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ARTIST] 박재철

 
동양화가 박재철의 그림에 담긴 시선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해서 사회로 확장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소소한 일상에서 길어 올린 박재철의 사유는 특유의 회화적 형식을 거쳐 독보적인 형상회화로 완성된다. 박재철은 광주은행에서 제정한 〈제2회 광주화루〉에서 대상작가로 선정됐다. 이를 계기로 작가 박재철의 과거 작품세계와 현재 모습을 살펴본다. 4월 11일부터 5월 7일까지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문화창조원 복합6관)에서 열리는 〈제2회 광주화루〉10인의 작가전에서 박재철의 작품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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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철의 서사회화

김최은영 | 미학, 경희대 겸임교수

박재철 〈비천한 길Ⅰ, Ⅱ〉 한지에 먹, 채색 162×130cm(각)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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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무엇이냐?’ 물었다. 원론을 묻는 것 외에 ‘당신, 동화작가이기도 하지요?’ 라는 속내가 포함된 질문이다.

박재철의 시각예술작품과 동화책 양쪽 모두를 좋아하는 필자에게 작가론을 쓰는 것은 내심 부담스러운 일이다. ‘좋아한다.’라는 개인적 취향 때문에 객관성을 잃으면 어쩌나 하는 점도 적지 않은 고민이지만, 더욱 큰 문제는 감정을 무장 해제시키는 박재철의 글쓰기를 익히 알고 있다는 데 있다. 시각예술을 문자언어와 음성언어로 옮기면서 미학적 살을 붙이는 것이 필자의 직업이다. 간혹 이론으로 중무장한 작가를 만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리 당혹스러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작정하지 않은 진솔함으로, 허술한 말솜씨로 전달되는 진심을 목격할 때 곤혹스러운 글쓰기가 되리라 직감하게 된다.

요즘 미술계에 흔한 단어인 ‘일상’이란 낱말 없이 그려진 박재철의 1998년 작품 〈박이야〉, 〈마셔〉, 〈난 나비야〉를 다시 본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박재철 개인전, 서남미술전시관, 1999) 회화적 장식 없이 그려진 수묵의 손 위에 작은 박이 심어진 화분이 놓였다. 화면 위에 흐릿하게 글을 적었다. ‘박이야’, ‘고마워’. 뻗은 두 손 위엔 소박한 박 바가지에 수묵과 대조적으로 파란색 물이 시원하게 담겼다. 화면 귀퉁이, 말풍선에 작은 글이 적혔다. ‘마셔’. 활짝 핀 박꽃의 수분을 돕는 붓질을 하는 작가는 ‘난 나비야’라는 상상과 현실을 화면에 동시에 담았다. 동양화에 대한 새로운 담론과 현대적 계승으로 미술계에 온갖 실험이 득실거릴 때 박재철은 화면에 달랑 손 하나, 화분 하나, 그야말로 소소한 일상을 담았다. 이데올로기도 없고 시대적 담론도 없다. 화자(話者)의 시선은 온전히 일상 안에 있었고, 그 일상의 작은 것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기존에 학습한 필법과 각종 규칙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박재철이다. 방법을 버린 후 남는 감성에 대해 깊이 고민한 작가는 서양철학과 미학, 사회학 등의 강좌를 돌다 가장 하찮은 행위의 하나인 그림을 소박하게 하기로 마음먹고 일상을 마주했다. 각각의 화면으로도 읽히는 이야기는 작품을 연이어 보면 서사구조가 더욱 도드라진다. 먹과 물(水墨)만으로 그려낸 박과 인물은 화려하고 윤기 나는 장식 없이도 감정이 살아 있고, 새싹인 박과 꽃을 피우는 박, 바가지가 된 모습까지 연속성을 담고 있지만 소박한 구성이 억지스럽지 않고 편안하다. 동아시아 미학 중 의경(意境)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직접적이면서도 간접적이고, 확정적이면서도 불확정적이며, 형상적이면서도 상상적이라는 데에 있다. 1 박재철의 작품은 특정한 형상의 직접성, 확정성, 감수성을 지니면서도, 상상의 유동성, 개방성을 지니고 있다. “사물의 의미를 빌려 살아가면서 겪는 삶의 의문을 얘기해보는 방식을 취한다.” – 박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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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철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책 《봄이의 동네 관찰일기》와 《팥이 영감과 우르르 산토끼》(길벗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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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철은 회화뿐 아니라 동화작가로서의 역할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풀어간다. 구전동화를 재해석한 〈팥이 영감과 우르르 토끼〉는 읽는 이에 따라 선악의 구조가 바뀔 수 있다. 나쁘고 좋은 것으로 양분된 흑백논리가 아닌 나쁜 것과 더 나쁜 것을 고르거나 입장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행복한 봉숭아〉는 관찰이란 단순히 어떤 대상을 보고 기록하는 일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을 꿰뚫는 연습을 하는 일로 풀어내준다. 생각하게 하는 글과 그림인 셈이다. 작가는 고백처럼 생계형(?) 동화작가라 말하지만 필자는 동화 역시 그림과 마찬가지로 박재철의 생각을 담아내는 하나의 채널로 보인다. 그림으로 표현한 문학은 그의 그림 속 서사와 많이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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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철 〈나비 물을 만나다〉 화선지에 먹, 채색 91×116cm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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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철의 그림 속 서사는 〈15년 만에 숨을 쉬는 남자〉와 〈울지 못하는 남자 1, 2〉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아물지 않은상처〉 박재철 개인전, 갤러리 H, 2016) 이제 그는 일상을 소재로 그리고 있지만 단순히 일상 자체가 주제인 작품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비교될 만한 작품은 〈울지 못하는 남자 1, 2〉와 첫 번째 개인전의 〈스위티를 맛있게 먹다〉이다. 공원의 벤치 위에 앉은 남성은 화면 구조에서 다분히 유사성을 갖는다. 젊은 그는 정면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스위티를 맛있게 먹다〉) 여백이라 불릴 만한 화면처리는 주변보다 인물 자체에 집중한 표현으로 읽힌다. 밝은 표정과 손과 옷의 꼼꼼한 붓질은 작가가 주목하여 공들인 대상이 그 자신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중년의 그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보고, 벌거벗은 몸은 허술하기만 하다.(〈울지 못하는 남자〉) 남자와 벤치 주변에는 공원용 꽃나무가 잘 정리되어 있고, 보도블록마저 장식으로 꼼꼼하게 채워졌다. 콜라주처럼 구성된 화면 곳곳에는 깨진 액자 속 결혼사진, 움켜쥔 천 원짜리 지폐 등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짐작 가능한 요소들이 산재한다. 이 요소들은 특정한 감정과 연상을 유도하며 줄거리를 엿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몇몇은 화면 전체의 분위기를 퍼뜨리고 성격을 만들어낸다. 다시 말하자면 공원의 벤치, 남성, 꽃나무 등의 형상은 그대로인데 작가의 마음에 따라 화면에서 전혀 다른 기능을 수행한다. 이러한 화면 요소는 대부분 함축적 의미가 포함된 환경과 줄거리, 세부 묘사, 표정, 눈빛, 손짓 등 언어를 갖추고 있다. 형상은 뜻에 따라 변하고 뜻은 감정의 발산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보는 동아시아 화론으로 읽어도 무방하겠다. 2 여기서 박재철 회화의 간단한 표현 방식을 아이처럼 그리기로 읽어내는 오류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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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철 〈울지 못하는 남자Ⅰ〉 화선지에 먹, 채색 130×162cm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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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철 〈15년 만에 숨을 쉬는 남자〉 화선지에 먹, 채색 91×116cm 2016

 

〈스위티를 맛있게 먹다〉의 청년에서 〈울지 못하는 남자〉가 되어버린 중년 작가의 시선은 개인에서 사회로, 개별에서 보편으로 확장된다. 특히 〈비천한 길〉 연작은 상징과 서사가 공존하는 새로운 국면의 채널을 동시에 보여주는 박재철의 신작들이다. 공공의 공원, 아파트 단지 내의 그곳은 여전하다. 이제 주인공은 울지 못하는 남자가 아닌, 공원을 장식하는 나무들과 환경들이다.
아파트 단지에 조경해놓은 나무는 가지와 뿌리가 절단되고 심어진다. 아마도 운반의 편리와 아름답게 보일 목적으로 다듬어졌을 것이다. 아이러니한 건 이렇게 상처 낸 나무를 다시 살아나게 하려고 천을 감고 쓰러지지 않게 버팀목을지지하고 영양제를 꽂아 놓는 일이다. 아이러니로 서있는 이런 나무에서 작가는 강요된 삶을 살을 살아온 자신을 보았다고 고백한다. 3 박재철은 이 연작에 등장하는 소재에 대한 해석도 서슴지 않는다. 의자는 쉬는 것, 지폐는 자본, 보도블록은 길 등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들을 잘리고, 꺾이고, 상처 입은 후의 모습으로 재현하면서 전혀 다른 감상과 생각을 제시한다. 일상이 모아지고 축적되어 형성되는 삶의 태도나 관념에 대해 서술한다. 사회적 약속과 규범들, 공공(혹은 가족)을 위한 개인의 희생 등 시각예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생각이 깊이로 인해 추상화된 사유의 작용들을 말이다.

 

박재철 〈이 나비는 무엇을 쫓는 걸까?〉 화선지에 먹, 채색 91×116cm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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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붓질은 작가가 긴 세월 숙련을 통해 얻은 동양화 필법을 버리기 위해 시작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복잡해진 화면은 서사적 구조로 풀어야 할 작가의 목소리다. 복잡해진 화면은 아주 많은 대상을 포함하기 때문에 이미 여러 겹과 여러 가지의 표상이 서로 짜여서 하나로 엮이게 된다. 대상들은 화면에 직접 병치되거나 대비되면서 시각적으로 공간성과 예술성을 부여하기도 하고, 다층적이고 다각적인 사색을 제공하기도 한다.

박재철의 이러한 서사공간이 회화이든 글이든 그만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창작자가 선택할 수 있는 우월한 경우의 수를 여러 개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박재철의 시각예술은 창작의 공간을 마련하고 동화라 불리는 그의 글들은 두 가지 이상의 장면을 연결해서 깊은 생각을 일으킨다. 시각적 공간과 깊은 생각은 사실 글과 그림 양쪽 모두에 해당하니 필자의 창작 폭은 박재철의 그것보다 작음에 틀림없다.

‘그림은 무엇이냐?’ 물었다. 필자의 우문에 박재철 작가는 현답을 준다. ‘나의 존재감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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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재 철

1968년 태어났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첫 개인전은 1999년 서남미술전시관에서 열었고, 두 번째 개인전은 2016년 갤러리 H에서 열었다. 쓰고 그린 어린이 책으로 《봄이의 동네 관찰 일기》, 《행복한 봉숭아》가 있고, 그린책으로 《통일의 싹이 자라는 숲》, 《연습학교》, 《옛날에 여우가 메추리를 잡았는데》 등이 있다. 현재 경기도 김포에서 작업하고있다.


1 푸전위안,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 의경》,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3. p.117.
2 形勢豈有窮相, 觸則無窮. 심종건, 《개주학화편芥舟學畵編》권1.
〈산수山水〉 중 〈용필用筆〉
3 박재철 작가노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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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REPORT] MICHIGAN & NEW YORK

 

Nabil Mousa

American Landscape: An Exploration of Art & Humanity


Trigger: Gender as a Tool and a Weapon


문화계를 강타한 성추문 사건의 본질은 불평등한 성의식과 그로인해 빚어진 권력의 남용이 아닐까? 성의식은 생물학적 의미에서 사회학적 의미로 일찌감치 바뀌었으나 그것이 전통적 가치관과 윤리관이 견고한 집합체인 사회에서 용인되기란 난망한 현실이다. 그래서 미술관이 먼저 움직였다. 게이아티스트 나빌 무사(Nabil Mousa)의 개인전(2017.11.17~4.8, 아랍아메리칸 국립미술관)과〈Trigger전〉(2017.9.27.~1.21, New Museum)은 성소수자 작가와 격렬한 젠더 논쟁의 지금을 보여준다. 다양성과 차이의 존중은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수 조건이다. 미술이 사회변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 두 전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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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빌 무사(Nabil Mousa) 〈미국의 지평(American Landscape) #22〉 캔버스에 유채 120×152.5cm Photo courtesy of Arab American National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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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미술의 메인 스트림에 들어선 L.G.B.T.Q. 작가들

서상숙 |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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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시작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는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 연쇄 고발운동인 “미 투(Me Too, 나에게도 일어났다)” 운동이 최근에는 성소수자도 동참, ‘그에게도 일어났다’는 뜻의 “힘 투 (Him Too)”로 확산되고 있다.

미국의 온라인 사전인 메리엄 웹스터는 지난해 가장 많이 검색된 ‘올해의 단어’가 “페미니즘”이라고 발표했다. 그 배경에 미투운동과 더불어 성소수자와 여성 그리고 이민자들의 인권 보장을 약속한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선전으로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대통령이 탄생할 것이라는 기대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무너진 데 대한 실망과 분노가 섞여 있다고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정부는 남성/백인/ 시스젠더(cisgender: 사회적 성과 생물학적 성이 일치하는 사람들) 우월주의가 확연히 드러나는 정책을 펴고 있다.

페미니즘이란 단어가 처음 쓰인 것은 19세기였다. 21세기에 들어선 이제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 생물학적 성이 아니라 사회적 성, 즉 “젠더(gender)”에 대한 이슈가 대두되었다. L.G.B.T.Q.(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Queer) 등 모든 젠더에 대한 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것이다.

페니미즘 논쟁이 한창이던 1970년대, 작가 주디 시카고는 여성의 생식기를 도자기로 형상화한 <디너 파티>를 발표해 성차별을 논의했다. 이 작품은 현재 브루클린 미술관에 영구 소장되어 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 20년이 되어가는 요즘 젠더 논쟁에 다시 불이 붙었다. 이 격동의 시대에 미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최근 미국의 메인 스트림 미술관에서는 L.G.B.T.Q.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그들의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스미소니언 계열 미술관 중 하나인 아랍 아메리칸 국립미술관(Arab American National Museum, Michigan, AANM)에서 4월 8일까지 열리는 아랍계 게이 작가 나빌 무사(Nabil Mousa)의 <미국의 지평: 미술과 인간성을 탐구함(American Landscape: An Exploration of Art & Humanity)전>, 그리고 1월에 막을 내린 뉴뮤지엄의 <방아쇠: 도구와 무기로서의 젠더(Trigger: Gender as a Tool and a Weapon)전>이 그 대표적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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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빌 무사 〈미국의 지평(American Landscape) #45〉 캔버스에 유채 162.5×135cm Photo courtesy of Arab American National Museum

조지아 주 애틀랜타 시를 근거로 활동하는 나빌 무사는 시리아에서 태어나 1978년 기독교인인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 온 작가로 2000년 아랍인으로서는 물론 작가로서도 드물게 커밍아웃했다. 무사는 게이로서, 그것도 아랍인 게이로서 미국에서 살아가며 겪은 삶을 담은 페인팅 시리즈 <미국의 지평>(2008~2012)을 전시하고 있다. AANM이 기획한 첫 게이작가전이다. 전시장소가 뉴욕에서 멀리 떨어진 미시간 주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뉴욕 타임스 및 아트 인 아메리카 등에 크게 소개되었다.

이 시리즈는 미국 국기를 배경으로 삼아 그 위에 경계 및 위험을 상징하는 오렌지색 낡은 청바지, 남녀 화장실 표지, 임산부, 시리아의 심벌 등이 거친 붓질로 그려져 있다. 시리즈 #1의 붉은 스트라이프는 손에 손을 잡고 있는 남자 화장실 표지로 채워져 있고 왼쪽 상단의 사각형 안은 미국의 주를 뜻하는 별들 대신 인권운동의 상징이자 수학에서 같은 값을 뜻하는 노란색 등호(=)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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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나 콸스(Christina Quarles 〈아름다운 애도(Beautiful Mourning)〉 캔버스에 아크릴 121.9×152.4cm 2017 Courtesy the artist and David Castillo Gallery Collection David Castillo, Miami

뉴뮤지엄에서는 지난해 11월부터 올 1월까지 <방아쇠: 무기와 도구로서의 젠더(Trigger: Gender as a Tool and a Weapon)전>을 열어 큰 관심을 모았다. L.G..B.T.Q.I. 즉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트랜스젠더(Transgender), 양성애자(Bisexual), 퀴어(Queer), 인터섹스(Intersex) 작가 및 컬렉티브들의 지난 10년간 작업을 모았다.

뉴뮤지엄이 설립 40주년을 맞아 기획한 <트리거전>은 미술계의 가장 새로운 흐름을 최전선에서 포착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된 뉴뮤지엄의 전통을 이은 전시다. 40명의 참여작가 연령은 25세부터 60대 중반까지 세대를 넘나든다. 야심만만한 이 전시는 권위 있는 미술기관에서 기획하고 전시함으로써 미술계에서 그들의 존재 및 능력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성(性)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넓혀 그들을 사회의 일원으로서 일반화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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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린 보드리/리나티 로렌즈(Pauline Boudry/Renate Lorenz, 2007년부터 협업)
〈독성(Toxic)〉 Super 16mm film transferred to HD, 13 min. 2012 Courtesy the artists, Ellen de Bruijne Projects, and Galerie Marcelle Alix

그림, 조각, 비디오, 설치, 사진, 퍼포먼스, 공예를 포함한 다양한 장르에 걸쳐 남성 대 여성이라는 기존의 두 가지 성 체계는 물론 나아가 성의 구별 자체를 깨트리려는 언-젠더링(ungendering) 혹은 유동적 성(gender-fluid)을 표방하는 작업들이 미술관 3개 층에 걸쳐 전시되었다.

뉴뮤지엄은 1982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동성애 작가들의 서베이전 <연장된 감성들: 현대미술에서 동성애자들의 존재(Extended Sensibilities: Homosexual Presence in Contemporary)>를 기획, 전시했고 이어 <차이점: 표상과 성(Difference: On Representation and Sexuality) 1984-85>, <홈 비디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HOME VIDEO: Where We Are Now) 1986-87,>, <나쁜 여자들(Bad Girls) 1994> 등 성소수자들의 작업을 소개해왔다.

이번 전시의 새로운 점은 게이와 레즈비언은 물론 트랜스젠더와 퀴어, 그리고 인터섹스까지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남성(He) 여성 (She)의 이중체계를 넘어서 최근 “그들(They)”로 불리길 바라는 “유동적 젠더(Gender- Fluid)”의 대두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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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바라라 셀프(Tschabalala Self)〈(사자나 말의) 갈기(Mane)〉 캔버스에 린넨, 유채, 파스텔 2016 Lewben Art Foundation Collection. Courtesy the artist; Pilar Corrias, London; T293, Naples and Rome; and Thierry Goldberg, New York. Special thanks to Pilar Corrias and T293

27세의 흑인작가 샤발라라 셀프(Tschabalala Self, 1990~)의 페인팅은 여러 개로 자른 조각들을 바느질로 이어붙인 일종의 콜라주 혹은 아상블라주다. 화면에 나타난 형상은 그만의 아바타로 여자와 남자 혹은 성별이 불가능한 인물들이 서로 엉켜 있다..

네이랜드 블레이크(Nayland Blake, 1960~)는 전시 중 ‘노멘(Gnomen)’이라 이름 붙인 곰과 들소의 하이브리드 의상을 입고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관객들과 소통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털이 많은 동물 의상을 이용한 롤플레이 <퍼르소 (Fursona)> 작업이다. 털의 부드러움이 주는 ‘포함’ ‘돌봄’ ‘측은지심’ 등을 진하게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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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왼쪽)  세이블 엘리스 스미스(Sable Elyse Smith)〈풍경III(Landscape III)〉 2017   || (가운데) 아니카 이(Anicka Yi) 〈한사람을 위한 테이블(슬픈 카페에서)(Table for One(at the sad café))〉 2011 || (오른쪽) 〈나는 이제까지 내가 만난 모든 여성이다(I’m Every Woman I Ever Met)〉2011
“Trigger: Gender as a Tool and a Weapon,” 2017. Exhibition View: New Museum. Photo: Maris Hutchinson / EPW Studio

이번 전시에 초대된 유일한 한국인이자 지난해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휴고 보스상 수상전으로 관심을 모은 아니카 이(Anicka Yi, 1971~)의 2011년작 두 작품은 침묵 속에서 강렬한 메시지를 전한다.

투병 비닐에 진공 봉인된 진주목걸이를 역시 투명한 플래스틱의자에 앉히듯 걸쳐 놓은 <한 사람을 위한 테이블(슬픈 카페에서)>, 벽에 반달 모양의 플렉시 글라스를 설치하고 껍질땅콩과 진주 목걸이를 진공 포장해 길게 늘어뜨린 “나는 이제까지 내가 만난 모든 여성이다”는 고정된 사회관념 속에 갇힌 여성성의 숨 막힘이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이 작업들은 2010년 시스젠더 규범성이 포함된 군사기밀을 위키리크스에 유출한 트랜스젠더 군인 첼시 매닝 스캔들에 반응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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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왼쪽 천작업) 조시 파우트(Josh Faught) 〈마브 디케이드(The Mauve Decade)〉2014 || (사진 위) 시몬 리(Simone Leigh) 〈영양교환(trophallaxis)〉 2012 || (사진 맨 오른쪽) 시몬 리 〈컵보드IV(Cupboard IV) 〉 2015
“Trigger: Gender as a Tooland a Weapon,” 2017. Exhibition View: New Museum. Photo: Maris Hutchinson / EPWStudio

 

울리케 뮐러(Ulrike Mller, 1971~)의 작은 기하학적 추상들도 원색적인 이미지와 계속해서 움직이는 비디오의 소리가 섞인 전시장에서 무인도처럼 고요하다. 뮐러는 페니미스트 젠더퀴어 컬렉티브인 LTTR과 1970년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운동의 슬로건과 이미지를 찾아내는 협업 프로젝트 “허스토리 인벤토리(Herstory Inventory) 2012”등에 참여하고 있다.

많은 참가작이 게이들의 선정적인 이미지를 다루고 있고 순수미술로서의 작품 수준을 따지기에 앞서 너무나 절실한 작가 개개인의 메시지들이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이번 전시의 큐레이터인 조앤나 버튼(Johanna Burton)은 전시도록 서문에서 “이 전시는 퀴어전도, 트랜스젠더전도 아니다. 이 같은 이슈에 대한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일시적이나마 성별의 불안정함과 성별을 통합, 혹은 몽땅 거부하는 방식을 포함하는 현상에 일종의 통로를 만들어보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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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ARTIST] 김세진

 
미디어 아티스트 김세진은 거대담론과 미시세계 사이를 오간다. 자본주의 사회의 심화 단계에 진입한 동시대 신자유주의 환경 속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개인의 내밀한 모습을 포착한다. 공공영역의 이면에 존재하는 엄중한 역사적 현실에 감추어진 개인의 일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있다. 그가 영상으로 포착한 이미지는 영화적 표현과 다큐멘터리의 객관적 시선이 혼합되어 있다. 독특한 영상언어와 스크리닝으로 자신이 주장하고자하는 메시지를 선명하게 전달하는 김세진의 작품세계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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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에 관한 연대기(Chronology about the bad blood)〉 싱글 채널 HD 비디오, 5.1 채널 서라운드 사운드, 12분 50초 2017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신여성 도착하다〉에 출품된 작품과 작가 김세진 | 사진 : 박홍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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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의 연대기〉, 불리거나 사라짐의 통로

이단지 | 독립 큐레이터

〈나쁜 피에 관한 연대기(Chronology about the bad blood)〉 2017 스틸 컷

 

〈나쁜 피에 관한 연대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출발해 보자. 가방을 들고 길을 떠나는 여자의 뒷모습. 저 멀리 명랑한 달빛이 잔잔한 바다의 파도를 비춘다. 카메라는 서서히 뒤로 빠진다. 배우의 모습 너머로 배경 스크린에 그려진 붉은 바다가, 마이크가, 촬영용 모니터가, 카메라 레일이 등장한다. 덕수궁미술관 〈신여성 도착하다〉 전시에서 소개된 작품의 실제 주인공이 1951년에 사망한(사망했다고 추정되는) 한국 최초의 여성 소설가 ‘김명순’이라는 사실은 이 비디오를 김세진의 작업 중 가장 ‘영화’적인 것으로 만든다. (1896년 평양에서 출생한 김명순은 진명여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동경 국정여학교에서 1년 수학하고 귀국하여 숙명여학교에 편입, 1917년에 졸업하였다. 동경음악학교 재학 등의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1951년 4월 일본 청산(아오야마) 뇌병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설로 〈조모의 묘전에〉, 〈처녀의 가는 길〉, 〈꿈 묻는 날밤〉, 〈돌아다볼 때〉등 15편이 있다. 1925년 한성도서에서 출간한 창작집《생명의 과실》이 있다.)

(모든) 영화는 우리에게 재현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그것이 어떤 시대이든 인물이든, 어디까지가 재현 가능한 것인지, 한계 지점에는 무엇이 있는지, 한계에 닿았을 때 드러나는 것, 혹은 한계를 통해 사라지는 것은 무엇인지, 혹은 그 곳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같은 질문들을 말이다. 더구나 영화가, ‘아직 우리에게 당도하지 않은 대상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은 어떠한가. ‘당도하지 않은’ 것은 비단 미래나 과거에 대한 상상일 뿐 아니라 알지 못하는 현재에 대한 기대를 포함한다. 사실 나에게 ‘움직이는 이미지’는 늘 -혹은 대부분의 동시대적 예술 경험이란 늘- 그런 것이다. 재생되는 순간부터 예측하지 못하는 다음 장면을 기다리는 응시의 연속이며 동시에, 채 종결되지 않은 과거의 순간을 다시 확인하려고 애쓰는 현재를 느끼는 일 말이다. 오늘의 글은 〈나쁜 피에 관한 연대기〉를 중심으로 김세진의 영화를 구성하는 대상과 (비)재현을 위한 영화라는 물질성에 대해 적어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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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파크(Victoria Park)〉 2 채널 비디오, 3분 53초 2008

높은 집세에 지낼 곳이 없어 주말 낮 시간을 공원에서 보내는 홍콩의 어린 식모(〈빅토리아 파크_ 2006〉), 좁은 의자에서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징수원과 건물 경비원(〈야간 근로자_ 2009〉), 잘 정리된 미술관의 한 켠에서 공간을 응시한 채 서있는 전시장 지킴이(〈도시 은둔자_ 2016〉)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김세진은 인물에 기대어 어떤 시간들을 담아낸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유령들. ‘제7의 인간’에서 존 버거가 이야기하듯, 그들은 태어나지도 않으며 양육되지도 않고 나이 먹지도 않으며 지치지도, 죽지도 않는다. 실존에 대한 김세진의 다큐멘터리들은 시스템의 선택과 망각된 익명, 그 사이를 부유하는 실존에 주목함으로써 근대 이후 ‘개인’이라는 개념이 순간적이고 미시적인 ‘상태’로 전환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미술관에서 찍은 〈도시 은둔자〉에서 잠시 스쳐간 사물들을 떠올려본다. 세제통과 걸레처럼 창고 안의 어딘가로 들어가 있어야만 하는 건조한 대상들 말이다.

이제는 사라진 한 소설가, 어림잡아 1967년 전에 작고한(1951년에 사망했다고 추정되는) 인물을 우리는 어떻게 만날 수 있나? 사라진 망자를 호명하는 영화들을 상기해 볼 때 흔히 배우의 모습이나 목소리는 인물의 실재성을 보강해줄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기실 이러한 방식은 허구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 뿐이다. 영화는 심지어 우리가 그것을 보는 동안에도 지워지고 사라진다. 〈나쁜 피의 연대기〉는 (그러한 성격을 보여주는) 좋은 예인데, 왜냐하면 실존했던 소설가에 대한 재현의 조건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은 (반대로) 부재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 또는 영화는 단지 재현된 것만이 아니라 재현 가능성 자체를 다루기 때문이다.

비디오의 주인공 김명순은 근대 시기 기생의 딸로, 외군 장교에게 강간당한 어린 여학생으로, 여성 소설가로, 자유연애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으로 인해, 탄생과 사망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자신의 자리에서 추방당한 여성이다. 김세진은 오직 스스로가 남긴 글 안에서만 살아 있는 소설가를 위해 배우의 연기와 화면의 쇼트, 서사를 암시하는 듯한 오리지널 사운드, 내레이션 등, 지극히 영화적인 문법으로 인물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영화는 현실을 보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허구임을 영.화.화하는 것이다. 작가의 카메라는 존재의 은밀함을 파괴하는 일이며 대상이 망각될 권리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패러독스 위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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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근로자(Night Worker)〉 2 채널 HD 비디오, 6분 58초 2009

뒷모습과 목소리

나는 〈나쁜 피에 관한 연대기〉를 두 번 봤는데, 첫 번째는 덕수궁미술관의 전시장에서 봤고 그다음 번은 작가에게받은 비디오 링크를 모니터에 띄워 놓고 헤드폰을 낀 채 봤다. 두 번의 경험 안에서 영화는 영상/비디오 트랙과 사운드/오디오 트랙, 두 개의 중심으로 확연히 분리되었다.

김세진은 〈밤을 위한 낮〉, 〈도시 은둔자〉 등 대부분 작업에서 대사나 내레이션 없이 정적과 공백의 흐름으로 서사를 만들어 왔다. 스크린은 하나의 화면을 반사하는 분할된 면들과 분절된 싱크로 흩어지며 관람자의 동선을 만들어낸다. 무빙 이미지, 편집, 프레임, 현장의 스크린 싱크 플레이, 공간의 조명설치 등으로 전달하던 ‘시각적 서사’에 비하면 이번 작업은 ‘낭독 영화’라 말할 수 있을 만큼 매우 청각적이다.

무엇이 ‘시각적 서사’를 청각적 서사로 이동하게 했을까. 소설가 김명순이 1951년에 죽지 않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어딘가에 생존하여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완성한다는 가정하에서 시작된 〈나쁜 피에 관한 연대기〉는 그녀가 남긴 시, 소설, 희곡 그리고 에세이에서 발췌한문단들과 단어들로 지극히 개인적인 내적 욕망, 이상, 좌절, 외로움, 희망, 고립감에 대한 고백적 텍스트의 조각으로 구성된다. 라디오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오리지널 사운드, 김명순의 시를 낭독하는 목소리, 배우의 목소리, 주인공을 비난하는 남성들의 목소리, 숲에서 녹음된 필드 레코딩, 파운드 푸티지, 중창으로 얽혀드는 불협화의 목소리, 서로가 서로를 침범하는 소리들은 일련의 추상적인 드로잉이 된다. 목소리의 떨림은 보이지 않는 인물을 성립시키는 듯한 암시가 된다. 조너선 스턴 〈청취의 과거: 청각적 근대성의 시원〉에는 근대 축음기의 발명 목적 중에 하나가 ‘가족 구성원이 자기 목소리로 직접 대화, 회고담, 유언을 녹음하는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즉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의 목소리를 언제든지 현재로 불러오는 능력, ‘사라진 것의 소환술’로 망자의 음성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녹음된) 목소리는 실존이면서 동시에 주술적인 존재 상태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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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은둔자(Urban Hermit)〉 2 채널 HD 비디오, 6분 25초 2016

〈나쁜 피에 관한 연대기〉의 첫 장면은 어린 범네와 특실이의 이별이다. 두 소녀는 손을 동그랗게 모아 입에 대고 이쪽과 저쪽으로 멀어져가는 서로를 향해 이름을 부르며 이별 인사를 나눈다. 영화의 시간은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아니라, 타자에게 다가가는(혹은 떠나가는) 시간이자 실존을 향해가는 시간이 그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경험할 수 있는 것의 한계에서, 현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의 시간 위에서, 경험 속에서 고정되거나 공통적으로 붙들 수 없는 것, 즉 불리는 형식이거나 사라짐의 형식. 호명과 이별의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 어쩌면 영화의 정의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다시 〈도시 은둔자〉의 장면을 기억해 본다. 유리창과 복도엔 티끌도 없다. 미술관의 곳곳을 조용히 걸어 다니며 걸레를 훔치던 미화원의 뒷모습, 김세진은 그 장면을, 촬영한 비디오를 뒤로 감아 잠시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는 모습으로 남겨둔다. 감각을 낚아채는 이미지는 인물의 뒷모습이다. 〈밤을 위한 낮〉, 들판에 서서 손에 든 핸드폰 불빛을 밝히던 소녀,〈잠자는 태양〉, 〈일시적 방문자〉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뒷모습. 침묵의 순간이다. 김세진은 뒷모습에 대해 ‘익명성이 함축된 이미지’로 설명한다. 어느 곳을 바라보는지 알 수 없는, 군중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듯한 장면은 우리에게 실존에 대한 집중력을 요구한다. 가방을 들고 길을 떠나는 〈나쁜 피에 관한 연대기〉의 여자. 이제 그 뒷모습들은 우리가 무엇을 보았는지 묻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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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세 진
1971년 출생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와 서강대학교 영상대학원 영상미디어과 석사, 영국 슬레이드 스쿨 오브 파인아트 석사를 졸업했다. 2005년 인사미술공간에서 열린 〈이상사회〉를 시작으로 금호미술관, 브레인 팩토리, 미디어극장 아이공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제4회 다음작가상’(2005), ‘블름버그 뉴 컨템퍼리즈’(2011), ‘Henry Tonks Prize’(2011), ‘송은미술대상’(2017)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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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캐슬린 킴의 예술법 세상 19]

 


예술품 절도범들은 재산을 훔치는 것이 아니다 

캐슬린 김 | 미국 뉴욕주 변호사, 홍익대 겸임교수

마리 로랑생 〈Group of Artists〉 캔버스에 유채 65.1×81cm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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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은 흐르고/우리의 사랑도 흐른다.”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의 한 구절이다. 현재 예술의전당에서는 〈마리 로랑생전〉이 열리고 있다. 아폴리네르와 로랑생에 얽힌 이 시의 사연을 아는가. 두 사람의 이별에〈모나리자〉 절도 사건이 있다.

파리 몽마르트 시절 파블로 피카소와 아폴리네르는 서로 예술적 영향을 주고받던 막역한 사이였다. 아폴리네르는 《큐비스트 페인터》라는 비평서까지 출간하며 피카소의 새로운 시도를 옹호했다. 로랑생을 아폴리네르에게 소개해준 이도 피카소. 이렇게 시작된 아폴리네르와 로랑생 간의 사랑이 어떻게 해서 이별로 이어졌을까. 세 사람의 우정과 사랑과 이별은 절도 사건과 어떻게 관련됐을까.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Les Demoiselles d’Avignon)〉(1907)은 폴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들(The Bathers)〉과 고대 이베리아 석상이 영감의 원천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베리아 석상이었다. 피카소는 아폴리네르의 조수 게리 피에레로부터 이베리아 석상 2점을 구입했다. 하필 석상은 피에레가 루브르 뮤지엄에서 훔쳐온 것이었다.

1911년 8월 22일 오후, 루브르에서 〈모나리자〉가 사라졌다. 어느 미국 유학생이 여느 날처럼 〈모나리자〉를 보러 갔는데 벽이 휑했다. 뮤지엄 측이 찾아낸 것이라곤 층계참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액자와 유리 케이스뿐. 파리가 발칵 뒤집혔다. 놀랍게도 피카소와 아폴리네르가 용의선상에 올랐다. 조수 피에레의 진술 때문이었다. 지레 겁을 먹은 피에레는 언론에 대고 자신이 루브르에서 이베리아 석상을 여럿 훔쳤고, 이 중 둘은 친한 예술가에게 팔았다고 자백했다. 그저 자신이 〈모나리자〉 절도범으로 몰릴까봐 한 자백이었다. 경찰은 피에레의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얼마 전 아폴리네르가 루브르의 경비가 허술하다는 내용의 언론 기고문을 쓴 사실이 확인됐다. 그래서 먼저 아폴리네르를 소환했다. 피에레가 훔친 석상을 구입한 피카소 역시 경찰에 소환됐다. 둘에 대한 대질신문이 벌어졌다. 아폴리네르는 피카소가 석상을 구입한 건 맞지만 훔친 물건인 줄은 몰랐을 것이라며 피카소를 방어했다. 그런데 피카소는 그게 아니었다. 그는 아폴리네르를 전혀 모르노라고 잡아뗐다. 둘은〈모나리자〉 절도범이 아니었기에 얼마 후 풀려났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회복될 수는 없었다. 피카소의 소개로 사랑에 빠졌던 아폴리네르와 로랑생의 관계도 그러했다. 그렇게 사랑은 흘러만 갔다.

그렇다면 〈모나리자〉는 누가 훔쳤을까. 범인은 〈모나리자〉의 유리 케이스를 제작한 이탈리아 출신 빈첸초 페루자와 그의 동향 친구였다. (사실이 아님에도) 나폴레옹이 약탈해갔다고 믿은 이들은 이탈리아의 보물을 다시 고국으로 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피렌체로 가지고 갔다. 페루자는 곧 체포됐지만 이탈리아에서 영웅이 됐다. 이탈리아 정부도 〈모나리자〉는 반환했지만 페루자의 송환은 거부했다.

세계 각지의 도난 예술품을 등재하는 ‘도난예술품등록부(ALR: Art Loss Register)’가 있다. 목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회화나 골동품이다. 저명한 예술품일수록 관리가 엄격하기 때문이다. 도난품 중 주인의 손으로 되돌아오는 작품 비율은 채 1%도 되지 않는다. 다시 시장에 나올 때까지는 망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루브르의 〈모나리자〉가 피렌체에서 모습을 드러내듯 도난 예술품은 대개 다른 나라에서 발견된다. 예술품 전문 절도범들은 작품을 장물업자에게 넘기고, 업자들은 다시 외국으로 되판다. 도난 예술품에 국경은 없다.

절도범들이 특별히 좋아하는 예술가가 있다. 바로 ‘피카소’다.작품이 많아서이기도 하겠지만 지금까지 도난당한 피카소의 작품은 집계된 것만으로도 1000점이 훌쩍 넘어선다. 생전에 피카소는 작업실에 도둑이 드는 경우를 대비해 판매가 결정될 때에 비로소 서명을 했다. 지난 2월 18일 미국 밀워키에서 피카소의 작품이 또다시 절취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작품은 초상을 담은 1929년작 판화로 시장가는 약 5만 달러로 추정된다. 예술품 가치평가사가 소장하던 작품인데 잠시 고객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피해자는 절도범을 두고 ‘행운아’라고 비아냥댔다. 작품에는 가격이나 가치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부착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품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 단순 절도범으로 취급했다. 하지만 이 절도범도 판화의 오른쪽 하단에 녹색 크레용으로 쓴 “Picasso”라는 서명을 놓쳤을 것 같지는 않다.

일반적 의미에서 절도죄는 재산범죄다. 재산적 가치, 즉 돈을 훔치는 범죄다. 그런데 환금하기 쉬운 금반지나 시계도 아니고 왜 하필 유명 예술작품일까. 예술품 절도범들은 왜 하필 팔기도 어렵고, 세상의 주목을 받는 바람에 붙잡히기도 쉬운 예술품을 훔칠까.

영화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에서는 억만장자이자 예술애호가인 주인공이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클로드 모네의 그림을 훔친다. 그러고는 며칠간 집에서 감상한 후 다시 뮤지엄에 잠입해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주인공에게는 유명한 그림을 훔치는 행위 자체가 짜릿한 유희다. 앞선 〈모나리자〉 절도 사례는 낭만적 애국심의 발로다. 최근 미국에서는 임대 전시 중이던 중국 진시황릉 병마용의 왼쪽 손가락이 절취당한 사건이있었다. 범인은 뮤지엄에서 열린 파티 참석자였다. 그는 폐장한 전시장에서 병마용과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렸고, 곧바로 체포됐다. 과도한 자기현시욕이었을까. 중국 정부는 강력한 처벌과 손해배상을 촉구하고 나섰다.

렘브란트의 〈야코프 데 헤인 3세의 초상화〉는 같은 작품이 네 번이나 도난당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이 두 번째 도난당한 때는 런던의 덜위치 미술관이 개장한 대낮이었다. 비상이 걸린 직원들이 용의자를 찾기 위해 근처를 수색했다. 그러다 미술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무언가를 싣고 자전거를 타고 가던 의심쩍은 사람을 발견했다. 자전거를 세운 직원이 싣고 가는 네모 모양의 물건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렘브란트의 초상화라고 답했다. 그림이 좋아 보여 복사본을 한 장 만든 다음 다시 미술관에 가져다 놓을 계획이라 했다. 천연덕스럽게 뭐가 문제냐며 반문했다. 자신은 훔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잠시 빌릴 생각이었다며 끝까지 고집하는 바람에 기소조차 할 수 없었다.

명화가 갖는 상징성을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하는 이들도 있다. 1994년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미술관에서 뭉크의 〈절규〉를 훔친 이들은 조직폭력배였다. 〈절규〉를 돌려주는 조건으로 자신들의 두목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아이를 납치해 돈을 요구하는 유괴범죄(kid – napping)가 있다. 외국에서는 이런 범죄를 ‘예술품 납치(art – napping)’ 범죄로 다룬다. 이렇듯 예술의 다양성만큼이나 예술품 절도범죄는 다양하고 역시 그 다양성만큼이나 범죄의 동기 또한 극적이며 각양각색이다.

예술품 절도범이 훔친 예술품(장물)을 자신이 소장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유통시키게 된다. 이렇게 절도 범인으로부터 장물을 매수한 예술품 소장자는 어떤 책임을 져야 할까. 훔친 예술품인 줄 알고 구입했다면 당연히 장물취득죄(형법 제362조)가 성립할 것이다. 범죄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고도 저지른 고의 범죄이기 때문에 당연하다. 이렇듯 우리 형법은 고의범을 처벌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그런데 몇 가지 경우에는 지극히 예외적으로 과실범죄도 처벌한다. 교통사고가 대표적이다. 누가 교통사고를 내고 싶겠는가. 그런데 잠깐 주의를 게을리 해서 발생하는 사고가 바로 교통 범죄다.

장물 범죄에도 그런 엄격한 주의 의무를 부과한다. 훔친 물건이 함부로 유통되게 되면 결국은 절도 범죄를 고무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실장물죄(형법 제364조)가 있다. 예를 들어 훔친 예술품을 구입한 소장자가 있다고 하자. 사실 전문가라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팔러온 사람의 신분을 통해서도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소장 경위 등을 꼼꼼하게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눈감고 가격을 후려쳐서 구입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때는 과실장물취득죄에 해당할 수 있다. 정말 장물인줄 모르고 구입했다면 어떻게 될까. 이때는 민법상의 문제로 돌아간다. ‘선의취득’이라는 법리가 있다. 지면 관계상 이 부분은 서술하지 않겠다. 이렇듯 예술품을 훔치더라도 유통을 엄격하게 차단해서 절도 범죄의 횡행을 막고자 하는 것이 우리뿐만 아니라 대부분 나라의 형법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지난 2005년 로스앤젤레스 폴 게티 뮤지엄이 장물 스캔들에 휩싸였다. 뮤지엄에 전시되어 있는 수많은 작품이 제2차 세계대전의 혼란 속에서 도굴 또는 약탈, 절취된 것이며 뮤지엄 측은 이를 알고도 장물 거래상으로부터 구입해 전시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탈리아 정부는 게티 소장품 가운데 42건이 이탈리아에서 불법적으로 넘어간 장물이라고 주장했다. 이탈리아 정부와 뮤지엄 측은 공동 조사를 통해 순차적으로 반환키로 합의했다.

2012년 10월 서울 소재의한 갤러리에서 소개한 사람을 통해 강원 삼척시 어느 절에서 1993년 도난당한 〈영산회상도〉를 2억1000만 원에 사들인 사립미술관장이 있었다. 문제의〈영산회상도〉는 조계종 도난백서에 도난품으로 등재되어 있던 작품이었다. 검찰은 관장을 문화재보호법 위반 및 장물취득 혐의로 기소했다. 2016년 1,2심 법원 모두 문화재보호법 위반은 유죄로 인정했다. 그런데 〈영산회상도〉에 대한 장물취득 혐의는 장물성에 대한 소명 부족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사건 전체를 검토하지 않아 판단하기 어렵지만 검찰이 입증 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음을 지적한 판결로 읽혔다.

예술가의 아이디어를 훔치는 것은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예술가의 창작적 표현을 훔치면 그때는 범죄다. 저작권법 위반이 된다. 그다음으로 예술가의 창작 예술품 자체를 훔치면 그때는 형법상 절도죄를 구성한다. 예술가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예술형사법의 기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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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GHT & ISSUE Gangwon International Biennale 2018

 
〈강원국제비엔날레 2018〉(강릉녹색도시체험센터 일원)이 2월 3일부터 3월 18일까지 강릉에서 열린다. 올해부터 명칭을 변경하고 국제 미술행사로 치러지는 〈강원국제비엔날레〉는 58명(팀) 작가의 작품 110여 점을 선보였다. 하나의 독보적 가치만으로는 세상이 굴러가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한 주제 ‘악의 사전(The Dictionary of Evil)’이 어떻게 전시장에 구현됐는지 확인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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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도&이사벨 아퀼리잔 (Alfredo&Isabel Aquilizan) 〈Bounds〉 트럭, 현지에서 구한 물품, 끈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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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최 이유를 찾는 것이 당면과제가 된〈강원국제비엔날레〉

라파엘 고메스 바로스(Rafael Gómez Barros)〈House Taken〉 레진, 나무, 모래, 혼합재료 가변설치 2008~2017

국내에서 국제미술행사가 열릴 때마다 항상 듣는 말이 있다. “비엔날레의 홍수” “비엔날레의 과잉” 말의 온도에서 느껴지듯 결코 긍정적인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적의 근원은 그간 국내에서 열린 숱한 비엔날레 행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부실한 구성 등 여러 이유가 꼽히지만 미술이 시장의 시대로 접어든 마당에 비엔날레는 더 이상 동시대미술의 양상 혹은 미래 예언자로서의 역할을 상실했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이에 비엔날레는 그냥 열어야 하는 당위만 존재하는, 미술계 사교의 장이 되어 껍데기만 남았다는 극단적 비판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강원국제비엔날레〉는? 알려졌듯 〈강원국제비엔날레〉는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와 개최를 기념하여 열린 〈평창비엔날레〉를 확대한 국제규모의 미술 행사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비엔날레가 차고 넘치는 현실에서 〈강원국제비엔날레〉에 대해서도 당연히 비판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비판을 최대한 유보해도〈강원국제비엔날레〉의 탄생 이유였던 평창올림픽 이후 행사의 존속이 걱정되는 상황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강릉행 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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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더욱 밝은 내일을 위하여〉금속,  스티로폼 2018

이번 〈강원국제비엔날레〉 홍경한 예술총감독이 내세운 주제는 ‘악의 사전(The Dictionary of Evil)’이다. 일견 그로테스크한 세계의 일면을 내세우는 것 같아 보이지만 전시장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가서 보면 세계를 움직이고 구조화한 가치가 다양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의미로 읽힌다. 즉 이른바 ‘선(善)’만이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가치가 아니라는 것, 그 대척점으로서 ‘악(惡)’은 세계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축이 된다는 점을 밝혀내는 것이다. 이에 대해 홍 감독은 《월간미술》과의 인터뷰(2월호)에서 올림픽이라는 화려함의 이면에 숨은 위선의 양상을 설명하고 그 존재의 당위성을 설파하면서 그것이 바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라 강변했다.

그렇다면 이 주제가 과연 전시에 어떻게 발현되었을까? 이번 〈강원국제비엔날레〉는 알려진 바대로 주전시장인 강릉녹색도시체험센터와 인근에 세워진 가건물에서 진행되었다. 우선 주전시장인 체험센터 내부로 들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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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아치 〈가리왕, Tree Man, 孔雀夫人 Sings〉 영상, 설치 2018

양아치는 〈가리왕, Tree Man, 孔雀夫人 Sings〉를 통해 욕망이 발하는 악의 극한적 발현에 대해 이야기하고있다. 영상과 설치로 구성된 그의 전시장은 욕망이 그것의 출현을 매개하거나 도움을 주는 대상을 만나 등장하는 과정을 담아냈다. 실제로 벌어진 각종 재난과 정치적 사태를 배경으로 해 현실에 대한 응시를 이끌어낸 작업도 선보였다. 영상 다큐멘터리 작가 故 박종필은 〈잠수사〉를 통해 전 국민적 트라우마를 야기한 세월호 이야기와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사를 담은 〈장애인이동권투쟁보고서-버스를 타자〉 등을 통해 우리가 애써 외면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침↑폼, 겐지 구보타, 에바&프랑코 마테스, 제이슨 웨이트가 참여한 큐레이터 그룹 Don’t Follow the Wind는 후쿠시마 지진 때 파괴된 원전에서 누출된 방사능으로 인해 폐쇄된 구역을 360도 영상으로 보여준다. ‘위기’에 대해 지속적으로 환기하고 있는 셈이다. 까맣게 벽면을 채운 대형 개미를 설치한 라파엘 고메스 바로스는 콜롬비아 내전으로 분리된 사회상을 보여준다. 두 개의 해골이 붙어있는 형태의 개미는 전 세계의 보편적 문제로 지적되는 이민자와 난민 문제를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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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승욱〈안정화된 불안_8개의 이야기가 있는 무대〉(부분) 아연도금강, 알루미늄, 사운드, 혼합재료 400×400×440cm 2018 최수진이 퍼포먼스를 벌이는 광경

체험센터 뒤편의 공터에 컨테이너와 철제 구조물로 만든 임시 전시장은 의외의 효과를 자아냈다. 가공되지 않은 공간에 설치된 작업들은 체험센터의 말끔한 화이트 큐브와 극명한 대비를 이뤄, 다양한 가치가 공존한다는 점을 드러낸 전시주제에 맞추려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프레스 오픈 당시 열린 심승욱의 〈안정화된 불안_8개의 이야기가 있는 무대〉를 배경으로 벌어진 최수진의 퍼포먼스와 신제현의 〈해피밀〉 퍼포먼스도 극명한 효과를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더불어 이 공간에는 이민자와 난민, 잊힌 산업세대로서 광부(鑛夫), 소통하기 힘든 비동일 언어권의 만남 등 인간의 보편적 문제부터 전쟁,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한 피해자의 현실, 공공미술의 문제 등 동시대미술이 그간 적극적으로 취해온 다양한 주제의 작업이 선보였다. 주제와 작업, 공간이 조화를 이뤄 전시기간이 끝나면 철거되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근래 보기 드물게 완성형의 전시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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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영 〈타워〉 폐스피커, 사운드 2011〈Reflection〉(사진 앞 쇠사슬 작업) 2016

전시장을 나서며 이제 〈강원국제비엔날레〉가 숙고해야 할 과제는 개최의 지속여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했듯, 행사 개최의 이유였던 올림픽이 종료되었다. 미술행사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강릉에서 국제행사급의 미술행사를 지속할 이유를 찾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직전 〈평창비엔날레〉와 이번 비엔날레가 비평적으로, 운영 면에서 그렇게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고 존재의 이유를 증명해냈다는 점이다. 특히 이번 행사에서 주제와 전시형태가 상호 부합하는 나열식으로 이뤄졌다는 점은 주효한 전략이었다고 보인다. 물론 작품의 배경과 그 세부적인 내용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전시 맥락에 엮을 수 없는 예외적인 사이트도 있었지만 전시의 맥락에 크게 무리가 없었다고 보인다. 이에 앞으로 〈강원국제비엔날레〉가 새로운 개최의 계기를 어떻게 마련하느냐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 강릉 = 황석권 수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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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TOPIC 마지막 여행은 달에 가고 싶다

정강자 50 YEARS OF WORK

작가 故정강자(1942~2017)의 첫 회고전이 아라리오갤러리 천안(1.31~5.6)과 서울(1.31~2.25)에서 열렸다. 작가가 2015년 위암 투병 중에 그린 작품제목 〈마지막 여행은 달에 가고 싶다〉와 동명인 이번 전시에는 정강자의 대표작과 근작이 대거 출품되며 다양한 아카이브 자료를 선보인다. 사회정치적으로 격동의 시기를 온몸으로 감당해내며 한국 현대미술사에서는 퇴폐와 선정적 이미지로 인해 평생 체제 밖을 떠돌아야 했던 정강자의 예술가적 열정과 애환이 느껴지는 현장을 만나본다.

 


자화상 속의 신체

고동연 |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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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여인들(감비아)〉(사진 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릭 160×200.5cm 1989 | 아라리오갤러리 천안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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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벗었다는데 그렇게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어요. ‘누드’ 자체가 하나의 ‘오브제’로 쓰이고 있을 뿐인데…”라면서 속안(俗眼)을 탓한다.

비평가가 작업이 지닌 미학적인 측면에만 집중하고자 할 때 작가 개인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방해가 되곤 한다. 작업 대신 작가의 ‘독특한’ 삶에만 독자의 관심이 집중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정강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1968년 세시봉 음악감상실에서 열린 〈투명풍선과 누드〉에서 팬티만을 입은 채 가슴 부위에 투명풍선을 달고 터뜨리는 행위예술의 주인공이었던 그녀의 ‘스타성’은 미술계뿐 아니라 세간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 두드러진 것 역시 작가 개인의 신체 이미지였다. 국내 여성작가들이 자화상을 제작하는 일은 흔히 있지만, 자신의 신체를 중점적이고 지속적으로, 그리고 일상적인 맥락에서 활용하거나 재현한 경우는 흔치 않다. 전시된 작가의 유품 사진들 중에 관광지 유적 앞에서 찍은 모습은 자화상과 신기할 정도로 일치한다. 특히 1970년대 초 명동 거리의 중심을 활보하는 여성으로부터 1990년대 작업복 차림의 여성,2000년대 들어서 간략화된 자연추상과 여성의 몸을 중첩시킨 최근 풍경화에 이르기까지 정강자는 행동하는 자신(여성)의 신체를 전면에 내세운다. 1960년대 말 이젤 앞에 놓인 자화상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나 1990년대 이후 그녀의 거대한 자화상들이 필자의 이목을 끈 것도 이 때문이다.

정강자는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에 참여하면서 ‘아방가르드 여성 1세대’로 불려왔다. 1960년대 국내에 오브제의 개념이 도입되었고 국내 미술계에서도 순수미술의 지위에 대한 철학적인 논쟁이 제기되면서 미술계의 권력구조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들이 전개되었다. ‘무동인’, ‘신전’, ‘오리진’ 등의 소그룹이 벌인 전시나 해프닝은 작업의 재료나 형태가 비물질적이거나 완결된 형태를 띠지 않았고, 내용에서도 〈한강변의 타살〉(1968),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1970)은 1972년 유신체제로 향해가는 억압적인 사회 현실을 다양한 방식으로 풍자하였다. 정강자는 〈투명풍선과 누드〉등의 행위예술 이벤트를 통하여 남성 멤버들 위주로 조직된 소그룹 운동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동시에 보수적인 성문화에 과감하게 맞섰다. 그를 한국 여성미술의 선구자로 언급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1세대 여성 실험예술가로 분류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이번 전시를 위해 다시 제작된 〈억누르다〉(1969)는 정강자의 여성주의적인 관점을 암시하는,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업이다. 엄청난 무게의 쇠 파이프가 대형 목화솜을 누른다. 쇠 파이프는 무거워 보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완벽하게 솜과 밀착되어 있지 않기에 위치를 변경하거나 제거할 수 있다. 현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쇠 파이프가 상징하는 사회적 억압을 극복해보려는 작가의 ‘의지’를 짐작게 한다. 뿐만 아니라 설치작업〈키스미〉(1967)는 동료작가 심선희의 〈미니1〉(1967)과 함께 대중문화 친화적이었던 젊은 세대 여성작가의 관심사를 반영한다. 전후 한국 화단을 대표한 여성작가 천경자가 꿈의 이미지나 뱀과 같이 문학적이고 상징적인 소재를 가지고 순종적인 여성상을 거부했다면,〈키스미〉에서 여성의 성적 해방은 립스틱이나 선글라스와 같은 대중소비문화의 파편을 통해서 구현되었다.

물론 1960년대 말부터 국내에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대중소비문화를 성적 해방과 직결하는 부분은 논쟁의 소지가 있다. 대중문화의 편린을 사용해서 보수적인  유교문화에 제동을 걸고자 한 정강자의 시도는 군부독재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서구 대중문화를 활용해서 민중이나 대학생, 지식인들의 사회비판적인 관심을 분산시켜온 역사에 비추어 보아 비판받을 만하다. 여성의 성을 자발적으로 대상화한 ‘키스미’라는 문구도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불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스미〉가 1960년대 말 남성 위주의 성적 관념이나 순수예술에 대한 젊은 여성작가의 솔직하고 저돌적인 발언이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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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 작가의 자화상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청바지 162×130cm 1992 © Estate of JUNG Kangja. Courtesy ARARIO GALLERY

1974년 한국을 떠난 정강자는 이후 몇 차례 개인전을 갖기는 했으나 국내에서 최근 자화상을 포함해서 그녀의 작업을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이에 작가가 타계하고 처음으로 열린 〈정강자: 마지막 여행은 달에 가고 싶다전〉에서 한복 변형 시리즈, 동남아시아의 바틱 기법을 사용한 2차원 작업, 암투병기에 제작된 자화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선보였다. 

그런데 최근 작업들에서 필자의 이목을 끈 것은 역시 신체가 강조된 자화상이었다. 〈자화상〉(1992)에서 작가는 푸른 청바지를 입고 연장에 해당하는 붓을 들고 있고 1996년 자화상에서는 청바지에 가죽점퍼를 입은 작가가 팔레트를 옆에 두고 서있다. 이국적인 풍경이나 모티프들 속에 위치한 자화상은 타문화를 탐구하고 해석해가는 화가의 적극성을 암시한다. 여기서 팔레트와 붓은 창조의 원천이나 도구로서 남성작가들의 자화상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소재이다. 재스퍼 존스가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의 마초적인 창조적(성적) 에너지를 풍자하고자 붓을 거꾸로 붓통에 꽂아놓은 모습을 브론즈로 주조한 바 있다. 따라서 거대한 팔레트 옆에 서있는 정강자의 자화상은 여성 작가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통상적인 젠더 구분에 도전장을 내민다. 또한 살결이 검은 남태평양의 원주민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한 모습은 일찍이 서구권의 남성작가들이 비서구권의 문화를 대상화해온 관행을 꼬집는다고도 볼 수 있다.

정강자의 자화상은 철저하게 여성의 신체를 타자화하는 방식으로부터도 비껴나 있다. 말년 자화상에서 여성의 신체에는 수술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고 캔버스 밖에 위치한 여성은 자신의 모습을 측은하다는 듯이 손을 뻗어서 쓰다듬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작가는 최후까지 자신이 그림 속 대상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하였고 그림 안과 밖, 관찰자와 피관찰자의 경계를 허물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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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자의 행동하는 몸으로부터 배우다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진행된 전시 전경

결론적으로 정강자에게 몸은 직접 경험하고 행동하는 인간 실존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단 하루를 더 살더라도 자신의 열망을 숨김없이 표현해야 한다’는 작가의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1960년대 말 행위예술 분야에 적극적으로 몸을 던진 것처럼 작가는 외국으로 이주한 후에도 이국적인 풍경의 중앙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그 부분이 되고자 애썼다. 덕분에 필자는 1960년대 말〈투명풍선과 누드〉에서 그가 보여준 저돌적인 작가의 자의식과 존재감을 최근 자화상들과도 쉽게 연관시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강자의 신체 이미지를 통하여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몸이 갖고 있는 위상에 대하여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성의 해방을 부르짖은 지 5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여성의 몸은 공공의 장소에서 기이하고 불편한 존재이며, 최근 우리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투(#MeToo) 운동이 제기하는바 남성의 욕망을 ‘본의 아니게’ 자극한 여성의 성은 처단되어야 할 대상이다. 정강자의 파격적인 용기가 다시금 필요한 때다. ● 고동연 |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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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BOOK]

불안과 가능성 사이 미세한 떨림의 도약


한명식 지음 《바로크, 바로크적인》 연암서가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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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는 르네상스 이후 17세기 유럽의 시공을 풍미한 예술사조로 기록된다. 한편으로 바로크는 심연으로부터 근대적 세계관을 열어젖혔으며, 나아가 많은 사상가에게 근대로부터 탈근대를 사유하는 영감을 주기도 했다. 한명식의 신작 《바로크, 바로크적인》은 바로크의 사유를 ‘바로크적’으로 이끌어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는 바로크의 다양한 조류를 찾기보다 바로크 건축, 미술, 문학, 철학 등 전방위 흔적들을 연결하고 이를 바탕으로 바로크적 사유를 직관적으로 풀어낸다. 그에 따르면 바로크는 특정 시기 유럽의 미적 양식 너머 시공의 변화를 관통하는 인간의 본원적 역동이다.

중세 이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근본적으로 세계관의 지각변동을 시사한다. 르네상스의 세계관이 인본주의 질서를 만들어냈다면, 바로크는 분리로부터 인간의 불완전성을 심화한다. 신적 영향력에서 독립된 인간 능력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지만, 구원의 응답이 없는 침묵 속에서 영원한 고독에 사로잡혀 제 길을 찾아가야 하는 운명에 사로잡힌다. 종교의 위세가 무너진 자리, 바로크의 현재성은 세속에 연결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집단은 기독교다. 바로크 양식은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마케팅전략으로 활용되었다. 숭엄의 효과는 회화와 조각, 건축의 유기적인 무대연출로 구성된다. 표상뿐인 세계는 구원과 피안을 묘사하지만, 이마저 연극적 장치 아래 구현된다. 종교적 효과와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을 선전하는 광휘의 스펙터클 뒤로 바니타스 미학이 공허의 생채기를 남긴다.

바로크적 현재란 선적인 시간질서가 무너진 심연의 수면으로 떠오른 표상이다. 표상은 어둠으로부터 미립자로 구성되어 끊임없이 증식한다. 바로크 미술의 촉감적 사물과 영화적 공간은 시각의 동세를 반영한다. 색이 형을 넘어서고, 개별성은 음영 아래 하나의 덩어리가 되며, 얼굴을 가린 가면이 거울에 난반사된다. 영원성을 추구하지만 세계는 결국 죽은 자연물의 흔적으로서 ‘나투르 모르트’(Nature Morte)이자 정물화(still life)이다. 본질까지도 허상으로 구성된 세계는 죽음을 왜상(歪像)처럼 남기며 알레고리를 증식한다.

저자는 인간의 정신과 세계를 분리하는 데카르트 대신, 세계로부터 미세한 단위로 지각하는 인간 지각으로부터 정신을 이끌어내는 라이프니츠를 바로크 철학의 본령으로 삼는다. 어둠 속에 서로 연결되어 패턴의 연속체를 구성하는 바로크 회화의 형상을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와 모나드론에 어렵지 않게 연결시킨 문장들은 오랜 기간 바로크를 연구해온 저자의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다. 광휘와 침묵이 무한 반복하는 바로크미학의 양극성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것은 책의 강점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다시 읽은 질 들뢰즈의 바로크적 세계관을 가져와 주름으로 만들어진 내재적 자율성 아래 무한한 증식과 자기분열의 세계를 비춘다면, 다른 한편에서 주체와 타자의 경계가 심연에 묻히는 불안과 결핍을 읽는 지점은 바로크의 상이한 해석들을 불안과 가능성 사이 진동으로 울려낸다.

책의 구성은 위계를 두고 대칭을 이루기보다 자의적인 키워드들을 추출하여 주관적으로 배치된다. 예의 미세지각적 접근은 바로크적 세계관을 다른 시공의 면면과 공명시킨다. 신비주의, 모노크롬회화 등 다방면에 연결하는 서술은 바로크를 보다 확장된 시간으로 해석하는 것이자, 바로크의 거울에 비춰 상이한 역사를 서술하고자 하는 ‘바로크적’ 시도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크를 보편적 세계관으로 확장하는 시도는 탈역사적 비약의 효과를 내기도 한다. 단적으로 동양화의 여백을 바로크 테네브리즘(Tenebrism)의 역전된 형태로 접근하는 시도는 동양사상의 내용과 맥락을 변별하지 않는다. 설령 바로크시기 유럽 선교사들이 중국에 왕래한 기록이 있고, 이들이 바로크 미학에 영감 받았다 하더라도 바로크적 주체는 유한성과 불안으로부터 다시금 주체를 향한다는 점에서 동양화의 여백과는 의미를 달리한다. 그렇기에 독자는 바로크를 인간 보편의 미학적 사유로 끌어올리는 확장된 ‘바로크적’ 사유로 성찰하는 한편, 역사적 매듭으로서 17세기 바로크미학의 특수성을 인지할 필요가 있겠다. 이는 작가가 주장한 ‘바로크적’ 사유를 보다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것인 바, 덩어리로서 탈역사적 시간을 관조하는 동시에 미세지각의 촉수를 섬세하게 뻗어 역사의 주름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 남웅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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