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가택연금- Home sweet home

  • 《가택연금  -  Home sweet home》 아트스페이스 공-원 전시 전경 2022
  • 강홍구 〈녹색연구 -  서울  -  공터  -  창신동 2〉캔버스 위에 피그먼트 프린트, 아크릴채색 140×200cm 2019 챔버1965 전시 전경 2022
  • 정성진 〈해몽경〉(사진 가운데) 3D애니메이션, 24인치 모니터, 알루미늄 프로파일, 강화유리, 3D 프린트 2분 29초 2022 상업화랑 을지로 전시 광경 2022
  • 서동욱 〈여름  -  아침2〉(사진 오른쪽) 캔버스에 유채 116.5×91cm 2018 상업화랑 용산 전시 광경 2022

예술가에게 집이란 지역을 초월하여 과거부터 현재까지 하나의 우주에 비견되는 공간으로서 관찰의 대상이 되어왔다. 시대가 지나며 바뀐 것은 삶의 본질적 요소가 되는 ‘주(住)’의 규모와 의미다. 그래서 한 작가의 작품은 제작연도에 따라, 그리고 그가 거처를 옮겨감에 따라 같은 ‘실내’에서도 조금씩 달라진 생각들을 지속적으로 반영하게 되었을 테다. 그렇기에 집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당연히 예술의 소재 및 주제가 되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집에 강제로, 얼마간 묶여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2020년에는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실내 공간에 대한 재조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고, 작가들은 세태와 발맞춘 작품을, 기획자들은 실내 공간에서 진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여럿 발표했다. 당시에는 초유의 사태를 맞아 비좁은 공간에 갇혀 정신적으로 극한에 내몰렸던 시민들의 삶과 거주권에 관한 논의도 신선한 주제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2022년 하반기, 강력한 록다운 제재가 종료된 시점에서 ‘가택연금’이라는 주제는 오히려 철 지난 논제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집은 뿌리내릴 곳이 아니라 언제든지 비워주어야 할 곳으로 변화해왔으며, 대한민국은 언제나 심각한 주택난을 겪고 있고, 끝내 소유할 수 없는 집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개인이 실시간으로 무너지고 있는 국가이기에 해당 주제가 시의성이 떨어진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기자는 작금의 0.5인 가구나 1~2인 가구의 단출한 생활 규모를 떠올리게 하는 소규모 공간, 그것도 과거 주거 목적으로 사용되던 집을 개조해 만든 전시장을 《가택연금  -  Home sweet home》(이하 《가택연금》)의 바탕으로 삼았다고 한들, 전시가 신선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더불어 해당 전시를 굳이 들여다보고자 한 이유는, 《가택연금》이 근래 더욱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는 전시 공간들 간의 연계로 더 큰 화제를 불러오고, 이로써 같은 작가들의 더 많은 작품을 노출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내는 전형적인 ‘네트워크형 전시’의 면모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기에서는 4곳 장소에서 열리는 전시의 구조를 묘사하기보다 영리적 목적을 갖는 화랑이 중심이 되어 기획한 전시가 각 공간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와, 작은 공간에 참여 작가들의 다른, 그러나 엇비슷한 규모의 작품들을 내거는 일이 어떠한 의미를 획득하는지를 되물어야 하겠다. 강홍구, 노충현, 박진영, 서동욱, 안경수, 옥정호, 윤정미, 정성진, 정용국, 정재호, 최선의 작품은 각 공간을 채우고 있다. 한 공간에 참여 작가들의 작품이 모두 들어가는 형태다. 다시 말해, 을지로 소재 상업화랑에도 작가 11명의 작품이 있고, 공  -  원에도 작가 11인의 작품이 걸려 있다. 다른 공간에서도 마찬가지다. 한 작가의 작품이라 해도 개별 공간에 담긴 작품은 코로나19 이전부터 이후까지의 집안과 거주자와 함께하는 사물들, 그리고 실외 공간에서 기인한 상황들을 포괄하고 있기에 상이한 모양새이지만, 작품들이 연작에 가까워 보인다는 인상과 전시가 작가들의 구작으로 다수 구성되었기에 익숙하다는 느낌을 지우기는 어렵다. 전시 장소 네 곳에 방문한 뒤 남은 것은, 개별 작품에 관한 심층적인 감상보다도 작가들의 작품을 여러 공간에 모두 넣어놓는 형태의 전시가 ‘가택연금’이라는 전시 제목을 강조하는 것 외에는 달리 중점적으로 생각해볼 만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아 보인다는 감상이었다.
《가택연금》의 전체를 보기 위해 상업화랑 을지로 및 용산, 공  -  원, 챔버1965에 전부 들른 관람자는 적어도, 오늘의 미술 현장에 애호의 감정 이상의 정보를 갖고 흘러넘치는 전시 정보 중에서도 ‘이 전시’를 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미 일정 시간 이상 참여 작가들의 활동을 지켜본 관람자일 확률이 높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관람자들에게 《가택연금》을 구성하는 작품들과 전시 방식은 친숙할지언정 새롭지만은 않은 이벤트로 비쳤을 것이다. 그러나 반복되는 구작의 나열에도 긍정적인 면모를 찾자면, 바로 그 작품들의 연관성 덕택에 네 개 공간에서 열린 전시는 별다른 설명을 추가하지 않아도 무리 없이 하나의 기획전으로 묶이고, 또 읽힌다는 점이다.
그러나 《가택연금》은 11명 작가의 개별 작품조차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아쉬움을 남긴다. 기획자가 상업화랑의 본래 공간에 익숙했기 때문일까, 상업화랑 을지로의 경우는 갤러리에 알맞은 밀도로 작품이 배치되어 각 작품의 감상 가능성이 어느 정도 명확히 확보되었다. 반면, 골목길에 위치한 1940~ 60년대 축조된 한옥을 개조해 만든 공-원, 챔버1965같이 공간 자체에 역사적인 서사가 응축된 전시장에서조차 벽면에 작품 연작을 다닥다닥 붙여 놓은 방식이나 한 작가의 커다란 회화 주변에 다른 작가들의 소규모 작품을 가깝게 배치한 방식은, 설령 의도적이었다고 할지라도 작품들을 생활공간에 적재되어있는 물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상업화랑 용산에서는 《가택연금》의 취약한 구성이 뚜렷이 나타났다. 서로 다른 작가들의 맥락이 상이한 영상 작업이 하나의 작은 모니터에서 연이어 재생되었을 때는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대부분의 전시에서 영상 작품은 작품의 주제와 구성을 충분히 고려하여 한 작가에게 주어진 모니터나 스크린에서만 상영된다. 그러나 이처럼 본래 커다란 스크린을 염두에 두고 제작되었을 영상이 소규모 실내 공간 전시에 알맞은 다른 작가의 영상과 붙어 재생될 경우, 작가의 의도가 관객에게 명확하게 가닿기란 어렵다. 또한 전시장의 규모에 비례해 화분과 작품들이 놓인 받침대의 골조가 컸던 나머지, 벽에 걸린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어려운 구조가 되어버렸다.
공간들의 연계로 이루어진 형태의 《가택연금》은 참여 공간끼리의 관계를 굳게 다지는 계기로써 상생의 의미를 창출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전시의 질을 높이는 본질적 요소가 되지 못한다는 점을 오히려 역설한다. 이렇게 여러 공간에서 참여 작가들의 작품을 작게나마 전부 보여주려는 ‘하나의 전시’는 기획자에게는 매력적인 도전 과제로 느껴질 수도 있을 테지만, 그것이 작가들의 작품을 함께 감상하는 것도, 따로 감상하는 일도 해치는 목표라면 과감하게 수정되었어야 한다.

조현아 |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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