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안 조나스 Joan Jonas

“안으로 접혀 영혼의 심장을 가격하는 빛”1
– 조안 조나스, 세기를 건너뛴 ‘비디오 아티스트’

서현석 연세대 교수

Artist

© Joan Jonas/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제공: 글래드스톤 사진: Maximilan Geuter

조안 조나스/ 1936년생. 매사추세츠 마운트홀리요크대 미술사 학사 학위 및 터프츠미술관(보스턴미술관) 부속학교 조각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조각 석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뉴욕 드로잉센터, 뉴욕 현대미술관, 런던 테이트모던, 포르투 세랄레스미술관, 상파울루 피나코테카, 마드리드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 뉴욕 디아비콘, 뮌헨 하우스데어쿤스트 등에서 작품을 선보였으며, 단체전 카셀 도큐멘타 5(1972), 6(1977), 7(1982), 8(1987), 11(2002), 13(2012), 제28회 상파울루비엔날레(2008),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2015), 제13회 상하이비엔날레(2021), 제5회 코치-무지리스 비엔날레(2022) 등에 참여했다. 2018년 교토상 및 2024년 백남준 예술상을 수상했다. 뉴욕에서 거주하며 작업한다


“그녀에게도 운명이 있을까?”2
드로잉과 영상으로 이뤄진 설치 작품 〈강으로부터 심해의 평원으로(Rivers to the Abyssal Plain)〉(2021)에서 남성 화자가 질문을 던진다. 화면에는 85세의 조안 조나스가 분주하게 해변을 오가는 모습이 보인다. ‘운명’이란 걸 삶의 중요한 사건으로 조망할 수 있다면 두 자릿수를 꽉 채워가는 연륜의 그에게 ‘비디오’라는 주제어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미술사를 공부하고 조소 작업에 몰두하던 20대의 그가 무용에 눈을 돌리면서 뉴욕에서 창작 활동을 막 펼칠 무렵 ‘운명처럼’ 소니 DV-2400 비디오 포타팩(Video Portapak)이 세상에 나왔다. 백남준을 비롯 비토 아콘치, 브루스 나우먼, 피터 캠퍼스 등 이 새로운 창작 도구를 집어든 예술가들은 당시 동시대 미술을 관통하며 흐르던 뜨거운 혈맥을 더불어 머금었다. ‘매체 성찰’이라는 모더니즘의 강령이었다. 훗날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북해에서의 항해 (포스트-매체 조건 시대의 미술)』(2017)3에서 돌이키듯, 회화와 조소로부터 불붙은 매체로의 환원은 산불처럼 번져
사진과 영화를 장악했고 비디오라는 가전제품이 미술관에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강림했다. 아방가르드 영화 작가 홀리스 프램튼의 표현대로 사진이 “뮤즈(예술의 신)의 배에서 잉태되어 커머스(상업의 신)의 품에서 양육되었다”4면, 비디오는 커머스의 배에서 잉태되어 뮤즈의 품으로 입양 되었다. 그리고 모더니즘의 규율 아래 훈육되었다. 그것은 곧 조나스의 ‘운명’이기도 했다.

모더니즘은 스스로를 바라보려는 주술이었다. (마침 거울을 소품으로 활용하고 있던) 조나스에게 비디오는 이를 위한 도구였다. 이미 익숙한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타인처럼 낯설고 심지어 “불편한”5 ‘나’를 재발견하고 새로운 의미를 탐색하기 위한 바라보기. 이를 통해 조나스는 인간을 바라보고 우주를 바라보았다고 말한다면 다분히 낭만적으로 들리겠지만, 백남준상 수상 작가로서 펼친 《인간 너머의 세계》6라는 회고전의 제목은 60여 년 동안 꾸준히 이어진 창작자의 행보를 통시적으로 조감하고 함축한다. 시간을 관통하며 돌이키는 작품 표면 너머의 세계는 또한 역설적이게도 지극히 인간적이다.

〈Double Lunar Dogs〉(스틸)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24분 4초 1984

〈시내, 강, 비행, 패턴 III〉3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4개의 차이나 마커 드로잉, 종이연, 설치 가변 크기 2016/2017

“움직임을 지속하려는 의도를 우리는 운명이라고 부른다.”7
1960년대의 작가 지망생 조나스는 미술사를 공부하고 조소에 몰두하던 중 트리샤 브라운, 이본 레이너, 스티브 팩스턴 등 저드슨 무용단을 꾸리며 무용의 새로운 방법론을 개척하고 있던 무용가들과 교류하며 평생 작품 세계의 근간이 될 ‘몸’의 영역으로 뛰어들었다. 1970년 일본 여행 중 포타팩을 구입했을 때, 30대를 맞은 그는 준비된 퍼포머였다. 준비된 퍼포머에게 카메라, 테이프 녹화기, 흑백 모니터로 구성된 포타팩은 곧 자유였다. 카메라 앞에 서면 작업실은 극장이 되었고, 녹화가 끝나면 현상이라는 후반 과정을 거칠 필요 없이 녹화기에서 바로 꺼내는 테이프가 완성된 작품이었다. 특히〈바람(Wind)〉(1968)과 같은 이전 작업에서 이미 다뤘던 감광필름으로는 상상도 못하던 실시간 재생이야말로 비디오가 선사하는 (당시로서는) 기적 같은 특혜였다. 작업실의 편안함 속에서 몸에 집중하며 스스로를 즉각적으로 모니터링하거나 결과를 바로 확인해 보는 것은 ‘커머스’가 내린 대단한 축복이었다.

이 마술에 힘입어 초기 비디오 아티스트들이 시도한 퍼포먼스와 비디오의 융합은 다른 한편으로는 사상적인 모순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퍼포먼스 아트는 마이클 프리드가 말했던 작품의 ‘사물성(objecthood)’으로부터 보란 듯이 화려하게 탈주로를 질주했지만 그렇게 기껏 확보되며 미술계에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발산한 신체의 비릿한 물성이 기계에 의해 다시 흑백의 (회화적) 평면으로 압축된 것이다. 하지만 분명 비디오는 단순한 평면 매체가 아니었다. 기계가 촉발시키는 어떤 입체적이고 역동적이며 과정적인 속성이 매체의 정체성으로서 아른거렸다. 전자장이 물씬 피어오르는 비디오 화면은 실물과 허구의 어중간한 간극에서 모더니즘의 간극을 기묘하게 채광했다. 과연 비디오란 뭘까? 감광필름과 확연히 다른 전자 매체만으로서의 고유한 특징은 뭘까? 퍼포먼스의 신체성을 박제해 버리는 비디오의 폭력성을 어떻게 몸으로 들여서 융합할 수 있을까? 비디오는 분명 모더니즘을 탈피하려는 동시대 미술의 원심력에 가속도를 붙여주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비디오의 이탈에 날개를 달아준 것 역시 ‘매체 성찰’이라는 모더니즘의 추진력이었다.

“내 작품은 언제나 ‘층 쌓기(layering)’에 관한 것이다. 인간 뇌가 그런 식으로 작동하니까. 동시에 여러 생각을 하거나, 뭔가를 바라보면서 또 다른 이미지를 중첩시킨다.”8
대표작 중 하나인 〈버티컬 롤(Vertical Roll)〉(1972)에서 기계와 신체의 인터페이스를 긴밀하게 밀착시킨 것은 기술적 능숙함이 아니라 카메라 신호가 모니터에서 동기화되지 않는 비정상 상태의 기계적 불안정함이었다. 당시 브라운관 텔레비전의 보편적인 기능 중 하나였던 수직 동기 보정 스위치를 살짝 돌리는 것만으로 간단히 유도할 수 있는 효과를 이용, 조나스는 카메라에서 전송되는 본인의 신체 이미지가 모니터에서 위아래로 흔들리게 만들고 또 다른 카메라로 그 불안정한 화면을 녹화했다. 다른 비디오 아티스트들이 실시간 모니터링을 위해 애용한 충실한 모니터를 조나스는 장치와 인식을 교란하는 불온한 도구로 역이용한 것이다. 딸꾹질하듯 요동치며 미끄러지는 프레임들은 환영성으로부터 신체를 탈구시키고 파편들의 증식으로 그 물성을 변환한다. 여기에 근원이 모호한 둔탁한 타격음이 프레임의 요동과 어중간하게 동기화되며 긴장을 더한다. (할머니의) 스푼으로 거울을 두드리거나 발을 구르고 손으로 바닥을 치는 동작이 음원으로 가장하기도 하지만, 〈짖기(Barking)〉(1973)에서 개 짖는 소리와 화면에 언뜻 보이는 개 모습의 동기화에 대한 의심에 휩싸이듯,9 우리는 불확실한 상황에 놓인 채 감각의 구타를 당한다. 현실을 형상화하는 비디오의 의도된 임무는 이렇게 지극히 간단한 조작에 의해 불확정적이고 불완전한 떨림으로 치환된다.

나우만, 아콘치, 캠퍼스, 백남준 등 포타팩 세대의 비디오 아티스트들과 조나스를 가르는 것은 (포타팩의 유매틱에서 베타캠을 거쳐 Hi-8, DV, HD, 4K 등으로 변신해 온 비디오 매체에 평생 충실했다는 존경스러운 사실 외에도) 그가 무용가처럼 몸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조나스에게 무용이라 함은 동작의 전문적 조형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언제나 공간부터 탐색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몸을 움직임으로써 질료와 형식을 발전시키듯 공간에 변형을 가한다.10 거울, 콘, 연 등의 오브제를 운용하는 동기 역시 공간과 연관된다. 전기 매체를 몸의 유기체적인 공모자로 포용한 것은 그렇기에 가능했던 일인지 모른다. 〈버티컬 롤〉에서 평면으로 압축된 신체는 도리어 중층적인 구조를 기계와 합작하며 물질과 재현 사이의 복합적인 층위들을 들춰낸다. 격발의 몸짓은 유기적 운동이자 기계적 결함이며, 스스로를 여성적 도상으로 대상화시키는 동시에 창작 주체 로서의 권위를 성립시킨다. 격렬한 폭력성과 규범으로부터의 비행은 동의어처럼 중첩된 의미를 공유한다. 그 장치적 율동은 심장을, 생명을 닮는다. 비디오는 더 이상 몸짓을 전람해주는 매개가 아니라 몸짓 그 자체다. 신체와 형상의 접점에서 여러 층위의 감각과 의미를 탐색하는 몸짓.

〈버티컬 롤〉(스틸) 흑백 19분 53초 1972

“나는 시, 조각, 필름, 댄스 사이에 큰 차이를 느끼지 않는다. 내게 몸짓은 하나의 드로잉과 같은 무게를 지닌다.”11
조나스의 작품을 유형화된 질료나 매체로 규정하자면 서로 구분될 수밖에 없는 각 영역은 ‘몸짓’으로 융합된다. 조나스 작품 세계의 중추가 되어 온 드로잉은 평면의 재현체이기 전에 몸짓의 과정이자 결과이며, 비디오 역시 마찬가지이다. 단채널 비디오 작품들 중 ‘픽션’에 가장 가까운 〈더블 루나 독스(Double Lunar Dogs)〉(1984)에서조차 형상은 서사가 아닌 순수 몸짓의 맥락에서 발생한다. 너무나 오래 우주를 비행하느라 “출발지도 목적지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두 인물이 마치 기억을 재구성하려는 듯 반복하는 유리 위의 드로잉은 (서사적 당위성을 거역하면서까지) 최종 결과로서의 재현체가 아닌 신체 행위로서 부각된다. 드로잉, 연, 영상 등으로 이뤄진 〈시내 강 비행 패턴 III(Stream or River, Flight or Pattern III)〉(2016/2017) 역시 벽에 투사된 이미지를 따라 드로잉하는 행위를 진행형의 거친 신체 과정으로 보여준다. 비디오는 드로잉을 평면이 아닌 ‘몸짓’으로 재발명하도록 해준 것이다. 이는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서도 조나스의 영상 작품들이 화려한 특수 효과에 의존하지 않고 수공예적인 과정에 충실한 이유를 설명해준다.《끝없는 드로잉들(Endless Drawings)》12이라는 한 전시 제목이 시사하듯, 몸짓으로서 드로잉의 완성은 끊임없이 유보되며, 따라서 시간의 중심은 생겨나지 않는다.

1999년부터 2000년까지 이어진 ‘마이 뉴 시어터(My New Theater)’ 연작은 제목 그대로 ‘새로운 극장’을 제안한다. 모니터 화면을 프로시니엄에 상응하는 프레임으로 둘러싼 간단한 조형 구조는 비디오 화면을 단지 평면 재현체로 여기는 가정적 관성으로부터 작품을 ‘새롭게’ 재편성한다. 보는 행위를 재맥락화한 것이다. 이는 스스로를 재발굴하려는 몸짓이기도 하다.

〈강으로부터 심해의 평원으로〉 드로잉,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가변 크기 2021

〈빈 방〉 12개의 조각(철재, 토리노코 종이, 조명)으로 구성된 멀티미디어 설치,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수제 종이에 그린 50점의 잉크 드로잉, 고래 조각(표류목과 금속), 제이슨 모란의 오리지널 피아노 작곡 2025

“바다와 존재는 공범이다. 그렇다면 ‘생각’은 언제 생겨난 걸까? 혹시 바다의 한없는 중심성과 관련이 있을까?”13
초기 비디오의 매체적 특징은 아티스트의 시선을 통해 우러나왔다. 카메라를 향한 아티스트의 시선이 모니터를 통해 본인에게 “부메랑처럼” 돌아감으로써 그 주체와 대상이 일치된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이러한 순환 구조를 ‘나르시시즘’적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14 (‘나르시시즘’을 ‘자기애’라는 통상적인 번역어로 옮기지 않는 이유는 비디오의 순환적 시선이 자기에 대한 애정으로 치우치지는 않기 때문이다). 모순적이게도 주체와 대상을 통합하는 시선은 분열된 주체를 등극시킨다. 크라우스가 말하는 비디오 매체의 ‘나르시시즘’적 특징은 스스로 만든 폐쇄적 순환성에서 주체의 정체성이 미끄러진다는 모순에 그 핵심이 있다.

“[나누어진 여러 주체들 중에서] ‘나’는 어디에 있는가?” 크라우스가 라캉을 인용하며 분열에 주목하는 중요한 이유는 이로써 모더니즘이 등극시켰던 중심적인 주체로서의 창작자에 균열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탈중심적 주체성’이라는 철학적 논제가 장치의 원리로 구조화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크라우스는 조나스의 〈버티컬 롤〉이 당시 동시대 미술의 화두였던 공간과 시간을 파편적으로 재구성하기에 그 구조에 위치되는 주체 역시 분열적으로 와해됨을 강조한다. 비디오는 신체의 즉각적인 개입을 초대하면서도 소외의 여지를 만든 것이다. 이것이 비디오 아트의 모순적인 한계이자 확장적인 매력이기도 하다. 결국 크라우스가 조나스 등의 초기 비디오 아트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비디오 아트가 모더니즘을 계승함과 동시에 파기한다는 점에 있다.

조나스의 작품 세계에 인간과 비인간, 신체와 기계, 물성과 재현, 문명과 생태계라는 오늘의 뜨거운 화두들을 주입하는 건 어렵지 않다. 수십 년에 걸친 작품들에 꾸준히 등장하는 반려견 및 동물들의 위상을 참조하며 탈인간중심적인 생태학을 꾸준히 실천해 온 아티스트로 추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조나스를 소개하는 테이트모던 홈페이지 역시 1960년대 뉴욕의 활발하고 역동적인 미술 신에서 여러 창작자들과 교류를 한 사실을 강조하며 미술사의 맥락에 그를 위치시키려 한다.15 하지만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로부터 에코페미니즘에 이르기까지 그의 평생을 둘러싼 담론적 유전자들로서는 설명되지 않는 탈시대적이고 탈중심적인 개성 혹은 탈담론적인 유연성에서 그를 찾아야 할지 모른다. 끊임없이 구조를 빠져나가는 진동체랄까. 이 글은 모더니즘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사실 그는 그 그물로부터 훌쩍 벗어나 있다. 그는 형식에 집중하지만 형식주의의 엄중함을 훌쩍 벗어버린 자유인이기도 하다. 그를 진보적인 페미니스트라 부를 근거가 있다면 언어화된 슬로건을 외치며 여성적 도상을 재발명하고 정체성을 수행적으로 확립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시대의 관성으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이다. 정해진 바로부터 이탈하는 끊임없는 움직임을 그는 ‘운명’이라 부르는 건지 모른다.

“그녀를 보라, 때로는 히말라야 산맥처럼 불길하고 때로는 토성의 고리처럼 희미하다.”
“때로 그녀는 한 권의 책처럼 우리의 닫힌 귀에 덧없는 글귀를 속삭인다.”
“누적된 물방울은 그의 자주적 존재, 알록달록한 점박이 무늬”
“그리고 그녀의 소리를 만들어낸다.”16
〈강으로부터 심해의 평원으로〉(2021)에서 젊은 남성 화자는 그를 호명하고 묘사하고 설명하면서 직설, 은유, 상징, 비유 등을 횡단한다. 삼인칭으로 호명되는 타자는 그 주체성을 선언하지 않는다. 고정된 정체성은 가변적이고 불확정적인 파편들로 대체되어 있다. 그는 화면에 보이는 85세의 인간 조나스일 수도 있고, 조나스라는 미술사적 관념일 수도 있으며, 바다 혹은 우주일 수도 있다. 조나스의 말대로 그의 작품에서 매체들이 여러 층을 형성한다면, 그를 통해 수행적으로 성립되는 주체 역시 중층적이다. “유일무이한 까닭에 증식을 거듭하”17는 유동체. 그렇기 때문에 발화 역시 몸짓이다. 주인 없는 빈자리의 발화자. 죽은 매체를 따라 같이 사어(死語)가 되어버린 ‘비디오 아티스트’라는 게 뭔지 이제야 가까스로 설명되는 듯하다.


1 조안 조나스 〈강으로부터 심해의 평원으로〉 2021 중. “안으로 접힌 이 빛은 너무도 가지런하여 눈동자를 가볍게 통과하고 영혼의 심장을 가격한다”라는 영상 내레이션에서 따왔다
2 조안 조나스 〈강으로부터 심해의 평원으로〉
3 로잘린드 크라우스 지음 김지훈 옮김 『북해에서의 항해 (포스트-매체 조건 시대의 미술)』 현실문화A 2017
4 Hollis Frampton “Some Propositions on Photography” Bruce Jenkins (Ed.) On the Camera Arts and Consecutive Matters: The Writings of Hollis Frampton MIT Press 2009 p.6
5 Kasper Bech Dyg “Joan Jonas Interview: Layers of Time” Louisiana Channel https://www.youtube.com/watch?v=WISlYE4dOKw 2026.1.29
6 《조안 조나스: 인간 너머의 세계》 백남준아트센터 2025.11.20~3.29
7 조안 조나스 〈강으로부터 심해의 평원으로〉
8 앞 인터뷰
9 거울을 두드리는 스푼, 하얀 개가 각기 실제 음원일 가능성이 짙다.
하지만 시간은 의혹을 만든다
10 “A Visit to Joan Jonas’ New York Loft” The Museum of
Modern Art https://www.youtube.com/watch?v=tAA
LwOokkY 2026.1.31
11 백남준아트센터 《조안 조나스: 인간 너머의 세계》 전시 리플렛 재인용
12 《Endless Drawings》 Amanda Wilkinson Gallery
2025.9.25~2025.11.25
13 조안 조나스 〈강으로부터 심해의 평원으로〉 자막
14 Rosalind Krauss “Video: The Aesthetics of Narcissism”
October Vol.1 MIT Press 1976 pp.50~64
15 “Five Things To Know: Joan Jonas” 테이트모던 홈페이지
https://www.tate.org.uk/art/artists/joan-jonas-7726/five
things-know-joan-jonas 2026.1.31
16 조안 조나스 〈강으로부터 심해의 평원으로〉 자막
17 같은 출처

2026년 3월호 (VOL.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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