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남화연 가브리엘

〈코다〉 알루미늄 파이프, 황동 파이프, 에어블로어, 에어컴프레서, 진동모터, 튜브, 레코더 마우스피스, 플루트, 호른, 트럼펫 가변크기 2022

시간은 이야기를 요청한다. 이야기 없는 지속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이야기다. 물론 시간의 성격마다 이야기의 종류가 달라진다. 혹은 그 반대이다. 《가브리엘》에 등장하는 시간 역시 하나의 이야기는 아니다. 전시장에서는 사라진 시간, 반복되는 시간, 암시하는 시간이 객관적 시간과 함께 흐른다. 그에 따라 사라진 이야기, 반복되는 이야기, 암시하는 이야기가 나름의 연결고리를 찾아 전개된다. 이때 보는 자의 위치에서 감지하는 시간은 이 모든 시간의 중첩이다. 이 중첩은 대체로 독립적인 것들, 거리를 둔 것들 사이의 결합이다. 전시는 전체적으로 묵시적인 분위기를 띤다. 더 근사치로는 여러 시대의 묵시적 장면 전후가 잠재하는 선별적인 구성에 가깝다. 이때의 사물과 장면은 상징이면서 현실이다. 그러나 이 묵시록은 한 가지 세계의 종료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요컨대 묵시록은 큰 시차를 두고 반복된다.
전시의 시작과 끝은 긴 관을 가진 여럿의 나팔 〈코다〉와 함께한다. 나팔은 전시장의 가장 낮은 곳부터 가장 높은 곳까지 수직, 수평, 사선을 그리며 공간을 가로지른다. 관의 입구에 대고 아무리 큰 숨을 불어넣는다 하더라도 나팔을 진동시키는 일은 요원해 보인다. 포기한 소리에 관해서라면 바벨탑처럼 위태롭게 겹쳐 올린 플루트도 마찬가지다. 나팔을 연장하는 긴 관에는 더러 청갈색의 녹이 슬었다. 어쩌면 나팔은 긴 관에 녹이 피어오르는 동안 이미 여러 차례 울리며 묵시의 과정을 반복해왔는지도 모른다. 이 반복은 기원전 2000년부터 17세기까지 약 3,800년에 걸친 역사를 가진 마야 문명부터 지금 화성에 있는 탐사 로버 퍼서비어런스(Perseverance)까지를 경유한다. 탐사 로버가 매일 전송하는 화성의 이미지는 영상 최첨단 항공 매핑 기술인 라이더(LIDAR, Lighting Detection And Ranging)로 밝혀낸 과테말라 북부 밀림 속 마야 문명 유적의 이미지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라이더는 공중에서 다량의 레이더 펄스를 발사하고 그 빛이 물체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것을 탐지해 3차원으로 그려낸다. 그것은 빛의 과거로 이루어진 이미지다. 영상 〈가브리엘〉에 등장하는 나뭇가지 사이로 스미는 햇살 역시 그 자체로 과거다. 약 8분 전의 태양이 이글거리며 만들어낸 빛이 초속 30만km로 날아와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을 보게 하는 가시광선이 된다. 지금 보이는 것은 지금이 아닌 것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셈이다. 결국 지금을 보는 것은 과거를 통해 보는 것이므로, 보는 자는 언제나 미래에 있다.
전시 《가브리엘》은 도상학적 해석의 여지를 충분하게 열어놓았다. 말없이 정면을 응시하는 아이들, 수태고지 그림의 부분, 창문과 불꽃, 빛과 기둥, 나팔, 죽음과 생명의 상태가 공존하는 식생은 전시 전체의 모티프로서 반복되는 시간을 묵시하는 표상으로 기능한다.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회임을 알린 가브리엘의 형상은 여럿의 그림에서 반복된다. 수태고지 그림에 등장하는 창은 영상 〈가브리엘〉의 여성이 내다보는 창이 되었다가, 부식된 백동판으로 낸 창 〈창문  -  꿈〉과 이어진다. 나팔이 연장된 관의 굵기와 위태로운 기울기에 비추어 전시장의 기둥은 상대적으로 항구적이고 단호한 느낌을 준다. 늘어선 기둥, 열주는 다시 영상 〈가브리엘〉의 그림 속 기둥이 되었다가, 인적 없는 지하 공간의 기둥이 되었다가, 아이들이 기대선 나무의 줄기가 된다. 그것은 시대를 불문한 신전의 회랑에 나란히 늘어선 기둥이자, 현재를 과거로부터 떠받치는 기둥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기둥이 벌린 틈에 아무런 생명이 등장하지 않는 세계가 도래할지도 모를 일이다. 죽은 잎과 살아있는 뿌리를 함께 가진 식물은, 생동하지만 살아있는 것이 아닌 그림 속 꽃과 다르지 않다. 생명은 끝없이 소멸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생명이 인간의 상식 밖에 있기를 기대한다. 거기에 아직 보지 못한 세계가 있기를 염원한다. 그런 점에서 묵시는 영구한 회귀로써 도래한다.
시간은 말이 없다. 따라서 시간은 그 자체로 직관이다. ‘추상이나 일반화 또는 논리적 추론 등을 통해 얻어지는 매개적 지식과는 달리, 순간적으로 직접적인 지식을 낳는 특별한 인식 행위’ *인 직관은 언어로 환원될 때 불완전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현재를 지연시킬 수 없는 작가의 생각은 이 모든 시간의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을까? 남화연은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구상한다. 그것은 물리적으로는 비가역적이지만 관념적으로는 가역적이다. 그 구상은 몇몇 표상으로 드문드문 드러난다. 아직 보지 못한 것에 관해서 묘사할 수는 없지만 암시할 수는 있다. 이는 과거의 방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미 지나가서 보지 못한 것에 관해서도 묘사할 수는 없지만 짐작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과거와 미래는 과연 차이의 방향이 선명한 선형적 흐름이기만 할까? 직관하고 있는 시간의 감각을 형상과 형태로 드러내는 일 자체는 애초에 한계를 포함한다. 시간을 붙잡아두려는 요청은 그 과정에서조차 시간을 집어삼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럼에도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인지할 수 있는 시간관념의 한계 속에서 예술은 끝없이 그 바깥을 상상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쏘아 올린 빛이 되돌아오는 시간 동안, 안팎은 서로의 위치를 바꾸며 소멸을 침묵으로 응시한다. 그때가 되면 귀청을 때리는 요란한 나팔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끝내 시간은 이 모든 여정을 이야기로 수렴시킬 것이다.

* 『철학소사전』한국철학사상연구회 편역 동녘

〈가브리엘〉 단채널 비디오, 6채널 사운드 20분 4초 2022
〈새로운 사원〉(사진 앞) 유토, 천, 금박지 가변크기 2022 사진: 김상태 사진 제공: 에르메스 재단

박수지 | 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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