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식 Lee Doo Shik
화가 이두식과 그의 회화세계
임두빈 미술평론, 한국미학미술사연구소장
Artist

〈Dance〉(부분) 캔버스에 아크릴릭 250×200cm 2009
이두식/ 1947년생.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2005년 일본 교토 조형예술대에서 예술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홍익대 미술대 교수로 재직하며 학장, 학생처장, 박물관장, 기획처장 등을 역임했고 제17대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장, 예술의전당 이사 등을 지냈다. 1970년대 초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국내외에서 70여 회의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상파울루비엔날레, 북경비엔날레, FIAC(프랑스), MANIF SEOUL 등 주요 국제전과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 선미술상, MANIF 대상, 제4회 문신미술상, 한국미술공로대상 등을 수상했고, 중국 요녕성 ‘외국인 전문가 영예상’ 1995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Ⅰ
이두식은 1947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화가로 나가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매년 아버지와 함께 서울에서 열리는 국전을 관람하며 화가로서의 꿈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서울예고로 진학 했는데, 이때 교사 백문기를 통해 소묘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이 영향으로 훗날 화가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속적 으로 소묘작업을 했다. 서울예고를 졸업한 후 그는 그토록 열망하던 홍익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당시 홍익대 회화과에는 한국 현대미술의 중추적 화가들이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이두식이 현대미술의 새로운 사조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이들 회화과 교수진의 영향이 컸다고 말할 수 있다. 이두식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그분들의 어깨너머로 앵포르멜의 제작 과정과 추상미술에 대한 토론을 들으면서 현대미술을 어렴풋하게나마 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젊은 내가 현대미술을 지향하게 된 동기였습니다.”1 20대의 이두식이 홍익대를 다니던 1960년대 후반은 앵포르멜 외에 개념미술이나 행위미술, 팝아트, 미니멀아트 등의 다양한 현대미술 사조가 한국 미술계에 밀려와 미술학도들에게 충격과 혼란을 주었을 때였다. 이런 다양한 현대미술 경향의 유입은 진지한 미학적, 역사적 고찰이 결여된 상태에서 피상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더욱 충격과 혼란이 컸을 것이다. 이두식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것저것 새로운 실험을 해보았지만 심리적으로 혼란스럽고 갈등만 심할 뿐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 제대 후엔 홍익대 대학원에 입학했고 회화과 조교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비로소 자신이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두식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회화과 조교생활을 하면서, 차분히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때가 1970년대 초인데, 이 시기에 나는 비로소 나만의 회화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깨닫고 재출발을 했던 셈입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이두식은 비로소 화가로서 본격적인 첫출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두식의 작품세계는 양식의 변화에 따라 크게 보아, 전기(1970년대 초~1987년)의 초현실 주의적 작품 시기와, 후기(1988~2013년)의 표현주의적이고 추상적 작품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생의 기원〉 종이에 연필 80.3×100cm 1972
Ⅱ
1970년대 초, 당시 20대 중반이였던 그는 초현실주의적 화풍을 구사하며 본격적으로 화단에 발을 내디뎠다. 어떤 이는 그 이전 시기인 학창 시절의 앵포르멜적 그림과 기하학적 색면추상화가 있었던 실험기를 첫출발로 보기도 하는데,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그 시기는 혼돈의 연습기이지 결코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출발 시기는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두식도 스스로 말하기를 “화가로서의 나의 첫 출발점은 초현실주의였다”고 밝힌 바 있다.
이두식이 화가로서 본격적인 첫 발걸음을 옮길 때 왜 극사실적인 초현실주의 양식을 선택했는지는 그의 말에서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가 있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소묘력이 남달리 탁월했던 사람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처음부터 소묘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손으로 그리는 소묘를 가지고 극사실 회화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림의 주제를 초현실주의로 해석하기로 했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두식은 소묘력이 탁월했던 데다가 현대미술을 하고자 했기에 현대미술의 중요한 사조의 하나였던 초현실 주의 회화를 선택했던 것이다. 더욱이 초현실주의 미술에는 극사실적인 표현 경향도 있어 그러한 점이 묘사력이 뛰어났던 이두식에게 극사실적 초현실주의로 향하게 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초현실주의는 이성과 논리의 울타리 너머 무한한 넓이로 존재하는 무의식의 불가사의한 세계를 표현할 것을 주장하면서 상상력의 해방을 부르짖었던 20세기 최대의 혁명적 예술사조였다. 이렇게 초현실주의가 지향한 논리적, 합리적 사유의 부정과 무한한 상상력의 예찬이 이두식의 논리에 대한 거부감과 상상력에의 본능적 신뢰와 유사한 바가 있었기에, 이두식이 작가 생활 초기에 초현실주의적 작업을 시작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생의 기원〉 종이에 수채, 연필 45.5×53cm 1987

〈누드〉 캔버스에 아크릴릭 45.5×53cm 1991
이두식이 화가로서 첫출발을 했던 초현실주의적 경향의 작품들은 종이에 연필로 그린 기이한 극사실적인 그림이었다. 현실과 상상이 기묘하게 혼재하는 그의 작품들은 미니멀적 단색주의 회화가 지배하던 1970년대의 한국화단에 신선하고 개성적인 작업으로 눈길을 끌었다. 1972년에 그가 그린 작품〈생의 기원〉이 있다. 화면에는 인체의 형상과 풍경과 새와 기호들과 수수께끼의 형상들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이들은 서로 결합되거나 상호 침투하면서 변형되어 기묘한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준다. 작품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화면 오른쪽 맨 위에 그려진 산과 구름이 낀 하늘이 전개되는 풍경이다. 산은 바다인지 땅인지 구분이 안 가는 애매한 평면 위에 솟아 있는데, 이 한 조각의 풍경은 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변형되어 마치 화면 위에 붙여놓은 부정형한 파라핀 덩어리나 무채색의 플라스틱 덩어리처럼 입체적으로 돌출되어 보인다. 이 덩어리의 왼쪽 가장자리 일부분에서 검정 색면이 뻗어 나와 마치 찌그러진 뿔 나팔의 실루엣인 양 놓여있고, 그 아래에는 변형된 사람의 두상을 연상케 하는 모양이 이어지고 있다. 화면 왼쪽 공간에는 작은 크기의 무엇인지 모를 미지의 형태들이 다양한 모양으로 아련한 추억 속의 이미지의 파편들처럼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대지의 지층구조 같기도 하고 확대한 피부의 단면구조 같기도 한 형상이 가로로 크게 배치되어 있다. 이 형상 밑에 난데없이 그려진 왼쪽 발의 모양도 그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눈길을 끈다. 화면의 한가운데에 그려진 둥근 형태는 작고 다양한 수수께끼의 물상들을 안에 지닌 채, 날개를 접고 내려앉은 듯한 새의 모양을 보여주고 있다. 한 조각의 풍경이면서 파라핀 덩어리 같기도 한 형상 아래에는 그에 이어서 정밀하게 그린 새 머리 모양이 등장하고, 새 머리 모양 옆에 약간의 간격을 두고 눈이 얼굴 가득 크게 그려진 기이한 사람이 등장한다. 작게 그려진 이 기이한 사람은 몸의 윤곽선이 화면 아래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그보다 큰 사람의 하반신으로 연결되고 있다. 화면의 맨 오른쪽에도 뛰어가고 있는 듯한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하반신의 모양만 분명할 뿐 상반신이 수수께끼의 다양한 이미지들로 연결되어 이루어져 기이한 느낌을 증폭시키고 있다. 하나의 이미지가 또 다른 이미지를 낳으며 다중이미지를 발생시키거나 무생물과 생물의 이미지가 하나로 연결되고, 수수께끼의 기호들이 난무하며, 식물과 사람의 이미지들이 특이하게 섞이어 연결되는 이두식의 이 작품에서 우리는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Dépaysement)과 편집광적 비평방법(Paranoia Critical method)과 같은 화법적 특징들을 발견한다.
1970년대에 그는 〈생의 기원〉같이 화면 가득 다양한 이미지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그렸다. 당시 이두식이 그린 초현실주의적 작품들은 서구의 초현실주의 회화와는 전혀 다른 개성의 작품이었다. 이것을 보면 이두식의 초현실주의 회화가 단순히 감각적이고 피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의 독특한 개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초현실주의 화법을 구사했던 것이다.
이두식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신의 초현실주의적 화풍에 조용한 변화를 준다. 화면 가득 등장했던 사물의 다양한 이미지들은 상당 부분 정리되어 사라지고, 공간에 여백을 두고 사물의 이미지가 배치되는 것이다. 그리고 서서히 종이에 연필로만 그렸던 기존의 매체에 변화를 주어 수채물감으로 다양한 색채 효과를 주고 있다. 물론 이 시기에도 간간이 종이에 연필로 그린 작품이 제작되기도 했다. 대체로 이 시기의 그림에는 화면에 여백 공간이 시원하게 주어지고, 화면 중앙이나 한 부분에 특정한 인체의 부분을 연상케 하는 형상들이나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형상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종종 꽃이나 식물의 이미지들이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이 시기에 수채 물감은 물을 풍부하게 머금고 종이에 자연스러운 번짐 효과를 내는데, 이와 같은 물감의 번짐 효과는 사전 계획 없이 이두식의 즉흥적 발상에 따라 그때그때 종이에 칠해지며 나타나는 것이다. 이두식은 이렇게 즉흥적으로 색칠한 데에서 나타나는 우연적인 물감의 번진 흔적을 보고, 그것이 연상하게 하는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따라가면서 거기에 다양한 형상을 그려 넣어 작품을 완성한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종이는 허망하기 짝이 없다. 바라볼 때마다 그 허망함이 투명해져 간다. 너무나 투명하기 때문에 나는 그 허망한 여백에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작품은 종이에 물감을 바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물감의 얼룩과 얼룩에서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이다. 물감을 발라놓고 보면 그 말라가는 시간의 과정 속에서 온갖 이미지들이 떠오르기 시작하고, 그 수많은 형상 속에서 가장 강력하게 남는 것이 그림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잠재의식의 표출로서 나는 아직 이만한 방법을 딴 곳에서 찾아보지 못했다.”2 1980년대의 이두식 그림이 그가 1970년대에 그렸던 초현실주의 양식에서 조금 변화하긴 했지만, 여전히 초현실주의 회화가 추구하는 무의식, 잠재의식의 표출이라고 하는 큰 연장선상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라고 하겠다.
또 다른 〈생의 기원〉(1987)은 이두식이 이 시기에 그린 동명의 그림이다. 종이에 물감을 엷게 여러 번 겹쳐지게 칠한 후, 그 자연스러운 흔적을 이용하여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 아래쪽에 마치 완만한 언덕처럼 그려진 회색의 물감 흔적 위로는, 털 같기도 하고 새싹 같기도 한 녹색의 짧은 선들이 군데군데 나 있고 한가운데에 곡식 이삭의 실루엣을 마치 음각을 한 것처럼 그려놓았다. 그 위 공간에는 다양한 모양의 얼룩을 이용하여 배꼽이나 가슴, 주름진 종이와 눈을 하나 그려 놓았다. 얼룩은 마치 얇은 석고 벽이 뚫려서 생긴 것 같은 입체적 두께감을 가지고 그려져서, 그 속에 등장하는 모호한 사물의 이미지와 함께 비현실적인 정조를 고조시키고 있다. 화면 왼쪽 공간에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난데없이 등장하는 작은 3개의 구멍과, 그 옆에 정교하게 그려진 곡식의 이삭과 작은 녹색 씨앗들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회화적 장치가 되고 있다.

〈잔칫날〉 캔버스에 아크릴릭 60.6×72.7cm 1998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두식 회화세계의 전기 안에서도 1970년대의 작품들과 1980년대의 작품들은 그 경향상의 공통점 안에서도 확실히 차이를 보인다. 1970년대의 작품들이 초현실주의적 방법에 더욱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면, 1980년대(1980~1987)의 작품들은 대체로 초현실주의적 화법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운 편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여전히 잠재의식을 표출하기 위한 즉흥적이고 자동기술법적이며 우연적인 효과가 작품 속에 살아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1970년대와 1987년까지의 1980년대 회화를 하나의 시기로 묶어서 설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한국의 현대미술에서 1970년대는 서구의 미니멀아트의 영향을 받은 ‘미니멀적 단색주의’ 회화가 화단을 지배했다면, 1980년대는 현실참여적인 형상미술이 당시의 사회 정치 상황과 맞물려 화단을 휩쓸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이두식은 화단의 유행하는 경향에 휩쓸리지 않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가고 있었다.
Ⅲ
이두식은 1988년경에 이제까지 그려왔던 그림에 완전히새로운 변화를 주고자 했다. 이 변화는 그 어떤 때보다도 파격적이었다. 예전과 같은 극사실적이며 초현실적 묘사는 사라지고, 화면이 강렬한 원색이 난무하는 표현주의적이고 추상적인 양식으로 변모했다. 이두식 회화세계의 후기이다. 42세부터 사망 시까지 그가 지속적으로 연구해 온 ‘표현주의적 추상’의 시기로 들어선 것이다. 그는 이 작업을 하면서 서구와 다른 자신의 그림이 무엇인가를 많이 생각하고 연구했다. 다음은 그에 대한 이두식의 말이다.
“1988년 처음 발표하는 표현주의적 추상화에 원색을 과감하게 썼다. 그러나 그냥 쓴 것이 아니라 색의 배색과 대비에 나만의 조화, 나만의 스타일을 찾기 위해 많은 연습을 거쳤다. 어떤 부분은 그 강렬한 원색이 더 강렬하게 보이도록 유도하기 위해 주변을 가라앉혔다. 색이 튀어나오듯이 보이는 나의 새로운 그림을 보고 관객들은 우리 민족의 근원적 정서를 공감해 주었다. 나는 〈축제〉, 〈혼례〉, 〈수탉〉 등 오방색과 조화를 이루는 작품으로 삶의 환희와 밝은 면을 표현했다.”3
이두식이 작품 속에 강렬한 원색을 쓰게 된 것은 어린 시절 그가 보았던 상여의 색채와 울긋불긋한 만장 행렬의 감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소 우리 민족을 흰색을 선호하는 백의민족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1970년대 미니멀적 단색주의 회화작가들이 흰색 위주로 색채를 쓰면서 흰색이야말로 한국인을 대표하는 전통적인 선호색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할 때, 그는 그러한 주장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그 어느 민족보다도 강렬한 원색들을 사용한 전통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새롭게 시도하는 표현주의적 추상화에 우리의 고유색 오방색을 과감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릴 때에도 붓은 모필을 썼는데, 특히 동양 붓인 황모 붓을 즐겨 사용했다. 황모 붓은 다른 붓에 비해 보다 자유롭고 부드러우며 섬세한 특징이 있어, 화가의 심리상태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고 표출해 주는 장점이 있다. 황모 붓의 사용은 표현주의적 추상화를 그린 이두식의 표현 영역을 보다 자유롭게 넓혀 주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두식이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계획적이고 논리적인 게 아니라 직관적이며 감성적이고 즉흥적이기에, 화가의 심리상태가 촉발하는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황모 붓은 그의 작업에 잘 어울리는 붓이었을 것이다.

〈심상〉(부분)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160cm( ×2) 2009 
〈Dance〉캔버스에 아크릴릭 Artist 102 112×162cm 2009
이두식의 표현주의적 추상화는 1990년대 중반까지는 추상적 화면 속에 여체의 형상이나 사물의 이미지들이 자유롭게 변형되어 그려져 있곤 했다. 물론 전기의 초현실적 작품들처럼 극사실적인 형태로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거친 선묘와 강렬한 색채 속에 자유롭게 단순화된 대상의 이미지들이 화면의 군데군데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누드〉는 이두식이 1991년에 그린 작품이다. 마치 동양화의 수묵을 쓴 것과 같은 묘한 느낌을 받는다. 아크릴 물감에 물을 듬뿍 섞어 발묵 효과 같은 느낌을 낸 것이다. 당연히 서구의 추상표현주의 회화와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화면은 굵고 거친 검정색의 선과 검정색에 물을 많이 섞어 마치 담묵과 같은 투명한 느낌을 낸 부정형한 색면으로 채워져 있고, 화면 상반부 좌우에 과감하게 여백을 두었다. 얼굴도 팔도 생략된 변형된 여체가 그려져 있고, 그 옆 검은 색면 속에 여인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두식의 이 당시 그림은 마치 예전의 극사실적 형태 묘사로부터 격렬하게 반발해 나오듯, 굵고 거칠고 속도감 있는 부정형한 선묘와 강렬한 색채, 형태의 자유로운 변형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기간에 그는 뉴욕의 제리브뤼스터 화랑(Jerry Brewster Gallery)과 전속 계약을 맺고 미국 미술계에도 정식으로 작품을 선보이게 되었다.
1997년경부터 이두식의 형상성이 거의 사라진 표현주의적 색채 추상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1988년부터 시작된 표현주의적 추상 작품엔 앞에서 설명했듯이 여체의 부분들이나 사물의 변형된 형상들이 알아볼 수 있게 그려져 있곤 했다. 그런데 1997년경부터는 사물의 형상성이 거의 사라진 작품들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대략 1997년에서 1998년까지는 형상성이 보이는 종래의 표현주의적 추상 작품과 새롭게 형상을 거의 지운 표현주의적 추상 작품들이 공존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러다가 1998년 이후에는 화면에 어떠한 사물의 이미지도 찾을 수 없는 완전한 표현주의적 추상 작품이 그려지게 되었다.
〈잔칫날〉은 이두식이 1998년에 그린 작품이다.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이 그림에는 구체적인 사물을 연상케 하는 어떠한 사실적인 형상도 없다. 이두식은 그림을 그릴 때 미리 습작을 그려 본다든지, 또는 계획성 있게 밑그림을 그려놓고 그리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기존의 방법들은 그때그때 가슴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창조적 조형의 충동을 생생하게 표출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잠시 명상을 한 후, 빈 캔버스 앞에 선다. 명상은 그를 세속의 시간으로부터 창작의 시간으로 인도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명상을 통해 세속의 온갖 잡념들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후, 깨끗한 상태로 붓을 드는 것이다. 그러고는 솟구쳐 오르는 창조적 충동에 몸을 맡겨 빠른 속도로 그림을 그린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아크릴 물감은 유화와 같은 무거운 느낌도 낼 수 있고 물을 많이 섞으면 수묵화나 경쾌한 수채화와 같은 느낌도 낼 수 있는 비교적 표현의 폭이 넓은 수용성 물감이다. 그는 황모 붓에 아크릴 물감을 묻혀 어떤 부분엔 유화 같이 칠하기도 하고, 어떤 부분엔 수묵화나 투명 수채화 같은 효과를 내기도 한다. 이 그림에서도 그런 효과들이 보인다.
발묵법의 효과와 유사한 농담 효과도 나고 거침없는 필선과 자유분방한 운필로 선과 색면과 여백의 구성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화면은 좌우 양옆에 흰색의 여백을 두고 검정색과 진한 회색, 붉은색, 황색, 파란색, 녹색의 크고 작은 색면들이 자유롭게 다양한 모양으로 서로 겹쳐지기도 하고 감싸거나 교차하기도 하면서, 강렬하고 화려한 기운으로 충만한 축제의 장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 색면 위로 수수께끼의 기호 같은 형상들이 가늘거나 굵은 선으로 그어져 빛을 발하고 있다. 수수께끼의 기호들은 이두식의 심리 깊은 곳에 잠재하는 과거 경험의 흔적이거나 집단무의식의 부유물이 반영된 흔적일 것이다. 붉은색이나 노란색이나 파란색이 어떻게 칠해지는가는 그때그때 화가의 내면에서 움직이는 즉흥적 조형의 감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결코 사전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그림은 마치 수백 년 된 고목에 매달린 울긋불긋한 원색의 헝겊 같은 느낌을 주고 있는데, 그로 인해 샤머니즘적 주술성 같은 것도 느껴지고 있다. 이두식은 바로 한국의 전통 이라고 하는 유구한 역사의 고목 위에 한국인의 열정과 정신을 자신의 내적 체험과 결합시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이두식이 했던 말이나 그가 쓴 글을 보면, 그는 ‘한국성’이라는 것에 대해 그다지 고민하지 않은 것 같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굳이 회화적 표현양식에 있어서 한국성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연구하기 위해 고민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필자는 이두식의 이러한 태도가 그를 위해서는 다행스러운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한때 우리나라 화가 다수가 ‘한국성’에 대해 지나치게 고민하고 생각한 탓에 오히려 그것이 창작의 자유로움을 제한하고 저해한 바가 있었는데, 이두식은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사실 한국성이란 작품 속에 내재하는 정신적인 요소이고 따라서 한국성의 회화적 표현이란 것도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인데 그걸 어떻게 하나로 구체화시켜 정의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한국미술의 역사를 보더라도 우리 미술은 시대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이며 한국의 정신세계를 표출해 왔다. 필자는 이러한 다양함이 우리 미술의 내면세계와 그 표현 영역을 풍요하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작가 개개인이 남과 다른 독창적 표현을 위해 노력할 때,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한국성이 빛나는 것이 아닐까? 더욱이 그렇게 해서 나온 독창적 표현이 세계인들까지 감동시킨다면 거기에 세계성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두식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창작에 임해 왔기에 그만의 개성적인 회화세계를 창조하게 되었고 그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국적 정서가 회화적 시각으로 전이되어 빛나는 것을 느낀다.
이두식은 작품세계 전기의 초현실주의적 회화에서도 그만의 독자적인 초현실주의적 양식을 구현했던 화가였고, 특히 1998년 이후 사망할 때까지 보여준 표현주의적 추상 양식은 한국적인 추상화를 그리고자 한 끝없는 회화적 탐색의 여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두식은 그러한 회화적 여정을 진실성 있게 보여준 화가였다.
* 故이두식 초대전이 4.15~5.5까지 선화랑에서 예정되어 있다
1 홍익대학교 『이두식TEXT』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2013
2 이두식 「작가의 자작수상」 『공간』 1980년 9월호
3 이두식 『고릴라 로마역에 서다』 정음 2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