 이전 작업들이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캔버스를 채워나가는 작업이었다면,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작품들은 채워진 화면을 비워나가는 과정을 보여주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비어있음’을 표현하기 위한 더 많은 작업이 필요했다는 점에서 ‘존재와 부재’가, 혹은 ‘채움과 비움’이 한 공간 안에서 이루어 질 수 밖에 없다는 예술적 딜레마를 안게 되었다. 순간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도구로서의 작가의 즉흥적 행위가 만들어 내는, 존재와 부재의 오묘한 경계에서 이호진의 회화는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 볼 만 하다. 이호진의 전시 〈공의 매혹〉은 작가의 즉흥적 표현이 발현되는 ‘순간’과 그 표현의 흔적으로서의 ‘회화’, 그리고 그들이 만나는 전시의 ‘공간’을 하나의 커다란 행위적인 예술로서 이해할 때, 진정한 ‘없음’의 미학을 경험해 볼 수 있겠다.

위 이호진 〈Vague memories〉 캔버스에 유채 112×162cm 2016

CRITIC 민재영 다시, 드로잉

1.3~15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이성휘 | 하이트컬렉션 큐레이터

지난 1월초 사루비아다방에서 열린 민재영의 개인전은 그간 그의 필치로 각인되어 온 촘촘한 가로선을 배제하고 느슨한 드로잉과 벽화작업으로 색다른 시도를 보여준 전시였다. 민재영은 지난 십 몇 년 동안 도시의 일상에서 접하는 상황들 중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장면들을 포착하여 화폭 위에 촘촘한 가로선을 빼곡히 채운 수묵채색화로 그려왔는데, 사루비아 전시에서는 기존의 촘촘하고 치밀한 붓질이 아닌 힘을 뺀 드로잉과 벽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감 자국이 인상적인 벽화 작업으로 변화를 꾀한 것이다. 이는 민재영이 사루비아다방의 SO.S(sarubia outreach & support)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진행한 결과이기도 하다. 사루비아 다방은 2015년부터 작가들을 중장기적으로 지원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SO.S를 시작했고, 이중 민재영은 개인전 5회 이상의 경력을 가진 40~60세 작가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사루비아는  SO.S를 통해서 작가의 창작의 조력자이자 작가 고유의 언어를 복원시켜주는 매개자 역할을 하고, 일회성의 전시를 치러내는 것보다는 창작의 결과물 이면에 감춰진 작가의 노력과 시간을 들여다보려 한다고 밝히고 있다. 민재영의 말에 의하면 큐레이터들은 지난 1년 반 동안 작가들의 작업실을 수시로 방문하면서 고민을 듣고 새로운 가능성을 같이 모색해왔다고 한다. 작가가 가진 스펙트럼이 더 넓게 확장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기존에 작가가 확립한 방식을 답습하기보다는 외려 깨버리는 쪽으로 유도했으며, 그들의 설득이 작가로 하여금 드로잉에 대한 실험을 독려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프로그램에서 민재영은 수묵채색화가 아닌 드로잉에 매진했을까? 작가와 큐레이터는 변화 추구라는 표현을 썼는데, 나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말이 생각났다. 호크니는 한때 수채화에 매진했는데, 회화에는 손, 눈, 마음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한 회화에 대한 중국인들의 태도에 영향을 받아서였다고 말했다. 호크니에게 이 세 가지가 고루 중요했던 것은 잘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이는 것에서 한층 더 자유로워지기를 원했기 때문이리라. 즉 회화는 시각적이면서 신체적이고, 심리적인 것이다. 그동안 민재영이 그려온 작품들은 거의 사진을 소스로 한다. 그가 작업으로 다뤄온 소재가 현대인의 삶, 그 속의 피로감 같은 것인데, 이를 사진으로 먼저 촬영한 후 수묵채색화로 다시 옮기는 식으로 진행했다. 그는 자주 도시의 군중과 트래픽 잼에 가까운 도로 상황을 그리곤 했는데, 이러한 장면들을 선택한 것은 도시적 삶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에게서 공감을 끌어내고 보편성을 획득하고자 한 방편이었다. 사실 그는 동양화를 전공할 당시부터 전통적인 재료로 오히려 현대적 장면을 그리는 것에 흥미를 느꼈고, 동양화의 선묘가 일루전을 표현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를 극복할 방법으로 가로선의 중첩을 시도했다고 했다. 동양화의 먹 자체에는 매료되었으나 형식적으로는 인상파 식의 명암 표현을 추구한 것이다. 특히 그의 가로선은 TV 모니터의 주사선이 중첩된 듯한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RGB디지털 화면을 연상시킨다. 초창기부터 그가 사진을 활용한 점에서 그에게 사진이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보고 느끼는 대상들을 포착하는 데 뛰어난 도구였고, 동양화를 통해서도 시각적 일루전을 추구하는 시도를 가능케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사진의 시선에 익숙하고, 사진이 3차원 공간을 2차원 평면으로 포착해내는 구도에도 익숙하다. 이러한 사진을 회화로 가져올 때, 인상파부터 게르하르트 리히터까지 이미 수많은 시도를 보아온 우리들은 더 새로운 것을 기대하게 된다. 누군가는 회화가 아예 사진을 의식하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 근래 민재영은 회화에서 보편과 공감을 추구하던 것에서 개별성으로의 전환을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그 시작을 나는 이번 사루비아 전시 출품작 중 하나인 목탄 드로잉에서 발견한다. 물에서 부표를 잡기 위해 손을 뻗는 이 장면은 오랫동안 작가의 머릿속에 있던 이미지다. 이번 전시에는 이 작품 외에 모든 출품작이 사진을 소스로 한 드로잉이라는 점에서 저 부표에 손이 닿을 때까지 안간힘을 써야 하는 작가의 두려움이 어느 정도 감지된다. 작가는 사석에서 인생이 안 바뀌는데 그림이 어떻게 바뀌냐는 농을 던지기도 했지만, 이미 스스로 무료함을 느껴 SO.S를 친 게 아닌가. 저 부표를 향해 헤엄쳐 나아가는 것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