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정진용 샹들리에

정진용과 홍경태 〈샹들리에  -  인간, 道雖天道學則東學〉스피닝 스페어(spinning spare), 패널에 한지, 철 가변 크기 2022

서세동점의 국제정세와 조선왕조의 몰락 시기에 나타난 수운 최제우의 동학이 2022년 창도 162주년을 맞았다. 북접의 최시형과 남접의 전봉준 등이 봉기한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은 128년 전의 일이다. 3 ·1만세운동을 주도한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와 그의 후예들이 펼친 독립운동사에 동학이 끼친 영향 또한 100년 안팎의 한국 근현대사 현장에 아로새겨져 있다. 천도교에서 원불교, 대종교, 증산도 등에 이르는, 동학의 자장 안에 있는 종교들 또한 근현대 한국의 정신문화를 일군 주역이다. 갑오농민전쟁, 3 ·1운동, 4 ·19의거, 광주항쟁, 유월항쟁, 촛불혁명 등 한국인의 저항정신의 뿌리를 이야기할 때도 동학정신은 역사적 과거가 아닌 현실 속의 살아있는 정신으로 호명되곤 한다.
이렇듯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정신문화 자산으로서 동학은 예술을 통한 재해석 작업으로도 뚜렷한 흐름을 만들고 있다. 전주에 자리 잡은 아트이슈프로젝트가 2022년부터 시작한 동학예술프로젝트는 ‘동학정신 예술로 태어나다’라는 주제를 걸고 연쇄 개인전을 열고 있다. 첫 전시 《이철량 : 우주의 꽃》은 낱낱의 점으로부터 온 우주에 이르는 조화의 이치로서 천지와 인문을 통찰하는 동학정신을 표현했다.
두 번째 전시, 《엄혁용 : 사고하는 존재》는 작가의 1994년 작 〈碑  -  시간 속으로〉를 소환하여 동학정신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다. 이렇듯 현대미술 작가들 개별의 역량을 집중하여 조선시대 말기의 학문 / 종교를 동시대의 시대정신으로 갈무리하는 기획은 《정진용 : 샹들리에》로 이어졌다.
수묵과 채색 및 오브제를 사용한 평면회화 작업을 해오던 정진용은 이번 전시에서 설치와 영상을 포함한 다매체 실험 작업들을 선보였다. 대표작은 설치 작업 〈샹들리에  -  인간, 道雖天道學則東學〉이다. 천장에 매달린 구체에는 동학의 시천주 문구들이 빛으로 나타난다. 그 아래에 드리운 샹들리에 선율의 끝에는 먹물이 흘러내리는 모필을 매달았다.
그 붓끝에서 떨어지는 먹물은 8장의 한지 패널 위에 ‘道雖天道學則東學(도수천도학즉동학)’ 여덟 글자를 드러낸다. ‘도로 말하자면 하늘의 도이지만, 학문으로는 동학이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이 텍스트를 통하여 그는 동학이 종교와 학문 양면에서 유의미한 정신문화 자산이라는 점을 깊이 새긴다.
샹들리에라는 서구문화의 상징을 먹이라는 한국 / 동아시아 전통문화 요소와 결합한 이 설치 작업은 인내천 사상에 뿌리를 둔 동학의 핵심을 ’도와 학‘의 측면에서 밝혀놓은 텍스트를 강조함으로써 동학에 관한 관람자들의 인지를 확장하도록 촉매한다. 그것은 이 문구에 담긴 뜻, 그러니까 종교적 영성을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 삼았던 조선시대 정신문화의 광활한 지평을 드러냄으로써 동학정신의 현재성을 재확인시키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구작 〈촛불사회〉(2018)와 맞닿는다. 광화문광장의 촛불혁명을 다룬 이 평면 작품을 통하여 그는 희망과 밝음, 정화 등의 이미지를 가진 촛불이 집단지성의 시민혁명으로 연결된 데 초점을 맞췄다. 신작 설치 작품 또한 그러한 촛불의 힘이 동학의 인본주의와 평등사상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을 각성하여 역사 속의 사상을 현실 속의 정신으로 호명하고 있다.
2019년 작 비디오 클립 〈3인의 영웅들〉은 한국 현대사의 정치적 영웅 3인과 작가 자신과 부친-조부에 이르는 3대의 얼굴을 교차 편집하여, 질곡의 시대를 살아온 자신의 가족사를 역사 속에 대입하는 작업이다. 국가의 역사와 개인의 역사가 결국 하나의 연결고리 속에 존재한다는 점을 성찰하는 이 작품은 역사의식 속에서 자기정체성을 재발견하고자 하는 탐구의 과정이다. 3점의 〈민중〉 연작은 먹으로 표현한 사람들 이야기다. 흘러내리는 먹선의 번짐으로 인하여 화면 전체가 하나의 면으로 확장하는 과정을 보여주거나, 또는 붓으로 찍은 점들의 연쇄가 미묘한 먹빛의 화면을 창출하는 과정을 통하여 민중의 본성을 파고 들어가는 작업이다.
이 전시는 동학의 도시 전주에서 열리는 동학예술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열렸다는 점에서 뜻깊을 뿐만 아니라 정진용의 작품세계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떻게 확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정진용의 작품이 역사적 풍경을 담은 장면의 서사에서 역사적 사건을 담은 사건의 서사로 전환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먹그림을 자신의 장르로 가진 예술가에게 주어진 전통적 회화술을 동시대적 감성으로 잇고자 하는 과제를 그는 매체특정적 관점만이 아닌 의제특정적인 설정으로 훌쩍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동학의 개벽사상을 자신의 정신문화 자산으로 세우고 정진하기 시작한 정진용은 목표로서의 전통을 과정으로서의 전통으로 확장하면서 새로운 사건의 서사를 향하여 진화하고 있다.

김준기 |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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