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윤세영 낯설고 푸른 생성지점

《낯설고 푸른 생성지점》 전시 전경
윤세영 〈생성지점(Becoming Space)〉 장지에 먹, 유채 122×244cm 2022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환경을 접할 때 우리의 세계는 넓어진다. 윤세영 작가는 2019년 독일 뮌헨 빌라 발드베르타(Villa Waldberta) 레지던시에 참여하면서 유럽으로 활동 반경을 넓혔다. 그리고 올해 지인의 추천으로 아이슬란드를 여행했다. 북유럽의 고위도 지역은 여느 나라들과는 다른 자연환경 덕분에 지구의 색다른 이면을 만날 수 있는 장소다. 이번 윤세영의 전시 《낯설고 푸른 생성지점》은 아이슬란드 여행을 모티브로 그곳에서 경험한 ‘낯설음’의 감정을 시각화했다. 얼핏 우주 같기도, 제3의 행성 같기도 한 장소에서 겪은 감동이 그대로 캔버스에 담겼다.
전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우주를 표현한 듯 보이는 〈생성지점〉이었다. 화면의 중심에 다양한 빛깔들이 새어 나오고 있다. 푸른색과 노란색, 초록색으로 이루어진 빛의 향연은 아이슬란드의 오로라와 닮았다. 그리고 우측의 작은 폭포에는 물이 아닌 빛이 떨어져 흐른다. 어둠과 연결된 검은 부분은 물감의 굵은 마티에르가 암석을 만드는데 그 암석들 사이사이에도 푸른색, 붉은색 빛들이 새어 나온다. 그림에서 빛과 어둠의 조화는 성운과도 닮았다. 매혹적인 우주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검정 배경이었다. 캔버스 위에 검정 물감을 풀어 자연스럽게 번지도록 하여 테레핀 용액이 증발하고 남은 안료가 오묘한 어둠의 흐름을 만들고 그것이 우주의 깊이를 상상케 한다. 그 효과는 회색의 모노톤으로 그려진 또 다른 〈생성지점〉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작품을 멀리서 보면 어두운 밤하늘에 달을 감싸고 있는 옅은 구름 같기도, 빛의 행성을 감싸고 있는 뿌연 우주먼지 같기도 하다. 가까이서 보면 오묘하고 다채로운 회색 톤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그리고 은은한 드리핑의 흔적은 존재감을 크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작품을 가까이서 볼 때 은하수처럼 거대해진다. 마치 우리의 세상, 우리의 존재가 그 작은 물감 방울과 같음을 시사한다.
작가의 〈생성지점〉 시리즈는 본래 ‘구멍’을 모티브로 한 작업들이 먼저였다. 화산의 분화구 혹은 지표면의 구덩이 같기도 한 홀(Hole)은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안내자다. 홀을 만드는 개체는 가시넝쿨인데 근접하기 어렵고 위험해 보인다. 그 중심의 홀을 들여다보면 매우 깊은 심연이 느껴지면서도 내부가 궁금해진다. 여기서 장지라는 재료가 효과를 발휘한다. 작가는 2010년대 초창기 작품부터 장지에 분채를 주재료로 사용해 왔다. 동양적 재료인 장지는 서양적 재료인 캔버스보다 물리적으로는 얇지만 색채의 깊이는 더 깊다. 분채로 그린 바다는 심해가 되고 분화구는 지하 세계로 이끈다. 과연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 속에는 존재의 근원과 동시에 생의 끝 지점이 있을 것만 같다.
아이슬란드는 화산 분화로 인해 생긴 섬이다. 그리고 지금도 섬 전체에 화산활동이 일어나고 있다. 윤세영의 이번 신작에는 화산을 모티브로 한 작품도 상당수 있었다. 화강암 위를 흐르는 붉은 마그마는 알 수 없는 기운에 의해 공중으로 치솟는 듯한 모습이다. 두꺼운 물감층으로 화강암을, 레진으로 매끄러운 반사면을 만들어 그림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은 인간의 나약함을 상기시킨다. 거대하게 약동하고 생성되는 ‘그 무엇’에 대한 탐구는 우리의 생성과 존재에 대한 총제적인 질문인 것이다.
과거 윤세영의 작업은 어머니를 통해 생명의 생성지점을 탐구했고, 설치를 통해 타인과의 연결, 죽음과 삶의 생성지점을 고찰했다. 그리고 이번 아이슬란드 여행은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당위성에 대한 생성지점을 발견하는 여정인 것이다. 비록 낯선 여행지의 자연풍경을 빌렸지만 자신의 내면세계를 발견하고 표현하기 위한 실험은 중요하다. 그래서인지 소재가 지나치게 다양해 산발적이었는데, 이는 여행 후의 영감을 여과 없이 펼쳐놓은 탓일 것이다. 이후의 활동에서 소재와 방향이 정제될 것으로 기대한다.
카피라이터 김민철은 그의 에세이 『모든 요일의 여행』에서 ‘여행’이란 ‘여기서 행복할 것’의 줄임말이라 했다. 윤세영은 여행에서의 행복을 캔버스에 담아내고 새로운 작업의 시작점으로 삼았다. 여행하는 순간뿐만 아니라 작업의 매 순간을 행복으로 삼는 윤세영이 태도는 소중하다. 예술가의 우주라는 방대한 세계를 탐험하는 출발 선상에서 행복의 자세는 지치지 않는 중요한 에너지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재혁 | 전시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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